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6 01:43
■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박응규 교수, 한국교회사 연구서 〈한부선 평전〉 펴내,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한 타협않는 신앙인펴냄
2003년은 한부선 선교사가 이 땅에서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무슨 까닭인지 한국 교회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는 일에는 적잖이 소홀했다. 그의 고국 미국에서 출생 100년을 기념하는 세미나가 몇 차례 열려 뜻있는 이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미국 장로교 역사의 한복판 필라델피아에서 한부선 선교사를 만나 그의 삶과 신학을 연구할 수 있게 이끌림을 받은 박응규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회사 및 역사신학 교수)가 쓴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 한부선 평전(도서출판 그리심)이 빛나고 값진 것은, 한편 은인에 대한 우리의 소홀함이 너무 커 우리의 염치없음을 면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가 기리 간직하고 다듬고 벼리어야 할 믿음의 얼이 무엇인지를 이 평전이 우리에게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다.
말년을 보낸 필라델피아에서 한부선 선교사와 가까이 지낼 기회를 가졌다고 하는 이정식 박사(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7월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반 틸 홀에서 가진 한부선 평전 출판 기념 강좌에서 서평을 하며 만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풍겨주신 이미지하고는 많이 다르다며 박응규 교수가 쓴 평전이 풍기는 한부선 목사를 선교사라기보다는 투사라고 표현했다.
프린스턴신학교 재학 당시 신학교 안에서 종교 전쟁을 경험하고 현대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과 싸운 사실에서, 자기를 선택해 준 미국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이른바 진보파 목사들과 치열하게 싸운 사실에서, 그리고 후에는 일제의 탄압 하에서 신사참배에 맹렬하게 반대한 사실에서, 이정식 박사는 투사 한부선을 발견했던 것이다.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신사참배를 어찌할 것인가를 논하는 이날의 토론은 기실 토론이 아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주장은 원천봉쇄 됐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예 투표조차 할 수 없게 억제 당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치부, 신사참배는 그렇게 가결됐다. 그때 한국 교회에는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현실순응파도 있었고, 소위 교회 보호파도 있었고, 진짜 친일파인 황국신민파도 있었다고 이정식 박사는 분류한다.
저항파의 불가론은 발언권조차 못하고 현실순응파와 교회보호파와 황국신민파가 야합하여 가를 외치는 이상한 회의에 격분하여 회장 규칙이오 문제를 제기하여 일어선 한부선은 일본 형사의 엎어치기로 회의장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수모를 겪으며 끌려 나갔다. 아마도 한부선은 이날을 기억의 칼로 그의 심장에 깊이 후벼 새겼으리라.
브루스 헌트(Bruce F. Hunt), 한부선은 한겨레의 가장 고난스런 시기, 1903년 6월 4일 이 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헌트(William B. Hunt)와 어머니 버다 헌트(Bertha Violet Finly Hunt) 선교사의 모국어와 신앙과 함께 어린 한부선은 또래 조선의 동무들과 함께 조선의 말을 익히고 조선의 얼을 담그며 자랐다.
학업을 위해 부모의 나라 미국으로 떠날 때 조선 천지는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평화스런 동포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과 야만스런 일본 군경의 총검을 목격하며 십대의 한부선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니 어찌 그의 방에 조선의 태극기를 걸어두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휘튼대학에서 영적 체험을 하고, 럿거스대학에서는 세속학문과 자유주의를 접하고, 프린스턴에서는 신학논쟁을 목도하며 한부선의 신앙과 신학과 성품은 담금질되었다.
프린스턴 신학 투쟁에서 현대주의의 거센 도전에 맞서는 메이첸의 편에 서면서 한부선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선교사 한부선은 다시 조선에 선교사로 돌아왔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조선에 왔지만 그는 결국 신학의 정도를 좇아 미국장로교회(PCA)를 설립하는 데 동참하게 되고, 장로교해외독립선교부 소속 선교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가지고 만주에서 선교 사역을 재개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에 항의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은, 그리고 1941년 10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 그의 행동은, 그의 삶의 이와 같은 족적을 돌아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타협할 수 없는 불굴의 신앙과 조선 사람이 다 된 그의 조선 얼, 조선 사랑이, 겨레의 살과 피를 이어받고도 신앙과 겨레를 배신한 무리들과는 견줄 수 없는,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 사람다웠던 한부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부선 선교사는 1942년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한 4년 미국에서 사역을 하고 또 다시 조선, 아니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온다.
1984년 7월 8일 한국기독교백주념기념 뉴욕 전도대회에서 한국 교회가 그에게 수여한 한국선교 공로상은 그가 한국 교회에 심은 정신에 비하며 너무나 조촐한 것이었다. 그는 1992년 7월 26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글:김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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