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참 자기를 찾을 것

 

1979. 12. 16. 주일 오전

 

본문 : 이사야 58장 13절∼14절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금년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듣고 놀랄만치 각각 자기대로 보이는 축복을  받는 해로 정하고 그 방편인 믿음을 지켜보자 하는 것을 우리가 다  약속했었습니다. 금년이 거의 다 지나가는 가운데에 달성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미달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정반대로 실패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바로 아는 것은 영생이요, 잘못 아는 것은 사망입니다.

 이 세상에는 현재와 영원의 사망이, 화와 복이, 화복이 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화복과 영원한 화복이 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화를 만날  때에 슬퍼하고 복을 만날 때에 기뻐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화와 복을 만났을 때에 화는 싫어하고 복은 기뻐하는 여기서만 머물지  말고 여기서 한 걸음 더 진보적으로 나아가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만난 그 복의 종류의 것이나 화의 종류의 것, 그것이 언제든지  변함없이 고정적으로 되어 있는 것 아닙니다. 원하는 복도 번개같이 달아나는 수  있고 싫어하는 화도 오는 것도 번개와 같고 가는 것도 번개 같습니다. 복이나  화가 오기도 잠깐 오고 가기도 잠깐 갑니다.

 그러기에 현재 자기가 가지게 된 화와 복 그것을 바로 평가해서 화는 싫어하고  복을 좋아하는 그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행동의 가함에 따라서 화가  무한한 복의 원인도 될 수 있고 그 화가 현재보다 극히 큰 화로 또 바꾸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화나 복 그것만을 화는 싫다, 복은 좋다.

이렇게만 단순히 가지고 있지 말고 좋은 복에다가 내 행동을 어떻게 거기에  가하느냐? 원치 아니하는 이 화에다 내 행동을 어떻게 가하느냐? 하는 이면을 더  힘쓰고 주의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온 것은 와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지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어떻게  큰 화를 만났을지라도 그 화가 변하여 큰 축복도 될 수 있습니다. 또 그 화가  잘못하면 더 큰 화로, 긴 화로 변해질 수도 있습니다.

 복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구비한 좋은 복을 가졌다 할지라도 거기 대해서 내가  행동을 어떻게 보태느냐? 그 행복에 행동을 가하는, 보태는 데 따라서 그  행동으로 인하여 구비한 축복이 구비한 화도 될 수 있고 큰 화도 될 수 있고  구비한 축복이 그것만 보존될 것이 아니라 더 큰 축복으로 구비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당면한 화와 복에 대해서 어떻게 네가 행동해서  거기에 가할 것이냐 하는데 대한 것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 행동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 방편을 주신 것이 간추려서 말하면 십계명입니다. 열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가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요, 나머지 여섯  가지는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 주신 계명은 우리가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고 복을 유지되게 할 수 있고  작은 복을 큰 복으로, 일시의 복을 영원한 복으로 바꿀 수도 있고 화를 제거할  수도 있고 큰 화를 예방할 수도 있고 하는 법칙으로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법칙을 "영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한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말씀인데 아버지의 말씀은 영생이니라." 말씀하셨고,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투쟁을 이 말씀으로 투쟁했습니다. 이 말씀 하나  지키는 것으로 모든 투쟁, 모든 건설, 모든 보존, 이렇게 삼으셨는고로 예수님의  그 하신 일이나 행위나 자체에 조그만한 부스러기 하나도 남은 것 없이 전부는  이 계명 순종으로 끝을 갖추었습니다.

 이 계명은 열 가지 계명이 있어 그 가치적 순위로 일계명으로부터 십계명까지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넷째 계명이  중심입니다. 넷째 계명을 중매 계명이라 이렇게 할 수 있고 중심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여기에서  일계명으로부터 열계명까지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체의 실력과 또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  계명 가운데에 넷째 계명이 중심되는 계명이며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소개적 계명이요, 시발적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 가지 잘 알아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안식일이 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안식일이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인생에게 준  안식일이 따로 있습니다.

 안식일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축복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음받은 것들이 이 두 가지 축복을 받아야 그것이 복되지 이 두 가지 축복을  받지 못하면 복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복되게 하시려고  이것을 주는 날을 정하여서 안식일이라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은 거룩케 하는 복과 모든 복을 받는, 이 두 가지를 받는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체가 거룩하게 변화를 받는, 성화를 받는 날이요. 자체가 거룩하게  성화를 받는 날이요. 안식일은 자체가 거룩하게 성화를 받는 날이요, 또 모든  축복이 되는 하나님의 계약을 받는 날입니다. 말씀을 받는 날입니다.

 말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온갖 축복 그 실상이기 때문에 말씀 따로 있고 축복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말씀 그대로 하면 축복이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축복을 말씀 속에다 넣어줬기 때문에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차지하고 보니까 축복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모든  소망하는 것을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러면 지금은 안식일은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토요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느냐 하는 여기 대한 의문을 똑똑히 해결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일차창조의 것을 다 창조하시고 이것들을 성화  받고 그들에게 필요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정한 날이 안식입니다. 안식일은  일차창조의 것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은, 일차창조의 것은 다 변동될 것들이요, 이것은 온전치 못한 것들인데  일차창조의 것을 영원불변의 완전의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 창조하신 십자가의  구속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진동될 것들을 폐하고 진동치 아니할 것들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대형하셨고 대행하셨고 하나님과 완전 결합을 이루신  이것은 택한 자들을 대신해서 완전히 대속의 행위를 이루셔서 아무 공로 없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죄가 없다, 의롭다, 하나님과 화친의 이 관계를 맺은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완전 창조, 신령한 창조, 무궁한 창조, 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산 자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창조의 성화와 복을 받는 날은 안식일이요, 일차창조의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들인데 이차창조의 것, 곧 둘째 아담에게 속한 것들은 주일날  성화와 복을 받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차창조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요, 이차창조의 안식일은 일요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날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사람으로만 이렇게 만들었는가  오인하기 쉽습니다.

 지금 이 안식일을 주장하는 교파가 있습니다. 안식교입니다. 안식교는 모든  정통교들이 다 안식교를 이단교라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단교입니다.

전체가 성경에 위반되고 다만 안식일 하나만 가지고 주장을 합니다. 안식일  지키면 구원 얻고 안 지키면 구원은 없다고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 안식일을 폐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절기, 월삭, 안식일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 주일의 그림자라  말이요. 주일은 실상이요, 안식일은 그것의 그림자요, 하나의 예표라. 그러기에  구약 성도들이 이 주일이 아니면 그들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대표로 자던 성인들이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이래서 "안식과  짐승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인간을 깨끗케 하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라"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9절에 "첫 것을 안식, 월삭, 절기, 짐승으로 제사드려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 드리는 이 첫 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안식일을 폐하는 것은 주일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렇게 똑똑히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니라"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더 똑똑히 말씀했습니다. 첫째 안식일로서는 인간들이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 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로 정해서 이날을 구원 얻는 날로 주실 때에는 너희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겸손히 복종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그 날짜는 변경이 됐고 그 지키는 진리는 폐했다고, 변했다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짜는 변경됐고 안식일을 지키던 그 이치대로 그  법리대로 주일을 지키면 됩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움싹이요, 종자요, 중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주일날 자신이 성화를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어떤  기회로 성화받는 일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선포해 놓으신 것은  주일날 성화받습니다. 주일날 자신이 변화를 받습니다. 어떤 집회에 참석하는  일, 또 어떤 기회를 개적으로는 만나는 그런 일도 있지만 그거는 희귀한 일이고  일반적 성도는 주일날 자신이 성화를 받고 또 주일날 자기에게 필요있는 복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시는 그것이 뭐이냐 막바로 주일날 자신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일날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천 사람, 만 사람에게 해당 된 것을  설교하지 못합니다. 몇 사람에게 해당된 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한 사람에게도 해당이 안되는 설교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님께서  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한 사람에게도 그 설교로서는 맞지 아니하고  예비적으로 교훈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러나 설교하는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각자에게 감동시켜서  각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변화 받게 하신 그 변화를 그 예배 시간에 받고  변화를 받은 자에게는 성령님이 각자에게 직접 그에게 설교를 인하여 자기  개적으로, 개별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설교는 예를 들어서 하라는 것을 설교를 할 때에 개적으로 그에게 급하게  당면된 문제는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문제기 때문에 설교는 하라는  것을 설교 했는데 이 사람은 거기서 '아,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나는 어떤 것을  안 해야되겠구나.' 안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강단에서 '이런  죄를 짓지 말아라' 이렇게 설교 할 때에, 개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어떤 자에게는  "너는 이 의를 행해라" 이렇게 정반대로 감동시켜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이 주일날 잊어버렸던 참자기를 이 주일날 찾지 못하면 다른  날은 절대 못 찾습니다. 이 주일날 찾아야 됩니다. 자기 속에 참사람, 자기를  망치는 자기 아닌 옛사람, 죄악의 사람, 의의 자기. 죄악의 자기, 의에 자기  있는데 다 사람들은 자기를 의의 자기인 줄 알고 자기를 누구보다도 신봉해서  자기에게 따라 살면 자기에게 유익될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인생이  자기를 따라서 산 그것이 죄요, 그것으로 망했습니다. 한 말로 말하면 인간을  망친 자가 누구뇨? 자기입니다. 인간의 원수가 누구뇨? 자기입니다.

 자기 안 면을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는 자기가 못 보지만 자기가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잘 보일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 자기가 자기를 망친다. 저  교만이 망친다. 저 욕심이 망친다. 저 성질이 망친다. 저 지식이 망친다. 저  재물이 망친다. 전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제 자신을 망친다 하는  것으로 환하게 건너다 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망치는 자가 자기라" 그러기에 "스스로  속지 말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자기를 멸망가운데 빠뜨리지 말라."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 수단 방법 그거 가지고 쓰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됐는데, 이 주일은  영원히 썩지 안하고 변하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낡아지지 아니할 완전한  자기로 변화를 받는 날이요, 완전한 복을 영감의 깨달음으로 받는 날이라.

그러기에 한 사람이 강단에서 하나님이 세워가지고 설교를 할 때에 거기서 수만  수천, 몇이든지 하나님의 계약을 의존하는 자는 거기서 썩지 아니할, 진동치  아니할 자로 변화를 받고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축복으로 깨달음과 영감으로  받습니다.

 첫째 안식일은 진동될 것들이 변화를 받고 진동될 것들의 축복을 받고,  주일날은 진동되지 아니할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 있는 이 자체로 성화를 받고,  자기에게 필요한 복을 받고,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치료의 약을 받고, 자기에게  제거되어야 할 모든 제거해야 할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그 지혜와 능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그러기에 주일을 바로 지키는 것은 어떤 게 바로 지키는 것이냐? 일을 하지  아니하는 그것도 주일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요, 예배당에 오는  것도 주일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요. 예배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주일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 조건을 갖추는 것이요.

 주일을 바로 지키는 것은 무엇이냐? 여기 왔든지 안 왔든지 주일은 주일입니다.

여기 참석을 해서도 주일이요, 집에 있어도 주일입니다. 어쨌든 주일은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생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의 공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이  공로를 실질적으로 입어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삼 일 만에 다시 신인양성일위를  입으시고 부활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을 바로 지키는 것은 자신이 성화를 받는 것이요, 다시  말하면 참자기를 찾는 날이요. 자기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받는 날이요, 영감을  받는 날이요. 이것이 주일을 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인생을 오늘까지 망쳐 나온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있는 자기 아닌 자기  그것이 자기가 되어가지고 소원하는 것도 그놈의 소원, 비판 평가하는 것도  그놈의 소원, 희로애락도 그놈의 희로애락, 순전히 이것이 되어가지고 예수 믿어  복받으려 하니까 어떻게 복이 있겠소?  예수 믿는 것은 그 자를 막바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 자의 행위를 절단을 내는  것입니다. 이 자가 호주가 되어 있으니, 이 자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으니, 이  자가 자기 주인되어 있는 그 자의 모든 행동이 자기 망치지 아니하고 뭐할  것이요? 이 자가 그 가정의 호주가 되어 가지고 있는데 그 가정을 망치지  아니하고 뭐하겠소?  그러므로 자기에게는, 자기를 완전히 이 세상을 망치는 세상으로, 자기 망치는  세상으로, 영원한 영광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 기회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은 이것 때문에 했는데 이 기회를 자기 망치는 일생으로 삼게 하는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 자기같지만 자기 아니라 그말이요. 이 자기가 자기에게 있고  자기를 금생과 영원에 복되도록 할라 하는 참자기, 영원한 자기, 이게 자기라.

 이 심신의, 내 마음과 고깃덩어리에 참 주인이 되어 있는 중생된 영, 참자기  이것이 자기에게 있으니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가장 자기를 미워하고 하나님과  함께 자기를 사랑하는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사망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늘 속에 있는 사람이요,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요. 받더라도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이날에 원수인 자기와 참자기를 찾으십시오. 이날에 찾지 못하면 다른 데서  찾지 못합니다. 이날에 못 찾으면 기회가 없는, 기회가 지나가는 멸망이라는 큰  환난 속에서 혹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수한 어떤 기회,  그런데서 찾을 수가 있으나 그런 기회는 많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자기와 자기, 두 자기를 찾는 날이 주일이요, 이걸 바로  찾아서야 주일을 바로 지킨 것이요. 이래서 가장 미운 자기요, 가장 귀중히  아껴야 될 자기요. 자기가 심신이 거기에 다 바쳐서 살아야 될 존귀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원수인 자기를 발견해서,  시편을 기록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시옵소서. 나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죄가 없는 자입니다. 말에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흠이 있는가?" 이게 누구입니다. 이것이  참자기를 지금 찾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옳고 깨끗한 자기가 자기 속에 있소. 이 사람은  소원도 하나님과 같고 욕심도 하나님과 같고 비판도 평가도 하나님과 같고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 속해 살고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고 하는 이  자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 삼 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이러므로 주일날 자기와 자기를 찾아서 '아, 아무것이를 내가 원수로  삼았더니만 원수를 삼은 그 자는 참 내가 아니고 원수인 나 그놈이구나. 지금  내가 참 나를 찾고 보니까 그 사람이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은인이로구나.

나를 이렇게 공중까지 치켜 올렸는데 나는 그 사람을 은인으로 알았는데 그럴 때  좋아하던 그놈은 참 나가 아니고 원수인 내로구나. 그 사람이 나를 망친  사람이로구나. 그것도 옛사람이로구나. 내 안에 있는 원수와 같은  사람이로구나.' 이것을 깨달아서 주일날 참자기와 거짓된 자기를 찾고, 참자기를  응원하는 사람과 말과 행동을 찾고, 자기를 망치는 자기를 협조하고 함께 해서  공동으로 협동해서 자기를 망치는 원수가 무엇이다 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세상에 화다. 복이다 하는 것들 겁내지 마십시오! 어떤 화라도 내가  거기에 가공을 하느냐가 문제요. 그 화에 내 행동만 바로하면 화가 지극히 큰  복도 될 수 있소! 세상이 부러워하는 어떤 행복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내 행동만  잘못 가하면 그 행복이 지극히 큰 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에  당면한 화와 복을 보고서 기뻐하고 슬퍼하지 말라. 거기 대한 너희의 행동이  어찌 됐나 하느냐가 문제다. 네가 어떻게 가공을 하느냐가 문제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올바른 가공을 하는 거기 대해서 하나님이 계명주신대로의 이  법칙대로 따라 움직이면 그것은 지극히 큰 상도 될 수 있고 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첫 안식일보다 귀한 둘째 안식, 주님이 주신 날. 주의 날이라  하면 주님이 주신 날이라 그말입니다. 이 주일은 우리가 참자기와 원수인 자기를  찾아서 '보자, 내가 이제까지의 희로애락을 했던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했던 이게 대체 무엇이냐? 옛사람이 그렇게 했더냐? 새사람이 그렇게  했더냐? 내 기쁨이 정말로 새사람의 기쁨이냐? 내 슬픔이 정말로 새사람의  슬픔이냐?'  이것을 이날에 가려서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참자기를 찾고, 자기에게 참  원인을 찾고, 자기에게 복된 말을 찾고, 해되는 말을 찾고, 불의한 친구를 찾고,  자기가 원해야 될 것을 바로 찾고, 잘못 원한 것을 버리고, 이렇게 해서 자체의  변화를 이날에 받아야 되지 이날에 받지 못하고,  자기를 망치기 위해서 자기같지만 그 속에는 마귀가 들었소. 그속에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란 게 들었소. 이제까지 죄만 짓던 그 더러운 습성이  그 속에 들었소. 이것으로 뭉쳐있는 자기, 이것을 자기로 삼아가지고 그 자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멸망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요. 그자가 큰 것은 멸망이  커지는 것인데 이것을 변화받지 안하고 무슨 좋은 날을 보려고 무슨 생명을  보려고 우리가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찾아야 됩니다. 자기를 찾을 때에 자기  생활과 자기 망치는 생활을 구별하게 됩니다. 자기 할 일과 자기 안 할 일을  구별하게 됩니다.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자기부터 찾아놔야 모든  비판과 평가가 바로 되지 자기가 잘못된데에 그다음에 모든 것이 잘못되지  어떻게 잘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주일날 자기 찾지 못하면 찾을 기회는 없습니다. 주일날 찾지 못하는 자가 돈  속에서, 욕심 속에서, 악인들 속에서, 악령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령이  미혹시키는 그 미혹에 빠져서 빈틈없이 정신 차릴 수 없는데 거기서 어떻게  파묻어 놓은 자기를 찾겠소? 자기같이 감쪽같이 변장해서 나와 가지고 자기를  오늘까지 다스리고 있는 그놈을 어떻게 원수인 줄 알겠소? 성령 앞에서  찾으십시오. 성령 앞에서 지금 찾으십시오. 바로 지금 찾아야 됩니다.

 '아, 아무것이하고 말했던 그 나는 이것이 참 내냐, 옛사람 내냐? 과연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담대히 설 내냐? 이 내가 하나님 앞에 정죄 받을 내냐?  그자가 소원한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이냐? 멸망할 것이  아니냐? 내가 지금 분주 복잡한 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분주 복잡한 것이냐? 내가  이것은 귀하고 천하다고 평가한 이것이 누구의 평가이냐?' 이것을 여기서 찾아서  자기를 해결지워 원수 자기를 판정하여 원수로 삼아 물리치고 참자기를 찾아  자기가 되어지고 나면,  그러고 난다음에 하나님이 막바로, 그게 돈이요. 하나님께서 돈에 대해서 바로  깨닫게 하는 그게 막바로 돈이요. 권세에 대해서 바로 깨닫게 하시면 막바로  그게 권세요. 멸망에 대해서 바로 깨달은 바로 그것이 멸망을 벗는 것이요.

 이외에는 없습니다!! 다른데 없어!! 주를 바라보는 자는 수치를 보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비천하게 이렇게 허덕거리고 있습니까? 왜 해도 안됩니까? 하나님의  원수인 옛사람으로 사는데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어찌 가겠소? 하나님의  원수가 일하는데 그의 일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일에 동행할 수가 있겠소?  자기가 자기 아닌 것으로 자기가 삐뚤어졌지. 지식이 삐뚤어졌지. 이러니까  소원도 욕심도 삐뚤어졌지. 생각도 삐뚤어졌지. 비판도 삐뚤어졌지. 방편도  삐뚤어졌지. 행동도 삐뚤어졌지 이러니까 삐뚤어진 결실외에는 뭐 있을 게  있습니까?  여러분들, 보이는 거 컸다고 자랑하지 맙시다. 성공같은 실패있습니다.

실패같은 성공 있소. 홍포입은 부자가 성공했지만 그는 완전히 실패자입니다.

나사로는 실패같았지만 그는 성공자요. 영원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영광과 존귀에 하늘의 것이 비추어 오고 있는 세상이요.

무한한 사망과 고통이 지옥의 것이 비추어 오고 있는 이 둘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화의 움싹이 와서 모여가지고 섞여 있는 것이  세상이요. 보이는 행복이 좋습니까? 무한한 행복이 있습니다. 보이는 고통이  있습니까? 무한한 고통이 있습니다.

 이러기에 보이는 것을 인해서 보이지 않는 무한한 발견하고 보이는 이것만으로  상대하지 말고 보이는 이것을 인해서 무한한 것을 상대해서 영원한 가난을 벗기  위해서 살고, 영원한 고통을 벗기 위해서 살고, 영원한 존영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이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한다. 믿음으로 행한다." 하나님이 이거 좋다하신 그대로  그거보고 행하요.

 그러므로 오늘 자신이 자신과 자신을 구별해서 참자기를 찾아 이 자기를 가지고  이 참자기가 힘을 얻고,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를 미워서 이놈을 죽이고 이놈을  꺽고 이놈이 원수다 하는 간판을 똑똑히 써붙여 놓고 '아무것이하고 얘기할 때  그때 그놈은 내 원수인 그놈이구나. 아무데서 말할 때에, 아무데서 기뻐할 때에,  어떻게 생각한, 어떤 방편을 쓴, 어떤 노력을 한 그놈은 내가 아니라 내 원수인  그놈이구나.' 그놈을 여기서 간판을 똑똑히 붙여서 원수로 삼고,  새사람, 참사람 자기가 이 자리에서 힘을 얻어 이 자기가 마음도 복종시키고  몸도 복종시켜 이 자리에 내 마음과 몸이, '참 나 여기에 복종하겠다. 내  주인공인 산 영, 참사람 나, 이대로의 내가, 마음은 이 사람에게 내가 쓰이겠다.

내 마음은 이 사람에게 쓰여지겠다. 내 몸은 이 사람에게 쓰여지겠다. 이  사람대로의 마음으로, 이 사람대로의 몸으로, 이 사람대로의 행동으로, 이  사람대로의 생활로, 이렇게 살겠다.' 하는 것을 단정지우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깨달음이 나올 것이요 이 설교를 할 때 각각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깨달아질  것이요. 깨달아지는 그것을 받으십시오! 막바로 그것이 여러분들이 원치 안하는  화를 다 피하는 치료제요! 막바로 그것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행복 그  자체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외에 사는 길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들이 지꺼려도 노아 홍수 때에 홍수에  매장 당하는 그런 운동과 같은 것들이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다 멸망이요. 더  큰 것 작은 것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숫자도 상관이 없소. 많고 적은 것이  상관이 없소.

 이 시간 찾읍시다. 이 시간에 자기를 찾지 못하면 헛일이요. 이 시간에 찾아서  미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이 시간에 그자로 살았던 것이  괘씸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찾는 사람이 복이 있소.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자기에게 깨닫게 해주시면 '나는 이것을 행해야겠다. 이것을  버려야겠다.' 이것이 막바로 행복이요. 막바로 화를 벗는 그것이요.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096 주일날/ 마태복음 28장 1절-7절/ 1988. 08. 21.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7
1095 주일날의 유래와 법칙/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1986. 10. 19.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7
1094 주일날의 은혜/ 요한계시록 1장 10절-16절/ 1985. 5. 12.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7
1093 주일날의 은혜/ 요한계시록 1장 10절-13절/ 1983. 11. 9.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27
1092 주일성수/ 요한일서 5장 8절-9절/ 1985. 5. 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91 주일성수 7가지, 4계명/ 출애굽기 34장 27절-34절/ 1983. 4. 17.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1090 주일심방/ 요한복음 14장 12절-15절/ 1984. 2. 12.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89 주일에 대해서/ 로마서 8장30절-39절/ 1982. 7. 11.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1088 주일에 부활받아/ 베드로전서 1장 3절-12절/ 1981. 10. 11.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1087 주일의 법칙/ 시편 23장 1절-6절/ 1984. 6. 4.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1086 주일의 유래,은혜,준비/ 히브리서 4장 4절-11절/ 1983. 11. 9.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1085 주일의 은혜/ 요한계시록 1장 9절-12절/ 1983. 11. 6.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1084 주일의 은혜/ 요한계시록 1장 9절-20절/ 1983. 11. 6.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1083 주일준비와 받을 은혜/ 사도행전 2장 1절-4절/ 1987. 6. 14.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 주일-참 자기를 찾을 것/ 이사야 58장 13절-14절/ 1979. 12. 16.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1081 주일학교/ 야고보서 5장 16절-18절/ 1987. 11. 1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80 주일학교 공과 가르치는 요령/ 출애굽기 20장 12절/ 1987. 3. 1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79 주일학교 일군들을 위한 기도/ 고린도전서 15장 33절-34절 상반절/ 1988. 10. 9.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78 주일학교에 대해 기도할 대상/ 고린도전서 15장 32절-34절/ 1988. 9. 2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077 주일학생 교통사고/ 히브리서 12장 2절/ 1983. 11. 28. 월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