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선지자선교회 1984년 1월 1일 주전

 

본문 : 요 1: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오늘은 84년 1월 1일이 주일이 됐습니다. 84년으로 말하면 오늘이 첫 날이  되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이 다 정한 것이지마는 우리는 그것을 기회  기회로 삼아서 우리 구원에 잘 이용되도록 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우리가  83년까지는 살아왔었지마는 84년이라는 이 해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해요 또  달도 처음으로 맞이하는 달이요 또 새 달이요 처음으로 맞이하는 첫 날이요 새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 가운데에 있는 어떤 도리를  다 같이 생각하고 궁구하는 기 좋은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에서 오늘 세  가지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은 날을 살아왔고 또 잘했든지 못했든지 그 많은 날을 다 우리가  거기에서 영원을 마련해 지나왔습니다. 우리가 몰라도 그 마련한 것이 지극히  작은 것도 빠짐없이 다 영원에 등록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다 연수요 달수요 이렇지마는 그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이 하루라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요 또 춘하추동  사시라는 것도 하나님이 다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 날로 처음 날로 맞이하는, 언제든지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처음 만나는 날 새로 만나는 날 다시 두 번 만나지 못할 날 그 새날을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 새 날에 대해서 합당한 새 출발을 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또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지마는 세상에 계실 때에 언제든지 만나는  새 날은 한적한 곳을 찾아서 아버지로 더불어 의논하는 것을 첫째로 했고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게 대한 그 모든 모르는 소식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당신의 하는 일로서는 둘째 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는 아버지에게  대해서 사신 생활이요, 다음에는 사람에게 대해서 사신 생활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 만나는 날 이 순서대로 먼저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을  해야 되겠고 다음에는 사람에게 대해서 할 일을 하는 것이 순서인 줄 압니다.

사람에게 대해서 하는 일은 곧 자기도 그 안에 한 포함된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할 일을 하는 것이 사람에게 대해서 하는 일이  쉽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를 모를 때에는 어두우니까? 벌로 살았지마는  하나님의 이 도리를 알고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우리들은 차차 차차 구속을 입은  자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의 도리를 가르침 받은 자로서의 합당 한 생활에  나아가도록 늘 힘써서 가야 쉽겠습니다.

 그런고로 처음 만나는 그 새 날의 첫째 할 일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할 일이라  하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고 그대로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자기가 혹은  예배당에 모여서 여러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는 그런 일을 하는 게 좋고 자기 집이 만일 멀면  어디 한적한 곳을 찾아서 자기 개적이라도 먼저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할 일을 하고 또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며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 하루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문의도 하고  의논도 하고 인도도 받고 도움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벽 예배에, 이 새벽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첫째가, 나는 하나님을  몰랐다가 하나님을 알게 됐고 하나님의 구속을 입은 자이요 또 하나님의 법칙을  안 자가 되었으니 첫째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하나님 섬기는 마음으로 새벽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 예배 참석  못 하면 좀 전에 말 한대로 개적으로 어디에 산이든지 들이든지 옥상이든지  골방이든지. 안 되면 셋방살이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부엌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뜰이 없으면 한 방이라도 각각 한 구석을 향하여 한적한 자기의 처소를 그대로  마련해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먼저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마음으로 새 날, 첫날 첫 시간을 자기의 생활의 순서를  잡아야 될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만나면 무슨 일을 하는가?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바로 알기 위해서 연구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차차 차차 연구하면  성경말씀과 진리가 자기에게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한 것이 차차 발견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감사할 것을 발견해서 여기 이 면에 대해서 감사하고 저 면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사할 것을 찾으면 그 다음에는 기쁨도 올 것이요 이  감사하신 하나님에게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자기의 또 생활할  것이 거기에서 차차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라고 나면 자기는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언행심사에  참 바로 살기가 심히 어려운 세상 속에 들어있는 자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논하는 그 순서가 나오겠습니다. 주님이시여 오늘 내가 사는 데에는  지금 내 형편으로 말하면 이런 환경에 있고 이런 처지에 있고 이런 위치에 있고  이런 현실에 있으니 오늘 하루를 내가 여기에 대해서는 저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에게 대해서는 저 지위에 대해서 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이 사회에  대해서는 가정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는 것을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하는 그 순서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의논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나올 것입니다. 그때에 예 내가 이렇게  해야 될 것을 이래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런 저런 마찰의 애로가  있고 난제가 있겠으니 이럴 때는 어떻게 이것을 감당해야 됩니까? 여기에서  피해야 됩니까? 이것을 충돌을 해야 됩니까? 이것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돼  나가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거기에 모든 것을 문의할 때에는  자연히 하나님 앞에 인도를 구해야 되겠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런 가운데에서 자기가 과거가 자연히 떠오르게 되니까? '내가  과거에는 이럴 때에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그건 잘못됐으니까?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그런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제 어떤 사람에게 내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고 일곱 살 되는  아이인데 설 쇠니까? 이제 올해 일곱 살 되는 아이인데 그 아이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말하기를 '아버지 어머니, 내가 오늘은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무슨 회개를 하겠느냐' '제가 원치 안하는 곳에 하나님이 보내서 와서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데 보냈는가 해서 속으로 많이 원망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한 두달 동안에 살이 바짝 마르고 밥을 먹지 안하고 그저 웃지도 안하고 근심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무슨 병이 있는가 걱정을 했는데 그래 말하기를 '내가  속으로,' 말은 전혀 안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한 그런 죄를 내가 범한 것을  이제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오늘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하나님 앞에 죄지은 걸 회개를 합니다'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서,  그 부모네들이 놀래서 속으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그래 원망하면 안 되지 회개를  해라' 그랬는데 그날 밤에 무슨 하나 뉘가 예물을 보내서 오니까? '내가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이 이것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서 그라고 그 시간부터 밥을 무엇이든지 각각 잘  먹고 아주 입맛있게 밥을 먹고 그렇게 얼굴에 수심이 없는 그 쾌활함을 봤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차차 이렇게 만나지면 참 그, 마치 사람이 자기밖에 일은 알지마는서도  자기에게 대해서는 모르는 것처럼, 대구 ○○병원에 내과 과장으로 있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내과 과장인데 그 다른 병 치료에 대해서만 열중을 했지 자기는  몰랐습니다. 갑자기 자기에게 안됐어서 이거 어짠 일인고 해서 진찰해 보니까?  위암이 걸렸습니다. 위암이 걸렸는데 그 위암 걸린 것을 그 밑에 모든 제자되는  그 의사들이. '녜 그거는 수술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서 '그래', 그라면  수술을 할라고 시작을 해서 수술을 했는데 자기가 그 수술하고 나서 깨어나니까?  말하기를 '이제 괜찮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다 완전히 수술을 해서 깨끗이  됐습니다' '아 그러냐고 참 수고 했다' 하고서 기쁘고 즐거움으로서 밥도  먹었습니다. 내용적인즉 그 의사들이 벌써 배를 갈라 보니까? 벌써 틀려서 그건  백 프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판정했기 때문에 고만 그대로 덮어서 꿰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 본인에게는 알리지 안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수술한지 나흘  만에 죽었습니다. 여기에 ○○○ 목사님의 이종 사촌인지 고종 사촌인지  친사촌인지 사촌 형이라 하는 그런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모든 것의  원인인데 이것은 가마득히 모르고 눈에 보이는 외부만 무엇이 형통하고 잘 되면  다행이라 행복이라 축복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속에 참 이 암병같은 우리의  영원한 고질병되는 이거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막히는 이런 일은 사람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새로 만나는 첫날 첫 시간을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 안에 계시지마는서도 역사적으로는 또 자기 밖에도 있고 자기 마음 밖에도  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상대해서 자기를  하나님앞에 드러내 놓고 자기의 모든 환경과 자기의 입장 처지 화경 자기의  장래를 다 솔직히 드러내 놓고 하나님 앞에서 '이건 어떻습니까?' '저거  어떻습니까?' 이렇게 문의해서 의논하지 안하고는 안심이 안 되는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그라다 보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해야 되겠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되겠고 막상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라고 보니까? 어떻게 어려운 일이  있는지 어떻게 딱한 일이 있는지, 제가 오늘도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 이런 저런  모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1월1일이니까? 1일에 축하가 있을 터인데 그 축하로  인해서 이 주일을 어떻게 하나 이래서 제가 혼자로서 얼마동안 좀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런데에 이거 시험에 안  들어야 될 터인데 그러면 거기 가서도 주일을 지키는 일로 할 수도 있겠다  그라면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는 별스러운 사람이라 보여지지마는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해 가지고라도 이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하나님 앞에 거리끼지 않는  사람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서 이런 방편 저런 방편으로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다 보면 참 자기가 이길 수 없을 만한 그런 딱한 일 있습니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 앞에서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다 다니엘을 죽일라고 다  원수가 됐는데 거기에 찬한. 사람이 자기를 옹호해도 그는 참 환란 동지이기  때문에 그거는 기막힌 동지인데 하물며 대왕이 되는 그분이 자기를 구원할라  하는 그런 동지로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정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참 죽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죽음으로 그 해결된다면 그분이 생명을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런 마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도 안 되니까? 그 사정하는 그 사정에 하루  종일 '참 미안하고 안됐습니다마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면 나도 절단나고 왕에게도 피해가 갈 터이니까? 내가 이것을 계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끝내 기도를 안할 수 없습니다' 하는 사람으로 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입장인 지 지위를 가지고 권세를 가진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은  다르고 형편은 다르고 종류는 다르지마는 이와 같은 입장들을 다 당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점에 있어서도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 안할 수 없고 또  거기에서 이리 저리 피해 갈 그 길을 인도를 구하지 안할 수 없고 또 잠언 21장  1절에 보면 왕의 마음은 막아 놓은 보의 물과 같기 때문에 그 주인이 이리  될라면 이리 되고 저리 될라면 저리 된다 했습니다. 자기 위의 상관의 그 모든  마음은 우리 주님이 다 딱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그 상관이 자기에게 압박할  수도 있고 박해할 수도 있고 거슬리게 할 수도 있고 또 자기를 도와서 이렇게  아주 존대할 수도 있다 이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분에게 또 잘 보이도록  그렇게 밉게 보이지 안하고 충돌적으로 반감적으로 그렇게 되지 안하도록 또  그런 일에 대해서 또 당신에게 기도를 해야 되겠다 이기요.

 이러니까?, 첫날 첫 시간 첫 일로서 하나님을 대하여 하나님과 모든 것을 다  의논해서 해결을 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이제는 안심하고 튼튼하게 나가서  사람들에게 조심있게 하루 생활을 지나고 그 다음에 모든 사건들이나 물질을  대할 때에 시험에 들지 안하도록 조심있게 그렇게 대하는 이 순서 생활이  아니고는 안심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 새벽 기도에 와서 참석하는 것이지,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또 자기에게 새 은혜 주실 그 설교가 있으니까?.

설교도 듣고 또 거기에서 이런 저런 그런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도 있고  그 다음 하나님께 대한 순서 다음이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요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자기가 은혜받는 것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도 있고,  아내가 이거 안 나가면 새벽 기도 안 나가 면 또 저 사람 나만 보고서, 아무  것이도 안 나가니까? 나도 안 나가도 되겠다 이럴터이니까? 부득이 또 그 사람  때문에 또 나가야 된다이기요. 이래서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 중에 말단입니다. 맨끄트머리, 다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새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거기에 속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연달아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며칠 전에 광고를 했습니다. 이 권찰님들은 어짜든지 자기  맡은 그 식구들에게 새벽 기도에 새해부텀은 꼭 참석을 해서, 참 전지 전능 전재  주권 주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 앞에 먼저 경배를 드리고, 경배를  드리고 그분에게 솔직히 모든 것을 의논해서 모든 각 방면으로 은혜를 입도록  그렇게 합시다 하는 것을 제가 광고를 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그 보고 있는 권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찰님들 반사 선생님들 이런 분들은  산 위에 세운 성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 분들이 하나 움직이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를 참 '일파동 만파동' 과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주목하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가 동하면 다  동하고 정하면 정하기 쉬운 것이니까? 어짜든지 새벽 기도에 힘을 쓰도록  개적으로 그렇게 전화라도 해 가지고서 좀 같이 협동하도록 권유를 하십시오  하는 그런 말을 제가 광고를 지금부터 사홀 전인가 나흘 전인가 했습니다.

 이제는 오늘이 첫날이니까? 내일이 둘째날이 되겠습니다. 84년 둘째날이  되겠습니다. 이제 금년에는 내가 새벽 기도를 시작하고 한 번도 빼지 않겠다 한  번도 빼지 않겠다 그 빼지 않는 데에는 내 마음이 약해져도 안 되지 만 하나님이  병을 줘도 안 되겠습니다. 원치 안하는 고런 형편을 줘도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이 자리에 나올 것이 아니라 병석이면 병석에서도 오늘은  첫날이라 오늘 내가 첫날 첫 시간 하나님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모든  것을 의논해서 그 분의 은택을 입어 오늘 하루를 살겠다 하는 이런 순서로 사는  이 슬기로운 생활을 할 것을 작정을 하고 꼭 이대로 실행을 합시다.

 바쁠수록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존. 웨슬레는 말하기를 그날 일이 바쁘거든  기도를 많이 하라 했습니다. 일이 바쁘거든 기도 많이 하고 복잡하거든 기도를  많이 하라 했습니다. 그거는 다 신앙의 사람들의 경험이요 체험입니다. 아이구  바쁘니까? 오늘은 기도할 시간 없다 하면은 벌써 그날은 저는 실패로 지금 속해  가지고 실패로 그날 하루는 진행되고 맙니다. 오늘은 바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  많으니 하나님의 특수한 은혜를 내가 입어야 되지 안 입으면 안 되겠다 하여  하나님으로 더불어 그날은 많은 시간을 걸쳐서 충분한 의논과 그분의 은택의  허락을 입고야 출발하는 사람은 그날은 성공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쁘면 고만 이 중요한 해결 열쇠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바쁠수록이 그 해결 열쇠를 손에 딱 잡고 있어야 됩니다. 손에 쥐고 있어야 착착  꺼내서 해결을 짓지 바쁘다고 열쇠 잊어 버리면은 한 칸도 못 들어가고 자기가  포위된 그 감옥에서 한 감옥도 탈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같이 한번  금년에는 첫날 첫 시간 먼저 하나님을 상대해서 경배하고 그분의 은택을 입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인도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대우하는 이 일을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일이나 물건 취급을 실수없이 잘하도록 해  달라는 이 기도를 우리가 통성으로 다 같이 한번 기도합시다.

 다 같이 한번 이 시간 눈감고 이 종소리가 날 때까지 다같이 기도합시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세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를 구속하신 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 대해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의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하나님의 조심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지식을  가져야겠고 또 믿음의 행위를 가져야겠고 또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지식이라 말은 사람들에게 배우고 듣고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당시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의 지식을 가르쳐서 믿음의 지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딿는 지식, 당씬을 딿는 지식.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라는  말은 당신이 이리 인도하시고 저리 인도하시고 당신이 이렇게 교훈하시고 저렇게  교훈하시고 당신이 이렇게 명령하시고 저렇게 명령하시는, 당신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된 그 행동을 가르쳐서 믿음의 행위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이 믿음의 사람은 당신이 우리에게 대해서 온갖  섭리를 해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이 사람 되게 하시려고 저런 사람 되게 하시려고  요 면은 요런 사람 되도록 조 면은 조런 사람이 되도록 당신이 우리를 만들고자  하시는 그 만들고자 하시는 그대로의 만들어짐을 받은 사람된 것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이  우리가 되는 이 일을 오늘 또 새롭게 하는 기 가한 줄 압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고 깊고 높고 길고, 사람의 지식이 측량 못할  인간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그 사랑에 대해서 믿음의  지식으로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야 되겠고 믿음의 행위로 그 사랑을 입어야  되겠고 믿음의 사람으로 그 사랑을 입어 믿음의 지식의 사랑, 믿음의 사랑의  지식 믿음의 지식의 사랑, 믿음의 행함의 사랑, 믿음의 사랑의 행함 믿음의  사랑의 사람, 믿음의 사람의 사랑. 이것이 되어지도록 우리는 또 새롭게  연구하고 생각하고 명상하고 묵상하고 자기의 과거 현실에 과연 내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은 행위였더냐, 하나님의 사랑이 내 행위에 있었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내 지식에 있었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내라는 사람에게  있었느냐 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이었더냐 그것을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의 지식대로 그 넓이가 얼마나 넓으며 깊이가 얼마나  깊으며 어디까지 들어 갔으며 어디까지 넓어졌으며, 사람이 부활해 가지고서  무궁한 세계에서 살면서 우리가 놀래는 것은 그럴 것이요. 공간적으로  종류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우리가 볼 때에 평생 처음 만나는 성질의  일을 만났을 때에, 아 거기에도 가서 보니까? 주님의 구속의 사랑이 거기도 와  가지고 자리잡고 나를 위해서 다 정리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존재적으로라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영원한  세계에서 새로 들었고 새로 만났고 새로 봤는데 거기에도 주님의 구속의 사랑은  거기에도 벌써 와 가지고 다 해결짓고, 그와 나와는 영원한 화친의 터전을  마련해 가지고서 나도 처음 만났고 그도 처음 만났지마는서도 주의 사랑은  거기에 벌써 화친의 그 공로를 설정해서 해결을 지워 놓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 사랑 소망은 항상 있을 것인데' 했습니다. 모든 것은  끝났지마는서도 가도 보니까? 새 소망이 있고 가도 보니까? 새로 또 복종해야  되고 또 따라서 움직여 믿음의 해야 될 것이 있고, 가도 보니까? 또 하나님의  사랑이 새로 발견되고 새로 접촉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한한 것을 우리는 많은 시간을 걸쳐서 자기 지식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대체 어디까지 갔느냐. 종류적으로는 어디까지 그 사랑이 널리  이제 우리의 대속의 그 대속의 사랑이 효력있게 가서 역사하고 기다리고 있느냐  시간적으로는 몇 해나 가겠느냐. 몇 억만년이나 가겠느냐 그 사랑이 들어서  우리에게 대해서 고난은 무슨 고난을 면해 줬느냐 무슨 고난을, 백 가지를 면해  줬느냐. 천 가지를 면해 줬느냐. 억만 가지를 면해 줬느냐. 그 사랑의 공로가  우리에게 고난을 면해 주기를 어떤 어떤 종류를 면해 줬으며 어디까지의 그 넓게  면해 줬으며 깊이 면해 줬느냐 그 사랑의 대속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되 몇 가지,  종류에나 소망을 줬느냐 금생에서는 어떤 종류에서 어떤 형편에서 소망을  줬느냐, 영원 무궁에는 얼마나 줬느냐 이것을 우리가 그렇게 쉽게 말로 들어  가지고 단박에 아는 것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이분은 자존자시요 창조주시요 무한하신 창조주시오 무한하신  시은자시요 무한하신 창조주요 무한하신 시은자시요 무한하신 그능력과  지혜자이신데 이 무한하신 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킨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연결을 시켜, 연결을 시켰기 때문에 무한하신 창조주에게  연결됐으니까? 무한하신 창조는 다 나를 위한 창조되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시은자에게 연결됐기 때문에 그분의 무한하신 그 시은은 다 내가 입을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지능자시니까? 무한하신 지능자에게 내가 연결됐으니까?  무한하신 지능은 내가 받고받고 또 받고 또 받고, 지능해지고 지능해지고  지능해져서 그 무한한 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 우리가 형언 못할 영영한  무한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를 무한한 고난에서, 우리가 물질면의 고난, 사건면의  고난. 신체면의 고난. 정신면 마음면의 고난, 금생 고난. 내세 고난. 우리의  모든 지능면의 고난. 오만 그 고난에서 우리를 해결지워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고난의 원인은 뭐인가? 고난의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죄입니다. 그  고난의 원인이 죄입니다. 금생 고난의 원인도 죄지마는 서도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고난만 벗어볼라고 면해볼라고 애를 쓰지 고난의 원인이 분명히  죄라서 그 죄를 정리하면 고난이라 하는 것은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붙들어도  고난은 삭아서 녹아버리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무한하신 이 고난의 원인된 그 죄를, 당신이 다 대속했습니다. 대속할라고  하니까? 하나님이시지마는 그 모든 걸 다 내어놔서 가난하게 안 되면 안 됩니다.

죽기까지 안하면 안 됩니다. 또 사람을 입지 안하면, 하나님으로서는 하면  초절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지 사람을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우리 무한한 이 고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 사랑입니다.

무한한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절망은 그 원인이 뭐인가? 절망은 창조주와 관계를 끊어 버렸으니까? 새로운  창조의 아무 혜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시은자와, 은혜를 베푸는 시은자와  관계 끊어졌으니까? 새로 은혜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주재자와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자꾸 앞으로 끊겨지는 것뿐이지 이미 기성 되어 있는 존재에게  대해서 관계가 끊어져서, 홍포입은 부자는 기성 존재에 대해서 끊어진 그것을  가르쳐서 물 한 방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지능에  대해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은 참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절망도 겪어 보는기 좋습니다. 자살할 만한 절망도 많이 겪어보는 기 좋고,  절망이, 절망이 분명히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강합니다. 네가 이  절망을 가질래 죽을래 할 때에 절망을 취하지 안하고 죽음을 취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세상에서 그것을 명상으로 느끼고 영감으로 느끼고 자기가  실제로 그 체험 실험에서 느끼고 느끼는 그런 것은 참, 외부적이요 사소한  일입니다. 이 무한한 절망의 원인은 하나님과 끊어진 것인데 이 하나님과 끊어진  이 절망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사망을 받으나 당신은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을 화평으로 하나님을 거머쥐고 저주 사망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달라붙으면서 저주 사망 받아서 끝났으니까? 당신은  사망으로 끝났습니다. 끝나도 화목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그 화목은  죽음으로서 승리해 버렸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원수로 절단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완전 승리를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난이라 하는 것은, 가난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가난인데  가난이라 하는 것은 그 가난의 원인이 뭐인가? 가난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피동줄이 끊어진 것이 가난의 원인입니다. 피동되는 피동의 줄이  끊어진 기 가난의 원인이요.

 신명기 28장에 그의 명령을 순종하면 땅 위에서 어떻게 된다는 것을 거기에  많이 기록해 놨습니다. 그것도 땅 위에 사람들이 물질면으로나 자기의 모든 사건  면으로나 자기의 신체면으로나 자기의 마음면으로나 영면으로 나 모든 면에,  모든 면에 자기에게 좋은 것이 이루어지는 부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부요라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동할 때에  피동되는 고 피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피동이라는 그 꼭대기에 피동이라는  꼭대기 속에 인간의 모든 이 물질면이나 사건면이나 자기의 신체면이나  정신면이나 자기의 영면이나 이 모든 필요한 것이 자기에게 있어지는 그 부요  필요한 것이 있어지는 부요라는 것은 이 하나님께 피동이라는 피동 꼭대기 속에  맺어져 있는 커다란 배와 같이 열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 피동이 끊어진 그것을 잇기 위해서  당신이 대신 행함으로서 비로소 칭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칭의를 우리에게 입히신 것은 영원한 가난을 우리에게 다 면제해서 영원한  부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칭의를 주신 것이고 영원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화평을 이루신 것이고 영원한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대형으로 사죄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 우리는 여기에 명상  많이 해야 됩니다. 그저 우리는 껍데기에 바빠 가지고서 그만, 실은 생각하면  가치적으로 따지면 참으로 가치없는 일입니다. 가치가, 가치가 적은 일이요 아주  매우 적은 일이요. 매우 가치 적은 그 일로 분망해 가지고서 피곤하니까? 그만  자고 또 깨면 그 일에 분망하고, 이 분명히 악령이 우리를 분망케 만들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는 사람은 내려가며 사는 기 좋습니다. 자기가  이 자리에서 살 사람이 조금 내려가면 좀 자유롭습니다. 더 내려가며 자유롭소.

지혜있는 성령의 사람은 내려가면서 살고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자꾸  올리고 올리는데 자기는 내려가기를 원합니다. 올라 갈라고 하는 기 아니라 내려  갈라고 합니다. 내려 갈라고, 역부터 내려 갈라면 자살 행위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내려 갈 길이 됐으며 됐다 하고서 그 길을 취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서 내려 갈 길 됐으면 아이구 한층 더 내려서면은 내가 평안하겠다  내가 스스로 내려가면 자살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으로 내려가게 되니 내려가게 되는 그 길 있으면 기다리다가 좋아서 그 길을  얼른 갈 것입니다.

 이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나는 내려갔는데 하나님이 또  집어 올려 버립니다. 올리니까? 또 어려움을 또 닥칩니다. 어려움 닥치면 밤낮  소원은, 소원은 자유로운 데에서, 좀 더 쉽고 수월하고 자유로운 신앙의 자유  양심 자유 믿음의 자유 하나님에게 복종 자유 이 자유로운 데에서 살려고 우리는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고난은 원인이 죄요 모든 가난의 원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그분이 가라 할 때에 가면 고만 부요해지고 놀라 할 때에 놀며  부요해지고 하지 말라 할 때에 안하면 부요해지고 하라 할 때에 하면 부요해지고  죽으라 할 때에 죽으면 생명에 부요해지고 천해지라 할 때에 천해지면  존영해지고 그분과 연결에서만 우리는 모든 종류면으로 부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 피동으로만 우리는 모든 소유면이나 우리의 사용면이나 우리의 모든  신체면이나 우리의 모든 마음 정신면이나 우리는 부요해집니다. 이것이, 이것을  위해서 칭의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 영육의 부요는, 영육의 풍성은 그분에게  숭종하는 이 피동되는 이 의, 의는 당신에게 피동되는 것을 가르쳐서 의 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의인은 어떤 것이 의인이냐? 그분의 형상대로의 그분의  모형대로의 된 사람, 그분의 형상대로의 된 사람 그것이 의인입니다 그분을  따라서, 그분을 따라서 된 것이 그것이 의인이요 의의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기난을 면하는 것은 그분에게 거슬려 피조물 단독이  하는 행위를 없애야 합니다. 피조물 단독이 하는 행위 그것 때문에 모든 가난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있으면 결과는 필연적입니다. 그런고로, 가난의  원인은 자기 독단 자율 사욕 주관 독단 모든 언행심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고  모든 부요는 그분에게 언행심사의 피동으로 말을 피동됐으면 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요해질 것이요 또 행동으로 했으면 그 행동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만하니까? 충만하니까? 그 행동이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다 충만해지고  부요해지고 누굴 누굴해질 것입니다.

 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이 창조주 시은주 전지전능 그분은 자존자  완전자신데, 완전자신데 그분에게 연결이 되면 그분과 친밀해지면 그분에게  연결되면은 그분의 충만은 내 것이요. 그분의 충만은 내 것이요. 이것이 인생의  금생 내세에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땅 위에 어떤 소망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분과  끊겨졌으면 그 소망은 반드시 그 소망에 꼬리를 물고 오는 절망이 즉시 끊어지지  안하고 닥쳐옵니다. 소망이 절망으로 변해져 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다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멸망을 받았는데 그 원인을 주님이 해결해 주셨고 그  원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공과 가르치는 데에서 다섯 가지로 산다 그 말은 우리는 이  육체적으로 살고 육체로 살고 또 우리 마음으로 삽니다. 또 우리의 그 모든  활동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물질로 살고 있습니다. 물질에도 가난도  있고 고난도 있고 절망도 있고 우리의 모든 활동 사역에 대해서도 가난도 있고  고난도 있고 절망도 있고 우리의 신체에 대해서도. 신체에도 그 종류는  한없습니다. 신체가 약해서 가난한 것도 있겠고 신체가 기능 모자라서 가난한  것도 있겠고 아무리 있어도 활동을 없어 활동 무대가 없어서 가난한 것도  있겠습니다. 신체적으로 가난한 것 마음으로 가난 한 것 마음에 고통되는 것 또  마음에 절망되는 것 이것을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한하심에 대해서, 한 가지는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지극히 큼에 대해서,  우리에게 대한 소망,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이 크심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우리가 지식으로 가져야 쉽겠고 또 우리가 우리 모든 활동하는 생활로 가져야  되겠고 우리 자체가 그런 사람으로 돼져야만 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첫날 첫 예배에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또 우리는 그대로 살 수 있어야 되겠고 그대로의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심.

 다니엘 이 다리오왕 앞에서 그와같이 산 것 장한 것 아닙니다. 장한 것 아니요.

장한 기 아니요. 그가 담대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 충성한 것도 아니요.

다니엘이 하나님의 크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자기가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자기에게 준 소망을 알았기 때문에 그 길 외에 딴 길은 못 갑니다. 딴  길을 갈 수 없어. 딴 길 가기는 참으로 죽기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요 그 길밖에  못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한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우리 소망은 첫째가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이 입으심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그 형상을 입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1장에 지극히 큰 소망. 하나님의 속성에 참예하게  되는 그 지극히 큰 소망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힘써 믿음 덕 지식을 지키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아니요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같이 되고 하나님같이 행동하고 하나님같이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하나님같이 모든 것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고  하나님같이 모든 것들을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 중에 제일 큰 소망입니다. 하나님같이 하나님 같이 우리가 되어지는 것.

 그 다음에 소망은 우리가 시은의 기관이 되는 것이요. 복의 기관이 되는  것이요.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 왕같은  제사장이라 말은 왕같은 제사장, 왕, 제사장이 누가 왕 제사장입니까? 왕  제사장은 대제사장 예수님이 왕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같은 제사장이라 말입니다.

제사장은 자존하신 하나님과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그 사이에 중보자 되어져  가지고서 하나님의 것이 중보자 제사장을 통하여서 조화돼 가지고서 피조물에게  와서 피조물에게 해가 없고 다 유익이 되고, 피조물의 것이 하나님에게 직접  감으로써 큰 대환난이 일어날 것을 제사장에게서 거기에서 조화가 되어 가지고서  하나님께 가 가지고서 영광이 되어지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사이를 서로 조화해  가지고서 화합을 해서 하나님은 피조물로 만족하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이런 조화의 역사를 이루는 직책이 제사장 직책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제사장의 이 큰 소망을 가졌습니다.

 또 우리는 선지의 소망을 가졌습니다. 선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하는 말을 대변한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까지 이 대변이  확립되지 안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올 때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선지자로  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러나,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되시고 영계와 물질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될 때에는 그때는 이제  천군 천사의 지위는 내려옵니다. 천군 천사의 지위는 교회를 받들어 섬기는 이  지위로 바꾸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 하나님의 대변자 하나님의 왕 단일. 단일  정권, 단일 정권의, 이 단일 정권의 통치하는 이 통일 정권 단일 정권이 통일  정권이 되는, 단일 정권이라는 고 자체가 하나가. 정치한다 말이 요 통일이라  말은 많은 것을 이렇게 한테 합했지마는서도 그 하나로 움직이는 걸 가르쳐서  통일 정치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한 분에게 피동됨으로서 모든 우주와  영계의 충만한 것들에게 한 분의 그 분의 움직이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다  전달해서 움직이는 그 움직임을 전하고 움직임대로 다스리는 그것을 가르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한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지는 것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선지 하나님의 왕, 만물에게 충만케 하여서 만물이 충만케  하여서 주님은 우리와 모든 만물을 위해서 당신의 있는 것을 다 죽어서 생명까지  완전히 없어졌는데 하나님이 또 있게 하시니까? 또 있고 또 있고 있는 것  없어지고 또 있고 이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는 전부 오고 그리스도의 것은  우리에게로 오고 이와같이 외어지는 이것이 대속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연결되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계대할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는 성경이 다 절절이 말했기 때문에 털끝만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소망을 가졌으니, 우리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땅 위에서  이런 입장도 만족하고 저런 입장도 만족하고 올라 갈라고도 하지 안하고 내려  갈라고도 하지 안하고 당신의 인도대로 그대로 믿음 생활, 당신에게 피동되는  것으로 그대로 사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우리는 열심히 읽어야 되겠습니다.

라오디게아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소경이다 소경이다 그런고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 말씀은, 안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식을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에 발표해 주신 이 신구약 성경 지식을 말하고 또 당신의 피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영감을 가르쳐서 말합니다. 네가 신구 약 성경 지식으로 네  지식을 삼으면 모든 사리판단과 가치 평가와 네 소원할 것 경영할 것이 그것이  다 눈이 밝아서 바로 보고. 좋은 것은 좋은 걸로 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귀한 것은 귀한 걸로 천한 것은 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식을 떠나고  인간지식으로 나가면 귀한 것은 천한 것으로 천한 것은 귀한 것으로 정 꺼꾸로  보는 무식한 소경같은 자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이 지식으로  네 지식을 삼아 네 마음의 눈이 밝게 되고 영감을 받아서 네 마음의 눈이 밝게  되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서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하는가  알아야 우리 눈이 밝아집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신구약 성경 말씀 읽고 보니까?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 시로구나'  하나님의 크심을 우리가 알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을 뭘로 봅니까? 우리 마음  눈으로 보는데 우리 마음의 눈은. 마음의 눈이 밝아야 되지요. 마음의 눈이  밝을라면 신구약 성경 말씀의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아서 이 지식으로 봐야  우리는 눈이 밝아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 무한하심,  하나님의 그 크심이 무한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할 자가 있겠느냐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두려우신 분이요. 무한히 크신 분이요. 무한한  권력을 가지신 분이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하나님의 크심을 알 때에 피조물이 큰  것에 대해서 그 피조물의 큰 것을 만드신 그 분의 더 큰 것을 찬성하고 찬양하고  피조물의 큰 것을 인해서 하나님의 크신 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안 자는 땅 위에 큰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자기가 깨달은 자는 땅 위에 어떤 것으로서도  자기가 낙망이나 고통이나 그런데 빠지지 않습니다. 슬픔과 고난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에서 치료받지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위로 받지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 우리의 소망의 지극히 큼. 하나님의 크심도 무한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무한하고 우리의 소망도 지극히 큽니다. 우리 소망은 무한한 소망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지극히 큽니다.

 그런고로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참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연구를  많이 해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이제는 넉넉하다 풍부하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아주 지극히 큰 부자가 되는 것 이것도 이 연구에서 나옵니다.

자기는 어떤 그 무쇠 가죽에, 무소 가족 속에 태양 빛에 말려서 쫄려서 죽는 그  가운데에서도 그런 것이 해할 수 없는 그 무한한 평강을 얻어서 평강의 소유자로  평안을 가진 그것이 이 연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그 원인이 죄요 모든 것이 다 독단 피조물  단독행위가,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핍절해진 것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가운데에서 모두가 다 절망이라 하는 것이 생겨진 것인 것을 우리가 점점 깨닫고  이것을 주님이 와서 다 해결을 지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극히 크심, 그 크심이 무한한, 무한하신  크심 무한히 크심, 무한히 크심, 하나님의 무한히 크심을 자꾸 성경을 보고서  연구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보고서 연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히 그 넓고  깊고 큼, 크심. 우리의 소망의 지극히 큼, 이것을 우리가 '성경을 봐서 자꾸  연구해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부요는 다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부요는  다 믿음에서 나오요. 믿음에서 나온다 말은 알고 인정하고 고대로 딿는 데서  나온다 그 말이요.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인정하고 고대로의 내가 지식하고  있어. 고대로 내가 지식하고 있소.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 것처럼 고와같이 내가  고대로 내가 지식하고 있소. 지식하는 믿음에서, 고대로 따라서 움직이는 행동의  믿음에서, 고대로 따라서 닮았고 본받고 고 형상대로 모형대로 된 내 변화된  사람의 믿음에서, 거기에서 우리가 되어지는 것이니까? 어짜든지 성경을 보지  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겠고        크심에 대해 무식한 소행이 뭐이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크게 여기나 저거를  크게 여기나 할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보다 그기 크면 거기에 머리 숙이지요  인생은 생애 애착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대주의가 있습니다. 사대 사상이  있소. 큰 걸 따라가고 큰데 속하고 큰 걸 섬기고 큰데 속하고자 하는 것이 이기  필연성입니다. 하나님보다 큰 기 많으면 거 있소.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여기 저기 속한 것이 뭐이냐? 이 사람은 누구 보다도 요 사람이 크다 자기에게  직접 관련되어서 제일 크다고 보이는데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자기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크심을 안 자는 하나님에게  거기에 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함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는 그 사랑 속에 파고 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지극히  큰 소망을 깨달은 자는 그 소망 외에 다른 소망을 가지지 안하고 그 소망을  위해서 모두 가집니다. 자기가 글을 읽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그 소망에서 그저  소망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외에 움직임은 그 소망을  향하고 가고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세 가지만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크심의 그 무한하심 하나님의 사랑이 넓고  깊고 그 따시고 뜨거움의 무한하심 우리의 소망의 지극히 큼에 대해서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무식한 자 되지 말고 유식한 자 됩시다. 그 유식으로  인해서 내 언행심사가 그 유식에 따라서 그 유식한 대로의 행위, 그 유식한  대로의 사람, 그 유식대로 모든 사리판단 가치 판단 평가가 다 이루어지는 우리  사람이 되어지도록 우리가 금년에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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