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5 22:28
■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 박윤선
저자 : 박성은
저자 박성은 박사는 박윤선 목사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아이오아 주립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M.D) 학위를 받았다.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종교문학석사(M.A.R)를 받고, 동 대학원에서 변증학을 전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I)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통증의학 및 신경내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선한청지기교회 협동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저자 : 안만수
저자 안만수는 목사.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화평교회에서 27년 동안 교회를 섬겨왔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예장 합신 노회장과 총회장으로 봉사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국제위원장과 공동회장,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총무와 국제위원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공동회장,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장, 루디아어린이선교회 이사장, 소련선교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 현재 영음사 대표회장으로서 박윤선 목사의 문서 선교, 신앙과 신학이 겸전된 그의 삶을 후대에 널리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 : 박영선
저자 박영선은 목사. 한양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을 졸업하였다. 미국의 리버티 신학대학원에서 교육학석사와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설교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석좌교수로 봉사하고 있다. 남포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서 30년 동안 섬겨왔고 현재는 원로목사로서 설교 봉사를 계속 하고 있다.
저자 : 허순길
저자 허순길은 목사. 고려신학교와 계명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 캄펜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와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호주 자유개혁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와 원장으로 봉사한 후 은퇴하여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자 : 정창균
저자 정창균은 목사. 전북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설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산 새하늘교회에서 11년 동안 목회를 하였으며 지금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봉사하고 있다. 설교자하우스를 설립하여 20년 가까이 수백 명의 설교자를 길러내는 사역도 하고 있다.
-목 차-
서문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박윤선 목사님 4
1부 한국교회 은혜의 산 증인 박윤선 목사
한국교회 은혜의 산 증인 - 박영선 목사 13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가 - 허순길 박사 19
목사의 딸과 아버지의 딸 - 정창균 목사 37
나는 죄인입니다 - 김영재 목사 45
삶이 곧 주석입니다 - 안만수 목사 63
2부 아버지, 죄송합니다! - 박성은 박사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77
원래 사람은 모두 진흙이었다 82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 87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 91
‘이미, 그러나 아직’의 원리 97
죽기 내기로 기도하라 102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다 106
당신의 숨겨진 눈물을 누가 알까요? 113
주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121
3부 아버지, 사랑합니다! - 박성은 박사
진리의 편에 서는 자가 승리한다 135
청교도적 신앙의 소유자 141
박성은 박사 인터뷰 147
“인격적 경건 중시한 개혁주의자, 고 박윤선 목사를 만나다”
4부 나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 이승구 교수
평생 중요한 일은 신학교육과 성경 주석이다 161
나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164
고려신학교의 초석을 마련하다 173
나를 기다리지 마시오 178
혼탁한 한국교회와 정암 184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람 박윤선 193
일사각오의 정신과 지사충성의 자세 203
※ 다음은 이 책을 읽다가 몇 군데 체크한 것을 발췌한 것이다.
P4. 서문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박윤선 목사님
아버지!
이 얼마나 중후한 그리움의 대상인가.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묵직하고 든든한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나도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이나 그리움만은 아니다. 존경과 사모의 마음이 가득하다.
P64.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원어성경을 기준으로 저술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써 왔던 성경 개역한글판은 이미 원어에서 번역된 성경을 보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원어로부터 번역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이는 박윤선 목사께 직접 들은 바이고 이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소위 시중에 떠도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라는 등, 영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잘못 된 말입니다. 원어 외에 다른 외국어 성경은 단순 참고자료였습니다.
(발췌자 주: 중국 선교사로써 중국 목회자들과 성경공부 시간에 개역한글판 성경과 한어 성경을 대조해 볼 때가 있다. 그러면 한글 성경이 한어 성경보다 번역이 바로 잘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P74. 2부 서문
당신의 유산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진정한 영웅이시며 자랑입니다. 신구약 성경 주석을 완수하셔서 열악한 과도기 한국교회의 강단을 부요하게 하셨으며, 성경 무오설을 생명 같이 여기시며 한국에 정통신학을 파수하셨으며, 기도의 모범과 영성으로 보수신학을 기름지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주신 인격적 감화와 개혁주의적 영성은 주님 오실 날까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P93. 목사는 항상 보따리를 싸고 목회를 해야 하며 목사도 다른 장로와 함께 임기제로 해나가라고 힘든 주문을 하셨습니다.
P96. 이사를 나닐 때마다 기도할 수 있는 뒷산이 있는 집을 구하려고 어머니가 노력하셨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P99. 미국을 수없이 왕래하셨지만 그 흔한 국립공원 한 곳도 가보지 못하고 그저 사명에 몰두하여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P100. 어떤 일이 일어나도늘 '진리 편에 서라'고 하셨던 아버지는 순수한 복음 진리 때문에 많은 오해도 받으시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셨음을 저는 압니다.
90년 전 보장된 교수직과 큰 교단의 이점을 포기하고 조그만 신학교를 세워 진리 운동을 주도하던 G. 메이쳔 박사, 그리고 보장된 노후를 마다하고 새로 시작하는 웨스터민스트신학교에 참여하셨다가 1년 후 폐렴으로 소천한 프린스톤신학교의 구약학 전설 로버트 딕 윌슨 박사, 그리고 존 머리 교수,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 모두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음을 저는 압니다.
그들이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라고 변호하시며, 강단이 두 쪽이 나도록 내리치며 절절히 외치던 당신의 사자후의 설교가 유독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분열주의자란 말도 때론 감수해야한다 고외치시던 당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유독 듣고 싶은 때입니다.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선 고난도감수해야 된다고 단호한 자세로 일러 주시던 쉰 소리가 많이많이 생각나는 때입니다.
참 진리가 다수결에 의해 몰락되고, 비진리가 군중에 의해 진리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당신의 외침은 가슴 벅찬 메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P104. 또한 기도가 영적 전쟁이기에 '죽기내기'로 시간을 확보하고, 죽기내기로 집중하고, 죽기내기로 우선 순위를 바로잡지 못하면 진정한 기도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귀가 닳도록 역설하셨지요.
P117. 약 40여 년 전, 집 한칸도 없이 신학 교수직을 정년퇴임 하신 아버지는 늦게 재혼해서 얻은 저희 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염려하셨고 또한아직 마치지 못한 성경주석을 속히 마치시기 위해 미국 이민을 결정하셨지요. 오래 전에 미국에 가 있던 요한 형님의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리 가정의 먹고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것을 보고 제 마음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나이 칠십에 우리들은 아직 10대(맏이었던 필자는 19세)였고 영어 한 마디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죠. 생활을 책임지셔야 했던 어머니는 미국 공장을 옮겨 다니시며 힘들게 일하셨고, 아버지는 아직 남은 몇 권의 주석을 계속 집필하시려고 주말이면 어머니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주변 신학교 도서관으로 전전하셨지요. 생활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여서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P118. 특히 이민 시절엔 저녁 식사 후 헌 양복이라도 차려 입고 나오셔서 가정 예배를 인도하시던 당신! 오늘도 새벽별처럼 기억이 떠오릅니다.
P119. 돌아가시기 전 침상 위에서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방문하시는 한 분 한 분 다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특히 교수님들에게 신학교를 부탁하셨습니다. 눈과 온몸은 황달로 샛노랗게 되셨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쉰소리로 코와 입에 호스를 끼신 채 힘에 겹지만 강한 어조로 부탁하셨습니다.
"신학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P122. 하늘나라로 가시기 며칠 전 "저 주석 이제 다 불태워도 한이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나더러 기도많이 한다고 말할 때 내 마음에서 그런 말을 즐기곤 했음을 회개한다" 라고도 말씀하셨지요.
두 주간을 계속 회개의 기도를 하시다가 아버지는 영광의 주님께 가셨지요.
당신이 주님 앞에 서시기 이틀 전 저를 부르셨습니다.
"아들아,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주님이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구절이 마가복음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읽어주렴."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합니다.
아버지는 긴 한숨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되뇌시다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시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벌써 28년이 흘렀네요.
P132, "주석 집필은 만주사변 때부터 시작하신 것으로 알며 1979년에 모두 마치셨으니 38-40년에 걸쳐 집필하신 겁니다. 어렸을 때 저ㅕ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온돌 바닥에 놓인 의자가 없는 책상에서 주석을 집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름에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갖추기 힘든 때에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고 늘 앉아 계시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P155. 아버님의 소원 중 하나가 주석 집필이 끝나고 시간이 되면 성경신학적 교의학을 쓰시고 싶어 하셨지만 그렇게는 못하셨지요.
P180. ... 이 당시 어려운형편의 단면을 한부선 선교사가 선교부 총무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박윤선과 그의 일곱 식구는 장 두개가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웃으로 물을 길러 가야만 하였고 이 때문에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비가 오면 그 집은 빗물이 새서 부엌 바닥에는 물이 고였습니다. 박윤선은 매일 신학 책에 코를 박고 살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걱정을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한상동 목사가 그에게 자기 집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상동 목사 내외는 방 하나에 살면서 먹고 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