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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선교사 - 4. 교회의 건설(1881-1888)

 

로스목사의 첫 선교 기간의 특징은 그의 문학의 성취이며, 둘째는 교회의 사회 내 정착이었다. 특히 로스목사는 만주의 주요 도시에 새로운 선교사를 보내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염려했기 때문에, 18816월 선교회 총무는 봉천에 있는 그에게 목사 한 사람과 의사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 교회는 제나나(Zenana)라는 여선교회를 설립하여, 같은 해 914일에 한 사람을 중국에 보냈고, 상해에 1031일에 도달했다. 바바라 프리티(Barbara Pritty)라는 여선교사는 1113일 영구에 도착되었으나 겨울을 지나서 봉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로스목사는 영구에 머무르면서 왕 징밍(Wang Jing-Ming)및 중국 전도사가 감독하고 있는 봉천교회를 살폈다.

 

1881년 보고서를 보면 중국에 도착한 다음 로스목사는 신약성경 번역을 강조했고, 그 해 말 누가복음의 출판됐으며 1,000권을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회 앞으로 보냈는데, 그 사람들은 조선으로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로스목사는 누가복음은 거의 전부 맥킨타이어목사가 한 일이라고 말했고, 보고서를 붙일 때 요한복음서는 거의 출판되었다고 전했다. 이 복음서들은 출판할 때 이 두 선교사가 고백서와 스코틀랜드교회 소문답서(The Scottish Shorter Catechism)를 같이 인쇄했는데, 이 전도지는 누가복음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

 

로스목사의 1881년 편지를 보면, 그가 번역한 방법을 알 수 있다. 먼저 과거를 치뤘던 조선인이 중국 文理 신약5) 번역으로부터 조선어로 옮기고, 다음에 로스목사가 각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비교했다. 비교하면서 항상 조서인과 같이 번역했고, 문제가 생길 때는 토론했다. 교정한 후 로스목사는 "그 번역한 것이 천연두 환자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 후 그 개정 번역을 백지에 다시 쓰고, 그 다음 헬라어 용어 색인과 비교했다. 그 까닭은 될 수 있으면 조선의 단어가 같은 헬라어 단어로 번역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신약 성경은 다시 헬라어 신약과 비교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항상 통역하는 조선인의 노력을 인정하고 감사했다.

 

188111월이나 12월에 로스목사에게 비극이 닥쳤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첫 아들인 휴(Hugh)가 죽었다는데, 그 이름은 자기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82년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로스목사는 늘 조선어 신약성번역의 완성을 위해 걱정하고 있었다. 신약번역에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에 1881년도 선교사업 보고서를 늦게 부쳤다. 이로 인해 에딘버러(Edinburgh)를 본부로부터 심한 징계를 받았고,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하고 중요한 보고서는 제시간에 부치며, 성경번역 사업을 강조하지 말라고 꾸중했으며, 1882년 로스목사는 선교본부로부터 이런 편지를 가끔 받았으므로 언짢아 한 것 같다. 1882년 말 본부에 편지를 쓴 때에 본부가 자기 사업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했다.

 

그 해 여러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인쇄자 김청송은 세례를 받았고, 로스목사는 그를 고향인 간도지역에 성서 판매원으로 보냈다.

 

1882년에도 맥킨타이어는 에딘버러에 연락할 때에 '(Pae)'이라는 조선인 전도자가 한반도에 전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 백자는 한국어 발음으로 ''이 되나 중국어로는 ''가 되니까 그 사람은 아마 백홍준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년 만주교회에서 세 사람의 집사가 안수를 받았다.

 

로스목사를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를 위해 '조선어문법 및 어휘'('Korean Speech with Grammar & Vocabulary')라는 조선어 교재를 썼다. 그 해 1026일에 새 선교사인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와 듀걸드 크리스티(Dugald Christie)의사가 왔고, 로스목사 부부와 프리디 선교사는 영구의 부드에서 그를 만났다.

 

이 사람들은 며칠 간 쉰 후, 로스목사가 만주와 광활한 선교지역을 구경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며칠 순회전도를 했고, 이듬해에 크리스티 의사가 로스목사와 함께 봉천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웹스터목사는 영구에서 일을 했다. 이 두 선교사가 왔으나 매킨타이어목사가 18823, 11년만의 안식년을 맞아 영구에 왔으므로 만주 선교회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1883년 주일본 스코틀랜드 성서회를 통해 신약이 한반도로 분배되었고, 성서회 대표자 長坂(나가사가)和田(와다)씨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 해 봉천에서는 37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 중에 5명은 조선인이었다. 그 사람들은 한반도로 들어온 성경을 통해서 처음 기독교에 대해 듣고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같은 때 선교회 본부는 처음 지부에 있는 사업을 폐쇄하고 만주에 있는 사업을 강화할 생각이 있었다. 그 전해에 그와 본부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로스목사의 사역에 성공과 발전을 나타낸 것 같다.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조선어 신약'('Corean New Testament')이라는 기사를 썼는데, 거기서 신약번역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이 기사가 중국에 있는 선교사에게 로스목사의 명성과 한국 신약성서 번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로스목사가 신약을 번역할 때에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 성령, 천사 등의 용어 선택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는데,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를 로스목사가 택하고 만들었던 것이다.

 

1884년 보고서에 만주의 교회가 계속해서 커지고, 조선어 신약의 출판과 배포가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직 신약은 한 권으로 묶여진 것이 아니라 각 복음서가 따로 따로 배포되고 있었다.

 

누가와 요한복음서는 각각 3,000여권씩 출판하였으나 1884년 초에 다 나누어졌으므로, 같은 해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출판하고 같이 5,000여권씩 제본했다.

 

1884년 말 요한복음서 5,000여권과, 마태복음서 5,000권을 출판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마가복음서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가 인쇄 중이고,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의 번역을 다시 교정하고 있으며, 여러 소론들을 한반도로 보냈다고 전했다.

 

1884년도 만주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6월까지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전도자 2명은 요앙에서 일하고 있었고, 봉천에 3개의 예배당이 설립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중국인이 감독했다.

 

철령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봉천 북쪽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영국 및 외국성서회 대표자들은 각 지역에서 성경 보급이 동이 났다고 전했다. 재미있었던 것 중에는 로스목사가 그 전 인쇄자인 김청송의 간도지방 전도에 대해 전했고, 로스목사에게 통화 동쪽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조선 피난민들에게 성서를 많이 팔았고, 물건이 더 공급되면 더 팔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전도에서 갑신정변 피난자인 사람은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부탁했다. 한 사람은 간도지방으로 다시 가서 전도를 시작했고, 또 한 사람은 로스목사가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을 할 때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응찬씨는 죽었던 것 같다.

 

김청송을 통해서 간도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므로, 로스목사는 1884년 가을 초 웹스터목사를 그 지방으로 보냈는데, 아마 봉황성에 선교장소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웹스터목사와 아일랜드 선교회 하먼(Harmon)목사와 함께 수암과 대고산으로 갔다가 봉황성과 고려문(Corean Gate)으로 갔다. 거기에는 관전으로 해서 120리 북쪽에 있는 Corean Valleys(간도)라는 조선인 촌으로 갔다. 영구로 돌아 갈때는 봉황성과 해성을 통해서 갔다. 간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원했기 때문에, 로스목사와 웹스터 목사 생각에는 그 지역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지명한 것 같다.

 

맥킨타이어목사의 1884년 선교보고서를 보면, 봉천 북쪽 및 동쪽지역의 교회 발전과 제일 희망적인 한국인 전도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생각에 봉황성에 임명되면 그가 배웠던 중국어와 조선어를 둘 다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또 만주 선교사는 조선인 전도에 대해 모두 열의를 가지고 있고, 미국과 구라파 선교회로부터 자기의 조선전도 계획에 대해 문의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이 얘기를 보면 선교회 본부에 봉황성이나 통화 지역과 조선 북쪽의 전도를 탄원한 것 같으나, 아마 본부는 산동반도의 선교를 폐지하려고 계획했으므로 맥킨타이어목사는 이런 새 선교계획을 요청했다.

 

188412월 로스목사와 웹스터목사는 간도로 갔고, 봉천을 떠나 왕릉이 있는 흥경을 거쳐 통화로 갔다. 그곳을 새로운 부라 하며 중국과 조선 사이에 있는 女軍(?) 숙영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 지역의 행정장관이 보냈던 군인 2명을 성 밖에서 만나서 성안으로 호위했다. 거기서 며칠 간 머무른 후에 다시 동쪽으로 향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그 우두머리는 행로에 대해 대단히 걱정했다. 또한 장관이 보냈던 군인을 로스 목사가 다시 통화로 돌려보냈으므로, 산적이나 노상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여행의 제일 험난한 산길인 요양 정상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로스목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로 사진을 찍은 후, 중국인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무사히 산을 내려와 첫 조선인 마을로 들어갔다. 거기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성경을 분배했으므로 이 지역의 전체가 기독교촌이 되어 있는 점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웹스터목사의 일기를 보면, 마을이나 골짜기의 이름은 없고 그냥 첫째, 둘째, 셋째, 넷째 골짜기라 임명했고, 선교사들은 125일부터 12일까지 이 지역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로스목사는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을 했다. 1213일에 떠났고, 봉천에 19일 도착했고, 성탄 전야에 영구에 도착했다.

 

1884년도는 로스목사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그때 여름 새로운 부인의 둘째 아들인 Findlay가 죽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간도의 순회전도가 연기되었으나, 이런 슬픔은 첫 딸 마가렛 프리티(Margaret Pritty)의 출생으로 씻어졌는데, 그것은 프리티 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5년 로스목사와 여러 선교사들은 만주의 선교장소를 늘이려고 노력했고, 선교 보고서를 보면 봉천, 철령, 연대의 전도에 대해 많이 전했다. 같은 해에 로스목사는 중국어 찬송가를 출판했으므로 선교 본부는 15파운드를 지불했고, 간도의 조선인촌 학교를 위해 매년 10파운드를 보조했다. 1885년에 10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조선인 100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보고서를 보면, 로스목사나 다른 선교사를 통해 언제 조선인 촌으로 갔던 것 같다. 로스목사는 제일 중요한 조수인 왕 징민씨가 죽었으므로 아주 슬퍼했다.

 

1886년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과 세례자 수가 많아지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자기의 노력이 중국인 전도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했고, 그가 만주에 온 다음에 600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 중 12명만 로스목사의 전도 때문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중국인 전도자를 통해서만 교회가 발전될 수 있겠다고 했고, 이 결과는 그 생각을 확신케 했다.

 

1882년부터 로스목사는 선교회 본부와 중국인 전도자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에딘버러에 있는 본부는 모든 전도자와 대표자를 임명하고 싶었으나, 로스목사의 생각은 환경을 잘 이해하는 선교사들이 직접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1886년 로스목사가 본부에 대해

 

"신앙심 깊고 지식 있는 토착 전도자를 이용하는 선교회는 발전이 있고, 그것이 없는 선교회는 발전이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시간상 간도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가서 그 두 곳의 개종자들과 만나 학습문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서울에서 일하는 전도자가 로스목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아직 새로 온 미국선교사에게 연락을 못해, 로스목사를 그들의 지도자로서 생각했었으므로, 로스목사 밑에서 세례를 받고 싶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 해 대원군의 동료가 북경으로 갈 때에 봉천에 머무르면서, 성서를 번역하는 조선인에게 대원군이 조선은 3년 내에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것은 지나칠지 모르나 로스목사의 선교방법을 아주 칭찬했다고 생각된다.

 

1886년 말 조선어로 된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이 완성되어서 신약 전체를 배포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번역을 이용, 중국어 성경은 지성적 文理번역으로부터 현대어로 표현된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스목사의 본부와의 서신왕래 가운데, 아일랜드 장로교 선교회는 봉천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다는 내용과 만주의 연합 개신교 선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887년에 로스목사가 본부에 편지하기를 만주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전했는데, 그것은 7월이나 8월에 만주 교회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전도자로 택했고, 그의 봉급을 보증하겠다고 전했다. 보고서를 쓸 때 교인을 한 사람 더 택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논 중이었는데, 같은 해 모든 교인을 위해 표준 교리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매년 지도자 교리 시험을 실시했다.

 

1886N.E.M.James이라는 탐험가가 로스목사 집에 들렸다가 그 후 만주 산맥들을 탐험했다. 1887년 출판된 긴진 산맥: 만주의 여행(The Long White Mountain:or a Journey in Manchuria)을 보면, 만주 교회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

 

그 해에 본부에서 1888년이 안식년이란 소식을 받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받고 봉천 북쪽 지방에서 탐험과 전도할 생각이 있어서, 웹스터목사와 함께 1118일 봉천을 떠나 먼 길림으로 갔다. 갈 때는 철령과 해룡성을 거쳐갔다고 했다.

 

로스목사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그해 봄 만주 선교회의 小史와 유교에 관한 글을 본부에 보냈다. 1887년 가을 로스 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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