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사는 것

  선지자선교회

1981. 7. 24. 금야

 

본문로마서 6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 때에 모든 면으로 기도 생활이 늘 계속되었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대로는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무엇으로 이 땅으로 업을 누릴 것을 알리이까하면서 간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충족시킬 만한 그런 구비한 은혜를 하나님께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말씀하셨고 그의 신앙 자체를 따라가는 자 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다 영원 불변적인 진실의 약속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또 그것을 하나님이 의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으로 이것을 알리이까한 그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신앙에 대해서 더 증거를 주셔서 신앙을 견고케 해 달라는 그런 신앙 요구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한 제목은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이것이 첫 기도요 간구였습니다. 그 다음 기도는 소돔 고모라 성이 멸망받을 때에 자기 조카를 위해서, 신앙 동지라고 할 수 있는 그를 위해서 간구한 것이 두번째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첫째 한 기도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이 기도였는데 이 기도는 성도로서 제일 중요한 기도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신앙뿐입니다.

 

신앙이면 다입니다. 신앙이란 곧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제일 보배인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더 충만케 해 달라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더하여지는 그 방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편을 씀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전과 아주 다른 믿음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믿음에 대해서 부족한 것이 성경에 나타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 더하여지는 방편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삼 년 된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로 제사를 드리라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즉시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는 그런 환경 엄숙을 만드시고 또 그를 감동시켜 하나님 앞에 심히 두려워 그 마음이 다 긴장되도록 하시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 사이로 지나 제물을 태우게 하셨습니다. 그때 제물 사이로 하나님의 불이 지나가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고 다시는 모자람이 없는 충만한 믿음을 받아 여생을 살았습니다. 그 후로는 조금도 믿음에 부족한 것이 없었고 하나님을 만족케 한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해서 나타난 형식 계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된 우리들에게도 믿음이 더하여지는 방편으로 이 방편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방편을 통해서 믿음을 크게 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취를 따르는 신앙 행위를 가지는 우리들에게도 꼭 같은 장성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이면 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잘 맺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잘 맺어지도록 하는 그 생애가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역사를 자기가 다 받아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는 믿음이면 다입니다. 믿음의 가치를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요 지식입니다. 이것은 모르고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전 인류의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어리석은 자요 무식한 자요 무지한 자입니다.

 

그런 것 다 몰라도 믿음이 성도에게 있어서 제일 보배라는 이것을 알고, 즉 믿음의 가치를 알고 믿음을 가진 자가 되면 그 사람은 인생으로서 제일 유식하고 지혜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요 가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 우리 앞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있는데 이 모든 충만을 내가 받아 가지는 것은 믿음으로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모신 자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역사를 자기가 입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은 자로서는 믿음이 제일 보배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더 많이 가지고자 하고 충만히 가지고자 합니다. 믿음을 많이 가지면 하나님이 모든 면으로 더 많이 자기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능력도 지혜도 많고 더 많아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이 더 많고 충만케 되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더하여지는 이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믿음이야 부요해지건 말건 돈이나 있으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런 것들만 구비하고 풍성했으면 하는 그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이요 아직까지 사망의 탈을 벗어나지 못한 사망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이 우리에게 더하여지는 방편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방편 곧 짐승을 잡아서 제사로 드리라 하는 이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로 드리라.

 

다시 한번 복습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 더하여지는 것이 돈 더해지는 것보다, 지위나 권세나 세상 무엇이 더해지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만 가졌으면 다 됐어요. 가정에 아무것도 없어도 가족들이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은 그만 인간 가운데 제일 높은 가정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믿음 가졌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아무 보인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신앙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무궁세계에서 그이의 영광과 존귀와 부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하나님은 자랑삼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암만 이 설교를 해도 이해를 못 합니다. 믿음이 보배라는 것을 알고 믿음에 욕심을 내야 믿음 더해지는 것을 말하면 아이구, 나 도 이 방편을 배워서 믿음이 더해져야 되겠다.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되겠다?? 이 렇게 생각이 되지, 믿음, 믿음 하니까 ??아이구 징그럽다

 

?? 믿음을 징그럽게 생 각하고 믿음을 천하게 생각하고 돈만 좋아하는 그자에게는 돈 말을 해야 눈이 버 쩍 뜨이고 기분이 나지 믿음 말하고 믿음 더해지는 방편을 말하면 귓전에도 안 들 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믿음 외에는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만 가지면 됩니다. 믿음 하나만 가지면 다요. 믿음 외에 아무것을 가져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믿음 때문에 가지는 것이지 믿음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이 있는 줄 압니까? 믿음 외에 돈이 필요한 줄 압니까? 아니오. 돈도 믿음 때문에 필요하지 믿음에 쓰이지 않는 돈이면 소용없습니다.

 

건강이 필요합니까? 믿음 때문에 건강이 필요하지 믿음 아니면 건강 아무 소용없습니다. 있는 것이 해독입니다. 믿음 더해지는 방편은 짐승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외에는 방편이 없습니다.

 

아무리 의를 행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고 연보를 하고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해도 믿음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또 그것이 믿음 더하여지게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 것 같지만 아닙니다. 믿음 더하여지게 하는 것은 짐승 잡아서 제사드리는 그 외에는 방편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고 지금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짐승 잡아서 제사 드린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그 실상을 미리 바라보면서 예표로 드린 것입니다. 실상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그림자와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와 나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의 어린양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 것인데 이것이 아직도 몇 천 년 남아 있으니 지금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망하고 바라보는 그 효력이 지금 너희들에게 나타나도록 한 것이니 이렇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잡은 짐승은 곧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짐승을 잡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은 것을, 예수님을 죽인 이것을 우리가 알고 실감 있게 느끼고 여기 대한 자기의 올바른 마음 자세와 행동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 자세를 가질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돌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 자세를 가진 것만큼 하나님과 나와는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느낀 것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 관계의 행동이 있는 것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실질적으로 관계되는 그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하나님으로서 피조물 되어 오신 거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사생활 공생활을 거쳐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끝났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이 났지만 죽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모든 순서가 다 연결되어서 최종 결실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은 뭣 때문에 죽으셨는가? 우리가 범한 죄를 없애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죄를 없애는 것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원자탄으로 태워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억억만 년이 지나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죄를 멸하기 위해서 형벌을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를 죄 안 짓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전체를 대표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악령과 죄는 예수님을 죄 짓게 하려고 오만 조롱 고문 고형 다 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아 놓고 끝까지 죄를 짓게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죄 짓지 않는 그 생애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에 죄 짓지 않는 것으로 끝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멸하지 않으면 죄값으로 우리가 영원히 멸망받기 때문에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멸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법에서는 내 죄가 다 도말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까지 죄의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있는 죄악성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팔을 뒤로 비틀고 거꾸로 매달고 살을 깎고 불로 지지고 태우고죄 지으라고 그렇게 온갖 고문 고형을 가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면 살려 주마 어기면 살려 주마 하는데 어기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렇게 고문 고형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멸하신 이 죄를 내가 살기 위해서 다시 죄를 범할 수 있겠느냐? 내가 죽어도 죄를 범하지 않겠다 하여 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죽는 그 죽음이 내 생애에서 죄를 없애기 위해서 죽는 죽음입니다. 그것이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하여 있는 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65절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요것은 필연적으로 됩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같이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는 자가 되었으면, 완전히 죄를 멸하기 위해서 생명을 다 기울여 죽은 자가 되었으면 그는 부활에 연합해서 다시 산 자가 필연적으로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은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불의를 어떻게 멸하는가? 이미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그 불의는 형벌을 받아야 없어지지 형벌 받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만들어 놓은 불의, 앞으로 만들 불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서 만드는 그 모든 불의를 당신 혼자 다 지시고 값을 받아 죽음으로써 불의를 멸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불의, 우리가 앞으로 만들 불의 그것이 우리를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심으로 불의를 멸해서 그 댓가를 내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기준해서 그 법칙을 어긴 것을 죄라 말하고,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근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칙을 떠나서 인간 자기의 법칙을 만들어 가지고 행동한 그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와 불의는 다릅니다.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자율대로, 내 주장대로 함으로 영원히 멸망받는 그것을 주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내시고 그 불의를 멸했으니 그 죽으심을 본받아서 나도 이제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 불의를 멸하기 위해서 죽겠다, 주님의 그 죽으심에 연합하여 나도 이제는 불의를 용납지 않기 위해서 죽겠다 하는 이것이 양심이요 이것이 예수님을 실질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 더하여지는 방법입니다. 이럴 때에 이 공로를 인해서 주신 성령의 감동이 와서 역사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 더해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무를 심어 놓으면 필연적으로 성장하듯이, 과일나무를 심어 놓으면 열매는 필연적으로 맺듯이 믿음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마귀는 의를 건설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주님은 끝까지 건설하다가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의를 건설하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요, 불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 아니라 버리고 저거 법을 세워서 그대로 산 것이 불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역사할 때에 방해하는 마귀는 건설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아무리 방해를 해도 끝까지 건설해서 의를 건설하는 것으로,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으로 죽어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마귀는 다시는 의를 건설하지 못하게 할 여유의 아무런 부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손을 들었고 예수님의 전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전부가 됨으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법을 만족시킨,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케 한 우리의 대행의 의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미 만들어 놓은 불목을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고 불목된 이것을 없애는 데는 그 값을 내야 되는데 그 값은 형벌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기까지 형벌을 받아 가지고 이 불목을 없애 버렸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과의 불목, 인간과의 불목 이 모든 불목을 없애고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이 형벌 받아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노력할 때에 하나님도 만물도 다 못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다 기울여 마지막 생명이 끊어지기까지 화평을 주장하고 화평을 간구하다가 끝을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전부는 화평을 위한 전부가 되었고 불목의 댓가를 낸 전부가 되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로 알아서 그 죽으심에 연합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 불의 때문에, 내 불목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고, 내 사죄를 위해서, 내 칭의를 위해서, 나와의 신인 화목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이 죽음을 내가 알고 느끼는 여기에서 믿음이 생겨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우리가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생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 생겨집니다

 

이제 나는 죽는 날까지 범죄하지 않겠다! 죄 안 짓는다고 죽이면 생명을 빼앗길지라도 죄는 짓지 않겠다! 생명 다해서 의를 건설하겠다! 생명 다해서 하나님과 인류로 더불어 화평한 이것으로서 세상을 끝마치겠다! 하는 요것이 필연적으로 생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았으나 죽은 자인 것을 아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또 우리는 옛날같이 산 사람이 아니라 새 창조물로, 진리와 성령으로 영생으로 새로 살아난 자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인 것을 알아야 되고, 살아난 자인 것을 알아야 되고, 죽음으로 죽음 속에서 살아난 자가 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 속에서 살아난 자가 사는 이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우리는 죽은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산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할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애요 이것이 영생입니다. 여기만 평강이 있습니다. 여기만 저주나 사망이나 죄나 악령이나 모든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는 우리의 피난처요 세상에 있는 천국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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