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2:11
하나님의 안보
본문 : 사 26:1-7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견고한 성으로 문들을 열고 들어 오라" 견고한 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입니다. 하나님의 안보를 받는 세계가 견고한 성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내편에는 보호가 되어 유리하고 대적의 편은 해 할 수 없도록 방어되어 있는 것이 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는 언제나 내 자신에게는 편리하고 유리하고 나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그 대적이 불리해서 대적하는 일이 다 절단 나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나님으로 안보를 삼아 사는 사람을 해하다가 보면 그 해가 자기 해가 됩니다. 또 하나님의 안보를 바라고 사는 그 안보 속에 있는 사람을 유익 되게 하려고 하다 보니까 결과는 자기 유익하게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견고한 성이라, 하나님의 안보는 견고하다.
"문들을 열고 들어가라" 이 문은 어떤 문인가?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 또 피조물들을 의지하는 그 의지 이것을 부인하고, 이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르는 그것이 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 견고한 성밖에 있는 사랑이요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사람은 문을 피해서 문에서 멀리 가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인도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이 안보에 평강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문을 찾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이행하는 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면 하나님의 피난처 견고한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보 하는 그런 성이 있습니다. 안보 하는 안보를 성이라고 한 것은 이제 말한 대로 본인에게는 유리하게 되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불리하게 되어지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안보를, 안보 속에 있는 사람을 해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 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안보 속에 있는 자를 위하는 것은 그를 위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자기를 위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안보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바르고 참되고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을 대적하면 제가 망하고 옳은 것을 위하면 자기 위함이 결과적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라.
신이라 말은 순종이라는 말인데 순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이 있고 사람에게 순종하는 순종이 있는데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 순종을 해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이라는 이 신은 순종인데, 이 순종 중에도 어떤 각도를 여기에 말씀했느냐? 순종 중에도 여러 각도가 있는데 순종 중에도 어떤 각도를 말했느냐? 서로 약속을 맺고 약속대로 이행하는 그 순종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 날, 아무 시에, 아무 데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면 약속을 하고 그 약속대로 그 시간에 만나려고 그 자리로 갔으면 상대방과 약속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상대방에게 자기가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어겼으면 상대방에게 거역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로 더불어 약속을 선포해 놨는데 이 약속을 지키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요 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사람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사람 되어집니다.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 이 약속 지키는 사람이 되어질 때에 하나님과 약속 지키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옳은 약속을 했으면 지키지 마는 잘못된 약속을 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못된 약속을 해도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잘못된 약속하는 것을 지키면 죄를 짓는 것인데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만일 잘못된 약속을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면 죄가 되기 때문에 약속을 어긴 대가를 자기가 변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일을 같이 하자' 이렇게 약속을 했는데 가만히 뒤에 생각해 보니까 그 약속은 그것은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약속이 됐습니다. 노여워하는 약속이 됐을 때에는 그 약속은 그만 무시해 버려도 되느냐? 아닙니다.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약속을 자기는 지키되 그 일을 함으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죄가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아니하고 어기는 대가를 자기가 내야 됩니다.
어떻게? 만일 그 약속을 어김으로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준 일이 있으면 피해를 자기가 보상을 해야 하고, 또 피해를 보상하는 그것이 역연 죄가 된다고 하면 죄 되는 보상은 할 수가 없습니다.
죄 되는 보상은 할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는 약속을 어긴 위약자로서 사과를 해야 됩니다. 내가 이런 약속을 어겼으니 내가 이 잘못됐다는 그 사과를 해서 그이 앞에 자기가 잘못된 그 약속을 어긴 그 일에 대해서는 상대방에게 약속 어긴, 어긴 그것이 죄인입니다. 그 면에 대해서는 내가 죄인이 됨으로써 내가 약속을 어겼다 하는 죄를 정죄 해서 사과를 함으로 그것이 대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 약속을 했지마는 그 약속은 하나님이 노여워하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하게 됐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내가 돈으로 그걸 대가를 해 준다든지 무슨 일을 하나 다른 일로 해 준다든지 해서 될 것 같으면 다른 일로 해 주고 돈으로 대가를 해 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도 해 주지 못하고 약속한 것을 지켜서 그대로 이행하려 하면 그 자체가 또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질 때는 그 약속에 대해서 변상도 못 합니다.
그 변상을 못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것은 내가 모르고 안 해야 될 그 잘못된 약속을 내가 했으니 약속을 잘못한 그 대 실수를 저지른 내가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약속을, 잘못된 약속을 한 그 죄인이다 거기 대해서는 내가 사과를 한다. 그거는 내가 잘못된 사과를 한다.' 그 상대방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사과를 직접 대해서 해서 할 수 없는 일이면 뭐 통지로 하든지 뭘로 하든지 그 사과를 해서 자기가 이 일로 말미암아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된 사과를 해야 된다는 이것을 생각하고 사과를 할 때에, 이렇게 약속을 지켜 나가면 그 사람은 차차 어떤 사람이 되어지느냐? 허탄한 약속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약속은 돈으로,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돈으로 변상해야 되지, 내 공력으로 변상을 해야 되지, 내 명예로 변상을 해야 되지, 내 지위로 변상을 해야 되지, 아주 자기의 자존심을 그만 꺾어서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는 자기로 변상을 해야 되지, 이렇게 되어지면, 어떤 사람 내가 만나니까 '나는 죽는 것보다 자존심 꺾어지는 것이 더, 죽기는 죽어도 자존심은 꺾을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합디다. 그런데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남한테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잘못했다 소리는 하기 싫다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십시오.' 하든지 안 하든지 내가 잘못된 것을 그것은 내 명예와 내 인격 자존심을 가지고 그 대가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가 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약속을 생각지 않고 약속해 놓고 약속을 이행하려 하니까 그 일을 약속한 대로 해서 이행을 하든지 다른 것으로 대가를 내든지, 대가를 내는 것도 안 되면 자기 명예 지위, 자기가 그런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기의 위신, 자기 명예 지위, 자기 인격이라는 그것을 그에게 머리를 숙여서 사과를 하게 됩니다. 뭐 어떤 방편으로 사과를 하든지. 이러니까 이렇게 신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이 아마 '죽는 것보다 자존심 꺾어지는 것이 더 기가 찬다' 하는 그런 사람은 남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그 사과는 참 죽기만치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신을 지키게 되면 이 다음에는 허탄한 그런 약속이라 하는 것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차차 차차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조심해서, 이행하지 못할 말이나 이 행하지 못할 약속이나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 대가를 치르는 데에서 자기라는 것을 성장시키는 그 일 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순종이라 하는 것은 언제든지 순종보다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약속을 했든지, 그리 안 해도 자기가 어떻게 하겠다, 만일 국회의원 선거할 때에 자기가 그 운동 하기를 '나는 국회의원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 했으면 그것이 자기가 당선되는 그 지역 사회와 약속한 것입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신임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는 '약속해도 뭐 안 지키면 되지' 하는 이런 사람 되기 때문에 작게는 어떤 일이든지 무책임한 그런 작정과 언행심사를 하는 사람이 되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그로 인해서 자기가 망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과 약속한 그 약속, 또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 자기와 약속한 약속, 자기와 약속한 약속은 이것은 어겨도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자기가 자기하고 약속을 한 그 약속을 이행하는 그 일을 연습을 해서 그것을 이행하도록 이래 하면 자기와 약속한 약속이 차차 숙달되고 성장돼 가면 다른 사람,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 더불어 약속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과 약속한 그 약속을 이행하게 되면 하나님과 이 문서로 약속해 놓은, 구약은 먼저 약속이요 신약은 그 다음에 약속인데 하나님이 문서로 약속한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하라" 이것이 구원의 성곽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 이것이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다" 잘 한다. 여호와 의뢰를 꽈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다. 의뢰하면 참 든든하고 네 의뢰하는 것을 다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을 주신다" 이 심지, 심지라 말은 자기하고 약속하는 것인데 자기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 결심을 합니다. '내가 이것을 하나 하겠다.
이래 하겠다. 이것이 옳고 바르니 이대로 하겠다.' 이렇게 자기가 작정하는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하나님하고 작정한 작정이다 그 말입니다.
자기가, 심지라 말은 자기 마음에 뜻을 정하는 것이니까 자기가 '이것은 옳다 내가 이걸 하나 해 보겠다 내가 새벽기도를 한번 나가보겠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이제부터는 거짓말 하는 이것을 거짓말 하지 않아 보겠다.' 무엇인가, 너무 어려운 것 하지 말고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그 쉬운 것 어떤 것이든지 '내가 이것을 하나 해 보겠다. 나는 자는 시간을 일어나는 시간을 무엇을 한번 해 보겠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이 일은 하는 것이 옳고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내게 필요하고 이 일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하는 그 무엇이든지 하나 자기가 정해 놓고 '이 일을 내가 한번 이대로 한 번 실행해 보겠다.' 하는 그것이 뭐이냐? 심지입니다. 마음에 뜻을 정 한 것이오. "심지가 견고한 자" 그 심지로 정해 놓은 그것을 요동치 않고 그대로 이행하는 그 사람이, 이행하는 그 사람이 그로 인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점점 평강에 평강을 더하게 된다.
평강이라 말은 형통이라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무슨 일이 좀 되어집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뜻한 것이 되어지고 자기 또 뜻하지 않은 것도 뭐 되어지고 무엇인가 자기 아닌 다른 것이 돕는 그 도움이 되어 집니다.
자기 아닌 다른 것이 무엇인가 좀 '뭐 좀 운이' 안 믿는 사람은 '운이 있다.
운수가 있다. 뭐 돌아본다.' 또 안 믿는 사람은 그런 말해요. '하다 못해 안 되면 됫골 여우가 돌아봐도 돌아봐야 되지 돌아봐 주는게 없으면 안 된다.' 그런 말 해. '됫골 여우가 돌아봐 줘도 돌아봐 주는게 있어야 되지 돌아봐 주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자기가 보면 무엇인가 좀 뭐이 돌아봐서 뭐이 좀 되어지는 것 같은 이런 무슨 응원 같은 것이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그 말이오 그것이 뭐이냐? 주께서 평강을 주시고 또 평강을 주셔서 형통을 주시고 형통을 주시고 형통을 주신다. '나는 이 면에 심지를 정하고 내가 이 일 한번 해 보겠다.' 이렇게 심지를 정해 놓고 그것을 요동하지 않고 하나 지키려고 이래 했는데, 그것 했는데 엉뚱한 데에서 나에게 무엇이 좀 슬슬 돼 가는 그런 형통이 오고 평강이 옵니다. 그것 뭐이냐? 내가 이것을 했기 때문에 "주께서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 하나님이 그와 같이 하신다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옳은 것을 하나 작정하고 하려 하는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약속한 약속인 것입니다. 사람이 옳은 것들 자기가 찾아 가지고 하려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여호와를 찾는 것이오.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요 참의 하나님이십니다.
어제 제가 중간반 반사회에서, 어떤 분이 이제 설 쇠었다고 그랬는지 떡 몇 개씩하고 또 밀감 몇 개씩하고 그렇게 해서 한 봉지씩 했는데 '이거는 중간반 교장 선생님에게도 한 봉지가 돌아가니 이것 와서 좀 참가할 수 없습니까?' 그래서 내가 내려갔습니다. 또 중간 반에 그 참 부지런히 일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대접하는 그 대접도, 물건이 큰 게 아니라 그 정성이 아름답고 이래서 기뻐서 동참하기 위해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까 내가 또 자리에 안 앉을 수 없어 자리에 앉아 가지고 어제 졸업반 학생들에게 대해서와 또 중간반 모든 식구 관리에 대해서 얘기가 났습니다.
얘기가 났는데 거기에서 자꾸 무슨 내가 명령적으로 '이렇고 이렇습니다.' 이렇게 떡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사람 죽이는 짓을 제가 하지를 않고 '자, 이러면 이 일은 어떻습니까? 한번 의논해 보십시오.' 자꾸 논리를 합니다.
모든 반사들이 다 얼마든지 발언을 해 가지고, 틀린 발언이든지 옳은 발언이나 이렇게 해 가지고 '이거는 이러니까 이 면으로 이렇습니다. 전 면으로, 이 면은 좋지만 저 면이 안됐습니다. 또 이거는 모든 면이 이거는 좀 안됐습니다.' 자기 자유로 의사 발표를 해가 치고 의논을 하고 변론을 하고 논평을 하고 이래 가지고 어제 참 그 원만한 것을 많이 결정을 하고 그걸 봤습니다. 그럴 때에 저기에 반사들 가운데에서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아따 그 뭐 학생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많이 말썽이 있다.' 그만 그렇게 의논하는 것을 '말이 많다, 말이 많다, 말썽이 있다, 말이 많다.' 또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까 '목사님이신데 목사님이 말씀 한 것도 '그것은 아니라 이렇게 이의를 달기도 하고 반발도 하고 거기서 변호도 하고 또 이렇게 한다. 버릇이 없다.' 별별 오해를 가질 것입니다.
그런, 나는 그걸 취미 있게 생각해서 자꾸 이래 가지고 조금 그 사람이 옳은 말 조금 했으면, 그 사람이 만일 눈꼽재기만치 옳은 말했으면 내가 그 옳은 말에다가 더 붙여 가지고 '아, 이게 옳다. 이러니 옳고 이러니 옳고 이러니 옳다.' 해 가지고 눈꼽재기 만한 옳은 것을 그것을 주먹덩이 만한 옳은 것으로 또 내가 그래 만들어 놨습니다.
그래 만들어 옳은 것은 내가 이래 하고, 또 조금 그게 틀린 게 있으면 그것도 또 그것을 또 내가 말을 해 가지고 주먹덩이 만한 틀린 것을 자꾸 '그거는 그렇겠습니다. 이 면이 아무래도 좀 틀렸고 저 면이 틀렸고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어떠니까 이거는 주먹덩이만 한 틀린 것을 말했는데 이것이 뒤에 짚동만치 틀렸다. 짚동만치 틀려진다.' 하는 그런 것도 자꾸 말을 해서, 나는 그것 할 때에 아주 취미가 있었습니다.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맛이 있어서 이런데 어떤 아마 반사 중에서 어떤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아이고, 가치 없는 그런 걸 가지고 많이 말하고 있고 말썽 많다, 버릇없다, 예의가 없다, 체면이 없다.' 그 자리서는 갑론을박을 이래 해 재끼니까. '화평이 없다. 두말 할 것 없이 도덕면이나 그런 면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회개를 해야 되지 그걸 회개치 아니하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신앙이요, 인본적인 신앙이요, 인본적인 신앙이라는 건 왜 인본적인 신앙이라 말하느냐 하면 사람을 귀중히 여기지 무엇을 귀중히 여기지 안 하는 것입니까? 누구한테 좀 한번 물어볼꼬? 무엇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까? 누구한테 물어봐야 될꼬?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될 건데. 자, ○○○집사님 한번 대답해 보이소. 100점이오. 진리를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 옳은 것 인간보다 진리는 무한히 탁월합니다. 하나님 다음에는 진리가 큽니다. 그것이 뭐이냐? 진리를 대우하는 것이라 말이오. 진리를 대우하는 것.
'뭐 그런 것을 따지고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이 사람은 뭘 크게 여기느냐? 인간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오. 그 사람이 인본이라. '목사님이 말씀했으면 그대로 쪽 따를 일이지 거기에서 옳으나 그르나?' 목사님이 '이렇게 하라.' 했으면 그것을 '목사님이 우리보다 견해가 크니까 그대로 해 보자.' 이럴 수 있겠지마는 '옳으냐 그르냐 이것 한번 의논하자.' 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따져 그래 옳은 걸 찾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러고 목사님이 하라 해도 '목사님이 하라 하니까 그저 뭐 순종해야지.' 자, 그런데 자기 마음에 '내 견해는 이해를 못하지마는 나보다 모든 것이 탁월하니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탁월하신 분이 했으니까 나는 여기 대해서는 모르지마는 순종해야 되겠다.
순종하면 그분이 나보다 탁월한 분이요 나 지도자이기 때문에 내가 순종하면 그게 잘못된 것은 그분이 책임지지 나는 이 밑에 하나님이 소속을 시켰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나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 대해서는 모르고 지금 위에 지도자를 존경하는 뜻에서 순종한다.' 이러면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키시는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가 안 되지마는 명령하니 순종해야 되겠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진리를 이것을 사람보다 천하게 보는 것이고 사람을 높이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 되면 그 일을 순종할 것이 아니라 말을 해야 정리다. '이것은 내게는 이해가 안 되고 아무래도 이것 잘못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습니까?' 그럴 때에 '너는 몰라. 모르기 때문에 너한테 말해 줘야 모르니 네가 무조건 순종해 봐. 그러면 알 것이라.' 그러면 책임을 그이가 졌기 때문에 그에게 책임을 두고 내가 순종해 봅니다. 순종해 보면 '내가 이해 못 했지마는 순종해 보니까 그 지도가 옳구나,' 이래 되면 자기는 계속해서 하는 것이 뭐이냐? 그분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영접해 가지고 '이게 옳구나' 하고 난 다음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 보기에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같지마는 그 이 면에는 진리에게 순종하는 것이요, 진리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이것이 틀렸다.' 이래 싶을 때에는 지도자가 '너는 몰라도 틀렸어도 그래 해 봐.' 이럴 때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하는 그 이치, 이치와 지도하는 자의 지도의 그 능력과, 이치의 능력과 지도의 능력 그 두 가지 비중을 달아 가지고 자기가 순종을 해야 됩니다.
'내 뜻에는 이게 틀렸다 싶지마는 내가 틀렸다 하는 것이, 과거에 내가 틀렸다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열 가지 있더라. 내가 이제까지 살이에 열 가지 있더라.
틀렸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열 가지 있더라 옳다고 하는 것이 틀린 것이 열 가지 있더라. 그러면 나는 열 가지 틀린 것이 있더라, 나는 열 가지 틀린 것이 있더라. 저분이 지도하는 데에는 옳다 하는 것이 틀린 것이 내가 이제까지 발견한 것이 다섯 가지가, 옳다 했는데 틀린 것이 다섯 가지가 있더라. 또 틀렸다 했는데, 나는 보기에 그분의 말한 게 틀렸다 이랬는데 틀렸다 하는 그것이 다 맞고 다섯 가지만 옳더라.' 그러면 '내가 보니까 내가 실수한 것은 열 가지가 있었고 저 지도자 저분이 틀린 것은 실수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있더라.
그러니까 저분이 내가 알고 있는 이치보다도 중량이' 누가 무겁습니까? 자, 옳은 중량이 자기가 무겁습니까 지도하는 그분의 중량이 무겁습니까? 어느 게 무겁지요? 지도하는 자의 중량이 무겁지요? 다섯이 안 무겁습니까? 배나 안 무겁습니까? 그러니까 '과거에 그런 것 보니 중량이 그분이 높으니까 내 마음에 틀렸다 싶지마는 순종해야 되겠다.' 이리 되는 것입니다.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이래 하고 지도를 하는 사람도 이렇습니다.
그것을 계산을 착착 쌓아 가지고 이것을 통계를 자꾸 맞춰가며 이래 나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를 찾는 사람이요 진리를 대우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요 대우하는 사람이지, 이런 걸 이것 가리니까 '에, 시시한 걸 가지고' 뭘 시시한 걸 가립니까, 가린 것이? 찬 생명이 우주보다 큰데 어떻게 시시합니까? 저는 돈이나 몇천만 원 하면 '아이구, 그것은 참 가릴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이렇지 마는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논리 하는 것은 '그것 뭐 꽉 찼는 사람, 예수 믿으시오 하면 나을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적게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은 유물주의자요 한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 했는데, 한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 말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결합됐으면 우주의 주인공이오. 한 생명 이 우주보다 귀하다 말은 한 사람이, 결합이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결합된 그것이 피조물의 생명이오. 한 사람이 하나님과 결합된 그 결합은 우주보다 크다. 왜? 우주의 주인공이오.
영계의 주인공이오. 이러니까 크지 않습니까? 이런 중대한 지금 사업인데, 하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이런 투자한 큰 사업인데 이 사업이 크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도, 사건이 크지 않을지라도 옳으냐 그르냐, 어느 것이 참되냐? 자기가 불교의 불경을 가지고 불경적으로 옳으냐 그른 걸 따지면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신 우상 마귀를 찾는 것이 되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을 근거해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걸 찾는 것은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막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제 그것을 보니까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아주 보니까 아주 눈이 그만 정기가 팔팔 나고 이래 가지고 눈이 막 이래 솟겨 가지고 막 이래 가지고 그 취미 있게 하나 틀리니까 이래 긁으면서 '아, 그렇다.' 자꾸 이래 하며 자기에게 아주 옳은 것은 수락하고 그것 틀린 것은 그것 조금 얼마 틀렸다 하니까 '아, 그것도 그렇다. '고 이렇게 아주 흥미 있게 취미 있게 거기에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쓸데없다 소리는 안 해도 그렇게 쾌감을 가지지를 않고 이래 앉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쓸데없는 일 하고 있다.' 마음에 그 회의하는 것을 불쾌하게도 여기고, 업신여기기도 하고, 또 공연히 라고도 하기도 하고,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이 공연히 쓸데없는 얘기로 지루하자 이렇게 생각해서 하는 그것을 내가 낱낱이 안면으로 다 본다 말이오. '저 사람은 어떻다.' 그것 인제 그 사람은 그것이 뽑혀 나가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믿지 못 하요.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언제 떨어져 나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옳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옳은 것으로 나타나 옳은 것을 잡고 들어가 보니까 주님이 그 안에 계시오. 삐뚤어진 것을 자기가 그것을 삐뚤어졌지마는 '이것 삐뚤어졌지 뭐, 삐뚤어진 것 이까짓 삐뚤어진 것이야' 이까짓 것 삐뚤어졌다는 조그만한 삐뚤어진, 자기가 그 삐뚤어진 것을 잡았는데 들어가 보면 그 속에 마귀가 들어앉았습니다.
여기에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이 자기 마음에 '이것은 내가 옳은 줄 안다. 다 못해도, 다 못해도 내가 이것 하나 해 보겠다. 이것 하나 해야 되겠다.
이것 하나 해 보겠다.' 그러면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인제 차차차 해 나가면 그 사람은 자기 마음에 작정하지 못한 것이 혹 하나 있는 사람, 둘 있는 사람, 작정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작정한 대로는 다 지금 이행하고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작정해 봤자 안 되니까 작정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어떤 사람은 작정 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 자꾸 돼 가는데 이제는 어떤 사람은 작정한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그 사람은 입학생 아닙니까? 작정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도 작정해 봤자 안 되니까 작정 못 하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있어서 '내가 이것 하나 작정을 해 봐 야 되겠다.' 자기에게 필요하고 가깝고 자기에게 해야 될 것 이게 옳다는 그 한 가지를 딱 이것을 자기가 작정을 딱 작정해 '나는 이것 하나 해 보겠다.' 그렇게 자기가 벌써 성경 신앙 지식을 가지고 믿음을 위해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내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내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하는 데에는 모든 것 다 못해도 이것 하나 내가 해 가가겠다.' 하고 그 하나를 딱 작정을 했으면 그것이 자기가 자기 혼자 작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한 것이 자기보다 하나님께서 탄식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것 하나 작정을 시키려고 애를 써 가지고 중생 된 영을 또 일으켜 가지고 성령과 중생 된 영이 거기에 두 분이 한테 합해 가지고 내 문을 두드리면서 내 마음에 그걸 하도록 하려고 그전에 '이게 옳다. 이래야 될 것이다, 이거 잘못했다 이것 이래 하면 좋겠다.' '좋겠다.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여러 수십 번 수십 번 거듭 연습시켜 가지고 자기에게 '이것 내가 하나 작정해 보겠다.
작정해 보겠다. 이래 해 보겠다.' 그렇게 심지를 세우게 됐다 그말이오.
그것이, 그렇게 자기 마음에 옳다 해서 하나를 작정한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고 원하시고 원하시고 원하시고 안타까운 마음, 또 중생된 영이 원하고 원하고 탄식으로, 자기 속에 속사람이 말이오. 속 사람과 주님이 탄식으로 이렇게 해 가지고 작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놓지 않고 "견고한 자" 그것을 굳게 지켜서 이런 일이 있어도 저런 일이 있어도 그것을 굳게 지키는 그것이 뭐이냐? 주님 대접이다 그 말이오. 그것이 여호와 의뢰라. 여호와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의지하고 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바라보다니? 우리가 말이오, 자기가 만일 그 사람에게 뒤에 참 어려운 소리를, 어려운 부탁을 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해야 될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 만만히 할 수 있습니까? 어려운 부탁을 할 것 있으면 만만히 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내가 사람같이 보이고 또 그 사람으로 서로 친밀을 가지고 이래 하려고 밑천을, 어려움을 부탁할 때에 들어 줄 수 있는 그런 밑천을 마련하려고 애를 씁니까 안 씁니까? 사회 생활 한 ○장로님? ○장로님은, 사회 생활 해 본 사람은 척척 안다 그 말이오. 예수만 믿고 사회 생활 안 해 본 사람은, 이것 그만 어릴 때부터 예수 믿는다고 믿어 가지고 교역자 나간 사람은 이걸 모르기 때문에 탈이라.
사회 생활 해 본 사람은 '이 사람에게 내가 어려운 소리를 할 것인데. 할 수 있을 일이 생길 건데' 이러면 미리부터 알아서 그 사람에게 서로 친밀을 가지고 그 사람을 후대하고 자꾸 사이 좋게 합니다.
또 사람이 사회 생활 해 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아무 상관없는 사람도 그 사람에게 자기가 친절히 하고, 겸손히 하고, 신실히 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후대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 이 사람에게도 내가 언제 내가 원수가 외나무다리에 만난다고 그 쓰운 소리를 할는지 어려움을 부탁할 일이 있을는지 이 사람과 무슨 인연이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에 뒷날을 봐서, 그래서 '뒤에 볼 나무는 끄터러기를 높이 베어라. 후에 볼 나무는 끝을 높이 벤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을 상대하는데 뒷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대해서 만만히 하지 못하고 후히 하고 조심 있게 한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심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자기하고, 자기 단독이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기 속에 옳은 지식하고 했는데 옳은 지식하고 한 그것이 옳은 지식하고만 한 것이 아니고 옳은 지식 속에 옳은 것의 주인 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약속을 맺은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요동치 않고 하는 사람은 "평강에 평강으로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평강으로 그래 지키신다 하니까 하나님이 지켜 준다 말이오. "지켜 주신다" 왜? 그것이 여호와를 의뢰함이다.
여호와를 바라봄이다 그 말이오, 여호와를 바라봄이다. 여호와를 바라봄이라는 건 후에 볼 나무를 끝을 높이는 것처럼 뒤에 그 사람에게 혹 쓰운 소리나 있을까 해서 미리부터 조심해서 밑천 장만하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자기가 소망하는 그것으로써 인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고 나면, 또 무슨 말했느냐? 영원히 의뢰해라. 그는 영원히 의뢰할 만하다. 영원히 의뢰하라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으로 더불어 약속을 맺은 심지를 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요동치 말고 지키라.
또 그 다음에 또 무슨 말을 또 해 놨느냐 하면 그는 높은 데 있는 것을 낮추시기도 하고 강한 자를 꺾기도 하시고, 높은 것을 헐어서 땅에 티끌이 되도록 할뿐만 아니라, 티끌이 되도록 할뿐만 아니라 제일 천한 인간의 발에 지끈지끈 밟히게까지 하신다. 이렇게 높은 것을 끌어내려 가지고 천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인간 중에 제일 천물이 "궁핍한 자가 밟으리로다" 제일 천한 인간에게 밟히게 까지 할 수 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네가 마음에 '이것 하나 실행해 보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면 네게 대해서 그것 하나 이행하려고 하면 네게 대해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아주 네게 대해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려움이 있지마는 하나님이 너희의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신다. 그것을 뒤에 말해서 "주께서 평강으로 평강으로 지키신다" 네가 하나 작정한 그 일을 네가 하려고 할 때에 '아이고, 이 일은 내가 못 하겠는데, 이제는 내가 거짓말 한 마디 안 하려고 이와 같이 작정했지마는 거짓말 한 마디를 안 하려고 하니까 거짓말 안 하면 이 자리서 내가 모가지가 달아나겠다.' 하는 그런 일이 있다 그 말이오. 네가 하나 뭐이든지 결심을 하고 결심한 그것을 이행을 하려고 하면 네 힘으로써는 할 수 없는, 참 네 힘의 100배나 있어야 하지 그것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을 당하게 된다. 그럴 때에 네가 요동치 말아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 하나님이 그 일을 너를 모자 란 것을 보충해 가지고 네 모자란 걸 보충해 가지고 그 일을 하게 할 것이다.
또 네가 하나 그 작정한 그걸 지키려고 하면 어떤 강한 세력이, 강한 세력이 방해를 해 지키지 못하게 한다 말이오. 강한 세력이 방해를 해서 지키지 못하게 한다 말이오. 지키지 못하게 할 때는 '아이구, 저렇츰 강한 세력이 이렇게 닥쳐오니까 내가 지키는 것 못 지키구로 하는, 못 지키구로 하는 세력은 저렇츰 강한데 내가 어떻게 지키겠느냐?' 강한 세력이 올 때도 요동치 말아라. 네가 나 와 작정한 작정에는 요동치 말아라. 높은 것을 꺾어서 땅에 떨어뜨릴 뿐 아니라 가난한 제일 약한 자의 발에 지끈지끈 밟히게까지 한다.
강한 게 어디 있느냐? 그까짓 것 나라가 강하냐? 강한 나라라도 네가 지키는 데에는 그걸 방해하면 내가 그걸 꺾어서 진토에 떨어져서 천한 인간에게 밟히게까지 라도 내가 다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강으로 평강으로 지키신다. 이것이 여호와를 의뢰함이다. "이것이 하나님하고 작정함이다. 그럴 때에는 네가 염려하지 마라. 네 자신이 약할 때에도 염려하지 말아라. 네 힘이 모자란 것은 내가 도와 줄 터이니까 너만 요동치 말고 해라. 상대방이 강하다. 상대방 강해도 염려하지 말라. 어떤 강한 것이라도 내가 너 방해하는 데는 내가 그것 꺾어서 깨뜨려서 없앨 수도 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많은 것을 작정하지 말고 '내게는 이것 하나가 필요하다. 이것 하나는 내가 어떻게 해도 지키겠다. 이것 하나 지키려고 하면 뭐 이웃의 애로, 가정의 애로, 사업의 애로, 위에 사람의 애로, 내 자신의 그 신체의 애로 오만 애로가 있지마는 그것을 요동치 말아라. 심지가 네가 견고히, 그걸 굳게 하고 요동치 말아라. 그럴 때에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하고 계약이다. 암만 환경이 어려워도 염려하지 말아라.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며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음이여" 저 높은 것을 지를 지끈 밟는다 그 말이오.
"높은 것을 발음이여" 어떤 자가?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제일 못난 자의 발에 밟히구로 한다 말이오. 제일 잘난 자를 제일 못난 자의 발에 밟히게 까지 내가 할 수가 있다. 내가 여호와다. 너하고 계약 세운 게 이렇다. 이러기 때문에 이행을 하라.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첩경이라면 지름길 아닙니까? 질러가는 것이 그것이 첩경인데 질러가는 그 길을 평탄케 합니다. 질러가는 것이 어떤 길이요? 질러가는 것이 무슨 성공에, 질러가는 길이 무슨 길입니까? 이 성공을 하는데 이 성공을 하려 하면 이리 하고 이리 하고 이리 하고 인간하고 사회하고 뭐하고, 뭐하고 하려 하니까 일을 하려 하니 어떻게 복잡하고 분주하고 많은데 그것이 지금 둘러 가는 것입니다.
질러가는 것은 주님하고 나하고 같이 해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함으로 되어지는 그것이 질러가는 길이요, 그게 자꾸 지름길이오.
무슨 일 자기가 사업을 할 때에 '이 사업을 하려 하니까 인간적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막 그래 가지고 인간 다 교제 다 가지고 주일 범할 때는 주일을 범하고, 거짓말 할 때는 거짓말하고, 또 술 받아 줄 때는 술 받아 주고 별일 이리 해 가지고 하는 것이 둘러 가는 길인데 첩경으로 가는 것은 어떤 것이 첩경으로 가느냐? 자기에게 있는 자기 그 사업을 성공하려 할 때에 그 사업 성공하려 할 때에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 사업을 경영합니다. 이것이 질러가는 길이오. '이러면 되겠느냐?' '이러면 이래 가지고 안 되는데' 염려 말아라.
첩경을 평탄케 하신다. 네가 질러가는 이 길을 가면 내가 그 길을 평안하게 해서 성공하게 해 주겠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의지하는 자는 되고 안 하는 자는 안 됩니다.
하나 결심할 것. 한번 결심해 보십시오. 결심해서 그것 하나 하면, 그것 하나 합니다. 그것 하나 하려고 보면 다른 모든 것이 따라서 되어져 버립니다. 언제 됐는지 모르요. 그것 하나 하려고 하다 보니까, 나는 그것 하나 하기로 했는데 과거에는 나를 보면 비쭉비쭉한 사람이 나를 보고 아주 사람으로 대우를 합니다.
내가 그것 하나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신임을 합니다.
우리 저 ○집사, 새벽기도 말이오. 이래 가지고도 새벽기도 나와, 인제 오늘 처음에 나왔네. 이래 나오니까 다른 사람이 모두, 저 무슨 청승이라고 이러다가 나중에는, 청승이라 하다가 나중에 꼭 그러고 자꾸 이래 하니까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감화 감동을 받았다 말이오. 모든 사람이 감화 받아. 새벽기도 나오는데, 등신이 새벽기도 나오는데 감화 감동 받아. 감화 감동 받으니까 '그 사람은 참 사람이라. 그 사람은 하는 일 헤 협조를 해야 돼. 그 사람은 것이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 이렇게 그것 하나 가지고, 지금 다른 게 돼서 요새는 아마 지내기가 괜찮은 것 같애. 저 먼저 나를 대접한다고 말이지, 밥도 굶던 사람이 대접한다고 돈을 10만원을 가져왔어. '안 한다. 그만 연보로 해라' 자꾸 안 한다고 물리쳤더니마는 나중에 연보궤에다 넣어왔어. 그 10만원을 말이지. 나 뭘 좀 사 자시라고. 그래 10만원을 내가 받아 가지고 그것을 아주 요긴한 데 쓰는, 이 설교록 이것 지금 출판하는 데 거기에 쓰려고 지금 딱 옮겨서 저축을 딱 해 놔. 저금을 딱 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 첩경으로, 옳고 바른 자의 지름길, 첩경은 질러가는 건데, 둘러 안 가고 질러가는 것. 질러가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한다.
질러가는 길은 어떤 길이 질러가는 길이냐? 인간들의, 모든 모든 인간을 맞춰서, 과학에 맞춰서 이게 다 하는 그것은 둘러 가는 것인데, 지름길은 주님에게 순종하는, 주님의 뜻대로 하는 이것 하나 가지고 만 가지를, 믿음 하나 가지고 만 가지를 성공하려 하는 이것이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이 평탄케 해 주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씩 결심해 봐요. '나는 새벽기도, 나는 지금 뭐' 반사들로 말하면 '다른 건 안 해도 내가 아무래도 이제 아침 심방 저녁 심방, 내가 한 집을 해도, 한 집을 해도 심방에 결석한 것,' 어떤 사람 보니까 아침 심방이 결석했다 저녁 심방이 결석했다 이걸 그만 심방에 결석하는, 아침 심방에 저녁 심방에 그걸 적어 내대요, 보니까. 아침 심방 결석했다, 저녁 심방 결석했다. '이 심방에 결석하는, 결석하는 것 이것 내가 안 하겠다. 한 집을 해도 하지 내가 이것 하나는 결석은 안 하겠다.' 이것 하나 결심하면 이것 하나 결심했는데, 그것 하나 결심했는데 나중에 그것 하나 어기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면이 얼마나 많이 됐는지 모르겠어. 또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 뭐이든지 쉬운 것 하나 작정하고 요동 치 않고 해 보라 말이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가서, 나중에는 작정 다 해서 이행하고 작정 안 한 것이 없어. 안 한 것 없는데 가다가 하나 발견됩니다. '아, 이것을 내가 이제까지 몰랐는데 이것 하나 또 작정해야 되겠구나.' 바울이 말하기를 "양심에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 한 것은 자기가 작정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작정한 것은 다 이행을 했는데 지금 아직까지 작정할 것을 발견치를 못해 가지고 작정 못 한 것이 남아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할 자인 줄 알고 있다. 알지 못하심이 없는 그분 앞에 갈 터이니까, 내가 아는 대로는 다 작정했고 이행을 했지마는 아직까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 때문에 내가 죄인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 작정해 나가면 나중에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오늘 아침에는 무엇인가 하나 작정하자. '나는' 각각 사람마다 다르다 말이오. '나는 이것 하나 작정하겠다.' 이렇게 해 가지고 그것을 작정한 것이 주님하고 작정한 것이요, 그 작정을 버리지 않는 것이 주님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그 작정을 그대로 끝까지 가지고 나가는 것이 여호와의 도우심을 자기가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라 그 말이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