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9 22:50
■ 보혈속죄와 이신득의
(서론)
교계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한다. ‘이신칭의’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경에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하다’는 말씀이 있는가? 없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를 말씀한다. 그렇기에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하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성경적 표현에서 오류이다. 그런 것은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이기에 ‘이신득의(以信得義)’로 표현해야 성경적에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칭의(稱義)’ 즉 의롭다 칭하다는 ‘득의(得義)’ 즉 의롭다 함을 얻음이 아니므로 ‘죄 사함’ 즉 속죄(贖罪)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그리하여 ‘칭의’ 즉 ‘의롭다 칭하다’는 죄 사함 곧 구속에 속한 것으로써 예수님의 사죄의 구속과 칭의의 구속과 화친의 구속에서 ‘칭의의 구속’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계의 교리 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이신칭의’는 ‘이신득의’로 수정해야 성경 진리에 맞다.
그리고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음’에 대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은 한자적 교리용어로 ‘보혈속죄(寶血贖罪)’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론에서 핵심적 교리용어는 둘로써 곧 ❶보혈속죄와 ❷이신득의이다.
그러면 ‘보혈속죄’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신득의’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 본 자료에 대한 전문(全文)은 홈페이지> 연구> 교리문답>에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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