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1:59
마음 깊이 살아라
본문 : 마태복음 5장 1절-4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잘못하면 껍데기 외식으로 살기가 쉽습니다. 외식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이 외식으로 사는 것인가 하면. 그 사실이야 어찌 됐든지 사람 눈과 귀와 입을 상대해 가지고 사는 사람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속이야 어찌 됐든지 내게 대한 것을. 내용이야 어찌 됐든지 다른 사람이 보지 안했으면 됐다, 아무리 악한 일이 있어도 보지 안했으면 됐다, 그만하면 안심이다, 또 내게 대한 것을 듣지 못했으면 됐다 그만하면 안심이다, 또 혹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말만 안 하면 별 문제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주 껍데기로 살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듣든지 못 들었든지. 보았든지 못 보았든지, 말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 속에 사실이 있습니다. 그 속에 사실이 있는데 사실에서 이것을 수정하려고 생각지 아니하고 그저 남의 눈가림으로, 입막음으로 귀가림으로 이런 세계에서 '이만하면 된다' 하고 사는 그런 외식자가 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내가 사람의 눈을 피하고 귀를 피하고 입을 피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실은 사실대로 있습니다. '사실이야 어찌 됐든지 이라면 된다' 이렇게 사는 그런 사람이 되면 그 사람에게는 안심하고 산다는 것이 그것이 마치 끓는 물 옆에 어린 아이가 돌아다니는 거와 같습니다. 언제 그 뜨거운 물에 빠져 가지고 그 아이는 상할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언제 자기에게 갑자기 큰 화가 들이 닥칠란지 그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거기서 살아서는 안 되겠고. 다른 사람의 아무리 눈을 피했고 귀를 피했고 입을 가루고 피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이 있으니 그 사실을 우리가 거머쥐고 그 사실에 잘못됨이 없도록 살라고 그렇게. 뭐 다른 사람이야 보든지 안 보든지 그 사실이 잘못됨이 없도록 하려고, 눈가림으로 살지 말고 자기의 생활을 깊숙이 사실에서 사는 사람이 돼야 되겠습니다. '암만 다른 사람은 몰라서 나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는 대로의 사실이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날 몰라서 입을 닫고 있을지라도 사실이 있지 않느냐?' 사실에서 우리가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사실에서 살면 그만하면 족한 줄로 그래 여길 것이 아니라. '내가 사실은 뭐 사실이다. 사실 있는 거는 있고 없는 거는 없고. 또 내가 그런 행동 한 거는 하고 안 한 거는 안 했고. 또 그 일은 이런 무슨 이 세상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그것이 합법적이고 또 그 일들이 일반 세상에서 다 하고 있는 일들이 아니냐?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나도 그 한 일이 그것이 뭐 누가 봐도 그걸 나쁘다고, 잘못됐다고 정죄할 만한 그런 일은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자기가 세상 일반 법적으로, 일반 사회적으로 일반 그 모든 여론적으로 그런 데에 정죄받지 안할 만한 그런 일이라면 되지 안했느냐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안심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신앙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에 아무래도 그것이 일은 다 그렇게 되어지고 있지만 양심상 거리끼는 그런 일이 속에 있습니다. '일은 됐지만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그 일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양심으로 생각해 보면, 물론 다 일반 국법에서 뭐 다 걸릴 것 없고 용인되는 일이고 또 일반 모든 경우에서, 경우에, 이면에 걸릴 것 없고 이목에 걸릴 것 없고 이렇게 된다 할지라도 실은 자기 양심상 생각해 볼 때에 그 일이 아무래도 거짓부리가 있고 그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게 진실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겉으머리 일은 아무리 밋밋하게 잘 됐다 하고 잘돼 나가고 그렇다 할지라도 속에 양심에 불쾌해서 그것을 부득이, '눈에 보이는 일이 좀 지장이 있고 그게 잘못돼도 아무래도 내가 양심에 이거 자책을 받으니 못 견디겠다.
양심에 가책을 받으니까 다른 사람이 뭐 나를 보고 말하지 안하고 알지 못하지만 양심에 가책을 받으니까 마음이 도무지 불쾌해서 못 견디겠고 마음이 '활발하지를 못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차차차차 그 모든 일에 손해를 봐도, 또 그 일이. 오히려 자기 양심대로의 바로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껍데기만 보지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대로 하는 그 일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 먹을 일이 되고 이해 못 할 그런 일이 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남이야 뭐 이렇게 말하든지 저렇게 말하든지 아무래도 내가 양심 편한 대로해야 되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양심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으로 우리가 성장돼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내가 뭐이 일반 이면, 이목, 이목에도, 사람의 또 그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또 이런 사회법이나 이 법적의 무슨 대한민국의 법적으로 이렇게 따져도 아무런 뭐 걸릴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한다고 해 가지고 거기서 안심을 하고 마음에 '깨운하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그런 평강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신앙 양심의 기독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신앙 양심에 그것이 가책이 없어야 되지 그렇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하는 그 사람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게 뭐 세상법에서는 이걸 정죄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의례히 그래 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것이 내가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경대로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이것은 성경대로 되지 못했다' 하는 그런 께끄름한 마음을 가지는 그것이 신앙 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신앙 양심으로 모든 것을 다 고쳐서 수정해서 신앙 양심에 가책 없이 삽니다. 신앙 양심에 가책할 것이 없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는 이렇게 이만하면 됐다. 뭐 이만하면 내 양심에 가책될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살면, '이제 이만하면 됐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신앙 양심 대로는, 양심에 거리끼거나 그럴 거는 없지만 무엇인가 내가 도무지 이성 판단으로 이성으로 가지고 이거는 잘못됐다 이거는 뭐 삐뚤어졌다 이렇게 내가 아무리 생각할라 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것도 없고 또 내 양심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봐도 아무런 뭐 그런 것이 없기는 없는데 어짠지 마음에 좀 께끄름하다.
이거 왜 께끄름하냐? 왜 이렇게 그만 마음이 활발하지를 못하고 마음이 쾌활하지를 못하고 마음에 힘 이 나지 못하고 이렇게 좀 무엇인가 내게 좀 기분이 죽어지고 내 속에 까랑까랑하는 정기가 이것이 가리워지고 이렇게 좀 어두워지고 텁텁해지는가? 그러니까 그 면을 보고 사는 사람은 그것이라야 그래도 좀 안심하지 그게 아니면 도무지 마음에 견디지를 못하는 그 사람이 진리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진리대로 살아서. 자기가, 성경 말씀이 보증을 해 줍니다.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아, 이 일은 이렇지 않느냐? 성경 말씀에, 성경에 이렇게 말하지 안했느냐' 성구를 가지고 보증을 할 때에 그때에 '아, 성경 말씀대로 됐으니까 됐다. 뭐 내가 어떻게 심판 앞에 간다 하더란대도 이 성경 말씀만 가지고, 성경에 이렇게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이대로 나는 했습니다.' 이제 그 마음이 좀 보면 무슨 허전한 그 공허감을 가지는 사람이. 공허 속에 드는, 빌 공(空)자 빌 허(虛)자. 공허감에 든 사람이, 개가 주인을 잃어 놓으면, 개가 저 객지에 나가 가지고 개가 주인을 잃어 놓으면 그 개가 그만 꼬리가 축 처집니다. 그거 뭐이냐 하면 공허감이, 허전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 사람도 이렇게 자기가 살던 그 사회에 서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만 사람이 공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들이 사십 세까지는 수절을 잘하고 삽니다. 뭐 그 때까지는 자기의 자존심 가지고 살 수 있고 자기의 젊은 혈육의 힘을 가지고 사십 세까지는 과부가 잘 수절하고 삽니다. 그러나 사십 세로부터 벌써 오십 오 세까지 한 십 오 년 동안. 십 오 년간이라는 그 기간은, 그만 그 남편이 있다 없으니까 텅 빈 것 같은 그런 공허감이 생겨지게 됩니다. 공허감이 생겨지니까 그때에 사람들이 실수를 해 가지고 사십 세 넘어가고 난 다음에 다시 재혼하는 사람, 처음에 자기가 혼자 됐을 때나 또 그리 안하면 결혼하지 안하고 미혼 남녀로 이렇게, 남자든지 여자든지 살던 사람들이 사십 세 될 때까지는 잘 살지만 사십 세가 척 지나가고 나면 남자도 어짠지 좀 허전한 기가 생기고 여자도 허전한 기가 생겨 가지고 그저 독신된 사람이 재혼하는 사람도 있고 또 미혼 남녀로 살던 사람이 다시 혼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의 누님은 천주교에 가 가지고 수녀노릇을 했는데.
수녀로 지내다가 쉰 두 살인가, 쉰 두 살인가 쉰 다섯 살인가 내가 똑똑히 나이를 모르겠는데 어쨌든지 오십 몇 살 먹어서 그때 다시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처녀로 있다가서 시집을 갔습니다. 그거 다 그런 거 모두 공허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아무리 자기가 이 세상에서 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했고 입을 피했고 귀를 피했다 해도 사실이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되지를 안하는 그 사람이 진실로 들어가는 사람이요, 사실에서야 이 사실을 뭐이 세상 사회서도 다 인정할 수 있는 일이요 또 법으로도 다 인정할 수 있는 일이 이 또 이면 경위에도 다 이렇게 다 일반 사람들이 다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지마는서도 이거 가지고는 어짠지 께끄름하고 허전해서. 공허해 텅 빈 거와 같이 허전해서 견디지를 못하고 이라다가 하나님의 성구를 찾아 가지고 '아. 이 일은 이 성구대로 됐다, 이 성경이 뒷받침이 돼 있다' 성경의 뒷받침을 찾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마음에 허전한 기를. 그 공허감이 없어지고, '아, 성구가 요게 똑똑히 명문되어서 요렇게 하고 있다.' 자기가 명문되어 있지 안하면 그 성경을 해석을 해 가지고라도. '아 보면 이 해석은 반드시 이 해석이다.
이러니까,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일은 성경이 뒷받침이 돼 있다. 성경적으로 돼 있다 이래 가지고 그 공허감을 벗어나서 안심을 가지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그것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성경의 뒷받침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이만하면 됐다.' 성경이 뒷받침이 됐다 그말은 뭐이냐 하면 신앙 양심으로 산다 말입니다. 신앙 양심은 어떤 게 신앙 양심이냐 하면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언행 심사의 행동을 할 때에 '이것이 성경대로 됐다' 하는 그때에 안심을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이라 그말입니다.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성경 말씀의 이 지식, 성경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서 '성경 지식대로 요거는 바로 옳게 됐다' 하는. 양심이라 하는 거는 옳게 바르게 할라 하는 게 양심인데, 성경 지식. 무슨 불교 지식이나 유교 지식이나 일 반 사회 지식이나 그런 지식이 아니고 성경 지식대로 요거는 됐다 해서 성경 지식으로 바로 됐다는 그 생각을 가지고 안심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 양심으로 사나, 신앙 양심으로 살고 있지만 그 마음에 속에 똑똑히 쾌활한 마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3절에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다른 사람이 나를, 내 하는 일을 잘됐다 못됐다, 물론 못됐다 하는 일은 그거는 틀리면 고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 잘했다'나 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찬성을 하고 칭찬을 하고 또 바로 직계에 내 밑에 따라다니는 너희들이 나 하는 일을 '참 그거는 잘 됐습니다. 바로 됐습니다. 옳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는 그런 것을 내가 매우 작은 일로 안다. 사람들이 나가는 걸음을 인정한다고 그 인정을 아무런 그것이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지를 않는다. 또 너희들이 인정하는 그 인정을 내가 힘있다고 나는 그렇게도 생각지 않는다. 암만 사람들이 나 하는 거를 '야 칭찬할 만하다' 이래 가지고 뭐 노벨상을 받고 이래도, 신앙의 사람이 노벨상을 받고 한다 할지라도 노벨상 이거 가지고 안심이 안 되고 자기와 같이 동류 있는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자기가 직접 관련있는.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다 '옳다' 이렇게 인정을 한다 해도.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다른 사람들이 옳다 인정하고 바로 자기를 딿는 사람이 옳다 인정을 해서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이거 가지고 안심되지 않는다. 이것을 내가 매우 작은 일로 여긴다. 아주 그것은 참 심히 빈약한 일로 여긴다. 그 거 가지고 뭐 '이만하면 됐다' 그렇게 생각지를 않는다. 아주 빈약한 일로 여긴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내 마음에 내가 '아.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됐다' 그렇게 내가 나를 판단해서 내 판단을 인정해서 이만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런 것도 내가 받지 않는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그 판단 그까짓 거는 다 너무 깜깜한 그믐밤과 같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믐밤에 뭐 별이 있다 할지라도 별빛 가지고 뭐 되느냐? 이러기 때문에,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내가 나를 암만 살펴보고, 다른 사람은 내 비밀을 모르지만 나는 내 비밀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도 나를 더 많이 잘 보는 그런 내 양심 가지고 나를 비판해 가지고 내게 아무 책망할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그렇게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고 내가 아무리 성경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 잘못된 게 없고 신앙 양심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 잘못된 게 없다 할 지라도 '이만하면 의롭다, 됐다' 도무지 그 마음이 돼지지 않는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거 뭐 성경이 말했으니까 되지 않겠느냐? 또 자기 양심 가지고 아무리 또 비판하고 판단해 봐도 뭐 잘못되고, 그거야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느냐! 뭐 그거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거 필연성이다. 또 그거는 옳게 바르게 했다.' 이래서 자기 양심에 자책할 아무것도 찾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이만하면 됐다, '이를 인하여' '이를 인하여' 이만하면 됐다.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이로 인해서 내가 이만하면 됐다 의롭다, 이는 참 깨끗하다 하는 이런 마음을 도무지 내가 가지지를 못 하노니, 왜 그러냐?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 판단하지 마지막으로는 최종에 주님의 판단에 가기는 가는데. 주님 판단에 가기는 가는데, 주님 앞에 검사를 맡기는 맡아야 되겠는데. 주님 앞에 이 모든 것이 거기서 옳으냐 그르냐 이 모든 판단이 최종 판단이 거기서 판단이 날 것이기 때문에 뭐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또 나와 직접 관련된 가까운. 가깝게 접하는 사람들의 판단이나 또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나 그런 것 가지고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를 않는다. 왜? '나를 판단하실 이는'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나를 판단하실 이는'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라.
'그러므로 내가 때가 이르기 전에' '때가 이르기 전에' 내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전에, 심판자리에 갈 때까지 말입니다. 심판 자리에 갈 때까지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주님을 만날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아무것도 '이만하면 됐다, 이제 이거는 끝장났다. 이거는 판단됐다. 이거는 안심됐다. 이만하면 다 됐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 외나 큰 심판이 남아 있는데 네가 그 판단 자리에 설 때까지라도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서, 네가 마음 깊이 생각해서, 심령이 가난하다 그 말은, 심령은 제가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단번에 들어서 잘 모르는지 몰라도, 마음, 심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 양심 밑에 든 마음이 있으니 양심을 파고 들어가서 양심에서 자꾸 마음 깊이 생각하면 양심을, 양심의 꺼풀을 뚫고 들어갑니다. 양심의 꺼풀을 뚫고 들어가면 들어간 마음을 가리켜서 영혼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혼이라. 영혼 그게 내나 육체에 속한 것인데. 영혼 영혼에서 또, 영혼도 마음인데. 영혼이라는 마음 속에 깊이 들어가면 그 속에 무슨 마음이 있느냐? 심령, 심령, 마음이 영에게 감동됐다, 심령. 심령의 마음이 있으니 심령의 마음에 파고 들어가서 심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령으로 사는 사람. 양심으로 사는 사람보다는 영혼으로 사는 사람이 그 사람이 더 진실하고 영혼으로 사는 사람보다는 심령으로 사는 사람이 더 진실하니, 심령으로 산다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사는 사람인데, 심령으로 사는 그것도 재미가 없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되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주관해서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자유를 박탈돼서, 내 욕심도 완전히 박탈을 당해 버리고 내 욕심은 완전히 박탈당했고, 내. 주관도 박탈당했고, 내 취미도 박탈당했고, 내 의견도 내 지식도 내 모든 것은 완전히 박탈돼서 나는 죽은 자와 같이 완전히 그분에게 정복을 당해서 나는 완전히 부인되었고 그분이 나를 주관해서 내가 그분에게 붙들려서 피동되어지는, 그분에게 붙들려서 피동되어지는 이거라야, 이제는 자기가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고 그분이 뭐 하자는 대로해서 그분을 따라서 그분에게 볼끈 붙들려서 자유가 하나도 없고 내 주관이 하나도 없고 그분이 나에게 완전 주권을 가지고 절대 권리를 가지고 나를 거머쥐고 다스릴 그때라야 이제 안심하는 그 자리에서 사는 그 사람이 기쁜 사람인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이만하면 됐다' 안심이 되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이신데 주님의 판단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주님의 판단이 남아 있는데 뭘 가지고 안심을 하느냐? 안심이 안 된다 말입니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런고로 때가 이르기 전' 주님의 판단을 받기 전 말이오. 주님의 판단을 받기 전 주님의 판단 앞에, 주님의 검사 앞에, 주님의 심판 앞에 서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주님이 오셔서 판단하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 말은 이거 옳다, 그르다. 틀렸다. 맞았다, 판단치 말라 그말 아닙니다. '아무것도 판단치 말아라' 이제 이거는 끝장났다 이거는 판단났다. 판결됐다, 이거는 안심이다 아무것도 안심을 하고 있지 말아라 그말입니다.
왜? 그때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이것도 아직까지 미결로 두라 그 말이오. '판단치 말라' 이것도 미결로 둬라. 미결로 두고 있으면 미결로 두고 있으면 혹은 길가에 가는데, 길가에 가는데 문뜩 거기에 대해서 판단이 납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생각이 떡 나기를 '아 그 일이 요런 면으로 보니까 잘못됐다' 거기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다시 수정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어떨 때는 식사하다가 또 깨닫게 됩니다. 어떨 때는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권면을 하다가, 전도하다가 또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뭐이든지 네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전에는 네 모든 언행 심사의 생활을 다 '이만하면 됐.
다' 안심하고 지내 보내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가 가지고 심사를 받고 검사를 받을 것이니까 어찌 되느냐 하고 미결로 두고, 미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판단해서 '됐다' 그 판단을 통과해 버려야 이제 완성이 되는 것이지 그 전에는 다 미완성이요 미판단이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판단으로 있으면 숨질 때까지 뭐인가 또 수정할 것이 있으면 또 수정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나 이것을 판단해서 지내 보내버리면 다시 그만 그것에는 재고할 아무것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다시 판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건강할 때와 병들 때와 다르고, 병들면 심령이 밝아집니다. 또 병들 때와 또 여러 가지 자기에게 큰 환난을 당하면 또 심령이 밝아집니다. 왜 밝아집니까? 병이 드는 것이나 큰 환난을 당할 때나 심령이 밝아지는 것은, 그럴 때는 이 세상 모든 세욕적. 세상의 혈육의 욕심, 육체의 정욕 모든 안목의 정욕, 모든 이 세상의 모든 지방 정실, 혈육 정실 뭐 사회 정실, 사업 정실 모두 다 이런 것들이 다 그것이 끝이 나간다 말이오. 자기에게 건강이 없어지고 그만 병이 들면 다 그런 것이 끝나니까 그것들이 가로막고 있던 것이 다 뚫어지니까 내 심령이 밝아지게 되고 이제는 큰 환난이 나서 '이제는 죽는다' 하는, 이제는 참 눈앞에 벼락같은 그런 일이 떨어지고 나면 이제 모든 허영과 허욕과 모든 육체의 소욕들이 다 없어지고 이런 것들이 들어서 공연히, 힘도 아닌 것이 막 장담을 하고 그렇게 용기 등등하게 이렇게 했던 것이 다 그것이 까부라지니까 그때에 심령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무엇이든지 판단으로 결재를 지우지 안했다. 이거는 아주 판결이 나지 안했다. 판단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에게 판단이 끝나야 되지 판단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다 판단이 '다 됐다' 그렇게 생각지 말아라.
그러면, 죽을 때도 그것이 수정할 수가 있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는 철통같이 이랬지만, 이래서. 양심에 가책 없이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살았는데 참 죽을 때가 딱 되니까 저도 지난번에 참 큰 은혜 많이 받은 것은, 그때에 꼭 팔월 첫째 주일을 보 그 난 다음부터 드러누워 가지고 그랬는데, 그때에 내 몸에도 아주 그만 살 희망이 없이 아주 병이 짙어서 모든 세상 욕망이 다 아무것도 없어지고 또 그때 불같은 시험이 내게 뭐 겹쳐 와 가지고 때려 누르고 이러니까 그때에 내가 이 오십여 년 동안 목회한 것이, 오십여 년 동안을 목회를 했는데 이 목회한 그 모든 것이 다 너무도 잘못됨이 많고 너무도 삐뚤어짐이 많고 너무 허영으로 한게 많고 허욕으로 한 게, 많고 또 그것을 분석을 해 보니까 뭐 이런 거 저런 거 잡탱이가 너무 많이 들어 있고 외나 취할 만한 진짜는 별로이 들어 있지 않는데 진짜 그것도 또 주님 앞에 가 서서 보면 또 이제 밝아지면 그것도 또 아닌 가짜가 있을 것이라 그 말이오.
이래서, 참 그저, 그때는 회개의 눈물이 참 계속 흐르고 또 주님에게 대해서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그때 정상적인 사람인데. 이 고기덩어리는 나았지만, 힘을 얻어서 나았지만 그때에 있던 그 심령이 가난한 거 그것이 그때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심령의 그 가난이 그때와 지금과 달라서 지금은 심령이 가난해지지 안하고 심령이 강퍅하고 완패해진 그것을 느낍니다.
이래서 이 심령 가난을 찾았다가 왜 뺏기느냐? 찾았다가 뺏기는 이유는 이 현상 세계. 눈에 나타나고 보이고 들리고 하는 이 현상 세계. 이 현상 세계 일이 자꾸 등장을 하니까. 현상 세계 일이 자꾸 등장이 되니 이 일도 해야 되겠고 저 일도 해야 되고, 이 사람하고 이 말도 해야 되겠고 저 말도 해야 되겠고 자꾸 현상된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자연히 주님과 관계되는 내 자신을 깊이 살펴서 반성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양심보다 깨끗한 영혼으로, 영혼보다 깨끗한 심령으로 이렇게 사는 그 심령 생활이 자꾸 겉으머리로 기어 나와 가지고 그만 영혼 생활이 되지, 영혼 생활이 찍해야 그만 양심 생활이 돼 버리고 말지, 양심 생활이 그만 뭐 성경에 뭐 위반된 것 없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 봤자 법적에 걸릴 것 없고 이 사회 법에도 걸릴 것 없고 인간의 이목에 걸릴 것도 없고 경우에 걸릴 것도 없고 이만하면 되지 안했느냐 또 이렇게 뭐 껍데기로 자꾸 외식으로 나온다 그 말이오.
그래서 제가 그런 말했었습니다. '지금 앞으로 자꾸 집을 지을 일은 많이 있는데, 집 지을 일을 그걸 이제 이만하면 다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집 짓는 일은 내가 다시는 하지 않겠다.' 이래서, 건축 위원회를 조직해 놓고 이제는 분교나 뭐 그런 거 짓는 것도, 앞으로 또 여기 좀 있으면 또 뭐 사택도 어디 지을란지 모르는데 그런 것도 이제는 건축 위원들에게 다 맡겨서 그분들이 뭐 어떻게 하든지 해 가지고, 붜 찍해야 많이 손해 가면 돈 손해 갈 것이고 또 더 손해 가면 집이 좀 잘못된 거 그런 거 있을 것이고 암만 집이 잘못되고 돈이 손해가도 주님과 나와의 밀접한 관계 맺은 그 관계 관계를 빼앗기는 것만치는 손해가 아니다. 이제 그분과의 관계 그것을 내가 빼앗기지 안해야. 지극히 큰 능력과 나와의 연결이 돼 가지고 있어야 그 능력이 와서 일하면 내가 뭐 돈 손해 간 거, 내가 일을 못 해 손해 간 거, 또 그것을 지혜가 그만 못 해서 명철하게 그것을 모든 계획하지 못한 거, 뭐 설계 잘못한 거 손해가 봐도 그 손해만 못하다 그 손해만 하지 못하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작은 손해는 다 떼 붙이겠다 그렇게 제가 작정을 하고 선언도 했었습니다. 지금 아직까지 그것을 말로만 해 놓고 지금 위원들을 대략 선정만 해 놓고, 또 교회 행정이라 하는 것도 재판국을 설정을 해 가지고 이걸 그분들에게 다 맡겨서 이라고, 참 최종적으로 그분들이 모른다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해 줄지라도 이제 그런 것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저 양산동에 처음에 나무 갖다 심고 그랄 때에는 내가 전적 해 가지고, 뭐 나무 한 개도 내 손 들어가지 안한 거는, 내가 나무 뿌리 밑에까지 손을 넣어 가지고 다 그걸 흙을 골라 넣어 가지고 이와같이 이래서 이래 했지만 이제는 이번에 저 어디서 나무를. 소나무를 삼십 주를 구했습니다. 삼십 주를 우리 ○○○집사님이 서둘러 가지고 구했는데. 그 나무를 심을 때는 이제는 나는 캐러 가는 것도 안 보고 갖다가 이렇게 심으는 것도 안 보고, 이제 그때는 심으는 사람들도 그만 딴 집에서 식사하고 심으고 접촉도 안 할란다 내가 그렇게 작정을 했습니다. 하고, 그거 그래도 한번 가서 이거 보기는 봐야 되는데, 같은 많은 나무 가운데에 어떤 걸 선택하느냐 봐야 되는데 그것도 내가 지금 미결 중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성경보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거 이 세 가지만 내가 내 힘 가지고는 하려고 했는데 이제 거기 가 보는 것을, 내가 가서 보는 것이 유익이 있겠나, 내가 보는 것보다 주님에게 부탁을 하고 '당신이 그들에게 지혜 총명을 줘서 잘 선별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제 기울일 만한 그런 힘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보다도 이 세 가지 할라 하는 이걸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바로 된 것인지 뭐인지 몰라서 갈까 말까 지금 미결 중에 있습니다.
이래서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그가'어떤 분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그분이 인간들이, 인간들이 입으로 가룬 것, 인간들이 구변으로 가리워 놓은 것, 또 사람들이 돈이 많으니까 돈을 가지고 막 돈 세력 가지고, 삐뚤어지기는 삐뚤어졌는데 돈으로 가리워 놓는 거, 또 권세로 가리워 놓는 거, 이러기 때문에, 정권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비가 많이 드러납니다. 정권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비가 더 많이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이, ○정권 때에 같이 수족같이 일하던 사람이 이제 다시 정권이 달리 교체되는데 그 교체되는 정권에 가 가지고 자기가 또 일을 하려고 하니까 어떤 정권에 일할 때에 이렇다는 그런 것을 기록한 그런 책을 내가 껍데기만 잠깐 봤습니다. 봤는데. 있을 때는 그런 게 권세에 눌러 가지고 안 드러나지만 권세가 없어지면 드러납니다. 드러나고, 또 내가 입으로 막아 놓은 것도 그 사람 입이 없어지면 드러납니다. 돈으로 막은 것도 돈이 없어지면 드러납니다. 권세로 막은 것은 권세가 없어지면 드러납니다. 안면으로 막은 것도 그 사람 안면이 없으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 사람이 지혜로 가지고 해 놓은 것도 드러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에 자책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했지만,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런고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모든 감추어 있는 그 진상을, 감추어 있는 그 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네가 이런 마음을 먹지 안했느냐 저런 마음을 먹지 안했느냐 마음먹은 것까지 다 그때 그때 다 나타내시리니 '마음의 뜻을 다 나타내시리니' 이러기 때문에 주님은 교훈하신 것을 보면 행동이나 일이 나 그런 거 가지고 말하지 안하고 벌써 '네 마음이면 그 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네 마음으로 탐을 냈으면 도적질 한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으로 벌써 음욕을 품었으면 음행한 것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마음 가지고. 마음을 행동으로 잡았고, 또 사람의 뜻을 '인간의 모든 행동을 살피는 자이시니' '사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러면 인간의 행동을 말한 것은 뭐 우리는 수족으로 하는 행동만 말하지만 자기가 퍼뜩 마음먹은 그런 것이 다 자기가 움직여진 행동이라 말이오. 마음의 행동이라.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칭찬이' 이거는 좋은 말로 '칭찬이 있으리라' 책망이 있으리라 칭찬이 있으리라, 칭찬이 있으리라 하는 말씀 상대는 책망이 있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책망할 것도 그때 나타나고 칭찬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가 오기 전에는 무엇이든지 완성이, 내게는 '됐다' 그렇게 판단하지 말고 늘 미결로 두고 자꾸 그때까지 심사하고 심사해라. 심사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럴 것입니다. 몇십 년 된 일인데, 그거는 잘됐다 싶은 일인 데 몇십 년 된 일인데 몇십 년 후에 밥 먹으며 생각하니 그게 생각이 나는 데 '아, 그때 이렇게 했는데 그게 이 면 잘 됐는데 이 면을 못 생각했다. 이 면이 잘못됐다.' 밥 먹으면서 생각해서 몇십 년 전 일을 그것을 다시 고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질 때 있고, 길을 가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심방을 가서 전도하다가, 그러기 때문에, 전도하는 사람들이 유익을 많이 봅니다. 구역장들이 성화가 잘됩니다.
바로 하면. 다른 자기 밑에 있는 식구를 이렇게 가르치고 권면하다 보니까 권면하다 보니까 자기가 반성이 돼 가지고. '나도 아무 이 먼저 번에 이렇고, 이렇고 이랬다' 하는 그것이 반성돼서 이제, 권찰 일을 보면서는 나중에 권찰 일이 달성이. 숙달이 되어지고 성장돼 나가면 '아, 내가 이 교역자에게.
목사님에게 내가 이와같이 애를 먹였기 때문에 내가 이 식구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식구가 나에게 이와같이 하는데 내가 신앙 선배에게 이렇게 하지 안했느냐' 그래 가지고 반성하는, 간증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식사하다가도, 어떨 때는 변소간에 가 가지고 이래 가만히 용변하고 앉았는데 그게 문뜩 생각납니다. 몇십 년 지난 일이 생각 이 나면서 '아 그때에 이 면이 잘못됐다. 이 면을 생각지 안하고, 그때 내가 그 일을 할 때에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했던가?' 자꾸 좀 뭐이 께끄름해서 '그 사람에 어떻게 했던가' 이것을 알기 전에는, 이래 가지고 누구에게 묻기도 하고.
그때 사람들을 찾아 가지고 묻기도 이래 이래 해 보니까 '그때 이렇게 했다, 그 판단이 치우쳐서 잘못됐다' 치우쳐서 잘못된 그것을 주님이 또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판단치 안하고 그분에게 가서 심판받을 것을 생각하고 자꾸 이렇게 미결로 두고 기도도 하고. '내게 무엇인가 잘못 안 걸 이것을 회개할 것을 나에게 알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기회를 따라서. 나는 잊어 버려도 당신이 잊어 버리지 안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또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살피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때를 따라서 나로 하여금 내게 음성을 들려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에, 내 심령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만치 준비가 되어 있을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해 가지고 고칠 것을 고치도록 해 가지고, 어쩌든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으리라' 하는 그 심판 가기까지는 항상 우리가 조심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는 말은, 심령은 양심에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양심보다 깊은 마음, 마음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 양심보다도 깊은 마음, 영혼. 영혼보다도 깊은 마음. 심령에서 살면서 심령으로 이런 거 저런 거 판단해 가지고 심령에 가난한 자 심령에 '아이구.
이러니까, 이것이 이러니까 이것은 다 불완전하다. 이거는 아주 빈약하다.
이거는 허무하다. 이거는 참 너무 알차지 못했다. 이거는 너무 껍데기다' 자기 한 것이 자꾸 모든 것이, 이미 가진 것이, 가 진 것이 좋은데 가진 것이 그게 때가 묻어 있고 흠이 들어 있고 주름 잡혀 있기 때문에 이 흠 있는 거 주름 잡힌 거 거기에 대해서 고통이 되어지고 좋기는 좋은데 이게 너무 빈약하고 너무 약하고 너무 양이 적고 너무 질적으로 너무 허무하고 양적으로 허무하니까 그 허무한 것이 어디 것? 하늘에 대해서, 그러기 때문에 후란시스가 기도할 때에 제자들이 가 들어 보니까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이라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눈물을 흘리고, 자꾸 '아버지가 나한테는 어떻게 했느냐?' 우리가 세상에서 자꾸 혼자 명상을 해서 자기가 주를 위해서 무슨 좀 손해를 볼 때에 손해 볼 때에 주님은 부요하신 자이신데 나 위해서 가난해졌으니까 그 분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손해를 얼마나 봤는가, 평소에 주님이 날 위해서 손해를 얼마나 봤으며, 주님이 날 위해서 얼마나 낮아졌으며, 주님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참 멸시와 천대와 그런 압박을 받았느냐. 그때 만일, 그때 '내가. 내가 누군데 네가 나한테 하느냐' 만일 그렇게 말씀을 들고 나섰더라면 우리 구원은 다 절단났겠다 이렇게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눈물 흘린 것이 후란시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껍데기에서 살지 말고. 어떤 사람은 말해 보면 말이오, 상대해 보면 뻔하이 그 속에 일이 보이는데, 그 속에 일은 내 눈에. 내가 보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말로만 이리 돼 가지고. 말로만 해서 그만 그 말을 갋지 못하면, 말 가지고 이리 이리 하니, 이리 그리 해서 할 수 없어, 말만 가지고 있으니까 말을 못 하고 안 하고 있으면 '됐다. 이제는 내가 말해서 말 막았으니까 됐다.' 된 게 아니라 사실이 속에 있지 않느냐, 사실이? 사실. 저 사람이 말을 안 한다 할지라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러기 때문에, 이제 말에서 사는 데에서 일에서 사는 데에서 양심에서 사는 데에서, 영혼에서 사는 데에서.
이제 심령에서 사는 데에서 그 다음에는 뭐이냐 하면 하나님에게 내가 피동되어서 사는 거기에까지 나아가지 안하면 안심이 안 되는 그런 생활을 우리가 자꾸 명상으로 찾아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마음 깊이 살아라' 그것을 하나 표어로 기억하십시오. 마음 깊이 살아라. 마음을 껍데기로 살지 말고 마음을 깊이 깊이 생각해서. 마음을 깊이 찾으면 그 속에 더 밝은 마음이 있다. 밝은 마음 가지고도 또 네 모든 걸 살펴보고, 또 마음을 또 깊이 찾으면 또 그 속에 그 밑에 또 깊은 마음 깨끗한 마음 온전한 마음이 있다. 이래서 마음 깊이 생각하고 마음 깊이 조사하고 마음 깊이 연구해서 마음 깊이 사는 사람들이 되자 하는 것을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만 새벽 기도에 나오다가 뒤에 저렇츰 줄었어 껍데기 말만, 껍데기 고함만 지르면 고함에 그게 진리인지 진리 아닌지 살피지도 못하고 고함 지르면 좋다고 야단입니다. 또 감정 움직이면.
어제는 기도실 옆에서 신체 장애자들이 거기 있는데 그분들이 아무 거석이 없으니까 뭐 전축을 틀어 놨는데 오만 걸 어떻게 쿵청거리고, 전축을 틀어 놨는데 그 전축을, 그러니까, 뭐 전축을 틀어 놓으면, 춤 출 때는 사람이 우쭐거리는거 아닙니까? 이라는데, 자꾸 그리 끌려 나온다 말이오. 그라니까, 그리 끌려나와서 잘못하면 그리 끌려 나왔다가, 썩 들어갔다가 또 그거 때문에 끌려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끌려 나왔다가, 그중. 그것을 턱 지나 가지고 저 안에 그것이 들리지 않는 데까지 들어가기가 참 힘이 들어 몇 시간 그러더니만 나중에는 그만 자기네들도 그만, 할 수 없어 기도를 했어. 저거 좀 거석해 달라고. 그라니까, 그날 ○○○권찰님 구역에서 기도하는데 아마 그 소리 들린 사람들은 그만 그 퉁당거리는 그거 감상이나 했지 속에 깊이 자기 깊은 마음을 찾지를 못하고 영감 생활을 찾지 못하고 말았을란지도 몰라요. 그래서 기도했더만 나중에 중단이 되고 말았었습니다.
어쩌든지 우리는 외식으로 살지 맙시다. 마음 깊이 생각하고 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무슨 사건이든지 완결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까지 미결입니다. 왜? 주님 앞에 최종적인 검사를 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미결로 두고 자꾸 깨끗하게 할라 하면 어느 기회인가 깨끗해 질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자꾸 주님이 열어 주시고 고침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