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강

 

1987. 6. 3. 밤 (수)

 

본문:빌립보서 4장 4절∼7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한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심판하실 법조문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계약을 보고 자기도 이 계약에 대해서 해야 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도 하실 의무가 있으니 하나님은 변함없이 하십니다. 계약을 어긴 자에게는 사망으로, 계약을 지킨 자에게는 축복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렇게 이행하시는데 우리 사람들이 이 계약을 예사롭게 여기고 계약을 지키지 아니하는 그 불쌍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또 그러고 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말씀은 다 명령이라면 다 명령입니다. 명령은 지키지 안하면은 즉시 형이 있는 것입니다. 다 명령이라면 다 명령입니다.

명령이요, 계약이요, 또 우리의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 우리에게 아직까지 모르는 미래와 영원 장래 것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신 예고의 말씀이라 그렇게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다 지켜 행하도록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절수는 지키고 어느 절수는 뽑고 그렇게 하지말고 또 이 말씀을 누가 다 지켜 살겠는가 그런 망령된 생각도 하지말고 하나님께서 다 지켜 행하라 했기 때문에 지켜 행할라고 하면은 행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행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정상의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도 하나님의 명령이요 또 계약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안하면 하나님 앞에 벌을 받습니다. 또 기뻐하지 안하면 약속을 어긴 자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뻐함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기뻐하지 안하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뻐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을 기뻐하지 안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뻐하지 안하면 얻을 승리를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가 들어갈 그 행복의 곳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뻐하라는 것이 우리가 곧 “도적질하지 마라” 하는 명령과 같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는 그 명령과 같습니다. 또 “음행하지 말라” 하는 그 명령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뻐하라는 이 말씀 이 명령은 우리가 뭐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줄로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뻐하는 이것은 대단히 이 계명을 지키는 데에 효력이 큽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큽니다.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 관용이라 말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모든 면에 너그럽게, 너그럽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관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잘못됨이 없이, 사람과의 관계에 잘못됨도 없고 또 그 사람이 뒤에 똑똑히 알고 보면은 원망스러울 것도 없고 감사할 수 있도록 인간 취급하는 것이 그것이 관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관용이라는 뜻을 잘못 알고 어짜든지 사람 좋게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 좋게만 하니까 우선은 저도 좋고 그 사람도 좋지마는 일단 그 한 단계가 지나가면은 나중에 가서 원망으로 화해지고 맙니다. 원망으로 화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그때 이렇게 해 줬으면 괜찮을 터인데 저렇게 해 줬으면 괜찮을 터인데.’ 그렇게 해서 도리어 원망거리가 되는 그런 관용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관용이라 말은 그 사람에게, 사람이 원망할 것도 있고, 미워할 것도 있고, 또 괘씸한 것도 있고, 원수도 있고, 섭섭한 것도 있고, 모든 그런 것이 많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상대방의 행복을 진정 원하는 그 행복이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서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안하는 그런 것이 많습니다.

여게 관용이라 말은 상대방의 자기와의 관계가 어떠한 뭐 물질 관계, 윤리 관계, 또 정리 관계, 자존심 관계, 인격 관계, 사업 관계, 명예 관계 뭐 별별 그런 관계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에게 제재를 받아 가지고서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아주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래서 일생 동안 예수 믿는다고 믿지마는 분석을 하면은 내나 전부가 복수주의, 원수 갚는 복수주의 이것 외에는 다른 것이 별로이 없는 그런 것이 인생들인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됩니까? 여게 관용이라 말은 그런 것이 암만 있어도 그것 때문에 상대방에게 대해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그의 행복, 진정 원하는 그가 참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진정 원하는 그이에게 성공과 유익이 되어지도록 그렇게 진정 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대해서 소원하시는 거와 같은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서 상대방을 대하는 걸 가리켜서 관용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관용이라 이런 것도 해석을 잘못해서 인간적인 이 관용으로 가지고서 죄악만 자꾸 번성됩니다. 죄악만 자꾸 번식돼요. 그게 제딴에는 아주 관용인 줄 알고 또 처세술인 줄 알고 그 사람이 아주 관대한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 죄악만 마구 무성하게 자라게 해 가지고서 저도 망하고 그도 망하고 일생 동안 산다는 것이 멸망만 마련하고 구원은 하나도 마련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 관용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자기와의 관련이 어떻게 됐든지 상대방의 진정 영육의 행복, 영육의 성공, 승리, 그것을 진정 원하는 그런 사람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줘라 그 말입니다. “관용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알게 하라” 이것이, 예를 들면은 돌담을 쌓을 때에 돌 한 개 밑절미 놓고 그 위에 또 두 개째 놓고 또 세 개 놓고 이렇게 돌을 포개 올리는 것은 뭐 그것은 아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들지 못하는 돌은 못 들어 올리지마는 자기 힘으로 들 수 있는 돌이라면 돌 한 개 놓고 돌 위에 또 포개 놓고 포개 놓는 거는 할 수 있습니다. 뭐 자기 힘껏은 두 개를 포개든지 세 개를 포개든지 열 개를 포개든지 이렇게 포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밑에 돌 놓고 그 위에 포개지 아니하고 놓는 돌은 한 개도 못 놓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한 개도 못 놓습니다. 아무리 장사라도 밑에 돌 놓고 돌 위에 포개는 것은 몇 개든지 놓을 수 있지마는 밑에 돌 없이 그 위에 돌을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절대 못 놓습니다. 그거 놔집니까? 안 놔집니다.

또 이런 집도 지을라면 기둥이 있고 위에 봇짱과 뭐 이런 것이 있어야 돼지지 기둥 없는데 그 위에 무슨 봇짱을 할 것이며 무슨 스라브를 할 것입니까? 밑에 받쳐 주는 게 있어야 스라브가 되지. 또 일층을 짓고 난 다음에 이층을 짓지 일층 안 짓고 이층만, 이층 짓는 그런 능력이 이십세기의 과학으로도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것은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고 또 더 기뻐하고 이 기쁨을 가진 후에 그 사람이 관용이 되어지지 이거 가지기 전에는 관용이라 하는 것은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져야 관용이 됩니다.

“관용을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 말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그런 뜻도 있지마는 주님이 지금 너와의 거리 멀지 않게 있다. 그러면 거리 멀지 않게 있다. 주님이 자기와 거리 멀지 않게 있으니 자기가 그렇게 관용하는 그것이 주님하고 딱 들어붙는 이 사실이라는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관용은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요구하는 관용은 불택자로서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치 말고” “아무것도 염려치 말고” 염려 안 할라 하는데 염려가 안 됩니까? 염려를 안 할라고 해도, 그러기에 사람들은 무슨 문제 없는 사람이 없는데 염려를 안 할라고 해도 안 되니까 그만 술을 먹든지 뭐 술도 좀 독한 거 빼갈이나 뭐 이런 좀, 술을 먹고 얼얼하게 그만 다 잊어버려서 그래 염려를 없앨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게 “염려를 말라” 이말은 모든 것에 완전 해결이기 때문에 염려할래야 염려할 것이 없는 그 염려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염려를 잊어버리고 덮어 둬서 염려하지 말라는 그런 것 아닙니다. 이것도 순서대로입니다.

관용하는 사람 되고 지금 주님이 자기와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 지금 떨어지나 주님과 밀접해서 하나가 되어지나 하는 요것을 지금 보는 사람 되고 난 다음에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라니까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사정이 이렇다고 형편을 도고하고 또 간구하고 또 간구하면서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것은 다 외식의 형식이 아니고 진정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 기도하면서도 참 기도하면서도 감사하고, 자기가 자기된 것이 어떻게 행복된지 감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러니까 위에 무엇을 기도하고 또 간구하라 했는데 그 뒤에 답안을 보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평강, 한없는 평강, 한없는 평강 한없는 만족 한없는 기쁨 그것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게 된다 그렇게 말했어. 가득 차게 된다. 그러면 이게 행복입니다.

이러니까, 안 믿는 사람 가운데에 그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조금 다른 사람이 모두 그 사람이 정신 이상이라 돈 사람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사람이 어째 그래 가지고 그만 그걸 잊어버렸어. 그래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그라면서 과거에 그 미쳤던 그것이 너무 그리워서.

그만 그때는 아무 근심 없이 살았는데 이렇게 그만 그걸 잊어버리고 나니까, 그렇게 태평 세계에서 살았는데 그만 고통스럽고 미운 것이 생기고 원망스러운 것이 생기고 이래서 불행으로 느끼고 있는 그런 사람을 제가 봤습니다.

이랬는데 그런 사람은 예수 믿지 안하는데도 자기가 완전히 정신이 이상되는 데에서, 정신 이상에서, 정당한 정신 가지고서 고민한 그런 것을 벗고 평안하게 사는 그런 사람도 있는데 이 예수 믿는 사람이 얻는 그런,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 가운데 기쁘고 있는 평강스러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인데 이 평강이 참 우리 속에 가득 차고 충만해야 되는데 이것을 그만 잊어버려 놓으면 기독자들이 힘을 못 씁니다.

그래서 오늘밤에는 우리가 이 계명을 지켜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이 말씀을 증거를 합니다.

제가 그때 내원사 산장여관이라는 그 여관에 가 가지고서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있는데 거게 보니까, 그때가 아마 봄쯤 됐던가 뭐 냇가에서 그저 하루 종일 춤추고 놀고 이래 뛰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래도 기쁘게 사는데, 어짜든지 사람은 기뻐야 됩니다. 기쁘지 안하면 그 사람에게는 사망입니다. 뭐 돈이 있든지 지위가 있든지 기쁘지 안하면 사망이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기쁘게 살라고 술을 취해서 기뻐하든지 그뭐 또 어떻게 하든지 기뻐하든지 그 기쁘게 살라고, 그러니까 여러날 동안 지나다가 그 하루 좀 비정상의 기쁨이라도 기쁨을 가질라고 그렇게 날을 받아 가지고 그 기쁨을, 그날 보니까 그 노래를 뭐 아침에 한 열시쯤 시작하더니마는 저녁먹고 늦게까지 냇가에서 기뻐서 뛰고 굴리고 그래 노는데, 그래 내가 그것 보고 ‘저 사람들은 저래따나라도 기쁜데 우리 기독자들이 기쁘지 안한 기독자들은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 그 기쁨은 또 우리는 못 가집니다. 가져봐야 그거 빤하기 때문에 그 기쁨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지 안해. 우리의 지식은 벌써 관철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멍을 뚫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워진 게 없는고로 그 장래를 보기 때문에 기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러면 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이요 또 항상 기쁜 거게서 자꾸 기쁨이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거는 다시, 그라면 항상 기쁜 그 기쁨에 또 그 기쁨이 또 갱신돼. 기쁨이 또 새로와져서 또 더 기쁘고 더 기쁘고 자꾸 더 기쁘고, 그러면 더 기쁨이 얼마나? 또 기쁘고 또 기쁘고 자꾸 더 기쁘고 자꾸 이래 새로와지는 것이 기독자의 기쁨이다.

그라고 나면은 어찌 되느냐?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대하듯이 그렇게 그에게 대해서 진정 행복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진다.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진다.

우리가 이걸 잘못 해석해 가지고서 그저 무사주의로 모든 것을 죄나 뭘 용서주의로 이래 가지고서 그 사람하고 접하면은 얼마 안 접해 사람을 버려 버립니다. 그건 관용이 아니요. 그거는 사람을 감옥에다가 집어넣어서 자꾸 가둬재끼는, 가둬서 없애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거게서 해방시키는 것 아닙니다.

이 관용이란 말은 해방이라는 뜻입니다, 해방. 해방. 모든 묶이고 얽힌 데서 해방시키는 것.

그러면 관용의 사람이 되어지고, 또 점점 주님이 보여져서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지고, 또 염려 없는 사람이 되어지고, 또 모든 것을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하나님하고 의논하면 다 돼 버려. 의논하면서 항상 또 감사함으로 살아. 그러니까 그 마음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평강으로 그 마음이 충만하게 돼서 ‘인간이 도무지 그렇츰 좋을까?’ 인간이 암만 이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를 할라 해도 표시할 수 없는 그 정도의 이 평강으로 충만해질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기쁨된 기뻐하는 이것도 하나님의 계명인데 뭘로 어떻게 해 가지고 우리가 기뻐해야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돈으로 인해서 기뻐하는데 그러면 돈 오면 우리가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돈으로 기뻐하는 그 기쁨은 혹 정신 없어서 어찌 갑자기 퍼뜩 기뻐해도 혹 정신 없는 사람이면 몇 시간 기뻐할 것이고 정신이 까랑까랑한 기독자라면 그거는 한 시간도 기뻐하지 안할 것입니다, 돈으로 기뻐하는 것.

무슨 또 자기 이 세상에 어떤 일에 형통하게 성공이 되니까 기뻐한다는 그런 기쁨도 기독자들은 가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항상 기쁨이 됩니까? 그 기쁨이 또 자꾸 더 충만해지고 자꾸 강해집니까? 이러니까 여게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 이 기쁨은 우리가 첫째로 깨달을 것은 이 세상이 기뻐하는 기쁨은 아니라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규명을 지워야 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기쁨은 아닙니다. 그 기쁨은 항상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 기쁨은 점점 그 기쁨이 새로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뭘 기쁘겠소? 그러면 성경에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네가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이 무엇이 너에게 유익하노?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고를 줘서 그로 하여금 다 늙어지게 만드는 것 정력 소모하게 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다.” 이랬으니까 항상 기뻐하는 이 기쁨 우리가 찾아야 되겠는데, 우리가 물론 하고 있지마는. 이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은 아니라 하는 요것을 판명을 지워 놓으십시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무슨 세상에서 경영하는 일이 잘되고, 또 수입이 많고, 또 잘먹고 잘입고, 또 다른 사람이 존귀하게 이렇게 높여 주고 뭐, 그런 것 또 이런 저런 행락, 별별 행락 취미 다 있을 터인데 그런 것은 다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늙어져도 변동될 것이고, 병들어도 변동될 것이고, 죽으면 아주 또 없어질 것이고, 이러니까 그 기쁨이야 항상 기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거 항상 기뻐하는 이 항상은 끝없는 기쁨을 말합니다. 끝없는 기쁨.

끝없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기쁨은 아닌 기쁨을 우리가 가지고서 계속 기뻐해야 되겠는데 이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항상 기쁘겠소? 밤에 생각해도 기쁘고, 낮에도 기쁘고, 감옥에서도 기쁘고, 사형을 받아도 기쁘고, 고문과 고형을 당해도 기쁘고, 죽음을 당해도 기쁘고, 멸시와 천대를 당해도 기쁘고, 죽어도 기쁘고, 죽고 난 다음에도 기쁘고, 부활할 때도 기쁘고, 심판에 가도 기쁘고, 항상 기쁘고, 항상 기쁠 수 있는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 조부라운 그런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무한한 그,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끝없는 측량 없는 그런 상대하는 거와 같은 그런 상대자가 관대자가 되어져라 이렇게 할 그런 그 기쁨이 뭐일란지?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자기를 위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내는 것도 남 위해서 성내고, 까다로운 것도 남 위해서 까다롭고, 야단치는 것도 남 위해서 야단치고, 큰 소리 야단 남 위해서 야단치지, 남 위해서 하지 남 위해서 안 하고 자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어. 이것은 기독자들이 조금만 성장되면은 다 이것은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지요. 미워하는 것도 뭐 저 때문에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한테 이렇게 하니 미워할 것 없소. 그런 것은 뭐 억만 명이라도 얼마든지 참고 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그걸 미워하는 것이고, 노하는 것이고, 책망하는 것이고, 또 큰 소리 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아니고 자기 위해서 하는 일이 없어.

이런데 이 항상 기쁜 것, 그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 무궁토록 언제든지 기쁠 것, 사형장에서도 기쁘고, 가난 속에서도 기쁘고, 병 중에서도 기쁘고, 지금 숨이 깔딱거리면서도 기쁘고, 이렇게 항상 이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데, 죽고 난 다음에도 기쁘고, 천국 가서도 기쁘고, 항상 기쁠 수 있는 이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 기쁨을 예수님이 주시기 위해서 왔는데 이 기쁨을 우리가 가지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데 이 기쁨을 우리가 잊어버려 놓으면은 우리는 참 불쌍한 사람이오.

이 기쁨 잊어버리고 나서 자기가 뭘 기쁠라고 뭐 일을 한번 해 보고 어떤 사람은 기쁨, 그 기쁨이 없어지고 좀 쓸쓸해지고 좀 마음이 뭣이 허젓해지고 모든 게 공허감이 생겨지고 좀 답답함이 생겨지고 컬컬함이 생겨지면 ‘이거 이러니까, 이러니까 뭣 때문에, 한번 그래, 한번 바람 쐬러 가 볼까? 관광을 가 볼까? 또 그리 안 하면 두 부부 저 시장에 한번 뭐 밥 사먹으로 한번 가 볼까? 또 극장을 가 볼까?’ 이렇게 찾지마는 그것은 기독자의 기쁨은 아닙니다.

참 기독자라면은 가서 구경하고 웃고 이라고 나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통회가 나올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왜? 좀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들은 땅위에 그런 거 가지고는 기뻐하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 그 사람은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인데 술을 먹을 때는 뭐 먹으면 누구보다도 놀고 노래 부르고 춤 추고 뭐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되게 놀아도 술을 먹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 다 떨어져 가버리면 맨 뒤에 쳐져 가지고 술 먹고 그라고도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자기 혼자 있든지 집을 돌아가든지 할 때는 늘 울며 간다 말 들었습니다. 늘 울면서. 왜? 안 믿는 사람이라도 마음에 눈이 밝으니까, 밝은 사람은 그 결과가 어찌 되며 인생의 장래가 보여지기 때문에 그 기뻐하지 못하고 한다는 그런 사람 대개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제가 들은 데 안 믿는 사람으로서 침대에서 사흘 동안을 인생이 불쌍하다 인생이 불쌍하다 눈물 흘리면서 그렇게 혼자 자문자답으로 호소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말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기뻐하라” 뭘로 가지고 이거, 우리가 이 기쁨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는데 이 기쁨을 좀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는데, 무슨 기쁨을 뭐 어데서 이 기쁨을 어째 찾아야 되겠습니까? 이 기쁨. ○○○목사님이 알란가? 오늘 내가 저 기도막에서 보니까 막 고함을 꽥꽥 지르면서 뭐 야단을 지기고 이래 기도하는데, 어째 만나봤어, 주님 만나봤어요? 만나봤어? 뭐 떠들어 쌓대, 내가 보니까.

우리가 이 기쁨은 세상 기쁨과 달라서 피조물을 상대해 가지고는 이 기쁨을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자기 몸 밖에서 이 기쁨을 만나고 찾아갈라고 아무리 허덕거리고 돌아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기쁨은 자기 속에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 기쁨은 자기 속에 있습니다. 이 기쁨은 자기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자기 속에 있는 기쁨을 이것을 자꾸 “문을 두드리라” 열립니다.

“찾으라” 만나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기쁨은 자기 안에 있는 기쁨인데 이 기쁨을 자기가 만날 수 있고 이 기쁨을 볼 수 있고 이 기쁨의 행복을 자기가 누릴 수 있고 하는 것은 뭘로 가지고서 자기 안에 있는 기쁨을 파서 이 기쁨을 만나고 붙들 수가 있습니까? 이 기쁨을 뭘로 가지고서 이 기쁨을 찾아 만날 수가 있고 이 기쁨을 자기 것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님? 믿음이라, 그거 좀 거리가 멀어. 믿음이, 어째 믿는 건고? 믿음이라 말은 그거 틀렸다고 빵점을 줄 수도 없고 백점을 줄 수도 없고 그런데.

녜, 이 기쁨은 자기 안에 있는데 우리 생각이라 하는 걸 가지고서 이 기쁨을 찾아야 됩니다. 생각.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생각하고, 생각으로 찾아 가지고 그 다음에 붙들 때에는 뭘로 붙듭니까? 생각으로 찾아 가지고 붙들 때는 믿음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붙듭니다.

그러니까 기독자가 자기가 온 세계에 제일 행복된 사람, 제일 능력 있는 사람, 영광 있는 사람 되는 것도 그 모든 보배가 자기 몸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자기 몸 안에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남에게 있으면 그것을 얻을라 하면 참 힘이 들지마는 자기 안에 있으니까, 뭐 자기 안에 있으니까 자기가 얼마든지 가져도 다른 사람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만 보배가 자기 안에 있는데 자기 안에 있는 이것을 자기가 생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꾸 생각하면 찾아집니다. 자꾸 생각하면 찾아지는데 찾아 가지고는 그 다음에는 자기가 믿으면 볼끈 붙들려 버립니다. 생각하고 찾아지거들랑은 믿고 그러면 그만 자기에게는 기쁨이 자꾸, 자꾸 커집니다. 기쁨이 커집니다.

그러면 뭣을 생각하면 이렇게 기뻐지겠습니까? 뭣을 생각하면 기뻐지겠습니까? 뭣을 생각하면 기뻐지겠습니까? 뭣을 생각하면 기뻐지겠습니까? 저 양성원 학생들, 나는 잘 몰라. 성을 잘 몰라. 저 어데 있노, 안 보인다. 모두 자기 집에 갔는가 잘 안 보이네. 어디로 설교해 달라고 초대해서 초대받아 갔는가? 저는 배워야 돼.

초대 가면은 오늘 저녁에는 왔다고서 한 상 잘 받을란지 모르지. 그런 것 탐하고, 여기서 배우면 될 건데 배우지 안하고 가는 그런 것은 그거 내나 밥티기에 잉어가 낚이는 거 모양으로 그런 것 때문에 손해가.

자, 저 ○조사님 옆에 무슨 조사님이지? ○조사님 옆에 그거 누구야? 어? ○조사? 어데 ○○교회? ○○교회가? 그래. ○조사님 그라면 그 자꾸 생각으로 찾고, 찾고 난 다음에는 믿음으로 뽈끈 잡아버리면 꼼짝 못합니다. 생각으로 찾아 가지고 찾아지거들랑 믿음 가지고 뽈끈 잡아 놓으면 그만 자기 것이오. 이런데 생각으로 뭘 찾아야 됩니까? 저 ○조사님 옆에 있는 조사님? 대속? 대속. 그래 대속이라 하니까 낙제는 안 하겠는데.

우리가 찾는 것은, 그전에 우리 공부했지요? 기본구원이 몇 가지지요? 기본구원이 몇 가지요?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기본구원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다 잊어버렸는가배. 기본구원 손가락으로 좀 가리켜 봐요. ○○○집사님,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 다섯? 다섯? 어디 기본구원이 다섯이라? 기본구원, 우리가 기도의 제목에서 기본구원을 몇 가지로 배웠지요? 자, 기본구원을 그때 열 가지로 배웠습니다, 간추려서.

그라면 제일 처음이 뭐입니까? 자, 모두 한목 해 봐요. 첫째가? 예택 구원, 또? 다 모두 같이 해 봐요. 예정 구원, 또 창조 구원, 또 대속 구원, 또? 중생 구원, 또? 하나님의 아들된 구원, 또? 천국 시민권 구원, 또? 또 성화의 씨 받은 구원, 또? 세 가지 보증 받은 구원, 피 성령 진리의 보증 구원, 또? 생명 부활 구원, 이게 그렇게 좋습니까? 여러분들 이는 참으로 좋아서 뭐 죽을 것 같으면 몇백 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그런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안하고 믿지 않는 데에서 그렇지 이 믿으면, 자, 우리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함을 받은, 하나님 목적으로 우리가 예택받은 이 예택이 이게 천하 팔아넣으면 됩니까? 이 예택하고 온 천하를 차지하는, 온 천하를 차지하는 정권하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 ○선생? 정말로 없어? 나은가? 이 지구 땅덩어리하고 우리가 예택받은 것하고 이거 지구 땅덩어리하고 이래 둘이 저울질 하면은 어느 게 중량이 무겁지요? 어느 게 무겁겠어? 이거 지구 땅덩어리하고. 지구 땅덩어리가 무거워? 예택이 지구 땅덩어리 이거 억억만 개보다도 더 가치 있습니다.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깨달아지고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이라면은 이는 뭐 말할 수 없는 이 큰 구원인데 우리가 이 구원을 생각지 않는 데에서 마귀란 놈에게 잡혀지고 우리는 그 능력 있는 자로 살지 못합니다.

이 예택받는 것을 예택받지 못한 자가 그자가 세계 갑부라면 그 세계 갑부 재산 가지고서 예택을 돈 주고 살 수 있겠소? 그럴 수도 없지만 우주를 준다고 이 예택을 살 수 있겠소? 못 사. 이게 심령이 어두워서 생각지 않기 때문에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생각하면 참 뭐 놀랄 일이고 생각하면 또 놀랄 일이고 이 사실을 믿을 때에 자꾸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뭐 형언 못할 수 있는 형언 못할 기쁨이 자꾸 충만해져요.

그 예택을 자꾸 믿으니 그 예택을 자꾸 믿고 생각하고 믿고 하니까 아무 염려할 것이 없어. 뭐 못 할 게 있어, 뭐? 이 사람이라야 관대 관용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택했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 모든 것을 다 전개시키고 또 모든 것을 창조 섭리해 나가는데 이 예정이 나 위해서 예정이 돼 있다는 것, 이 예정이 나 위해서, 내 구원 위해서, 예택된 내 구원 위해서 예정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자기가 생각하고 놀라지 안할 자 없습니다.

마음에 뭐 기뻐서, 기뻐서 이거 외에, 예정 이 예정이 내 구원 위해서 에정됐는데 이 예정 구원을 생각하고 또 뭐 딴거 구할 게 아무것도 없어.

예정 구원, 창조 구원, 신인양성일위가 해 가지고서 우리를 대속해 주신 대속 구원, 세상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가지고서 내 대신 죄의 문제를 내 대신해서 해결지웠고 하나님의 공심판, 공심판을 누가 모면할 수 있어, 공심판을 누가 벗어날 수 있어? 공심판에 누가 통과할 수 있어? 이 공심판 통과를, 하나님이 이 화친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되는 이 일을, 이거는 뭐 말로 다 할 수 없어.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됐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됐지, 천국 시민권을 얻었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 같은 하나님같이 온전해지는 성화의 씨를 받았지, 성화 씨가 뭐인데? 성화 씨가 피와 성령과 진리의 씨라. 진리의 씨. “너희들이 거듭난 것이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됐다” 진리 씨, 영감 씨, 주님의 대속의 공로의 씨. 이렇게 영원 무궁세계에 갈 수 있는 이 생명의 부활을 받는 거, 이런 뭐, 이 기본구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해요, 기본구원을. 그때 내가 ○○○선생이 보니까 그 비니루다가 입혀 가지고서 몇 가지를 해 놨는데 아주 그거 잘했어. 그런 걸 좀 할 수 있으면 해 가지고서, 그 뭐라 하노? 카드라 하나? 코팅이가? 코팅인가 뭐인가 그걸 좀 많이 해서 이만치 이래 가지고서, 왜?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서 자꾸 외워. 하나씩 자꾸 외워요.

○○○씨, 어데 있어? 그거 하는데 한 장에 얼마 치였어? 백 원씩 치여? 백 원? 아따 그라면 그거 비싸다. 백 원 아니라 천 원이고 만 원이라도 쌉니다. 그런 걸 아마 그전에 있는 그런 걸 좀 모아 가지고서, 열 개면은 천 원, 백 개면 만 원 아니요? 그것 좀 만들어 봐요. 만들어서 이래 가지고 다니면서 하나씩 보겟트 넣어다니며 자꾸 외워요. 이 보겟트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암만 가지고 다녀도 피이지도 안하고 좋겠어. 자꾸 외워.

아까 물으니까 믿음이라 하는데, 녜, 내가 말한 것은 생각을 하고 생각해 가지고서 믿음이 나와야 되지 믿음만 그라면 재미가 없어 안 돼. 자꾸 이 생각해 보면은 만나게 돼요. 잡게 돼요. 생각해서 잡아 가지고서 믿으면 돼요.

이것을 자꾸 생각하고, 또 비판해 보고, 평가해 보고, 논리해 보고 자꾸 이라는 데에서, 그러면 기독자의 담력도 자기 안에서 나오고, 지혜 전지의 지혜도 자기 속에서 나오고, 전능의 능력도 자기 속에서 나오고, 영원한 기쁨도 자기 속에서 나오고, 평강도 자기 속에서 나오고, 한없는 그 하나님같은 그런 존귀한 인격도 자기 속에서 나오고 막 자기 속에서 오만 보배가 다 나와. 생각만 하면 생각에서 좔좔 나와.

그 속에 뭐이 들었는데 그래, 저 ○○○교회? 그 속에 뭐이 들어서 속에 자꾸 좔좔 나와? 그 속에 뭐이 들었어요? 그 속에 뭐이 들었어요? 그 속에 뭐이 들어 자꾸 속에 능력도 나오고, 지혜도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평강도 나오고, 존귀도 나오고, 인격고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뭐 좋은 거 자꾸 다 나와. 그거 참 이상하네. 우리 속에 뭐이 있는데 우리 속에 자꾸 그런 게 다 나와요? 우리 속에 뭐이 있는데?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오만 것 다 나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요 능력이요 기쁨이요 평강이요 영광이요 존귀요 사랑이요 승리요.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생명이 떨어지면 그 시간부터 썩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격과 영에 대해서, 우리의 인격이라면 영적 인격인데 우리의 인격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면 그시간부터 우리는 썩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움직일라고, 말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고, 생각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고, 또 소원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소원하고, 행동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움직일라고 애를 쓰고 이거 한 형식으로 해도 자꾸 그리스도로 이렇게 움직일라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해서 이래 움직이게 되면은 거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냐? 그리스도로 인하여 동하고 정한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에녹은 어떤 사람이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보는 것도 주님으로 보고, 보는 것도 주님과 같이 보고, 듣는 것도 주님과 같이 듣고, 말하는 것도 주님과 같이 말하고, 언행심사의 전부를 저 혼자 하지 안하고 주님 모시고 주님으로, 주님으로 보고, 주님으로 듣고, 주님으로 말하고, 주님으로 생각하고, 주님으로 느끼고, 주님으로 소원하고, 이게 주님하고 동행하는 거라. 에녹은 주님하고 동행해서 산 채로 승천했어. 이거는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의 도리로 주신 것입니다. 계시 인물이오. 주님과 동행에는 죽음이 없다 하는 것을 보입니다.

주님과 동행에는 죽음이 없다.

주님에게 피동하는 엘리야는 일생 동안 그의 생활이 주님에게 피동이라 주님에게 순종하는 순종만 했지 자기 단독이 하는 일이 없어. 비오지 않게도 하나님께서 비오지 않게 하면은, 네가 비오지 않게 하라 하면 비오지 않는다 하는 그것도 순종으로 한 것이지 엘리야 단독으로 한 일은 없어.

엘리야의 전 생애를 연구하면은 그는 하나님께 피동으로 살았습니다. 피동으로 산 그것 가지고서 그는 죽지 안하고 산 채로 승천했어. 하나님께 피동은 영생이요 죽음 없어. 피동은 다 생명이요 영생이다. 피동은 영생이다. 하나님과 동행은 영생이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기독자들이 주님과 동행할라고서 애를 쓰고 주님에게 피동될라고 애를 쓰는데 가다 보면은 내나 동행하다 보면은 어떤 사람이나 사건 만나고 그래 버리면 그만 주님 잊어버리고 그 사건하고 저하고 둘이, 그 사람하고 둘이 짝자꿍이 돼 이라다 보니까 주님 잊어버렸다 말이오.

이라니까 또 사람이 기가 차서 이제, 어짜든지 주님과 자기와 둘이 하나되어 가지고 모든 사물을 다 취급하고 모든 인인 관계를 다 취급할 그때는 다 영생이 됩니다. 이 주님은 참 보배요. 주님은 참 보배요 보배요 보배요. 주님만 생각해서 주님하고 나하고 함께 같이 듣고 보고 생각할 때는 다 생명이요 실수가 없고 다 영생인데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주님으로 인하여 살기가 이렇게 어려워.

어려운데 우리 구원 영생은 어떻게 살아야 영생한다 했어요? 요한복음 6장에도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다 영생한다” 이랬는데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어떻게 산다 했습니까? 어떻게 산다 했소,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주님으로 인하여.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나로 인하여 살리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피동되어 산다 말 아닙니까? 이거 우리가 연습해야 돼요.

주님과 동행하기를 연습하고 주님으로 더불어 피동되어 주님에게 순종으로 연습, 에녹은 동행으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안하고 영생했고 엘리야는 순종으로 영생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세상에 암만 근심이 있다 할지라도 근심은 꿀밤딱쟁이만, 근심은 아무리 큰 근심해 봤자 사형받는 근심보다 더 큰 근심 있습니까? 사형받는 근심에 비하면, 사형받는 근심을 꿀밤 한 개만한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 우리 안에서 찾으면은 이 태산 지구 땅덩어리보다 더 큰 기쁨이 있으니까 그까짓 거 근심 어데 갔겠소? 다 없어져 버려.

이러기 때문에 자기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인데 이 그리스도를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이것이 기초가 돼야 모든 신앙 생활이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도 안 되고 억지로 강제로 자기가 의지나 결심 가지고 할라 하면은 부작용이 생겨서 수월하게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게 부작용이 생겨서 계명 하나 지키면 죄는 열 가지나 스무 가지나 더 지어. 속에는 더 썩어져요, 더 더러워지고 더 썩어져요. 그래 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원망 낙심 낙망하고야 만다 그거요.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따라합시다.주안에서!항상 기뻐하라!내가 다시 말하노니!기뻐하라!이 기쁨은!자기 안에 무한히 있으니!생각과 믿음으로!다져라! 그라면 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거는 뭐 돈드는 것도 아니야. 잘나야 되는 것도 아니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무식해도 생각 못 할 사람이 어데 있습니까? 믿으면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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