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00:58
말씀 안의 내재적 영감
본문 : 마13:3-9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어제 아침에 길가 뿌린 씨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 길바닥에 대해서 지난 대구집회 때 거기 대해서 세밀한 해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에누리하는 일이 생기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귀 밖으로 듣는 그런 망령이 생겨지는가? 그것은 다 이 세상에 책임없는 거짓된 말을 많이 들은 그것이 원인입니다.
그걸 비유해서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씨를 뿌려도 그 땅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거짓말을 많이 들었고, 또 무책임한 말을 많이 들었고, 필요 없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고, 또 그런 사람들을 많이 접촉을 했고. 이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그만 그와 같이 사람들이 예사롭게 들리고, 또 업수이 들리고, 그렇게 심각한 그 들림이 없는 그것이 길가에 뿌리운 씨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 분과 또 이렇게 저렇게 세상에 수많은 책을 그려놓은 그 말하는 사람들과의 그 말한 자를 똑똑히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천하에 수많은 도서를 그려 낸 그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 말씀해 주시는 이분이 지은 자들입니다. 이분에게 지음을 받은 것들입니다. 또 수많은 도서가 있지마는 그런 책은 다 이 말씀이 말씀을 가지고,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이위 예수님의 신성인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씀이라 그렇게 했고 또 하나는 말씀이 말씀하신 그 진리를 가리켜서 말씀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구원 얻는 도리를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어떤 일 했는고 하니 이 진리가 우주와 영계의 모든 실존들을 시공한 존재입니다. 인격체는 아니고 이치의 권능인데 이 이치가 모든 우주와 영계에 있는 만물을 지었습니다.
말씀이라고 표시하신 성호,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말씀해 가지고 지었습니다. 말씀이, 말씀이라고 표시한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서 모든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땅위에 있는 모든 말들은 이 말씀이 창조한 사람들이 말해 놓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분과 말한 자들과 이 비교를 이거를 할 줄을 모르고 권위나 모든 완잔이나 그런 비교를 못하고 말씀과 또 말과 비교를 못 하는 가운데서 사람이 혼돈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 집회에 갈 때에 길가 뿌린 씨가 안 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어떻게 행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그것을 깨닫는 깨달음이 있으면 길가에 뿌리운 씨를 면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나 또 자기가 읽을 때나 거게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기가 깨달아져야 됩니다. 새벽으로도 여기 나와도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행할 것이 깨달아지지 안하면 그 사람은 길가에 뿌리운 씨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 성령이 강림했을 때에 설교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회개한 사람들이 삼천 명이나 됐고 이튿날은 또 설교하는 소리를 듣고 주 모인 사람이 더 많이 불어 가지고 오천이나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 들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보니까 독주에 취한 새술이라 말은 독주라 그말입니다. 술도 맏물이 있고 후물이 있는데 맏물에 취했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독주에 취한 사람들 모양으로 마구 뭐 주위나 환경이나 그런 것, 뭐 위신이나 명예나 또 뒤에 가서 이제 그것에 데한 여론이나 남의 이목구비를 생각지 못할 만치 다 소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 한 설교를 할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각각 해당되는 그런 삼천이나 되는 사람이 통곡할 만한, 삼천이나 되는 그런 모든 요건들을 다 설교를 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설교는 다만 어느, 주님을 주님을 증거했다든지 또 어떤 면을 하나 증거했든지 증거를 했지마는, 사람은 증거할 때에 혹 한 가지 두 가지 몇 가지를 증거를 했지마는 그때 성령의 역사는 거게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신의 감동으로 감동시켜서 각각 자기가 잘못돼서 그 심판받을 잘못된 것을 각각 깨달아서 원통히 여기니까, 너무 원통해서 후회가 돼서 견디지 못해서 발동을 하고 구불고, 이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마 저 사람이 술이 되게 취했는가보다' 그렇게 말을 했고 또 자기가 어떻게 했어야 될 터인데 어떻게 하지 못한 것, 그 하지 못한 것이 그때는 더 깨달아져서 '그걸 그렇게 했더라면 좋은 건데' 해서 원통해서 못 견디는 사람, 또 자기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할 그런 각오와 결심에서 못 견뎌서 발동을 한 그런 사람들이 다 합해서 삼천이나 됐던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 말한 것과 같이 성경은 불과 신구약 육십육 권 요 책 한 권이지마는 기록할 것을 다 기록하려고 하면 온 세상에도 둘 만한 곳이 없을 만한 그런 복잡한 것입니다. 그렇게 수가 많고 복잡한 것인데 요렇게 함축시켜서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육십육 권에 간추려 놨지마는 여게는 빠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빠진 것이.
뭐 여게 신구약 성경에 문서적으로 본다면 빠진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지 많습니까? 이러나 빠진 것이 없다 했습니다. 왜? 전지 전능자가 모았기 때문에 여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치 그렇게 많은 내용을 어떻게 이 육십육 권 가지고 다 행사를 할 수 있는가? 그러기 때문에 성경 안에 영감이 내재해 가지고 역사합니다. 그 영감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내재. 성경 안에서 계셔서 역사하는 내재적 영감이라.
성경 안에서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이 그 안에 계셔 가지고 각자들에게 이 말씀, 신구약 육십육 권의 이 도리를 통해서 그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알게 하는 그런 운동하는 것을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자기가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않는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안한다 그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말은 자기가 보이는 것, 이 세상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 뭐 또 자기의 귀로 들어보는 것 이 모두 다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 전부를 통틀어서 그 한 마디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상대로 해서 거게 따라서 움직여 살지 안 하고 '믿음으로 산다' 그말은 자존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이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산다 하는 말을 가리켜서 믿음으로 행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가 어떤 일이라도 그 일이 있을 때 꼭 성경에 명문되는 것만 생각지를 마십시요, 명문되는 것. 그러면 거기 해당된 명문이 있는 그 명문도 좋지마는 명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당한 그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 요거 좀 어려운 말입니다. 자기가 당한 당면한 그것에게 해당되지 않는 성경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많이 열거해 놓고 이렇게 우리에게 표시해 놨지마는 그 성경 말씀을 통해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내가 읽는 성경 말씀 안에는 성령님이 내재하셔 가지고서 나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인도하실 분이 이 성경 안에 계신다. 또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과 함께 전지 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책임지신 성령님이 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신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의 사건에, 자기의 당면한 사건에는 상관도 없는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서 읽고 들을 때에 자기의 마음을 밝게 해 가지고서 성령님이 와서 직접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에 내가 읽는 그 성경이 꼭 명문되어 있는 명문이 나를 깨닫게 해 준다 그렇게 우리가 그 국한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국한하지 말고 내가 명문되어 있는 성경을 읽을 때에 그 명문과 해당도 안 되는 그런 면을 내가 성경 읽을 때에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서 자기에게 깨닫게 해 주십니다. 또 설교를 들을 때도 그러합니다. 이러니까 이 성구를 읽고 묵상했는데 그 성구와 해당도 없는 상관도 없는 거리 먼 다른 사건이 자기에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에게 깨달아지고 알려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매일매일의 생활을 할 때에 자기가 할 일은 뭣인고 하니 자기 할 일은 명문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자기가 사랑합니다. '이 성경 말씀이 나에게 영생을 준다.' 영생을 준다 말은 성경 말씀이 나에게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이 생명의 길을 줘서 자기가 한 시간 한 시간 그 현실을 돋파나가는 현실이 멸망하지 안 하고 영생이 되는 산 생활을 해 나가게 하신다.
그래서 주님도 '아버지의 말씀은 영생이라' 내가 영생인 줄 아노라 '영생인 줄' 우리 한국말로서는 애매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좀 적극성이 없는 것같이 보여지나 '영생임을 아노라' '영생인 줄 아노라' '영생임을 아노라' '영생임을 아노라' '영생임을 아노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할 일은 '명문되어 있는 이 성경 말씀에서 내가 걸어가야 될 그 바른 길을 여게서 인도받겠다' 하여 성경 말씀을 자기가 상고하든지 묵상하든지 성경 말씀의 강론하는 설교를 듣든지 자기 할 일은 그걸 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읽고 듣고 보고 묵상하는 데에서 '이 말씀 안에 있는 성령님이 나에게 바르고 옳게 가르쳐 주신다' 하는 그 지도를 바라면서 명문되어 있는 성경을 접할 것이요, 성경 말씀을 인간의 입을 통해서 가르치는 데에 자기가 접하든지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서 접하든지 자기가 마음으로 이래 눈을 감고 묵상해 접하든지 그럴 때에 표현한 문서는, 문서적인 그 말씀은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 여게 대해서도 말씀하고 여게 대해서도 말씀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내세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여러가지 말씀했지마는 그 안에 내재하셔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한 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은 단일성이라 하는 것을 그전에 조금 많이 말했는데 그 한 분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계시는데 그 성령님 그분은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면서 읽으면서 들으면서 묵상하면서 이렇게 해서 누구를, 진리인데 진리를 가지고 뭘 하느냐? 그 진리로써 하나님의 소개로, 그 진리를 하나님 소개로, 그 진리의 하나님 앞으로 안내하는 그 안내로 이렇게 이 진리를 통해서 성령님 만나겠다, 성령님의 인도를 만나겠다 하는 그 욕망을 가지고서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묵상하든지 그럴 때에, 자기는 예를 들어서 성경에 예를 들면 백 가지를 지금 명문으로 기록해 놨습니다. 기록해 놨으면 자기는 백 가지 중에 어느 하나 가지고서 그 한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데에서 성령님을 영접했습니다. 성령님을 영접했으면 그 성령님은 그러면 백 가지로 나타냈지마는 그 성령님은 한 분이십니까 백 분이십니까? 한 분이시지요. 한 분이신데 그 한 분이 오시면 이제 자기에게 해당된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십니다.
마치 빛이 오면, 깜깜할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다가 빛이 오면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는 것처럼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오면 각각 삼천 명이 있는 데에도 성신의 감화가 오니까 제각각, 빛이 환하게 오니까 제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깨달아서 애통하고 회개할 그런 조건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에게 물으려고 하는 것도 좋기는 좋지마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참 겸손을 가지고서, 알래야 알지 못해서 사람에게 묻는 것 그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좀 공통된 그 견해는 어떤가 해서 묻는 것은, 후배가 선배에게 묻는 것 그런 것은 다 좋은 것이지마는 그것도 그것조차도 내가 사람에게 묻는 것보다도 성경 말씀에게 물어야 되겠다 성경 말씀에 물으면 네가 네게 해당된 그 성구를, 네게 해당된 그 성구를 네가 성경에 무식한 사람이 찾으려고 하면 며칠을 찾아도 잘 찾지 못할 터인데 언제 그 시기는 지나가 버리고 어찌 되겠느냐? 아니라. 성령님이 내게 오시면 모든 것을 옳고 바르고 참되게 다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하는 이것을 믿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밤에 기도하면서 오늘 생활 하는 가운데서 이런 이런 해결하지 못한 문제, 또 이런 문제점을 도리어 자기가 재를 저질러서 문제를 일으켜 놓은 것 뭐 잘못된 것 그런 것 많이 있는데 그것을 자기가 성경을 봐서 찾아도 못 찾으면 '내가 내일 아침에 새벽기도 가 가지고 하나님이 그때 내일 아침에 가르쳐 주시기를 내가 바라고 그때 내가 하나님의 올바른 인도를 내가 받겠다' 그러고 와 가지고서 온 사람이 만일 천 명이 아니고 만 명이라 하면 만 명이 제각각 그런 문제를 다 가져왔습니다. 그런 문제를 다 가지고 지금 '내일 새벽기도 인도할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바로 인도해 주시는 그 판결해 주는 그 판단을 내가 받겠다' 그 소망을 가지고서 만 명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 하고 뭐 빨리 한다 할지라도 그 어데 뭐 몇 사람에게 해당된 것또 다 못 할 터인데 만 명에게 해당된 만 건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 건을 다 말 못 하지마는 그렇게 바라고 온 사람이 만 명이면 만 명, 억만 명이면 억만 명, 그 억만 명을 그날 아침에 전부 다 각자들에게 다 각각 자기가 어떻게 걸어가야 뒬 그것을 가르쳐 주실 수 있는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 둬도 다 둘 수 없는 그 내용을 책임지신 이는 성령님이신데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것을 바라면서, 그것을 바라면서 저게서 자기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받는 것이 길가 뿌린 씨를 면한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그것을 받는 것이 일차적으로 길가에 뿌리운 씨를 면하고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은 말씀 들을 때에 들은 말씀이면 그만, 한번 들은 말씀이면 벌써 본문 읽으면 잡니다. '아이구, 그 말씀 들었으니까 뭐 내가 아는 말씀.' 이래 가지고 그만 한번 들은 것이면 안 듣고 자는 그 사람은 영감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의 말과 같이 문서로 표시해 놓은 문서를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문서를 상대해도 그 안에 있는 내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지 안 하고 문서만 상대하는 사람은 그 문서를 다른 일반적 세상 문서와 꼭 같이 여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외식하는 자입니다.
외식하는 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강팍해졌고 완패해졌느냐? 강퍅해지고 완패 해진 것은 세상이, 모든 무책임한 말들, 사람들, 이 사상 주장들, 그것들에게 많이 시달려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독서도 처음 하는 사람은 그 독서의 감이 크고 강하고 독서를 자꾸 많이 한 사람은 뭐 거게 대해서 아무런 그런 실감이나 소감이나 그런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길가 뿌린 씨를 면하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어떻게 행할 것을 깨닫는 것은 꼭 거게 해당된 명문이 나와서 깨닫는 게 아니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명문은, 명문이라 말은 글로 밝히 써 놨다 말이오. 명문이라 말은 글로 똑똑히 표시해 놨다 말이오.
성구가 나를 깨닫게 하는 것은 그 성구가 혹 어떤 한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한 건에 해당될지 몰라도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다 해당되겠습니까? 그러나 성구는 제한을 가지고 있지마는 그 성구로 말미암아 영접하게 되는 그 영감은 제한이 없습니다. 영감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이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그 인도를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길가 씨가 되지 안 하고 옥토에 뿌린 씨가 되기를 원하는 그 사람이오.
그러기에 사람이 어떤 그 한 설교를 듣고 사람이 확 변해집니다. 변해지는 것은 그 한 설교 명문 그것 가지고서 그 명문에 따라서 그 종류가 변화된 것 아닙니다. 그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빛이 와 가지고 자기가 변해지기 때문에 말씀은 단 한 시간 설교를 들었다면 한 시간 설교에 뭐 몇 가지를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로 인해서 깨달 아지고 변화된 것은 여러 수백 수십 수천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의 도를 들으려고 하는 합당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 그 영감을 바라지 아니하고 그저 문서 그것을 자기가 기억하는 것으로만 아는 사람은 재주있는 사람은, 그러기에 재주 명철한 사람들이 다 넘어지고 떨어집니다.
그러기에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안하다' 그말은 세상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참 아주 아이큐가 높으고 또 뭘 이래 광문다학해서 넓게 읽고 듣고 한 그런, 광문다학한 사람은 그 사람이 제일 멸망을 많이 받습니다.
왜? 그 사람이 강퍅하고 제가 이 문서만으로만 생각하고, 문서만으로만 생각해도 제가 똑똑히 알려고 하면 이 문서는 이 모든 그 문서를 만들어 낸 인간들을 만든 그 능력의 말씀인데, 인간들을 만든 능력의 말씀인데 이 능력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것도 제가 속은 것, 또 이 말씀을 말씀하신 분은 어떤 분이냐 그분은 또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이 인간을 비교를 못하고, 또 만물을 창조하신 이 진리와 인간들의 그저 지걸거리는 새 지걸거리듯이 지걸거리는 무책임하게 지걸거리는 이 말과 이 비중을 제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고, 그게 뭣이냐? 자기의 모든 지식으로 자기가 강퍅해지고 패망하게 된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영감이 임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자꾸 읽든지 듣든지 하는 것, 이래 듣는 것도 눈이 어둡고 기운이 없고 이렇게 한 사람은 성경을, 요새는 참 성경을 녹음해 가지고서 녹음기를 틀면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이거 눈이 어두워서 만일 소경이 되면 뒤에 이 성경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는데 지금은 녹음한 게 있어 놓으니까 눈이 어두워도 들을 수 있겠다 하니까 그런 것은 다 편리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과학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이용하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그것이 최고로 알아서 거기 복종하면 자기는 죽습니다. 그러기에 과학이라 하는 인간 지식이라 하는 것은 이용할 지식이지 그것에게 지배를 받을 지식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용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지도를 받을 말씀이라. 내가 하나님 말씀은 모시고 그 말씀이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그 말씀에게 복종해야 될 그 복종으로 높여 내 위에 무한히 높여 이래 높여 섬겨야 할 따라야 할 말씀이요 인간의 말은 어떤 대학자가 말하는 무슨 말 할지라도 그 말은 내가 사용해서 이용할 내 소지품이라. 요 위치를 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통해서 영감이 나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줄 것을 소망해야 됩니다.
저도 어제는 내가 이뭐 좀 읽어봐야 얼마 읽지를 못해요, 눈이 어둡고 이래서.
이래 한번 총괄적으로 해 봐야 되겠다 해서 어제는 신약 성경을 녹음을 한번 들어볼까 이래 가지고 박정규 장로님이라는 장로님이 녹음해 놓은 게 있는데 그래 녹음기를 틀어 놓고 이래 앉아서 들어 봤습니다. 들어봤는데 갈라디아까지 밖에는 못 들었어. 갈라디아서까지 들었는데 쭉 들으니까 그저 옛날 외운 것이 다 새로와지고 또 그런 가운데에서, 내 마음이 많이 밝아지고 또 거게서 이렇게 저렇게 모두 할 그런 것이 자꾸 생각이 나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런 것이 자꾸 자기에게 생각이 나지더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길가 뿌린 씨가 되지 않도록, 이번에 거창에 가 가지고서는 특별히 이걸 하고 언제든지 아침마다 올 때에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인도해 주실 건가?' 그냥 할 게 아니라 자기에게 무슨, 기도해 가지고서 '이런 문제 어떻게 하나?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까?' 이럴 때에 아침마다 그것을 바로 인도해 주시는 이가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어제 아침에도 말했지마는 강경자 집사님이라는 그분은 참 어려운 입장을 가지고서 살았는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불건전한 신비주의라 그렇게 여길 만치 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새벽기도 안 오고는 못 견뎌. 왜? '이런 문제가 있으니 이것은 또 어떻게?' 아침에 와서 또 들어서 깨달아졌어.
내가 물었어. '오늘 아침에 나왔습디까?' '녜, 나왔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무슨 문제를 가지고 왔습디까?' 늘 이래 자주 만나니까 그 안다 그거요. '무슨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까?' '이런 이런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걸 생각다가서 그만 머리만 아프고 이래서 내일 아침에 또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데 가서 들어야 되겠다 하고서 누워자고 오늘 아침에 가니까 목사님이-내가 그새 조사던가 목사던가 모르겠습니다-설교하시는 데 그래 깨달았습니다.' '내가 오늘 거기 대해 설교합디까? 나는 오늘 설교는 여게 대해서 이런 설교 했는데 그런 설교 하지도 안했는데요.' 이러니까 '예, 그래도 이리 이렇게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내가 바로 깨달았는가 싶어서 물어봐요. '그러면 그 건에 대아서 어떻게 하면 되겠다고 그렇게 깨달아졌습니까?' 그 말하는 것 보면 옳고 참되게 바로 깨달았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렇게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에, 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읽을 때에 거게서 뭘 하는 것이냐? 성령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주님을 소개하는 중매쟁이라 하는 걸 제가 늘 말하는 것이 그겁니다.
이 성경 말씀 묵상함으로써 성령님을 영접하게 되면 내게 성경 안에 있는 성령님이 빛을 내게 비추지, 또 우리 안에 또 중생된 자는 속에 빛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조명의 영감이라 이럽니다. 우리 속을 환하게 비추는 영감. 이 영감 영감이 한 영감이지마는 마주쳐 가지고서 나에게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밝아 놓으면 다른 것도 볼 수가 있다 그말이오. 내가 여게서 뭐 이 종 찾기 위해서 불을 켜 들었는데 불을 켜니까 이 종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환하게 다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짜든지 이번에 가는 데는 하나님이 증거해 주는 그 말씀에서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을 다 확실히 깨닫도록, 작정이 되도록. 사람들이 뭐라고 쌓아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똑똑히 몰라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불에 들어가면 타 죽고 불에서 나오면 산다는 그걸 아는 사람은 자기 힘있는 대로는 불에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범죄하는 것이 그 죄를 범하는 것이 어떻다 하는 그걸 똑똑히 알면 죽어도 죄를 짓지 안하려고 죽는 힘까지는 발동을 하는 것이 생의 애착의 본능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본능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길가 뿌린 씨가 되지 안하도록 다 노력을 합시다. 말씀을 보든지 듣든지 읽든지 자기가 묵상하든지 문서로 된 이 말씀을 상대할 때에 그 안에 무한하신 성령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보는 이것이 돼야 된다 그거요. 그러면 성령님 오시면 다 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은 뭐 봉사 없습니까? 어제 소제를 모두 하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는갑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시작입니까? 주일학교 오늘부터 시작하요? 기도를 많이 하시이소. 교통사고 나지 안하도록. 그러고 교통지도원들은 나와 가지고 모두 힘을 써서 잘 지도해서 사고나지 안하도록 반사들도 말이요, 어제 아침에 말했는데 자기 몸뚱이로 가지고 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몸뚱이 이까짓 건 둔합니다. 몸이 둔해서 마음이 한 시간 가는 것을 몸 이거는 가려고 하면 뭐 여러 수십 일도 걸립니다 몸 이거 제일 껍데기고 천 하고 둔한 것이요, 이 몸 이게. 제일 천 하고 둔한 것. 그보다 마음이 민활하고 예민합니다. 마음으로 일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일하는 것이 제일 큽니다.
이러니까 일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혼자 읽든지 듣든지 해서 영감을, 성령을 영접해 가지고 성령으로 일해야 될 터인데 다니면서 심방이나 부지런히 하고 예배 볼 때는 참석도 안 하고 또 학생이나 들으라 하고서 예배볼 때 참석도 안 하고 저 늦게 참석하는 그런 사람은 참 그거 어리석은 일이요 속는 일입니다.
영감을 영접지 안 하고 뭘 할 겁니까? 그러니까 기도하는 게 다 묵상하러 가는 거라,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