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선지자선교회 1984년 1월 1일 주후 

 

본문 :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약속을 신구약 성경에 기록해서  주신 주님의 대속의 구원이 우리의 듣는 데에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리인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는 말은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의 이 계약을 선포해  놓으셨는데 선포해 놓으신 이 '구원 계약에는' 그 말입니다. 구원 계약.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는 이 의를 세상  지식대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의는 어떤 게 의인고 하니 하나님을 따라서 되어진  것을 가르쳐서 의라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 생각에 옳은 것을  가르쳐서 의라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들은 모르고 하는 말이고 의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그대로 되어진 것이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사람을 만들어 보시겠다고 하신 그대로의 사람이  되어졌으면 그것이 의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런 행동을 해라  하시는 그대로의 행동이 되어졌으면 그것은 의로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해라 하시는 대로 그 일이 이루어졌으면 그 일은 의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고저  하시는 그대로 이루어 지는 그것이 신구약 성경에 발표되어 있다 하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저 하시는 대로의 사람 하나님이 만들고저 하시는  대로의 행위. 하나님이 만들고저 하시는 대로의 일,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나타났다 하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는데 그 의 중에 제일 근본은 하나님이 독생자로  하여금 이렇게 이렇게 대속과 구속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소원대로 되어진 사람이면  의인이요 되어진 일이라면 의로운 일이요 되어진 행위라면 의로운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이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참되고 영원히 요동치 아니할 참, 살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이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행위와 모든 온전한  일들을 당신이 해 보시려고 목적을 정하신 그 하나님이 원하시고 경영하신 그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복음에 선포됐다 이 복음에 계약으로 나타나 았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나타났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이 목적하신  대로 소원하신 대로의 그 소원 성취. 하나님의 소원성취가 의인데 하나님의 소원  성취가 첫째로 도성인신 대속 부활이 하나님의 소원 성취요 하나님의 그 소원  성취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그 구원이 하나님의 소원 성취니  그것이 의인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에 그 하나님의 의가  선포됐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사람들이 자기가 얻어 가지는 그 방편이 뭐이냐? 얻어  가지는 방편은 믿음이다 믿음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믿음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점점 성장되고 점점 향상되고 진보되고  점점 성취되는 그 방편으로 순서로 이루어진다 하는 걸 가르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적은 믿음이 많은 믿음이 되고 작은 믿음이 큰 믿음이 되고  그렇게 점점 돼 간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은 원동이라면 거기에 피동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다 또 하나님이  원형이라면 거기에 따라서 그 모양대로 되어지는 그 모형 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다 원형이라면 거기에  따라서 사람이, 자체가 거기에 하나님을 닮아 그대로 되고 또 행동이 하나님의  움직임을 따라 거기에 피동되어서 하나님의 행동같이 되어지고, 일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그 일과같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피동이라 믿음은 순종이라 믿음은 딿는다 쫓는다 본받는다 닮아 간다  배워간다 따라간다 그런 것을 다 한 말로 말해서 믿음이라 그렇게 말 합니다.

믿음으로 된다 믿음으로 되는 이 믿음은 하나님의 요소와 우리 사람 요소가 둘이  합해가지고 믿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소를 따라서 사람 요소가 가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과 둘이 상대해 합작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은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둘이 합하여 이루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본 구원은 믿음으로 된 것 아닙니다. 우리 기본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원하든지 안 원하든지 우리 주관이라 하는 이것이  하나도 거기에 개입되지 안하고 순전히 하나님 혼자로서 이룬 것이 기본  구원입니다.

 그러나. 기본 구원을 얻어 가진 우리들이 건설 구원은 그 다음에는 기본 구원을  가진, 얻어 가진 이 기본 구원을 가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따라서  자신이 노력을 할 때에. 자신의 역사가 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하나님은 원동이요 사람 역사는 거기에 따라서 피동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의 사람 원하는 대로의 행위 원하는 대로의  일, 이것이 다 의인이요 의로운 일이요 의로운 행위인데 그것은 다 어떻게 돼서  됐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들이다 그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들이다.

 오늘 오후에 이 본문을 봉독했으나 오전에 설교한 그 설교의 계속입니다.

오전에는 세 가지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더 새롭게 확고하게  다시 소생했습니다. 세 가지, 하나님의 무한히 지극히 크심 하나님의 온갖 면의  크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다각형으로 생겼다. 네모잡이도 아니고  세모잡이도 아니고 하나님은 이모 저모 수많은 그 각면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각형의 하나님이라' 어떤 사람이 그렇게 표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각적으로 지극히 크신데. 그 무한히 크신 분이십니다. 지식  각도로 봐도. 지식 각도로 봐도 무한하고 지극히 크고 지혜로 봐도 그러하고  사랑으로 봐도 그러하고 진실로 봐도 그러하고 신실로 봐도 그러하고 불변적으로  봐도 그러하고 또 시간적으로 말해도 영원하고 다 완전하고 이래서 하나님이  이면 저면 이모 저모. 하나님의 그 크심을 우리가 연구하고 깨달아서 그 크심을  우리가 믿는 사람 되어야 된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 하나님의 지극히 그심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자존 또 하나님의 완전 하나님의 영원불변 또  하나님의 그 단일성. 요 단일성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요것을 좀 아는 사람들은  잘 알지마는 모르는 사람들은 모를 건데 요 단일성이라 말은 하나님의 속성이  수십 가지로 나타났지마는서도 고 속성은 다 외부에 나타날 때는 이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타나고 저기에는 저렇게 나타나서 수백 방면으로 수백 종류로  수백 성격으로 나타났지마는 실은 한 성격이 전부를 다 구비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끝없이.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용서하는 하나님의 그 성품이 따로 있고 또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지공하신 성품이 따로 있고 그런 기 아니라 내나  지공하신. 노여워하는 그 성품이 어떨 때에는 극히 또 사랑하는 성품으로  역사하고 그 성품이 얼마든지 딱딱하게 심판하는 그 성품으로 역사하시면서 내나  그 성품이 또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유순한 그 자비의 성품으로 나타난다 한  성품이 수억 만의 성품으로 활동하나 그 수억만의 성품 그 성품이 곧 하나이다  왜? 그 분은 완전자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 사람은 이 성품이 저 성품 되지 않습니다. 이 성품이 따로 있고 저 성품이  따로 있고 우리는 모든 그 속성들이 수많은 종류의 속성의 종합적 속성입니다  종합적 속성. 우리는 다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이 면에 이속성으로서는 참  온전타고 할 만침 깨끗해도 저 속성은 아무짝도 못 씁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안하고 수많은 속성이나 그 속성이다, 노여움의 속성이 완전  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성에는 사랑도 있고 자비도 있고 용서도 있고 긍휼도 있고  인내도 있고 다 그 안에 다 하나라 그 말이요. 완전하기 때문에 그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인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어 주셔서  하나님을 따라서 이루어진 것 그것이 의인이요 의로운 행동이요 의로운 사상이요  또 의로운 지식이라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모형 이, 하나님의 모형 성취가 의라  그렇게 생각하면 좀 간단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모형 성취가 의라 우리 사람들의  의의 그 원형이 원형이 하나님이라 비유컨데 우리는, 생화가 있고 조화가 있는데  하나님은 생화요 우리는 생화 모양으로 만든 조화라 그런 거와 같은, 비유로  말하면 그기 어느 면은 좀 비유가 되겠습니다,  의인은 다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으로 따라서 된 것은 다 믿음으로  말이암아 된 것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인데 그것은 또 살기도, 남은  미래에 사는 것도 전부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믿음으로 된 것이, 믿음으로 된  것이 또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모형으로 된 것이 또  하나님의 모형 생활한다 모형 행동한다 모형 비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비판했는데 저기에 따라서 이렇게 비판한다 그것이 모형인 비판이겠습니다.

 그래서 오전에는 세 가지를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빠짐없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크심이, 그 이상이 없는 것을 가르쳐서  지극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이상이 없는 것을 지극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의 크심은 지극하시고 무한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오전에 공부했습니다.

 또 둘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넓이도 끝이 없고  깊이도 끝이 없다 넓이라 말하면, 넓이라 말하면 공간적으로도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내세에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세는 뻗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뿐이지 내세는 없겠습니다. 금생에도 내세에도 또 지옥에도  어디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 안한 곳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곳 이 없고  역사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사랑의 받을 수 없는 곳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넓다. 그러면 이 종류, 종류적으로는, 종류적으로는 이  사람에게만 짐승에게만 물건에게만 아니라 모든 천상 천하에 모든 종류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그 종류 모든 종류에 하나님의 사랑이 다 가득 미쳐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깊다 그것은 하나 예를 들면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데에서 또 사람이 마음으로 느낄수 있는 데에서 사람이 느낄수 없는 깊은 은밀한  데에서 사람이 가지 못할 아주 깊은 은밀하고 세밀하고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심판까지 그렇게 깊이까지 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뻗쳐 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다 인간이 평가적으로 높은 것이 있고 공간적으로  높은 것이 있고 세력적으로 높은 것이 있고 능력적으로 높은 것이 있고  지위적으로 높은 것이 있어 모든 면으로 높은 것이 있으니 어떤 종류의 어디  어디 어디에 그 높은 데라도 주님의 사랑은 거기까지 다 우리를 대속하셔서 다  대비해 놓으셨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짧은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입는다는 것이 그것이 참 피상적이요 외부적이요 아직 시작이요, 시작이요 옅은  것이로되 우리의 그 신앙 인격이 자라감에 따라서 지식의 자라감에 따라서  우리가 성화됨에 따라 우리가 천군 천사보다도 더 높이 장성해졌으면 그때  우리가 모르던 사랑을 또 볼 수 있고 우리가 접하지 못 한 사랑을 또 접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까지 자라라 이랬는데 무한한 자에게 따라서 점점 자라감에  이 모든 면으로. 도덕면으로 자꾸 높아져 갈수록 이 지능면으로 높아져 갈수록  이 사랑면으로 높아져 갈수록 명예면으로 높아져갈수록 권위면으로 높아져갈수록  이제 높아져갈수록 그 무한히 높은 데에도 주님의 사랑은 거기에 다 우리를  대속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구원을 이룰 수 있고 어디까지든지 성화돼 갈 수 있고  자라갈 수 있도록 그 사랑의 높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 그 무한한 것을 우리는  점점 연구해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길이로도 그것은 길이는 뭐 공간적의 길이는 많이 길어봤자 우주의 폭밖에 안  될 것이요 영계의 폭밖에 안 되지마는 우주의 폭으로도, 이 우주 여기서도  저기서도 자기는 깊은 바다에 가서 빠져봐도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이 들어 있고 또 음부에 가도 거기에 있고 영계에 가도 거기에 있고 이것은  다 처소적으로, 처소적으로 먼 것을 말합니다. 처소적으로 멀지마는서도 그  길이는 한없다 천년이 가도 또 그 다음에 또 있고 만년이 가도 그 다음에 있고  억만년이 가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의 길이는 영원하다 영원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말씀해 놓으신 이것을 자꾸 보고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렇다 하시는 데로 우리는  그렇습니다 하고서 받아들여서 고대로 우리는 주입을 해 가지고 고대로의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광대하심, 광대라는 말은 속에  구멍이 뚫리고 넓은 것은 광대라는 그런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광대라는 것은  아주 속에 알맹이가 없는 지극히 작은 더 작은 것이 없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끝 까지 무한히 겉으로 널리 펴져 있는 것을 가르쳐서 광대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라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하면은 그 말은 모순된 말이요  하나님은 광대적으로 계신다 하면 그 말은 바른 발표가 된 것입니다. 자극히  좁은 데도 손 데도 지극히 작은 데도 그 가운데 하나님은 계십니다. 또 무한히  큰 데도 하나님은 거기 다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광대적으로 계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광대하심, 하나님의 그 크심.

 또 하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소망, 그 소망이 지극히 크다 그 소망은  무한하다 할 수는. 말은 붙일 수 없으나 지극히 큰 소망, 지극히 큰 소망이요  영원한 소망, 그 소망은 우리가 이루어 갈 소망이기 때문에 그 소망에는  하나님에게만이 붙일 수 있는 무한이라는 것은 우리는 붙일 수가 없으나 그  소망을 성경에 말하기를 지극히 큰 소망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지극히 큰 소망이라고 하신 그 소망 중에 하나 대표적으로 말씀  하시기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신 것이라 그랬습니다. 신의 성품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참예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그 완전 속성을 얻어  이루어 가질 수 있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말했습니다. 지극히 큰 소망이  우리에게 있으니 곧 너희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썩어져가는 정욕에 소망 두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이 소망을 받았으니  너희들이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우애를, 화목을,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팔 덕을 말해 놨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큰 소망.

 이 세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연구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은  어디까지 한계가 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크심은 자존에서부터 완전 불변 영원  전지 전능도 하나님의 크심에 속한 것이요. 또 하나님의 예정도 하나님의 크심에  속한 것이요. 그 지혜 지식이 무한히 큽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속한 것이요.

창조도 그 크심에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적 모든 개별 섭리도 하나님의  크심에 속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그 사랑의 무한하심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 하나님이 그 목적은 우리를 당신같은 온전한 자로 이루려는  그것이 당신의 목적인데 그 목적 우리의 곧 구원,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그 예정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정이 하나님의 크심에 속했는데  우리를 위해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에 속했고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심으로서 사랑으로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정은  하나님의 크심에. 크심에 속한 것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크심에 속했는데  하나님이 주권적 능력으로 우리를 위해서 섭리하시는 그 개별 섭리, 주권적 개별  섭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속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  개별적으로 섭리하시는 섭리, 하나님이 창조주가 우리를 대형하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셨고 대행하기 위해서 사람 되어 오셨고 대화친되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셔서 무한하신 그 고난을 참으시고 견뎌서 우리 위해서 이 세 가지, 가난을  영원 면제 고난을 영원 면제 절망을 영원 면제해서 영원한 소망으로, 영원한,  평강 영원한 부요로 우리에게 대속하신 이 공로를 설정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으로서 이렇게 모든 공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멸망이라면 세 가지 멸망인데 하나는 고난의 멸망이요. 하나는 가난의 멸망이요  하나는 절망의 멸망이나, 멸망 종류 종류라 하는, 멸망이라 하는 것은 다 세  가지에게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범위를 벗어난 멸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밖에는 멸망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멸망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 라도 그것을 찾아 보면 이 세 가지 범위 안에 다 든 것들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우리에게 면제해서 옮겼습니다. 가난을 영원한 부요로. 고난을  영원한 평강으로, 절망을 영원한 소망으로 이렇게 옮겼습니다. 고난을 옮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히 죄를 짓지 안할 뿐 아니라 그 죄지은 것도 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삭제할 수 있도록, 죄라는 것을 완전히 도말해 버리는 내가 천  번 죄를 짓고라도 주님의 피공로에 고하면 그 피공로에 도말되는 이 공로를  설정하신 대형의 공로를 설정한 것으로서 대형의 공로를 설정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고난을 다 면제해서 평강으로 바꾸어 주셨고 또 우리의 가난을  면제하기 위해서 그 부요를 다 내어 놔서 가난해지심으로 우리에게 부요의  공로를 설정해 주셨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당신이 대신 원수의 저주의  사망을 받으므로서 완전한 그 화친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그런  친밀을 이루어 줘서 우리에게 이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이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도록  성령님에게 부탁을 해서 성령님이 우리 구원을 책임지도록 주님이 하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요 또 이 진리가 우리 구원을 이루도록 주님의 공로로  인해서 다 책임을 이렇게 지워서 준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피공로가 가고 가고 가서 가다가서 우리가 함정에 빠졌을 때에 우리가 실족했을  때에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 우리가 절망이 되었을 때에 우리가 또 어떤 무슨  원인으로 고난됐을 때에 우리가 무엇이 핍절되어서, 무엇이 있어야 될 터인데,  내게 깨달음이 있어야 될 터인데 느낌이 있어야 될 터인데 내기에 감사가 있어야  될 터인데 기쁨이 있어아될 터인데 그 기쁨 없는 것도 궁핍에 속한 것입니다. 그  핍절된 거기에서 당신이 얼마든지 그 궁핍에서 부요로 바꾸어 주는 이런 공로를  설정한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 모든 창조와 모든 순서가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만 한 순서 한 순서가  역사에 전개되고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이 역사의 전개, 하루 하루의 날이  전개되는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역사로 이 새것이 전개 되는 것,  모든 하나님의 예정의 순서가 나타나는 것, 모든 존재들이 다 우리 구원만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고 구원에,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이용이 되어지도록  요렇게 다 대비 설치 해 놓은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이 지극히 광대하심.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이소망,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것, 또  모든, 모형이 된다면은 우리의 속성도 이것도 다 그 안에 포함됐습니다. 우리  역사적으로는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것 우리의 움직임은 완전자의 그분에게  피동되어서 완전에 피동되는 완전의 역사로 영원히 역사하는 것 두 가지. 우리의  역사함이 하나님에게는 무한하신 영광과 기쁨이 되고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그들에게 충만케 해 주시는 충만의  그 시은의 결과, 시은의 결과 그 중보의 결과, 제사장 선지자 왕의 그 중보자의  역활로 우리가 이루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직책적인 소망입니다. 우리의 직책의,  소망, 우리, 자체의 소망, 우리 행위의 소망 우리의 시은적인 그 직책적인 소망,  이것이 우리의 지극히 큰 소망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한함에  대해서 우리 소망의 지극히 큼에 대해서, 이 세 가지를 종류적으로 여러분들이  단단히 거머쥐고 잊어 버리지 말고, 착각하거나 혼란하지 말고 요 세 가지를  단단히 거머쥐고,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이루시는 방편은 믿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이 세 가지를 확고히 점점 아는 가운데에서 자라가야  되겠습니다. 점점 알아가야 되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자꾸 알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아는 것이 자라가면 아는 것이 자라가면 행위가 자라가겠고 행위가  자라가면 그 사람의 변화가 자라갑니다. 계속 자라갈 것 자라가는 데에는 돕는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인가? 돕는 것은 신구약 성경을 우리가 접하면 도움을 받을  수가 있고 영감을 우리가 접하면 영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는데 그러면 믿음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믿음을 바로 가지면 우리가 이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이 믿음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된 믿음의 지식을 우리가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믿음의 지식. 믿음의 지식, 지식이 믿는 것 다릅니다.

여러분들 지식으로 믿는다는 것, 지식으로 믿는다는 말과 믿음의 지식이라는  말은 아주 판이합니다. 요것을 잘 구별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성경말씀에 그러니까? 아 그렇다  이렇게, 이 지식이 주체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에 대해서 이 지식이 주체가 돼  가지고서 받아들이는 그것을 가르쳐서 지식이 이것을 믿는다 지식이 인정한다  이런. 지식의 믿음, 지식의 믿음. 그게 아니고 믿음의 지식, 믿음의 지식이라  말은 하나님이 이렇다 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그 지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그 지식같이 내 지식이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가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지식입니다. 믿음의 지식. 첫째는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믿음의 지식. 하나님이 말씀 하신 대로  하나님은 이렇게 크신 분이라고 성경이 말씀 하신 그대로 내가 받아들여서  하나님은 이렇게 크신 분이다 네가 어디서 배웠느냐 네가 연구했느냐 아니야  어떤 사람, 아니야 그러면 네가 그런 지식이 있다고 네가, 누가 가르쳐 줘서  받아들인 것이냐 아니야 하나님의 그 지식을 내가 받아들였어 그 지식을 내가  받아 들여 가지고서 이거는 내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받아들여,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받아들여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지식입니다. 믿음의 지식. 하나님의 크심을  당신이 말한 대로 크심에 대한 믿음의 지식.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내가 인정하고 그대로 그만 내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그 소망에 대한 믿음의 지식. 그러면 하나님의 크심의 믿음희 지식,  대한 크심의 지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  대한 믿음의 지식 요 믿음의 지식을 우리가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지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성경을 읽고 이렇게  하므로서 그 믿음의 지식을 우리가 가집니다. 그 지식 그 믿음의 지식을 우리가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시험하시는 시험으로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는 이렇게 크시다고 말했지마는서도 다른 것이 와 가지고서 그렇지  않다고 무신론주의도 오고 사회주의도 오고 철학주의도 오고 이종교 모든  사상들도 오고 모든 것이 와 가지고서 하나님의 크심을 내가, 크심에 대한  믿음의 지식을 가졌는데 이쪽에서 와 가지고서 거기에 대해서 그 믿음의 지식  가지지 말고 내 믿음의 지식을 가지라고 모든 이 피조물들이 날뛸 때에 그때에  내가 둘에, 이 지식을 따라 갈까 이 지식을 따라갈까 할 때에 이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믿음의 지식 가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비로소  인정하는 것이요 자기에게는 그 지식이 생명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그  지식입니다.

 그러면 지식의 시험이 우리에게는 옵니다. 지식의 시험이 와서 세상이 그  믿음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그와같이 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딿는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그 지식을 내가 받아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도록 세상이 이와같이 하는 것같이 보여지지마는 그것을  작용하시는 이가 주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서 내가 가지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세력들이 일어나 가지고서 처음에는 꾀우다가  달개다가 왈기다가 세력으로 눌루다가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탄압을  가지고 하느냐? 그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왜 일으키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지식을 내가 믿어 그 지식을 받아서 그 지식을 내가 가졌나  안가졌나 시험하는 그 종류의 것도 있고, 또 그 지식을 더 견고히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한번은 그 세력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서 그 지식이 혼란 됐다가서  그 다음에는 다시는 회개하고서 혼란되지 안하고 요동하지 안하는 그런 불변적인  그런 지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의 지식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

또 그 믿음의 지식을 우리가 견고하게 가지지 못하고 있으면서 견고히 가진 줄을  알아서 더 힘쓰지 안하고 그만하면 됐다 하는, 쓰지 못할 그 껍데기 아무  실력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 쉽기 때문에 실력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에게 알려 실패로 알고 그 다음에는, 나는 이제까지 가진 것은 속에  생명없는 지식이니까? 소용없다 이제 나는 생명있는, 온 세상이 밟아도 꺼지지  안하고 깨지지 안하는 이런 지식을 가지겠다 하는 지식으로 더 견고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시험물들을 다 설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것이 파괴하기 위해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속하는 일을 해치는  지은 이 우주 안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믿음으로 살 때에 다 이용되어지지  해치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인 것입니다.

크심에 대한 믿음의 지식.

 둘째로는 크심에 대한 믿음의 행위, 이걸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믿음의 행위.

크심에 대한 믿음의 행위, 크심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뭐이냐 하면은, 예를  들면은 하나님이 제일 크신 분이라 큰 것과 큰 것을 비교할 때에, (여러분들이  이거 뭐 참, 들어도 재미가 없으면 거리가 천리 만리 멉니다. 다 자기 혼자 명상  가운데에서 성경보고 명상 가운데에서 천리 만리 아슴 아슴하이 보이면은 그거  보이는 걸 따라갈라고서 산도 물도 죽음도 상관없이 따라가 가지고서 비로소  붙잡고 잡고 하는 것이지 그렇게 입어 넣어도 눈에 보이도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참 이거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크심에 대한 믿음의 행위,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세상에 어떤 큰 게 옵니다. 이  하나님보다 이게 크다 이게 크다 대통령이 크다 ○○○이가 크다 ○○○이가  크다 이런 사회에 단체가 크다 국가가 크다 뭐이 크다 이 큰 것이 와 가지고서  하나님의 크심과 비교하라고 자꾸 우리에게 오는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럴 때에 이 크심의 지식이 요동치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신  이는 없다 하나님이 제일 크신 분이시다 하는 것이 내 지식에 변동되지 안하고  내 행동에 변동되지 않습니다. 내 행동에 내 행동은 자기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지식이 흔들리야 행동이 흔들리지 지식이 흔들리지 안하면 행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식과 행동에 흔들리지 안하면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피동된  하나님의 크심의 믿음의 사람 돼 버립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자기가 해실히  인정하는, 사람 돼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첫째는 믿음의 지식을 갖도록  노력하고 이 믿음의 지식을 가질 때에 이 지식을 흔들라고 하는 수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수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수많은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요  믿음의 지식.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지식익 지식으로는 그랬지마는서도 실지로  행동을 할라고 할 때에, 행동을 할라고 할 때에는 실상을 대했으니까? 하나님을  제일 크신 분으로 하나님을 전능분으로 하나님을 주권자로 하나님을 개별  섭리자로 현실을 딱 당하고 보니까? 이거 인정 이 인정할 수가 없고 살기 어렵다  그 말이요. 그럴 때에 사람은 모처럼 밟아 나왔지마는서도 이제는 할 수없다  해서 지식도, 믿음의 지식도 흔들려서 하나님을 따른 믿음의 지식이 피조물  따라서 움직이는 지식으로 변질 돼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지극히 크심이 내 행위에 나타내고 지극히 크심으로 인해서  내가 이 행동하고 전능하신 그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이 행동하고 주권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이 행동하고, 다니엘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요 지존의 하나님이 시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 길 안 걷고는 못  견딥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모든 면으로 구비한 지식을 요동치 안하고  있으니까? 그 지식이 요동되기 전에는 다니엘은 하나님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은 제일 편하고 안전하고 안심되고 든든한 길을 택해 간  것이 사자구덩기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내가 믿음의 지식. 요걸 기억만 하고 자꾸 집에 가서 새김질하십시오. 믿음의  지식, 그 다음에는 믿음의 지식이 성장되어 믿음의 행위를 낳게 됩니다. 믿음의  행위, 믿음의 행위에서 수많은 시련을 받아 가지고서, 받아 가지고, 자 예를  들면은 자기에게 어려운 입장 상관이나 나라의 명령이나 어떤 명령이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배치될 때 있다 그 말이요. 자기 신앙 양심과 배치될 때가 있단  말이요. 그런 일을 딱 당할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에게 피동된 이 믿음의  지식대로 행동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크심에, 하나님의 크심에 따라서 행동해야  될 터인데 그만 그때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것이 믿어지지 안하고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심이 바꾸어져서 인간이 큰 것으로 바꾸어져 가지고  바꿔져 버린다 그 말이요. 그럴 때에 자기는 한번 바꾸어지면 그게 후회가  되어서 이 다음에는 죽어도 안 바꾼다 안 바꾼다 이렇게 수많은 싸움, 수많은  실패, 수많은 회개를 통해서 이제는 죽어도 요동 않는다 할 때는 시험이 안  옵니다. 그 다음에는 뭐 그게 뭐 시험될 게 뭐 있는가? 그거야 면직을 당하면  당하고 쫓겨나면 쫓겨나고 죽으면 죽지 어디 그게 요동이 있는가 요동이 없이 될  때에는 그런 것은 하나님이 다시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또. 높은 시험  다른 시험 가지고 시험하지 그거는 시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그러면 믿음의 사람이 돼  버립니다. 믿음의 사람이 돼. 전능의, 전능의 모형 자가 돼버린다 말이요.

믿음의 사람은 전능의 모형자가 됩니다. 전지의 모형자 지존자의 모형자가 돼  버립니다. 그러면, 그 분의 지체요 그분의 모형이요 그분대로 된 자라 그분의  따라서 된 자라 그것이 믿음의 사람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큼에 대해서  우리가 이 세 가지.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세 가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다 하는 그대로 나는 거기 따라서 '아!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다'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을 내가  지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 사랑에 대한  믿음의 행위, 사랑에 대한 믿음의 사람. 하나 해석했으니까? 고대로 해석해  나가면 여러분들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참 절망하고 낙망하지 안할  수 없는 자기는 원망 불평하지 안할 수 없는, 자기는 모든 온갖 고난 가운데  들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지식을 가지니까?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의 사랑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닌 것은 우리가  움직일 일이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서 움직이는 일이지. 또  하나님의 소망에 대해서 움직이지 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첫째는 믿음의 지식을  가져야 되겠고 둘째로는 믿음의 행위를 가져야 되겠고 셋째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믿음의 사람은 어떤 걸까? 하나님의 사랑이 원형이니까? 고  원형과 같은 모형의 사람이니까? 고와 같은 자입니다.

 셋째로는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 소망에 대한 믿음의 지식, 소망에 대한 믿음의  지식. 소망에 대한 믿음의 행위. 소망에 대한 믿음의 사람, 요것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요것은 다 수없는 전투로 됩니다.

수없는 전투로 됩니다. 수없는 싸움으로 됩니다. 거기에는 피가 많이 흐르고  진액이 많이 흐르고 거기에는 다 자기가 다 죽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입니다. 수없는, 거기에는 전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없는  전사자가 납니다. 수없는 전사자. 수없는 전사자. 수없는 전사. 이 자기를  죽이고, 옛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옛사람을 자꾸 죽여서 수천명 수만명이 다  전사하더라도 죽이고 수만명의 승리자가 나오고 수많은 전투로 이루어집니다.

 수없이 배척도 수없이 하고 환영도 수없이 하고 어느 것을 환영할래 어느 것을  배척할래 배척하고 환영하고 배척하고 환영하고 죽이고 살리고 이래서 주고 받고  바꾸고 바꾸고 바꿔서 이렇게해서 되어지는, 불로 연단해도 없어지지 안할 금,  이 보배로운 금, 세상이 다 달라들어서 시련해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주신  소망에 대해서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그것은, 그러기에, 우리의 전 현실은 다 전쟁입니다.

 우리 전 현실은 다 전쟁이요. 없는 가운데에 세상에는 다 마귀요 사망뿐  이었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명이 왔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싸움을 일으키러 왔다  죽이러 왔다 죽이고 살리기 위해서 왔다 서로 싸워서 나뉘기 위해서 왔다  말씀하신 것이 이런 것을 두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현재에서 늘 기도하고 기도해서  얼마 동안 자기 미래를 보면서, 미래를 생각지 안하고 돈만 보고 가는 사람  지위만 보고 권세만 보고 가는 사람 인간 보고 가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밖의 눈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대로의 그 지식하고 감각하는 것들을 가르쳐 말하고 안의 눈은  세상이 가지지 안하는 눈 신령한 눈이니 말하자면 영감의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영감된 마음의 지혜, 영감된 마음의 지혜,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닥치기 전에 벌써 자기는 씨름을 수없이 합니다. 연습 싸움을 수없이 합니다.

아, 내가 이런 행사에 대해서 주일 성수 문제가 나타날 터인데, 이런 행사에  대해서 내가 그 '아니라' 그 말을 거절하는 이 무서운 어려움이 올 터인데. 아  다리오 왕이 하루 종일 이제 이래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요것만 네가  행하라 하는 그 참 안면 괄시 못 하는 그 어려움이 올 터인데 그러기에 미래에  당할 모든 일을 미리 당겨서 미래의 것을 영감으로, 자기가 영감 돼 가지고서  현재에 살고 있으나 현재의 일은 아무 그것이 문제할 것이 없고 미래 일을  두고서 현재에 지금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고 임하기를 바라보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간절히 사모해라 거기 소망해라  거기에 사모해 가지고서. 거기에 소망을 지금 이루고 거기에 사모하는 것을  행동은 여기 와서 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래서 자기가 살아갈 때에 뜻밖의 일이 온다고 하면은 그는  반드시 놀라게 됩니다. 자기가 아는 게 힘입니다. 무슨 소리라도 알면 놀랄 게  없습니다. 한방에 같이 이렇게 여나믄씩 앉았는데 한 사람은 인제 몇 시 되면은  이 밖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날 거다 그것은 아무 것이가 와 가지고 거기에  무엇이 하나 폭발할 터인데 폭발 소리가 날 것이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그 시간 딱 시간 보고 이제 폭발소리 날 것이다 꽝 거리니까? 이 사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소. 놀라지 안하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소. 미리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야 이거 어짠 일이고 이기 뭐이  폭발이 어짠 소리고?' 막 놀래서 뛰어나가고 야단일 것입니다. 그 모르는  소리가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르는 소리 모르는 일 모르는 사람 모르는  행동 이런 것이 나타날 때에는 모르는 것이 나타나니까? 사람의 생리 본능으로  모르는 것이 저것이 어떤 결과를 맺을 것이며 저기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며 저기  어떤 힘을 가졌으며 무신하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말이요.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알아서 미리 다 대비를 다 해놨으면 그럴 때에 저는 읏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나쁠 게 뭐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에서도 회고적인 영감이 있고 현재적인 영감이 있고  미래적인 영감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회고적인 영감이라 하는 것은 지나고나서  가만히 영감 받아 보니까? '아이구 그거 잘못했다' 회고적인 영감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후회를 나타내는 것이 그것이 회고적인 영감의 소행입니다. 그거는  사함을 받지마는서도 유익은 아무런 없는 것입니다. 현재적인 영감은 다른  사람은 현재 무슨 일 닥칠지 모르고 있는데 자기는 현재 그 일이 닥쳤으니까?  언제 대비하거나 방어하거나 아무 그런 것은 하지 못하고 현재 그 나타난 것을  알기만 아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니 그렇지만 알기만 아니까? 자기는  당황할 것이고 다급할 것이고 자기는 자연히 두려워 떨면서 대단히 다급한 일이  되게 됩니다. 열 처녀가 기름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급하게  달음질치고 야단쳤지 그 기름이 필요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신랑이 왔거나  말았거나 그때 누워자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고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고적인 영감은 우리에게 후회를 후회할 것을 깨우쳐 주시고  또 현재적인 영감은 우리에게 다급한 것을 알려 주시는 그런 역사를 하고  미래적인 영감은, 미래에 대한 것을 영감한는 그 미래적인 영감은 닥치기 전에  이 모든 걸 영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잠자는데 저는 깨야 되고 다른 사람은  노는데 기도해야 되겠고 다른 사람은 안심하는데 자기는 급해야 되겠고 근심해야  되겠고 다른 사람은 평안한데 놀래야 되겠고 이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이 그  어려움을 닥쳐 가지고서 어렵게 되어지는 그 일을 자기는 미래적으로 알아서  방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이 그럴 때에는 다 기쁘고 즐거움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안한, 그 얼마 동안  믿음을 버려 미래적인 영감을 그만, 이 현재에 빠져 가지고 정신없이 한토막  미래적인 영감으로 살지 못한 그 일이 갑자기 현실에 닥쳤을 때에 예비도 못  했으니까? 방어도 못하고 당황해 가지고, 그때는 참 자기 정신이 아닌  비정상적인 당황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저도 부산 와 가지고서 그 일을 꼭 두 번 당했습니다. 미래적인 영감을 돈박을  끊어 가지고서 그걸 대비하지 안해서 제가 다급한, 당황해 가지고서 남에게  사람같지 않게 보이고 똥같이 보이고 천하게 보이고 그래 조롱 거리로 보여지고  그렇게 천해지는 그런 것을 내가 두 번 당했습니다. 그것이 다 세상 그 모든  이런 것 저런 것에 미혹받아 가지고서 껍데기만 보고 살고 거기데 따라서 움직여  그것 맞춰 살다 보니까? 미래적인 영감을 다 완전히 몰라서 까마득히 모르고  그와같이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없습니다! 절대를  붙일 수 없지마는 내가 거기 많이 속았기 때문에 미래적인 영감을 내가 놓치지  안하고 내가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기도회를 지금 선포하고서 이 기도하라 하는 것도  미래적인 영감에서 다 살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이것을 미래적인  영감으로서 이 기도를 시작했다가 그 기도를 중단했어. 내가 미혹 받아 가지고  중단을 했소. 그걸 중단했어. 중단한 그것이 얼마전에 저의 가정에 환난이  일어나는 그 환난의 원인이었습니다. 고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방비하게 해  줬지마는 내가 방비할 미래적인 영감을 가지고서 방비하지 못하고 쳐서 깨트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부딪혀 왔을 때에 나는 다급했고 당황했고 나는  실족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서부교회 지금 기도회 하라 하는 것은 나와 여러분들에게 미래적인  영감을, 나에게 주신 것은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러분들에게 세운 것은 여러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에게 보게 하기 위해서  세웠고 여러분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나에게 듣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세웠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언자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선, 여러분들의 나는 중보자요 여러분들의 대표자로 나는 하나님께서 세운  것으로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이 기도회에 참석해서 빠지지 말고 하라 하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경비한 그것도 큰 환난을  막았습니다. 큰 환난을 막았습니다. 이기 다 불타서 없어질 환난을 막았습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저기에서 던져 버렸으면 그만이지. 뭐 뭐 무슨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나타났고 그런 그 말이 나타나고 다 왔지마는 사람들은 예사로  압니다. 우리가 그때 삿보도 꽉 재 놓고 이와같이 있을 때에 휘발류 거석해  가지고서 휘발류 조그만한 폭탄이라도 던져 버렸으면 그거 탔으면 다 절단나  버리지 무슨 소용있소? 이러니까? 공연한 소리라 사람들은 말할 자는 말하겠고  하나님의 은혜라 방비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할 자는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자가 이래 와 가지고서, 요번에는 폭발 못 했다 폭파 못 했기 때문에 요  다음에는 틀림없이 하겠다 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끼리 불난 집 옆에서 지나가며  저거끼리 말하는 것을 들어 와 가지고서 제게 들려와서 그걸 조사를 했어요.

조사를 해보니까? 짐작은 해. 그런 무리들, 이 이십대 청년들의 이 천지를  모르고 이 테레비도 보고 만화도 보고 이 공산주의 모두 지하, 지하 운동  공산주의자들에게 돈 몇푼 얻어먹고 이리 저리한 그 자들이 지금 계획을 한  것인데 그 알지마는, 잡으면 잡지마는 잡아봤자 소용이 없다 그 말이요.

여기에도 간첩이 있지마는 잡을 필요없어. 나 안 잡습니다. 간첩이 있어도 왜?  내가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내가 짐작한다고 그럴 것도 없고 또 있어봤자  간첩 하나 있고 둘 있고 여럿 있어봤자 그것 가지고서 이 우리나라에 적화되고  뭐 북진 통일되고 하는 것 아닙니다. 있든지 말든지 강하든지 정하든지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이모든 것이 다 완전히 원인되어 있고 거기 다  주권되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그분과 관계되는 이 일이나 할 일이지 그까짓  지엽적인 그것 있으나마나 여기에 간첩이 여러 수백명이 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바로 가지면 그 간첩도 말씀들어 변해지면은  그것이 회개할 설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미래적인 영감에서 살아야 됩니다. 오늘 이래도 그저 지나간  일에 대해서 후회만 자꾸 생각을 하고 땅에 있는 것만 뭐이 잘못됐으니까? 그게  잘못됐다. 요라면 돈 벌이가 될 것을, 조라면 잘 됐을 걸 뭐 됐을 걸, 땅의 것만  생각하고 하늘의 것은 생각지 못하고 과거에 현재에 있는 그 세상에 속한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련을 생각지 못하는 그것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되는 이 난제를 우리가 시작한 이 기도회에서  기도하면 깨닫지 못하는 것 깨닫게 되고 회개 못할 걸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과  먼 것이 가까워지고 또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 맺어지고 해결 못할  것이 해결되어지고,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명상하는 것 묵상하는 것. 이  기도인데, 기도. 여기에서 회개도 나오고 믿음도 나오고 담력도 나오고 평강도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다 여기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옳고  바릅니다. 자기 몸 밖에 외부에서 들어 오는 기쁨 누구를 만나서 기뻐졌다 무슨  사건을 만나서 기뻐졌다 무슨 일이 어때 기뻐졌다 몸 밖에서 들어오는 기쁨은 다  썩을 기쁨이요 다 불탈 기쁨이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과 진리로 인해서  자기에게 솟아오르는 그 기쁨 솟아오르는 평강, 담력, 지혜, 이것이 다 산  것이요 온전한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오전 오후에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자꾸 연구합시다.

내가 크심을 내가 참말로. 내가 지식하고 있나 이 크심을 참말로 내가 인정하고  있나 지식하고 있나 내가 크심에 대한 합당한 행위를 하고 있나 내가 크심에  대해서 확실히 내가 믿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있나 이것을 우리가 조사해서  고쳐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큰 소망에  대해서, 그 소망이. 그 소망의 지극히 일부분을 가르쳐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만  못하다 했습니다.

 이거 공연한 과장된 말입니까? 과장된 말 아닙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천군 천사를 다 시위대로, 시위대로 거느리고  하나님 다음으로 제일 존귀한 것이 교회의 위치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를,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는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를 여호와의 군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믿을라 할 때에 못 믿구로 하는  것,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크심으로 인한 행동을 할라 할 때에 하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사람이 될라고 할 때에 사람되지 못하게 하는  것,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크심의 면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면에 대해서 우리의 소망면에 대해서 되게 할 때에 세상은 못 되게  하고 우리는 할라 하고 못 하게 하고 할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억하고 고요히 생각해서 깊이 깊이 느낍시다. 오늘 주일 학교 공과를  가르치는데 공과에 대한 내용의 뜻을 확실히 파악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일층, 지하, 이층, 사층,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껍데기로 여러분들이 도를 받으면 변화를 받지 못합니다. 어짜든지 깊이 깊이  새겨서 많은 시간을 걸쳐서 묵상하고 새김질하면 우리의 정신의 껍데기가 다 이  세상에 물들어 있는 그게 다 벗겨지고 벗겨지고 해서 우리에게 맑은 마음의  지혜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것이 안약을 발라서 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참 우리는 좋은 때를 만났습니다. 귀중한 시기입니다. 귀중한 시기를 땅의 것을  보고서 낭비할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땅의 일을 해도 목적은 그것을 위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 보기에는 사탕 장사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퇴짐 지는 것같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잡부일 하는 것같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 사무실에 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마는서도 다른 사람 보지  못하는 은밀한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이렇게 우리는 사는 믿음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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