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영희조직신학’ 그 명칭 사용에 대한 小考
선지자선교회
우리 진영에서 목사님 몇 분이 각기 조직신학을 정리하고 그 책의 이름을 ‘백영희조직신학’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영인목사님이 조직신학을 정리하고 ‘백영희 조직신학’이라 이름을 붙였고, 이 글을 적는 김반석목사가 조직신학을 정리하고 1차 원고본에서 ‘백영희 조직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2차 보완본에서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그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류재룡목사님이 조직신학을 정리하고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그 이름을 붙였습니다.

단언을 하면 어떤 누구라도 조직신학을 정리하고서 그 책의 이름을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함은 백영희적이면 백영희적이지 백영희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그 이름을 붙인다고 백영희조직신학은 될 리가 없음입니다. 이름은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붙였지만 그 속에 백영희목사님이 정립하고 가진 교리와 신조가 전체 전부 100% 다 꽉 차지 않으면 그것은 ‘백영희조직신학’이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영희조직신학’은 백영희목회설교록이 곧 백영희조직신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백영희목회설교록이 테이터화 되고 또 프로그램화 되어져서 조직신학 그 주제별 항목별로 찾아서 요약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 서론에서 ‘신학론’ 하면 ‘신학’에 대한 말씀을 백영희목회설교록에서 찾아보면 그 신학론을 찾아볼 수 있고, 또 ‘종교론’ ‘성경론’ ‘계시론’도 마찬가지로 백영희목회설교록에서 찾아보면 각각 그 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세론까지 그렇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의 교리신조 그대로가 아니고 거기에서 자기의 것이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그것은 이미 ‘백영희조직신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백영희목사님의 교리 신조를 근본으로 해서 거의 그 교리 신조대로 정리 했다 할지라도 ‘백영희적조직신학’이면 백영희적조직신학이지 ‘백영희조직신학’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반석은 처음 백영희목회설교록을 근본으로 해서 조직신학을 정리한 후에 그 이름을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김반석의 것이 한 줄이라도 추가 되는 그 즉시 아! 이러면 여기에서 이미 ‘백영희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은 붙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그 이름을 ‘성경적조직신학’이라고 변경하였습니다. 그러함은 전적 백영희목사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 외 정리자의 것이 섞이면 이미 백영희性은 가감이 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 백영희목사님의 교리 신조대로 그대로 100%가 아닌데도 ‘백영희조직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이름을 잘못붙인 것입니다.

● 백영희목회설교록을 근본으로 했으나 정리자 글이 몇 %라도 들어갔기 때문에 ‘백영희조직신학’이라는 그 이름을 ‘성경적조직신학’으로 변경하였습니다.

● 백영희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신학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연구차원의 임시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백영희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100% 전적 백영희의 교리신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백영희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공회 내부적으로나 공회 외부적으로 백영희목사님의 교리 신조가 이 정도구나” 하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오해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래서 백영희목사님이 정립하고 가진 교리신조가 100% 전부이면 '백영희조직신학'이라 그 이름을 붙일 수 있겠고, 그렇지 않고 거의 근접한 수준이면 ‘백영희적조직신학’이라 그 이름을 붙일 수 있겠고, 또 그 근접에서 더 떨어지면 아예 ‘백영희’나 ‘백영희적’은 붙이지 말고 참조문헌으로 하고 다른 이름으로 붙여야 할 것입니다.

<첨부1>

자기들의 갈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백영희목사님의 교리신조를 저버리고 가다가 자기들 갈 길에 그 이름이 필요하면 가져다 붙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첨부2>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을 예배 후 예정 없이 만났습니다. 어떤 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백목사님께서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백영희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에서 벗어나면서 이 문제는 왜? 백목사님을 들먹이는지 그 말을 듣는 제 낯이 오히려 붉어졌습니다.

<첨부3>

어느 한 목사님은 5년 전에 정리한 조직신학 1차 원고본에서 ‘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안’에 대한 자료를 교회론에 넣은 것을 가지고 조직신학에 유치하게 그런 내용이 들어갔다고 유치서럽게 자꾸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안’을 넣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그 정도 생각을 안가지고 유치한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유치하게 넣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론 안에는 목회론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면 ‘주일학교 운영안’은 목회론에 들어갈 수 있는 성격이므로 넓게는 교회론에 포함이 됩니다.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 그 서부교회의 운영안을 목회자라면 다들 궁금하고 살펴보고 싶지 이를 하찮게 여기는 분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글이라는 것은 그 성격에 따른 항목과 격이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구원중심의 글이라야 합니다.

조직신학 교회론 그 목회 항목에 주일학교 운영안을 넣어서 그 자료를 보고 주일학교 운영에 유익이 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주일학교 운영안 넣는 것을 유치하다 하시겠습니까?

우리 진영 목회자는 주일학교 운영안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지만 중국교회는 이제 주일학교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주일학교 운영에 귀한 자료라고 여기면서 여간 감사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교회에 1차 배포 자료에서는 ‘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안’을 넣었으나 2차 보완본이나 3차 출간본에서는 몇 년 전에 이미 그 부분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제한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중국교회는 그 당시 몇 년 전만 해도 인터넷을 할 만한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 자료를 포함 시켰던 것입니다.

<첨부4>

백영희목사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을 힘 다해서 가르쳐 놓았습니다. 그러한데도 우리들은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조직신학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백영희목사님의 가족 중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나 또 이런 조직신학 건이나 이런 면을 보면 가족들께 면목이 안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