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가질 것 세 가지

 

1984. 10. 12. 금새

 

본문: 시편 1편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미개할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쪽발로 걸어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또 새김질하는 그런 것만 네가 접하라 그런 것 안 먹어라  새 김질하는 짐승만 네가 양식 삼고 쪽발로 걸어가는 것만 양식 삼아라,  하나님이 법도로 주실 때에 레위기에 말씀을 하셨고 또 에스겔서에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언제든지 둘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둘로 만 구별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둘로만 구별하라.

 마귀는 사람들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이는 유혹하려는 동기와 목적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사람들인 줄 아시기 때문에 네가 복잡한 것을 생각하면,  복잡한 것으로 구별을 하려고 하면 너는 시험에 들기 때문에 그런 생활은  먹지말고 그런 방편을 먹지 말아라. 그런 방편을 쓰지 말아라 말씀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복과 화 둘이 있습니다. 뭐 거기에서 다른 잔줄 내는 거는 전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복이면 복, 화면 화 둘뿐입니다. 우리는 내  자체나 내 마음이나 내 몸이나 내 행동은 이 둘 중에 한 가지를 취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이 시간 내야 알든지 모르든지 복과 화는 주님이 홀로 주권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사람됨이 복을 받든지 화를 받든지 우리가 수많은  복과 화를 받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강퍅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강퍅함을 인해서 점점 자기에게 가리어져서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사립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말씀대로 먹은 후에 그로 인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아담 해와의 자손으로서는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화를 받게  됐습니다. 그 화가 인생들이 제일 싫어하고 제일 불행스러이 여기고 면하려고  제일 애를 쓰지마는 한 사람도 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은 영원 절대성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에게 어떻게 필요하며 어떻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한 행동의 삐뚤어짐에 대한 보응이 그러하거든 헬 수 없는, 수 없는  삐뚤어짐의 행동을 거듭하는 악령의 이 미혹을 받아 가지고 만들어 놓은  삐뚤어진 것을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벗어나며 면할 수 있겠습니까? 쌓이기는  지구 땅덩어리보다 많이 쌓였는데 먼지만한 것도 벗어날 힘은 없는 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만치 주의 대속은 필요하고 이것을 아는 것만치 자기의 마음이나  몸이나 행동이나 일에 대해서 삼가하게 됩니다. 이걸 모르는 자는  마구잡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은 이와 같은 무서운 이런 잘못을  시간마다 얼마든지 저질러도 거기에 대한 별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멸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잘못을 저질러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 먹음으로 사망의 화를 받은 거와 같이 잘못을 저질러서 화를 받는다고  했는데, 뭐 믿는 사람은 다 하늘나라에 가니까 화가 어디 쌓이는가 그렇게 화를  보는 눈이 흐려져서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지 말라는 거 한 번 하니까 인간이 제일 원치 아니 하는  그 사망을 받게 됐다. 내가 수많은 현실을 살고 나가는데 내 행동이 저질러 놓은  잘못의 그것이 얼마나 쌓였으며 얼마나 그러면 화를 받을 건 가, 화가 얼마나.

그렇게 화라고 말하면 화 하나만 해도 그런데 화가 열이나 백이나 천이나 만이나  되면 어찌 될까? 뭐 그렇게 화 위에 무슨 화 가 있겠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마는 화의 값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복은  측량 못 합니다. 무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무한이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있을까 하지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무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축복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건설하셔서 그 공로로 인해서 무한한 축복이 우리에게 와 있는데, 택자들이 한  행동 한 행동에서 무한한 축복을 그것을 무한함을 다 완전히 말살시키는 무한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한한 축복을 받은 자가 아무것도  없는 벌거벗은 구원을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말씀을 어겼을 때에 그 화의 값이 이렇게 크거든 우리가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 어기는 일을 했으니 그 화는 얼마나 클 건가 그 화가  그러면, 한 화도 받아도 그런데 그 화가 그러면 어디 그렇츰 많을 것인가.

공연한 하나의 궤변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주님이 대속하셔서 우리에게 이 공로로 말미암아 설정해 놓으신 그  축복은 한이 없습니다. 무한입니다. 그 무한함을 자기의 하나 하나의 행동으로  다 이것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얼마나 말살시켰느냐  말살시키는 것을 계산합니다. 우리가 무슨 축복을 마련하는 것은 아니고,  얼핏보면 마련하는 것 같지마는 주님이 다 마련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  축복을 내가 얼마나 삭감하게 되었느냐 그것을 계산해서 삭감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의 손에 잡힌바 된 그 상을 좋아간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승리로 우리에게 주신 그 축복을 그것을 하나도 손실  없이, 자기가 신앙 시작하는 그 걸음 그때부터라도 하나도 손실 없이  걸어가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무한한 축복과 무한한 삭감과 또 무한한 거지와 무한한  부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자에게는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공적 심판에는 다 이 공로를 입어서 하늘나라 가기는 가지마는  하늘나라 가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설정해서 은혜로  주신 축복을 얼마나 제 언행 심사의 행위로 삭감했느냐 하는 그것을 결정 지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요, 거기에서 무한한 축복을 무한히 삭감해 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그런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법칙의 전 성경이 가르치는 필연적인 지공법입니다. 지성법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현실을 만날 때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 깨어 있는  자는 보는 자요 듣는 자입니다. 또 움직이는 자입니다. 깨어 있으라 말은 이  사실들을 보는 자로 살라 말이요, 이 사실에 대한 음성을 듣는 자로 살라는  말이요. 이 사실에 대해서 피하고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깨어 있으면 그  사람이 불이 나면은 불을 피할 줄 알 것이요 또 불이 없으면 불이 안나면  평안하게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지마는 자면 불이 오는 것을 모릅니다. 불이와도  불 없는 자리로 옮겨 서지를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큰 화냐 복이냐 하는  것이 우리 앞에 언제든지 두 길은 기다리고 있는데, 깨어 있는 자는 화를 피해서  복에 옮겨서서 주님이 입혀 주시는 그 복을 다 박살내지 안하지마는 자는 자는  이것도 모르고 주님이 경고하는 음성도 못 듣고 주님이 보여 주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지금 화냐 복이냐 결정지우는 좌우의 하나인데 여기에 대해서  산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서 자는 자라고 말하고, 깨어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구별해서 화를 피해서 복으로 옮겨 서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고 복에 있다가 유혹으로써 화로 옮겨가지 얻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는, 너무도 많은 말씀들을 신구약 성경 육십 육 권에 했기  때문에 우리 거짓부리 같은 사람들이 이 말씀도 이렇게 많으니까 다 그렇게  중량이 가볍다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도적같이  주님의 날이 오지 않는다.' 그 말했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도적같이 주의 날이  임하지 잃는다 그 말은 깨어 있는 자는 주님 재림하실 때에, 하나도 손해 본  것이 없고 하나도 잊어버린 게 없고 자기에게 영원 무한한 그 축복 주신 것을  하나도 뺏기지 안하고 하나도 도적맞지 안 하고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깨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현실에서 복이냐 화냐 자기는 둘 중세 하나를 취해서 복을  취하는 것은 복을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설정해 주신 그 복을 버리지  안하고 그대로 그 복을 간직하는 것이고. 또 화를 허하는 것은 복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화를 취하는 것은 복을 삭감하는  것입니다. 택자들에게는 화는 없습니다. 화는 없으나 잘 하면 그 복을 제가  그대로 주님이 주신대로 그대로 보존하고, 또 자기가 잘못하면 보존했던 그 복을  버려서, 복을 버리니까, 복을 버리니까 그게 화가 됩니다. 택자에게는 그  행동에서 복을 버리니 화가 되고 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복과 화가 있다. 화는. 우리의 화는 어떤 게  화인가? 복을 벗어버리는 게 화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속의 공로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화를 하나씩 처하는 것이 그것이 화요 복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복을 간직하는 것이 복이요 복이 삭감되는 것이  화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없습니다. 복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복이 없고 화를 하나씩 둘씩 점점 저축하는 것이 그것이 그들의 화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자와 불택자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입고 없는 여기에서  이렇게 차이 있습니다.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는 복이 삭감돼서 없어지지 화는  없습니다. 복이 삭감되는 것이 자기에게는 화입니다. 또 불택자는 복이  없습니다. 복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화가 되는 것은 하나씩 화를 마련하는  것이요 화를 마련하지 안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앞에는 이것이 있는 것을 알고 살아야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악인의 길이라는 것은 피조물  중심입니다. 피조물 중심의 길과 하나님 중심의 길 두 길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길뿐이오. 두 길뿐인데. 어떤 자는 알고 장난삼아 예사롭게 여기고 '이  하나님 중심의 길은 분명히 알기는 알겠는데 하나님 중심의 길을 버리고 피조물  중심의 이 악의 길을 걸어 보자. 내가 이거 알고 장난삼아 걷고, 그 방편으로  걷고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서 걷고 이것을 하나 취미로 걷고 걷는 것이지 내가  정말로 악인이 되어 걷는 거는 아니니까 이런 거야 방편적으로 취미적으로  일시에 하고 버려 버리면 되지 않는가?' 싶지마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절대  버리지 못합니다. 고대로의 자기는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만큼 벌써 축복은 삭감되고 다시 복구는 절대 못 합니다.

삭감된 화는 복구 못 합니다. 축복이 감축된 것은 다시 회복은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는 하나님 중심과, 피조물 중심을 악이라  말합니다. 선은 하나님 중심 또 악은 자기나 피조물 중심, 악과 선의 정의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별별 사람들이 말을 해도 선악의 정의는 여기에서  삐뚤어지면 안 됩니다. 제가 보는 시야가 좁기 때문에 다른 이런 저런 말들을  하고 있지 이것이 아니면 선과 악의 정의는 안 됩니다. 혹 성경에 부분 적에  대해서 그런 말을 쓴 거 있지마는 해석하면 전부는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 자기가 주신. 죽으심으로 주신 이 복을  보존하느냐 이 복을 팽개쳐 버리느냐 하는 그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요 악인의 꾀는 악인이라 말했지마는 '마귀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자기는 마귀를 따르든지 하나님을 따르든지 둘 뿐이니 그럴  때에 내가 괄시하지 안하고 대적하지 안하고 환영한 그 하나님이 내가 기도할  때에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요, 노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어두움이 있을  때에 가르쳐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 이 창조주요 주권자시요  주재시요. 그. 하나님이 내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분인데,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이 하나님을 칼로 찔러 놓고, 이 하나님을 주먹으로  내질러 놓고, 이 하나님을 뺨을 때려 놓고. 또 그 다음에는 '주여' 하는 그  가증스러운 자입니다. 이거 회개하기 전에는 절대로 기도가 안 됩니다. 자기가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대되지 안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자기에게는  가리어질 것이요 이것을 깨닫고, '내가 이러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회개가  있어야 하나님이 대면해 주시고 하나님과 통해 주시지 그렇지 않으면 통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번에 교역자회 할 때도, 보면 환하게 다 압니다. 자기들도 다 압니다. 이겨는  마귀의 역사요 배암편이요 마귀편이라, 배암편 마귀편, 배암편 마귀편 피조물  중심편, 이는 하나님편 진리편 성령의 감동편 두 편뿐입니다. 두 편뿐이오. 두  편뿐인데, 제가 이것을 예사로운 일로 알고 거기에서 제 마음대로 장난삼아  망령을 부려 가지고서 마귀 편에서 놓고, 제가 하나님께 절대 기도하면,  기도했으면 그 사람이 그렇지 않소. 기도 잃는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설교할 때에 하나님을 힘입어서 설교했다면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혼자는 이기는가 지는가 모를지라도 그게 판명될  때에는 즉시 옮겨서지 그 자리에 서서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언제든지 복이냐 화냐, 복은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그 복을 제가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요, 화는 그 복을 깨트려 버리는 것이  자기에게는 화입니다. 성도에게는 화를 받는 그 화가 아니고 자기에게 베풀어  줘서 있는, 설정되어 있는 그 북을 파괴시키는 것이 화입니다. 화와 복이 자기  앞길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안면과 하나님 이 베푸실 그 받을 징계 그 징계를 보는  눈동자를 쉬지 말지어다' 우리는 이것을 언제든지 보며 살아야 됩니다.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는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아야 노약자를 저거가 다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자기 부모라도 힘이 약하니까, 힘이 약하니까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습니다. 자기 자녀도 힘이 약하니까 먹었습니다. 둘이 싸우다가서 힘이 약한  것이 먹혔습니다. 그 피를 가지고 음료수를 냈고 그 고기로 가지고서 양식을 한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성경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그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그 진노가  우리 진노입니다. 우리에게 올 진노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그런 말도 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가들 전부 잡아 가지고서 가마니 속에다 넣어서  꿰매 가지고 쫙 늘여 놓고 소를 여러 마리를. 힘센 소 여러 마리를 대 가지고 그  위에다가 무거운 걸 실어서 채찍으로 깔리니까 끌고 가니까 탁탁 거리면서 골이  탁 깨져 가지고 피가 척 나오고 창자가 툭 나오고 이라니까 마구 전부 철철 철철  하는 피바닥이 된 그 속에 우리가 들어갈는지 모른다는 그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된다 말이오. 그 속에, 그 속에 우리가 들어갈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너무 이 남한 교회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증오심이 심히  큽니다. 복음을 위한다고 하지마는 전부 제 중심이오. 다 제 중심입니다. 뭐  광고하는 것도 제 중심, 무슨 운동하는 것도 제 중심, 교파 마련하는 것도 제  중심, 제 중심이 있으면 그거는 다 망합니다. 하나님의 적은 피조물 중심인 줄  알아야 됩니다. 여간 그 사람이 뭐 실수를 해 가지고서 이러니 저러니 무슨  도덕면에 실수했다 해도 하나님과 일 대 일로 적이 되는 거와는 다릅니다.

자기중심이라는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고 제자 대적하십니다.

 이러니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올는지 모른다, 자기는 그때의, 그때의 두려움을  끌어다가 오늘의 두려움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의 두려움을 오늘 네가 봐라.

그때 두려움을 보는 것과 오늘 두려움과, 그때에 참 기막힐 답답함을 오늘의  답답함으로 느낄 수 있는 그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영감의 사람입니다. 그때에  온갖 고문으로, 저도 이렇게 팔이 이제 곧아져서 아무리 철봉에 달릴라 해도  팔이 아파서 못 달립니다. 힘이 없어 못 달리는 게 아니라 아파서 못 달립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제가 어릴 때 이걸 봤는데 그것이 기억이 납니다.

개백정들이 나오면 개를 잡아 가지고서 앞다리를 뒤로 착 휘어 가지고서 뒤로  짜매 놓습니다. 그러면 얼마 안 가다가 죽습니다. 개들이 사람도 뒷져침을 딴  이래 가지고서. 최덕지 선생이 뒷져침을 이래 가지고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얼마 동안 했다 하는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작대기를 들고 듭니다. 작대기를 들고 듭니다. 들면  처음에는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뼈가 휘떡 부러져 가지고서 그렇게도 되지도  안하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도 당할는지 누가 압니까? 모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굴복시켜서 예수를 내놓으라고 진리를 내놓으라고 하기위해서 하다가  마지막에 숨이 끊어져야 말지 끊어지기 전에는 그와 같이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도 항복을 시키려고 하다가 하다가 숨이 끊어지니까 더 못 했지 숨이 남아  있었으면 얼마든지 계속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취를 걸어가는, 우리의 당할  십자가는 그런 십자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는 눈동자를 쉬지 말지어다, 그런 것을 우리는  보면서, 생각하면서, 어제 아침에 하나 말할라 하다가서 안 했는데 이것을 더  말해야 되겠다 해서 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 되면 그리 치우쳐져서 세상에 아무 의욕이 없고 이제 낙망의 또  구덩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줄 알고, 그런 줄 알고 그것을 벗어나는  절대적인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벗어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이것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언제든지 자기가 명상해서 봐야 되겠고, 우리는  범사에 그것을 봐야 되겠고, 매시로 그 사실을 지금 내다보면서 살아야 되겠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신다. 미가서에 보면 주님은 진노 하셔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라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말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있지  않느냐 주님의 권능이 있지 않느냐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가 없다  하는고로 너희들이 예루살렘은 수풀 언덕이 되고 모두 시온은 밭 감을 당할  것이라고서,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바로 봐야 됩니다.

노여워하는 하나님인지. 하나님이 기뻐해서 너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칭찬하는  하나님인지. 우리에게 지금 화의 채찍 가지고 있는 하나님인지 자기 개인이  어떻게 걸어간다 할지라도 남한 교회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멸하는  공산주의와. 다른 민족보다 공산주의의 그 고문과 고형이 제일 심합니다. 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대하여 있으니까 진노의 하나님인  줄 알고, 우리고 맞이하고 있는, 대하고 있는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라 이  진노를 풀기 위해서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흘려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진노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이런 징계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는 회개를 해야 될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달라는 기도를 하자 하는 것을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현실에서는, -악인의 꾀라 말은, 악인의 꾀라 말은 자기중심의  운동이 있다 말이오. 자기중심의 운동, 자기중심의 계획, 꾀라는 것은 운동이라  말이요, 계획이라 말이요, 목적이라 말이요. 동기라 말이요, 편의라 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중심이냐 피조물 중심이냐 분명히 그 둘뿐이지 없는데. 둘  뿐인데, 둘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취하며. 창조주를  버리고 피조물을 취해서 갈 수 있는가? 이거는 자멸하는 행동입니다. 자멸하는  행동. 이것을 모르면 그까짓 거 뭐 인간 도덕 행위 암만 깨끗하게 해서, 암만  잘해도,  에베소 교회에, 그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고 하나만 하면은 이 장로는 위대한  장로다 이 목사는 위대한 목사다 할 수 있는 굵닥굵닥한 것을 아홉이나 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고 내가 교회를 옮기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를  옮기겠다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내게서는 끊어졌다. 너는 내  대속의 피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훌륭한  행동을 했는데 그렇겠습니까?  오늘도 눈이 있어서. '안약을 사서 발라라' 성경 가지고서 모든 만물을 봐라.

그러면, 오늘 지금 운동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운동의 그 결과가 이 아홉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칭찬하고 자랑하고 야단이야 하지마는 보면 참으로 주의  피와의 관계를 가졌는지, 피로 인함인지 자기중심인지 뭐인지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돼 가지고 하는 것인지 마귀에게 피동 되어서 하는  것인지, 마귀에게 피동 안 되면 하나님께 피동되고 하나님께 피동 안 되면  마귀에게 피동됩니다. 둘뿐입니다. 마귀의 피동이냐 하나님의 피동이냐. 하나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 하나님 중심이냐 마귀 중심이냐, 네가 화냐 복이냐  그것뿐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우리는 이러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됩니다.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됩니다. 말을 해도 그 말을 '아 저 말이 나로 하여금 복을  간직하게 하는 말이냐 복을 파괴케 하는 말이냐' 고 둘로 구별하면 간단합니다.

간단합니다. 고 둘로 구별하면 뺨을 때려도 감사할 말이 있고 아무리 저를  높여서 막 이렇게 칭찬을 해도 자기가 진노할 말이 있습니다. 화냐 복이냐, 나를  하나님 편에 세우는 말이냐 마귀 편에 세우는 말이냐, 내가 창조주 중심을  가지게 하는 말이냐 피조물 중심을 가지게 하는 말이냐,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냐 흥하게 하는 것이냐 요것을 구별하면 자기는 그런 망령을 부리지  안하지마는 자기 속에 귀신이 들어 놓으면 그것을 못 벗습니다. 귀신이 들어오면  알아도 그걸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내전으로서 자기가 회개해서  고쳐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번에 공회 때도 마귀 편 하나님 편이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마귀 편에 선  사람들이 나중에 다 잘못했다고 회개는 하고 뭐 후회하고 와서 자복도 하기는  하고 하지마는 벌써 그것은 지나가 버렸어. 후회는 앞세우지 못한 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후회는 그것으로 끝장났습니다. 다시 그 복구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걸음을 우리가 걷고 있습니다.

 뭐 인간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때에 내가 대적한 그 하나님 이 환난  가운데에 나를 건질 수 있는 그 하나님이요. 그때 내가 그를 반대하고 귀신 편에  섰던 반대한 그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다 주관하는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을  그렇게 배척해 놓고 자기가 그 하나님에게 대해서 기도한다 하는 그 기도가  헛기도요. 기도를 하면은 반드시 그것이 회개가 될 것입니다. 회개 안 되면  기도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관대로의 그와 같이 돼 가지고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참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보이는 것 모든  것보다 더 똑똑히 계십니다. 우리 눈이 어두워서 안 보이지 그분은 더 크십니다.

더 확고히 크게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만났느냐 안 만 났느냐,  그분과 내가 대립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보는 자에게는 보이지 마는 못 보는  자에게는 소경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악인의 경영을, 악인의 계획을, 악인의  소원을 악인의 운동을, 악인의 편을, 악인의 목적을 환하이 아는데 악인의  목적을 제가 취하면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인 줄 모르면 몰라서 제가 있다  할지라도 원수는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인은, 죄인은  하나님의 공로를 벗은 자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은 자요, 의인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된 그 걸음이 죄인의 길이요, 하나님의 이 계시 영감  도리에 합당한 그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의인의 길이라 말은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알고 피를 입고 있는  자요, 자기를 벗어 던진 자입니다.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더럽히지 안한  자는 자기를 벗은 자를 말합니다. 뭐 그 옷을 벗을래야 다 벗지는 안하지마는  더럽힌 자, 옷을 더럽힌 자, 횐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말은 벗은 옷을 다시 네가 사서 입어서, 벗은 대속의 공로를 다시 사서  입어라. 대속의 공로를 사는 것은 너를 부인하고 주님으로 너를 삼으면 대속을  입을 수 있고, 네가 주장되고 네 중심이 돼 가지고 있으면서는 주님의 대속의  공로는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횐 옷을 사라 말은 자기가  중심돼 가지고 했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게 비참한 길을 걸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 말은. 이제 네가 갈급이, 기독자는 죽는 날까지 갈급이  계속해야 되고 가난이 계속해야 되고 마음에 늘 죄인이 계속돼야 됩니다.

기독자의 서서 있을 자리는 죄인 자리입니다. 의인 자리는 서면 안 됩니다. 죄인  자리입니다. 죄인 자리에, 장 그라면 그 자리에 있어? 아니오. 날마다 그 죄  아니오. 그 죄 아니고, 자꾸 발견하니까 또 죄인 자리에 섰고 또 죄인 자리에  섰고, 죽는 날까지 죄인 자리에 섰는 것을 계속 발견해서 자기가 죄인 자리에 선  것을 깨닫고 죄인 자리에 섰는 그것이 기독자의 설 자리지, 기독자는 '아,  이제는 모든 죄 다 회개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양심의 자책할 것이 없으니,  양심에 가책될 것 다 회개했으니까 나는 의인의 자리에 섰다' 하면은 그 사람은  벌써 넘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하나 이러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라.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심판을 인해서 지금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어요.

 너무 에누리를 모두 다 우리가 많이 합니다. 에누리를 많이 하는, 그 심령이  어두운 것만치 둔해집니다. 어두운 것만치 가리여져 있습니다. 이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자지 않고 쉬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만큼 세밀하고 철저하기  때문에 이를 통과한 그 통과한 것만큼은 통과한 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심판하고 통치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갈급이나 가난이나  예수님의 대속을 연결하면 자기가 어떤 의라도 심히 부족한 가난이 면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에 대해서 가난해져야 되겠고. 충성에 대해서 가난해져야  되겠고 인내에 대해서 가난해져야 되겠고, 주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가난해져야  되겠고, 주님에 대해서 우리는 가난하고 갈급하고 무익한 종이라. 가난하니까 좀  더 부해져야 되겠고 우리는 갈급하니까 좀 더 마셔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끊어진  자는 오만한 자입니다.

 하나라도 실행을 하고 가져야 우리에게 변화가 있고 효력이 있지 암만 그까짓  거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 외우는 것도 좋지마는 성경 외우면 그 한  말씀이라도 사귀어야 됩니다. 사귀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 말씀이라도 새겨서  자기에게 양식이 되고 변화가 되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쭐쭐 미끄러져 나가는 그게 참 불행입니다. 어떤 사람은 쫙 외우는데 그 속의  뜻은 하나도 모릅니다. 미끄러져서 그걸, 너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깨어  보지 안하고 너무 만홀히 본 죗값입니다. 외워도 읽어도 미끄러집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가집시다. 요 세 가지  다 두 쪽으로만, 쪽발로만 걸어가야 됩니다. 쪽발로만.

 복이냐 화냐, 하나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 내가 마귀 편에서 가지고서 하나님을  실컷 대항하고 주먹으로 쥐어박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내가 오만 악을 다 품고서  그 하나님에게 또 무슨 기도를 할 것이며. 설교도 보면 마귀 들려 가지고  설교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마귀의 설교와 성령의 설교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앞으로 죽음이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승리가 별로  없습니다. 내가 그리 소망을 가지지 안합니다. 죽음이 대부분이오. 지금이라도  오면 다 쓰러져서 몰사합니다. 너무도 심령이 둔합니다. 귀도 마귀 귀가 돼  가지고서 정반대로 들려지지 보는 것도 정반대로 보여지지. 생각하는 것도  반대로 생각하지 여러분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인간을 좋아하고 마귀를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여러분들이지 하늘나라와 하나님과 성령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바로 되지 아니면 감감 합니다.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된다고 눈물이 흘러야 되지 여러분들은 강퍅합니다. 나도 부산 와  가지고 많이 강퍅해졌어. 나도 강퍅한 자 됐어. 이제 올 거는 화뿐이라. 우리가  회개해야만 면해지지 회개하지 안 하면 하나님이 긍휼이 안 오면 헛일이라. 왜  자기가 자기를 못 봅니까? 하루 종일 마귀의 편에 선 걸 와 못 봅니까? 중심이  마귀 중심이 돼 가지고 있고 하나님 편의 사람들은 다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  편의 사람들은 다 대적이 돼. 마귀 편의 사람들은 다 좋습니다. 마귀의 말은  듣기가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기가 싫습니다. 그러면 그게 뭐입니까?  오늘 한국에 교회의 전성시기라 하지마는 껍데기로 예수냐 뭐 공산주의냐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 많지마는 하나님 중심이냐 마귀 중심이냐 하나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 둘로만 가르면 짝. 모두 다 서이인 줄 아는데, 그렇지마는 이것도  이것도 말해 그렇지 둘로만 가르면 아무리 소경 같은 자도 환하게 알 것입니다.

둘로만 가르면. 둘로만 가르면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 얼마나  되느냐?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라고 갈라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망령 부리지 말고 둘로만 갈라서, 오늘에 뭐 먹는 거 입는 거 문제지마는  그까짓 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애를 쓰다가 굶어  죽었으면 그것도 하나의 순생자요 순교자인데 그렇게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까지 굶을 수 있다면 하지마는 그 근방에 가기도 전에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습니다. 어리석게 공연히 안 할 걱정을 하고 할 걱정을 안 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맙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마귀인지 하나님인지를 모릅니다. 마귀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를 모릅니다.

자기를 죽이는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 모릅니다. 간교한 말인지 자기에게  하나님의 교훈이나 명령의 말씀인지를 모릅니다. 이걸 구별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살겠습니까? 어리석습니다. 어리석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마귀에게 속한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행여나 내 뭐 잘못이  그들에게 거리낄까 싶어서 하는 것이지 마귀에게 속한 것을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사람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두려움도 둘 뿐이요, 두려움도 둘 뿐이오.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 세상이 주는 두려움. 둘 뿐이라. 두려움도 둘 뿐이요. 기쁨도 둘 뿐이요,  복도 둘뿐이오. 뭐이든지 둘뿐이라는 것을 알고 둘로써 구별하십시오. 마귀란  놈이 주는 복은 복 같은데 화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복 될 때도 있고 화  같으나 그것이 참 진정한 복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둘로 만 구별해서 소경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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