2015.10.30 10:42
모든 승리는 절제에서 나온다
1987. 11. 13. 밤 (금)
본문:고린도전서 9장 23절∼27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세상에서 서로 이기기를 다투는 경쟁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기독자들도 신앙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모두 이기기를 욕망하고 서로 경쟁하는데 우리는 두 가지 기억해야 됩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기기를 다투는 경쟁은 뭐 수백 수천 수만 종류도 더 됩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썩을 승리, 썩을 승리를, 썩을 면류관. 면류관이라 말은 이기면 면류관을 씌워 줍니다, 저 구미 지방에서는. 이래서, 썩을 승리, 썩을 승리 또 썩지 아니할 승리, 세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마귀란 놈은 이것 저것 뒤섞어서 분주하게 만들어 가지고 ‘땅위에 인간들이 수천 수만 종류의 투쟁과 경쟁을 하고 있지마는 둘뿐이다, 하나는 썩을 것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과 하나는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는 요 두 가지뿐이다.’ 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마귀가 혼돈 시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으면 안 됩니다.
세계 강대국들이 뭐 이렇게 모두 다 그 나라에 머리되는 사람들이 제일 수상들이 지금 회의가 있다, 또 무슨 대화가 있다, 뭐 있다 이렇게 하지마는 우리는 꼭 요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에 유엔이 모여 가지고 하니까 대단히 큰 일 같으나 ‘보자, 그것이 썩을 것을 얻기 위함이냐 썩지 안할 것을 얻기 위함이냐?’ 그래 판단해야 됩니다. 또 아주 미약한 그 시골 산골에서 아주 초리한 그런 무슨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저 생활 하는 저것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하나,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하나?’ 요것 구별해야 됩니다. 그러면 온 세계가 움직이는 그 움직임보다도 조그만한 산막에서 아주 초리한 그 거지가 혼자 움직이고 있는 그 움직임이 무한히 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경쟁, 저게는 모두 일류대학에 들어가려고, 또 지금 어떤 노벨상을 받고 어떻게 지금 출세를 하려고, 마구 세계가 울씬울씬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그것을 보고 벌로 덤비면 우리는 정평 정가 못해서 패전하기 쉽습니다.
단지 둘로만 구별하십시오. ‘저것은 썩을 승리를 위함이냐 영원히 썩지 아니할 승리를 위함이냐?’ 썩을 승리 전부보다 썩지 아니할 승리 지극히 작은 것이 가치가 큰 것이 곧 나타납니다.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다 나타납니다. 이런 데에서 신자들이 미혹을 다 제거하고 슬기롭게 삽니다.
교역자들도 보면 그 사람은 썩을 승리와 썩지 안할 승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부러워하는 것, 아주 가치로 높이 평가하는 것, 높이는 것, 두려워하는 것, 거게 눌리는 것, 이걸 비판 못 하면 썩을 면류관에게 눌리고, 썩을 면류관 부러워하고, 썩을 면류관을 높여서 섬기고 이런 썩은 자가 되기 쉽습니다.
모든 경쟁에서는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요 둘로 가지고서 구별해서 판정해서 썩을 것은 버리고 썩지 아니할 것을 취하는 이 사람이 조만간에 우주와 영계를 다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것 하나 보조 상식으로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여게 말씀하시기를 26절에,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어디로 향해 가 가지고서 일등 기를 잡을 건가 그것도 모르고 지금 등을 매기고 상을 줄 자는 저게 있는데 이 사람은 그걸 몰라서 엉뚱하게 딴데로 갑니다. 암만 뛰어가 봤자 소용 없어. 벌써 제도와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런 사람이 어데 있겠소? 달음질 하는 데에 그 가는 길도 있고 목적지도 있는데 그걸 모르고 달리는 그 사람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이것은 비유인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신앙 생활에 달음질을 한다 할지라도 내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그 자기의 목적을 모르고 노력을 하는 자는 다 향방 없이 달리는 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은 목적을 똑똑히 정해 놓고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적은 뭣인가? 지난번에도 말한 것 같이 우리의 목적은 주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약을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날에는” ‘그날에는’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날부터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날부터, 그날부터 모든 존재는 달라집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주 하나님이신 주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고 나와 주님은 아버지 안에 있고 하는 것을 너희들이 알게 되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이래 계셔서 하나님과 나와 하나되는 이것이 우리가 달음질하는 향방입니다. 우리가 달음질하는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또 15장 7절에는 보면 “네가 내 안에 있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을 원해도 이루어지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과 일치될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과 하나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내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믿고 있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믿고 있을 때에는 마귀도 사망도 죄도 아무것도 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잊어버리지 안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기억하고 나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은 자인 것을 자기가 믿고 의심하지 안하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믿고 있을 때에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은 어떤 것이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인가? 내가 모든 마음이나 몸이나 움직일 때에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움직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생각도 하고, 마음도 가지고, 뜻도 가지고, 소원도 가지고, 계획도 가지고, 또 그대로 내 몸이 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행할 때에 그것이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는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 언행심사를 주관하는 것이고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가 잊어버리지 안하고 믿고 있을 때에는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우리가 성공하려고 달음질 치는 것과 같이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리지 안하려고, 그만 돈 생각하느라고 깜빡 잊어버리고, 인간 생각하느라고 깜빡 잊어버리고, 사건 생각하느라고 깜빡 잊어버리고, 좋은 것, 나쁜 것, 어려운 것, 온갖 것, 이런 것 생각하다가 그만 주님의 대속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잊어버리면 나는 주님 밖에 나가 버렸습니다.
열여섯 가지 사활의 대속을 내가 잊어버리지 안하고 나는 이 대속을 입은 자라는 것을 자기가 믿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믿고 의심하지 안하고 믿고 있을 때에는 자기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행동할라 할 때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안하고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 뜻대로 행할 때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증거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하려고 할 그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할 때에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음질 치는 것과 같이 노력하는 것은 이것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랬는데 그 다음에 또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 한 일이 있습니다. “싸우기를” 싸우기를.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싸울 때에 대적을 보고 그 대적에게 활을 쏘든지 총을 쏘든지 거머쥐고 다투든지 해야 될 터인데 대적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이 공중 보고서 싸우는 그런 싸움 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런 싸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 돈을 뺏들어 갔으니’ 사업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싸우고, 지위 권세 때문에 싸우고, 명예 때문에 싸우고, 자기 욕심 때문에 싸우고 이 싸움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그 싸움은 남의 싸움이오. 그것은 남의 싸움이라. 이용당하기 때문에 제일 망하는 인간입니다.
또 자기가 뭣을 하려고 애를 쓰고 부지런히 열심히 신앙 생활 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아주 예수를 잘 믿으려고 뭐 성경도 열심히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수를 잘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지마는 자기의 대적이 뭣인지 그 대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애쓰는 사람은 그것은 허공하고 싸우는 싸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을 대적으로 삼아서 싸울 것인가? 27절에,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그러면 우리의 싸움은 뭣이 싸움이냐? 우리의 마음과 몸, 우리의 마음과 몸 이놈을 다른 놈이 점령을 합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은 중생된 나, 주님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이 마음과 몸을 주장해야 될 터인데 이 마음과 몸이 마귀에게 복종하고 악성에게 복종하고, 악성이라 말은 자기 중심에게 복종한다 말이오. 자기 중심이라는 자기 중심의 그 마음이 마귀가 준 마음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까? 자기 중심으로, 계획을 하든지 평가하든지 뭘 하든지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 마음과 행동은 그것은 자기 행동입니까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서 마귀의 행동입니까? 마귀의 행동이라.
이러기 때문에 어떤 싸움을 싸우느냐 내 마음과 몸을 마귀와 자기 중심이라는, 그것이 원죄입니다. 악습이라 하는 건 본죄입니다. 마귀와 원죄와 본죄가 내 마음과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과 중생된 영 곧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 새사람 나, 참사람 나, 새사람 나, 내가 이 마음과 몸을 주장하도록 이 싸움을 싸우는 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하고 싸웁니까? 싸우는 것은 한쪽은 마귀와 원죄와 본죄를, 악령과 악성 악습을 물리치는 싸움을 하고 한 손으로는 내 마음과 내 몸을 중생된 나에게 복종을 시키는 이 싸움을 합니다. 한 손으로는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물리치고 한 손으로는 내 마음과 몸을 내게 복종하도록 내게 굴복하도록 나에게 속해서 나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자기가 싸워야 되는 것을 모르고 하루 종일 자기 마음과 몸은 돈 그놈이 차지하고, 마귀가 차지하고, 죄악이 차지하고, 세상 것들이 차지하고, 인간이 차지하고, 내 중심이라는 이 악이 들어서 차지하고, 내가 나쁜 그 습성 있는 과거에 나쁜 버르쟁이 구습 그놈이 차지하고, 일생 동안 자기 마음과 자기 몸을 중생된 대속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하루도 차지 못 하고 한 시간도 차지 못 하는 그런 인간도 있습니다.
차지 못 하고 그놈이 뺏들었으니까 그 마음과 몸의 기능은 어찌 됩니까? 마음과 몸의 기능은 영원한 멸망으로 다 멸망하게 됩니다.
요것이 지금 이 교계에서 큰 문제입니다. 나는 그 기능은 멸망한다 하는데 그 기능이 멸망하지 안하고 그 기능이 상관없이 그대로 있다 해서 이게 지금 문제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복종 못 시키면 버림 받지. 복종을 못 시키면 버림 받지요. 복종을 못 시키면 버림 받는데 누구에게 버림 받습니까? 자기에게 버림 받습니까 주 하나님에게 버림 받습니까? 누구에게 버림 받습니까? 누구에게 버림 받습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복종하게 하는 것은. 내가 공연히 다른 사람 구원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자기 몸을 쳐 복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러면 버림은 누구에게 당하는 것입니까? 모르겠습니까? 자기에게 버림 당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하나님에게 버림 당한다고 아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하나님께 버림 당해. 하나님께 버림 당하면 멸망이지 뭣이야? 하나님께 버림 당하면 멸망 아닙니까? 이러니까 우리 싸움은 하루 종일 내 마음과 내 몸을 진리와 성령과 주님의 피로 중생된 새사람 나, 참사람 나, 진리대로 사는 나, 영감대로 사는 나, 주님의 피공로로 사는 나, 그게 내라. 우리의 영이 중생하기를 몇 가지로 중생했습니까, 우리 영이? 몇 가지로, 손가락으로? 몇 가지로 중생했습니까? 세 가지로 중생했어. 피, 성령, 진리. 세 가지로 중생했어. 이러니까 세 가지로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내 생명입니다. 세 가지는 내 힘입니다. 세 가지로 사는 내가 중생된 새사람 내입니다.
내가 내 마음과 몸을 쳐서 복종케 하려고, 내가 내 마음과 몸을 내게 복종시키는 것, 내게 복종하는 것은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입니까? 내게 복종하는 건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내게 복종하는 것은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입니까?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요, 영감에 복종하는 것이요, 주의 피공로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자기의 몸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중생된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인데 중생된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몇 가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에게 복종하는 것이라. 이걸 똑똑히 알고 믿어야 돼요.
그러면 하루 종일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내 마음을 현실에서 진리에 복종시키려고, 영감에 복종시키려고, 예수님의 피공로에 복종시키려고, 피공로로 살면 피공로에 복종한 것, 피공로대로 살면 피공로에 복종한 것, 영감으로 살면 영감에게 복종한 것, 진리대로 살았으면 진리에 복종한 것.
돈 시키는 대로 했으면 돈에 복종한 것,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인간에게 복종한 것, 죄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죄에게 복종한 것, 그런 것 아닙니까? 하루 종일 내 마음과 몸을 이놈에게 뺏기지 안하고 내가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라 그거요. 알겠습니까? 내가 하루 종일 달음질하는 거와 같이 애쓰는 그 목적이 어데 있는가?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계시는 이 일이 성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우는 것과 달리는 것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싸우는 것과 달리는 것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같다고 아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같애, 내나 그거라.
이런데 왜 달음질로 말했느냐? 달음질로 말하는 것은 달음질하는 사람은 그 달음질에 투쟁이 쉴 사이가 없어. 끝이 나야 쉬지. 끝나기 전에는 계속이라.
우리의 싸움은 계속해야 된다 하는 것을 여게 보이는 것이오.
또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뭘 나타내서 말하느냐? 적이 똑똑히 있으니까 적 그놈을 죽이면 내가 살고 그놈 못 죽이면 내가 죽는다. 지면 심신 빼앗기고 이기면 심신을 내가 점령한다. 투쟁이 있는 것은 승패가 결정된다 그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밤에 증거하는 외나 결론의 목적은 아직까지 말하지 안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 경쟁하는 데에 이 달음질에 승리, 전쟁에 승리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오느냐 요걸 여러분들에게 지난번에도 말했는데 다시 말해 주고자 합니다.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오느냐? 내가 오늘 이 말씀을 증거 안하고 다른 말씀을 증거하려고, 믿음이 없어서 “너희들이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 내 하는 말을 순종하지 안하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그 성구를, 늘 외우는 성구인데 그 성구를 내가 알려고 한 한 시간 이상 찾았습니다. 암만 찾아야 눈에도 안 보이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구절을 잘 외우고 있는 이제 녹을 들이댔습니다.
○○○권찰님이 잘 알기 때문에 ○○○권찰님에게 말했습니다. ‘그 성구를 내가 모르겠는데 그 성구가 어데 있는고 좀 찾아봐라.’ 자기가 아마 성경을 신약에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거의 나볐을 것입니다. 못 찾았어.
나중에 여기 예배당에 오니까 그때사 ‘아, 아무데입니다.’ 하며 나한테 말해.
그때는, 나도 못 찾아서 자꾸 이 애를 쓰는데, 애를 쓰니까 그 성구도 못 찾지 이러니까 오늘밤에 증거할 말씀이 뭐이냐고 이래 이래서 어데까지 갔느냐 하면 ‘주님이여, 내가 이래 살면 살 필요가 없고 내가 게을하고 이래서 주의 말씀을 이렇게 모르고 어두워서 그 성구도 찾지 못하니 나는 이것 아무래도 주님이 내 생명을,’ 내가 그전에는 좀 ‘오랫 동안 좀 살아서 이 증거하게 해 주옵소서’ 이랬는데 오늘 저녁에는 ‘주님이 내 생명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살아봐야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죽을 지경이라. 저녁 못 먹었어요. 저녁 먹으라고 자꾸 하지마는 저녁 먹으라 벌써 다섯시부터 조우는데 저녁을 못 먹고 내려왔어. 저녁 먹을 생각이 있어야지요? 이랬는데, 죽자 살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 말씀을 주셔. 이 말씀 증거해라.
그때사 깨달아서, 그리고 나니까 ○집사도 성구를 알지 나도 다 알지 모두 다 그때 다 알아. 주님이 요렇게 조절해서, 어만 설교 할라 하면 눈을 깜깜하게, 마음의 눈을 깜깜하게 해서 암만 봐야 몰라요. 당신이 하라는 고것 딱 해야 눈을 확 열어서 알려 주지.
달음질하는 승리, 싸우는 승리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오느냐?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오느냐?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옵니까? 여게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했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달음질 이기는 것도 절제에서 나오고, 싸움 이기는 것도 절제에서 나옵니다. 절제가 없으면 승리는 못 합니다. 승리는 절제에서 나옵니다.
절제는 뭣인가? 절제는 가감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조절한다 말입니다. 보태고 떼고 하는 것. 보태고 떼다니? 보태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더 보태서 많게 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싸우는 데 손해가는 것은 다 없애버립니다.
자기 달음질 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다 없애고 달음질 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갖추고, 싸우는 데에 방해되는 건 없애고 싸우는 데 필요한 것은 자꾸 마련해서 갖춥니다. 여기에서 모든 승리는 나옵니다. 모든 승리.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지금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승리, 모든 승리는, 자, 인제 따라합시다.
모든 승리는! 절제에서 나온다! 모든 승리는! 절제에서 나온다! 이해가 됩니까? 이것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심내면 되는 줄 알지? 힘세면 되는 줄 알지? 암만 실력 있어도 소용 없어.
달음질하는 사람이 제가 아무리 날래다 할지라도 자기는 몰랐는데 자기가 밧줄에 매여 가지고 있습니다. 밧줄에 매였으면 제가 아무리 장사라 할지라도 일등 할 수 있습니까? 밧줄을 끊어야 되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장사라도 허기가 났습니다. 배가 고파서 허기가 났어.
장사라도 달음질에 일등 할 수 있습니까? 저 ○집사님, 일등 할 수 있소? 아무리 장사라도 배가 고프면 척 늘어져. 그러니까 배고플 때는 밥을 먹어야 되겠고, 밧줄에 매였으면 밧줄을 끊어야 되겠고, 어쨌든지 자기 달음질에 방해되는 것은 다 없애야 되겠고 자기 달음질에 유익된 것은 갖추어 가져야 되겠고, 자기 싸움에 방해되는 것은 없애야 되겠고 자기 싸움에 유익한 것은 갖추어 가져야 되겠고,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이게 탈이라, 이것 탈. 딴데는 말하지 안해도 그러면 ‘아멘!’ 자기 마음에 옳다 싶은 설교가 나오면 ‘아멘’ 이러는데 여기는 멍충이 모양으로 점잖하게 믿는 것처럼. 안 돼. 이제 불파를 따라가야 돼, 불파를. 불파를 다른 건 안 따라가도 불파 ‘아멘’ 하는 데는 따라가야 돼. 거게는 설교하면 `아멘 옳소이다' 이래 가지고 자꾸 이라니까 설교하는 사람도 좀 신명도 나고 좀 재미도 나고 좀 이런데 여기는 ‘이해됩니까?’ '···' '맞습니까?' '···' 벙어리 모양으로 이래 놓으니까 이거 뭐 맞는지 안 맞는지? 모든 경주에 승리나 싸움에 승리나 그 승리는 절제에서 나온다 하는 말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몰라. 아멘 하기는 했지만 이해된다는 것을 아는지? 고것 조금 그만 살피면 알아요, 그만.
경주하는 데에 핫바지를 입고 이와같이 지금 경주 합니다. 겨울인데 경주하는데 핫바지를 입었습니다. 또 경주하는데 보따리를 무거운 보따리를 금덩이라고 해 가지고 금덩이를 한 보따리 짊어졌습니다. 금은 안 뺏길지 몰라도 경주는 헛일이오. 알겠습니까? 자기가 싸우는 데에도 뭣이 들어서 이 싸움에 방해다, 뭣이 들어서 싸움에 필요하다 하는 그것을 다, 방해되는 것은 다 없애버리고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그러면 그 경주에 이길 수 있소 없소? 방해되는 것만 다 없애버리고 필요한 것만 다 갖춰 놓으면 이기지 뭐. 힘이 필요하면 힘 준비하고 뭐이든지 필요한 대로.
필요한 것 다 있고 방해되는 것 다 없애버리고 그러면 그 경주나 싸움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사람이 그 준비를 다 못 해 그렇지 그 두 가지 준비만 하면 다 이기지. 절제하면 다 이기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 오늘 저녁에 하나만 말하고 맙니다. 그러면 경주하는 데에 무엇이 필요가 있는지 어찌 알꼬? 경주하는 데에 무엇이 방해가 되는지 어찌 알꼬? 싸우는 데 싸움에 뭣이 방해가 되는지 어찌 알꼬? 싸우는 데 필요한 것을 어찌 알꼬? 어찌 알아야 되겠습니까? 이건 비유인데, 어찌 알아야 되겠소? 예? 고것 알면 오늘 저녁에 그만 설교 그만 하요. 그만 그것만 알면. 누가 대답하면 그만 설교 그만 하고 그칠 거야.
어떻게 그거 알꼬? 자, 아는 방법 좀 말해 봐요, 누구든지. 저 ○조사님인가? 한번 말해 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면 안다, 제로. 빵점이야. 또 저 ○○ 교회 에 있는 ○목사님? 예? 뭐라 하노? 하나님과 동행? 빵점. ○○○조사님? 어? 지도? 기도? 그것도 빵점, 전부 다 이래 놓으니까 헛일이라. 아멘! 경주 해 보고 싸워 보면 압니다. 알겠습니까? 경주를 해 보니까 ‘아이, 이것 안 되겠다. 이것 필요하다.’ 싸워 보니까 방해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알지.
그러기에 이 싸움을 해 보는 자가 아니면 절제는 절대 안 됩니다. 실지로 이 경주와 이 싸움을 해 봐야 무엇이 방해고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자기가 해 보지 안한 자는 절대 모릅니다.
해 보니까 처음에 할 때는 ‘요게 모자라서 실패했다. 요게 들어서 방해해 실패했다.’ 자꾸 한 번 해서 방해하는 것 모자란 것을 자꾸 발견합니다. 열 번 해서 열 번 방해하는 것을 열 번 발견해서 제거하고 절제했습니다. 스무 번 절제했습니다. 자꾸 그렇게 다시 또 해 보고 또 거기서 또 새로 발견하고 또 절제하고 자꾸 해 보고 절제하고 해 보고 절제하고 이러니까 마지막에는 승리할 수 있소 없소? 있어. 있어. 오늘 저녁에 결론이 요것입니다. 해 봐야 알아.
내가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잊어버리지 안하고 생각하고 대속의 공로를 믿는 것 계속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요것을 기억하고 계속 기억하고 계속 생각하고 계속 믿으려고 해 보니까 방해하는 놈을 압니다. ‘이 친구가 방해한다. 이 게을이 방해한다. 무슨 사업이 방해한다.’ 방해하는 놈을 압니다.
이래 해 보니까 ‘내가 조심이 필요하다. 내가 계속 기도가 필요하다. 내 마음을 놓지 안하고 내 마음을 자꾸 붙들고 역사하는 게 필요하다.’ 자꾸 알아져.
그래서 연습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안 됐는데 두 번째 하니까 조금 낫게 됩니다. 열 번째 하니까 조금 더 잘 됩니다. 백 번 하니까 더 잘 됩니다. 자꾸 연습을 하니까 더 잘 되는 이유가 뭐입니까? 연습을 하니까 자꾸 잘 돼지는 거, 연습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잘 되지는 그 이유가 어데 있습니까? 뭐? 절제라 하면 다 되는데 그만.
연습을 해 보니까 절제가 자꾸 됩니다. 알겠습니까? 연습을 자꾸 하니까 절제할 것을 알게 돼. 이해가 됩니까? 연습을 해 보니까 절제할 것이 자꾸 발견돼. 또 절제하니까 또 가볍고, 또 절제하니까 또 가볍고, 또 절제하니까 힘이 더 나고.
이래 가지고서 자꾸 연습 연습으로서 연습에서 절제할 것이 발견되고 절제함으로 힘이 나고 또 연습함으로 또 절제할 걸 발견되고 절제하니까 발견돼 가지고 절제하고 나니까 힘이 나서 처음보다 좀 낫고 점점 이래 가지고 온전함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기독자들이 왜 힘이 없느냐? 뭣 때문에 힘이 없느냐? 힘 없는 것 간단해. 병들고 배고프니까 힘 없어. 힘 없는 것은 병들고 배고프니까 힘이 없습니다. 암만 음식이 있어도 병들면 힘 없어. 병이 치료되면 그만 힘이 납니다. 또 병이 암만 치료돼도 밥 안 먹으면 안 돼.
병 고치고 음식 먹으면 힘이 나오는 것은 필연합니다. 이 외에는 없어. 힘 나는 일은 병 고치고 음식 먹으면 그만 힘 나와요.
자, 그 사람이 무슨 병에 들었든지 병이 병 한 가지 치료되고, 한 가지 치료되면 힘 나오요 안 나오요? 한 가지 치료되면 힘 나요. 또 암만 치료했다 할지라도 안 먹으면 안 돼. 또 먹으면 힘나. 병 치료하고 먹으니까 그만 힘나.
치료는 뭣이 치료입니까? 뭐 어떻게 하는 게 치료요? 치료는 어떻게 하는 게 치료입니까? 회개하는 게 치료라. 이것 몰라요? 치료는 죄를 회개하는 게 치료라.
죄를 하나씩 회개하면 힘이 나와요.
죄를 회개해도 의를 행하지 안하면 힘이 안 나와요. 의를 행하는 것은 밥먹는 거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내게 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 행하는 것 아닙니까? 죄를 회개하고 실행하면 자꾸 힘이 나옵니다. 장사가 돼.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려워도 하나 순종 둘 순종하면 자꾸 힘이 나와.
이제 이 말씀을 단단히 기억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것을 놓지 말아요. 진주요 보배라. 놓지 마라. 성경을 암만 껍데기로 암만 읽어도 나오지 안하는 것이야. 읽고 실행하고 기도하고, 이래야 나오지.
광고합니다.
오늘밤부터 연경회 시험지와 새로 가입할 사람은 저 별관 입구에 거게 연경실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거게서 지금 직원이 시험지를 받고 내주고 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하고 일층에서 하지 말고 거기 가서 하도록 하십시오. 또 앞으로도 거기서 할지 모릅니다.
또 그리고 일층에는 낮으로 문을 닫아 놓습니다. 문을 닫아서 아침에 주일학교 새벽기도 딱 마치면 문 아주 잠궈버립니다. 밤이나 낮에나 기도할 사람은 이층에 와서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재독도 이층에서 듣습니다. 일층은 다만 예배볼 때에만 사용하고 다를 때는 사용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거게 비디오를 모두 설치해 놨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이래 벌로 출입하면 물건을 상하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새벽예배 네시 반 예배드리는 것은 반사들은 전부 자기네들이 모이는 그 교실에서, 북쪽 지하실은 북쪽 지하실에, 남쪽 지하실은 남쪽 지하실에, 일층은 일층에, 삼층은 삼층에, 이층은 장년반 예배를 여기서 모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층은, 여게 이층에 모이는 반사들은 사층에서 모이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각 부들이 자기 부에 모여서 주일예배 보는 그 교실에서 주일날 새벽예배를 네시 반에 시작해서 예배보고 다섯시까지 설교 마치고 다섯시 반까지 기도하고 다섯시 반에 부장이 전부 반사 선생들 통솔해 가지고서 ‘출발’ 출발해서 다섯시 반부터 출발해 가지고서 여덟시 반까지 세 시간 동안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여러분들이 배고프거든 여기 콜라병 거기다가 우리 우물물 이거 갖다 넣어요. 우리 우물 이것 보통 우물 아닙니다. 여게 영양이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물검사 하니까 균이 하나도 없어. 여게서 그만치, 탱크에 넣어 놨다가 또 저리 빼 돌려 가지고 저 오는데 저기서 조사하니까 세균이 열 마리 들었어, 열 마리. 백 마리까지 있어 가지고는 식수로 썩 좋다 하는데 열 마리밖에 없으니까 그 우물에는, 우물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는 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물이기 때문에 겨울에도 여름에도 그 우물, 여러분들이 그래 봐요. 콜라병 한병 물 하나 딱 넣어 들고 어찌 됐든가 그날 아침에 물 먹으며 그러면 병도 고칠 것이고 배도 안 부른데 힘도 나올 것이고 한번 기적을 여러분들이 볼 거라.
그래 가지고 다섯시 반부터 출발해 가지고서, 이번에는 어짜든지 여러분들이 바짝 힘써 가지고서 이번 주일에는 한번 만 명을 올리도록 한번 힘을 한번 써 봐요. 만 명을 목표하고 어짜든지 힘을 써요.
그리고 일층에서는 결혼식이 있으니까 많이 축하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반사들은 공과를 외우도록 하고, 지하철 기도하고, 또, 녜, 광고는 이것입니다.
요런 말씀을 듣고는 놓지 말아요. 요대로 꼭 실행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