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는 영광의 도


선지자선교회 1982년 7월 12일 월새

 

본문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자기가 신앙생활 하다가 형편이 천해질 때라든지 또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려고 하므로 인해서 내가 천해지든지 할 때에는 하나님이 사람되어 날  구원하러 오신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주님이 주시는 이 구원을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고 이 구원을 보존할려고  할 때에 우리의 형편이 천해지는 수많고 우리의 모든 이치가 떨어지는  수많습니다. 그래도 천해져도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의 도를 배반치 않고,  떨어져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그 일에 내가 제재받고 중단하지 않는 그런  신앙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일날 성령의 이전보다 충만함을 받아가지고 바로  깨달아 주님을 볼 때에 사도요한은 죽은 자와 같이 되어서 머리를 들지 못해서  그때를 형용하기를 ‘주의 얼굴이 햇빛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얼굴이  그렇게 광천한다는 것이 아니고, 얼굴이 햇빛 같다는 말은 해를 보면 볼 수  있습니까? 해를 보면 눈이 부셔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볼 때에 내가 낯이 부끄러워서 내가 부끄러워서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그 사람 상대방이 허무해서 너무 생각 이하의 사람이라 눈이  부신 것도 있지마는 그것은 안 믿을 때의 생각이고 안 믿을 때의 비판이고 믿고  난 다음에는 사람도 그 사람은 거룩한데 자기는 거룩하지 못할 때에 낯을 들  수가 없고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참 사랑과 진실로 행했는데 나는 그와 같은  사건에 너무도 무자비하게 경거망동 했을 때에 낯이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이것 모양으로 사도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가지고 자기가 과거에 산  생활이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자기는 의인이요, 충성이요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알고 자신만만했는데, 성령의 충만함이 오고 보니까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인간을 구원하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신 것을 그것을  깨닫고 보니까 바로 보고 보니까 과거에 그렇게 생각하였던거, 만족히 여겼던거,  의로 여겼던거, 모든 것이 너무 참람되고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그런  밝음을 받아서 그래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내가 주님의 구원을 받아 도를 지켜나갈 때에  주님으로 인해서 가난해 질 때에 내가 암만 가난해져봤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부요로 모든 거 다 낙원을 위해서 버리고 옷 한 벌을 가지지  못하기까지 그렇게 가난한 것에 비하면 우리 가난이 얼마나 가난해지면 그만치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자기에게 가난이 올 때에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그 많은 부요를  다 내여 놓으시고 가난해지신 나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해지신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가난해지심을 우린 연상해서 생각하므로서 자기가 주와 주의  도를 인해서 가난해질 때에 위로가 되고 오히려 가난해진 것을 조그만치도  불만하게 생각하였던 그것이 마음에 가책되어서 견딜 수 없는 요것이 도를  자기가 받는 것이요 도인이 되어서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는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므로 요번에 다른 사람이  구원을 생각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유익을 봤을 터인데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손해본거, 내가 가난해진거, 이것도 주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신 이것을 연상할때에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난해진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러니까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조그만치라도 무엇을 찝찝하게 생각하였던 것을 가책이 되어서 견딜 수 없는  그것이 성신의 감화를 바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다 유익되기 위해서 하신 것인데 그랬다가 당신이 가난해지게 하는  일이 어렵지 부유하게 하는 일이야 얼마든지 당장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부유하게 할 수 있고 얼마든지 높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높아지기가 어렵고  떨어지기가 쉽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떨어지기가 어렵고, 가난해지기가 어렵지,  높아지고 부유해지는 그 까짓거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왜 가난해지기가 어렵고, 왜 떨어지기가 어렵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인도하실  때에 그와 같이 되는 그것을 인생이 아직까지 그속에 못된 마귀의 그 사욕이  있기 때문에 잘 받지 않으니까 않된다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넋이 나가고  돌아가지. 그러면 그래 가지고서 그만 마귀의 자식이 되지. 하나님 하나님하고  돌보심하고 버리지. 이래놓으니까 이것이 낮아지려고 할 때 낮아지지만 높이는  것 그까짓것 당장 높일수 있지만 서도 이걸 못한다말야. 인간이 자기를 부인치를  못하기 때문에 낮아지기가 낮아지게 하기가 어렵고 가난하게 하여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난해 질때에 자기를 부인치 안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불만, 불평도 있을 것이고 않된 욕심도 생길 것이고 별별 생각이  나지마는서도, 나는 주의 구속을 받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죽어도 병들어도 어째도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어떻게 인도해서 어떻게  쓰시던지 나는 남은 여생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다. 바치는 이 사람이  되야 도인이 되었고, 이래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돈도 줄수 있고 권위도 줄 수  있지, 이것이 않된 자에게 주며는 옛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주면 준거 가지고서  화를 만들고 다른 사람까지 멸망을 만들지 이익될것이 하나 없다 이거지.

 그러기 때문에 나와 내 도를 위해서 손해본 자는 여러 가지 이것저것 손해본  자는 내가 세상에서 여러 배, 백배를 준다. 그러나 핍박을 겸하여 준다. 그말은  그 복을 주는데 말씀대로 하면 당장에 망할 그 길이고, 말씀을 떠나면 성공이 될  그 길이고, 그렇게 보여지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핍박이요, 마찰이요, 애로란  말입니다. 꼭 애로를 통해서 옵니다. 그럴 때에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 인정하면  당장에 성공이 되는데, 그럴때에 자기 부인이 안되기 때문에 지체하고 만다.

주님은 전능의 분이시니 우리에게 이렇게 주의 공로로 계약되어 있지만 믿지않기  때문에 모두가 틀린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마치 하늘과 땅의 높이가 차이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 우리  생각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을때에 순종하는 그것은 좋을 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나쁠 때 순종할란지 않할란지 모릅니다. 좋을 때는  순종했지요. 나쁠 때에 제 형편이 나쁠때에 시켜봐야 됩니다. 또 나쁠때는  순종을 잘합니다. 나쁠때는 순종을 잘하지만 그것이 제형편이 풀리고 좋아지면  어떻게 될는지 또 모릅니다.

 나빠도 순종, 나빠도 주의 것으로 살고, 좋아도 주의 것으로 살때에 주님은  그에게 인간이 모르는 중차대한 그런 짐을 그에게 지울수 있고, 사명을 맡길수  있고 그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여생을 살수가 있는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주님이 날 위해서 어떻게 되어졌는가 그것을  생각하여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되어져도 주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된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주님과  나와의 대조를 해가지고서 살므로 사람들이 거 갈급증이 나지 안하고 항상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서 만족해지고 또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해 줄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 때에도 그사람과 나와 비교하고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  내가 넘어지고 떨어질지라도 주님이 날 구한 그것을 내가 그 사람 구원하는데에  비교해볼 때 내가 암만해도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것만치 내가  합니까? 그러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 암만해도 주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것만치 난 못했고 아무리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희생을  했다할지라도 주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희생한 그 희생만큼 난 못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난 무익한 종이요, 바울이 늘 `빚진 자라, 빚진 자'라 말하는 것은  주님은 있는 것을 싹 다 드렸는데 자기는 비어 살지마는 서도 다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빚진자라 이라다가 디모데후서 4장에 `이제는 순교의 제물의  그 시간을 맞이하여 말하기를 이제는 싸울 싸움은 다 싸웠고, 달려갈 길은 다  달려갔고 내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이제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땐  미쳤단 소리하지 않았다. 이 생명까지, 생명까지 주의 영광위해서 주님의  복음위해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생명까지 딱 바쳐, 다 바친 거기에서 비로소  빚을 벗었다. `빚을 졌다' 그말은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므로서 이렇게 큰  구원을 주셨고 큰 구원을 주실때에는 큰 희생을 드려가지고 구원을 주셨는데, 이  구원을 내가 다른사람에게 전해주는데는 내게 있는것을 다 희생해야 될 터인데  아직까지도 생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빚졌다, 빚졌다, 다 바치지 못했다'  이랬다가 순교로 순교가 되면서 `이제는 달려갈 길 다갔다. 이제는 싸울 것 다  싸웠다. 이제는 내가 지킬 직분 다 지켰다. 이제는 남아있는 것은 의의 면류관  밖에는 없다.' 말한 것입니다.

 그 바울이 나는 죄인중에 괴수 죄인이라는 것이 뭐 다른 사람들 보고 자기보고  비교했으면 죄인이라는 것이 느껴집니까? 다른 사람들은 60점짜리 이며는  사도바울은 100점짜리입니다. 그 예수 믿기 전에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예수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사랑의 법에 어김이 하나  없었다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죄인이라고 합니까? 암만 봐야 그때 사도들  중에는 제일 낫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인간위에 뛰어난 사람들인데 사도들과  비교해도 사도들보다 뛰어났는데, 사도들보다 뛰어났는데 그러면 누구를  비교해봐서 죄인입니까? 이사람 봐도 그사람 보다 났고, 저사람 보니 저사람보다  났고. 났다고 자기는 의인중의 의인이라 이랬을 것인데 죄인중의 괴수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과 자기를 비교하지 안하고 주님과 자기를 비교했기 때문에 이런  답안이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데 암만 자기가 지중해에서 인간구원을 위해서 잡혀가면서 배위에  타가지고 그렇게 풍랑일때에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이 풍랑이니까 모두다 저 살  구멍만 생각하고 이러는데 사도바울은 풍랑일어 자기 죽는 것은 생각지 안하고  자기가 그 뱃속에 들어있어 배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줘야될 터인데 해서 이것 때문에 쉬지않고 기도하고 여기에  전심전력이 기울여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가지고서 `바울아 네가  이렇게 똑같은 환란을 당하고서 네 환란은 돌아보지 안하고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으니 안심해라.' 네 기도대로 이백, 이백십 몇입니까? 여섯  사람이가? 에? 이백일흔두 사람이가? 이백일흔두 사람? 에? 칠십육?  이백일흔여섯 사람이가? 네.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오늘밤에 네게 주셨다.' 네게  주셨다. 한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아니 하리라. 그날 밤에 내게 주셔 그날 밤에  바울의 제자가 됐고 예수 믿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들은 도를 받았습니다.

 예수교는 이런 희생 끝에 맺어지는 것이지 이것이 없이 맺어지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했으니까, 아 햐 칠 년동안 감옥에 육 년동안 감옥에  있다가도 그 자랑을 일생동안 팔아먹고 뭐 제 욕심대로 다하고 망령 다하고도  거짓말로 빚을 내가지고서 자랑할 길 풀어놓으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척  하는걸 보고 나는 집어던져 버렸어. 이 뭐야 뒤에 아무것도 아닌데. 이래  영화배우 나왔다 하지? 세상은 참 별세상이라. 그럴터인데 사도바울이  그렇게하고 괴수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것,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것. 이걸 생각해보니 자기는 암만이 해봤자  거기에 억만분의 일도 않된다, 이러니까 하고도 부족하고 하고도 부족하고 항상  빚진자 되어서 마지막에 순교에 입장에서야 비로서 안심을 하고 `이제는  싸울싸움 다 싸웠다' 그랬습니다.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한 것, 주님이 인간을 내가 구원할려고 한 그사람에게  대해서 주님이 하신 것, 이걸 볼때에 나는 구원을 가로막은 것 뿐이라, 그러므로  주님을 보면서 주님이 하신 일과 자기 한일 주님의 희생과 자기희생 이것을  비교하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해도 부족이요 불만이요 마음에 항상 죄인으로  불충으로 겸손히 있을 것이요, 주님을 보지 안하고 인간과 자기와 비교하면 그  인간은 교만에 빠져서 시험에 들기 쉽고 자기의 의에 대해서는 갈급이 없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지를 않해. 의의 만족이 없다. 나는 이렇게 의가  크다. 너무 지나치게 의를 행했다. 너무 지나치게 예수 잘 믿었다. 이렇게  될것이란 그말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름을 주시지 의에 만족한  자에게는 배가 고파집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그에게 더 충만해가지를 못한다  그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오늘아침에는 영광에 대해서 말을 하겠는데, 영광 하나님의 도는 영광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보며는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불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불렀다.' 하나님의 도는 영광스러운  도요 덕있는 돕니다. 덕이란 말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입히는 덕을 보이는  그것을 가르쳐서 `덕'이라 말합니다.

 덕은 덕 보이는 것은 돈으로 덕 보이는 것도 있고 권세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덕 보이는 것도 있고, 또 노력을 가지고 노동을 가지고 덕 보이는 것도 있고, 그  사람에게 지식으로 덕 보이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덕을 보이는 것이 있지요.

`아, 그 사람은 아무 것이 덕을 많이 본다.' 덕 보이는 것도 있지마는 그  사람에게 좋은 본을 보여서 저 사람이 어찌 저리 됐노? 그 사람을 닮아서 그리  됐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본을 보여서 다른 사람이 본 그 본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변화가 되어지는 이런 것 다 덕 보이는 것입니다.

 덕 있는 사람, 덕 보이는 사람. 이제 덕을 많이 보면 덕본 사람들이 덕 보인  이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영광을 돌립니까? 욕을 합니까? 에? 에? 영광을  돌리지요? 이렇기 때문에 덕에서 영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는  영광이요, 덕이라.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불렀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보면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불렀다.' 그 영광을 보니  아무리 시간이 가서 깨달아지고 또 깊이 파고 들어가지고 또 깊은 이면을 보고  보고 자꾸 찾아 들어가고 알아들어가고 보아 들어갈수록 덕은 끝이 없고 한이  없어. 전체가 덕 덩어리라. 당신의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전부 우리의 우리를  덕 보이기 위해서 우리를 유익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 다 투자했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도는  덕의 돕니다. 영광이라 이러니까 모든 자들이 지옥에 있는 자들도 주라  시인하면서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렸다 이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영광의 도요, 덕의 도라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하고 나하고 단둘이 붙었으면 됐지, 뭐  사람이 끼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래가지고 덕에 대해서 상관치 않습니다.

내가 이러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나 해를 끼치나 감화를 주나 다른 사람을  오히려 넘어지게 쓰러지게 하나 내가 이러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 이 내  언행심사가 내게야 어떻게 됐던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겠네, 하나님에게  기쁨되는 것은 내게 좋은 것도 하나님에게 기쁜이 되지마는 서도 그일은 내게만  대한 일은 없습니다. 내게 대해서 유익이 되도 다른 사람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덕이 되지않는 일을 본이 되지않는 일을 유익을 끼치지 못한 일이 된다고  하며는 그것은 덕이 없는 일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1장 4절 엔가 그 이하에 보며는 아, 5절에 보면  `믿음 그다음에 무엇입니까? 믿음, 믿음에 덕을 다하고' 이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 대한 것이요, 믿음은 하나님에게 대한 것이요, 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으로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빛을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로 인해서 의에 대해서 힘을 얻도록, 진실에 대해서 힘을  얻도록, 사랑에 대해서 힘을 얻도록 그 감화를 줘서 감화를 주는 것이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  낙심할 사람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래 에,  홍수철목사님은 많은 덕을 세우고 갔습니다. 또 정경림집사님도 덕을 많이  세우고 갔습니다. 그 암병이라는 것은 지독히 아프다는 것인데, 그 아픔이 그가  신앙을 흔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교인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신앙에 손해가 갈 그런일을 하지 않을려고 애를 썼고  마지막에 설교하다가 넘어져 쓰러져 돌아가시고서 그시간으로 신앙을 떳단  말입니다. 다른사람이 그분을 볼 때 그분을 생각하면 `에그 그분도 그렇다, 뭐,  시시하다.' 이런일은 그분을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마음이 긴장이 되어집니다.

 그럴때도 그래 믿었다. 나는 거기에 비유할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  마음은 왜이리 흔들리고 있을까? 그분을 생각할 때에 부끄럽고 주님을 생각하면  더 부끄럽고. 이러기 때문에 덕을 세우고 갔습니다. 그래, 정경림집사님도 옆에  있는사람 말 들어보니까, 허퍼도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감사가 변동되거나 자기에  대해서 불만을 품거나 이런 일이 없었고 언제든지 감사하고 기뻤고 그 입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고, 누구든지 만나면 웃으면서 그 다른사람에게 감화를  줬다는데 나는 그 정경림 집사에 비하면 나는 백분의 일도 않됩니다.

 나는 조그만 일만 있어도 그만 그 상이 새파래지는 것이 다른사람에게 아주  좋지않은 그런 인상을 주지 그렇게 뭐 나도 암병 주시면 나는 아마 깡깡하고  찡그려 가지고 옆에 사람이 견디지도 못하게 할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의 평화를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을 찬양함을 조금도 요동치 안하고 덕을  쌓았다. 전상수목사님도 제가 말들으니까, 그 배가 이렇게 부어가지고 그 병은  아픈 중에는 가장 아픈 병이요 그런 병이었는데, 이래도 그 숨질때까지  다른사람이 볼때에는 그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않아픈 것처럼 권면하는 얘길하고  또 다른 사람이 봤을때에는 손을 들어서 악수를 하고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기쁨을 그에게 발표시켜서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이 도로 위로를 받고 않아픈갑다  하고 안심하고 갔는데,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  늑막염으로 갔다가서 안에 물이 채어서 배가 이렇게 됐으니까, 아, 우리가 속에  조그매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배가 부르지 않아도 속이 갑갑해서 마구 뛰나서고  야단을 치겠는데 그렇게 됐다면 사람이 못견딘다 말이요. 가보면 굉장한 일이  있어.

 어떤 성자를 무소 가죽을 벗겨가지고 무소 가죽을 벗겨가지고서 벗기니까  물씬물씬않샀소? 무소에서 벗겨가지고 그안에다 집어 넣어가지고 공중의 나무에  달아났다 말이요. 이기 마르면 오그라져서 이렇던 것이 오그라지면 요것밖에  않된다. 그래 사람이 졸려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참 힘드는 일인지 모릅니다. 요  손가락 하나도 볼끈 조아가지고서 피가 통하지 안하고 요것이 딱 조아지며는  마구 아파서 못견딥니다. 그런데 팔뚝하나 그러면 못견뎌. 이런데 그렇게 전신  그랬으니 굉장할 터인데도 그래도 다른사람에게 덕을 잃지 않는다. 자기  아픈것만 생각하고 마음대로 갖다가 생가해서 다른사람에게 믿음의 손해를  보이고, 기쁨의 손해를 보이고, 하늘의 소망의 손해를 보이고, 하나님 믿는다  해도 소용없다. 봐라. 하고 온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그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졌구나. 신앙의 의인이다. 다 감화를 받고 가도록 하는  그것이 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매장을 당하고 이렇게  매장을 당하니까 이 사람이 아마 죽었던지 기절했던지 밥맛도 없어 분해서  못견디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고 가보니까, 밥도 잘먹고 기쁨도 충만하고  오히려 이렇게 매장시키는 원수된 그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참 그사람들을  사랑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사람들이 도로 위로를 받고 가는 것처럼,  저사람이 저렇게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거지 됐으니까 이제 저 사람의 신앙은  전부 흔들리고 괘숭토 않할 것이다. 아, 가보니까 아 정함없는 물질 그까짓거  오면오고 가면가고 그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극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근에  대해서 기근은 배고픈것인데 기근적신은 배고프고 헐벗는 것이 기근적신인데,  그것이 와도 조금도 요동치 않아요. 이러기에 덕 세우기를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않됩니다.

 덕, 이래 덕을 세워서 영광을 돌릴수 있도록 이러니까 내가 가만 생각하면 참  얼음이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얼음이 더 차운 것 처럼 이제 내 밑에  제자지마는 아주 저 변판원씨, 순교자 변판원씨라 현직 박기천조사님이라든지  바로 내 직계제자로 되있지만 순교했는데, 그런분들과 내가 비교해서는 그 내가  참 그럽니다. 나는 실상 아무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은 나를 칭찬하니 내가  죽기전에 죽기전에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을 하고 다른사람에게 억울하게 욕을  얻어먹는 일을 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이것을 갚고가지 넘는 그 영광을 받았고  칭찬을 받았으니까 이걸 대가를 내고 가야되지 이대로 가며는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참 부끄러운 사람이 되겠다. 그래서 앞으로 그런 것이 오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오기를. 그 않오면 하기는 요만치 의로운 일을  해놓고 막 이렇게 했다고 칭찬을 받고 다른 사람이 의로운 일을 했는데 칭찬은  내가 받고. 변판원씨 그런이가 순교의 신앙을 그렇게 가지고 지키니까 아 그분이  아무것이 밑에가서 있던 그 제자가 아닌가, 교인이 아닌가? 그러니까 아 일은  그분이 했는데 칭찬은 내가 받으니까 댓가를 뒤에 내어도 내야지. 받을 칭찬을  받아도 하늘의 상급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니까 이 칭찬받는 것은 참  백해무익입니다.

 그래 그런일을 가만 생각하면 앞에 추달선생도 그 `너 지금도 내가 시키는대로  못하겠느냐?' 총알 한방 탕 놓으니까 팔이 하나 뚝 떨어져도 다시 부시시 떨고  일어나면서 `못합니다.' 또 이러다가 다리가 하나 뚝 부러져도 푹 자빠져가  드러누워서 `이래도 이놈의 새끼 못하겠느냐?' `못합니다.주일을 범할수  없습니다.' 이래가지고 마지막에 순교당했습니다. 그사람이 그사람이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 회계한 것처럼 반드시 그사람이 택한자라면 큰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사람이 그래놓고 나중에 그런말을 하지 못하고 이남에서 청상  믿었을란지 이북에 가도 그사람이 지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덕을 세워가지고 덕 그것이 뒤에 영광이 되어지기까지 힘써야  됩니다. 영광과 덕으로 부르신 도라. 베드로전서 1장에 1장 3절에 보면  베드로후서 3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므로  말미암음이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올때에 무얼 통해  오는가? 영광과 덕으로 온다. 영광과 덕으로 오요. 교회를 세우는 것은  생명운동이요, 그 경건운동인데 생명운동과 경건운동은 다 영광과 덕을  통해가지고 되어지지, 그길 통하지 안하고는 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일과  같이 사욕으로 되는거는 아니요. 그러기에 감화로 된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사람에게 대한 좋은 영향을 끼치고, 좋은 본을 끼치고, 좋은 덕을 끼치고, 좋은  모범을 끼쳐서, 좋은 결과 그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행실이 고쳐졌고, 나  때문에 사람이 되어졌고, 나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되어졌고, 나 때문에 인내의  사람이 되어졌고, 나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졌고, 나 때문에 진실한 사람이  되었고, 나 때문에 정직한 사람이 되어졌고 이게 다 무어냐면 덕을 끼친 것이라.

나 때문에 화평한 사람이 되었고, 나 때문에 희생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이 다  덕을 끼친 것이라. 그래가지고 영광을 돌리기까지 되어지는 이 껍데기를 가지고  속의 생명과 경건의 알맹이가 들어가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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