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5 16:22
■ 귀에 들리는 제일의 소리
시골 마을에는 연세가 높으신 노인 분들이 주로 살고 계신다. 이런 어느 시골에 성악가가 와서 클레식 노래를 하였다. 시골 노인 분들은 귀에 들리는 소리에 아주 기뻐하고 좋아하셨다. 그런 것은 수준 높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에 들리는 제일 기쁜 소리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귀에 들리는 제일 좋은 소리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귀에 들리는 제일 복된 소리는 무엇일까?
“예수 믿어 죄 사함 받고 영생 구원 얻읍시다!”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최권능 목사님의 전도가 떠올려졌습니다. 그의 전도는 간단하고 단순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했습니다.
최권능 목사는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7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글씨를 잘 썼다고 합니다. 성격은 무척 괄괄하고 급했다고 합니다.
최봉석은 16살 때 평양 감사 민병석의 비서가 되었고 나중에는 평양 감사 아래 감찰의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찰의 자리를 이용해서 국고금 3만량을 횡령했다는 죄로 반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분 속에서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주에는 이미 1896년에 교회가 설립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삭주에 백유계란 유명한 한의사가 있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최봉석을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참다운 생활을 해 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주고 갔습니다. 최봉석은 복음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고 삭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3살 때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03년 그가 34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불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솟아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도는 간단하고 단순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했습니다. 1905년에는 삭주교회의 집사가 되었고 후에는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삭주교회에서 전도와 목회 사역을 너무 열심히 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압록강 지역과 만주 지역을 다니며 ‘예수 천당’의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고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1907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며 벽동교회에서
조사의 일을 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기도와 전도에 열중했습니다. 공부는 겨우 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를 했고 밤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에 시험을 볼 때는 백지를 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답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
그는 다음 날 시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예수 천당’을 병력 같은 소리로 외치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받은 달란트였습니다.
죄인들을 무너뜨리는 가장 성능이 좋은 총탄은 ‘신학탄’이 아니라 ‘예수탄’이라고 믿고
예수탄’을 쏘아 댔습니다. 방앗간 앞을 지나다가 방앗간을 향해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망아지는 놀라서 벌떡 뛰었고 방아가 엎어져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이 최봉석 조사에게 달려들어 야단을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방앗간 주인은 항복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최봉석은 1907년에 신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4년 후인 1911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이 지났는데도 최봉석 조사는 계속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벽동교회의 교인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조사님, 졸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봉석 조사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1년 더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3년이나 반복되었습니다. 1913년도 졸업생 명단에 최봉석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계속해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좀 난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봉석 조사는 교무실로 들어가 교수들을 만났습니다. 3년씩이나 낙제를 한 44세가 된 노 학생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거북하고 곤란했습니다.
최봉석 조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교수님들에게 아뢸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 먼저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하시고 또 목사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만 잘해야 목사가 됩니까?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고 전도한다고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 나에게 졸업장을 주어 나도 목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러 주옵소서.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모두 덩달아 아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최봉석은 샘 마펫 교장에게 졸업장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안됩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최봉석 조사는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 전에 저의 기도에 모두 아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교장과 교수들은 할 수 없이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낙제의 기록을 세운 최봉석 조사가 이렇게 해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1913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8월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벽동교회에서 1년 동안 목회 하다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맹이로 맞아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소똥에서 익은 콩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힘이 났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걸어갔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12년 동안의 만주 전도를 마치고 1926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 거리는 이제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로 날이 밝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마다 들려오는 '예수 천당'의 외침은 생명길을 알리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였고 나라 잃은 평양 시민들의 멍든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청량제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길선주 목사의 주선이 컸다고 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가 멈추는 날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이 망한다”고 말하며 최봉석 목사를 격려하며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불타는 심정으로 ‘예수 천당을 외쳤는데 그 소리에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항복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최권능 목사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머리 좋고 설교 잘 하는 채필근 목사가 지나가는데 최봉석 목사가 큰 소리로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깜작 놀란 채필근 목사는 “나 채 목사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최봉석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목사지만 뻘지(벙어리) 목사요.” 최 목사는 거리를 다니면서 큰 소리로 찬송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를 큰 소리로 부르며 지나갔습니다. 일본 경찰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최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동차가 뿡뿡 울리는 소리는 시끄럽지 않고 내가 부르는 찬송 소리는 시끄럽다는 말이요. 당신들은 교통 사고를 막기 위해서 자동차 소리를 그냥 놔두지만 나는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사고에서 구하기 위해 찬송 소리를 내는 것이요.”
최봉석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앉으며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하심은”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감방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의 전도로 예수 믿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고 그의 찬송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감방이 교회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형사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고문할 때마다 최봉석 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죽기 위해서 오늘까지 당신들의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오. 주님이 나의 집을 예비하고 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를 때리니까 최 목사는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때때로 감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는데 1944년 3월 1일 금식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사모님과 아들과 딸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면회를 왔습니다. 그는 반갑게 가족을 맞았습니다. 보통 때는 사모님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 사모님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므로 간단히 면회를 마치곤 했는데 그날의 면회는 길어졌습니다. “내가 금식 기도 작정한 것을 알고 마귀가 맛있는 음식으로 시험하는군” 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애들아, 집에 가서 날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금식기도 끝나는 4월 10일까지 누구도 면회 오지말고 기도해다오. 미안하다. 땅 위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인데 내가 주님께 충성하다 보니 지나치게 가정과 너희들에게 등한히 하였구나. 하하, 이것도 육신의 생각이지” 하더니 딸과 부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켜 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고 너희들도 나와 같이 저 낙원에 가서 즐거이 살게 될 때 그때 땅에서 못 받던 위로를 하늘 나라에서 받자.” 그 날의 면회는 정이 넘치는 면회였습니다. 그 날 가족이 가지고 온 음식은 모두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병 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성도들이 기홀병원으로 몰려들어 "목사님!"하고 부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봉석 목사는 오히려 성도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박 집사, 오집사, 왜 이러는가? 그동안 나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또 주기철 목사 위해서, 박관준 장로 위해서, 이기선 목사 위해서, 한상동 목사 위해서, 손양원 목사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모두 고마워." 그의 주치의인 장기려 박사가 안정해야 한다고 하며 면회를 사절시키려고 했지만 "장 박사, 그러지 마시요. 나를 위해 오는 형제들을 내가 기쁘게 맞이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일일이 맞았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15일 동안 의사와 간호원과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찾아오는 교우들을 다 만나보다가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지 4일 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4월 21일 최권능 목사님은 4월 25일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최봉석 목사의 생애는 '예수 천당'이 전부였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예수 천당'의 외침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었고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역자와 신자들의 가슴에 꽂는 양심의 비수였습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식을 애써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성능이 좋은 ‘예수탄’을 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무식한 바보가 되었지만 그분만큼 예수를 많이 드러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70여 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분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전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 순교의 사람이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바울처럼 예수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그 몸에서 예수 나타내는 것을 그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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