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영감 역사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3일 주후

 

본문 : 요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은 성부가 성자이신 예수님에게 대한 모든 그 관계를 한 마다로  총칭해서 아버지의 사랑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에게 대한  희망도 크고 또 베푸신 은혜도 크고 이루신 결과도 컸습니다. 예수님의 이 하신  일이 없었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가 다 무가치하고 또 헛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에 예수님의 역사가 있어 예수님이 성공하신 그  성공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제대로 돼서 가치가 있게 됐지 하나님이  영계와 이 물질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아무리 보존하시고 섭리하셨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 하신 성공이 없었으면 그 모든 것은 다 헛됩니다.

예수님이 성공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다 잘 됐고 또 타락됐던  것도 잘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심히 복잡하고 또 고귀하고  또 심히 어려운 그런 것을 예수님에게 맡겨 주신 일을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상 천하에 피조물이 많지마는 모든 피조물 중에 예수님의 그 인성인 피조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대와 소원이 제일 컸었고 또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그 역사해 놓은 그것이 뒤에 잘 그것을 말한 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하는 그말 천상 천하에 모든 창조되어 있는 그것들에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충만을 줄 수 있는 그 중대한 일을 예수님에게 맡기신 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여게 표현한 것입니다.

 십자가상에 달리셔 가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를 이렇게 모든 피조물을 대속해서 하나님의 창조가 헛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목적이 그대로 달성되어지는 그 달성에 유일한 원인으로, 그  달성되는 데에 전부의 공로가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 죽으심을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맡겨 주셨습니까? 이렇게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이 일을 어떻게  나에게 맡겨 주셨습니까?' 하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찬양을 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이렇게 중한, 아주 귀중하고 어려운 이 역사 어려운 이  공로, 지극히 어려워 이 공로 설정을 바로 하면 천상 천하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참 지음받은 것이 다행이고 있는 것이 다행이고 행복이지마는 만일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가 없으면 모든 것은 다 생겨지지 안했으면 좋을 뻔했고  없었으면 좋을 뻔한, 하나님의 지으신 그 수많은 것들이 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거기에서 이런 것들을 구출하는 데에 대한 희생, 구출하는 데에 대한 이 지극한  이 사랑의 역사의 이 공로,  참 첫째는 창조하신 하나님이 필요하고 둘째는 이 창조되어 있는 것을 이것을  영원히 복되게 행복되게 하는 이것이 둘째로 필요한데 둘째가 없으면 그 첫째  것을 다 없는 게 낫지, 나지 안한 게 낫고 생기지 안한 게 나을 것인데, '이렇게  중대한 일을 어떻게 내가 맡겠습니까? 내가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겟사마네 동산에서는 '이 어려운 일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 어려운  일을 혹 천상 천하에 감당할 만한 다른 무엇이 있으면 그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내 주장을 세우는 것은 아니고 너무  이 일이 어려워서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워 행여나 감당치 못하고 실수할까  두려우니 실수 없이 잘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존재가 있으면 맡겨  주옵소서.'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러다가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렇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가 이 일을 감당하는 데에는  부족하니 내가 지금 얼마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또 의논하고 간구해야 되겠는데  내게는 그럴 만한 지금 힘이 없어서 육체가 약합니다.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심히 약합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 도와 줘 가지고 비로소  그 기도의 그릇을 다 채웠습니다.

 기도의 그릇을 채워서 하나님의 이 돕는 은혜를 가지고 만물을 구속하는,  창조된 모든 것을 창조되어 존재케 된 것이 행복스러울 수 있는 이런 큰 구속을  베푸는 일을 심한 통곡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죽는 일도 어려운 것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세포 하나도 지성과 지공에  자원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도 어렵고 또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질적으로 모든 구속을 입은 자들에게 분배해서  실상으로 입게 해야 되는 데에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야 되는 것이니까 신성은  죽지 안하시고 '그대로 있지마는 인성이 죽었다차 다시 살아나야만 이 일을 하는  것이니? 이제 죽는 것도 문제고 살아는 것도 문제라' 이 두 가지 문제를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참 피와 땀이 얽힌 기도를 주님이 하시면서 아버지 앞에  도움을 간구할 때에 천사를 보내 가지고서 기도를 해서 완전히 이 일을  신인양성일위 된 인성에게 맡기지 안하고 신성이 이 일을 책임맡아 해 주실 그  허락을 받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와서 '이제는 때가 됐으니까  일어나라. 가자.' 기뻐하시면서 '나를 잡아 줄 자가 왔다' 하시고 기쁨으로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어떻게 나를 이와 같이 멸망받는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구원해서 생명과 펑강과 기쁨의 행복을 누릴 수 있어  아버지에게 이 모든 피조물로 인해서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될 수 있는 이 구속의  제물로 나를 이렇게 세우셔서 이 제물의 이 완성을 하게 하십니까? 이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제물이 되게 하십니까? 또 이 제물로써 완성을 하게  하십니까?' 하는 찬양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인간으로 생각을 하고 인간 생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박혀 죽겠다고 하기는 했지마는 막상 십자가세  못박혀 가지고 고난당하는 그 고난을 당했을 때에는 마음에 고통스러워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이여 어떻게 아버지가 나를 이래 고통 가운데  던져버립니까 하는 그런 것으로, 얼 마나 고통스러웠기에 주님이 그렇게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그런 말을 했겠느냐? 그러니까 주님이 참 십자가 못박히신  건 심히 고통이다.' 그렇게들 사람들이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대속이 어떻게  어렵다는 것, 어느 정도의 어렵다는 것, 어느 정도의 힘 든다는 것, 지성의 법을  만족케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어려우며 지공에 만족하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어려운가?  지공에는 자기가 원하면 원하는 그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지마는 원하는 가운데에 세포 하나라도 아픔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면서 아픔의 고통을 당하지 아니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만일 예를 들어  세포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 세포는 내나 예수님의 몸에 속한, 작기는 작지마는  몸의 요소이기 때문에 몸에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을 하는 대신한다는 이  대신에 세포 하나라도 원함이 아니고 거게 불만이 있으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지공법에 예수님이 대속하셨다는 그것은 강제로 됐기 때문에 이거는 대속이 안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도 심히 어렵지마는 또 부활하시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피땀 홀려 기도하시다가 이제 아버지가  완전히 다 그것을 책임맡고 같이 해 주실 것을 말했을 때에 지극히 큰 능력이 그  일을 해 주시기로 약속을 받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제는-일어나면서-이제는  안심하라. 가자. 이제는 됐다.' 하고서 가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히러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셔서 십자가상에서 하는 말이, 그때는 벌써 그런  문제는 다 해결을 지웠고 다 지나갔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그렇게 대속의  대속주가 되는, 대속의 제물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쓰셔서 대속의 제물로  삼으신 거게 대해서 감사함을 드리는 그 찬양의 말입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은 예수님이 그 죽으신 것이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님의  신성을 붙들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으시는 일을 할 수 있었지 지극히 큰  능력이 안 했으면 못 했습니다. 또 부활하신 것도 지극히 큰 능력이 부활케  하셔서 부활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것은 인간이 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했지마는 인성이 하지 못할 것은 지극히 큰 능력 곧 하나님의 신성이  하나님의 능력이 그 일을 하셔 가지고서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요한복음 15장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하는 그 말씀은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구속의 직책을 구속이라면 그 범위나 그 깊이나 높이나 길이나 그 넓이나  가치성으로나 그 무한한 것인데 이 무한한 거기에 온갖 수많은 종류의 부분이  있는데 그 모든 그것을 다 예수님에게 책임지워 주시고 예수님에게 일임시킨  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사랑이라고 인정되는지?  이 죽음의 사랑은 다른 것을 희생시켜 자기를 좋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가 다른 것을 살게 행복되게 기쁘게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 그렇게 성경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도 사랑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하신 것도  사랑이요, 부활하신 것도 사랑이요,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주신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구세주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이  지극히 큰 직책을 예수님에게 맡겨 주셨는데 주신 그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하는 그말은  아버지가 어떠하신 분이 돼 가지고서 그 직책을 예수님에게 맡겨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내가 승리를 함으로 인해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모든 것을 다 아버지의  위치를 나에게 맡겨서 내가 이 일을 성공하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의 보좌에 내가  얄아 아버지의 그 모든 것을 다 내가 맡아 가지고서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보면은-다 내게 주셨다' 권세도 주셨고  모든 직책도 주셔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서 아버지가 하신 일을 다 내가 하도록  이제는 되었으니까 아버지가 그때 어떠한 아버지가 돼 가지고서 나에게 이  지극히 큰 직책을 맡겨 준 것과 같이 나도 아버지와 같은 자가 되어 가지고서  너희들에게 이 직책을 맡겨 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맡은 직책은 아버지 앞에서 주님이 직책을 맡겨 주셔서 맡은  것과 같이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이래 승리하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의 위치  아버지와 꼭 같은 모든 걸 가지시고 모든 권능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구비해  가지시고 한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이 하신 그 직책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아버지가 맡겨 주신 이 직책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감사를 우리가 해야 되겠고 또 주님이 아버지의 이 직책을 맡았을 때에  심히 그 직책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참 땀이 피가 되기까지  그렇게 아버지에게 간구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간구하니까 천사를 보내 가지고  예수님의 그 기도에 모든 부족을 채워서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님에게 이 일을 맡기신 그 맡긴 일을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님을 도와서 이  대속의 죽는 일과 대속으로 다시 부활하시는 일을 다 감당하도록 지극히 큰  능력이 책임을 지시고 함께 해 주실 이 사실을 자기가 확실히 응답받고 난  다음에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안심하라.' 또 '이제는 잡아 줄 자가  왔으니까 가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십자가상에서는 그 앞으로 대속는 입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주님이 다 미리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때문에 '내가 죽기까지  고민하다' 하는 것은 십자가 못박혀 죽기가 어려워서 고민한 것 아닙니다.

 아주 사람들이 유치한 사람으로서 죽음을 그렇게 아주 무서워하는 그런 어린  사람들은 그렇지마는 인간이 그 죽음이라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도 생명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렇게 크게 여기지를 안합니다. 그러기에 다 사선을 넘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정치가들도 사선을 넘어야 하고,  사업가들도 사선을 넘어야 되고, 모든 큰 개발을 하는 그런 사람들도 다 사선을  넘어서 하지 뭐 생명을 애끼고 살고 뭐 하리라 하는 그런 생각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내가 죽기까지 고민하다는 그 고민은 십자가의 대속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그 고난이 일반 고난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다  담당했기 때문에 그 고난이 심할 때에 그 고난으로 인해서 세포 하나라도  지성하신 하나님을 향하지 안하고 이제 아픈 데로 기울어졌으면은 그 지성에는  범죄입니다.

 또 지공법에서 자원해야 되는데 대체적으로 이성은 자원하고 주장은  자원하지마는 거게 소속한 세포 분자 하나라도 그는 자원하지 안해서 '나는  자원이 싫은데 이 몸뚱이가 가니 이게 주체가 영이 끌고 가니 어쩔 수 없이  간다.' 하는 그런 불만과 불평을 품어 가지고 원치 아니하는 그 세포 하나라도  있으면 세포 그것 하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지공법에는 대속이 안 됩니다. 만일  대속이 되면 강제가 되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요.

 이런고로 이것까지를 다 생각을 하시고 겟세마네서 죽기까지 고민 하다가  기도로써 이제 그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안심하라. 이제는 좀 자고 쉬라.'  또 좀 있다 '이제 가자' 기쁨으로 가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를 제물로  이렇게 버리십니까? 제물로 이래 제물로 사용하십니까?'  그 버리는 것이 우리가 버림을 당했는데 우리 대신 당신을 버리는 그 일을 할  때에 아버지가 그 대속으로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세우시는 그 일에 대해서  감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주하고 이렇게 버리는 것을 어데까지 아버지는 버려도  주님은 버림받은 데에서 안하고 그 버리는 것을 지당하다 하고 하나님에게  화친으로 달라붙었기 때문에 그걸로 끝을 냈으니까 화목의 제물로 성공을 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그게 하나님의 찬양을 그렇게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에 대속의 제물로 모든 것을 영원히 책임져서 그를 살게 그를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그가 전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그것들이 잘되게 하는 이런  무거운 책임을, 심히 복잡한 책임을, 영원한 책임을 예수님에게 지워 주신 것을  예수님께서 가리켜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을 17장에 보면은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아버지여-곧 십자가에 지금  못박히시는 그 일을 두고서- 아버지여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나를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로 삼아 이 제물의  완성, 이 제물의 완성을 하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할 때에  아버지가 '이미 나를 영화롭게 하였고 또 영화롭게 하겠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도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여게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라'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요 내용인 것을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그걸 잡지 안하면 아무 그만 거게서  폭탄이 다 김이 새 버리고 그만 헛일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으로서 대속의 죽으시는 일,  구속으로서 다시 부활하시는 일, 그 부활은 죽었다 살아났으니까 좋다 싶은  그것은 육의 생각이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일이 어려운 것이 만일 열  근이라고 하면은 부활하신 것도 어려움이 열 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에 대해서 당신이 희생하는 희생은 죽음이 반이요  부활이 반입니다. 이 육의 생명 가진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좋다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직까지 그거는 믿는 도리를 전혀 몰라서 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이렇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대속하시고 또 부활로 구속하시고 하는, 영원히 책임져서 영원히 피조물들의  종이 되어서 피조물들을 유익되게 해 가지고서 영원히 피조물을 만족케 해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할 수 있는 이 직책을 예수님에게 맡겨 주신 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 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십자가에서  대형 대행 대화친 하신 그것만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나를 십자가에서  대속을 하시고 구속을 하신 것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요 또 우리가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을 계대해서 예수님과 같이 모든 내게 해당된, 내게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 피조물을 대속하는 그 일을 우리가 행하고 또 영원히  구속하는 그 책임을 지고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안하고 하나도 거게 부족함이 없이 완전 대속 구속을 이루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첫째 대속의 제물되신 그로 인해서 우리를 그다음 열매로 대속의  제물로 우리를 세우셨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하신 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피조물의 형상을 벗지 못하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이 직책을 맡은 것을 가리켜서 아버지의 사랑이라 했는데 우리에게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도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니까 그 사랑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왜 사랑이 되는가? 사랑이 되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지마는 인성으로서 창조주 신성 다음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는 가장  으뜸되고 가장 존귀하고 모든 존재들에게 필요해서 없어서는 안 될 감을 느끼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창조주 하나님 다음으로 둘째로 필요하고 요긴하고 없어서는  안 될 그런 것, 창조주가 피조물들에게 베푸신 그 은혜 다음으로 지극한 은혜를  베푼 그자가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가만히 놀려 주면은 그것 을 그날은  '참 나는 후대해 준다'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고, 자기를 하루 사는 데에도  참 가치 있게 살아 뒤에 돌아 생각해 봐도 후회할 것이 없고 자기 산 데 대해서  그 자기 하루의 삶을 인해서 많은 것들이 도움을 받고 많은 것들이 혜택을 받고  많은 것들이 유익을 봐서 많은 것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을 시킨 그것을  후대를 받았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사람도 각각 여러 층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여게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은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후자에 속한 것.

 그러기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 그말은  하버지가 주님에게 이렇게 귀한 직책을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그와 같은 직책을  내가 너희들에게 맡긴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가 이렇게 큰 직책을 맡겨 주셨는데 그 맡겨 주신 그  직책을 무엇으로 감당했느냐? 아버지가 이 지극히 큰 직책, 지극히 큰 사랑,  천상 천하에 제일 귀한 사랑, 제일 귀한 직책, 천상 천하에 모든 피조물이  기쁘다 즐겁다 감사하다 이래서 당신 하나의 움직임을 인해서-이것 잘못 들으면  육덩이로 들으면 헛일이오.-당신의 그 대속과 구속을 인해서 모든 피조물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면서 그들이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서 멸망을 다  벗어나 가지고서 구원을 얻고 만물도 새로와지고 하는, 해 가지고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것을 보는 그 기쁨, 그들이  행복된 그 행복을 인한 기쁨, 그들이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은 그 기쁨, 그것을  보시고 좋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기쁨 그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행복되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엊저녁에, 엊저녁에 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게 우리 교회서  반포국민학교에다가 동아 어린이 신문이라는 그 신문을 한 달 보냈습니다. 한  삼십 부 되던가 그렇게 한 달 보냈는데 그 보낸 데 대해서 그 학생들이, 그  학교는 참 아주 갯가에 있어서 곤란한 학교인데 전학생이 백팔십 명밖에 안  되는데 백팔십 명이 밑에는 냅두고 위에 편지 쓸 수 있는 학생들은 다 편지를  해서 나한테,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교회서 했는데 내가 대표로 그래 내가  인사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뭐 거게다 별별 말을 해 놨는데 너무  그만 내 책임이 무겁고, 그들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거게서 보고서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 것도 알았고 또 별것을 배워서 우리가 아주 지식이 넓어졌고 뭐  이러면서 기뻐해서 그 할 수 없어 또 한 달을 더 보냈습니다. 어짤 수 없어서.

그 편지가 와서. 한 달 더 보냈더니만 또 편지가 몽땅 왔습니다. 그 편지를 내가  온 것을 그냥 하지 안하고 다 읽어봤습니다. 다 읽어 봤는데.

 그걸 내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렇게 이런 성격으로 일 하는 게 많을  거라. 내가 거기다가 무슨 무엇을 하나 은혜나 사랑이나 무엇이나 공로나 베풀어  줬을 때에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걸 볼 때에 참 마음에  좋고 즐거워서 그래 그로 인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그걸 내가 엊저녁에  한 서넛이 앉아 가지고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말이지요, 우리가 과거에는 참 혹 서로 시비하다가 그 사람이  억울한 꼴 당해도 자기가 이기면 좋았지마는 지금 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람이 좀 변화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손해본 것은 마음에 기쁘고 남을 해친  것은 안 됐고, 자기가 손해본 것은 오히려 자기 손해봄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또  마음이 좀 마음에 뒤에 우울 해지고 섭섭해질까 해 가지고 가 가지고 그  사람에게 또 위로를 해 주고, 이래서 모든 사람을 행복되게 기쁘게 한 것은 이  무슨 잡지에 나와도 그런 페이지가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며 '참  고마운 사람이라, 그것 참 잘됐다.' 이렇게 하는 것인데,  이제 무궁세계 가 가지고서 천상 천하에 그뭐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만물이  얼마나 많으며 그 모든 존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을  향해서, 당신 아니면 우리는 멸망했는데 당신으로 인해 구원 받았다고서 이렇게  모든 것이 좋아하고 영원토록 그들에게 좋게 하고 이러니까 그런 영광스러운  희생, 영광스러운 대속의 구속의 그 일을 베푸시는 직책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안하고 주님에게 맡겨 줬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고 감사를 하고 죽을 때도  감사를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영광스러운 직책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마는 나중에 인제 한번 죽음 통과하고 심판을 통과해서 심판 앞에  가면은 뭐 여게 주일학교 반사들에게 대해서 굉장할 것입니다. 그 모든  어런이들이나 영들이, 영들과 혼들이 그래 가지고서 '아이고, 선생님이 그때  이렇게 권하지 안했으면 내가 이럴 건데 이래 권면해 주시고 이래 타일러 주시고  이래 붙들어 주시고 내가 이래도 길이 참으시고 또 찾아오시고 찾아오시고 이래  하고 했다'고 뭐 그때 감사와 그 찬송이 넘치게 될 때에 기분이 대단히 좋을  것이라 그거요.

 이런고로 결과적으로 영원 무궁에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 기쁨이 되고 모든  피조물이 나를 보면 반가워하고 나로 인해서 나로 인한 혜택이 그에게 갔고 또  하나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래 봤자 예수님이야 홀홀 단신, 뭐 빼빼 마른 단신이니까 뭐 있습니까마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그렇게 모두를 줘 가지고서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그에게 주니까 그들이 만족해 가지고 주님에게 감사하니까 아버지는  '네가 내 심부름 잘했다' 하고 영원히 기뻐하시고 또 주님은 그 모든 것이 다  그래 하니까 또 기쁘고 즐겁고 멸망하는 것이 구원을 받으니까 얼마나  즐겁습니까?  의사들 말 들었는데 의사들이 환자를 맡아 가지고 그 병을 치료해 놓고 나면은  돈벌이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아파서 죽으려고 그렇게 하던 걸 자기가 그것  고쳐 놓고 나면은 그 병 고쳐서 고통스러운 병을 고쳐 준 그게 기쁘고 즐겁고 그  환자가 와 가지고서 '나를 이렇게 병을 고쳐 주셔 참 감사하다' 하는 감사를 할  때에 그 고통을 치료하는 분이 더 느껴 가지고서 그 쾌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그렇게 해서 그 환자를 그뭐 자기가 참 칙사 대접하듯이 대접을 하면서  자기 기쁨으로서 그래 삼는 것을 저도 봤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 그와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하는 그말이, 사랑했다 이 말이 우리를 죽게 했다 그말이요, 우리를  천하게 했다 그말이요, 우리를 매맞게 했다 그말이요, 죽도록 애써도 욕  얻어먹고 치사 하나도 못 듣게 했다 그 말이요, 손해보게 했다 그말이요, 아무  댓가 없이 심신으로 밤낮으로 희생하게 했다 그말입니다. 그런 직책을 우리에게  줬다 그것이오.

 여기 어떤 사람, 사장이고, 저거 집에다가 얼마나 했던지 그때 집안에 뭐  농인가 뭐인가 집안에 있는 뭐라 합니까? 뭐 도구라 하나 기구라 하나, 뭐라  하노? 방안에 짜다라 해 놓은 것? 가구라 하는가? 그걸 내가 들으니까, 아마  요새 돈으로 말하면 한 사천만 원 되는 것 같애. 그때 사백만 원이라 하던가  그런데 뭐 굉장히 그렇게 해 놨다가서 그것 다 치워버리고 전도하러 가 가지고  이 아이를 보고서 '너 야, 나오너라 교회 주일에 나오너라.' 이랬는데 그 옆에  하나 있는 건 그거는 그만 내비뒀다 말이오. 내비두니까 그 아이는 삐쭉거리며  가는데, 그래 '저 아이가 왜 가노?' 저한테 말 안 해 주니까 간다고.

 그래 가 가지고서 '야야 야야' 아무것이 좀 부르니까 안 나오고 암만 불러도 안  되고 그 부르니까 나와 가지고 '나 안 가요.' 이러니까 그 마음이 섭섭했다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주여' 그 앞에서 삽짝 밖에서 또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빌고 주님 앞에,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 했다.' 그 삽짝 밖에서 실컷 비니까  그래 놓으니까 삘쭉하게 해 가지고 그래 하도 빌어 쌓아니까 척 나와 가지고서,  그래 '나는 그래도 안 가요. '야, 내가 너한테 잘못했다.' 하도 그래 쌓아니까  '그러면 가지요.' 이제 그렇게 그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그  가운데에 그것이 인간의 영이, 영의 생활이기 때문에 영이 기뻐하고, 양심의  생활이기 때문에 양심이 기뻐하고, 사랑의 생활이기 때문에 사랑이 기뻐하고  아버지가 기뻐하고, 그것이 이다음에 무궁세계 가 나타나니까,  부부간이라 너 아니면 나 못 살고 나 아니면 너 못 산다고 이리 해도 가죽  껍데기 속에 파묻혀 가지고 있으니까 속으로는 전부 도둑같이 다 이래 가지고 제  욕심만 차려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어머리만 입으로 가지고 이래  사랑한다고 이래 했는데 나중에 가죽 껍데기를 휘떡 벗고 나면 그때 인제  지옥에서 싸움입니다. '야 이놈아 네가 나를 이렇게 했는데 나는 이런 줄 모르고  속았다.' 서로, 서로 속았다고 다 원수가 되는데 인제 그때에 척 모든 게  벗겨지고 보니까 '아이구, 선생님 내가 그 문앞에서 너무 애를 먹여서 참  죄송합니다. 나를 이렇게까지 속을 썩혀서 구원하지 안했으면 내가 구원  얻었겠습니까?' 이래 쌓아면서 모든 것이 다 그만 그래 돼지니까 그때에 그것이  무궁세계에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영광이 되고, 힘이 되고, 양식이 되고,  밥이 되고 이렇게 되는 이런 직책을 아버지가 천사에게도 맡기지 안하고,  천군에게도 맡기지 안하고, 천사장에게도 맡기지 안하고 아무에게도 맡기지  안하고 예수님에게 그것을 맡겨 줬기 때문에 참 예수님이 기쁘고 즐겁다  그말이오. 예수님에게 그것을 맡겨 줬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워.

 그런 직책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그것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주님과 같이 낮아지고  갸난해지고 또 천해지고 억울함 당하고 모든 것 다 당신 위해서 한번도 해  보지도 못하고 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모든 죽은 자 멸망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다 투자하고 희생한 그 생활이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든 죄인을 대신 하게 하는 것이 그게 사랑이요, 대신해 가지고  형벌받게 하는 게 사랑이요, 대신해서 모든 수고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대신  천해짐으로 높아지게 하는 그것이 아버지가 사랑이라. 그 사랑과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줬다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주님의 소원하시는 소원을 위해서 내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만물들을 내가 제물되어서 그를 살리는 그 직책을 맡겨 준 것이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사랑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를, 죄인을 위해서 죄 없는 우리가-죄 없는 우리라  하면 좀, 우리가 회개한 것이라야 또 제물이 되지 회개 안 한 건 제물이 안  돼요.-그렇게 낮아지고 천해지고 죽어지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또 영원히  한번도 머리 들지 못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은 그렇게 이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그런 직책을 준 것을 가 리켜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를  내가 사랑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그 직책을 어떻게 감당을 하셨느냐? 그 직책을 감당하신  것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게 됐다' 아버지가  나에게 이 직책을 맡겨 주신 이 직책을 다른 방편 가지고서 내가 이 직책을  감당한 것 아니다. 이 직책은 모든 피조물을 다 개개의 개별개별의 구원하는 그  세밀한 복잡한, 그 모든 것들에게 다 충만을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충만을  그들에게 다 끌어다가 줄 수 있는 이런 구원인데 이렇게 지극히 큰 일을  아버지와 나와 연결될 것이 한 가닥만 연결돼야 될 게 아니라 백 가닥도 천  가닥도 연결이 돼야 되겠1고 아버지의 것을 끌어오는 것이 천천만만도 넘어야 될  터인데 그 모든 어려운 문제를 내가 뭣 가지고 감당했느냐? 아버지의 명령  순종하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 내가 감당했다.

 그것 하나 가지고 아버지가 만족하고 영영히 피조물이 만족해서 지옥에 있는  것까지도 주라 칭하여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했다 하니까 지옥에 있는  것들도 주님에게 다 감사하고 주라고 칭하게 하는 이렇게 구비한 무거운 직책을  다 완전히 구비하게 감당하게 된 감당한 방편과 능력은 뭐이냐? 그 명령  순종하는 요것 하나 가지고 했다. '아버지의 명령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됐다.'  그런고로 너희들도 이렇게 지극히 큰 직책을 맡겨 주었으니 이 직책은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 계명이 뭐입니까? 그 계명이 곧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우리에게 나타낸 진리입니다. 이러니까 그 계명이 진리라 그말이오. 그 계명이  영감 진리라 그거요.

 이제 영감 진리가 없는 가운데 천상 천하에 모든 것을 창조했지, 또 영감  진리가 모든 피조물 속에 우리들을 우리 인류라는 우리 인간을 창조했지 또  창조한 인간을 영감과 진리로 이렇게 산 영이 되게 하셨지 또 산 영 된 것이  영감과 진리로 에덴동산에서 영생하게 했지, 했는데 요 영감과 진리로 이렇게  모든 걸 다 하시고 능하신 영감 진리인데 영감 진리를 에덴동산에 인류의 대표인  아담 하와가 영감 진리를 배반해 가지고서 전인류 부정모혈로 난 사람들은 다  사망하게 돼 버렸습니다.

 이랬는데 사망하게 된 여기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서 이제 오신 것이 이 책임을 지고 오신 것이니 이것이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지고 오셨는데 이 책임을 뭘로 가지고  감당했느냐? 감당한 것은 단지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 가지고서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것 가지고 감당했느냐? 부활하신 것  가지고 감당했느냐? 아니오. 아버지의 명령 영감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그것  가지고 감당했습니다. 영감 진리가 십자가에 못박히라 했기 때문에  못박히셨으니까 됐지 영감 진리가 시키지 안한 것 백 번 죽어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러니까 영감 진리로 지은 것을 영감 진리로 살게 하고 영감 진리로 또  살았는데 영감 진리를 배반함으로 죽고 영감 진리를 배반함으로 죽은 것을 다  살리기 위해서 오셔 가지고서 영감 진리로 다 순종으로 살았다 그거요.

 그랬는데 살려 놓은 우리들에게 이제 예수님이 지극히 큰 직책을 맡은 것과  같이 우리들이 지극히 큰 직책을 맡았으니 이 직책을. 뭘로 감당할 것이냐?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과 같은 그 대속을 우리가 계대해 가지고서, 예수님은  원둥치 대속했고 우리는 뽀스래기 대속을 해야 되겠? 고 우리 개별개별에게  분담된 대속을 해야 되는데 이 대속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려 한다 그말이 예수님의  우리에게 분담된 이 사랑 역사를 하겠다 그말입니다.

 그랬는데 그것을 뭘로 하겠느냐? 내가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떨어지지 안하고 이 사랑을 감당하게 됐다. 너희들도 계명 지키면 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안하고 이 사랑을 감당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예수님께서 대속하셔서 우리를 대속하셔 가지고 우리를 벌써 영을  중생시켜 가지고 이 심신 구원을 얻게 하시고 우리의 영육의 구원 얻은 이것이  모든 우리에게 분담된 것들에게 대해서 제물이 되어 가지고서 모든 존재들을  살게 해서, 예수님이 계명 지킨 것 가지고서 이 직책을 감당해 가지고 아버지  우편에 앉은 것과 같이 너희들이 이제 이 사랑의 지극히 큰 사랑을 맡았으니 이  사랑 맡은 이것을 다른 것 가지고는 감당 못 하겠고 계명 지키는 것 요것 하나만  하면은 감당할 터이니까 하나만 해서 감당하게 되면 내가 이것을 감당하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너희들도 감당하면 내 보좌에 함께 앉으리리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지존하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뭐 손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말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뭘로 하시느냐? 이제 감동으로 일하십니다. 감동으로 일하는 그  감동을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감이 나타나면 영감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그 나온 영감을 말하기를 진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진리를  가리켜서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이 신구약  육십육 권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곧 진리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데  하나님에게서 뭐이 나왔느냐? 영감이 나왔는데 그 영감이 진리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진리와 영감의 이 권위를 바로 깨닫고 진리와 영감으로 지음받은 것이  진리와 영감을 어김으로 죽었고  진리와 영감으로 죽은 우리들을 주님이 이제 당신이 진리와 영감을 혼자 행해  가지고 우리를 다 살렸으니 그 영감과 진리로 행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에베소  1장에 보면은 '지극히 큰 능력이 그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십자가  못박혀 죽기도 하고 부활도 하게 했다' 고, 모든 것에 구주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은 이 영감 진리가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진리와 영감으로는 모든 사망의, 죽고 망하는 것을 치료하는 것이  진리와 영감이요 또 이제 망한 데에서 벗어나 가지고 치료돼 가지고 있는 것을  영원히 살리고 행복되게 하는 것이 진리외 영감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은  우리를 치료하는 능력이요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능력이요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이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줘 가지고 있는  진리요 이것은 곳간에 재어놓은, 곳간에 재어놓은 진리외 영감이요 이 진리와  영감이 우리 현실을 만나 가지고서 우리 현실을 만났을 때에 현실을 요런 현실을  줄 때에는, 요런 현실을 줄 때에는 요 영감 진리를 내가 끌어내서 내것 삼을 수  있는 때고 또 저런 현실을 줄 때에는 그 현실에 해당된 영감의 진리가 있으니까  그 일에 해당된 진리와 영감을 끌어내 가지고서 내가 그 영감과 진리를  힘입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때 우리가 현실을 주는 것은 창고에 들어 있는 지극히 큰  능력의, 능력을 가지시고 창조했고 모든 걸 심판도 할 것이고 하는 이런 능력을  우리가 끌어내 가지고, 끌어내 가지고서 우리가 그 현실에서그 현실에  해당된,-자면 안 돼! 들으면 몰라. 참 기가 막히지. 진리요, 진리. 안 들으면  죽어, 진리야! 뭐 아무 데 짜다라 듣는 게 아니라. 조는 사람 봐서는 지금 뭐  증거해 줄 맛이 없지마는 그래도 자면서라도 혹 들어 가지고 깨어날까 싶어서  이러는 것입니다. 졸지 마. 저게 서울 이대 졸업한 여학생인가 뭐, 자지 마, 뭐  한다고 자꾸 자고 있어?  우리 현실에, 현실을 우리가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그 현실에 해당된 진리와  영감을 내가 이제 내 모가치가 됐습니다. 그 진리와 영감을 내가 이제 받아서 그  진리와 영감을 내가 영접하게 됩니다. 영접하게 되는데 그 영접하게 되는 그  진리와 영감은 어떤 능력을 가진 영감과 진리입니까? 내가 현실을 만날  때마다-이것 졸졸 잘 따라나와야 뭐 증거를 할 건데 안 따라나오고 모르니까 참  이것 말하기가 힘이 들어요.

 우리 현실을 만났을 때에는 요런 현실을 줄 때에는 거게 해당된 진리와 영감을  내가 이제 차지할 수 있습니다. 차지할 수 있고 또 조런 현실을 우리가 만났을  때에는 거게 해당된 영감과 진리를 내가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현실이 자꾸 현실이 많은 사람이 좋겠습니까 현실이 적은 사람이 좋겠습니까? 저  ○집사 한번 대답해 봐요.뭐꼬, ○○○교회 ○집사? 현실이 많은 사람이 좋겠어  작은 사람이 좋겠어? 그래, 모르는가 싶어서 내가 한번 모르면 코빵을 한번 주려  했더니마는. 그래, 현실이 많은 사람이 복있지  왜 복이 있어? 현실이 많은 사람은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진 영감과 진리, 바로  하나님의 직퉁인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내게 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때에 그 영감과 진리가 내게 왔을 때는 그 영감과 진리는 지극히 큰  능력, 무한한 지혜를 가진 진리와 영감이 내게 와 가지고서 .네가 요 현실에서는  요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그 영감과 진리가 나를 그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시킵니다.

 시킬 때에 시킬 때에 어떤 사람은 그 시키는 것이 자기 의견에 볼 때에 낭패가  안 될 상바르면 그 시키는 것을 하고 낭패가 될 상하면은 시키는 것을 안  합니다.

 안 하는데 지혜로운 성신의 사람들은 자기 현실에서 영감의 진리기 시킬 때엔는  별 낭패될 일도 없고 괜찮을 그런 일을 시킬 때에는 순종은 하기는 하지마는  그래 별 따가운 맛이 없습니다. 뭐 찍해야 그래 해 봐도 뭐 낭패될 것 없고  그대로 될 터이니까 별 희특한 일이 없지마는 자기 현실에 진리와 영감이 나타날  때에 이제 다니엘처럼 그런 진리외 영감이 나타납니다. 그 현실을 줄 때 여게  현실에서는 진리와 영감대로 하면은 너는 죽는다 하는 그런 현실을 당신이 딱  주셔 가지고서,  그러면 그 현실 줄 때에는 그 현실에 내 쓰는 것은 자기가,그렇게 만들어  가지고서 '기도하면 사자구덩이 집어넣을 것이고 기도 안 하면 산다' 하는 그런  현실을 딱 만들어 놓으니까 그때에 진리와 영감은 '기도해야 된다' 하니까  기도해야 된다 하면은 큰 낭패가 났다 말이오 큰 낭패가 났으니까 이제 우리에게  영감과 진리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까 시킨 그분이 책임이 있다 그거요. 시킨  그분이 책임이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분이 책임을 질 터이니까 아주 그때는 큰 낭패될 그런 일이 턱  닥켰을 때에 다니엘은 그저 얼른 그 진리와 영감대로 그대로 순종하면 그 뒤의  일은 시킨 당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 그거요. 당신이 책임질 거라.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보면 그렇소. 나는 뭐 그런 사람 못  되지마는 그래도 믿기는 그래 믿는 모양이라. '이것 뭘 하랍니까? 무슨 장사를  하랍니까?' 이러다가 '아무 장사를 한번 해 봐라.' 뭐 두말 안 떨어지요 그만.

'예. 그러면 목사님이 그러니까 순종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거는 딱 내게  책임을 지워놨다 말이오. 책임을 딱 지웠다 그거요. 책임을 지웠으니까 이제  '목사님이 하라 해서 내가 했으니까 하라고 하신 분이 책임지겠지' 하고 의심도  없이 '예, 그러면 그것 시작하겠습니다.' 거게 대해서는 참 기가 막힙니다. 겁이  벌벌 나. 시켰으니까 그것 안 되면 내가 책임을 져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  이러니까 그만 뭐 두말 할 것 없이 그만 얼른 그래 할라 합니다. 그래 어떤  사람은 있다가 '가만 있어, 가만 있어. 좀 있어. 가만 있어. 가만 있어.' '뭐  그래 해 보겠습니다.' '가만 있어, 가만 있어. 좀 생각해 보자.' 좀 더러 생각해  보고.

 사람도 그 사람 나한테 지도하고 시키는 그분을 믿기를 백만 원어치 믿으면 그  사람이 나한테 시킬 때는 백만 원 이하짜리는 시킬 때에 의심 없이 예예 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백만 원 실력밖에 없으면 일억의 것을 시키면은  '암만 시켰지만 저분이 그것 감당하겠나?' 하면은 하는 걸 좀 꺼릴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래라 저래라  시키시는 그것은 영감의 진리인데 그렇게 영감과 진리가 '이렇게 하라' 할 때에  그렇게 하면 그 영감과 진리는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고 또 있는 것을 없애고  모든 전지 전능을 가지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영감의 진리기 때문에 그  시킬 때에는 반드시 시키신 그 영감과 진리가 책임을 집니다. 영감과 진리가  책임지요.

 이스라엘을 홍해 바다로 건너가라 하는 것이 영감과 진리인데 영감과 진리가  건너가라 했을 때에 건너가면 물에 가서 빠져 죽으면 영감과 그 진리의 책임이라  말이오. 그 영감과 진리는 전능하기 때문에 건너 가라 하는 그분이 책임을 지고  건너가라 한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뭐이든지 하나님이 시키시면 그 시키신 것은  시키신 그분이 책임을 진다는 것을 그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안심하고 해야  됩니다.

 홍해 바다로 건너가라 할 때에 건너가니까 물이 갈라져서 잘 건너 갔습니다. 또  영감과 진리가 '기도해라' '기도 할랍니다.' 하니까 사자 구덩이에 들어갔지마는  그 영감과 진리가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제 사자 입을 막아 가지고서 참 승리를  이루었다 그거요.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도 '너는 우상에게 절 못 한다'  해라 영감과 진리가 그때 그러기에 '못 합니다.' 했더니마는 뭐 불 가운데  집어넣어도 불내도 나지 안하고 됐다 그거요. 얼마나 이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책임을 집니까?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영감과 진리가 '일어서 걸어가라' '체,삼십팔 년이나  이래 가지고 일어서 걸어가지 못하는데 뭐 일어서 걸어가라? 그따위 소리를 누가  들을까?' 이랬으면 헛일이지마는 영감과 진리기 '일어서 걸어가라' '예, 일어서  걸어가지요.' 일어서니까 일어서지고 걸어가니까 걸어가졌다 그거요.

 '네가 이 돌을 굴려 놔라' '죽은 지가 나흘이 돼 가지고 썩어 내음새가 나는데  뭐 돌 굴려놓으면 소용이 있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돌을 굴려 놔라. '예, 굴려 놓겠습니다.' 굴려 놓으라 하는 그분이  책임진다 말이오. 영감과 진리가 책임졌어 떡 굴려 내고 나니까 '나사로야'  부르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오지 안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현실에 영감과 진리가 시키는 그것은 전능의 능력이  시키는 것이요 전지의 지혜가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키는 것을 그대로 내가  행할 때에 거게 대한 책임은 당신이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닥칠 때에 그 영감과 진리가 현실을 닥칠 때에 그 영감과  진리 때문에 망하는 그런 현실이 좀 오면 좋겠소 진리외 영감대로 해도 별 뭐  아무 망하거나 흥하거나 그런 굴곡이 없는 그런 현실로 해 주면 좋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어떤 게 좋소? 아무 굴곡 없는 그런 현실을 주면은 굴곡 없는  영감과 진리이기 때문에 그래 해 봤자 별 희특한 일이 없지.

 이러니까 우리에게 영감과 진리를 어떻게 줍니까? 이 영감 주고. 저 영감 주고,  영감을 주기를 어떻게 우리에게 줍니까? 진리와 영감을 어떻게 우리에게 줍니까?  이 영감 주고 저 영감 주고 이 진리 주고. 저 진리 주고 주는 것은 어떻게 뭘로  담아 가지고 우리에게 줍니까? 현실 그것 가지고 줍니다. 현실 그것 가지고서  영감과 진리를 줍니다.

 요 현실 주면은 거게는 요 영감과 진리가 필요하고 저 현실 주면 저 영감과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 현실을 만들어 주는 데 따라서 거게 영감과  진리는 바꿔진다 그거요.

 현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이도 당신이시요, 그 현실을 만들어 주신 이도  당신이시요 그 현실을 만들어 줄 때에는 이 영감 이 진리 써라 저 영감 저 진리  써라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다 해 놓고 그 현실에 내가 차지할 영감과 진리는  벌써 하나님께서 신구약 육십육 권에 다 만들어 내놨는데 놓고서 우리 현실  조정에 영감 진리 조정이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 현실을 줄 때에 그 현실에서 그 영감과 진리대로 하면 망하는 것도  있고 안 망하는 것도 있고 큰 환난 당할 것도 있고 '안 당할 것도 있고 이런  것이니까 그렇게 올 때에 자기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 영감과 진리가 자기  현실에서 그 영감과 진리가 자기를 망치는 그런 영감 진리가 될 때도 있고, 죽게  하는 영감과 진리가 될 때도 있고, 아주 산산히 다 아주 낭패가 되게 하는 그런  영감과 진리도 있고, 그것이 뭐이냐? 환경을 만드는 데 따라서 그래 다르다  그거요.

 신사참배를 다른 때는 뭐 안 해도 아무 일 없지마는 하필 그 환경이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은 전부 잡아다 가두고 다 죽여버린다 하는 그런 현실을 딱 만들어  놓고 딱 우리를 신사참배 해야 되는 저기다가 딱 잡아다 놨으면은 그 현실은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면 감옥에 가는 영감과 진리요, 그리 안 하면 사형을 받는  영감과 진리요,  6·25때도 하필 딱 인민군 속에다 집어넣어 놓고서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래 잡아다 놓고 이래 하니까, 이래 떡 나무에다 이래  달아 놓고서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러니까 자기가 안 믿는다 할 수  없으니까 '나는 믿을랍니다.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그게 영감과 진리니까  그 믿습니다. 하는 것은 그거는 당장 죽는 일이라 그말이오. 죽는 일.

 그러면 죽는 일인데 그것이 지극히 큰 능력의 영감과 진리가 그렇게 그 현실을  딱 만들어 줘 가지고서 그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니까 죽임을 당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현실은, 현실은 그 영감이 죽으라고 하는 영감입니까 살라고 한  영감입니까? 어떤 영감이요? 영감이 뭐라 합니까? 예수를 믿는다 하면 죽습니까  삽니까? 죽지요. 그러면 그 영감과 진리는 죽게 만드는 영감과 진리라 그말이오.

영감과 진리가 죽으라 한다 말이오. 죽으라 할 때는 죽어야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영감과 진리가 그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대로 하니까 죽어진 그것이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입니다. 살 대로 다 살고 이제 이미 죽는 생명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으로  아주 폐물 중에는 제일 큰 폐물을 아주 가치 있게 이용했다 말이오. 폐물  이용이라. 이용을 했다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진리를 깨닫고 그저 우리 현실에 해당되는 영감과 진리는  그 진리를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그 진리가 이 온 세계 보다도 강하고,  천하보다도 강하고, 어떤 강대국보다도 강하고,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혜의 능력입니다. 알지 못함이 없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데서든지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왔을 때에는 우리는 영접할  때에 '지극히 큰 능력이 내게 왔다, 지극히 큰 사랑이 내게 왔다, 지극히 큰  선물을 가지고 왔다.' 요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깨닫고 그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가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만 딱 해 버리면  그다음에는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가장 유익되도록, 내가 죽는 것이 제일  유익하면 죽게 할 것이고, 또 병나는 게 유익하면 병나게 할 것이고, 또 거게서  무슨 감옥이 유익되면 감옥에 가게 할 것이고, 또 부자가 유익하면 부자되게 할  것이고, 그때는 내가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진 영감의 진리를 내가 영접하면 그  진리와 영감은 내게 유익된 것만 하게 됩니다. 어찌 됐던가 유익된 것만 하게  되기 때문에, 유익된 것을 얼마나 잘하느냐? 전능으로 잘합니다. 전지로  잘합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현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자기에게 현실이 올 때에는 '여게서  내 구원을 이루려고 현실이 왔다. 지극히 큰 능력이 나에게 지극히 큰 보배를  이루려고 나에게 지금 이 현실이 왔다. 요 현실에는 무슨 영감과 진리가 올  것인가?' 그 영감과 진리를 찾아 가지고서 그 영감과 진리를 우리가 맞이할 때에  그 영감과 진리는 지극히 큰 능력이요 지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감과 진리,  창조도 하고 모든 것 하시는 그 영감과 진리기 때문에 그 시키는 대로 그 영감과  진리가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딱 하기만 하면, 하기만 하면 그다음에,  내가 하는, 그 영감대로 진리대로 내가 하기만 하면 내가 영감과 진리대로  그대로 딱 한 그것은 뭐이냐? 이제는 지극히 큰 능력이 나에게 시키는 대로 내가  했으니까 내가 그대로 했으니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짊어집니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짊어지지요? 이게 들려지요? 누가 책임지요? 예? 진리와  영감이 책임을 진다 말이지? 진리와 영감이 하라 하는 대로 내가 했으니까  진리와 영감이 책임을 져야지.

 사람도 그렇지 안해요? 사람도 '네가 요거는 요래 요래 해라' 했으면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시키는 사람이 책임지지, 시키는 대로 안 했으면 문제지마는 시키는  대로만 했으면 시킨 분이 책임지지 잘못돼도 시킨 분이 벌을 받든지 뭣 하지  없다 말이오. 책임을 집니다.

 만일 하라는 대로 해 가지고 잘못됐으면 배상을 물릴 것 아니겠소? 그런 것  아니겠소? '요래 하라' 해 가지고서 잘못됐으면 하라 한 대로 했는데 잘못됐으면  시킨 이가 책임을 져야지. 우리 주님은 뭐 배상할 것 많습니다. 부자요,  톡톡하요. 만일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서 잘못 됐다면 당장 배상 청구를  하십시오. '여보, 당신이 시키는 대로 내가 했는데 내가 이것 어찌 됐느냐?'  시비할 수 있어. 그 배상을 안 물면 하나님을 벗어놔야 됩니다. 뭅니다. 당신이  영감과 진리로 우리에게 시키신 것은 우리에게 잘못 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손해갈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그 영감과 진리대로 내가 하기만 하면 그다음은 시킨 그 분이  책임집니다. 너 홍해 바다로 기어들어가거라들어가라 했으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 들어가다가 안 들어갔으면 뒤에 잘 못돼도 이의 없지마는  들어가다 빠져 죽었으면 그거는 하나님 책임이라 그말이오.

 들어가다가 손해봤으면 어째요? 만일 그대로 들어가 가지고서 홍해 바다에서 다  죽었으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이 이대로 들어가거라 했는데 들어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면 어찌 됩니까? 그걸로 끝났습니까? 아니오. 무궁세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오십 살이면 팔십 살 살 것 같으면은 삼십 년 동안 예수 잘 믿을 그  모든 행복을 배상을 줘야 됩니다. 배상을 안 주면 안 돼.

 그러니까 우리에게 시키신 그분이 지극히 크시고 진실하시고 또 우리에게  건너온 그 영감과 진리 자체들도 지극히 큰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저 뭐이든지 닥치면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만 해 버리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지극히 큰 능력이 책임지고, 전지가 책임지고 사랑이 책임지고,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한 나에게 유익되게 좋게 해 줍니다. 유익되게 좋게  해 주요.

 유익되게 좋게 해 주면 어떻게 좋게 해 주는가? 유익되게 좋게 해 주면 내 주관  비판에 '좋다' 내 주관 비판에 '나쁘다' 거게 맞춰서 내 주관 비판에 맞춰서 해  주실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 전능의 그 비판에 맞추어서 나에게  좋은 것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어떨 때는 해 주는 것이 우리 주관 비판에는 맞지 안해서 '하나님이  좋은 것 해 줄 것인데 좋은 것 안 해 주고 나쁜 것 해 주신다' 보일 때 있지마는  그것은 우리 주관 비판이 삐뚤어진 것이지 전지의 지혜로서 비판에서는 삐뚤어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자기 현실을 날마다 현실을 만닐 때에 이  현실은 '또 오늘 하루 만났으니까 무슨 일 할까?' 이렇게 공작할 그것보다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살아도 보면은 거게 대한 인간도 사물도 자기 심리도 자꾸  바꿔집니다. 그러니 현실이 바꿔지요.

 현실을 닥칠 때는 '이 현실에는 어떤 능력이 올런고 모른다. 어떤 능력이  올런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 능력이 오는데 어떤 능력이 오면 좋겠습니까? 어떤  영감과 진리가 오면 좋겠습니까? 자기 닥친 현실에 딱 들어맞아서 그 현실에 그  영감과 진리대로 해도 아무 사고가 없는 그런 영감과 진리가 오면 좋겠습니까  자기 현실에 큰, 그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면 죽음이 생기고 무슨 큰 별스런 큰  낭패의 큰 일이 생기게 되는 그런 영감과 진리가 오면 좋겠습니까, 요 안경쟁이?  낭패되는 게 오면 좋겠어? 낭패되는 게 오면 좋답니다.

 낭패되는 것 오면 뭐 하려고? 낭패되는 것이 오면은 좋다는 사람은 '지극히 큰  능력이 어떻게 하는고 보자' 좀 구경도 하고 거게서 지금 지극히 큰 능력이  무엇인가 변동되는 큰 것을 무엇을 하나 해 줄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구경을 좀  하고 이제는 뭐 좋은 것 선물 하나 받을 그런 기회가 됐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기 현실에 그 현실이 올  때에 '야, 이 현실에는 뭐 큰 모순이 한번 있겠는데, 큰 투쟁이 한번 있겠는데.

이 현실에 한번 큰 박치기가 한번 있겠는데. 이 현실에 한번 큰 낭패가  있겠는데. 이 현실은 죽음이 있겠는데.' 이런 무슨 큰 굴곡이 있는 그런 현실이  오는 것을, 그런 현실이 오는 것을 기대합니다.

 이러다가 그 현실에 자기가 성구를 퍼뜩 생각해 보니까 '여게서는 이 현실을  지키려 하는 날이면 이제 큰 낭패가 난다' 이러다가 성경을 조금 더 상고해  보니까 '요래 지키면 아무 낭패가 안 되고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겠다.'  자, 요래 되면 자기가 그럴 때에 마음에는 어떻겠습니까? 요 현실에 영감과  진리대로 하면은 큰 뭣이 한번 꽝 거리는 그런 모순되는 그런 일이 한번 왔으면  무슨 구경도 하고 뭣이 하나 좀 새것이 생겨지고 좋을 것인데 요리요리 하니까  요 현실에 요래 지키면 요 현실도 거슬리지 안하고 현실에 하나님 말씀대로  지킨다고 해도 무슨 낭패가 없이 아무 무사히 지내갈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기뻐합니까 그 사람이 섭섭해 합니까? ○○○? 섭섭해 해? 그것 참  기차는 소리 들을세. 섭섭해 한답니다. ○○○씨, 섭섭해 합니까? 예, 믿음의  사람 들은 섭섭해 합니다.

 왜?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서 뭐라 하면 꽝 거려서 폭발해 가지고  뭐인가 하나 좀 조성이 될 터인데 보니까 아무 무사히 지내가니까, 무사히  지나가니까 무슨 마찰이 있어 큰 능력이 와서 역사할 것이 없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현실에 어떤 현실을 당하든지 거기에 해당되는 영감과  진리는 지극히 큰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니 거게서 어떤 현실이라도, 어떤  현실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영감과 진리가 와서 낭패될 큰, 낭패가 될  현실이면 지극히 큰 능력이, 이제까지 없던 낭패 될 일이라면 이제까지 구경 못  하던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고 또 그 현실에 아무 뭐 현실에  하나도 영감과 진리대로 해 봤자 별 수 없는 아무 무사히 지내갈 것이라면은 '이  현실이야 있으나 마나 뭐 아무 별 희특한 일도 없는 아무 수지도 없는 그런  일이다' 그렇게도 생각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또 주님이 요것까지도 무사히  통과하는 것 요대로 가지고 준비를 해 가지고 또 뒤에 꽝 그러도록 할라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니까 이제 범사에 감사하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해당되는 영감과 진리는 지극히 큰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능력이 우리에게 시키는 대로 그대로만 딱 해  버리고 나면은 그다음 나머지기는 지극히 큰 능력을 다 책임을 져 가지고서  거게서 잘 공사할 터이니까, 잘 공사하는데 이걸 해 줄런지 저것 해 줄런지 그것  모릅니다. 이것 해 줄지 저것 해 줄겠 몰라. 어쨌건 내가 시키는 대로 딱  했으니까 그분이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 주겠다'  하는 그것이 있을 터이니까 우리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뭐이냐? 현실이 왔을 때에 영감과 진리가  '이래라' 하면은, '이래라' 하면은 예 하고 그대로만 해 버렸으면 우리 할 일 다  했소. 그대로 하고 난 다음에는 팔짱끼고 기다려야 됩니다.

 그대로 하고 난 다음에 '이 진리와 영감대로 하면 죽음이 오는데?' 죽음이 오는  것도 그만 진리와 영감대로 실행하고 나머지기는 뭐 죽을런지 살런지 그거는  당신이 책임이고 어떻게 뭘 해 놓는지 그거는 당신에게 맡겨버리고 우리는  안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저 팔짱끼고 기다릴 것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우리에게, 진리는 신구약 성경이 진리요 영감은 어떤 게  영감이냐?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내가 차차 보니까 나를 점점 더 깨닫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는 그게 영감이오. 또 깨닫고 난 다음에 처음에는  그렇더니만 자꾸 기도하니까 자꾸 실행할 마음이 자꾸 생깁니다. 실행할 마음  그것이 영감이오.

 알게 하는 게 영감이요,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게 영감이요, 실행케 하는  영감이니까 그것을 사람들이 자기 주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자기 주관, 자기 주관이라는 부패성 주관은 마귀가 달라들기 때문에  하지 못하게 하지 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옳은 것에 대해서, 진리대로 하는, 현실에서 진리대로 하는 그  진리대로의 것을 더 실감 있게 더 느끼고 더 욕망하고 더 행하려고 하는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그거는 다 영감이지 부패성 자기 주관이 아니고 성화된  자기 주관은 다 영감으로-아이고, 이거 어려워서.-성화된 사람의 새사람의 자기  마음은 그 마음이 영감의 마음이라 그거요. 영감으로 살려놓은 마음이라,  영감으로 살려놓은 마음. 이걸 좀 조금 자꾸 알아야 되겠는데.

 이러니까 우리는 현실을 당할 때에 이제는 이 현실에 '뭐 이 올런고?' 그  현실을 닥쳤는데, 현실을 닥쳤는데 현실 그 배경, 현실 그 배경에 따라서, 요  현실을 닥쳤을 때 요 현실의 배경에 따라서 요 계명을 지킬 것도 있고 조 계명을  지킬 때도 있는 것이니까 요 현실과 그 배경을 봐 가지고서 거기에 배경과 모든  현실이 합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법 도를 영감 도리대로 영감 진리대로 지킬 때에  그 지킨 결과가 어찌 되나 하는 건 당신에게 맡겨놓고 지키면 지키는 데에 어떤  큰 낭패가 나겠다 그것도 당신이 크기 때문에 그까짓 거 문제가 없어. 그러니까  지킴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다. 거기 대해서 어렵다 쉽다 하는 건  인본주의요. 그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

 뭐 '야, 이 진리와 영감대로 이래 지키다가는, 네가 기도 한다 하다 가는  사자구덩이 들어간다.' 이것이 왔을 때에 다니엘은 거게서 두려워하지 안하고  온전히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 그 현실에는 영감과 진리가 찾기도 쉽게 '기도합니다.' 하는 것인데,  '기도합니다.' 하는 그 영감과 진리는 지극히 큰 능력,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고, 모든 걸 주권하는 지극히 큰 능력이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령대로 하면은 그 명령이 그까짓거 왕의 능력 그까짓 거 당할 게 뭐  있는가? 거기다가는 비교도 안 될 지극히 큰 능력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순종하는 그것이 지극히 큰 능력과 자기와 하나됐기 때문에 자기 할 일은 그때에  진리대로 행하는 게 자기 할 일이요 자기가 진리대로 행할 때에 진리대로 행한  거게 대해서 하나님의 하실 일은 어떻게 하실런지 그거는 지극히 큰 능력이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제 깜짝 놀랄 일을 닥치면 깜짝 놀랄 만한 신기힌 걸 구경할  거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야, 하나님이 하시는 솜씨를 좀 구경 좀 하자.' 하면서  기뻐했는데 믿음 없는 다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앞에 현실을 닥쳤을 때에 거게 해당된 영감의 진리대로  우리는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영감의 진리대로 하면 지극히 큰 능력이 그 일에  대해서 책임지고 착수하도록 그 힘에게 딱 위임을 시키는 것, 우리가 다 행하면  그것으로써 그분에게 위임 딱 짊어지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다음에는 거석할 게  없어. 그 나머지는 혼자 다 하십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눈 감고 생각하면 환한데 눈을 뜨면 이 현상 세계가 와  가지고 미혹을 주기 때문에 그만 달라집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현실에서 영감의  진리대로 하는 것은 지극히 큰 전능, 전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지극히 큰  능력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오. 지극히 큰 능력에게 자기 현실에 대한 것을  맡기는 것이오 전지한 지혜에게 맡기는 것이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오. 그러기에 내 현실을 하나님께 맡기니까 그 이상 더 잘할 분이  어데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이래 가지고 초인간적인 역사로 다 승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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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 직분에 충성/ 열왕기상 22장 1절-38절/ 1980. 1. 11. 금저녁 선지자 2015.12.28
971 진리는 하나/ 요한계시록 3장 20절-22절/ 1987. 8. 2.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970 진리는 행할 때 연결된다/ 골로새서 3장 1절-8절/ 1988. 7. 20.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969 진리로 양육하라/ 고린도전서 15장 35절-44절/ 1988. 5. 22.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968 진리를 깨닫도록 힘쓸 것/ 요한복음 5장 25절/ 1983. 7. 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967 진리순종으로 영혼 깨끗/ 베드로전서 1장 22절-25절/ 1982. 8. 15.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966 진리와 마귀의 복술로 되어있는 세상/ 고린도전서 1장 18절-24절/ 1988. 9. 7.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 진리와 영감 역사/ 요한복음 15장 9절-10절/ 1983. 7. 3.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964 진리와 영감의 가치/ 에베소서 5장 15절-21절/ 1983. 10. 25.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963 진리와 영감의 결박을 원해/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 1984. 2. 3. 금새벽 선지자 2015.12.28
962 진리와 자기와 일체화 할 것/ 전도서 1장 1절-18절/ 1987. 8. 10.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961 진리자유 영감자유/ 마태복음 4장 1절-11절/ 1988. 10. 24.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960 진실/ 요한계시록 17장12절-18절/ 1984.2.19.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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