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2:05
마음과 영의 생애
1984. 3. 17. 새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펀지하노니
이 1절에서 베드로에게 영감하신 그 영감이 어떠함을 나타냈습니다. 베드로에게 영감한 이 영감은 우리 택함을 입고 부름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는 다 같이 이 영감을 받을 수 있고, 또 이 영감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애를 쓰시고, 또 우리가 이 영감을 받아 이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1절을 벌써 오늘 아침에 여섯 아침째 계속합니다. 뭐 계속한다고 해서 다른 별 말을 증거하는 것 아니고 그저 증거한 그 말씀을 또 증거하고 증거하고 증거하는데 이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그 말은 내나 그 말이지마는 사람이 볼 수 없고 자기의 양심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영감은 언제나 아침마다 다른 영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로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 모든 존재들입니다. 볼 수 있는 것 안에는 볼 수 없는 것이 들어 있고, 또 보기 쉬운 것 속에는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어 모든 존재들은 다 구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보기 쉬운 것은 가치가 적고 보기 어려운 것은 가치가 높고, 잘 보이는 것은 가치가 적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가치가 높고 또 귀중한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도 다 그러하고 말도 그러하고 또 사람이 생겨진 자체도 그러합니다. 말과 행동은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 말도 알아듣기 쉬운 말 있고 어려운 말 있고 안팎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아듣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가치가 더 높습니다. 권위도 높습니다. 행동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은 가치나 권위나 모든 면이 좀 적고, 알기 어려운 행동은 가치나 권위가 높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라감에 따라서 차차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고 그 말을 알아보는 그 정도는 각각 다르고. 또 그 행동도 같은 행동을 같이 보지마는서도 그 행동을 보고 그 안에 있는 내부를 깨닫는 그 보는 각도나 양은 각각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저렇게 모든 그 종류대로 그 실력이 자라감에 따라서 그렇게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은 사람이 사람 되어감에 따라서 보는 그 지식이 차차 자라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겉에 보이는 것은 가치도 적고 또 폭도 좁고 또 깊이도 얕고. 가치도 적고 능력도 적고 또 그것이 나타내는 효력도 적습니다. 차차 깊이 들어갈수록 능력도 지혜도 폭도 가치도 효과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조도 그러한 것입니다. 몸이 있고 몸 안에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 영이 있습니다. 세상 학문에서는 그들이 영은 전혀 모릅니다. 알수 없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은 존재적으로는 존재하지마는 기능적으로는 전혀 없는 거와 같습니다. 사람이 타락하면 영의 작용은 전혀 없고 죽은 영과 살아 있는 마음과 몸 이것이 합해 가지고서 사람으로 되어 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의 육체가 됐다 그 말은 그 영의 작용이 작용하지 못하고 전혀 심신의 작용만 하게 됐다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 영의 작용은 전혀 없고 심신의 작용만 있을 때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육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소욕이라. 사람들은 육체라고 하면 이 고기덩어리 이것만을 육체라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한 대로 한 원어에서 이렇게 저렇게 말한 그것은 번역한 그 사람들의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을 이렇게 저렇게 번역해 놓은것은 그것은 번역만 보고서 안 됩니다. 그 번역은 수많은 사람들이 번역한 그것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한 원어를 여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은 성경에서 많은 그런 같은 원어를 찾아서 그 번역을 보면 참고가 될 것이고, 또 원어를 전혀 몰라도 전 성경은 한 체계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 성경을 읽으면 필연적으로 다, 정확하게 알아지도록 그 안에 내재하는 성령의 감동이 역사하십니다.
그런고로, 육체는 생각이 없습니다. 육체의 생각 육체의 소욕이라고 이래 말하는 것은 순전히 심신이 둘이 합작돼 가지고서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마음도 물질이요 몸도 물질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물질되어 있는 그 물질은 고상한 신비한 물질로서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제한받지 않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이 몸이라는 것은 그보다 둔해서 제한을 받고 제재를 많이 받는 물질입니다.
이런고로, 사람들은 영육이라, 이래서,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라 이렇게 사람의 요소를 둘로서 이렇게 분류해서 말하는 그 이분설을 말하는 그 교리가 있고. 또 삼분설을 말하는 교리들이 있습니다. 이분설을 말하는 교리도 장점이 있고 삼분설을 말하는 교리도 장점이 있고 또 단점들이 있습니다. 이분설을 말하는 교리는 단점이 뭐인고 하니 사람은 두 가지 요소로만 되어 있다 하기 때문에, 분명히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이 둘이 있으니 두 가지 요소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과 몸 두 가지니 마음은 영이요 몸은 육이라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 그 단점이 있습니다. 또 그 장점은 뭐인고 하니 영은 영물이요 육은 물질인데 마음은 그것은 신비한 물질이라. 영물이냐 물질이냐, 영체의 것이냐 물체의 것이냐 하는 그 두 가지로 나눌 때에 이분설은 마음이 물질에 속했기 때문에 그 점은 좋은 점입니다. 장점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영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음이 영이라 영이 마음이라, 이러니까 마음 중에 제일 착한 마음 양심이 영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영이 무엇이라 하는 것을 지금 교리에 똑똑히 나오지 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영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영을 자기가 만냈는지 봤는지 알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삼분설을 말하는 장점은 어떤 장점인고 하니 몸. 마음이 있는데 마음 외에 하나가 더 있다 해서 영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사람은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장점입니다.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영을 잘 말하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점은 뭐이 단점 인고 하니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은 이 혼이라는 이것을 이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영에 속한 것이라 하는 그것이 착각이요 잘못 안 단점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후에는 영은 완전히 기능이 죽었습니다. 영은 어떤 존재인고 하니 하나님의 모형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모형인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 그 영을 쓸 수가 있지 다른 것은 영을 쓰지 못합니다.
타락한 후에는 악령이 사람의 영을 이용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마는서도 악령은 이용을 할 수 없는 존재로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용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에 영을 말하기를 타락한 후에도 영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이 타락했으니까 기능적으로 무능하게 됐다 아주 저능하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무리 불신자라도 사람들에게 짐승에게 없는 그 도덕심이 있고. 윤리심이 있고, 또 그 종교심이 있다, 있는 그것은 타락한 영이지마는서도, 그게 자기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유능한 영은 되어 있지 안하지마는서도 무능한 영이 되어 있어 가지고서 무능한 그 영의 역사이다.
이러기 때문에, 불신자의 그 모든 인간다운 인간성의 것은 그것이 영의 작용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모형이 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들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다 영이 뭐인지를 모르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과 연결이 될 때에 그 영은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되면 그 영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영은 하나님같은 하나님의 모형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하나님에게 있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그 형상, 그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다른 데는 아무데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그 형상을 하나님의 존재를 꼭 고대로 나타내서 하나님을 가장 고대로 나타내는 피조물로서는 제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영입니다. 그러기에, 영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무한을 피조물로서 나타 내는 데는, 하나님의 무한을.
하나님의 완전을, 하나님이 지극하심을 그것을 나타 내는 데는 피조물 중에는 제일 정확하게 나타내고 제일 유력하게 그렇게 나타내는 그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그런고로, 이 타락한 천사가 타락 전에도, 타락 전에도 본 지위차 하나님이 사람으로 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의 영과 동등 위치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지음받을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지마는 천군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서 그것이 만들어져 나왔으니까 비슷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의 그 형상을 고대로 묘사해서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인 그 영과는 다릅니다.
성경에 종과 상속받을 아들과 한 집에 있을 때에 좀 있으면 호주될 그 아들이지마는서도 그 아들이 그 종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단계에 가 가지고서 장성해서 호주가 될 때에는. 주인의 아들로서 장성해질 때에는 그 종을 부린다 하는 그런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 천군 천사가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를 관리하고 우리를 지도하고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고 이래 하지마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과해 가지고 만물 위에 하나님의 몸으로 위치를 잡아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제사장 선지자 왕의 그 직책을 가지고, 마치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의 인성은 순전히 그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신성과 한 격위를 이루어 가지고서 예수님의 인성 이 하나님과 한 격위를 이룬 아주 하나 된 한 격위 하나되어서 역사하는 한 격위를 이룬 그 예수님의 그 인성같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라다가 그 위치에 가고 난 다음에는 천군 천사는 교회의 수종자요 교회를 옹위하고 모시고 선 것이 천군 천사들입니다.
교회는 곧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천군 천사의 그 다스림과 지도와 보호를 입지마는 장성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진 후에는 천군 천사는 우리를 옹호하고 우리를 수종하고 우리들이 부리는 존재요 우리는 그의 주인이 되는 때를 가리켜서 성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의 이 겉은 우리의 몸이요 몸 겉에는 그 몸의 기능대로 꺼풀을 입고 있습니다. 몸 겉에는, 자기의 지위도 몸의 껍데기요 자기의 권세도 몸의 껍데기요 자기의 의복도 몸의 껍데기요 자기의.가옥도 몸의 껍데기요 자기의 모든 처소가 다 몸의 껍데기입니다. 이런데, 땅에 있는 처소라 하는 그 말은 땅에서 사람이 천층만층구만층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마다 자기의 입고 있는 위치가 각각 다릅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에 따라서 그렇게 됩니다. 몸의 기능도 단독 그 몸의 기능만이 아니고 그 몸 안에서 작용하는 그 안에 많은 것이 있는데 그 작용의 기능이 몸을 통해서 나타나서 나타나는 그 실력에 따라서 자기의 처소를 마련해서 어떤 사람은 존귀한 처소를, 어떤 사람은 천한 처소를 어떤 사람은 아주 고급 요리를 어떤 사람은 아주 박식을 그렇게 먹는 것 그거 전부가 다 처소입니다.
이래서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집이 있다 그 말은 하늘외 처소가 영원히 있다 그말입니다. 자기의 지위도 영원히 있고, 자기의 권세도 영원히 있고, 자기의 존귀도 영원히 있고. 자기의 부강도 영원히 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벗을 집들이요 그것은 영원히 입을 집들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기 위해서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밤낮 탄식하면서 지금 고대하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모든 처소 안에, 저 김 일성이가 입고 있는 것도 자기의 처소입니다. 김 일성이가 그렇게 독재를 가지고서 하고 있는 것도 자기의 처소라 말이오. 처소는 자기의 몸의 기능 그대로입니다. 그 능력대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것도 복잡합니다. 자기의 몸이 입고 있는 모든 사람의 지위도 수 많은 지위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위 하나밖에 없는 사람, 열 있는 사람, 백 있는 사람, 천 있는 사람, 또 그에게 권세도 하나 있는 사람 권세가 수많이 많은 종류를 가지고 있는 사람, 또 그의 돈 권세도 있고 또 기술 권세도 있고, 또 무력 권세도 있고, 자기의 인권을 다 옹호받은 인성 권세도 있고 뭐 별별 수많은 권세들이 있는데 그것보다 그 몸은, 그 안에 있는 몸은 더 복잡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몸이라면 한 몸 이렇게 생각하지마는서도 한 몸 안에는 수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지체들이 있어서 오늘 이십 세기의 의학들이 인체에 대해서 그들은 그 인체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의학들이요, 또 그 속에 마음을 생각하는 것들이 심리학자들이요, 그 마음이 그 생각하는 그 마음 이상의 것을 지금 생각해 볼라고 더듬어 찾는 것이 철학들이요 종교들입니다. 그런데, 이 몸은 복잡해서 거기에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다, 의사들이 발견한 대로 뭐 이거는 우리가 아는 것은 눈 코 이목구비가 있다 수족이 있다 또 안에 있는 무슨 내장이 있다 대략 그거는 알지마는서도 우리는 의사들 만치 속에 어떤 내장들이 있으며 어떤 기관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 몇몇이 연결을 가지고 있고 그거는 연결가진 것이 둘인가 셋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겉에 어떤 영향으로 표시가 되는가 하는 그것을 의사들 만치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의사들이 절대 그것을, 기관, 지체만도 다 안 것 아닙니다.
저희들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또 그것을 말해서 그것보다도 그 지체들 안에는 세포가 들어 있다 이래 가지고서 무슨 세포라, 나는 그거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의사에게 '자, 손가락 이 하나를 만일 세포로 말하면 얼마나 됩니까?' 이라니까 '아이구, 그 세포는 그 몇 억이 되는지 모릅니다.' 아 그렇츰 많아요. 손가락 요 하나 속에 세포로 말하면 몇억인지 그 수를 모른대요 내가 있다가서 '그 세포는 그러면 그것은 생명을 각각 가졌습니까 그 생명은 개별적으로 가지지 못했습니까?' 이라니까, 아 그 생명을 다 개별적으로 가졌대요. 개별적으로 가졌는데 몸이 죽으면 그게 다 죽지마는서도, 그 세포들도 그 세포의 생명이 뭐 서른 네 시간 되는 것도 있고 스물 네 시간 되는 것도 있고, 또 아주 짧은 것은 열 몇 시간 되는 것도 있답니다. 세포의 수명도 각각 달라요. 그래 가지고 '그러면, 그 세포가, 그러면은 세포가 늘 있는 그 세포가 아니고 그러면 세포가 딴 세포', '아니, 세포가 죽으면 고만 초상쳐 버립니다. 죽으면 초상쳐서 없어지고 또 새로 이제 세포 자손이 나고 나고 이래서 사람이 한 일 주일 동안이 지나가면은 일 주일 간이면 세포가 거의 다 바꾸어집니다.' 이렇게 말해. '세포가 바꾸어 집니다. 이래서, 먹는 음식으로도 바꾸어지고 이 공기로도 바꾸어지고 모든 걸로 이래 가지고 세포가 바꾸어집니다.' 그렇게 말 해. 그러나. 그것이 각각 생명을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생명은 한 생명이라. 그 사람이 만일 죽어 버리면 세포도 몸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원 생명이 숨이 딱 끊어지고 난 다음에도 세포가 열 시간 더 사는 것 있고 열 다섯 시간 더 사는 것 있지마는서도 결국은 그 사람의 생명이 떠났으면 그 세포가 죽는 것이라. 몸에. 한 몸이라 하지마는서도 몸 속에는 수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어서 역사합니다. 그러면, 몸도 한 몸뿐이지마는서도, 몸이 한 덩어리 뿐이지마는 그 안에는 수많은 기관들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눈을 고치는 그 안과 의사가 눈 그것만 알고. 눈 그것만 알면은 그 사람은 남의 눈을 버릴 사람이다. 그 눈 안과 의사가 유력한 의사는 무슨 의사냐 하면 이 눈이 어디 어디 관련을 가지고 있고, 연결을 가지고 있느냐, 이 눈이 힘을 어데서 얻으며 이 눈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어데서냐, 그 뭐 조화가 어데냐 하는 그걸 보면 눈 하나가 온 전신의 그 모든 기관과 다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눈과 아주 엉뚱스러운 딴 데다 침을 하나 꽂아 가지고서 그 눈을 치료하게 된다. 또 그 눈은 아주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엉뚱한데 자극을 받고 있고 혜택을 입고 있다.
그래서, 저는 연구를 그래 했습니다. 이 몸이란 이 몸도 어느 한 세포라도 그 세포가 제 행위를 바로 해서 자기 본분을 바로 한다고 하면 그 세포는 전신의 수많은 세포의 혜택을 다 입을 수 있다, 입을 수 있다 또 그 세포 하나가 제 본분을 다 한다고 하면 저희의 혜택을 전신의 수많은 세포들에게 입힐 수 있다, 난 그 성경을 보고서 연구해 가지고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틀림없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도 복잡하고, 또 육체 안에 마음이라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마음은 하나뿐 인줄로 이래 아는데,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음은 하나지마는서도 마음 안에 있는 그 분자는. 한 몸 안에 수많은 분자들이 있고 지체가 있는 것처럼 마음 안에는 더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왜? 왜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우리가 추론할 수가 있느냐 하면 이 마음이 맡은 직분이 더 광대하고 세밀하고 고상하고 존귀한 것을 이 마음이 맡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의 모형을 지금 가진 것이 인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은 이 몸과 달라. 몸은 마음의 모형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마음보다도 몸이 저급한 것이요, 협착한 것이요, 단순한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그것은 천한 것이요, 가치가 적은 것이요 능력도 적습니다. 능력도 사람은 이 육체의 힘이, 힘이 이것이 강한 줄 알지마는서도 이것보다도 사람의 능력은 마음의 힘이 더 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천하에 제일 힘센 역사라 할지라도 아주 그 마음의 힘을 가진 아주 조그만한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을 당장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여러 천만 명이라도 다스릴 수가 있는 그런 것이 그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저거가 능력 있는 줄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마는서도 사람이 잘못 살아 그렇지 잘 살아서이 육체는 쇠해집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하는 그 속 사람의 그 부분은 마음에서부터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살아서, 그 마음이 이제 영의 모형을 잘 나타내서 영과 연결이 잘 돼 가지고서 영의 것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정말로 영의 도구가 잘 되어 있는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그 마음은 차차 차차 길러 가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져 갈수록이 자꾸 자라가게 됩니다. 많아져 갈수록이 그 마음이, 마음의 기능이 자라져 가고 마음의 그 권세의 범위가 넓어져가고 자꾸 커져가고 이라기 때문에,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는 언젠가 제일 실력있는 때냐 하면 믿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이 그 사람의 그 마음은 제일 권세있는 때요 또 육도 권세있는 때입니다. 영도 권세있는 때입니다.
불신자는 자꾸 이것이 심신뿐이요 위에 생명에게 연결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이 돼 있지 안하고 그 연결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심신으로만 움직이니까 그 마음이 얻을 때가 없어. 마음이 얻을 원천이 없어.
마음의 보급선이 없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육과 같이 쇠해집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도 그 사람이 육으로만 살고 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육이 쇠해질 때에 정신도 쇠해지고 마음도 쇠해지고 모든 역사 하는 그 능력이 쇠해집니다. 그러나 영으로 산 사람은 그 사람이 세상 떠날 때 그때가 최고의 권위를 가진 때입니다.
예를 들면은,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예언했는데 그거는 예언이요 축복이요 정죄요 심판입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말한 것은 그것은 너는 이렇고 이러니까 너는 이런 결과를 심판을 받는다 하는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예언한 고대로 오늘까지도 그 부분의 자손은 그대로 계속되어 연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아주 라헬과 레아를 취할 때 그 때 청년으로서 기운이 펄펄하는, 아주 정력이 불같이 뛰어지는 그때보다 그가 얍복 강에 와 가지고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난 다음에는 그는 권위가 나아졌고, 그보다도 마지막에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애굽으로 내려 갈 때 그때가 나아졌고, 애굽에 내려가 가지고서 좋어서 장사 지낼 때에 지팡이를 의지해서 말을 하고 하는 그때가 그 야곱으로서는 제일 권위 있는 때입니다.
이러니까, 이 권위 사람이 목회도 그렇습니다. 목회도 제가 참으로 이렇게 영으로 살아서 살았으면 절대 정년 퇴직을 안 당합니다. 정년 퇴직을 안 당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네가 정년 퇴직을 당했으니, 하나님 앞에 맹세하기는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그 직책을 하면서 주의 일을 하다가 간다고 이랬는데 어떻게 너거 마음대로 나이가 몇 살이니까 이 사람은 목사 노릇 고만하자, 항상 목사 노릇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해 놓고 너거 마음대로 그래 변개를 하나? 성경에 어데 있노?' 성경에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만하고 간접으로 들었습니다. '와 그 사람이 그러냐?' 이래 말하니까 아이구 아무리 교회를 맡겨 준다 해도 이제는 힘이 없어서 못 한답니다.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못 합답니다. 저도 혹 겪어 보는데 참 설교할 것이 없어서, 설교할라 해도 설교할 것이 없어서 답답할 때는 그보다도 더 무거운 짐이 없고 고역이 없고 참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싶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말씀을 줘서 말씀을 줄 때는 몸이 약해도 뭐 문제가 없고 이렇게 하는데 말씀을 주시지 안해서 증거할 말씀이 없는 그때의 그 일은 뭐 세상의 어떤 고역보다도 더 큰 고역입니다. '이겁니까' 그 일을 계속 못할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나 영으로 살았으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저거 법대로 정년퇴직 해야 된다 해서 정년 퇴직을 했으면 그 사람은 어데 가서 있든지 가서 있는 곳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암만 정년 퇴직했지마는서도 사람들이 오는 사람 못 가르치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산골짝에 가 있으면은 사람들이 산골짝으로 모일 것이고 만당에 있으면 만당으로 모일 것이고 바다 가운데 있으면 바다 가운데로 모일 것이고, 또 아무리 목사들이 거부해서 마다 할지라도 교인들이 그 사람 청해서 자꾸 집회하자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매일매일 증거를 많이 해서 계속 집회 인도하는 것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새 늘 하는 말이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도 한몸 속에는 수많은 분자들이, 속에 수많은 기관들이 들어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몸보다도 더 복잡한 분자들이 들어 있고 기관들이 들어 있다. 또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영에게는 이 우리 마음으로서 상상도 못할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한한 자로서, 유한한 자로서 가질 수 있는 무한의 것이 들어 있다. 이러기 때문에, 유한되어 있는, 유한되어 있는 피조물인 그 영에게 무한이신 성령이 그 속에 있어 가지고서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이걸 성전이라고 말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그 영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 영의 존재는 단순한게 아니라 그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마는서도 하나님의 그 속성이라든지 하나님의 기능이라는 것은 그 수도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무한이라는 그 실상을 가지고 계시는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와 형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느냐? 물체도 가지고 있지 안하고 영체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영체, 물체, 그 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반드시 어떤 윤곽이 있어 가지고서 윤곽 속에 들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체라는 그 윤곽 속에도 들 수 없고 물체라는 윤곽 속에도 들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은 영체가 없고, 완전이기 때문에 무한이기 때문에 그의 형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런고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멀리 한다' 그렇게 한 마디 주님이 표시한 말씀은, 말로 주님 섬기는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왜?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귀로 볼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하나님 섬기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귀로 눈으로 볼 수 있지마는서도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누이요 사랑하는 신부 아내는 이 볼이 석류 한 조각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석류 한 조각으로 비유핫 그것이 뭐이냐? 기독자의 그 인격의 미 그 행동의 미, 모든 미가 겉으머리 말하는 그말은 한 마디인데 다 같이 목사가 설교를 하기는 했는데, 녹음을 해 보니까 꼭 같은 데 같은데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그 말 속에 그 마음은 수많은 마음이 작용해 가지고서 이 한 마디 말로 나온 것 있고. 속에 마음에는 하나도 없이 텅 비어 가지고서 마음은 지금 어만데 가 가지고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 생각하고 저것 생각하고,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저 형식으로 말로 예수 믿고 그저 주일이나 갔다 왔다, 하는 행동으로 믿지 그 속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함으로 밤낮 그거만 사모해 가지고 그것이 가득 찬 것이 입술로만 말한다 그거요.
그러기에, 그 껍데기 말이 나타났느냐? 말 속에 사람이 볼 수 없는 감추어 있는 그 마음의 작용은 심히 많다. 또 그 사람이 마음으로 어떤 마음을 품었는데 마음 속에 그 영의 수많은 작용이 있어 가지고 그 사람의 그 마음에 하나 가졌다. 그 영의 어떤 가진 거 그것은 그것이 그 속에 무한하신 성령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 나왔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누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영은 딴 데 증거 못 합니다. 영은 다른 사람에게 증거를 못 합니다. 영은 순전히 하나님만 쓸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자기의 마음에게만 영은 증거합니다.
마음에게만 증거하고 또 자기 마음도 다른 데는 증거 못 합니다. 마음도 자기의 몸에만 증거합니다. 자기 마음 먹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도 그 몸으로 그 사람이 태도하는 것, 얼굴 빛, 모든 친부 이런 것 보고 서 '아 저 사람이 날 어느 정도 지금 미워하는가 어느 정도 반가워하는가' 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그 말이나, 말을 안 해도 그 피부에 나타난 걸 봐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 죽고 못 산다, 아주 생명을 애끼지 안하고 저렇게 나를 좋아한다 하는 것도 피부에 나온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기 몸에게 이렇게 증거해야 몸이 이 겉으머리 육덩이가 증거 하지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 증거를 못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은 하나님만이 쓸 수 있고 영은 자기의 그 마음에만 증거할 수 있고, 뭣 증거하는가? 하나님의 형상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요. 영의 형상은 이떻다, 영의 형상을 영에게 형상된 그대로 마음이 받고 마음이 가진 그 하나님의 형상 고대로 인간에계 전하고 하는데 영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순전히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마음 고기덩어리 이것만이 날뛰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이 날뛰고 있는 죽어 있는 영이요 마음과 고기덩어리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학문은 총칭해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그것이 나타났고 주관적으로 한 것이 나타났지 하늘에서 오는 줄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을 인간을 자기 마음을 초월한 영, 영을 알 수가 없고 영은 죽었기 때문에 영 위에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받지를 못합니다. 기독교는 위에서 내려 오는 도요, 인간의 도는, 인간의 말은 밑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과학을 초월한 것이 신앙이라 그런 술어는 아주 안된 술어니까 그런 술어는 아주 버려야 됩니다. 과학이라 하는 것이나 심리학이나 이런 것은 땅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뿌럭지가 땅에 있어서 암만 커 올라가 봤자 하늘에까지 못 올라갑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기독자에게서는 인제 그것이 예수 믿을 줄도 모르고 중생 됐습니다. 중생돼도 중생된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지고 하늘의 뿌럭지가 받아 가지고서 그것이 중생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밑에서 올라 오는 것 위에 오는 것 이것이 암만 그래도 밑에서 올라가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암만 높아도 그거는 아닙니다. 그걸 가리켜서 666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행동이 말과 이 행동하는 요것만 하고 마음이 없는 그런 행동을 하나님은 보시기 때문에 가증스럽게 봅니다. 마음없는 행동을 가증스럽게 봅니다.
마음없는 말을 가증스럽게 봅니다. 마음에 있지마는서도 그 마음이 마음이 주체가 돼 가지고서. 마음이 주장이 돼 가지고서. 마음 그놈이 왕이 돼 가지고서. 마음이 능동이 돼 가지고서 이제 나오는 그것도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원수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게 뭐이냐? 자기 마음, 자율의 우상이요 주관이 우상입니다.
이제 몸이 나온 것이 마음에서 나왔는데 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영에서 나왔고 영에서 나온 것이 그게 막바로 뭐이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영과 둘이 합작해 가지고서 증거한다' 하는 그것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가서 4장 12절에 보면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너는 어여쁘다 너는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요 덮은 우물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잠근 동산이라 말은 그 마음이나, 그 인격 속에 주님만이 출입하지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딱 잠가 놓고 아무가 꺼내 달라고 해도, 돈이 꺼내 달라 해도 안 꺼내 줍니다.
권세가 꺼내 달라 해도 안 꺼내 줍니다. 죽인다고 협박이 꺼내 달라 해도 안 꺼내 줍니다. 다만 주님만이, 주님이 오시면 주님만이 출입하실 수 있도록 잠근 동산이라. 그게 주님의 골방이라. 그것이 자기의 골방이라. '들어갈찌어다. 문들을 열고 밀실로 들어가라.' 밀실로 들어가라는 밀실에는 주님만이 계시는 골방이라 그렇게 말했는데, 골방이라, 밀실이라, 의로운 나라라 그렇게 말했는데 밀실이라 말은 자기 마음 안에는 주님만이 출입하실 수 있고, 주님만이 와서 계실 수 있고, 주님의 성전이니까 주님만 좌정하고 계시지 돈이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고, 권세가 차지해 가지고 있고, 애인이 차지해 차지고 있고. 가정이 차지하고 어떤 무엇이 그 내 마음을 차지하지 안하고 주님만이 꼭 출입하고 주님만이 계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것이 밀실입니다. 네 밀실로 들어가라 네 안에는 이런 방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이 있기 때문에 밀실로 들어가라 들어가서 문들을 닫아라 문들을 닫고, 잠깐 동안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봉한 샘이라, 샘은 성령의 감화를 말하는 것인데 그 속에는 성령의 감화가 가득히 충만히 들어 있는데 그 감화는 아무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고, 그 성령의 감화를 어떻게 사람이 다 발표합니까? 못 합니다. 성령의 감화 암만 있어도 그걸 발표를 인간의 방언으로는 발표할 수 없어. 인간의 방언이라는 이거는 참 간단하게 돼 가지고 이건 둔한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으로 발표 못 하는 것을 사람이 아는 것이 수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들이 기록한 것은 찍해야 문서로 기록한 그것은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있는 것을 문서로 기록했기 때문에 문서로 기록했지마는 속에 무한한 그 영감은 기록하지 못하니까, 영감이 알맹이인데 알맹이는 기록하지 못하고, 껍데기 송장, 시체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체는 그 영감이 없으니까 그 아는 사람은 교만해. 칼빈 주의를 아는 사람은 그 만침 교만하고 또 무슨, 무슨 누구 누구 사상을 아는 그 사람은 그만침 지식이 돼 있기 때문에 교만하고.
그 속에 생명인 성신의 감화가 있으면 그 사람도 되지마는서도 그 시체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그런고로, 봉한 샘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발표할래야 발표할 수 가 없는 것. 발표할 수가 없는데 발표하는, 다만 발표할 수 있는 그 언어를 통해서. 발표할 수 있는 행동을 통해서, 그 언어와 행동을 통해 가지고서 성신의 감동과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전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바울의 간절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기를 원하고 성신에 감화에 있기를 원한다' 그게 전달되기를 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도 내가 입에서 녹음에 녹음할수 있는 그 정도로서 다가 아니라 그 말을 전하는 거기에 성령이 내 말을 통해서 내 말을 성령에 써 가지고서, 진리가 써 가지고 그 말이 나가야 돼 지겠고, 또 들을 때에도 듣는 그 사람에게 주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가 감화해서 그 능력을 힘입어서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없으면 이거 전부 사망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꾸 외식자가 생겨지니까 자꾸 교만해진다 그말이오. 자꾸 교만해져요.
교만해지니까 제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훼방하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제가 판정하지 이러니까 기막히는 일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봉한 샘이요 덮은 우물이라' 덮은 우물은 휘떡 열면 먹을 수 있고, 떠 먹을 수 있고 덮을 수 있다.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발표할 수 있는 영감의 진리가 그 속에 가득히 담겼다.
이러니까 때가 되니까 휘떡 여니까, 뚜껑만 여니까 그 안에 처렁 처렁하다, 이것이 다 뭘 말하는 것이냐? 기독자의 인간이 볼 수 있는 말과 행위 그것을 말함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그 마음의 역사와 영의 역사의 내부를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 이 베드로에게 영감된 영감이 '주님' 하면 하나 하면 될 터인데 대단히 곶감 겹말해서, 아이들 말로 곶감 겹말,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곶감 겹말했다고, 곶감이면 곶감이지 또 뭐 겹이라 자꾸 이래 자꾸 한 말을 중복적으로 한다 그말이오. 중복적으로 한다고 하지마는서도 그 베드로는 말할 때에 그 속에 가득히 찼으니까 그 자꾸 속에 있는 대로 나오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 종이면 종이지 또 '사도' 또 베드로면 베드로지 '시몬'. 또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또 우리 이게, 자꾸 속에 있으니까 이게 발표된다 말이오. '우리'는 뭐이냐? 저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주님의 피로 구속한 주님도 한 분이요 보혈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 한 몸이라. 이라니까, 이제 항상, 기독자 전부가 합해서 우리가 되고 우리가 되고 우리가 결말에는 내가 된다. 모든 성도가 합해서 우리가 되고, 복수(復數)의 우리가 되고, 우리가 내가 된다. 이래서 내가 된 이것을 생각하니까 '우리' 또 '하나님'. 또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또 '하나님과' 또 '구주.' 또 구주는 전 책임을 짊어 지신 하나님, 십자가에 못박히신 전 책임지신 하나님, 구주는 책임진, 도성인신하신 신인양성 일위도 구주요 성령도 구주요 또 그리스도도 구주십니다. 구주. 구주는 구원하는 주이신데, 이 '구주' 이라고 난 다음에 고 다음에 또 해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또 의는 또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대속으로 이루신, 이 의는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이라 그말이오.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된 것이 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이 십자가의 그 대속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의라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옳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 그게 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완성된 것을 우리가 받는 것뿐이오. 우리가 새로 뭐 만드는게 아니고.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동일하게 꼭같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이 보배로운 믿음이라느는 것도. 지금 시간 없지마는서도 보배로운 믿음이란 이거 왜 보배라고 말하느냐? 하나님은 무한 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시요. 그는 모든 대주재십니다. 그는 자체도 완전하고 역사도 완전하고 만들어 가지고 가지고 계시는 소유도 완전하고 앞으로 미래도 완전하고 그분은 완전이라 무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이라 무한이라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내것을 삼을 수 있는, 내것을 삼을 수 있는, 내것을 삼을 수 있다 말은 내 개체에 사욕을, 사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무한하신 그 분이 나를 통해서 그 무한 하심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러기에, 네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 돼서 하나님의 것이 된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은 다 너희 것이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이 대로의 것인데 이것이 전부 믿음 하나로 됩니다. 믿음. 믿음 하나 가지고 되는 것인데, 믿음이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받는다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도 되고, 닮아간다는 말도 믿음이란 말도 되고, 또 거기에 딿는다 순종이란 것도 믿음이란 말도 되고 어쨌든지 믿음이라는 것은 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함과 우리의 극히 빈약함과 이것이 결합이 되어서 이 무한과 무한이 우리에 연결이 돼 가지고, 내가 무한에 연결 돼 가지고 내가 무한이 되어진다, 영원이 되어진다 하는 것이오.
아무 것도 없는 거지가 모든 것에 충만을 가진 그 충만이 내것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믿음 하나 가지고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믿음 하나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다' 할 때에 '예 그렇습니까' 하는 요게 믿음입니다. 또 '이거 받아라' 할 때에 '예' 하며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알고 살아라.' '예, 알고 삽니다.' '전능자의 품에 네가 안긴 것을 알아'라' '예 압니다.' 아는 것이 뭐냐? 입으로 하는게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을 당할 때에 전능자에 품에 안겨 있고 없는 것이 자기 마음으로 믿는지,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는 그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고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 세상 전 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것을 네가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네가 너를 시험해라. 이 현실에서 보면 받고 못 받는 것이 표가 나지 않느냐? 또 너는 입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도 볼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세상 살이 그는 하나님이 무한하신 것을 주기 위하심이요 또 우리를 알기 위하심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알기 위함이요, 전부 한 말로 말하면 이 세상 살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그 충만을 다 받게 하는 것뿐이라. 이 두가지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것인데 자기 마음은 솔박 다 딴 데 들이고 이까짓 거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돈 그것 다 하나님의 것이요 다 주님의 것입니다. 누구 것이겠습니까? 돈을 그에게 주신 이가 하나님이요 하나님께 먼저 드려 가지고 받을 자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주면서, 먼저 주니까 받아 가지고 드리는 것은 뭣 때문에 주느냐? 주고 받는 것은 주고 받는 가운데에서 당신을 알리려는 것이요 당신의 것을 믿으라는 것이요 당신의 것을 받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 신성인 당신과 인성인 우리들이 이렇게 교제해서 결합되게 하기 위해서 돈으로 결합도 시키고 지위로도 권세로도 시키고 환난으로도 결합을 시키고 이렇게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는 작용이지 다른게 아니라 그거요.
이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외식합니다. 이 외식하는 신자는 저만 속습니다.
자기가 말, 행동, 이 몸뚱이 안에 수많은 마음이 있으니 하나님은 몸보다도 마음을 더 요구하시고 또 마음보다 그 영을 요구하시고 이런데 그러면, 영뿐으로서 거기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에게, 영이 마음에게, 마음이 몸에게, 몸이 이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이렇게 나타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말단에서 나타나는, 안에서 충만한 것이 말단에서 나타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안이 없는 말단에 나타나기만 원하는 이런 외식자를 하나님께서 화 있다 말씀했다 말이오. '너희들이 화 있을찌어다' 마태복음 23장에 일곱 번이나 화를 거듭 말씀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시간있는 대로 계속하겠습니다.
어쩌든지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모두 다하라 이랬으니까 이 마음이 중요하니 마음을 당신에게 주지 않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십니다. 사람도 그렇지 안 해요? 동상이몽이라고, 한 자리에 누웠지마는, 누워서 뭐 남편이라고 좋아하고 이래쌓지마는서도 벌써 마음이 따로 돼 가지고 있고, 겉으머리는 그렇고 속에 마음은 따로 있으면 그 자리 있으면서 마음은 딴 데 있습니다. 딴 데 있소. 이러면 그 뭐이냐? 결국 나눠지고 맙니다.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둔해서 잘 모르지만 차차 차차 알아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그 사람이 뭐 친근하게 한다 해도 원수도 알고, 아주 성을 내서 책망을 한다 해도 사랑도 알고 압니다. 예민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 하지 영물이기 때문에 짐작은 한다 이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한 말로 말하면 요새 늘 말하는 것이 외식하지 맙시다.
외식하면 안 됩니다. 외식은 저 죽는 것이고 저 속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그 외식에게 손해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외식에 손해를 보면 제 것 되어 있는 사람, 요만침 제것 되어 있는 사람은 고만침 속고, 이만침 제 것 되어 있는 사람은 고만침 속고. 요만침 가까운 사람은, 제일 가까운 사람은 제일 많이 속이고 아주 먼 사람은 속이지 안하고, 전부 자기 죽이고 자기 손해가는 것이지 딴것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식 가지고 날뛰지 말고, 참 우리는 우리 마음에는 예수로 가득 차야 되겠습니다. '예수'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사람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람으로 부활하신 여기에까지의 모든 은혜를 생각하면서 '예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직책을 주신 것인데 '그리스도' 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대제사장 노릇한 것같이 우리를 제사장 만드시는, 제사장 만드는 이제사장 만들어지는 것, 자기가 제사장 만들어지는 것이 실력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제사장이 만들어지는 것, 선지자가 만들어지는 것, 왕이 만들어지는 것. 이제 이것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후란시스가 또 내가, 여러분들 지금 또 말합니다. 제자들로 더불어 한 달 동안 기도하러 산에 갔는데 '한 끼만 밥을 해 가지고 오라. 그라고 나 한테 오지 말고 밥만 갖다 줘라. 나는 좀 기도좀 해야 되겠다. 너거도 기도 해라' 했는데 제자들이 무슨 기도하는가 엿들으러, 한 달 동안을 엿들으니까 다른 기도가 아무것도 없어. 어떨 때 보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 말 한 마디 해 놓고 난 다음에는 생각하다가 눈물 흘리고 생각하다가 눈물 흘리고 또 그라며 그걸 생각하기를 어떨 때는 그래 놓고서 또 하루도 지내고, 또 일주야도 지내고 내나 보니까 '예수님은 누굽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굽니까? 나는 누굽니까?' 그 몇 마디 묻고 말더래요. 우리는 마음 속에 '예수님' 하면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 어떻게 크신 분이 어떤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서 나에게 오셔 가지고서 어떤 일 했느냐? 내가 그분에게 부담시키기를 어떤 어떤 행동으로 어떻게 무엇을 부담을 시켜서 그분에게 무엇을 부담시켰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얻어진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리스도를 생각으로 가득 찼고, 이러니까 나는 당신의 종이라는 그 종이라는 그 마음이 가득 찼고, 또 나는 그에게 사신이라는 마음이 가득 찼고 이게 자꾸 가득 찼고. 나는 또 시몬이라는 것이 가득 찼고, 나는 '시몬아 시몬아' 이제 시몬은 옛날 예수님을 믿지 안할 때의 옛날 옛사람 이름이라. 옛사람이 나타나기 때문에 '시몬아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 말한 것은 네가 지금은 날 사랑한다 하지마는 시몬이 될 때에는 날 저버릴까 하는 것을 다지는 말씀이라. 이러니까, 내가 옛사람으로 주님에게 부담시킨 것. 또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믿은 후에 사도된 것아니까 주님의 구속을 입어서 자기의 사명, 옛사람을 생각해서 옛사람은 이랬는데 구속을, 입은 후에 내가 이래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이 속에 가득 찼으니까 암만 찔러 봐야 딴게 나올게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종, 사도, 시몬, 베드로 그것 나오고 자꾸 거기 가는 것밖에는 나올 게 없다 말이오. 이것이 이렇게 되도록 우리가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스웨덴 볽(Emanue1 Swedenb○rg)라는 사람이 그 교리적으로는 건전치 못하지마는서도 그분이 말하기를 하늘에 가 보니까 입신 해서 가 보니까 '명상 많이 한 사람이 제일 봉사도 많이 했고 일도 많이 했더라.' 그 명상이 가만히 중 모양으로 그렇게 명상하는게 아니고 자꾸 예수 그리스도만 자꾸 명상한다 말이오. 어떤 아이가 말하기를. 조그만한 아이가 불을 꺼 놓고 뭣하노 물으니까 좀 명상 좀. 한다고. 자꾸 사람만 없으면 불 꺼 놓고 누워서 이래 자꾸 생각한대요. 뭘 명상하는지. 그래 내가 그 아이에게 대해서 내가 언제 전화를 하면서 네가 명상을 잘 한다는데 명상을 잘못하면 불교인 모양으로 마귀된다 그러니까 명상하는 것을 가르쳐 줄 테니까 언제 나한테 한번 오라 내가 그렇게 한번 말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하되 어떤 사람은 가만히 산에 가서 금식기도하러 간다 해 가지고서 자기 욕심, 자기 욕심 하나 있는 그놈을, 다른 때 분주하니까 그 욕심 생각을 자꾸 생각할 수 없는데 고요히 금식기도하면서 그 욕심을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니까, 나오면 그 욕심의 사람, 악한 사람 고집의 사람, 독한 사람, 아주 주관 사람 요런 사람만 돼 가지고 나오는 그런 자도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자꾸 마음 속에 생각해서 우리 속에는 예수가 가득 차야 되고 그리스도가 가득 차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종이라는 것이 가득 차야 되겠고, 주의 사자라는 것이 가득 차야 되겠고 우리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것이 가득 차야 되고, 이 본분이, 내가 어떻던 자이며, 내가 어떻던 자인데 그분이, 내가 과거에 어떻던 자에게 그분이 어떤 희생을 해 가지고 이제 어떤 자를 나를 만들어 놨느냐? 이러니까, 나는 어떤 자이니 내가 살 것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이것을 마음속에 가득히 채워서 이대로 살라고 애를 써도 자꾸 외식이 돼 나가는데 이제 이거는 안하고 말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설교하는 자도 말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주먹만 때리면 다 되는 줄 알고 이러니까, 외식하는 자는 화 받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건 다 자기 속이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연습해서, 사람도 몸을 대우하는 것보다 마음을 더 대우해야 되겠고, 마음을 더 대우하는 것보다 영을 대우해야 되겠고 영을 대우하는 것보다도 그속에 내주해 계시는 하나님을 더 대우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마땅한 지혜로운 일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이 기회에, 우리 기도회를 시작한 이 기회에 기도해서 후회없게 합시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면 기쁘고 즐거움으로 환난을 이길 수 있고 그 환난으로 큰 영광과 면류관을 장만할 수 있고, 평안을 가질 수 있고 기도 안 하는 자는 그 환난에게 한없는. 기도한 것 이상의 고통을 당 할 것이고 또 그 환난을 인해서 아주 천해집니다. 기다렸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신랑이 옴으로 천해지지 안했습니까?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옴으로 존귀해지지 안했습니까? 그저 마음을 강퍅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하든지 아이들이 말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속히 동하십시오. 속히 움직여서 따라가야 됩니다. 강퍅하게 '뭐 네가 말하는데, 아이가 말하는 데.' 아이가 말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복종해야 되지, 하나님이 아이는 통해서 말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강퍅과 교만을 버려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