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충성

 

1984. 8. 27. 월새벽 

 

본문: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이 두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에도 두 편이  있었고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두 편이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단의  회가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산 교회에는 반드시 두 편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아주 죽어서 세상화 된 교회는 두 편이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두 편이 없고 갈라지지 안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마는 천주교는  갈라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과 꼭 같기 때문에. 뭐 주일날 아무리  주일을 지키지 안하고 주일날 무슨 장사한다 해도 그거 상관하지 않습니다. 또  술이고 담배고 그런 거 암만 뭐 피운다 해도 그런 것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도 좀 살아나는 교회가 생겨질 때 그때에 두 편이 돼서.

천주교와, 성공회라는 교파와 천주교와 둘로 갈라졌습니다. 성공회라는 그 갈라진  교파에서는 성경을 개인에게 보도록 인정을 하고 또 기도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성경 보는 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허락 않습니다. 또 기도가  없고 주문만 외웁니다. 완전히 그는 자기네들 주권, 교권자들화 시켰던 것입니다.

 여게도 서머나교회 여게도 두 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데든지 죽어 있는데는 가면은 하나요 살아 있는 데는 반드시 둘입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둘이 있습니다. 교파적으로도 그러하고 교회적으로도 그러하고  또 당회가 모이면 당회적으로도 그러하고 또 제직회 모이면 제직회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차차 성화됐다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에 양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되어 있는 그런 편도 있고 아주 잘못되어 있는 편도 있고, 둘이 합해  가지고서 가운데서 차차차차 잘못된 것이 잘된 것으로 자꾸 이렇게 성화돼  나가면 그것이 교회가 성장돼 나가는 것이고, 또 잘되어 있는 것이 차차 못된  것으로 화해져서 나가면 그것이 교회가 타락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머나 교회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자니라' 이 서머나 교회도 환난이 있었고 궁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잘 믿을라고 하는데 환난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사는데 경제에 대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제 말씀 증거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모든 것이 다 풍부할 수  있다고. 또 남에게 꾸어 주지 꿀 것이 없다고 하는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을 어제 말했습니다. 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모든  것이 풍부하게 잘 산다고 하신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와 같지 안하니 이것이 뭐인가 한번 연구해 보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런 잘 믿는 신자에게도 환난이 있고 궁핍이 있다고  하시는 이것도 또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세상적으로 모든 것이 빈곤해지는 그 문제에  대해서, 빈곤한 것은 다 잘못 믿은,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또 모든 형편이 좋고 잘 사는 것은 이거는 예수님을 잘  믿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단정하면 잘못하면 잘못된 단정. 일반적인 단정을 하기 쉽겠습니다. 잘 믿는  사람도 환난과 궁핍이 있을 수 있고 또 아주 잘못 믿는 사람에게도 모든 것이  풍부하고 죽을 때까지 재물도 더하고 고통도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말을 믿어야 될 것인가? 그러면, 내가 지금 풍부하게 사는 것, 내가  아주 세상적으로 모든 것이 형통하고 풍부하게 사는 것은 뭐인가 그것도  살펴봐야 되겠고, 또 자기가 세상적으로 모든 면에 곤고한 사람도 '이거  곤고하니까 저주받았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고 내가 곤고하게 살고 있는 것은  이것은 뭣 때문에 곤고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그것도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살펴서 하나님의 저주라면 벗어나도록 애를 써야 될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그것을 잘 보존하도록 애를 써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 고난이 하나님의 저주인지 이 풍부가 하나님의 축복인지 그걸  모르겠다 이거요. 이 풍부가 하나님의 축복인지 저주인지. 이 고난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성경에  이렇게도 말해 놓고 저렇게도 말해 놓고, 잘 믿는 사람은 잘 산다 이렇게도 말해  놨고 또 잘못 믿는 사람도 잘 산다 이렇게도 말해 놨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정평  정가해야 되겠는데 그것을 정평 정가할 때에 어떻게 할랍니까? 요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다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다 정평 정가해야 되겠는데.

자기에게는 환난과 곤고도 오고 또 형통과 풍성도 옵니다. 이러니까 언제든지  그것을 잘 심사해서 그게 하나님 앞에 참으로 징계인지 축복인지 그걸 바로  알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모른다면, 축복을 저주라고 해석하면 그것도  망하는 길, 또 하나님의 저주를 축복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것도 망하는 일,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 하나 비판해 나가야 되겠는데 어떻게 비판해야  되겠습니까? 자, 남반에 한번 대답해 보이소. 어떻게 비판해 나가야 됩니다? 예?  예, 잘 말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심사할 때에 내가 마음에 양심에 가책될 것이  없이, 양심에 가책될 것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오는 가난이라든지  환난이라든지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축복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나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참고 견뎌서 어짜든지 요동치 안하고 어떤 환난이  올지라도 나는 믿음에서 요동치 않겠다 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투쟁해서  승리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심에 가책되게,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있으면서  자기에게 만일 풍부가 오고 모두 것이 형통이 왔다고 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나를 버린 자식으로 나를 버려 두는 것이든지 죄를 지어도 그대로 형통케  해 두시면 하나님께서 버린 자식입니다. '버린 자식으로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든지  만일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나는 택함을 받지 안한 자인가' 여러 가지로써 자기는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환난도 꼭 그와 같습니다. 만일 환난을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 양심에 가책 없이  지키는데 환난이 왔으면 하나님이 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요 양심에 가책 있는,  가책 있는 그런 점이 있어서 회개를 안 했는데 환난이 왔으면 즉시 그것만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모든 것이 형통해질 때에도 양심에 가책할 것이 없이 믿음을  지켰는데 왔으면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알고 그 축복으로 인해서 자기가  교만하면 실패하게 되기 때문에 그 축복을 인해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주의해서 나가면 더 좋아지겠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양심에 가책됐는데 그런  것이 형통함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인가 버림인가 또 그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심에 가책 없이 살아 나가는데  오는 것은 환난도 좋고 궁핍도 좋고 또 평안도 좋고 축복도 좋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기를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잘 지켜 가고 있는데 온 환난이나 풍부와 형통이나 그것을  내가 믿음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것을 기준해 가지고 우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야 되지, 그저 껍데기로 형통이 왔다 고난이 왔다 그것만 가지고  우리는 비판하고 평가하면 모든 것이 틀려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나 제가 생각할 때에 '나는 참 평안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껍데기 보기에 좋은 그거보고 축복이라, 평안한  그것보고 평안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평안과 축복 같은 그것이  앞으로 큰 환난을 지금 만드는 저주스러운 일도 있고 또 자기가 평안함으로써 그  평안을 인해서 앞으로 하나님 앞에 큰 저주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지금 종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환난도 꼭 그러합니다. 그 환난이나 곤고도  자기에게 환난과 곤고가 참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환난과 곤고가 오는 것 있고, 시험하기 위해서 오는 것 있고,  자기가 참 저주로써 환난과 곤고가 오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저 축복이든지  저주든지 우리는 그것을 잘 심사해야 됩니다. 심사 안 하고 껍데기 좋다고  좋아하고 나쁘다고 나빠할 것은 아닙니다. 껍데기가 좋아도 나쁜 것 있고 나빠도  좋은 것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이냐 하는 그것은  어데서 평가하느냐? 이제 대답한 것과 같이 내가 믿음을 지켰는데 왔느냐 믿음을  버린 면이 있어서 왔느냐 그것을 잘 생각해서 거게서 비판하면 됩니다. 자기가  믿음을 지키는데 억울하게 오면은 우리는 그럴 때에 조심해서 가만히 참고  견뎌야 됩니다. 가만히 참고 견디면 그 모든 것이 축복으로 바꾸어지고 또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단의 회를 내가 네 앞에 머리 숙여 무릎 꿇고 자복하도록  그렇게 만들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우리는 내가 믿음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요것을 근거해  가지고 만 가지를 우리는 비판하고 평가해야 됩니다. 자기가 믿음을 지키지  안했는데 어려움이 왔으면 '요것 때문에 이렇다' 하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것만  고치면 그만 모든 것이 해결이 됩니다. 자기가 또 믿음을 지켰는데 어려움이 오면  가만히 참고 견디면 좋은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 믿음을  근거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아주 처음에 불러서 그거 뭐 아무것도 아닐 때에는 그런 실수가  있어도 용서하지마는 차차 장성해 가면 하나님이 용납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차 잘 믿어 갈수록 하나님께서는 점점 더 깨끗게 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과 달라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일수록이 점점 더 깨끗게  할라고 애를 쓰고,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라면은 그만 뭐 이런 것 저런 것  허물도 다 무조건 용서하고 다 이해를 하고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이 범죄하면 소를 잡아 가지고 속죄제를 지내야 됩니다. 개인이  범죄할 때에는 비둘기라도 되고 양이라도 됩니다. 그러나 온 민족이 범죄할 때, 온  민족 전체가 범죄했을 때에는 또 소를 잡아서 속죄제를 지내야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 제사장은 그 중에 제일 하나님이 깨끗게 한 사람인데 제사장이 범죄한  것은 온 민족이나 범죄한 거와 꼭 같다 그런 계산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서부 교회에서 뭐 형통을 당한 사람도 있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있는데, 어려움 당했다고 무조건 저주라, 자기를 하나님이 버렸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또 자기에게 무슨 형통이 있다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신다 그렇게 해석을 해도 안 됩니다. 자기가 믿음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압니다. 또 다른 사람도 압니다. '저 사람에게 앞으로  축복이 오겠나 한번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꼭 온다' 볼 수 있다 그말이오.

정확하게 압니다. 모르는 게 아니오.

 그런고로, 우리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사람들 생각대로 외모를 보고 좋다  나쁘다 그렇게 좋은 것은 축복이라 나쁜 것은 저주라 그렇게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믿음을 지켰느냐, 믿음의 결과로 좋은 게 왔느냐 믿음의  결과로 아주 환난이 왔느냐 그것을 우리가 거게다 근거 해 가지고 평가해야  합니다 믿음의 결과로 온 것이면 환난이 와도 그것이 좋고 축복이 와도 좋고 다  좋습니다. 믿음의 결과로 환난이 온 것은 그 다음이 형통하니까 믿음의 결과로  환난 왔을 때에는 다른 조심할 것 없이 믿음을 계속 지키면 그만 됩니다.

그것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로 좋은 축복이 왔을 때에는 믿음만 지킬라고 한 가지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믿음 지킬라고 해서 믿음 지키는 줄 알아도  자기는 축복이 왔기 때문에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교만치 않도록 하는 거와 믿음 지키는 것 두 가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데,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증거할라고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받은 것은  일어나서 증거할 말씀을 생각하니까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빨리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얼마 하도 안하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증거하게 된 것은. 1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라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렇게 하는 이 말씀 받은 자에게는  구할 것은 뭐이냐? 충성이니라. 맡은 자가. 자기가 주님에게서 무엇이든지 맡은  직책이 있는 자는, 자기는 무슨 가정부로 그 직책을 맡았든지, 어떤 또 종의  직책을 맡았든지, 그래 아니면 무슨 사장 직책을 맡았든지 혹은 교회의 무슨  성업의 어떤 직책을 맡았든지 어쨌든지 아 각각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까  맡아 가지고 있는 그 일로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또 학생은 공부하는  것을 맡았으니까 자기는 공부하는 그 일을 충성되게 해 가지고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이렇게, 맡은 자들은 뭣을 맡았든지 맡은 그 일을 주를 위해서 네 힘을  다 해서 그렇게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이 승리하는 그 승리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혹 그래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제 조금 아마 과로가 됐던가, 이래서 밤에  별로이 잠을 못 잤습니다. 온 전신에 두드러기. 두드러기가 나 가지고. 내가 입술  붓는 것도 그것도 '뭣 때문인가' 이랬는데, 입술 붓는 그런 것 다 과로가 되니까  입이 뚱뚱하게 부어 버려요. 그만 갑자기 붓습니다. 전신에 두드러기가 올라  가지고서 여게도, 이 볼도 뻑뻑하이 이래 되더니마는 충성하라는 그 말씀 듣고서,  오늘 아침에 내가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가졌는데  이 말씀 받고 난 다음에 '내가 나가야 되겠다' 그래 나왔습니다. 나와 보니까 이  볼때기 뻑뻑한 거는 다 풀어졌어. 다 풀어졌고, 몸뚱이 이거는 근지러운 것도  없어졌는데 지금 뭐 설교하니까 모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라고 산에 기도하러 가는 거 못 가겠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오늘은 산에  가지 못하니까 그리 알고 조처해라 ○집사한테 그래 말했는데. 또 이 성구를 받고  난 다음에 새로 전화했습니다. 내가 산에 가겠으니까 그렇게 전과 같이 준비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래서, 내가 그라니까 날 회개 시킬라고 그랬는지 어쨌든지  '오늘 아침에 무슨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습니까' 하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하는 그 말씀을 우리가 다 같이 오늘 아침에  주님이 주시는 이 표어로 삼아서 회개를 합시다.

 죽도록, 자기 맡은 직책에 있는 전심 전력 다 기울여서 그래 하라. 뭐 그렇게  전심 전력 안 기울여도 할 수 있는 그 일이라도 우리가 전심 전력 기울이면,  그것이 다 만점이 되어지고 아무리 그 일은 잘 됐다 할지라도 우리 성심 성의를  기울였나 안 기울였나 거게 대해서 그것을 근거해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시기  때문에 일은 잘 했다 할지라도 자기 기울인 것은 다 기울이지 안했으면 영생은  안 됩니다. 다해야 영생된다고 하나님께서 못을 박아서 그렇게 표준을 정해  놨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남권찰 또 여권찰들 가운데에 팔복산에 기도하러 간다고 하는데, 그래 잘  갔다 오도록 하고, 그걸 꼭 주의해야 될 것입니다. 요새는 모두 등산객들도  많습니다. 또 관광객들도 많습니다. 이래서, 여름에 날은 덥고 하니까 경치 좋고  물 좋고 선선하고 하는 그런 자리에 가 가지고서 한번 푹 쉬기 위해서, 자기의 또  기분을 만족하기 위해서 가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새는 뭐 그런  관광객 등산객 또 그런 무슨 천막 캠프 생활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가 보면 산마다 구석구석에 천막 쳐 놓고 모두 그렇게 더위를 피해서  피서의 그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기도원에도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많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그저 피서에 자기의, 참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거와 같은 꼭 그런  성격의 것을 한다고 하면은 반드시 갔다 와 가지고는 믿음이 타락할 것이요  손해를 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꼭 다른 것을 한다는 걸 생각해야 될 겁니다.

그와 꼭 다른 것. 우리는 기도하러 산에 가서. 자기가 벌써 자기 직책을 쉬고, 이  세상에서는 보니까 대구 집회, 거창 집회 찍해야 열흘 간인데 열흘 간 그거 오  일간씩 휴가를 맡는다는 것도, 일년에 열흘 동안 두 차례로 오 일씩 휴가 맡는  그것도 휴가 맡을라고 얼마나 힘을 쓰고 봐서 휴가 맡을라면 흠점이 없이 이렇게  해야 휴가를 맡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직책 받았기 때문에 중대한  직책입니다.

 이러니까, 휴가 맡아 가지고서 가서 하는 것이, 기도하러 갈 때에는 반드시  원한적인 기도 제목이 있어서 가야 합니다. 원한적인 기도 제목, '나는 이게  아니면 내가 죽는다. 이게 절단나면 내가 살고 이걸 멸하지 못한다면 내가 죽는다'  이렇게 원한적인 전투의, 원수로 더불어 전투하는 원한적인 이런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휴가를 맡아 가지고 가야 되지 아무 그런 것도  없는데 '요새 덥고 하니까 심심하니까 어데 경치 좋고 물 좋고-그런 데. 공기  좋은 데 가 가지고서 얼마 동안 좀 재미를 누려야 되겠다' 그런 생각 가지고  가면은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가서, 나는 그라요 '기도하지 말고, 기도하지 말고  가만히 누웠다가 오니라' 나는 그라는 사람 있어. 왜? 그 사람이 죽도록  충성했으니까 벌써 지나쳐 가지고서 곧 발병될, 병이 날 발병 직전에 있는 사람은  '너는 가 가지고 기도할라고 애쓰지 말고 가만히 공기 좋은 데 가서 누워  가지고서. 이제 네가 지나쳐서, 병으로 바로 발생할 터이니까 병이 발생되기 전에  네가 그 피곤을 풀고 그렇게 오라' 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있고,  이번에 모두 가는, 기도하러 가는 분 가운데도 남권찰 가운데도 제가 아는 대로  그런 분도 있고 그런 분 있습니다. 그런 분도 있고. 내가 보기에 그분은 뭐  그렇게 피곤 풀기 위해서라도 가야 되겠다 그런 분은 없고, 그분은 기도의  원한적인 제목이 뭐 있는가. 그것도 가지지 안하고 공연히 놀러가는 사람인가  그렇게 남권찰과 여권찰 가운데서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한적인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원한적인 기도 제목이 없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그것을 제가 원한적으로 뼈아프게 느껴서 마음에 느끼지  안하는 그런 기도 가지고 하나님이 듣지 안하십니다. '내가 밤낮 구하는 자에게  너희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원한을 풀어주지, 원한 아닌 것을 그저  잠꼬대하듯이 놀기 삼아 슬슬, 저는, 제가 해도 할 수 있는 저는 하도 안하고  하나님 앞에 심부름시키는 것으로 '이거 내가, 이거 하시오. 하나님 이거 해  주시오 저거 해 주시오' 이렇게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이 듣지 않습니다.

 기적을, 표적을 나타내는 것은 믿음이 어릴 때에는 그저 잠꼬대라. 기도하라  하는데 '공연히 기도 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정말로 기도하면 되는가 보자'  '이 병 낫게 해 주옵소서' 그래 척 나았습니다. '아이구, 하나님이 참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그렇게 아주 잠꼬대 같은 그런 기도라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은 그게 하나님을 모르는 때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는 기도하는 제목이  아무나 따나 하는 그런 걸로 기도 안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자기가  힘을 다 들여서라도 해결 지울라고 힘을 다 들이기까지 하면서도 그 일이  해결되지 안하는 그 일을 하나님께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기도라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일 학년 기도와 장성한 자의 기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 서머나 교회는 잘 믿는 교회인데 환난도 있고 가난도  있습니다. 환난도 가난도 있는데, 실은 네가 가난이 아니라 네가 부자다 그 말은  이 환난을 인해서. 육적 환난을 인해서 신령한 면으로 축복을 주고, 네 모든  어려움을 인해서 네가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실상은 네가 부요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다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녜, 기도록에 등록된 사람은 육천 육백 사십 명이 등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권사님들은 세 분이 기도하고, ○○○ 권사님은 병이 나기 전에 내가 몇 번  말했습니다. '병난다.' 이번에 천막 치러 갈 때에도 '천막 치러 가지 마라. 이번에  가면 꼭 병난다' 이랬는데, 벌써 보기에 지나쳐서 이라다가서 병이 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병이 나니까 거기 가서, 저 장생골 가 가지고 누워서 빨리 일어나면  싶어서 약도 먹고 뭐 침쟁이도 데려다가 뭐 주사도 맞고 오만 일을 다 합니다.

 그래 내가 가 가지고 '절대 안 된다. 침 맞으면 점점 더하다. 그때는 좋은 것  같지만 뒤에 더하다.' 암말도 마라 하고 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이게 완전히  회복될라면 여섯 달 누웠어야 된나.' 여섯 달 누웠어야 되는데, 엊저녘에 내가  거기 심방을 가니까, 이제까지 한 번도 안 갔는데 엊저녁에 가니까, '가야 되겠다.'  가 봐야 되겠다는 그런 게 내게 느껴져서 가니까, 이제 두 주간만 더 있으면 거의  회복된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고 말했습니다. '두 주간 더 가면  회복되는 게 아니고 육 개월 있어야 된다, 육 개월. 육 개월 돼야 완전히 회복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암말도 말고 하나님 앞에 조절하지 안한 죄를 회개하고  가만히 누워서, 누워서, 누워서 일을 하라. 누워서 일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왜? 우리는 성령으로 하기 때문에 제가 뭐 고기덩어리로 왔다 갔다 하는  것 보다 누워서 심령으로 기도하고 심령으로 일하고 성령을 힘입어 일하면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안심하고 누우라 했는데, 이제는 다른 것 다 해 봐도 안되고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누웠어야 된다 합디다.' 이거 내 말 가지고는 안 들어, 내  말 가지고는. 목사님은 그래 말하지마는 그 의사가 말하기를, '가만히 누웠으면  회복되지 다른 약 암만 써도 안 됩니다. 가만히 누웠어야 됩니다.' 의사가 한다고,  의사가 하니까 의사 말은 백 프로 믿는지 팔 십 프로 믿는지 그래도 내 말은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뭐 다른 말은 순종하지마는 그 쉽게 백 프로나 믿을 게 뭐  있는가' 이라는데 '의사도 그렇게 말합디다' 하는데, 그 의사 말 듣고 누웠지 내가  누웠으라 해서 가만히 주사 안 맞고 침 안 맞고 그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나,  실은 믿음의 사람들이 의사 저거 보담 훨씬 더 압니다. 모든 걸 더 알고 있어.

먼저 앞서 알고 있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거는 몰라도 그래도 으례 짐작해도  다 안다 그거요.

 그런 사람들은 어데든지 좀 가서 좀 쉬어야 돼요. 쉬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지마는. 또 이제 이번에 기도하러 가는 가운데에서도 거기 가서  쉬어야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자기는 원한적인 기도를 가지고  가서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있겠고 또 처음에는 잘못  생각하고 실은 놀러, 바람 빼러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나, 남  따라서, 눈먼 망아지 원앙소리 따라간다고 그래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지 가 가지고, 요번에 처음에는 어째 갔든지 가 가지고는 그 자리에서  원한적인 기도 제목을 붙들어 가지고 원한 적인 기도 제목을 붙들어서 그 원한을  한 가지나 두 가지나 해결을 짓고 온다면 우리 교회도 수입이요 본인도 수입이  크게 될 것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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