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1 14:32
현실에 7가지
1981. 11. 4. 수새
본문 : 야고보서 2장 :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우리가 안 믿을때는 무엇을 가지고 살았는가? 안 믿을때는 마음과 몸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음이 주장이 되가지고 그 몸을 다스리고 또 어떨때에는 몸이 주장이 되가지고 그몸을 다스리고 또 어떨때에는 몸이 주장이 되가지고 그 마음을 다스리고해서 마음과 몸 둘이 합해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이요. 또 마음과 몸을 지배하는 것은 어떤것이 지배했던가? 인간을 타락케 한 악령이 지배를 했습니다.
악령이 지배를 해서 그 지배를 받은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져갔고,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서 악령의 지배를 받은 생각 주장 소원 비판 평가 희로애락 이것이 점점 많아져 갔습니다. 많아져간 그게 뭐인가? 그것이 인간의 지식입니다.
인간의 지식 그것이 합해가지고 인간의 지식이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타락후에 사람은 악령의 지배를 받아 그 심신이 합동해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요. 그 인생들의 지식이라는 것이 전부가 악령에 의해서 나온 지식이요. 이것을 가리켜서 세상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 세상을 통털어서 말하면 악한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 안에 있다" 그말은 자기중심 피조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 중심을 어떻게 하든지 이탈되게 하려는 것이 그것들의 주장입니다.
이러니까 섞인것이 없이 다 악한 것들이요. 악령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들이요.
모두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반하는 운동의 것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망이라. 이것은 목적이 뭐인고하니 죽고 망하는 것이 그게 목적입니다. 그 외에는 섞인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안믿을 때에나 또 안믿는 사람들이나 또 우리 믿는 사람이 믿음을 떠날때에나 그때는 전부 이 사람으로 삽니다.
이것은 벌써 죄에 갖혔고 죄에 갖혔다 그말은 삐뚤어진데 갖혔다. 삐뚤어진데 갖혀있어. 또 죄가 왕노릇한다. 삐뚤어진 것이 벌써 그 사람을 주장하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망하고 죽는 것뿐이다. 이것이 인간인데 예수님의 대속이 여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시가지고 먼저 삐뚤어지게 되어 삐뚜어짐으로 갖혀있는 여기에서 해방을 시킬려고 죽기까지 힘써가지고 해방을 시켰고 또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그것이 삐뚤어진 것인데 삐뚤어진데서 구출하려고 예수님이 공로를 베푸셨고 하나님에게서 삐뚤어진 다음에는 인간 자체가 악령 자체가 주장을 해 가지고 하는 그것이 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율이라 주관이라 사욕이라 악령의 감화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 불의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주님이 또 공로를 베푸셔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에만 복종하는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지 안하고 하나님 법에만 복종하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이렇게 공로를 베푸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친을 일으키는 이 공로를 베풀어서 우리를 구원하는 이 세 가지 큰 공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 가지로 구원했습니다. 삐뚤어진 데에서 구원했고 제가 주장하는데에서 구원하신 것이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 가지로 구원했습니다. 삐뚤어진 데에서 구원했고 제가 주장하는 데에서 구원했고 또 하나님 배반하고 하나님 없이 제 단독이 사는 요게서 구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한 것을 가리켜서 '성령이 구원했다. 진리가 구원했다' 해서 성령과 진리로 다시 살아났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한 그 구원은 하나님이신 성령이 구원했고 또 하나님의 뜻인 그 진리가 구원해서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은 것은 죄와 자율과 하나님과 원수된 그것으로 죽었고 살아난 것은 그거와 반대로서 살아났습니다. 그것과 반대가 뭐인데 죄에 반대 옳고 바른 것 불의의 반대 무엇 피조물이 제 마음대로 산것을 이제는 그 반대 조물주의 마음대로 또 피조물이 하나님 떼놓고 사는 것으로 죽은 것을 이제는 하나님과 연결시켜 사는 것으로 만든것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이 죽었던 자요. 또 점점 죽어가고 있는 죽었던 자가 죽어가는 이 방편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또 살아난것이 살게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면 죽었던 것이 어떻게 해서 죽었습니까? 또 죽은 것이 점점 죽어가는 행위를 하는데 죽어가는 행위가 어떤 것입니까? 살아나는 것이 살아는 방편이 어떤것인가? 살아난것이 또 점점 살아서 자라가는 방편이 무엇인가? 그러면 죽는 방편과 사는 방편을 죽는 법칙 방편이라 말은 법칙이라 말이오. 죽는 그 행위 사는 행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는 법칙, 죽는 이치, 죽는 방편, 죽는 행위 다같은 말이겠습니다. 또 사는 법칙, 사는 방편, 사는 행위 같은 말인데 죽은 방편이 무엇입니까? 또 죽은것이 점점더 죽어가는 방편이 무엇입니까? 죽는 방편 이미 죽은 우리가 이미 죽은 우리가 이미 죽은 부분이 있는데 안 믿을때 죽었었는데 이미 죽은 그 죽음이 무슨 방편으로 죽었던가? 또 죽은 것이 점점 더 죽음에 깊히 빠져지는 그 죽어가는 것이 무슨 방편이던가?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에 삐뚤어진 그것이 이미 죽은 방편이요. 또 죽어가는 방편이요. 또 하나는 피조물 주장대로 피조물 주장대로 피조물 비판대로 피조물 소원대로 피조물 이치대로 이 피조물이 주장이 되가지고 자기가 주장되는 것도 피조물이 주장된 것이요. 나라가 주장되는 것도 피조물이 주장한 것이요. 민족과 인류가 뭐 세계 문화가 신구약 성경 말씀과 성령이 주장하는 그 외에거는 전체가 다 인간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인데 이것가지고 죽었고 이것가지고 죽은 것이 점점 죽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있는데 그거는 뭐이냐? 하나님 떨어짐으로 죽었고 또 하나님 떨어짐으로 죽은 것이 점점 더 죽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이 죽는 그 방편이 무엇이냐? 이 세 가지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죽일 권세가 하나도 없습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죽이지 못하는데 다만 죽이는 방편이나 죽는 방편은 이 세 가지 죄는 하나님의법에 삐뚤어진것이 죄고, 불의는 피조물이 주장하는 그 주장 그것이 불의고 또 사망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떨어지는 그것이 사망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로 인류시조가 죽었고 전 인류를 죽인 원죄가 이 세 가지로 된것이 원죄요. 또 인간들이 범하는 그 죄를 가리켜서 본죄라 이러는데 이것도 이 세 가지로 된것입니다. 그것을 통털어 말하기를 모두다 한말로 삐둘어졌다.
그래서 죄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 떠나서 있는 그것도 삐뚤어진 것 피조물이 조물주의 뜻대로 하지 안하고 조물주의 피조물 제 뜻대로 하는 그것도 삐뚤어진 것 하나님이 선포해논 법칙을 어기는 것도 그것도 삐뚤어진 것 한말로 해서 어떨때는 죄 불의 사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때도 있고 그것을 뭉쳐서 죄라. 또 어떨때는 불의라 사망이라. 그렇게 분류해서 말할때도 있지마는 뭉쳐서 말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것을 분류하면은 이제 말한대로 그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의 인격이 죽는 것이나 권세가 죽는 것이나 또 그의 몸이 죽는 것이나 능력이 죽는 것이나 사업이 죽는 것이나 기쁨이 죽는 것이나 쾌락이 죽는 것이나 모든 것 다 죽는 것은 이 세 가지로 죽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로 인해서 죽은 것이 이 세 가지로 그 죽음이 점점짙어지고 더 강해집니다. 나무를 뿌리에서 베었으면 그 나무는 벌써 죽은 나무입니다. 또 그 나무가 죽은것이 버쩍 마르면 더 죽었습니다. 또 마른것이 이제는 썩기 시작합니다. 다 썩어버렸으며 이제는 더 죽어서 다 절단 나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는것도 이 세 가지로 죽고 죽은 것이 점점 더 죽어가는 것도 이 세 가지로 만 죽지 이 세 가지 외에는 죽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행복을 죽일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죽이지도 못하고 어떤 피조물도 죽이지 못합니다. 인간의 행복을 죽이는 것도 인간의 존영을 죽이는 것도 또 쾌락을 죽이는 것도 기능을 죽이는 것도 소유를 죽이는 것도 사업을 죽이는 것도 지위를 죽여 뭐이든지 죽은 것을 죽이는 것도 이 세 가지로 죽이고 또 산것을 죽인것도 이 세 가지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난것은 이것이 다 진리와 성령으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한번 살아난 것은 죽는 일은 없습니다. 살아난 것은 죽는 일은 없습니다. 둘째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실상 살아난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적 문제에서 살아났지마는 실상은 아직 살아나지 못했는데 법적으로 살아난 그것이 자기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살아난 것인데 법적으로 살아난 것이 실상으로 살아난 그 완전히 살아난것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왜, 그 진리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하나님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나지 안한것은 그것은 살았다 하나 그것이 일차 죽은 것입니다. 일차 죽은 것이 이 세 가지 법칙으로 점점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망하고 죽는 것이 이 세 가지로 망하고 죽는다. 요 지식을 우리가 확고히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악령은 이 지식을 혼돈시킵니다. 이 세 가지외에도 죽이는 길이있고 또 그 정반대인 예수님의 구속하신 이 세 가지 이 세 가지외에도 사는 길이 있다.
행복되는 길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 악령입니다.
그러나 악령의 미혹을 받지 말고, 확고히 이것을 가져야됩니다. 천하 만물이 다 죽일려고 달라들어도 내가 죽는 방편 이 세 가지를 벗어나면 죽일라는 것이 점점 나를 존영하게만 만들었지 나를 해하지는 못합니다. 또 천하에 모든 것이 나를 살리고 영광되게 만들라고 해도 내가 이 죽는 세 가지 방편 이 방편을 행하면 그들이 살리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방편을 벗어난 자를 죽일자가 없고 또 이 세 가지 방편을 취해서 이 세 가지 방편으로 가는 자를 살릴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이 현재도 있고 영원도 있고 이러기 때문에 현재 뿐으로 아는 사람은 이 현재뿐으로 아는 사람은 현재뿐으로서만 사는 방편가지고 죽는 것같이 보이지는 것도 있고 죽는 방편 가지고 사는 것같이 보이지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재판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과 둘이 상대가 됐는데, 예수님은 이 죽는 방편만 피할려고 애를썼지 그들이 죽인다는 못밖는 것이 무엇이고 하는 그런것은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짜든지 죽는 방편을 쓰지 안할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 죽는 방편이 하나님이 정한 이 세 가지가 죽는 방편이지 그 외에는 죽는 방편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살리는 방편 이 세 가지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살기 위해서 죽는 방편을 취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죽는 방편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제생각 인간 생각대로 했고, 하나님을 떨어지는 하나님과 그 연결이 떨어지는 그런 방편 이 죽는 방편을 벗어났고 그 아니 죽는 방편 이것을 혼돈해 가지고 본디오 빌라도는 이 죽는 방편 그것이 악령이 사는 방편이라 이렇게 말하니까 악령에게 미혹 받아가지고 인간 인간 곧 인간이 정한것은 마귀가 정한 것인데 마귀가 인간하고 한덩어리기 때문에 인간이 정한 마귀가 정한것 꾀워서 꾀워서 정한 그 사는 방편 그것을 인간이 정한 사는 방편을 취한 것이 본디오 빌라도 고 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한 그 죽는 방편을 취해서 나아갔습니다.
이러니까 일시에 보기에는 예수님은 그들 생각대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을 생명이 이제는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는 죽지 안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 그것을 인간이 정한 사는 방편 인간이라는 사는 방편 그 방편대로 하여 살았으나 그 방편은 하나님이 죽는 방편으로 정해논 그것을 본디오 빌라도는 취했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는 영원히 사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재판 앞에서 사는거와같이 우리는 날마다 여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이라는 것은 전부 예수님과 본디오 빌라도가 둘이 한 입장에서 한 입장에서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 하는 그와 같은 양은 적지마는 조류와 성질은 이치는 꼭같습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이 지식에 확고하지 못하면 잘못하면 우리는 이 지식에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현실을 당했을 때에 망하고 죽는 방편은 세 가지인데 망하고 죽는 방편이 세 가지인데 하나님이 정한 방편도 세 가지 마귀가 정한 방편도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정한 방편 마귀가 정한 방편 다 세 가지인데 마귀가 정한 방편과 하나님이 정한 방편은 정 반대입니다. 그러면 정 반대인줄 알면 돼. 하나님이 죽는 방편이라는 것은 마귀는 사는 방편이요. 하나님이 사는 방편이라는 것은 마귀는 죽는 방편이라 정 반대로 요래 세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악령이 우리를 죽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지식의 혼돈을 안받는 것이 이것이 제일 지혜로운 것입니다. 지식에 대해서 확정이 없이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신대로 이 지식을 이 지식대로 자기가 행하다가 저 지식대로 행하다가 하는 이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고 부동의 이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떤 현실을 당했든지 죽는 방편이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이 있는데 하나님이 죽는 이 정한 방편은 마귀라는 놈이 이거 사는 방편이라 해 가지고 우리를 자꾸 꼬운다 말이오. 그때에 그 지식이 혼돈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이 무엇인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죽는 방편의 하나 또 인간 생각대로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하는 그것이 또 죽는 방편의 하나 또 하나님을 떠나서 피조물하고 합작된 그것이 죽는 방편의 하나 이 세 가지가 죽는 방편의 죽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방편을 자기가 취해서 죽은 것은 취해서 죽은 것은 그것이 죽는 방편으로 취해서 죽어있는 것이 살아나는 데에는 사는 방편으로 인하여 살아있는 것이 절단이 나야됩니다. 절단이나야 절단나는 것을 통해가지고 살아는 것입니다. 요게 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만 두리뭉쳐서 혼돈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예수님안에 있는 이 구원은 이루어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 이것을 마귀라는 놈이 사는 방편이라고 말을 할때에 사는 방편인줄 알고 죽는 방편을 취하면 일시에 그것이 어찌됩니까? 일시에 그것이 안 죽는 수도 있고 그것이 사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죽는다는 방편을 그것을 쓰지 안하면 일시는 죽는수도 있고 없어지는 수도 있지마는 죽는 것을 통해서 살아나고 없어지는 것을 통해서 살아납니다.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서 살아나는 것도 그 방편으로 살았소. 죽는 방편을 떠나버렸습니다. 죽는 방편을 떠나니까 죽는 방편 그 방편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을 어짜든지 이 방편만 취하지 안하면 자기는 망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고히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안했어. 취하지 아니함으로 다니엘이 어찌됐습니까? 죽었지. 사자구디 집어 넣었으니까? 죽지 안했소. 죽었지마는 죽은 것 같았지마는 그것이 죽음 속에서 살아나서 그 죽음전에 산거와 영 판이하게 다른 권위있는 것으로 존귀한 것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일시 눈에 볼때에 그것이 없어졌다고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것이 망했다고 망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죽었다고 죽은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말이오. 죽는 방편을 행하지 안했을때에는 죽는 방편을 자기가 취하지 안할 때에는 죽는 방편이 자기에게 없을때에는 죽는 방편이 자기 사업에 없을때에는 죽는 방편이 자기 출세에 없을때에는 죽는 방편이 자기 지위 권세 명예에 쾌락에 행복에 없을때에는 죽는 방편이 이거 누리야 되지 죽는 방편 이것이 여기에 접선이되져야 이게 망하고 죽지 죽는 방편이 거기에 접선되지 안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않는 것이요. 죽이는 수가 없어. 만일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아니했는데 죽는 것 같이 보여진 것은 그것은 누가 죽이지요.
누가 죽는 것 같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피조물들이 죽였지.
피조물들이 죽였지. 조물주는 죽이지 안하고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안하고 사는 방편을 취했기 때문에 조물주는 그걸 살리는데 피조물이 그걸 죽입니다.
피조물이 죽이는 것이 조물주보다 강합니까? 피조물이 죽였느냐? 그것을 정 반대로 더 존영하게 살리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은 피조물이 죽였고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안하고 사는 방편을 취한 예수님을 살린 것은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하나님이 살렸고 세상은 죽였는데 죽인것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손해가 갔습니까? 유익이 됐습니까? 그는 영원히 죽지 안하는 것으로 살아나버렸다 그말이오.
그러므로 죽는 방편을 피한다고 이 피조물들이 죽인 그것은 이 방편만 취하지 안하고 한번 죽었으면 다시 그거는 피조물이 죽일 수 없는 것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 현실을 당할때에 요 지식을 확고히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온갖 어려움이 오면 그 어려움을 진찰해 가지고 바로 살펴야 됩니다. 내게 어려움이 오면 어려움이 오면 이것을 내가 죽는 방편을 취해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 죽는 방편 취한 그것이 원인이 되가지고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가? 그걸 살펴야 됩니다.
또 내가 죽는 방편을 안 취할려고 함으로서 내게 닥치는 어려움인가? 어려움이 죽는 방편을 내가 취한 값으로 지금 죽어가는 어려움인가? 죽는 방편을 지금 취하지 아니할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인가? 그 어려움이면 다 같은 어려움인가? 어려움이 다릅니다.
그러면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아니하고 사는 방편을 취함으로 어려워지는 그 어려움을 통해서 일단 죽든지 망하든지 해야 그것이 완전히 돌아서고 다시 개조가 되고 새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모든 것이나 영의 것이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구속을 받아가지고 법적으로 살아 가지고 있는 이것이나 또 자연 은총에 속한 이것이나 어떤것이든지 나만 그런게 아니고 내게 있는 소유도 물건도 버러지도 전체는 다 그것이 하나님이 죽는 방편을 취해서 죽습니다. 버러지 한마리 그것도 죽는 방편을 취하지 안하면 그는 영생합니다. 그런데 죽는 방편을 그거 힘이 없어. 죽는 방편을 취해서 죽습니다. 뭐 조그만한 요런 풀한포기도 하나님이 죽는 방편 정한 죽는 방편 그 방편을 취해서 죽어지지 죽는 방편 취하지 안하고 죽는 것은 없습니다. 또 사는 방편을 취하지 안하고 사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두워서 요라면 모르고 조라면 잊어 버리고 자꾸 이렇게 우리가 착각되는 제가 이번에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면서 그걸 늘 느끼지만 또 한번 더 느꼈습니다. 아, 내가 타고 있는 차가 분명히 서긴 섰는데 섰는데 차가 갑니다. 그 옆에 붙어있는 차가 그 붙어 있는 차가 가니까 이리가니까 나 탄차는 이리 간다 그말이오. 분명히 서기는 섰는데 야 이차가 분명히 서 가지고 있기는 있는데, 저 옆에 붙어 있는 저 차가 아래로 내려가니까 아 울로 올라가니까 아 나탄차는 가만히 섰는데도 내려간다. 이게 환경에 몰리면 우리는 착각하기 쉽다.
이렇게 마귀라는 놈이 이렇게 착각을 하는데 분명히 서기는 서 가지고 있는 차가 저 차가 가니까 저 차가 올라가니까 이차는 내려가는 것같이 보인다. 마귀라는 놈이 요런 꼬우는 술책을 가지고 우리를 꼬우고 있다. 그것을 제가 차가 그렇게 가는 걸 다시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그 위험지에 가면은 꼬와가지고 넘어지게 하는 그 사실을 나는 봤습니다. 우리는 요 지식이 확고해야 됩니다. 죽는 방편 하나님이 정한 방편 그것이 옳은 방편이지 마귀라는 놈들이 마귀가 주장한 인간들이 정한 그 방편은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정한 방편이고 하나님이 정한 방편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한 방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편만을 우리가 신용하고 신임하고 인용해야 되지 하나님이 주는 방편 이외에 인간이 주는 그 방편을 인용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방편과 인간의 방편이 둘이 혼돈될 그때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있는 것이요.
그때에 인간들은 다 말하기를 인간이 정한 방편으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방편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때에 제가 망하고 흥하는 것이 그 결정이라.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의 정한 방편은 이래야 네가 행복되다 했는데 인간이 정한 방편은 이래야 행복되다 할때에 내가 그 방편에 미혹을 받아가지고 혼동되가지고 인간이 정한 이래야 네가 행복되다.
이래야 네가 복이 있다. 이래야 네가 권위가 있다. 이래야 영광이 있다 하는 그 시키는 그 방법대로 해서 내가 지금 망하고 죽어가는 것인지 하나님의 방편대로 하기 위해서 그긴지 요것을 잘 구별해서 그 방편대로 취해서 내가 망하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방편대로 해서 사는 방편을 취해서 취하면 마귀가 주는 방편대로 살아난 것은 살아난 그것이 마귀가 주는 방편대로 살아난 그것이 하나님 방편대로 해서 살아날라고 하면 마귀의 방편대로 줘서 살아난 그것이 일단 죽어야 하나님의 방편 주는 이 방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더듬을 필요가 없어. 변함이 없어.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방편 아래 있소. 이 방편은 하나님이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그분이 책임져 그분이 죽는다는 그 방편이 방편을 내가 취하지 안했는데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깨져 하나님이 절단나 하나님이 깨집니다.
하나님이 죽는다는 그 방편을 제가 취했는데 피조물이 아무리 살렸다고 해 가지고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집니까? 하나님이 죽는다는 방편을 취해가지고 아무리 살아났다 할지라도 그분이 그대로 둬둡니까? 그분이 기어코 죽이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죽는 방편 하나님이 정한 사는 방편 요것을 확고히 검어지는데 인간 지식 마귀들은 말하기를 정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죽는 방편으로 정하는 것은 그것을 사는 방편이랍니다. 하나님이 사는 방편으로 정한것을 인간들은 죽는 방편이라 합니다. 이래가지고 제가 방편으로 잘 못써가지고 죽는 것이라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는 인간이 내논 지식이 원수입니다. 인간이 내논 지식이 원수요. 그래도 그 지식을 가지고 제가 출세하고 그 지식가지고 무엇을 하려합니다. 그 지식이 뭘 될줄 압니다. 그 지식이 있으면 하나님의 지식을 그 인정함에도 하나님의 지식이 왕이 되있소? 하나님의 지식을 이제 그 지식으로 어떻게 해서 그 지식으로 어떻게 해서 그 지식을 키울라고 애를 씁니다. 제일 원수는 인간이 내논 악령이 내논 지식이요. 잘못된 지식이요. 둘째 원수는 자기속에 자기 아닌 원수 자기 잘못된 자기 그놈이 둘째 원수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