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2 18:11
■ ‘긍휼과 자비’에 대한 성경적 해설
(신13: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서론)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은 긍휼과 자비에 대한 말씀이 있다.
‘긍휼’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의 긍휼은 무엇인가?
‘자비’는 무엇인가? 즉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인가?
‘긍휼과 자비’는 비슷한 말같이 보인다. 그러나 ‘긍휼’에 대한 구원도리와 ‘자비’에 대한 구원도리가 각각 있다.
또한 믿는 우리가 ‘긍휼’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는데 ‘자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아니한다. 그런 것은 ‘긍휼’에 대한 구원도리의 뜻과 ‘자비’에 대한 구원도리의 뜻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비’는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긍휼’은 무엇인가?
그리고 ‘자비’는 무엇인가?
다음의 본론에서 ‘긍휼’과 ‘자비’에 대하여 성경을 근거한 해석을 한다. 성경을 근거한 해석이라는 것은 ‘긍휼’과 ‘자비’에 대하여 해석해주는 성구를 성경에서 찾아 제시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최소한 첨부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긍휼’과 ‘자비’에 대하여 해석해주는 성구를 성경에서 찾는데 있어서, 구약성경에서 대표적 성구를 하나 찾아 제시하고, 또 신약성경에서 대표적 성구를 하나 찾아 제시한다.
이렇게 ‘긍휼’과 ‘자비’에 대하여 성경을 근거한 해석을 하면 긍휼에 대한 구원도리와 자비에 대한 구원도리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되면 긍휼과 자비를 구분해서 적용할 수 있겠다. 그리하면 불교에서 자비를 말한다고 해서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리는 현상은 없겠다.
- 본 자료에 대한 전문(全文)은 연구> 교리문답>에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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