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6 00:24
한부선 선교사 - ● 14. 대 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성장
141>20세기 초 한국에서의 대 부흥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점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 있어 위대한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면서도 소위 “오순절주의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부흥운동은 사경회를 모체로 하여 일어났으며,
142>일제의 강점 의도에 의병을 일으키며 항일운동에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한국교회의 강한 애국심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다. 나라의 유일한 희망을 교회에서 찾는 가운데 시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하여 교회 안에는 심각한 인식이 야기되었다.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고민은 매우 심각했다. 방위량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회는 한국 내의 단일 조직으로는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였다. 만일 교회가 정치불관여의 원칙에서 조금만 물러섰더라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의 리더십을 환영하며 그 깃발 아래 몰려들었을 것이다.”
나라를 상실해 가는 비탄으로 들끓는 가운데 교회의 신앙적 차원을 강조하며 인내하라는 메시지로 설교하며 교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상당한 지혜와 담대한 용기가 필요로 하였다. 또한 교회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기 다는, 민족운동이나 개인적 야망으로 채색된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이 천명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정책은 한국교회의 민족에 대한 관심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교회의 본질이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143>그러나 영국에 이어 미국정부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서둘러 인정했을 때, 전국적으로 엄청난 실망감이 번져 나갔으며 격렬한 반 외세운동의 물결이 한국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런 격동적인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의 자립을 도모하려는 선교사들의 마음은 착잡한 심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왜냐 하면 초기부터 복음적 차원의 신앙유형이 한국교회에 주도(周到)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현실적인 동기로 개화 지향적이고 민족운동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신앙 유형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4>1906년 8월에 평양에 주재하고 있었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 주일간 사경회와 기도 모임을 준비하였다. 이 때 원산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감리교 출신인 하디(R. A. Hardie) 선교사를 초청하여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그 관계는 사랑과 의로움에 인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모임을 통해서 어려운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는 길은 상한 심령과 진실한 눈물로써 회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46>1907년에 모인 평양 사경회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성대한 집회였으며, 주 강사는 이미 하디 집회를 통해 은혜를 경험한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였으며, 참석한 이들은 모두 지방에서 올라 온 개교회 지도자급에 속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 해 겨울에 열린 사경회는 지금까지 평양에서 열었던 사경회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원산의 하디도 참석한 사경회에서 이길함 선교사가 요한일서를 매일 밤 강론할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참석한 성도들에게 임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1월 12일 토요일 저녁 집회에서 선포된 방위량 선교사의 고린도전서 12:27에 근거한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의 하나 됨에 대한 설교는 한국교회 역사상 기억될만한 설교가 되었다. 한 주간의 집회 중에서 가장 은혜로운 집회에서 방위량이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들이라”고 외친 설교를 통하여 강렬한 성령의 불길이 온 회중의 마음 속으로 타올랐다.
147-148>방위량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그러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죄라는 죄는 그 날 밤에 모조리 공개적으로 자백되었다. 그 부흥회에 있었던 또 다른 한 명의 목사였던 이길함은 다음과 같이 생동감 있게 서술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쓰러지며 통회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마루바닥에 내던지며. 회오의 깊은 고뇌로 마루를 그의 주먹으로 쳤다. 가끔 죄의 고백 후, 전 청중은 통성 기도를 시작했고 수 백 명이 같이 하는 통성 기도의 영향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경회에 참석하여 매 시간마다 성경을 가르쳤던 한위련도 ”평양 사경회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와 간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기도로 점화된 사경회를 통로로 해서 성령의 강한 불길이 대 부흥운동으로 타올라 한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부흥의 불길은 한국교회의 경건한 신앙과 기도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기도는 한국교회의 초기부터 가장 두드러진 신앙 유산의 거대한 상징이었으며, 길선주가 1905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시작한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으며, 평양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원산늬 사경기도회(1903), 평야의 사경회(1904, 1905) 평양의 새벽기도회(1905), 이런 것들이 대부흥의 원류들이요. 한국교회의 신앙유형에 대한 정신적 차원에의 회귀와 복음주의에의 다짐이 그 동기였다.
149>원래 통성 기도는 평양 대부흥운동 이전에는 매우 낯선 기도방식이었지만 1906년 한국을 방문한 존 스톤 목사가 소개한 이래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길선주 목사의 증언과 같이 “만일 이러한 부흥이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은 있었어도 결코 질적 향상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는 신앙의 생활화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성경연구, 기도, 전도, 봉사, 그리고 봉헌의 생활 등이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 신앙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의 기반을 확립시켰다. 그리고 이 신앙의 기반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거듭되는 국난과 고난을 극복하고 전진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