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12:36
진실한 깨달음
1986. 7. 8. 화새벽
본문:베드로전서1장 3절∼7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리를 세밀히 알고 또 구비하게 알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목회자도 보면 저 사람의 목회가 길게 가겠나 그만 짤막하게 그렇게 부흥을 보다가 뒤에 가라앉겠느냐 하는 그런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뭘 보고 그렇게 짐작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도리를 깊게 넓게 길게 높게 이렇게 자꾸 연구를 해 가지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목회하는 사람은 그 목회의 수명이 길고, 하나님의 도를 얕게 알아 가지고서 그렇게 이 진리 아니고 다른 거 무슨 그 사람의 활동성이라든지 또 성대라든지 혹 그 사람의 다른 무슨 용기라든지 이런 거 인적 요소, 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런 것들 다 이용해서 세상 성공하는 그런 것들을 끌어 인용을 해 가지고서 하는 사람의 목회는 그것은 수명이 짧습니다. 갈수록 자꾸 쇠퇴해집니다.
그러기에, 이 모두 다 정년 퇴직을 목회자들도 하고 있는데 해서 안 될 사람들도 하고 또 해야 할 사람들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대개는 진상을 들여다 보면은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대개는 하게 됩니다.
어떤 진영에는 하고 어떤 진영에는 안 하는데 그것이 진영에 따라서 모두 결정들이 달라집니다. 달라지는 것이 그것이 다 말로는 자기는 안 해도 되고 안 해야 되지마는 다른 사람들, 나이가 많으면 노망을 해서 생명에 관한 것은 점점 희박해지고 노약해지고 그저 고집과 배짱, 미련, 그만 완패 이것만 많아지니까 그 사람들이 사면을 시킬 수도 없고 그 사람들 냅두면 이 교회의 교인들이 다 절단나기 때문에 부득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자기는 그렇지 안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만 그들 위해서 정년 퇴직을 하자 이렇게 결의를 해 가지고서 모두 이렇게 한다 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는 희생하는 이런 사람도 있는 것으로 말을 하고, 또 이는 뭐 목회를 계속하면 교회가 절단나기 때문에 이거는 정년 퇴직해야 되겠다 이런 사람들도 있고 그래 있습니다마는, 그 교파가 결정하고 안 하는 그런 데 대해서 가만히 이렇게 보면 그렇게 결정한 그런 교파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보면은 목회를 할 때에 참 목회하는 그 실력인 속에 참 힘, 참 힘 가지고서 하지 안하고 다 이런 세상 요소, 인간적인 요소, 또 눈으로 보이는,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의 요소 가지고서 목회하는 그런 교파들입니다.
그러면 이거 뭐 무슨 교파 가지고 일을 한다든지 세상 육체의 활동성 가지고 일을 한다든지 또 언변 가지고ㅡ그런 거 다 필요하지마는ㅡ언변 가지고 일을 한다든지 이런 수단 방법 가지고 목회 일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것은 나이가 많아지면 차차 차차 노쇠해지는 것입니다.
노쇠해지니까 힘이 차차 차차 떨어져서 줄어지게 되는데 실은 목회라 하는 것은 노쇠하는 것 가지고서 하는 것은 아니고 노쇠하지 않는 것, “겉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와진다” 하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안하고 노쇠에 제한받지 않는 그런 영생하는 그 힘을 가지고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참으로 썩지 안할 걸 가지고서 일을 했다고 하면 정년 퇴직을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할 일은 계속 남아 있어서 쉴 여가가 없이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현역 군인으로 있던 사람이 후방 군인 되면은 그만 아주 쇠퇴해져 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썩지 안할 것 가지고서 일을 한 사람은 그렇게 되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이 썩어질 것으로써 썩지 아니할 것을 자꾸 이루어야 되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루어야 되고, 늙는 것을 가지고서 늙지 않는 것을 이루어 가야 되고,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가지고서 점점 강해져 가는 그것을 이루어 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혈육의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으로 자꾸 이렇게 이루어 성장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첫째로 목회자는,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나 한가지입니다.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이라” 이렇게 말한 것은 그것은 목회자는 목회자요 교인은 교인으로 따로 있는데 실은 그런 게 아니라 목회자와 교인은 하나다. 목회자된 대로 교인 되고 교인된 대로 목회자 된다.
그러기 때문에 교인 못 봐도 목회자를 똑똑히 보면은 그 교회는 조만간에 그 목회자와 꼭 같이 된다. 또 목회자를 못 봐도 교인을 보면 그 목회자는 그 교인과 같다. 그러기에 교회라 하는 것은 목회자의 형상이요, 또 목회자는 교회의 형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만 이렇게 노쇠해지지 않는 그런 게 있고 평신도는 안 그런 게 아니라 꼭 같습니다. 평신도도 목회자와 꼭 같이 썩을 것을 가지고 썩지 안할 것을 마련해야 되고, 약한 것 가지고 강한 것을 마련해야 되고, 욕된 것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것을 마련해야 되고, 혈육의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을 마련해서 썩지 아니할 이런 것들을 자꾸 마련해 나가야 되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깨닫든지 배웠든지 이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이랍니다.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 교리라 그말인데, 깨달음이라는 것인데 이 깨달음을 진실되게 가질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진실되게 가지라 말은 어느 성구에든지 그 깨닫는 것이 둘이 되면 안 됩니다.
이리도 깨닫고 저리도 깨닫고 이래 깨달으면 그 사람은, 고 성구와 우리 세상살이와 일치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요 현실에 일치되든지 저 현실에 일치되든지 반드시 그 성구는 우리 현실에 한 번씩 다 해당이 되고 지나간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해당이 될 때 그때에 자기는 고 현실에 대한 성구를 깨달을 때에 두 가지로 깨달았으면 그 사람 행동은 두 가지가 될 것입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이렇게 해서 편리할 때는 이리 하고 저렇게 해 편리할 때는 저렇게 하니까, 진리가 둘이 아니고 꼭 하나입니다. 진리는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어떤 현실에든지 이래도 되고 이래도 되는 게 아니라 이러면 이렇고 이러면 이렇지 그 양쪽으로 이래도 저래도 되는 거는 아니라 그말이오.
하나인데, 자기가 깨닫기를 이렇게 저렇게도 깨달았으면 그 사람은 이렇게도 행동하고 저렇게도 행동하기 때문에 구원은 다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저는 다 이행하고 된 줄 알았는데 가 보면 안 됐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만 나중에 가서 점점 교만한 사람이 돼집니다. 왜 교만한 사람이 돼지느냐? 행하기가 쉽거든. 말씀대로 뭐 못 행할 게 없다 말이오. 요리 가면 막히면 요리 가고 요리 가면 막히면 요리 가고 요러니까 행하기가 쉬우니까 그 사람은 점점 자신있는 사람 교만한 사람이 돼지고, 하나로 깨달은 사람은 그 깨달은 고것을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못 하고 한 길밖에는 가지 못하는 그 길을 갈라고 하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 놓으니까 나중에 가서 자기가 자기를 다 부인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릴 때에 비로소 가는 그것이 자기가 걸어간 그 경험이기 때문에 그 사람 점점 갈수록 요 현실에서 요 성구에서 또 무능한 것 깨닫고 고다음 현실에서 고다음 성구의 또 무능한 걸 깨닫고, 자꾸 현실 하나 당하면 자기 무능한 것 하나 깨닫고 열 당하면 열 깨닫고 백 당하면 백 깨닫고 그러니까 한 성구 당하면 하나 깨닫고 백 성구 당하면 백 성구에 무능하다는 것 깨닫기 때문에 자기는 나중에 가서 죄인이 돼 버리고 말고 약한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는 자기 볼 때에 점점 약하고 죄인됐고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그 사람을 완전 무결한 성자라 성인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기독자가 정상적으로 바로 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경을 깨달을 때에 꼭 둘로 깨달을라 하면 안 돼. 둘로 깨닫는 그것을 됐다 하면은 그 사람은 진실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에 벌써 거짓부리의 사람이오. 뭐인가 이 천인 만인이 말을 해도 둘이라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거 아니고 요거면 요거고 조거면 조거지 둘이 아니라는 것. 두 가지로 깨달으면은 그 사람의 행동은 갈 지자 걸음으로 이래 걷기도 하고 저래 걷기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국은 생애 본능으로 좋고 쉽고 평탄한 길을 걸어갈라 하는 것이지 나쁜 길 걸어가지 안할라 하기 때문에 헛일.
그라면 안일주의만 버려 버리면 되겠다, 또 그 사람은 그리 안 되면 고행주의로서 나는 고생만 되는 길만 걸어가겠다. 그것도 또 아니오. 고생만 되는 길 걸어가는 것도 아니야. 고생해도 주님이 인도하는 고생이라야 가치 있고, 또 평안이라도 주님이 인도하신 평안이라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고행주의도 안 되고 안일주의도 안 되고 꼭 요 진실이라야 됩니다.
그것을 하나로 깨닫도록 이렇게 하고,이걸 바로 깨닫지 못하면 자기는 행동을 바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 깨닫는다는 말에 그 해석이 많이 있겠는데 이 깨닫는 것은 어떤 것이 깨닫는 것인가? 신구약 성경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행할 것을 자기가 아는 그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천인 만인이 깨달아도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게 대해서 자기가 행할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게 깨닫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그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름 부음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해라. 사람에게 배울 필요가 없고, 사람에게 너희들은 배울 필요가 없다.” 하는 그말 한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 깨달으면 잘못 행동하니까 구원이 잘못 되는 것이고 바로 깨달으면 바른 행동 하니까 구원이 바로 되는 것이니 이 깨달음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하냐? 깨달음이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에는 자기 소유나 자기 몸이나 자기 생명이나 그 깨달음 그 길에다가 다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투자할 길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은 자기 생명보다 가치가 크기 때문에 그 생명을 그 깨달음에다가 투자해서 깨달음에다가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자기 소유보다도 귀하고 자기의 몸보다도 귀하고 자기 생명보다도 귀하다는 이 가치를 우리가 먼저 알아서 요렇게 우리의 깨달음과 우리의 생명과 둘을 두면은 어느 것이 가치가 크냐? 깨달음이 가치가 크다 요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져야 이 깨달음을 하나님이 바로 주실 때에 그걸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가지지 못합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해 놓고 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 사람 새 마음을 가져야 된다”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그말은 이 세상 전부, 배암의 지식. 이 세상에게 끌리지 말라 그말이오. 세상에 끌리지 말아라.
제가 어제 성경 시간이기 때문에 양성원에 가 가지고서 잠깐 말을 했는데 성경을 하나님이 기록하실 때에는 성경 기록하기 위해서 히브리어, 헬라어를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조성해 가지고서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할라고 보니까 ‘보자, 땅 위에 인간들의 방언이 많이 있는데 여러 종류의 방언이 있으니까 어느 방언이 좀 유리하냐?’ 해서 제일 유력한 방언을 취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계시하는 고 도구로 쓰고 방편으로 쓰는 그 언어를 어느 언어를 써야 되느냐 이렇게 하나님께서 많은 방언 가운데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전용하시기 위해서 방언을 만든 것이 히브리어 헬라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이것을 만들어 놓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다 알게 되고 배우고 사용하게 되고 하는데 이 말을 아주 고등가들이 이 말을 도용을 했습니다.
도용을 한 것은 이 말은 일반 생활에 그저 일반 생활에 쓰도록 이렇게 해놓은 것인데 사람들이 이 말을, 고등가들은 불교의 종교, 다른 또 어떤 종교, 어떤 철학, 어떤 과학, 어떤 정치 그런 사람들은 그런 데다 이 방언을 사용해 가지고서 자기네들의 목적하는 그것을 자꾸 연구하기 위해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해 가지고서 그 특수 사용을 한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이 말을 많은 학자들이,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놨는데, 방언을 조성하는데 이 원어를 모든 그 특수인들이 그만 특수 사용을 해서 그거는 하나님이 말한 거 외에 그들이 참 도용을 해 가지고 특수 사용을 해 버렸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쓸라고 하신 그 방언을,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이 말을 그들이 저희들이 자기 주관, 자기 주관의 보편이 아니고 특수한 자기 주관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게다가 전용을 해 버리니까 그 말이 그 사람의 특수 사상에 이용당하는 특수 방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게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성경을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에는 당신이 전용하시기 위해서 예비하셨던 그 방언으로 성경을 기록하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언으로 해 놨습니다. 가장 쉬운 방언으로. 그저 그런 특수 인물들이 특수 전용하는 그런 그것은 그들이 도용해 가지고 그와 같이 했고, 일반인들이 다 일반 생활에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그 방언을 정도의 것을 사용해 가지고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도록 이렇게 해 놨습니다.
해 놔서, 그러면 그때 해 놔서 그렇게 해 가지고서 성경을 기록해 주신 것인데 성경을 기록해 준 것을 이 기록한 성경을 사람들이 연구하면서는 어떻게 연구를 하느냐 하면은 이 말은 불교 학자들이 불교인들이 뭐라고 사용했느냐, 불교인들이 뭐라고 사용했느냐, 불교인들이 사용한 그 특수 사용 전용한, 그 불교에 전용하기 위해서 해 놓은 그것은 불교적인 그 특수 사용울 한 그 언어를 이제 끌어다가서 이 성경을 기록해 주셨다 이래 가지고, 그 말이 일반어도 있지마는, 일반어로 기록했는데 일반어도 있지마는 그 일반어로 기록한 그 뜻을 생각할 때에 ‘특수 전용한 그들이 어떻게 이용했느냐?’ 그것을 연구해 가지고서 ‘이것도 성경도 내나 이렇게 인용하는 거로 이 뜻이 있다.’ 이래 가지고서 그 성경을 해석을 할라 하니까 그만 그 해석이 오히려 세상적이요 인간적이요 모든 이 종교적이요 모든 철학적이요 이런 것들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래, 그 혹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나는 히브리어를 나는 내가 뭐 가르치는 것 보지도 안했어. 아예 그거 나는 필요 없다 해서 보지도 안했어. 보지도 안했는데 이리 뭐 언뜻 내가 지나가며 들으니까 히브리어는 나는 그거 모르지마는 점 하나 뭐 위에 찍히고 아래 찍히고 요래 찍히고 저래 찍히고 하는 그 차이가 많다 그렇게 말하는데 참말로 그렇소, 히브리어 공부하는 사람들? 그래요? 글자가 그래 쓰였소? 그래 쓰였어? 그래서 점을 요래 삐치고 저래 삐치고 그뭐 위에 아래 그래 가지고서 같은 것 같으나 조금 다르면 딴 말 되고 딴거 되고, 딴거 된다는 그 글자 만들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거는 성경 기록에만 쓰기 위해서, 조금 틀리면 헛일이다, 조금만 틀리면 헛일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이 글자를 만드실 때에도 성경 기록에 필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그래 가지고서 한 것을 이것을 그만 달리 이렇게 그런 말 가지고서 이렇게 그 성경을 깨달을라 하기 때문에 성경에 그만 탈선되기 쉽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거는 일반 그 교계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 알아야 되는데 그거는 뭐이냐? 옷과 같애요, 옷.
옷과 같고 껍데기와 같고 그런데 꺼풀이 있어야 알맹이 있지 꺼풀 없으면 알맹이가 견디지 못해요. 옷을 안 입고 그라면 못 견디기 때문에 옷을 입는 것이고 이런 건데, 그 모양으로 그런 것을 우리가 이 상식으로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이 이래 한다 하는 이런 걸 가지고 있지마는 속에 알맹이는, 그저 성경은 가장 쉬운 말로 가르쳤기 때문에 누구든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여러분들이 계시록 끝장까지 주욱 읽어봐서 이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는 모르는 단어가 별로 없습니다.
일반 뭐, 일반 그 야만인, 미개인들, 무식한 사람들도 다 알수 있는 그런 말로 기록해 놨는데 기록해 놓은 그 속에 든 것이, 한 성구를 보고 이 사람은 말은 꼭 같은 말인데 그 가운데에 ‘이런 게 들어 있다 저런 게 들어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것이다, 또 계시해 주신 목적이 이거다, 여게 대해서 우리의 소망할 거는 이거다,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이렇다, 여게 대해서 대적할 거는 이거다, 원수는 이거다.’ 그거 겉으머리는 같은 한 말 속에 많은 게 들어 있다 말이오.
많은 게 들어 있는데 그런 것을 해석할라 할 때에 ‘이거는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에서는 저렇게 말했다, 과학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상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런 것이 여기 들어 있다.’ 하고서 그래 해 버리면 그만 결국은 성경을 가지고서 세상화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라.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그거 언어는 다 아는데 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누구만 아느냐? 그거는 아무도 모릅니다. 천하에 있는 그 과학자들이 다 달라들어도 모르고, 학자들이 다 달라들어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고, 성령님만이 알고 있는 거라. 성령님만이 가르쳐 주는 그것을 배워 가지고서 이렇게 해 나가야 일이 된다 그거요.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를 이렇게 깨달을 때에 조심할 것은 아무나따나 깨달아도 된다 하는 그 아주 패역 마귀의 유혹을 벗어나야 됩니다. 또 이래 깨달아도 되고 저래 깨달아도 된다 하는 그것을, ‘이런 대학자가 이렇게 말했고 저런 대학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래 깨달아도 저래 깨달아도 이거는 바로 깨달았다’ 그것도 큰일 납니다. 그것도 안 됩니다.
꼭 하나로만 깨달아야 되는데, 하나로만, 하나로만 깨달아야 되는데 하나로 깨달으면, 그러면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이 도리, 이 도리라 말하면 우리가 걸어가는 이치라 그말이오.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치라 그말입니다, 도리라는 것은. 도리라는 말은 길 도자 이치 이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치라, 살아가는 길이라, 구원하는 길이라 그런 것을 말로 해서 이 도리라 이렇게 말하는데, 이 성경 말씀을 자기가 궁구할 때에 ‘이 둘로 하면 안 된다 하더라,` 하나로 알아야 된다 하더라, 그러면 하나로 알아야 되는데 틀린 것이 천도 만도 넘으니까 틀린 것 중에 하나로 알면 그 사람은 더 낭파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로 알아야 된다 말은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이 요 말씀 속에, 요 말씀 속에 한 꺼풀 들어가면은 요게 들어 있다, 두 꺼풀 들어가면 또 요게 있다, 세 꺼풀 들어가면 요게 있다, 하나님이 고 속에 넣어 놓은 것 알맹이 고것을, 고거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하나뿐인 고걸 알아야 된다 그말이오.
고걸 아는 것은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느냐? 고거 아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가르쳐 주시면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가? 믿음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배울 수 있고 믿음으로 가르쳐 줍니다.
믿음이라니? 믿음이라 말은 무슨 말인가?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가지고서 가르쳐 주고, 또 우리는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가지고 받을 수 있어. 가르치기도 성령님이 믿음으로 가르칠 수 있고 우리는 또 믿음으로 받을 수 있지 딴것 가지고는 받을 수가 없어요.
이러기 때문에, 요 성경 도리를 자기의 생명보다 가치가 위에 있다. 왜? 자기는 모든 그런, 생명보다 가치 있는 이 교리에다가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은 교리에게 투자할 것이요, 교리는 생명을 받아 삼켜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교리는 더 귀중하다 요렇게 평가를 하고 요것을 바로 찾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요거는 단일 교리지 둘은 없다. 진리는 하나다.
이러기 때문에, 가치가 이만치 있는 줄 알고 도리를 바로 깨달을라고 애를 쓰고, 그러면 바로 깨달을라고 애를 쓰는 데에는 주님이 요한복음 8장 31절 이하에 보면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러면,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내 말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안다 말이오. 그렇게 뭐 깊이 알라고 하지 말아요. 깊이 알라고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 말씀은 꼭딱스럽게 알면 안 됩니다. 꼭 자연스럽게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그 사람된 정도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아는 것은 자기가 사람된 그 정도에서 아는 그것이 저절로 알아지는 것, 보면 그만 알아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지 거게다가 뭐 요렇게 저렇게 자꾸 이래 생각해 가지고서 해 가지고서 그래 알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자연스럽게 아는 고대로 「내 말에 거하면」 고대로 행한다 그말이오. 고대로 행해.
처음에는 무슨 교리든지 그 사람이 아주 일학년으로 껍데기로 지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을 지키면서 그날은 그 좀 술도 한 잔 먹고, 또 아침도 뭐 사 먹었고 또 이래 가지고서 주일 지켰습니다. 주일 지켰습니다. 그러면, 주일 지켰는데 어떤 사람이 있다가서 ‘주일 잘 못 지켰구만’ 이라는데 참 높은 사람은 보고서 그 사람을 ‘주일 잘 지켰다’ 잘 지켰다 할 수 있다 말이오. `잘 지켰다’ ‘그러면 이래 주일 지켜도 됩니까? 아무것이 잘 못 지키지 안했습니까?’ ‘괜찮아. 그래 지켜.' 그랬는데, 얼마 지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그날 술을 먹고 주일 지켰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주일 잘 지킨다 하는 대로 나는 이 술을 먹고 지금 오늘도 이래 주일 지켰습니다.’ ‘안 돼. 오늘은 주일 잘 못 지켰어. 오늘은 주일 잘 못 지켰어.’ 왜? ‘그전에는 잘 지켰다고 하더니만 오늘은 잘 못 지켰다 합니까?’ ‘네가 한번 생각해 봐. 잘 지켰는가? 그거 잘 지킨 게 되겠어?' 그 사람이 변화에 따라서, 변화에 따라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변화에 따라서 계명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변화된 것만치 계명을 지켜야 되지 변화 이상을 지키면은 초절한 것이기 때문에 돌담 쌓듯이 포개 올라가지 안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뒤에는 무너지게 된다 말이오. 무너지게 돼요.
이러니까 이 깨닫는 것은 자기가 알고 난 다음에는 고대로 실행해 보고, 실행하니까 실행한 것만침 자신이 「참 내 제자가 되고」 변화되고, 또 변화가 되고 나니까 처음에 내나 그 진리 자기가 그 교리를 실행했지마는 그 교리를 한번 실행하고 보니까 ‘아,’ 실행했으니까 잘 됐다, 이만하면 잘됐다가 아니고 실행하고 보니까 ‘아이쿠 잘못됐다, 요 요래하는 건데 요 잘못됐다, 내가 요 다음에는 닥치면은 새로 한번 실행해 보겠다.’ 그러니까 꼭 말씀보고 실행하기는 실행했는데 실행을 바로 하고 난 다음에는 ‘아, 이 실행이 좀 불비하다, 미비하다, 이 실행이 이거는 그뭐 오 푼짜리밖에 안 된다, 이게 백 점짜리가 돼야 될건데 오십 점밖에 안 됐다’ 이러니까, 또 고런 일이 되면 고다음에 인제는, ‘이제는 내가 요래 하면 백 점짜리 된다’ 또 백 점짜리를 실행했어. 백 점짜리를 실행을 했는데, 실행을 했는데 고다음에 실행하고 나서 뒤에 돌아보니까 ‘요번에 또 잘못했네. 요래 할 건데.’ 보면은, 그전에 처음에 한 거와 비교하면은 처음의 거는 오십 점인데 요번에는 처음의 것에다 비하면은 백 점짜리인데 또 생각해 보면은 그거 백 점짜리가 아니고 또 오십 점짜리입니다. 자꾸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왜 그러냐? 이것이 모두 신앙 경험이요 체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설교자가 설교하고 난 다음에, 뒤에 설교하고 나서 강단에 엎드리면 ‘아이구 주님이여 내가 또 이렇게 또 거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또 어두워서 주님의 도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양떼들에게 어지럽게 해 줘서, 요래 줬으면 쉬운 건데 요래 안 주고 요렇게 해서 어지러움을 줬고 복잡을 줬고 공연한 수고를 하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이거 안됐다, 고다음 시간에 또 설교해야 되겠다 말이오. ‘주님이여 내가 요 다음에는 그러면 요렇게 설교하겠습니다’ 또 설교했다 말이오. 설교하고 나서 또 뒤에 가서 보니까 이제는 만점인데 또 아니라. 또 틀렸어. ‘하이, 또 틀렸네. 요래야 되는 건데.’ 또 미비하다 말이오.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이렇게 하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설교를 또 하는데 받는 교인이 듣기 싫어하느냐 하면은 그래 하는 설교는 교인들 그 사람들도 또 교역자와 마찬가지로 자꾸 이렇게 그 사람이 설교 듣고 변화돼 나가니까, 설교 듣고 변화돼 나가니까 그다음에 설교 들으니까 또 새 설교가 되니까 또 은혜가 되고 또 변화되고, 그러면 이 설교한 사람이나 설교를 받는 모든 교인들이나 이렇게 한 설교 가지고 자꾸 해도 자꾸 원하고 자꾸 듣기를 원하고 자꾸 이래 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것은 성경이 바꿔져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가 변화가 돼지니까 변화된 것만침 깨달아짐이 달라져 가지고서 그런 것입니다. 요것이 정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꾸 그래 돼지니, 일 년 있으니까 더 붙잡고, 이 년 있으니까 더 붙잡고, 십 년 있으니까 더 붙잡고, 몇십 년 있으니까 더 붙잡고 자꾸 더 붙잡고, 그 설교 해 주니까 또 새로 들어야 되겠고, 또 새로 들어야 되겠고 자꾸 해 주니까 더 좋아하고 더 좋아하고 자꾸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이 기독교의 정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은 자기가 제일 자연스럽게 알라고 하는 것이 제일 정상적인 성경 연구법입니다. 거기서 뭐 특수하게 뭐 알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알라고 이래 하고 그대로 실행을 해 보면 고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자기는 모르지마는 실행하는 가운데서 사람이 변화됐습니다. 그만치 변화가,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은 예수님 닮았다 그말이오. 변화가 됐습니다. 변화가 되고 나니까 이제 「진리를 알지니」 이 진리 안다는 이 진리는 그라면 자기가 처음에 실행한 그 진리를 말합니까 다른 진리를 말합니까? 무슨 진리요? 내 말에 거했으니까 주님의 말씀에 거했는데 거하니까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았는데, 그러면 진리 안다는 요 진리는 뭐입니까? 진리는 자기가, 주님이 「내 말에 거하면」 그 말씀 안에 거한 그 말씀을 새로 알았다 그말입니다. 딴 말이 아니요 그 말씀을 새로 알았다 말이오. 그 말씀을 새로 알았다 말이요, 새로. 왜? 새로 아는 건 자기가 변화가 되니까 새로 알아.
그거는 그렇지요. 다 같이 같은 설교를 들어도 설교 듣는 데에 천 명이 있어도 천 명이 듣는 소리 다 다릅니다. 자기된 대로 다 들으니까 요 사람은 요 부분에, 그러면 설교한 사람은, 설교한 사람은 예를 들어 한 일학년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할 때에 거기에 만일 최고학을 가진 사람이ㅡ비유입니다ㅡ그 최고학, 세상 학문 가지고 되는 것 아니오. 비유로, 최고학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은 일학년 설교하는데 그 설교 듣고 깨닫기는 이 사람은 최고학으로 깨닫습니다. 고 최고학으로 깨닫소. 그러면 자기 된 대로 깨닫는다 그말이오.
예를 들면은 보름달 달은 하나뿐이지마는 그 달을 보고서 감상하는 것은 천 명 만 명의 감상이 다 다릅니다. 감상이 다 다르고 감상이 다 다른 것은 자기와 그 달과 이 접선이 어찌 되느냐 하는 데서, 그 달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자기의 주관이 달라지는 데 따라서 달을 보는 것이 달라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성경을 보고 깊게 높게 길게 깨달을라고 애를 쓰고 요것을 바로 깨달을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요거 잘못 깨달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온전히 깨닫고 온전히 깨닫고 바로 깨닫고 바로 깨달아서, 그러면 우리 행위도 그뭐 몇천 번이든지 자꾸 전진입니다. 내나 그 행위인데 또 그 행위보다 좀 나은 행위보다 자꾸 나은 행위, 또 깨닫는 것도 더 세밀히 더 바르게 정확하게 자꾸 이렇게 되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사는 길인데, 깨닫는 이 깨달음에 대해서 깨달음이 먼저 이렇게 생명보다 중하다. 바로 깨달으면 생명보다 중하다. 이 잘못 깨달으면 구원이 다 틀려 버린다. 또 두 가지로 깨달으면 그 사람은 구원 이루는 길이 이래도 저래도 하기 때문에 그 진리는 하나인데 그것도 헛일이다.
그라면, 바로 깨달을라면 어떻게 깨달아야 되겠느냐? 자기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변화하여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사람이 되어져야 하나님의 옳고 참된 뜻을 구별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깨닫기 위해서, 바로 깨닫기 위해서 실행해 봐야 됩니다.
바로 깨닫기 위해서 실행해야 돼요. 실행이라 말은 이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에 말씀을 읽고 지난 주일에는 그런 설교를 제가 했어요. 믿음 없는 교인, 믿음 없는 교인 도마, 또 ‘손으로 내밀어 봐라’ ‘내가 내밀어 볼 것 없습니다' 이라지 안하고 `그래 봅시다. 옆구리 넣어 봅시다.’ 믿어보는 교인, 믿어보는 교인 도마. 그라니까 확실하거든. 나중에 보고 믿는 교인 도마, 보고 믿는 교인 도마. 이라니까 나중에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너는 보고 믿지마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사람의 인공으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믿음 있고 하늘에서 뚝 주는 선물인 믿음이 있다. 다 선물은 선물이지마는 직접 내려 주는 그 믿음이 있다.
먼저 철 스미스 목사가 그분이 그래 말하는 것 여러분도 다 기억하고 있을 줄 압니다. 그 테이프 들어 보니까 그렇게 말하대요. 자기는 이적이니 기적이니 병 낫는 그런 거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그거는 아예 안 될줄 알고 그거는 뭐 부인도 하고, 못 하니까 부인했다 말이오. 못 하니까 부인하고 그거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떡 가니까, 길을 가니까 어떤 뭐 앉은뱅이인가 무슨 병신인가, 고거 내가 고거는 잘 몰라. 고 이치만 대, 도리만 내가 배웠지, 그랬어. 그런데 막, 좀 목사님 나 이거 좀 기도해 낫아 달라 하는데 어째 그때 그럴 때에 썩 마음에 나기를 ‘기도하면 낫지, 뭐.’ 하면서 낫지 싶은 그 마음이 있어서 기도하니까 그뭐 병신이 대번 낫더래요. 그게 하늘에 주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늘에 주셔서 믿는,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서 믿는 믿음이 아니고 하늘에 주는 그 믿음이 있어. 그 믿음이 와 가지고서 척 줄 때에 믿어질 때 그때 하면 돼 버렸다 말이오. 그런 걸 장 주는 게 아니라. 이 오른 발자욱 왼 발자욱이 두 발자욱이 요래 이래 걸어갑니다.
이래 걸어가서 인공 믿음, 이 인공 믿음 그것도 내나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 나오는 믿음은 믿음인데 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가리켜서 알기 쉽도록 해서 인공, 사람이 공들어 가지고, 인공 믿음, 인공 믿음 한 자욱 떼 놓고 나면은 또 하나님께서 주신 신공 믿음, 또 선물 믿음 또 한 자욱 떼 놓고 이래 자꾸 이래 가지고 걸어가는 거라.
이래 가지고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 교리를 바로 깨닫는 데에는 바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라는 데에는 좋은 방편이 뭐이냐? 성경을 바로 깨닫는 데에 제일 좋은 방편이 뭐이냐? 여러분들 학습 문답에 뭐하고 해 놨어요? 아는 대로 행하는 그것이 제일 바로 깨닫는 방편이다 하는 것을 학습 문답지에 써 놨어. 그거 아는 사람 다 알 거라 그말이오. 고것도 자꾸 새겨보면은 속에 그게 참 보배로운 진짜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이 교역자들이 요래 가지고 이거, 이래서 성경을 바로 알아 가지고 이제 우리의 힘은 없어지지 안할 힘이라. 없어지지 안할, 처음에 제일 껍데기 힘이 뭐냐 하면은 진리의 힘이요, 그다음에 알맹이 힘은 뭐냐? 영감의 힘이요, 그다음의 힘은 완성해 놓은 힘 있으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이라 그말이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바하신 구원이라는 그 말세는 신약 시대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이니까 다 되어 있는 구원이라 말이오. 다 되어 있는 구원은 그게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가리켜 말해. 예수님의 대속은 다 완성이라.
대형으로 사죄되고 대행으로 칭의되고 대화친으로 생명된 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은 완전이라. 완전한 구원이라. 이 완전한 구원은 다 예비되어 있다 말이오.
예비는 뭐 예수님이 예비 다 해 놓았어. 예비 다 해 놓았는데 우리가 받으면 돼요.
이것을 받으면 되는데 받으면 되는 것이 현실에서 받은 것인데, 현실에서 받으니까 이거 받을라 하면 힘든다 그말이오. 받을라 하니까 현실에 받으면 어떻게 받느냐? 받는 것은 악령, 악성, 악습에 이 속해서 그것의 소유가 되고 그게 제 주인인 줄 알고 악령, 악성, 악습 가지고 좋아서 똘똘 뭉쳐서 하나되어 있는 이 심신을 이것을 거게서 구출해 가지고서 피와 성령과 진리와 연결돼서 피와 성령과 진리의 것이 되도록, 이 피와 성령과 진리와 연결되도록 할라 하니까 이놈들이 지금 방해해. 누가 방해해요?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방해하지 온 세상이 방해하지 이라니까 어려움이 있다 말이오.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어. 어려움이 있어.
그러나, 어려움 있어도 눈 지끈 감고 떡 믿고서 이래 보니까, 이대로 척 믿음으로 통과하고 나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의 것이 됐으니까 거게 내 심신이 해방을 당했으니까, 해방당했으니까 해방당한 것이 좋고 기뻐하지. 해방당한 것이 기뻐하고 좋아하지.
왜? 악령, 악성, 악습 그들의 것이 돼 가지고 있을 때는 그놈 떨어지면 죽을 줄 알고 그게 저인 줄 알았는데 떡 거기서 나오고 보니까 그게 원수이고 저는 아니고 자유 해방을 당해서 참 자기가 살았고 자유가 됐다 그말이오.
자유가 됐으니까 이제 그때 살아난 거, 해방되고 살아난 우리의 요소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살리는 운동하던 이미 성화되어 있는 이 요소가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또 이 운동을 하고 있는 중생된 영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또 성령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이라니까 크게 기뻐하도다 이랬어요.
그만 요다음에 고거 계속해서 혹 시간 있으면 말하겠습니다.
이래서,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 요지는 뭐이냐 하면은 ‘바로 알아야 된다’ 바로 알아야 돼. 바로 아는 데에는, 바로 아는 방편은 이 방편 외에는 없으니까 이 방편 가지고 바로 알라고 애를 쓰지 이 방편 가지고 바로 알지 못하고 이 바로 알기 위해서 ‘이 성경 단어는 그러면 철학자는 어떻게 봤느냐, 이 과학자는 어떻게 봤느냐, 종교가들은 어떻게 봤느냐, 이 모든 정치가들은 어떻게 봤느냐?’ 그들이 이 단어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거게서 주 배워 가지고서 와 가지고 이래 알면은 안 된다 그말이오.
그래서, 언제 히브리어 박사에게 공부하는 사람이 ‘구약 성경은 예수 믿지 않는 히브리어 박사가 히브리어 모르는 예수 믿는 목사보다 구약 성경은 더 바로 깨닫고 잘 깨닫는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 박사가, 히브리어 박사가 그랬다고 배운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그래서, 내가 그래 말했어, 나중에 그라다가 안 돼서. 너거 배우는 것 나도 다 안다. 그거 나도 다 알아, 그뭐. 그거 내가 그 히브리어 박사가 아는 것 다 안다.
예를 들면은, 하나 예를 들자.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라 하니까 그들이 아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은 뭐 ‘처녀가 아이 배 가지고 탄생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나이 어린 것 아기 밸 년수가 되지 않는데 어린 게 아이 낳은 그게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처녀막이 뚫히지 안한 게 아이 낳은 것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뭐 이렇게 그걸 말 주 댈라 하면은 백 가지를 주 대겠다.
이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말하는 그것 주 끌어다가 하는 것인데 나는 알기는 그래 안다. 그저 동정녀 마리아는 부정 없이, 남편 없이 아이 낳은 것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이 이상 더 가면 헛일이다. 요거는 그만 다 돼 버렸다. 남편 없이 아이 낳은 것이다. 남편하고 동침하지 안하고 아이 낳은 것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때 말았는데 여러분들이 눈이 밝아야 됩니다.
눈이 밝아서 어짜든지 성경 바로 깨닫는데 성경 바로 깨닫는 것을 ‘보자, 이 성경에 이렇게 지금 말하는 이 성경 이 원어는, 원어는 철학자들은 뭐라 했노, 과학자들은 뭐라 했노, 종교가들은 뭐라 했노, 그들이 뭐라 했노? 이렇게 이렇게 말했구나, 이 단어는 그런 단어로구나.’ 알면 그 사람은 철학을 배웠어, 과학자가 됐어. 이래 가지고 중세대의 신학자들이 전부 철학적인 그런 신학을 가지고서 교회들이 막 무너지고 막 깨졌던 것입니다. 이거 좀 알아야 돼요. 눈이 밝으면 환하게 알기 쉬워.
모든 것 다 이래서 알아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성경을 꼭 바로 깨닫는 거는 생명보다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바로 깨닫는데는 자연스럽게 그저 일반 보통 말로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말 해 놨고, 말이 어려워 어려운 것 아니오. 해 놨는데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어려운 겁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실행함으로만 알게 되지 실행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도록 딱 하나님이 막아 놨어.
그러니까, 실행은 순종이거든. 순종하는 자가 알게 했지, 순종하는 자가 알지 순종 안 하는 자는 몰라. 그러기에 믿음으로 안다 했어. 순종하는 자가 알지 순종하지 안하는 자에게는 뭐 대대 박사라도 모르도록 딱 해 놨기 때문에 엉뚱한 소리 하고 있지 절대 모릅니다. 제 구원도 못 이루고 남의 구원도 못 이루어요.
순종하는 사람은 등신이라도 순종하면 안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 발표력이 없어서 발표는 못 해도 제가 알기는 알아. 그러니까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달기는 단데 뭐 발표를 못 하니까 응얼응얼 이래 하기는 하지마는 사실상 이거 꿀을 먹어 보니까 물과 다른 게 뭐 있다 그거요.
그것 모양으로 여러분들이 꼭 실행으로 이제 성경 도리를 깨달을라고 하는 요 방편을 잃지 말고 가져야 되지 요 책상 위에서, 굴 안에 앉아서 자꾸 들어앉아 이라면 된다고 그렇게 하지 말아요.
굴 안에 앉았어도 실행해야 돼요. 실행은, 우리 현실은 실행할 뭐 조건이 다 있는데 굴 안에서도 신구약 육십육 권을 다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감옥에서도 할 수 있고, 또 노무자에서도 할 수 있고 어데든지 다 할 수 있어. 이라니까 꼭 실행에서만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 ○○○장로님이 기도회에 잘 참석하고 새벽기도는 참석하는지 모르겠어.
이라면 좀 있으면 반사되겠어. 장로가 커서 반사되겠다 그말이오. 장로가 반사가 안 돼요. 장로가 커야 반사됩니다. 우리 ○장로님이 분 교 부장노릇은 하지마는 반사노릇은 못 해. 분교 부장보다 반사가 어려워. 가 가지고 이 학생 보고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라.’ 이래 가지고 개인을 만나 전도한다는 이거는 입이 떨어져야 되는데 성령이 입을 떼 줘야 되지 입을 안 떼 주면 짖지 못하는 개가 돼 가지고, 성경에 “짖지 못하는 개가 된다” 하지 안했어요? 안 돼.
이러니까, 우리 서부 교인들은 아이들에게는 전도하는 입이 떨어졌는데, 축복을 해 입을 떨어져서 이제 다 전도할 줄 아는데 어른들에게 입이 딱 막혀서 그만 어른한테는 입이 벌어지지 안해. 전도를 못 해요. 전도를 못 하는데 그거는 목사가 그러면 그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이 이래 입이 떨어지지 안해 그래. 이제 목사 입이 떨어졌어. 목사 입이 떨어져 저게 비행장에 가서도 전도하고 또 어데든지 가면 전도합니다. 여게서도 나갈 때 되면 만나면 이래 전도하고 이 자꾸 전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는데 여러분들도 시작하면 돼요. 시작하면.
시작하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해 보면은 하나님의 권능이 여러분들과 같이 하는 것을 볼 것이고, 믿어보면 ‘야, 나 예수 믿게 된 것 참 감사하다. 저렇게 강퍅을 부리는데 나도 저렇게 강퍅 부리던 자가 어떻게 예수 믿게 됐노?’ 예수 믿는 것 감사하고, 안 믿는다 하는 사람 봐도 깨달음이 있고, 믿을라 하는 사람 봐도 깨달음이 있고, 전도한다고 나를 뺨 때리는 사람 봐도 깨달음이 있고 막 전부가 막 깨달음이요, 깨달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제 어른들에게 가 입 벌려 가지고 전도할 사람 손 들어 봐요? 어른들에게 입 벌려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할 사람 손 들어 봐요, 지금. 예, 이제 한번 해 봐요.
인제 저 ○○○교회는 또 그런 방편 썼는데 그 방편 좋아요. 나는 지금 알아볼라 하는데 그날 만일 칠월 첫 주일날 그 삼천 명 작정한 사람이 만일 이천 명이나 되고 천 명만 왔다 해도 막 춤을 내가 한번 추겠어. 천명만 왔다 소식 들으면 춤을 추겠어. 어떻게 좋은지. 나는 거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이래는데, 다른 사람한테 물어서 모르면 내가 ○○○교회 목사님에게 내가 바로 직접 전화를 할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왔읍디까?’ 만일 백 명이 왔어도, 그래 가지고서 백 명이 한달 동안 교인들이 수고해 가지고 백 명 불었다면은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만일 천 명이 왔다면 참 놀랠 일이요 죽은 사람 천 명을 살렸으니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막 ○○○교회 위에 막 축복을 이래 할 거라 말이오. 하나님이 좋아서 막 그리 날아다닐 거라, 좋아서.
이러니까, 그리 못 해도 우리 서부교회 교인들도 그보다 더 좋은 방편을 지금 가지고 있다 말이오. 좋은 방편, 좋은 방편은 뭐입니까? 좋은 방편은, 네 가지 구원 얻고, 네 가지 병 치료 하고, 네 가지 축복 받고, 네 가지 증인노릇 하고 이라면 자꾸 끼역 끼역 들어온다고 하지 안했어요? 이 좋은 방편 가지고 사용하지 안 하고 게을부리면 하나님의 매 맞아요. 하나님이 매를 때려.
이제는 입 벌려서 만나는 사람에게 자꾸 전도해요. 전도지 가지고서, 처음에 모르면 전도지 가지고 해요. 전도지 가지고 이래 하고 나중에 가서는 전도지 가지고 할 것 없이 그만 그저 그냥 하면 돼요. 전도할 때에는 ‘예수님 믿고 영생합시다’ 이래요. 인제 ‘구원'이 좀 변해서 `영생'이라 해. `구원'이라 하면 그만 좀 정확지 못해. ‘예수님 믿고 영생합시다’ `예수님 믿고 영생합시다' 하든지 ‘영생 얻읍시다’ 이라든지 `예수님 믿고 영생 얻읍시다' 하든지 `예수님 믿고 영생합시다’ 하든지 그래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해요. 만나는 사람마다 입 벌려 전도할 사람, 인제? 전도할 사람 손 들어 봐요? 인제 됐어. 이라면 이 마귀 이놈 지금 막 혼납니다. 마귀 이놈 울고 혼날 거야. 이라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같이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