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의 은혜

 

1983. 11. 6. 주후.

 

본문 : 계 1:9-12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여기 9절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렇게 표시한 것은 사도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게 아니고 성령님께서 기록하라 하는 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나 우리나 타락한 것이, 꼭 같고,  부패성이 꼭 같고, 마귀도 꼭 같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입은 것도 꼭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라고 특수 인물이 아니고 우리와 꼭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타락도 같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입은 것도 같고, 또 소망도 꼭  같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책임과 의무와 본분도 꼭 같고 건설구원을 이루는  방편도 꼭 같은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악령은 우리를 와서 미혹시켜 가지고 '그는 사도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  우리는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미혹하는 그런 미혹을 다 제거하기  위해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여기 형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다른 데는  아무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하는 것은 뭐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까 싶어 그런 것 아니고 이제 말한 대로 이 면에 대해서 꼭  같은 자이니 동감을 가져야 되고, 또 동역을 가져야 되고, 또 같은 방편으로,  같은 노력으로 같은 소망을 이루어 가야 할 자이지 사도 요한과 우리와의 좀  거기에는 하나님이 좀 박하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후하게 하시고, 거기에는 또  어렵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쉽게 하시고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꼭 동질이요, 동향이요, 동등 동방편, 또 동등의 능력입니다. 우리 속에도  지극히 큰 능력이 와 있고 사도 요한도 그 속에 그 능력 가지고 일했지 딴것  가지고 일하지를 안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신구약 성경은 엘리야  선지자만이 그런 의무 책임 있는 것 아니고 우리도 엘리야나 같은, 또 이사야와  같은, 사도들과 같은 그런 사람들과 같은 꼭 같은 가본구원 얻었고 꼭 같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꼭 같은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가 '누가 성경대로 다 살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런 말은 그것은 잘못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가 성경과 꼭 같이 살아서 우리들이 정확무오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에 에누리해서 하신 것 아닙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피공로가 있고 피공로를 인한 성령과 진리가 있기 때문에  정확무오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무엇으로써 증거가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선지  사도들을 통해서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영감으로 된 그 성경은  정확무오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것은 성신의 감화 감동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인간이 기록했는데  그는 털끝만치도 잘못됨이 없고 다 정확무오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사람을  붙들고 역사하시면 정확무오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성경으로 다 보여 줬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다 우리가 지켜 행하여야 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요, 의무요, 책임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겼으면 우리는 강퍅과 망령을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회개해서 주님 앞에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율법 중에 하나라도 범하고 그와 같이  가르치는 자는 하늘에서 적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이 말씀대로 다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능한 것을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고, 거룩하심 같고,  그리스도와 같이 깨끗하라."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 행해야 됩니다. 못  행했으면 죄라고 사죄함을 우리가 구해야 되겠습니다. 행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 정죄하기 위해서 그런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 지키지 아니 하고 이를 가르친 사람은 천국에 적다고  말한 것은 다 지키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그 말씀인 것입니다.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의 환난" 예수의  환난은 어떤 것이 예수의 환난인가? 예수의 환난은 예수님은 죄 문제로 환난을  받았고, 또 불의 문제로 환난을 받았습니다. 죄 문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죄인데 죄 문제로 사형을 받았고 또 불의는 자기 인간 주장대로 한 것이  불의인데 불의의 값으로 사형을 받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이 값으로 예수님은  사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 가지 종류의 범죄로 인해서 그  잘못된 형을 예수님이 대신 사형 받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내적 죽음은 무슨 죽임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다 지키기 위해서 죽임을 받았습니다. 다 지키려고 함으로써 죽임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당신으로 움직이지 안하고 순전히 보내신 아버지로 인해서만  움직이려고 하는 이의 때문에 죽임을 받았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마귀가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 영광을 다 보이면서  '내게 절 한번 하라'할 때에 그것만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안하고 고거 하나만  독단 행위를 했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습니다. 또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할 때에 아버지의 명령이 없는 독단 행위로 성전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면 예수님은 죽임을 받지 않습니다. 그만하면 다 됐어. 그만하면 죄인됐고  그만하면 영원한 사 망이 되어서 악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안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환난을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지 말라고 할 때에 아버지 명령을 지키지 안한 우리  죄값을 우리 값으로써 죽임을 받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느라고 죽임 받았고,  또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인간 자율대로 움직인 그 불의 때문에 주님이 죽임  받았고 주님은 우리 대신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자율적인 자주적인 그런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고 완전히 순종 행동만 하시기 위해서 죽임을 받은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그 값으로 죽임받고 이제는 주님은 세상이  어떻게 달래고 꾀우고 협박을 해도 아버지를 배반치 안하고 아버지를 섬겨  지성에 만족하도록 하는 것으로 죽임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환난은 이 세 가지  환난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주님이 사죄 주신 이 사죄를 보수하기  위해서, 그런고로 죄로 더불어 싸우는 환난입니다.

 또 이제는 환경이 몰아쳐 가지고 내 마음대로, 인간의 마음대로, 사람 좋게  하는 그 일을 하면 문제가 없겠는데 순전히 하나님으로 안해서만 사는 이것으로  인해서 당하는 환난이 예수님으로 인한 예수의 환난입니다.

 또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만 섬겨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 모시고  사는 이것 때문에 당하는 그 환난이 예수의 환난입니다.

 이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자라. 예수님이 나 대신 환난 받으신 그 환난에 나도  동참한 자라. '너희 형제라 그말은 너희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늘나라,  세상이 좋다 해도 그까짓 거야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것이기에. 무한한 생명과  평강과 진리가 충만한 그 나라에 우리가 구원 얻었는데 그 나라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지니라' 하는  것을 사도행전 14장 이하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한 자라" 우리도 이 세 가지 때문에, 하나님  배반치 아니하려고 함으로써 당하는 환난을 우리가 다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 같은 꼭 같은 의무가 있는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배반치 않기 위한  환난, 어떤 인간들이나 피조물이나 내 마음대로 하지 않기 위해, 피조물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순전히 주님에게 피동되는 이 피동되는 이것만 하려고 함으로  인한 환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함으로 인한 환난 이것이 예수의 환난인데 이 환난을 우리도 꼭 같이 겪어야  됩니다.

 이 환난 겪는 사람은 그 사람은 세상에서 자연히 외로워질 것이요, 고독해질  것이요, 또 아무리 세상에 들어붙어서 세상을 좋게 하려고 해도 예수의 이  걸음을 따라가면 자연히 세상이 마다합니다. 세상이 마다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환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난을 평소에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은 주일이 참으로 고대될 것이요  주일을 만날 때는 한없는 기쁨과 평강의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하고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오랑캐입니다.

세상하고 하나되어 사니까 세상하고 하나돼 가지고서 재미있게 사는데 하나님의  계명이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원수입니다. 예수님이 원수입니다. 그런  자가 억지로 주일날 와 가지고서 그래 하니까 주일에는 잠이 오고 주일에는  싫습니다.

 사도 요한이가 이 주일을 만난 것은 예수의 환난, "나라에 동참한 자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나라를 바라봄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자기의 나라로 알고  그곳이 영주처인 것을 알고 그곳의 영주권, 그곳의 영주 행위를 위해서, 비록  땅에 계시지마는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서 하늘나라를 건설했습니다.

 "내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 이 세상 나라가 내 나라 같으면 나를 아무도  박해하지 안할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땅에 있지 안하고 하늘에 있는 진리의  나라가 내 나라기 때문에 내 군대는 세상에 없다." 말씀했습니다.

 "나라에 동참하는 자라" 그러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하늘나라 그 나라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금 동참해야 됩니다. 살기는 땅에서  다른 사람 보기에는 같이 땅에서 살지마는 같은 사탕 장사를 해도 그 사람은  하늘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 장로가 돼도 세상 사람으로  목사 장로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특색이 뭐인고 하니 하늘나라는 왕이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사탕 장사를 해도 사람 보기에는 사탕 장사지마는 속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절대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 보기에는 같은 사람이지마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으로 지금 사탕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나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 참음에, 이런 일을 하는데 이것이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상에 있는 날 동안은 그런 것이  계속하는데 아무리 지루하고 피곤해도 그 생활을 예수의 환난을 계속하고 예수의  나라의 생활을 계속하는, "참음에" 계속하는 그 계속에 동참한 자라.

 예수님께서 온갖 박해를 당했지마는 예수님은 참고 견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생활에서도 참고 견뎠고, 또 공생활에서도 참고 견뎠고  십자가상에서도 참고 견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그 생명을 부르실 때까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변동 없는 그 참음에 나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에 동참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계속되지 안하고 제 마음대로 시작했다가 제 마음대로 끝내면 상관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인내하신 그 인내에 동참하는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사는 사람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이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이 밧모섬은 사도  요한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보하지 안하고 말씀대로 주장을 하고, 밝히  주장합니다.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 모양으로 그렇게 믿으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영감을 어기지 안하고 살려고 이래 하니까 거기에서 이색돼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지마는 안 믿는 사람들의 핍박은 잠깐  갑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핍박하지마는 '그 사람이 그 참 이해 못 할 일은 못 할  일이지마는 저거가 믿는 신조와 교리대로 죽어도 그래 믿고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이 뭐 물질에도 그렇게, 물질도 상관 안 하고 생사도 상관하지 안하고  저거가 믿는 자기 신앙하는 자기 신조와 도리대로 믿는 사람을 우리가 장하게  보고 귀하게 보지 뭐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렇게 꼭 우리와 같이 살지 않는다고  그렇게 핍박할 게 있는가?' 해서 그런 사람은 별로 핍박하지 않습니다.

 꼭 거기에는 거짓 형제, 거짓 형제, 예수 믿으면서 세상, 성경 얼마든지 범하고  제 마음대로 예수 믿으면서 목사노릇 하고, 장로노릇 하고 신자노릇 하고 하는  그 사람이, 그 사람 때문에 저 가짜 예수 믿는 것이, 외식 예수꾼이, 제가 믿는  것은 성경적으로 믿지 않는 그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것이 들어나기 때문에  진실한 그 신앙가들을 박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외식자에게 박해를 당해서 순교를 당했지 이방인들에게 순교  당한 일은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당한 것도 애양원교회에 있는 그  교인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또 미움을 당하는 것도 어느 교회라도 미움당하는 것은 그 교회 거짓 형제,  외식하는 형제 그 형제에게 미움을 당하지 이방 사람들은 그렇게 뭐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잘 믿지 못하지마는 만일 내가 잘 믿는다고 하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방에 있을 것이 아니고 서부교회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우리는 이것이, 밧모섬으로 귀양  갔습니다. 사도지마는 '이 사람을 냅둬 가지고는 하나님의 교회 들이 아무래도  우리가 주장하는 대로 이렇게 따라오지를 안하겠고 이 교회의 교리와 신조를  바꾸지를 못하겠고 신앙 사상들을 바꾸지를 못하겠으니까 이 사람을 밧모섬으로  없애서 귀양 보내서 없애버려야 이 사람들을 다 우리 사상대로의 신앙을 만들  수가 있다' 해 가지고서 그때 교회가 서둘러 가지고 사도 요한이를 밧모섬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얼마 전에 ○목사님이 기독교신문이던가 또 복음 신문에 났다 하는데  '○○○목사는 선교학 박사를 받아 선교학 박사인데 그분이 와 가지고서  선교학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이렇게 이렇게 했다.'  하고서 ○목사님 사진을 박아 놓고서 거기에 강의한 내용을 기록했습디다.

 나는 그걸 전연히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저아레 양성원에 강의하러 가니까  거기에서 '이런 신문이 났습디다' 이래서 그런, 나는 눈이 어두워 보지는 못하고  '그러면 읽어 보시오' 이러니까 읽어 보는데 보니까 순전히 이용을 당했습니다.

 그래 내가 거기 말하기를 '○목사님이 공연히 크게 이용만 당했구만.' 이라고  말았는데,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한번 했습니다. '○목사님이 강의한 것은  자기네들 그 ○측인데, ○○○○○측인데 ○○○목사라고, 무슨 교회지?  ○○○교회. ○○○교회 목사님인데 그분이 그것을 내면서 ○목사님이 아니다.

그거다 비판하는 것은 다 빼 버리고 ○측이 세계의 선교를 추체적으로 했다,  세계 선교는 ○○○○○이 독단했다 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거짓말해서 남의  강의를 그렇게 뒤비트려서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도무지 인간의 양심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이의를 당할 일입니다.

 그렇게 해 놨는데 그것은 그분이 정통에 속한 신학자요 또 더군다나 욕은 많이  하지마는 우리 총공회에 교수로 있기 때문에 이제 그분들과는 거리 제일 먼 것이  총공희가 거리 제일 멉니다. 이래 가지고서 '이 목사가 이것을 강의했다' 이렇게  기록해서, 그 ○목사님이 그것을 보고서 '이제는 새로'한번 거석해 가지고  이것을 바로 수정을 해서 뒤비트려서 이거 바로 내가 강의한 대로 내야 되겠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말했습니다. '배암의 올무는 걸리면 자꾸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만 기어들 어가지 나오지 못한다 뭐한다고 거기 가서 강의를  했느냐? 그걸 바로 잡으려고 강의 하다가는 또 들어간다. 그러니까 아예 거기에  강의를 가지 말아라.' 이랬어.

 그래서 ○○○목사님도 미국에서 신학 하고 온 사람들이 많지마는 교리적으로  순서적으로 제일 단계적으로 이렇게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그 사람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깨끗한 박사입니다. 이랬는데 거기에도 다른 신학교에서 자꾸 강의해  달라고, 그 사모님도 여기 고려신학교에서 와서 강의해 달라고 이래서 갈까 말까  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기이한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함으로써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다른 선지 생도들과 같이 있었으면 엘리사가 고독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가 엘리야를 홀로 따라서 갔기 때문에 그는 고독했습니다.

 기독자가 아예 신앙 걸음을 걸으려고 하면 고독을 각오해야 됩니다. 외로운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고독을 각오해야 되지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이  사람 저 사람 사람 비위 다 맞추고는 절대 신앙생활을 못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우리가 하나님 다음으로는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지마는 하나님보다  앞세우지는 못합니다. 사람 때문에 진리를 양보할 수가 없고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예수님의 신부가 타고 오는 가마가 어디서 오는고 하니  거친 들판에서 온다 했어, 거친 들판에서 온다 했어. 광야에서 옵니다.

 성도의 생활은 광야 생활이라. 광야를 제가 찾아가서 광야 생활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버리지 안하려고 하니까 자연히 그  고독한 생활이 되어지고 아무런 세상에서는 무의무탁이 되어지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법칙만 바라보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각오하고 그 걸음을 걸어야 되지 언제든지 타협주의로 사람 좋게  하려 하면 하나님 좋게 못 합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네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둘 중에 하나 어느 것이냐? 사람을 좋게 하면 하나님의  종은 아니니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었는데 '주의 날에' 주의 날, 주의 날이라 말은 이  주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는 일요일이라 말 쓰지 말고 주일이 라고 씁시다.

이번에 ○목사님이, 뭐꼬? 충청도 무슨 교회지? 그 교회 갔다 와 가지고서 '너  뭐 보이는 것 없더냐?' 이러니까 거기에는 주일이라 하는 사람 하나도 없고 모두  다 일요일 일요일 다 하더라고. 그래 가르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일이라고  해야 됩니다. 주일.

 일요일은 일요일은 이 세상 이방신을 섬기는 미신을 섬기는 거기에서 미신의 그  신을 섬기는 그 날짜로 정한 것입니다. 해신 섬긴다고 일요일, 불신 섬긴다고  화요일, 물신 섬긴다고 수요일, 나무신 섬긴다고 목요일, 토신 섬긴다고 토요일,  모두 그래 가지고서 이방신을 섬기는 그 날인데,  로마의 황제 중에 한 사람이 그것을 인용해 가지고 이래서 그만 교회 안에서도  주일이니 뭐이니 그걸 없애버리고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만  이것을 사용하도록 그 정권자가 들어서 그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주일날 주일날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일날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데 또 그 감동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이 자기 앞에서 들려오지  안하고 자기 뒤에서 들려옵니다.

 그래서 이 음성을 알아보려고 자기가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니까 이제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세계가 보여졌습니다. 그것 뭐이냐? 그것은 이제까지 사도  요한으로 말하면 참 신앙의 사람이지마는 밧모섬에서 주일을 지킬 때와 같은  그런 깨끗한 주일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사도 요한에게 성신의  감동이 온 감동은, 그 감동은 밧모섬에서 자기에게 왔던 감동과는 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을 받아 가지고서 음성을 들으니까 자기 앞에서  상대방에서 음성이 들리는 게 아니라 자기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면 자기와  반대라 말입니다. 자기와 반대.

 우리는 오늘까지 나는 내 걸음은 바로 걸은 줄 알았는데 또 성신의 감화를 더욱  더 받고 보면 '내가 걷는 걸음은 주님에게 대적되는 걸음이로구나' 다시  회개하고, 회개해 가지고서 또 주일날 또 성신의 감화를 그전보다 더 충만한  감화를 받으니까 우리 심령이 더 밝아집니다. 밝아지니까 이제까지 자기는  의라고 옳다고 산 생활을 더 충만한 감화를 받고 보니까 그것도 잘못됐습니다.

'주님의 반대로구나.' 이래서 돌이킬 때에 회개하고 보니까 새로운 영안이 열려  가지고서 모든 것이 바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평소에 엿새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예수님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예수님을, 예수님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의 증거요,  예수님을 구주라고 또 우리가 증거하는 것도 증거요.

 어쨌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의 그 모형으로,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의 모형으로 살려고 하면 엿새 동안 생활이 심히  피곤할 것이오. 피곤합니다.

 피곤하고, 교역자가 피곤한 것은, 교역자가 피곤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피곤하고, 하지마는 일반 성도들은 이 세상으로 더불어 일선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일선에서 하나 하나 사건 사건이, 현실 현실이 하나님 말씀과  인간의 말과 이 둘이 대립되는 그것을 다 헤치고 싸워 나오려고 하고 또  인간대로 살려고 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모형으로, 하나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그 인격성으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렇게 자기가 살려고  하니까 또 인격에 인격이 마찰되고, 사상과 사상의 마찰이 되고, 의논을 하는데  의논과 의논이 마찰되고, 논리와 논리가 마찰되고,  이러니까 마찰이 되는 피곤을 가지고 이래서 그저 그러니까 자연히 피곤하니  자기 심령이 피곤에 약해지고 자기에게 번연히 옳기는 옳은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것에 처음에 주일 지키고 월요일날 하는  것보다도 더 빈약해지니까 마음에 그만 마음에 자꾸 희미해져, 말에 주장을  하기는 하지마는, 그 사람에게 '이게 옳다' 주장을 하기는 하지마는 속에 그  능력이 강하지를 못하다 말이오.

 강하지를 못하니까 자기가 흐려지고, 흐린 사람이 되어지고 자기에게 어쩐지  의의 힘이 강하지 못하고, 진실의 힘이 강하지 못하고, 이러니까 마음에 고민을  가지고서 안 되고 할 수 없이 '뭐 좀 철야를 해 봐야 될까? 산으로 가 봐야'  될까? 이렇게 피곤하던 그 사람이 주일을 만날 때 이제 주일을 만났으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깨끗이 씻어서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더 내 지식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 내 사상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 내게 소망도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 모든 것은 새롭게 해서 영감으로  충만하여 내가 하나님과 진리로 충만해서 강한 사람이 되어서 능히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해 주시련.'  하는 그 소망을 가지고 주일을 만나는 사람은 주일에 그는 이전보다 더 충만한  영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  주일이 자기에게는 참 즐거운 날이라, 기쁜 날이라, 이 날은 자기에게 평강을  주는 날이라, 힘을 주는 날이라. 복을 주는 날이라. 자기를 굳세게 강하게  세우는 날이라, 이 모든 허랑방탕한 이 모든 세상의 지저분한 미혹들을 다  제거해 주는 날이라. 이런 날로 알고 이런 날이니까 그 날을 기쁘게 즐겁게  영접하지마는,  그렇지 안한 사람은 주일 당한 것이 '아이고 또 주일 닥쳤다. 또 주일 닥켰다.

주일날 안 할 수는 없고, 주일 안 갈 수는 없고 주일 지키면 이 일 낭패다. 이  문제가 낭패다.' 이러니까 주일이 반갑게 맞이가 되는 게 아니고 주일이 참  억지로 못 견뎌서 가난한 집에, 뭐 속담에 가난한 집에 제사 닥쳤듯이 이렇게  마음에 아주 지겨운, 지겨운 그런 주일로 이래 닥치게 되니까 주일날 오니까  잠도 오고, 아무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그날에 뭣을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주일날 또 더 부패돼 가지고 가 버립니다. 더 부패해져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엿새 동안에 진리대로 사는 이 신앙의 선한 싸움, 믿음의  선한 싸움,  사람이 이 민족과 저 민족에 싸우는 싸움, 싸우는 사람은 그것은 다 민족  위주기 때문에 그것도 사욕이요 더러운 싸움이요, 이 국가와 저 국가가 싸우는  것도 그것도 뒤벼보면 참 추접한 싸움이요, 또 뭐 공산주의 민주주의 싸우는  것도 그것도 좋지 못한 싸움이오.

 그러나 인생이 죄로 더불어 싸운다, 죄로 더불어 싸운다는 이 싸움은 참 가치  있는 싸움이요, 이건 참 큰 전쟁이오. 진리에 반대되는 모든 불법으로 싸운다,  이것은 가치 있는 싸움이오.

 이렇게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현실에서 마찰이 되고  대립이 되고 이럴라 하s1까 사람도 안 잃어버려야 되겠고, 사람도 잃어버리지  안해야 되겠고 진리도 잃어버리지 안해야 되겠고, 사람도 얻어야 되겠고 주님도  배척해서는 안 되겠고 이러니까 양사이에 끼어서 그저 자기가 희생하고, 자기가  똥이 되고, 자기가 천물이 되어지고 아무리 해서라도 자기가 어떻게 되든지  사람도 잃기 싫고 하나님도 잃기 싫고 둘 다 잃기 싫어서 사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입니다.

 이러니까 이 생활이 '내일 일을 너희가 염려하지 마라 한 날의 괴로움이 그날에  족하니라' 그 하루를 신앙 생활하려 하면 피곤한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주일을 지키는 사람,  그러니까 자꾸 신앙생활을 하면 외로워집니다. 이래 외로워지다가 주일을 만난  그 사람은 이제는 하나님이 위로를 주십니다. 세상에 이만한 것과 진리 지키려  하다가 그만 떨어져서 외로워지니까 하늘에서 이것보다 더 좋은 진짜 무한한  것을 덤뿍 갖다 안겨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과 멀어짐이 하늘나라와 가까워짐이요, 인간과 멀어짐이  주님과 가까워짐이라. 인간의 모든 의사와 멀어져서 고독해 지고 보니까 영감에  가까워지게 됐다. 이래서 그날 성신의 감화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주일날 이제까지에 내가 주일날 영감받은 영감보다도  새로운 더 충만한 새 영감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주일날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왜? 그거는 제가 뭐 세상 욕심같이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벌써 예수  믿는 생활이 차차 세월이 지나가니까 사람과 서로 대립되는 일도 많고 마찰되는  일도 많을 것이고 또 사람으로 더불어 원수되게 될 일도 많으니까 성신의 감화를  더 많이 받아야 그 사람도 빼앗기지 안하고 하나님도 내놓지 안하고 진리도  내놓지 안하고 인간 의사도 감정 상하지 안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대로 그 회의를 인도하고서 그 회의에서 제일 말단 제가 하나 참석해  가지고서 거기서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 회의가 결의되도록 하려  하니까 고통스럽다 말이오.

 그러니까 남모르게, '저 사람 미친 사람인가?' 자꾸 눈 감고도 기도하고 눈  뜨고도 기도하고, 그저 회의가 번연히 알기는 하나님 말씀대로 요래 해야 되기는  되지마는 사람들 의사는 다 반대되어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그래 하려 하니까 고통이 되고, 뜻이 아닌데 또  동의를 하면 동참죄가 되 어지니까 그것도 못 하고,  하나님 때문에 요래도 모지고 조래도 모지고 요래도 배척이고 조래도 배척이고  요렇게, 이렇게 배척되어지는 이 엿새 동안의 생활이 있었으면 주일날은  고대해졌을 것이요 주일이 고대해져서 주일에는 '내가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영감이 충만해야' 그 영감이 충만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다. 됩니다. 영감이  약한 사람이 말할 때는 감정을 품는데 영감이 그보다 더 충만한 사람이 말하면  감정 안 품고 좋게 말합니다. 좋게 됩니다.

 이 사람이 가니까 악의 세력이 강하게 날뛰지마는 그보다 충만한 영감이 가면  그 사람도 웃고 좋아하고 서로 화평한'가운데 뭐이 되어진다 그말이오. 영감이  내가 약해서 그렇지 영감만 강하면 모든 이 세상에 죄악이라 하는 것이 그 앞에  다 굴복하기를 돼 가지고 있고 또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실은.

 이러니까 사도 요한이가 밧모섬에서 이전에 받은 영감보다도 더 충만한 영감을  받게 됐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해서 세상에서 손해본  것만치 하늘나라에 유익을 본다, 세상에서 외로워진 것만치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가 있게 된다, 세상에서 배척당한 것만치 하늘나라에서 환영이 있다. 이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올 때에 내가 영감을 지난 주일보다 또 새로운 영감,  내 문제가 있는데 여자들은 '남편이 지금 이해를 안 하고 듣지 안하고 자꾸  강퍅하게 나가니까 오늘은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감동이 내 남편을  주관하고 있는 악령을 탁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배보고 가 가지고 말 한  마디를 할 때에 그 남편이 있다가서 반가워서 환영을 하고-여보, 주일날 가니  나도 다음 주일에 가겠소-이렇게 그 사람을 악령에게서 해방시킬 수 있는 그런  영감을 내가 충만히 받아 가지고 집으로 가야 이제 남편도 구원하고 나도 안정한  가운데서 구원을 이루겠다.'  '내가 이전보다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가야 내 직장에서 모두 다 마찰될 만한  이런 사건이 있는데 이 마찰이 되지 안하고 순순하게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되어지겠다.' 이렇게 다 자기 할 일,  또 '내가 지금 이거 내 앞에 이래 번연히 여기 물욕이, 물욕이 와 가지고서  덤비고 또 여러가지 사치의 모든 정욕들이 와 가지고 덤비고 이런 것들이 많이  덤비는데 이것을 번연히 내가 침범 안 돼야 되고, 감염 안 받아야 되고, 거기에  피동을 안 받아야 되고 이렇지마는 내가 이걸 이리 가야 되겠는데도 내가 그날  이기지 못하고 그만 거기서 물들까?'  마치 말하면 술 안 먹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그만 술을 보고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술 먹는 사람이 돼 버리고 마지막에는 취해서 울고 탄식하는 것처럼 이제  이런 것을 이런 입장도 있다 말이오. 뭐 별별 입장이 있는데 성령만 오시면  해결이 됩니다.

 이러니까 '이전 성령보다 영감이 내게 더 충만해지면 모두가 다 영감으로  해결이 될 터인데'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영감을 더 충만히 받아 가지고셔  은혜를 더 충만히 받고 하니까,  월요일날 가니까, 그뭐 이랄까 저랄까 '그것 머리를 떡떡 긁으면서 '그것 참  사정상 그 딱한데 딱한데'이렇게 어렵던 일이 주일날 은혜받고 가니까 아무 그  문제가 없이 '그거는 이래야 됩니다.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그만 딱딱 그만  뭐이 주저하고 뭐 주저하고 유리하게 이렇게 방황할 게 아니라 착착차 이래도  다른 사람이 그만 아무 말도 없이 일사천리로 쭉 따라갑니다.

 이러니까 그게 모두 다 성신의 권능이니까 자기 앞에 있는 모든 난제의 험로를,  또 그 모든 마찰되는 모든 가시밭을 이것을 시온의 대로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성령의 충만함이면 그 모든 것이 해결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하고 그 사람하고 둘이 말을 하면서 대립이 돼 가지고서  뭐 죽어도 한번 해 보겠다 하는 그 원수인 그런 데에도 성신의 충만한 사람이 떡  가 가지고서 이래 말하니까 그 사람도 좋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그만 웃고  좋아하고 아무 어려운 것도 없고 다 이래 돼 버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보고서  '오늘은 그 사람이 변 해졌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이 일하는 것은 모두 다 그 쉬운 일인 줄  압니다. 일이 쉬워서 그런 줄 알고 사람들이 다 순해서 그런 줄 압니다.

 김현봉 목사님이 그 당시에는 서울서 제일 참 큰 교회요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큰 교회지마는 그 교인들이 그 목사님에게 그저 전적  복종입니다. 복종이니까 모두 말하기를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바보라서  다 자주장하지 못하는 그런 약한 사람들이라 무식한 사람들이라 그랬다'  이랬는데, 나중에 김현봉 목사님이 별세하고 나서 보니까 그 안에는 국회의원도  있고, 장관도 있고, 대사업가도 있고, 법률가들도 많이 있고,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다 복종했습니다.

 왜?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복종하고 또 충만한 그 목사님의  설교나 인도하는 데에 그대로 하면 되고 그대로 안 하면 반드시 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날, 내가 어제 토요일까지에 내게 닥친 모든 난제  해결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내가 내일 월요일부터는 이것이 다 해결이 되어야  되겠는데 이 해결되는 방법은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내라는 사람이 어제  사람보다 오늘 주일을 통해서 변화가 더 된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또 진리의  능력이 더 큰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영감의 능력이 더, 사람을 감화시키는  감화의 능력이 더 커야 되겠고,  이러니까 이 주일날 이런 지금 큰 기대를 가지고 주일날 오는 그 사람이라야 그  사람에게 잠이 안 오고 그 시간이 길지도 안하고 어 짜든지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지 소용없는 주일을 억지로 맞이해 놓으니까 그 사람은 '지루하다. 뭐  예배 시간이 길고 설교 시간이 길다. 설교는 한 십오 분만 하고 모두 다  찬송했으면 좋겠다.'  이래 가지고서 미국 나라는 벌써 설교는 대개 삼십 분 넘은 데가 없답니다.

모두 다 그저 이십 분 이십오 분 그러고 찬송한답니다.

 미국도 그 나라도 루터 칼빈 개혁하는 그 개혁으로서 된 나라가 다 미국에 있는  성도들의 그 신앙들입니다. 다 그 신앙들이오. 저거 조상의 신앙들이라. 저거  조상의 신앙들은 예배볼 때에 세 시간 이내를 보지 안했다 합니다. 세 시간  지나가니까 넘어가니까 사람들이 모두 졸면 작지 끝에다 이 달구깃을 달아  가지고서 그래 조는 사람에게 낯에다 이래 설설 쓸면서 잠을 깨워가면서 그래  가지고 세 시간 이내 설교를 안 했을 그때에 다 혁명이 일어났고 세계에 복음이  퍼졌고 일이 났습니다.

 이제 저거 비위에 맞춰서, 일주일 내 제 욕심대로 살던 자가 하나님 공경하러  와서 두 시간만 넘어가도 머리를 긁으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고 설교자를 욕을  하고 속에서 불평을 품으니 그거 지옥 갈 장 본이라 그 말이오. 제 기본구원  얻었으니까 영은 천국 가지마는 행위의 심신의 기능은 전부 지옥 가서 불탈 그  장본이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주일을 아주 우리에게 필요하게, 하나님이 날 중에 제일  필요한 날로 주일날을 우리에게 줬는데 왜 주일날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까?  왜 주일날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고 무거운 짐이 됐습니까? 왜 주일날이 우리에게  필요한 날이 되지 못하고 주일날이 우리에게 큰 거치는 날이 됐습니까? 이것 참  기가 막히고 참 탄식할 일입니다. 얼마나 이거 불쌍하고 가련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

 사도 요한 같은 그런 사람도 그 준비가 그리 되니까 준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전과 다른 영감을 줬습니다. 성령의 감화함을 받아서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제까지 자기가 듣지 못한 음성, 그때는 뭐  음성이 들린다고서 무슨 소리가 난 줄 압니까? 아니오. 양심을 울려 주는  음성이요, 양심을. 자기가 양심에 깨닫지 못하던 걸 그때 깨달았다 그말이오.

양심에 깨닫지 못하던 걸 깨달았어.

 우리는 과거에 깨닫지 못하는 양심에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서 나는 과거에  '이만하면 내 잘못함이 없다' 잘못함이 없다는 것을 새로 양심에 감화를 받아서  영감을 받아 가지고 보니까 잘못했다는 것아 느껴지고, '나는 이만하면 사람에게  할 일 다 했다' 했는데 미진한 것이 있어지고, '이만하면 하나님에게 다 했다'  싶었는데 영 불충성이 보여지고 자꾸 이렇게,  자기가 아직도 자기와 반대되는 음성을 들었어. 자기와 정, 자기와 비슷한  음성을 들은 게 아니라 자기와 정반대되는 음성을 들었어. 그러면 자기 있는  거기에서 또 백팔십도의 전환으로 또 돌아가고 또 이제 걸어갔다 말이오.

그러니까 뭉텅뭉텅 이래 올라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영감의 음성을 들어서 이제까지 내가 산 생활이 의롭다 하는  생활이 전부 정죄를 받는 이런 영감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자기 한 생활이 악령의 감화가 오면 '내가 이제까지 산 것은 너무 지나치게  예수 믿었다. 이거는 공연히 다른데 목사와 같지 아니하고 별스러운 목사가  주장해 가지고 이것 내가 너무 지나치게 치우치게 믿어서 백지 박해를 당했다.

너무 지나치게 믿었다. 좀 이제 좀 유하게 믿어야 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 들으니까, 여기 그 사람이 여기 왔는지 모르겠소. 어느  신학교, 내가 신학교 말은 안 합니다. 어느 신학교에 가니까 신학교 교수가  가르치면서 '요새는 너무 옳으니 그르니 이렇게 콩팥을 가려서 따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목회를 못 합니다. 그저 옳은 것도 그만 그대로, 그른 것도 그대로 그래  가지고서 이렇게 서로 화평하게 유유하게 나가야 되지.'  이러니까 그 사람이 있다가서 나중에 불러 가지고서 '교수님, 이렇게  교수님들이 전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여기 신학교인데 여기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지 말라고 이러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지 아니하면 양떼들은  어떻게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디 이럴 수가 있습니까?'그래  가지고서 그만 너무 억측이 나가지고서, 그래도 그걸 자꾸 합리화 하려고 자꾸  변명하는 데에서 그만 이 사람이 '아이구, 나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 하고서  거기에서 튀쳐나왔다는 그런 말 들었습니다. 옳습니다. 바로 했습니다. 바로  튀쳐나왔소.

 예수 믿는 것은 내가 어제까지 신앙생활을 바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늘  주일에 영감을 받고 가만히 보니까 '이것 참 내가 이제까지 신앙 생활한 것이  이거 너무 외식이다. 너무 가면적이다. 너무 이중 적이다. 너무 궤휼적이다. 이  꾀로 예수 믿었다. 꾀로 예수 믿었다. 미련하게 옳고 그른 것으로 뿍뿍 걸어가는  그 신앙이 아니었다. 이거는 뭐 바람 앞에 있는 그저 갈대와 같은 믿음이었다'  자기의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 약하게 보여지고, 옳다고 생각한 것이 삐뚤어진  것이 있는 것이 보여지고, 이러니까 이제 그 주일을 통해서 더 강해져야 되겠고,  더 옳아져야 되겠고, 더 깨끗해져야 되고, 더 구별해야 되겠고, 더 진실해야  되겠고, 더 흑백을 가려야 되겠고, 더 조심해야 되겠고, 더 주의해야 되겠고, 더  힘써야 되겠고, 자꾸 이 사람으로 화해지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주일날 받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말해 놓은 것도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  됩니다. 주일날은 무엇 때문에 첫째가 매매하는 걸 말라 했는데 매매하는 걸  말라는 것은 매매 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매매를 말라 말은 이 주일날은 우리  날 중에 제일 머리가 되고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이 날에 우리가 성신의 감화와  하나님의 그 영감의 음성을 들어 가지고서 내가 고치고 행위를 고치고 모든  세상을 바로 보고 이래 가 지고서 영원한 내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이 원동력이  주일날 내가 받는 것인데 이것 받는데,  잘못하면 매매하려 하다가 여기 등한히 되기 쉽기 때문에 매매를 중지하고,  모든 업을 중지하고, 또 자기가 '이 날 거석할라 하니까 조심하기 위해서 옷을  헌옷이라도 씻어 입고, 목욕도 하고, 자기 마음도 또 가다듬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나와 가지고서 거기에서 명상을 하면서 '이제까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무슨 은혜인가?' 자기가 그때 생각하면 이전에  깨닫는 것보다도 분명히 더 깨달아질 것입니다.

 여기 와 가지고 한 십 분이나 이십 분이나, 적어도 십오분 전에는 와야 됩니다.

십오 분 전에는 와 가지고서 여기 떡 앉아서 이래 하면서 과거에 자기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만 쪽 하나님에게 대해서 '내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자존자시라,  독존자시라, 그분이 모든 목적을 정하시고 나를 예택한 자시라, 그는  전능자시라, 그는 전지자시라,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 주권자시라,  주재시라, 개별 섭리자시라.'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그러면서 '나는 뭐입니까? 나는 뭐입니까?' 만물의 때와 같애. 만물보다도  더러워진 만물보다 더러워진 그 안팎을 가지고 있는 만물보다 더러워진 때와  같은 이런 인간이 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이걸 생각할 때에 감격해서,  자기가 깨달으면 자기가 이제까지 '나는 주님에게 이만치 충성했으면 됐다'  했는데 주님의 크신 것과, 그 사랑의 지극한 희생과, 우리에게 약속한 지극히 큰  소망과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예정해 놔서 모든 나타나는  순서도 내 구원 위해서 모든 존재도 내 구원 위해서 창조된 것,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공로가 우리 보증이 돼 가지고서 하는,  이것을 다 자기가 생각해 보고 난 다음에는 감사가 넘칠 것이고 기쁨이 넘칠  것이고, 평안과 담대가 넘칠 것이고 하늘의 소망으로 인해서 '나도, 이제 주님  나 위해 죽었으니 나도 주 위해 한번 죽고 싶다. 주님이 죽기까지 나를  사랑했으니 나도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 주님이 다해서 나를 위해서  살으셨기 때문에 나는 더러운 것이지마는-있는 것 다해서 나도 한번 주님 위해  살아보겠다.' 이 마음에 단마음 원하는 마음으로 순생의 각오가'생길 것이요  순교의 각오가 생길 것이요,  그러고 보니까 '나는 약하니까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모든 대적들은 심히  강하니까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아무래도 성신의 충만함을 받지 안하면 안  되겠다.'  이러니까 이제 성신의 충만함을 주일날 주실 터인데 이 충만함을 받아야 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에 진리 말씀과 함께 주시니까 '무슨 말씀으로 무슨  성령을 주실 것인가?' 이렇게 기다리는 자에게 이전에보다 이전 없던 이전보다  더 충만한 영감이 오고, 이전에 듣지 못하던 높은 주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음성 듣고 돌이켜서 그 음성 듣고 자기가 회개하고 보니까  이전에 보지 못하던 그 세계가 열리고, 이전에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이고,  이전에 보지 못하던 그 모든 욕망이나, 주님이 보이고 주님의 섭리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러고 보니까 사람이 달리 보인다 그말이오. 이렇게 자꾸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 사람이 최고의 존귀한 사람이라' 이랬는데 영감받고 보니까 그  사람보다도 '네야 길바닥에 앉았든지 말았든지 해라' 하는 인간으로 볼 때에는  보잘것 없지마는 그 사람이 보니까 전부 성신의 충만한 사람이요,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요, 진리대로 변화가 된 사람이요, 순전히 땅에 있지마는 하늘의  소망으로만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인간 평가가 달라집니다.

 인간 평가가 달라지지, 사리 판단이 달라지지, 가치 평가가 달라져서 과거에는  세상과 같은 평가를 했지마는 이제는 예수님과 같은 그 평가로 달라진다 이거요.

 이러니까 사도 요한이가 그만, 자기가 이전에 내나 예수님을 왜, 예수님의  제자인데 잘 모르겠습니까? 알았지마는 이전보다 충만한 성신의 감동이 오고,  이전보다 자기의 신령한 마음의 눈어 환하게 밝아지고 보니까 양심이 밝아지고  보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여진다 말이요.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

 보여지고 보니까 예수님 앞에 버릇없이 날뛰던 것이, 버릇없이 날뛴 것, 예수님  앞에 함부로 입을 벌린 것, 모든 것이 마음에 견디지 못해서 그저 죽은 자와  같이 꺼꾸러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위로를 해 줬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일날 좀 변화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 변화받는 데에는  그러니까 일곱 가지에 첫째는 우리가 매매를 그쳐야 되고, 또 업을 쉬어야 되고,  자기가 모든 의복이나 안팎을 다 깨끗이 해야 되고,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나와  가지고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어떤지 자기 전부를 다해 가지고서 과거의 은혜를  자기가 명상해서 이와같이 추억하고 추상하고 보니까 마음에 견디지 못한 감격에  넘치게 되고, 넘치게 되고, 또 넘치고 자기 생활할 앞길이 답답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은 권능 받아야 되겠다. 오늘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받아야 되겠다.'  이 전부를 받을 것 하나님에게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돈 없어도 좋고, 지식  없어도 좋고, 아무것도 없어도 되고 하나님에게 받을 것 이것 받아아 되지 이것  안 받으면 안 되겠다 말이요.

 영감과 진리의 그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이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전소망이 여기 기울어져 가지고 있으니까 강단 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한 말씀 할 때에 마음 가운데에 이제 '아멘, 됐습니다.'  또 한 말씀 하니까 '내가 이것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자복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행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 시간에 할 일이 어떻게 많은지? 왜? 그 시간에 치료받을 것이  많고, 그 시간에 수습할 것이 많고, 그 시간에 정리할 것이 많고, 그 시간에  들어서 정돈할 것이 많고, 그 시간에 지금 갖출 정비할 것이 많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 시간 중에 어떻게 보배로운 시간인지?  이러니까 오전 오후의 이 말씀에서 이전보다 충만한 영감, 이전보다 더  정확하고 광명한 주의 음성, 이전보다, 이전에 회개 못 하던 것 다시 회개, 회개  못 하던, 이전에 못 하던 회개를 회개하면 이전에 보이지 안하던 것이  보여집니다.

 회개, 이전에 회개 못 한 회개를 회개하면 반드시 자기에게 보이지 안하던 것이  보여집니다. 이전에 회개 못 하던 회개를 하면 반드시 새로 짐을 벗는 것을  자기가 보일 것입니다. 그 짐이 벗겨집니다. 새로운 힘이 나옵니다. 이전에 회개  못 하던 회개를 하면 이전에 누리지 못한 평강과 자유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오전 오후에 자기가 새로워져, 새로워지니까 이것을 놓치면 안  되겠으니까 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 또 거기에서, 그저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가지마는 자기는 뭐 볼 일을 간다 할지라도, 자기가 집에 간다 할지라도  가면서도 이 말씀 사모하고 그 영감을 빼앗기지 안하려고, 주의 음성 영음을  빼앗기지 안하려고 자꾸 이렇게 하고 이래 가 가지고,  집에 가서는 또 모아 가지고서 그래 하고 또 오후에도 그래 하고, 자기에게  충만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인도한 그 형제들이 여기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  있을 터이니까 또 가서 이래서 이 은혜를 나누고.

 이래서, 오전에도 제가 점심먹고 나 가지고 몇을 청해서 그 물었습니다.

'과거에 회개 20가지가 뭐꼬?' 내가 물었습니다. '회개 20가지.' 물으니까  조그만한 그 학생이 그걸 몇 가지를 정확하게 말하기 때문에 칭찬을 했습니다.

 스무 가지를, 회개할 것 스무 가지. 하나님에 대해서 네 가지, 또 성경에  대해서 네 가지, 사람에게 대해서 네 가지, 모든 사건에 대해서 네 가지, 물질에  대해서 네 가지. 그 아주 첩경의 진수, 기독교의 진수를 거기에 말해 놔, 진수를  말해 놨다 말이오. 그 안에 다 들었습니다. 진수를 말해 놨어. 그렇게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스무 가지를 회개하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거 무슨 말인고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혹 있을 것입니다. 스무 가지를 또 마음의 믿음 네 가지, 몸의  믿음 네 가지. 마음의 믿음 네 가지는 이렇게 물 으니까 아는데 몸의 믿음 네  가지는 물어야 하나도 아는 사람 없습니다.

 몸의 믿음은 실행하는 것, 실행 믿음. 시험 믿음, 연단 믿음, 완성하는 완전한  온전한 인내의 믿음, 이러면 이게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 자꾸 생각하고, 또 십계명도 또 외워보고 자꾸 이래 가지고 이러니까  그때에 뭐이든지 외워서 이걸 먹으니까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튼튼해지고  튼튼해져서 '이제는 죽으면 죽었지 진리 양보한다 말이가? 뭣이 두려우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전능자의 명령대로 하는데 어떤 땅에 있는 인간이  어떤 권세가 지금 거부를 하겠느냐?' 이래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그 믿음이  자기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

 보면, 신구약 성경에 보면 구약에는 역사가 약간 기록돼 있습니다. 구약에는  역사가 기록돼 있는데, 역사가 기록돼 있는데 그 역사를 보면 꼭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망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 어긴 그게 망했소. 하나님 말씀 어긴 그것이 멸망이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 어긴 그게 멸망이 돼 버렸소.

 하나님이 구원할 때도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멸망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멸망받는다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그 사람이 구원 얻었소.

이것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 계명을 위해서 "나와 내 도를 인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  '네가 지금 이 명령 안 지키면 사형이야.' 목숨이나 직장이나 애끼지 안하고  계명을 지켰더니마는 목숨이 살아났습니다. 직장이 튼튼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는 것이오. 믿는 사람은 전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요.

 이러기 때문에 참 믿는 사람은 사람을 애껴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저  죽은듯이도 하고, 아무 속도 없는 것 같고, 병신같이도 하고 이러지 실상 예수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조물은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정말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조물에게는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자라도.

 하나님 두려워해서 그분이 두려운 줄 아는 사람은 다른 데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다섯 가지가 있어도 이 총중에 제일 큰 두려움이 자기에게  부딪쳤으면 네 가지 두려움 이까짓 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오. 하나님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땅위에 피조물의 이런 저런 사건이나 존재나 두려움이라는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의 생활은 참 자유로운 생활이요, 기쁜 생활이요,  가치 있는 생활이요, 정말로 가치 있는 인격 있는 존귀한 생활입니다. 약하지  않소. 이 생활 외에는 다 추접하고 추하고 약하고 간사하고 참 불쌍하고 가련한  생활입니다.

 그런고로 주일을 바로 지키도록 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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