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의 표적

 

1980. 12. 28. 주일오전

 

본문 : 마태복음 9장 1절 - 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말씀을 지난 시간에도 증거한 일이 있고 또 금요일날 밤에도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의 특별계시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일을 개혁해서 번역할 때에 표적이라 그렇게 말씀을 번역을  했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감추어 있는 어떤 것을 나타난 그것을 통하여 미루어  알게 하려는 것이 표적입니다.

그러면 계시에서 첫째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주님은 우리들에 세상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온갖 병든 것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구주로 나타나신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다" 또 "의원은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이렇게 당신이 오신  목적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님을 상대할 때에 우리의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과 무궁세계와 무궁세계에 있는 모든 소유며 또 자체며 모든 존재들과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이런 병들을 다 치료해 주실려고 오신 주님으로 소망하면서  상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둘째로는 이 본문에 중풍 병든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메여와서 그 중풍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니까 거게 모인 사람들이나 또 그 소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 이 중풍 병든 자로 나음을 받은 이 사람만치 기쁘고 평안하고  소망에 가득 찬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고통하던 병이 물러가 고통이 없어졌으니 기쁠 것이고, 또 그가  자유 활동하지 못했는데 자유하게 되었으니까 그가 기뻤을 것이고, 이제는 참  절망 속에 있던 그 가련한 신세가 남 못지 않는 이런 새 소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가 기뻤을 것입니다. 뭐 다른 사람이 멸시했는데 이제는 멸시 안 받겠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것은 그 염두에 생각도 나지 안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고통이 물러간 것과 이제는 평안한 건강이 온 것 병신의 그 부자유가  물러가고 이제는 자유 활동이 온 것, 희망 없는 그에게 창창한 희망이 넘치게 된  이것을 인해서 본인은 누구보다도 더 기쁨과 평안과 소망에 가득 찼을 것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둘째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갖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시는 이 일을 하러 오신  구주시요. 우리에게 온갖 면으로 자유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자유 활동할 수  있는 이런 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시오.

또 모든 면에 낙망과 절망으로 그것이 소망이 있다고 해도 좀 깊이 생각하면  시간이 지나가면 다 절망화 되어버리고 낙망화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시공이나  어떤 그것에게 침해받지 않는 이런 가득찬 소망을 주시는 주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게 그 당시 그 환자에게 이 세 가지 종류의 행복이 누구보다도 충만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의 종류로 평안도 기쁨도 자유도  소망도 있지만 인간 중에 최고의 쾌락과 자유와 영영한 소망은 예수님 한  분으로서만 이 일이 가능하지 그 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없는 것인 것을 가르치는  계시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치료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소망하는 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이 세 가지의 인간에 강령적인 이  행복을 받을 수 있는 이 사실을 믿는 자, 이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을 가지고 있는 육 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놀랬고  부러워했고 기뻐했지만 참 중생된 영들과 예수님께서 이보다 더 크게 평가하신  것이 있는데 크게 평가하신 것은 이것은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들에게  나타나는 그 일 반신불수 중풍병자가 병이 낫는 그것보다도 몇 천배 몇 만배  측량 못할 어려운 일 큰 일 이것을 너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 중풍병자를  걸어가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크신 높이 평가하신 참 중생된  영들이 자기의 육을 인해서 죽을 때까지 탄식하는 이 난제, 죄 사함,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막혀 있는 것이 이것이 다 티워지는 이 사실 이것이 지극히 큰  일이지만 여게 대해서 그때에 크다고 느낀 사람들이 예수님 외에는 없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온갖 축복에 역사로 많은 사람들이 참  부러워 할 만치 세상적으로 축복을 받고 또 영적으로 이 믿음 생활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존귀하게 존대를 할 만치에 역사하는 그 큰 역사 이런 것은  우리가 복이라고 귀하게 평가 할 줄을 압니다.

그것도 귀한 것은 참 귀한 것입니다. 죄 지어 가지고 일찍 세상 형통되는 것  비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이 형통해진다는 것 귀한 것입니다. 또 썩어지고  없어질 일이 아닌 복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이 일에 영광되게 이 일이 잘  성취된다는 이것도 참 지극히 귀한 일입니다.

이렇지만 이것보다 더 귀한 것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이것이  치워지는 주께서 "내가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 말씀하신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는 이것을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우리 죄를 고하면 사함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징계가 멈추는 것을 말을 하는 것이요.

"소자야 안심하라" 하신 주님이 그 우리에게 잘못으로 인해서 주님과 가로막힌  이것에 대해서 주님이 노를 풀으시고 만족이 여기셔서 이제는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없다고 하신 이것에 참 이 가치는 예수님은 큰 일 어는 것이 크나  세상에 이런 것보다 크다고 하신 이 크게 평가하신 중생된 영들이 만물과 함께  탄식하는 이 탄식의 난제 주님과 나 사이에 막힌 이것이 이제는 주님이 만족이  여기셔서 이런 것을 다 헐어 제하시고 너와 나 사이에 막힌 것이 없다고 하신  이것에 큼을 우리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으며 여게 대해서 어느 정도 우리가  평가해서 얻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겠습니다.

보면 누가복음에 보면 열 문둥이가 누가 14장 17절에 보면 열 문둥이가 와  가지고 다 병을 나음을 얻었습니다.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얻었지만 병 나은  그것으로써 다 만족하고 그것으로써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 알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주님과 자기 사이에 막혀있는 것을 이것을 치워야 하겠다는 여게 대해서  중요성을 느끼고 주님 앞에 찾아 온 문둥이는 하나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아무 신앙의 효력이  없어서 참 믿어봐야 별 수 없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아무 흥미가 나지  안하고 힘이 나지 안해서 억지로 주일이 닥치면 무거운 짐같고, 또 교회의 어떤  행사라고 하면 심히 괴로운 그 비국민이 세금 닥친 것처럼 이렇게 괴롭게 여기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되어 있어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조롱이 되고 핍박의 원인이  되고 우리 자신들에게는 실지로 힘을 얻지 못하는 예수님 믿어서 아무 효력을  보지 못하는 그런 참 가련하고 비참한 그런 자리에 있는 것보다는, 예수님 믿어서 세상 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은 예수 믿어 참 저렇게 잘됐다.'  '예수 믿는 것 우리가 처음에는 네가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 망한다 이랬는데  과연 망하지 않고' '다니엘 저거 하나님 믿다가 죽는다 이렇게 했지만 과연 죽지  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 나오는 참 하나님이 계신다.' 할만치 이렇게  세상과 영계에 있는 영에 속한 하나님의 이 축복을 받는 것도 큽니다. 이것도  받지 못해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이 억지로 믿어 빛이 되지 못하고 덕이 되지  못하고 복음을 가리는 이것보다는 큽니다.

크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는 정도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으니 참  감사하다. 복을 주시는 주님이 다고 이렇게만 그것으로 기뻐한다면 열 문둥이가  문둥병 낫아서 그것으로 만족하는 이 아홉 문둥이의 불과한 우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한 문둥이는 병을 낫게 하신 이로 인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여 그분에게는 자기에 알지 못하는 무한함이 싸여 있는 것을 은연중  소망하면서 주님으로 더불어 가까워지기를 원해서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그물 던져서 밤새껏 헛일한 저에게 배에 가득찬 만치  그 많은 고기를 얻었으니까 감사하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어서 매매해서  돈 쓰자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배드로는 참 주님이 표적으로 주신 그 표적을  그는 자기의 복음으로 받지를 못하고 "너희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닥이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토록 있을 양식 위해서 일하라는 이 주님의 탄식거리가 될터인데, 베드로는 이것으로 참 표적을 삼아서 그는 고기로 인하여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게서 자기가 하나님에게 거슬린 것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막혀  있는 이 문제를 인해서 들짝 말하기를 그 앞에 죽은 것 같이 꺼꾸러져 엎드러져  가지고 '주여 주님과 나 사이에는 태산 같은 것이 막혀 있습니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주님과 나 사이에는 태산같은 죄가 막혀 있으니 주님과 나와는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그가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가리워져 있는 이것을  그는 발견하고 거게서 참 죽은 자와 같이 그렇게 기절할 만치 두려워 떨 때에  주님은 그에게 "시몬 베드로야 안심하라." 안심하라 이제는 네가 이것을 깨닫고  이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후로는 네가 고기 수입의 소망자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을 낚으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인간 수입을 네 수입으로 삼는  사람이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이제까지 갈급하던 그 고기에 만적된 것도  다 눈에 보이지 안하고 다 배와 그물과 고기를 버려두고 자기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이 면에 어느 정도 우리가 느끼고 평가하여 갈급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것도 크지만 이보다도 더 큰 것. 주님이 소자야 하시면서 그를 환영했습니다.

뽕나무 위에 있는 그 삭개오를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밤에 네 집에 가서  너와 함께 거하겠다고서 이렇게 주님이 영접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동행하는  이 동행, 주님이 "소자야 안심하라" 주님이 부르셔서 그 영접하시면서 주님이  위로하시고 동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목표요 이것이 우리의 종착이  되는 소망인 것을 보여 주십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주와 동행한 가정 생활에서 삼백 년 동안 주와 동행하는 그  생활, 노아가 일백이십 년 동안을 주님고 동행하는 그 생활, 아브라함이 주님과  동행하는 그 생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렇게 실수 많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세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두려워 떨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힘없는 대답을 할 때에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네가 어렸을 때에는 네 의미대로 다녔지만은 이제는 네가  장성하여 네 팔을 펴면 대적들이 많아져서 너를 묶어 원치 안하는 그런 곳으로  끌려가는 길이 있으리라"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에 그때에 베드로가  보니까 자기 보다 먼저 주를 따른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만찬 때에  예수님에 그 품에 기대서 팔 자가 누구 오니까 묻던 그 사도 요한이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게 했으나 네게는 상관이 없으니 너는 나를 따라라" 이것으로써 베드로는  주님에 영접과 주님에 위로와 주님의 동행으로서 그는 끝을 마쳤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게서 이렇게 전능하신 주님이 치료자로 오셨는데 치료받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이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로 어서 옮겨서야 되겠고 만일  보이는 치료를 받은 형제들이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아홉 문둥이와 같이  머물러 있지 말고 한 문둥이와 같이 주님과 나 사이에 가리워진 이것을 정리하여  "네 죄를 사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가리워진 것이 다 없어졌다 하는 이 말씀을  목표로 두고서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겠고, 만일 이 생애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게서 머물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들 보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당신에 피로  값주고 산 양떼를 참 안심하고 맡길만한 "이제는 너를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리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주님이 이렇게 환영하면서  이제는 위로하면서 주님이 동행하는 이 동행에 자리에 나아가도록 목표를 정하고  우리가 달려야겠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위치 어느 자리까지 이르렀든지 그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우리의  푯대를 정해서 정한 가까운 푯대가 도달되었으면 또 그 너머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주님과 동행할 수 있어 주님이 부르신 부활하신 후에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신 것 처럼 이렇게 주님이 부르셔서 주님의 온갖 위로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내가 알파와 오메가라" "네가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을 네가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대로 주님 그  부르심과 위로와 동행하는 여기까지를 목표 향하여 달려야겠는데 이 네 가지 순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단 그 구체적인 방편은 여게 두 가지로만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소자 된 것,  하나는 죄인 된 것이요. 그가 소자된 것은 주님이 "소자야" 많은 사람 가운데에  "소자야" 주님이 불러 환영하실 만큼 그 겸손한 소자 이 사람되는 것이 우리의  하나에 방편이요.

그 다음에는 안심하라 내가 네 죄를 사하였다고 위로해 주시는 이 죄인되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영접할 수 있을 만한 우리의 소자가 소자인 것을  깨달아서 소자 되는 것, 소자 된 점을 주님이 영접할 만치 소자 된 점을 우리가  알고 소자로 주님 앞에 나타나는 것, 주님이 우리의 죄를 죄에 근심을 인해서  안심의 위로를 줄 수 있는 참 죄인되는 것, 이 두 가지로 인한 근심 이것이  우리의 이 네 가지 문제는 다 해결 짓는 방편인 것을 여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에게 물리침을 받습니다. 의인은 주님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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