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2:02
마음 눈이 밝아야
1987. 9. 18. 새벽 <금>
본문: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한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기독자가 자기의 본질과 본성과 본분을 떠나면 그만 쓸모 없게 되고 버림받고 천해진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본질이 뭣이 본질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근거 기초 그것이 본질이요, 본성은 뭐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건설해 주신 이 구원이, 건설해 주신 구원ㅡ 기본구원입니다ㅡ건설해 주신 구원 이것이 본성이요, 본분은 제사장 선지 왕직 그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이것을 열여섯 가지라고도 하고 또 구원의 근거라 기초라, 또 구원된 우리의 자체라, 또 구원의 이 기업이라.
내나 한가지를, 이 주먹으로 말하면 손등이라, 또 손 배라, 또 손에 이 손가락이라, 뭐 엄지손가락이라, 이렇게 내나 한 주먹을 두고서 요 면을 말하고 조 면을 말하는 것처럼 알아듣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 면으로 저 면으로, 이 면으로 저 면으로라 말은 요면 요면 요면 그런 걸 가리켜 말할 때는 그 면이라 하고, 또 각도로 할 때는 요 빼쪽한 거 요 빼쪽한 데 요 빼쪽한 데 요 빼쪽한 데 그런 것을 가리켜서 또 각도라, 내나 한가지 말입니다.
그런데 여게 우리가 확신을 가지도록 자꾸 이 믿음을 길러 나가는 데에는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말은 다시는 짜게 할 수 없다, 절대 다시 짜게 할 수 없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요걸 깨닫는 것은 기독자들이 이 구원을 버리고 살면, 녹아지는 것은 소금은 녹아지는 것이 그것이 직책인데 이 녹아지는 데 대해서 희생이라는 그런 것을 저도 과거에 말했는데 그것은 도리어 방해하는 그런 해석이었습니다. 전부 주석들은 다 그래 돼 있는데 처음에는 그래 깨달았지마는 그분들도 나중에 깨달으면 달리 깨달아질 것입니다.
녹아지는 것은 안 녹아지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 녹아집니다. 열여섯 가지 이 구원으로 자기가 녹아지든지, 돈을 위하여 녹아지든지, 자기 욕심 차리다 녹아지든지, 그리 안 하면 자기는 뭐 행락 취하다 녹아지든지, 뭘 하다가 녹아지든지 녹아지기는 한 살 지냈으면, 일 년 지내면 그만치 녹아졌지 사람들이 ‘그 사람은 뭐 아주 열 살은, 십 년은 젊게 보인다. 이십 년은 젊게 보인다.’ 그 우리 눈이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똑똑히 보는 사람은 일 년도 못 속입니다. 다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잘못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십 세라 하는데 스무 살 같더라’ 이래 보는 거 우리 보는 눈이 어두워서 똑똑히 못 봐 그렇지 잘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스무 살이면 스무 살 딱 알지 뭐 열아홉으로 보지도 안하고 스물하나로 보지도 않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늙어진다 그말이오. 자꾸 줄어져. 녹아지는 거와 같이 자꾸 감소돼져. 자기의 생명 기간도, 생명의 수명도 자꾸 줄어지고 자꾸 자기의 정력도, 암만 힘이 세어지는 것 같아도, 어린아이가 한 살 먹는 것보다도 열 살 먹는 아이라면은 그 아이는 힘이 많아지는 거 같지마는 실은 우리가 볼 줄을 몰라 그렇지 많아지는 것이 아니고 벌써 그 아이의 힘이 백 근이라고 하면은 벌써 열 살이 됐으면 그것은 그만치 줄었고 또 한 살 먹는 거는 그만치 적게 줄었고 준 것은 그만치 많이 줄고 적게 줄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다 늙어지는 거 그거는 돈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명예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행락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또 자기 나쁜 악을 인해서 늙어지는 사람, 고집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또 시기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분노 위해서 늙어지는 사람, 뭐 늙어지는 것은 뭐이든지 늙어지기는 늙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평안하게 있으면은 안 늙어지는 줄 알아도 그것도 늙어집니다.
이 녹아지는 건 다 녹아지는데 이제 소금이 간을 가지고 녹아지는 거와 같이 사람들이 기독자의 열여섯 가지 구원 본질과 본성과 본분 이것을 하면서 늙어지느냐 이것을 떠나고 늙어지느냐 하는 그것이 이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잃으면 다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시 짜게 하지 못한다. 자기가 열여섯 가지 구원을 버리고 이 세상 것 위해서 살다가 늙어졌으면은 그것을 어떻게 다시 복구하겠습니까? 복구한다면 어제를 오늘로 만들어야 되는 건데 그거는 인간도 못 만들고 하나님도 못 만드는 것입니다. 지나가면 지나간 것은 다시 그거는 앞으로 돌아오게는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후회된 그것은 앞세우지는 못 합니다. 지나간 것은 자기 앞에 두지는 못한다 말이오. 지나간 거는 지나가 버렸지 지나간 그것을 자기 과거 된 것을 미래로도 둘 수 없고 현재로도 둘 수 없다 그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라고 난 다음에 인제 그 결과를 말했는데 “쓸데 없다” 뭐 기독자가 제가 인간들이 말할 때에 이 문화 운동 한 사람은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았다. 또 무슨 정치 운동 한 사람은 세계에 손꼽는 첫째 둘째가 됐다, 뭣을 했든지 기독자가 이 세상에 와 가지고서 열여섯 가지 구원 이것을 버리고, 이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걸로 살았으면 그 사람은 다시, 하늘나라에서는 이것으로 산 것만 간추려지기 때문에 이것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산 그것은 몇 해를 살았든지 다시 그거는 복구할 수 없다, 회복할 수가 없다. 못 하면 어찌 되느냐? 그것은 쓸모 없는 일이 된다.
사람들은, 노름꾼은 노름꾼의 그 면으로는 쓸모가 있어지지요. 또 이 체육을 하는 사람은 체육면으로서는 쓸모가 있어지지요. 남의 돈을 쓰리하는 도적질 하는 거 훔치기 하는 그런 사람은 훔치는 데는 쓸모가 있지요. 그러나 그 쓸모는 언젠가 없어집니다.
여게 “쓸데 없다” 그말은 하나님께 쓸데 없다 말이요 또 참 옳고 바르게 쓸데 없다 말입니다. 삐뚤어지게는 자꾸 쓰여지지, 그 연습하면은. 이렇지만 참 하나님에게 쓸데가 없다. 참으로 인류에게 쓸데가 없다. 만물에게도 쓸데 없다.
죄밖에는 쓸데가 없고 마귀에게 밖에는 쓸데가 없다. 그거야 암만 쓸데 있는 게 무슨 좋은 겁니까? “쓸데 없게 된다” 그러면 어찌 되느냐? “밖에 버리운다” 버림 받는다. 버림 받는 것도 하나님께 버림 받는 걸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또 이 인류에게 버림 받는 거 말하는 것이고 만물들에게 버림 받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거는 천대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성구는 다 우리가 요절로 기억해 가지고 항상 이렇게 생각해 보면, 자기 하는 일을 성경 말씀 가지고 비판을 해야 그 비판이 옳은가 그른가 이렇게 알 수가 있지 성경 말씀 가지고 비판하지 안하고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속에 자기 주관 가지고 비판하면은 자꾸 삐뚤어집니다. 자꾸 삐뚤어져.
자기 주관 가지고 비판하면은 옳은 것은 자기 주관대로는, 주관에 맞은 거는 자꾸 맞은 걸로 돼지고 자기 주관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고 자기 주관에 삐뚤어진 거는 자꾸 삐뚤어진 걸로 생각해. 그라면 저 죽는 거라. 지옥에 빠지는 거라.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기도하러 가 가지고서 ‘나는 오늘 요번에 이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는 금식을 하든지 어짜든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이 기도를 달성하고 오겠다’ 하는 그 사람은 백의 구십구는 실패합니다.
‘나는 좀 무엇인가 이거 내가 컬컬해서 기도하러 가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될란지, 또 내게 무엇이 잘못된 게 있는지, 내가 할 일을 안 한 게 뭐인지, 하나님하고 나하고 대조하고 말씀하고 나하고 대조해서 뭐 잘못된 거 있으면 고치고 또 내가 구비하지 못한 것이면 구비해야 되겠다.’ 이렇게 이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러 가는 것은 내 소원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러 가는 게 아니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기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제 소원이야 만물보다 거짓된데 제까짓 거 소원을 누가 들어 주며 하나님이 그거 들어 주겠습니까? 안 들어 준다 그거야.
그러니까 내게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뭐이겠느냐? 또 내게 대해서 성경이 소원하는 게 무엇이겠느냐? 그건 하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면은 그것이야 얼마나 힘써야 됩니까? 생명 내놓고 힘써야 되지. 그게 뭐입니까? 그게 뭐 육체의 소욕입니까 성령의 소욕입니까? 성령의 소욕이라.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은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요” 육체의 소욕이라 말은 하나님의 소욕이 아니고 제 소욕이라 말이요, 사욕이라 그말이요, 사욕. 성령의 소욕은 다른 말로 말하면 공욕입니다, 공욕. 네 소원도 되고 내 소원도 되고 전체의 소원이 되는 것이고 또 사욕이라 하는 것은 제 혼자 소욕이라.
제 혼자 소욕, 제 혼자 욕심, 그 다음에는 제게 속한 자의 욕심, 전부 저를 근거해 가지고 있는 그런 욕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의 소욕에 삐뚤어지는고로 사망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꾸 새겨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은 짜운 것이 거게 특색이라. 그 본질이라. 짜운 것이 본질.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은 예수님의 구속, 예수님의 이 구원 이것이 우리의 특성이요 우리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분이라. 이거 외에는 우리 본분이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제가 대통령 노릇을 해도 이 본분 제사장 노릇 하기 위해서, 선지자 노릇 하기 위해서, 저는 대통령을 하면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가지고서 제사장 선지 왕노릇 했어야 되지 그외 딴거 했으면 저는 다시 그거 복구하지 못해요. 그거는 다 쓸모 없는 자 만드는 것이고 버리움 받는 거 만드는 것이고 나중에 영원히 모두 다 짓밟히는 거 만드는 것이지 딴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요것을 늘 기억하면서, 그러면 기독자가 망하는 데는 어째 망하느냐? 맛 잃어 망한다. 맛 잃어서 망한다. 기독자가 기독자의 본질 본성 본분을 버려서 망한다.
이 망하는 것은 뒤에 다시 복구할 수가 없다. 회복할 수가 없다. 회복할 수가 없는 것은 다른 거야 회복들이 다 되는 것이지마는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이거는 다시, 다시 지나간 시간을 당겨다가 내 앞에 놓을 수는 없는 거라. 그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또 기독자가 영광스러워지는 그 방편은 무엇이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만드시기를 모든 사람이 너를 보고서 모든 것을 비판 평가를 하도록 그래 해 놨다. 너는 모든 사람에게 표본이요 또 모본이요 또 그것이 원형이다. 모든 사람의 원형이 된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놨기 때문에 네가 잘 하면 영광스러워지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니까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 돌리면 자기는 영광될 것 아닙니까? 우리 피조물은 어떤 것이 영광이냐? 하나님에 욕이 되든지 말든지 제게만 영광된다고 영광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됨으로 자기는 그 영광으로 따라서 자기도 영광의 빛에서 영광이 돼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가 자체가 영광스러워지는 거, 영광스러워진다면 모든 게 다 좋아진 것 아닙니까? 기독자가 영광스러워지는 방편은 뭐이냐? 다른 방편 아무것도 없어.
그저 빛노릇 하는 거.
빛노릇 하는 거, 이 불만 이거 꺼 버리면 우리 누군지 몰라요. 이거 누가 누군지 몰라요. 그러나 불을 탁 켜면 다 알아. 이거는 마이크, 이거는 나무, 또 이거는 뭐 의자, 뭐 이거 다 알아요. 그 모양으로 우리를 빛으로 했다 말은 우리가 인생에게 있어서, 인생에게 있어서 참사람과, 참사람의 행위와, 참사람의 성질과, 참사람의 마음, 참사람의 그 모든 행동, 이제 참사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참사람 만들라고 애를 쓰고 참사람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따라서 참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애를 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세상의 빛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옳고 바른 것을 보여 주는 그 빛이라. 그게 내나 뭐인데? 그게 내나 기독자의 본질 본성 본분입니다. 그러면 열여섯 가지 구원이라. 열여섯 가지 구원으로 사는 그것이 세상의 빛이라.
열여섯 가지로 살므로서 모든 사람들이 내 말 듣고 알고, 내 행동 보고 본받고, 내라는 사람 보고 또 닮고, 이것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또 역사하심을 우리가 보고 하나님 속성들을 보고 닮아가는 거와 같이 그리 돼 닮아가기 때문에 “너희들은 양무리의 본이 돼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내나 열여섯 가지 구원으로 사는 거라.
열여섯 가지 구원으로 살면 너는 점점 영광스러워진다. 영광스러워진다면 이거는 높아진다 말이요, 실력 있어진다 말이요, 쓸모 있다 말이요, 모든 사람이 다 필요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요, 유익을 준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기에 기독자가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빛 생활 하면 영광스러워진다. 빛이 뭐인데? 빛은 내나 우리가 받은 열여섯 가지 구원 그것이 세상 빛이라.
“너희들은 빛이 아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빛이 아니라” “그는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자라.” 참 빛이 왔으니 참 빛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열여섯 가지 구원의 원형이요 우리는 그 모형이라.
이러니까 빛으로 살면 영광스러워진다. 기독자가 기독자의 이 구원의 본질과 본성과 본분으로 살면 영광스러워진다. 기독자가 쓸모 없고 버림받고 천해지는 거는 뭐이냐? 기독자가 열여섯 가지 구원을 버리고 살면, 제가 뭐 민족을 위해 살았거나, 인류를 위해 살았거나, 이십세기의 문화를 위해 살았거나 뭘 살았던지 저는 쓸모 없는 인간 되어지고 또 버림을 받는 자 되어지고 천한 자 되어진다 하는 그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께서는 공과를 다 외우도록 힘씁시다.
또 지하철 이 공사로 우리 건물이 피해받지 안하도록 어짜든지 그거 위해서 기도합시다. 지금 쇠말목을 빼느냐 안 빼느냐 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가서 물어보니까, 뭐 십구일날? 십구일날은 저 맞은편에 뺀답니다. 그라고 인제 그 다음에 빼 봐 가면서 이쪽에 빼서 이 건물에 손해가 가나 안 가나 그걸 봐 가면서 만일 저쪽에 빼 봐서 손해갈 상바르면 이걸 안 빼고 두든지 하고 손해가 안 가면 빼고 이란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그뭐 누구 말 듣겠소? 아무 말도 안 듣습니다. 어짜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는 모르니까 어짜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
빼지 않도록 해 달라 하는 그런 기도도 필요 없어. 어짜든지 이 지하철로 인해서 건물이 손해가지 안하도록만 자꾸 그래 기도해요. 기도하면 그거 당신이 뭐 빼도 안 가게 하실라면 안 가게 하실 것이고 또 안 빼게도 할라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어짜든지 이 건물이 이 지하철 공사로 인해서 상하지 안하도록 그렇게만 자꾸 기도를 해요.
기도하는데 나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걸 나는 본 것은 이 다섯 살 여섯 살 먹는 그 아이들에게 자기 아버지 어머니, 자기 아버지는, 아버지는 신앙에 대해서 앞서서 그렇게 하지 안해요, 어머니들이 앞섰지. 그러기 때문에 이거 하늘나라 가서 보면은 이 남반들이 거석하지마는 세상에서 보면은 남반들이 천대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거는 신앙을 천대해. 집집마다 보면은 아내는 좀 믿음이 있고 남편은 믿음 없어. 그렇기에 그게 천할 수밖에 없어. 하나님이 천해게 하면 천해져. 앞으로 지금 이것 뭐 참 천해지겠어.
내가 어제 내가 그런 소리를 뭐 한 서너 번 들었는데 ‘이제 팔 년만 더 지내면 아주 남자 장가가기 참 어렵다. 이래 가지고 여자는 귀하고 남자는 많아진다.’ 그말 듣고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그러면 너는 딸이 있는데 잘 팔아먹을러구만.
세월나겠다.’ 내가 이랬는데, 그것도 몰라요.
뭐이든지 하나님과 멀어지면 천해집니다, 뭐. 제까짓 게 암만 잘나도. 아무리 잘나도 그만 하나님과 좀 멀어지면 그만 천하게 만들어 버려.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사람들이 모르는 면에서 자꾸 존귀해집니다.
그 사람들이 뭐 짜다라 떠들어 쌓아도 건강이라 그래도 잠깐이오. 여러분들 뭐 스무 살이니 서른 살 먹으면 우리야 하지만 건강 그까짓 것도 잠깐이라, 그뭐. 다, 나도 여기 서부교회 올 때는 아주 뭐 건강했어. 그래도 건강했었어. 이렇지마는 잠깐이라.
그러니까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아요. 그저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맡겨놓고 순종하고 열여섯 이 구원을, ○○○조사님이 ‘이거 모든 사람이 말하는데 이거 외워서 잘 알 수 있도록 요렇게 좀 박아서, 박아 가지고서 요걸, 그게 뭐 오 원 될란지 십 원 될란지 모르지마는 요래서 그렇게 해 주면 안 좋겠습니까?’ 이래서 잘 생각했다 싶어서 어제 잠깐 뭐 저게 서서 내가 얘기를 했는데 그걸 좀 더 소상스럽게 해 가지고서 또 박아 주면 가지고 가서 자기네들이 외우면 또 구원이 될 거라. 어짜든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이 세상에서 할 일입니다.
이러니까 이 반사 선생님들은 자기 반사직을 잘해. 백 목사 위해서 반사직 하는 그거는 짐승이라. 미친 자라, 어리석은 자라. 백 목사 그까짓 거 위해서 암만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어. 주님을 위해서 해, 주님 위해서.
주님 위한 것만 또록또록하게 그때 상급이 되어지지 아무리 뭐 주기철 목사 위한 것도 소용 없어요. 손양원 목사 위한 것도 소용 없어. 베드로 위한 것도 소용 없어요. 이 천주교에서는 베드로 보고 미사하고 다 이러는데 아무 소용 없어. 백 목사 위해서 하는 것도 아무 소용 없어. 꼭 주님 위해서 해야 돼요.
이런데 반사 선생님들은 나 위해서 하는 것처럼 이뭐 나하고 삐뚤어지면 안 합니다. 나하고 삐뚤어지면 안 해. 주님하고 삐뚤어져야 안 해야 되지 나하고 삐뚤어진, 내가 뭐 하나님인가? 그 어리석어.
이러니까 꼭 반사 선생님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가 설 터이니까 이렇게 사람 구원할 수 있는 아주 곧은 길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얼마나 이거 영광인지 모릅니다. 제까짓 게 장사하고 지금 반사 안 하면서 그렇게 인간 구원을 위해서 힘을 쓸 수가 있는 줄 압니까? 안 돼. 제가 대통령 하면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소? 그것보다 이 권찰직 하는 게 나아.
권찰직을 이래 떡 맡겨놓으니까 이거는 항상, 자꾸 또 인제 조사를 하지 또 보고를 하지 이라니까 이 마음이 전부 그리 기울어 가 가지고서 이 일을 이 가치 있는 이 일만 위해서 살게 되니까, 살게 됐으니까 이게 영광인 줄 알아야 되지.
‘내가 이라니까 주일학교 올라가고 뭐 교회 올라가니까 에, 돋으니까 내 안 한다.’ 하기 싫거든 마라. 너는 뒈지거라. 너는 지옥을 가거라. 너같은 욕심쟁이는 다 죽여야 된다. 너 위해서 뭐 하는 그런 건 죽여야 되지 주님 위해서 하는 것이면 주님이 변해집니까? 이러니까 반사들도 주님 위해서 해요. 권찰도 주님 위해서 하고. 모든 것 다 주님을 위해서 해요. 그것이라야 옳은 생활이고 산 생활이고 알속있는 생활이지 인간 위해서 하지 마십시오.
인간 위해서는 하는 건 다 암만 잘해도 나중에 그만 ‘보자, 네가 뭘 위했노?’ 보면 그만 인간 위한 건 다 헛일이라. 교인을 위한 것도 헛일이라. 꼭 주님 위해야 되지.
악이 뭐입니까? 자기 위주. 또? 피조물 중심 피조물 위주라. 그것 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착한 행실, 착한 행실은 뭐이 착한 행실입니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창조주 자존자 조물주 그분 위주,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주 위주 이것이 산 생활이지 딴건 다 죽은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