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1984. 6. 3. 주일오후 

 

본문 : 이사야 58장 13절∼14절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안식일이 일차 창조하신 그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그들을 잘  유지되며 또 축복하여 보존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은 일차적으로는 실패가 됐습니다. 안식일은  하나의 실패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실패의 날이요 이래서, 다시 하나님께서 새  날을 정해서 주신 날이 주일날입니다. 일차 창조가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받는 그 저주 아래에  머물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하루를 정하시고 새로운 인류 시조를 보내셔  가지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날. 곧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첫 안식일은 변동되고 진동될 수 있는 것. 실패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창조한, 축복하시고 구별하는 날이요. 둘째 안식일 곧 주일은  다시는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을 창조하시는, 그 창조 하신 것들을 축복하셔서  영원히 구원을 누리게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일차 창조의 것들이 구원 얻는  그 날이요, 둘째로 주일로 새로 변경해서 새 날을 주신 것은 이차 창조,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써 진동되지 안할 영원한 나라를 건설한 이  천국에 대한 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것을 똑똑히 알아야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 주일날에  대한 모든 법칙은,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된다, 주일을 잘못 지키면 어떤 화가  있다 이렇게는 기록된 것이 없고, 안식일을 이렇게 지켜야 된다 잘못 지키면  화가 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있지마는 주일에 대한 규정은 없는데 날짜는  바꿔 가지고서 안식일을 주일날이라고 그렇게 하고 그 규정은 안식일 규정을  쓰니까 '이거 뭐인가 좀 잘못 됐다' 이래 가지고서 고 유혹을 틈 타 가지고 나선  것이 안식교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이 된다고 주장하는 교리는 이단으로  정죄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안식일이 주일 된 것이 하나님의 일찍부터 예언해 놓으신  일이요, 또 안식일은 참의 그림자로 되어 있는 것들이요 다 이것은 폐해질  것들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제도와 날을 다 폐했다, 하나님께서 다 폐했다, 새  날을 정하셨다 하는 요것을 굳게 잡아야, 안식일이 이 주일날로 변경됐는데  변경된 것이 일시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예정 순서대로  변경이 된 것이라. 변경된 그것은 일차 창조의 것으로 타락에서 멸망받은 것을  이차 창조주인 둘째 아담이 와 가지고서 비로소 구원을 완성했다. 그러면, 일차  창조의 안식일은 일차 창조의 것을 보존하고 거룩하게 복되게 하는 것이고, 또  이차 창조의 것은 주일로써 이것은 예수님이 죽고 사심으로 인하여 건설된  나라라. 창조된 나라라.

그러기 때문에, 이날은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되고 살으심에 연합되는 날이라.

연합되는 그 깨달음을 연구해서 점점 깨달음이 자라가야 할 것이고 또 연합되는  우리의 소원이, 소망이 자라가야 될 것이고, 또 연합의 결실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자라가야 된다 하는 이 날짜 변동 된 것을 의심  안하고 확실히 믿는 이 믿음을 가져야 되지 이 믿음을 가지지 안하면 모든 것은  다 풀어지고 맙니다.

 날짜는 변경될 것은 성경에 말씀했고. 지키는 제도에 대해서는 변경될 것은  말씀하지를 안했습니다. 또 그 뒤에 그 지키는 법칙에 대해서 새로 법칙을  하나님께서 선포하지도 안하셨고 처음에 선포한 법칙을 폐지하지도 안했었으니까  처음에 선포한 그 법칙을 계속 지켜야 된다 하는 것으로 우리는 학정을 지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날짜는 안식일을 폐지하고 주일로 하나님께서 다시  날짜를 정하셨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하고, 이런 것은 뭐 다 알  수 있는데도 또 미혹을 받습니다. 지키는 그 제도와 법칙에 대해서는 안식일  지키는 그 법칙을 폐지를 안 하고 또 주일 지키는 법칙을 다시 새로 하나님께서  제정 선포하지를 안하셨기 때문에 안식일 지키는 그 법칙을 주일도 그와 같이  지키면 된다 하는 이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일날은 무엇을 하는 날인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또  이 부활하심 이 둘이 한테 뭉쳐져서 새 나라를 건설한, 이 건설한 이 나라를, 이  나라에 영원 전부터 소속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이 나라의 시민권을 얻었는데,  이 나라에 가서 살 모든 것들을 갖추어서 준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그것이  주일날입니다.

 그러면,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준비는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의 대속의 그  법칙을 깨닫고 주님의 대속과 자기와 관계를 바로 맺는 이것이 영원한 구원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두 가지 죽음인데, 한 가지 죽음은 첫째  아담이 하나님의 이 안식 할 수 있는 이 은혜 주신 것을 배반을 해 버렸습니다.

그 배반한, 그 배반 한 그것을 다시 무르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하나입니다.

배반한 것을 무르는데, 배반한 것이 무엇인데? 배반한 것은 죄요, 또  불의입니다. 불의는, 불의는 죄이지마는 불의는 죄와 다릅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것이 죄요, 불의는 어긴 자가 자기가 주장대로 사는 그것이  불의입니다. 원죄로 사는 것이 그것이 불의입니다. 불의는 자기주장으로  주관으로 자기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사는 것이 불의요, 죄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그 법칙을 어기는 것이 그것이 죄입니다. 또 하나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지존자로 주재로 주권자로 이렇게  제일 크신 분으로 자기 마음 가운데에 모셔서 자기 마음 안에 제일 높은 그  보좌에 이 하나님을 모셔 앉혀야 될 터인데 그 보좌에 다른 것들을 다 앉혀서,  다른 것들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앉혀 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그와 같이 그것들이 해준다 해서 앉혀 놓은 것을 가리켜서 우상이라.

그러기에, 사람들은 우상의 전각이 돼 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이런 것을  깨트리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깨트린다고 어째 죽는가? 네, 이것을 깨트리는 것은 이 게 다  죄인데, 이 세 가지 죄를 합해서 이게 다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 죄, 불의,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섬긴 거 이게 다 한 말로 말하면 죄인데, 이것을 없애는  것은 그 형벌을 받는 거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형벌 받기 전에 다른  것으로서는 이걸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형벌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벌  받아 죽으심으로써 죄가 깨졌고 불의가 깨졌고 하나님과 원수됨이 깨졌습니다.

원수됨 이 깨졌지마는 서도 이렇다고 해서 죄 없는 자로 무죄자로 아직까지  등장도 못 했고 의로운 자로 등장도 못 했고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이제 등장도  못 한 것을 주님이 이 등장을 시키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  후에도 아버지의 그 지성소 법궤 위에 거기에 그룹들 사이에 내가 올라가지  못했으니 갔다가 내려와야 됀다 하시고 올라갔다 내려오고 난 다음에는 그  제자들에게 만지라 하고 그 전에는 만지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두 가지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오전에도 말했거니와 이 두 가지. 하나는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는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고 두 카지 죽음입니다. 하나는 그렇게 우리 대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죄 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의로운 자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살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왜? 살라고 하니까 악한 세상, 죄악의  세상이 살지 못하게 해도 주님은 살라 하시고, 이러니까, 살지 못하게 하고 살라  하고 이렇게 신강하다가 그들이 살지 못하게 해도 그대로 사니까. 예수님이  그대로 살므로 그들에게 죽임을 받아서 비로소 그대로 사는 것이 성공을 한 것이  한 가지 죽음입니다. 한 가지는 벌을 받아서, 그 형벌을 받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 죽으심인데, 이게 두 가지 죽으심을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날을 줬기 때문에. 이 죄, 의, 하나님과 원수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 대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 대속을 인해서 이날을 우리가 받았는고로  이날에는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신 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깨닫고 이라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깨닫고 또 성신의 감화로 깨닫고 이렇게  깨달으면 깨달음에서 과연 '주님은 나 위해서 어떻게 대속을 하셨으며 주님의  공로가 없으면 어떻게 된다.' 이렇게 이제 차차 깨달음에 따라서, 이 세상의  법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 법정에 정죄를 당하고 범죄가 되면 그 형이 어떻다  하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뭐 압니까? 그러나 차차 장성해서 세상  법을 알면 이 법을 어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이제 큰 화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의 지식이 장성함에 따라서 법도 또  그 법의 배경인 권세의 실존도 알게 돼서 두려움과 조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주일날 자기가 어데까지 연구해서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이 어떤 공로를 베푸셨으며, 그 죽으심의 고난이 어떠했으며, 그 죽으심의  효력이 얼마나 됐는가, 죽으심의 효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그 효력의 영향이  있는가, 효력이 있는가 하는 그것을 깨달아 아는 것은 천 면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각각 다릅니다. 그 깨달음의 범위의 넓고 큰 것이 그 사람의  구속을 입은 것이 크고 넓고 어리고 적고 한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깨달음도 그러하고 깨달음에 따라서 감동돼서 자기 주관에 변화된 것이  '아, 이러니까' 과거에는 뭐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무심했는데 '감사하다'  하는 것이 생겨지는 사람도 있고, 또 감격해서 마음에 그만 감사해서 눈물이 참  글썽 글썽 나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 나오는 눈물을 억제 못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 눈물만 아니라 나왔던 눈물이 도로 싹 들어가면서 마음에  강한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이제는 온 세상의 어떤 것이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의 이 대속은 이제는 놓지 않겠다 하는 것으로서 강한 각오가 오고, 또  각오뿐 아니라 여기에서 그 사람의 구하는 바의 실력의 도수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으로서 그가 주일날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어떤 사람은  마음에 결심의 능력은 받았지마는 서도 실지로 그런 현실을 당하면 그만 턱  넘어가고 맙니다. 현실을 당하면 넘어가면, 여러 가지 고문과 고형에 견디지  못해서, 두려워서, 또 이래 저 래 해 가지고서 그만 이 주일을 범하게 된다  그말이오. 주일을 범하게 된다 그 말온 내나 예수님의 대형의 두 가지 죽음을  범해서 자기는 지금 안 죽기 위해서 죄를 범하고 또 자기 주관대로 사는, 그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행동을 하게 하고 하는 이런 게 다 주일날을. 주일을  범하는 것이요 구속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을 범하는 것이 주일을  범하는 것이요 구속의 능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 은혜 받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면, 이 주일날 주일 지키는 그 지키는 정도가 언제가 다 완성이 될  건가? 주일 지키는 정도가 완성이 세상에서 아무도 완성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난 주일보다는 오늘 주일이 좀 더하고 오늘 주일 보다 또 더하고,  더하고 더해서, 뭐이 더해?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대한 깨달음과 느낌이 차차  더해지고, 주님이 또 이 대속하신 그 범위가 어데까지 대속이 됐는가 깨달음이  달라지고. 이 대속이 없었으면 어떻게 될런가 하는 거기에 대해서 깨달음이 점점  달라지고 새로와지고 온전해지고 광대해지고 강해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도수가 차차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무라도 '이제 나는 이만하면 다 지켰다' 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벌써 신앙의 잠을 자는 사람이요 벌써 이 주일이 뭣 때문에 생겼는지  주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어데까지 지키고라도 또 이 주일에 대해서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대속하신 죽음을 죽어 주셨는데 나는 이 죽음을 죽어  주심으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이 대속의 은혜를 나는 다 받지를 못하고  업신여기고 이 대속의 은혜를 내가 속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래서 어데까지 가도  거기에서 또 회개하고 새로와질 여유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또 주일날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것이니까 주님이 이 두 가지  죽음의 공로를 베푸시고 난 다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두 가지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실질적으로 받아 가지고서  영원히 누리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부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 중생은 없습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 다음에 부활도  없습니다. 그저 죄 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되어 있으나  생명이 있어서 살지는 못합니다. 생명의 활동이나 작용은 안 되는 것입니다 죄  없다고 생명이 아니오. 또 의롭다고 생명이 아니요, 하나님과 화친됐다고 생명이  아닙니다. 화친된 것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이 세 가지 순서의 단제가  구비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를 거듭 나게 하사  중생되는 이 은혜가 우리에게 오 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일은 이 두 가지로  주님과 연합을 깨닫는 날이요, 또 연합을 내가 내 몸에서 실지로 기념하는  날이오. 기념한다 말은 이렇게 연합시켜 주셨으니 그 연합을 내가 보존하고  자랑하고 나타내고 그 연합을 놓지 안하고 그 연합을 한 그 연합을 드러내는  것이 그것이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을 찬양하는 것, 연합을 찬양하는  그것이 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주일에 대해서 우리가 몇 가지 간단한 법칙을 몇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 5절에 보면 이 안식일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사십 년  동안에 산 생활은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가지고서 하늘나라를 가는  준비하는 그 둥안을 모형한 것입니다. 예표한 것이요 모형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교회 생활입니다. 광야는 교회 생활이요 곧 세상 생활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이요 가나안은 천국을 모형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은 구약 성경에서 깨닫고 구약 성경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깨닫고 이렇게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두  계약을 우리에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만나 가루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그 평일은 자기 식구가 먹고 살  것만 받았습니다. 그 이상을 거두지는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만나 가루를 거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둔 사람은 암만 거두어 봤자 기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많이 거둔 데도 남음이 없다' 이랬습니다. 하나님 말씀 어긴 것만  제가, 하나님 말씀 어긴 죄만 제가 짊어졌지 .많이 거둬 봐야 자기에게 유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그 거두는 데에 자기의 실력이 모자라서 적게 거둔 사람  있습니다.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람이 없다 이랬습니다. 그 사람이 실력이  모자라서 이 세상살이에 수입을 적게 한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 구원 이루기에  합당한 물질을 주시기 때문에 물질 모 자라서 구원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조절하시는 것을 여기에 말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때는 만나 가루를 하나님께서 내려서 그래  했지마는서도 오늘은 우리가 농사지어서 장사해서 먹고 사는 게 아닌가? 그게  다르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도 장사하는 사람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뭐 공업을 하는 사람이나 또 어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그래 하는데. 그 사람에게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안 주면 제가 암만 해도 쌀내끼 하나도 안 나옵니다.

자기 한 끼 먹을 것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거는 지금  시간이 없어서 말 못하고 또 여러분들이 어린 신앙이 아니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만 만나 가루를 하늘에서 내려서 아무  저희들의 노력을 가하지 아니한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공짜배기로 그들에게 줘  가지고서 산 거와 같이 오늘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거 무엇을 한다 할지라도 그  수고는 다른 수고지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입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짜배기로  주신다 하는 것을 기억하고, 고것을 해석해서 이해가 되는 사람은 될 거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될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은 쌀을 한 되 얼마 주고 샀으면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쌀 값을  낸 줄 알지만 쌀값을 낸 거 아닙니다. 쌀값은 낸 거 아니고 그 쌀을  우리에게까지 갖다 주는, 운반하는, 운반하는 그 인간 노력의 댓가는 하나도  빠지지 안하고 다 준 것입니다. 그들이 그 노력을 한다고 해 가지고서 쌀이 되는  거 아닙니다. 쌀이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요. 쌀 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요. 쌀이 있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쌀을  만들되 쌀을 만든 거는 하나님 혼자 만드셨고 만든 그것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그 하나 방식을 한 것뿐이지, 그러면, 모를 심으고 하는 그런 것도 다 전달이오.

그 심은다고 쌀이 되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런 것을 믿음으로 모르면 참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를 심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모를 심은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인간들에게까지 갖다 주는 운반비라는 요걸  알아야 됩니다. 운반뿐이지 인간의 노력 그거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쌀 한  되 되는데 예를 들어서 노력이 만일 천 프로라 합시다. 천 프로라 하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천 프로요 인간의 한 것은 일 프로도 거기 안 들었습니다, 인간의 한  것은 인간은 다만 그걸 운반하는 거 한 가지뿐이라 말입니다.

 또 그것이 이해가 안 되면 저 시장에 가서 어떤 사람이 생선을 사다가 먹으면서  '아, 이거 뭐 내가 죽도록 일해 가지고서 돈 주고 이 생선 사다 먹는데, 값 내고  샀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셨나?' 이렇게 말하지마는서도 그 생선을 시장에서  댓가치는 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갖다 준 인간 노력 인간 운반비를 낸 것뿐이지  그 고기는 하나님이 공으로 길러서 공으로 준 것뿐입니다. 전부 공으로 먹지  하나도 하나님의 것을 의식주 뭐이든지 하나도 댓가 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입니다.

 그러기에, '아, 옛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나 가루를 하늘에서 내려서 먹여  살렸다. 오늘도 하나님이 공짜배기로 하나님의 백성들 먹여 살리고 있다. 또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공짜배기로 먹여 살리고 있다.' '아, 우리가 이렇게  과학적으로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저는 하나님이 공짜배기로 준 건데 하나님이  만든 그것을 너거가.' 천인 만인이 다 달라들어도 만 분의 일도 인간은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거는 하나님이 만들지 인간이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은 만들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인간에게까지 가지고 나오는 데에 하나의 운반의 인간 노력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 만나 가루 하나님이 주어서 먹은 것이나 오늘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나 꼭 같다 그말이오.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면 '아, 내가 이거 순전히 하나님의 것 공으로 먹은 바 아니고 나도 이런  노력을 들이지 안했느냐?' 할 때 그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똑똑히 구별해서  판정이 날 것입니다. '너는 밥 한 숟가락을 먹는 데도 네 공력은 하나도 안  들었다. 네 공력은 하나도 안 들고 순전히 내것을 네가 공으로 먹었다' 하는,  공으로 먹었다는 것을 판정을 해서 아주 계산을 해 가지고서 그 계산이 똑똑히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주일을 지킬라고 하면. 주일날 공부 안 하면 이거 안  된다, 또 주일날 장사 안 하면 안 된다, 주일날 근무 안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그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서 하시는 것이지, 그렇게 하나님이 시험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그거 안 한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안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른  날은 꼭 하나님께서 '너거 식구끼리 먹고 살 만한 그것만 너거가 거둬라.' 요게  하나님의 법칙인데, 요 법칙을 어겨서 거뒀어. 요 법칙을 어겨서 거둔 사람은  어기는 것만 남아 있지 어겨서 거둔 것은 자기에게 추호도 효력을 주지 안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잡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말씀대로 지켜 행하므로 살아지는 고것이  자기에게 합당한 그 양을 주시는 것인데, 말씀을 어겨서 무엇을 해 놓으면  그것이 제 보기에는 어리석게 '말씀을 어겨서 내가 이래 하지 안했으면 우리가  다 굶어 죽었겠다.' 하지마는서도 말씀을 어겨서 한 것은 자기나 자기 가족에게  대해서는 털끝만치도 효력이 없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단정을 지워야  됩니다. 요게 믿음이요. '왜? 나는 주일을 범해서 벌어 가지고 먹고 살았는데'  우리는 어두워서 범해서 번 그것이 자기에게 하나도 효력이 없고 양식이 되지를  못하고, 유익이 되지 못했고. 영양이 되지 못했고, 자기에게 도움이 털끝만치도  되지 못한 것을 여기 성경법대로 보면 그런데 우리 보기에는 안 그러니까 고것을  가지고 자꾸 모순된 것을 거머좋고 오래 동안 해석을 하고 연구하면은 과연  나중에 아멘이라는 그 답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 20절에 보면, 16장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것은 당일 먹고 그  이튿날 두지 말아라 했습니다. 요거는, 수입을 놔두고 요거는 보존에 대해서  말합니다. 네가 이 보관도 하나님이 법칙대로 보관하라는 대로 보관을 해야 되지  오늘 아침에 거둔 거. 아침에 거둔 것을 이것을 저녁까지 보관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관하라고 했기 때문에 보관해 두면은 고것이 생생하게 뭐 요새  모양으로 냉장고 안에 넣어 그런 게 아니라 안 넣고도 생생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것을 저녁에 다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아라 했는데 하나님 말씀  어겨서 보관한 것은   그 이튿날 아침까지 뒀습니다, 그들이. 안 둔 게 아니라.

  둔 것은 전부 벌레가 나고 썩은 냄새가 나 가지고서 그들에게 하나도 효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요 세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거는 인간 노력이지, 먹고 마시는 것은 순 주님이  공짜배기로 줬는데, 인간들이 이런 저런 노력을 한다 해도 그거는 만드는데  노력은 아니다. 쌀을 만드는데 노력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들었지.' 요것이  구별이 잘 되어지면은 심령이 좀 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 수입하는 것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의 법칙대로 수입해야 되지 법칙 어겨서 수입한  거 자기에게 아무 효려 없다 요것도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요런 거 다 학정이  됩니다. 믿음에서 다 확정이 돼요. 또 보관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관하라는 그  법칙에 따라서. 법칙을 어기지 안하고 법칙대로 보관해야지 법칙을 어겨서  보관되는 것은 하나도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 요것도 단정을 우리가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안식일날 그날은 너희들이 가서 거두지 말아라. 들에 나가서  거두지 말아라. 들에 나가도 없다' 이랬으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는 안식일  날 만나 거두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르게 살모시 나갔소. 그 전날 거두어  놓은 것이. 안식일날에는 거두지 말고, 하나님이 배를 주시겠다고 했기 때문에  애를 거두어 놓은 그것이 다른 때는 고만 그 이튿날 아침까지 두면은 벌레가  나고 썩어서 못 지냈는데 안식일날은 그 이튿날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도록  하나도 상하지 안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나 어째 무슨 해석을 해 가지고서  안식일날 거두러 나갔든지 거두러 나간 백성들이 많이 있었다 말이오. 나가  가지고는 아무리 돌아다녀야 만나 가루 뭐 조그매도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요것으로 뭘 보이느냐?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칙을 어겨서 이 안식일날 거두지  말라고 하는 그것을 거둬 봐야 저들이 거두지 못한 것처럼 그 법칙을 지금  우리는 주일날 지켜야 되는데. 주일날 자기가 무슨 일을 해 가지고서 수입을  보겠다고 하는 거, 주일날 제가 아무리 무슨 일을 해도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  수입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공부 암만 해봤자 그 공부가 자기에게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일날 장사 아무리 해 봤자 그 장사가 자기에게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일날 아무리 근무를 해 봤자 자기에게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일날 아무리 공장을 돌려 봤자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일날  무슨 사업을 아무리 뭐 골빠지게 해도 자기에게 유익은 하나도 얻지 못한다 요런  것을 말세에 단정해야 됩니다. 요 주일 지키는 법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는  말하지 안했습니다, 여기에 말해 놨기 때문에 말하지 안했어요. 요 법칙을  지켜야 됩니다.

 우리는 이 주일날 무엇이든지, 주일날은 수입해도 수입 못 한다. 아무리  수입할라 해도 수입을 못 한다.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확정을 짓고, 또 무슨  수입이든지 주님의 법칙에 따라서 수입해야 되지 법칙 어겨서 수입한 것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보관하는 것도 주님의 법칙을 따라서 보관해야 되지  법칙을 어겨서 보관한 것은 자기에게 해독만 있었지 유익이 없다. 또 주일날  아무리 수입하려고 애를 써도 그날은 하나도 얻은 것이 없다. 얻은 것이  없지마는서도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모르기 때문에 오늘 장사해 가지고 당장 만  원 벌었는데 수익인 줄 알지마는서도 그 만 원 그것이 뒤에 가서 이만 원이  나가면 손해 갔겠소 유익 됐겠소? 만 원 그걸 인해서 자기 망할 길을 걸었으면  더 손해갔다 말이오. 뭣이든지 하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수입 없다 하는 요  말씀을 우리가 믿고 수입이 없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민수기 15장 32절 이하에 보면,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안식일을 범한 사람들  있었습니다.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 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잡아 놓고서, 잡아다 놓고 하나님 앞에 재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말하지 않으니까 그래 놓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 가지고. '이 사람을 어떻게 하랍니까?' '용서 없이 죽이라. 죽이되 저  진 밖에 끌어다 놓고 멀리 세워 놓고서 이스라엘 전 대중이 돌을 던져 가지고서  돌조산을 만들어 그래 죽여라.' 이래서 사형시켰습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법칙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이것 저것 하는 것은 사형받는 일입니다. 다 오늘도 사형을  받습니다. 오늘도 사형을 받습니다. 주일날을 범해서 이것 저것 활동하는 그  활동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영원무궁토록 자기의 손발이 될 자기 손발의 기능을  다 고만침 뽑아 버렸소. 고만치는 썩어 버렸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일시 사용하는 것을 썩었다는 게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사용할 자기 기능이 다 그것이 다 완전히 썩어 버리니까 그것이 사형 아닙니까?  그거 죽는 거 아닙니까? 또 자기 될 것이 다 죽어 버렸다 말이오. 이래서 그걸  말하기를 '자기를 빼앗긴다' 이랬어요. 자기를 빼앗긴다. 자기를 빼앗긴다. 자기  될 것을 빼앗기니까 자기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  성경에 똑똑히 내세웠습니다.

 이러니까, 오늘도 우리가 주일날을 범하는 이 모든 행위는 다 사형받는 행위요.

지금도 어김없이 사형을 그대로 착착 변동 없이 사형 받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예수 믿기를 모태에서부터 예수 믿어서 칠십 세나 뭐 팔십 세까지  예수님을 믿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전부 이렇게 주일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다  사형받았으니까. 나중에 부활할 때 보니까, 부활할 때 보니까 이 짚둥이 같은 이  덩치만 부활했지 기능은 한 내끼도 없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니 기능은 하나도  없소.

 저는 요새 늙어서 이제 '아 부활할 때 기능 없는 부활 그거 참 안 됐다,' 이래  말은 했지마는 실감적으로 느끼기는 요새 느낍니다. 왜? 제가 육십육 킬로 육십  육 킬로면 어북 뚱뚱한 편 아닙니까? 이랬는데, 빼빼 마른 사람 우리 여기 저  ○○○집사님 못 당합니다. ○○○집사님 빼빼 말라서 '내가 보기에는 내 몸  보고 그이 보면 이 거머쥐고 요라면 부러질 것 같은데 뭐 그 양반이 수도꼭지를  딱 잠가 놓으면 아무리 해야 못 꺼냅니다. 아무리 꺼낼라고 해도 꺼내질 못해.

이 얼마나 잠갔나 꺼내 보라고. 슬그머니 이라면 꺼내져. 또 위생병이라 하는 그  병에 이래 딱 잠가 놨는데 뭐 고무로 대고 해도 안 되고 밥보자기를 대고 해도  안 되고 막 이래 발로 버투고 이래도 아무래도 안 되는데 그 양반한테 이래 '아,  이거 좀 빼 보소.' 그라면 이라면 뺍니다. 이라면 쑥 빠져 버려요. '아, 그 어째  그렇습니까? '뭐 매 안 잠겼더구만요. 목사님이 빼놨구만요.' 나 좋게 하려고  그래 떡 말하지만 힘이 없다 그말이오. 암만 뚱뚱해야 힘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래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면 넘어갈라고 쌓아서 자꾸 이래 이래 가누어야 된다  말이오. 가눠야 되고 아주 가눠서 남 보기에 그거 안 보일라고 아무리 해도 이래  획 자빠지면,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서 떨어져 가지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거 성경 말씀에 기록했으니까 부인은 못 하지마는서도 나는 그 말을 들을 때에  '거 참 거기에도 권능이 갔던가보다 그 어째 의자에서 떨어져 가지고서 목이  부러졌을까?' 했는데 요새는 의자에서 떨어지면 목 부러진다는 그것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제가 오층에 기도하는 거는 요만한 다이인데 거기에 가서 있다가  넘어가면, 콱 넘어가면 내 힘이 들어서. 내 무게가 모가지를 부러트릴 테니까  부러지고도 남겠어요. 이러니까, '이것 참 암만 몸뚱이 있어도 힘없으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이다음에 부활할 때에 기능 없는 부활해 놓으면 이거 모양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여기 저 ○장로님 오시는데, 뚱뚱하이 이래. 그 양반도  뚱뚱하이 나보다도 아마 한 목반이나 뚱뚱해. 이런데, 이래 쌓아면서 뭐 힘이  하나도 없어. 이러니까. 이것 다 우리가 주일을 바로 지키지 안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안하기 때문에 이 기능 다 죽였습니다. 다 죽였어. 우리는 주일을  범하면 죽는 일인 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실은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안식일에 속한 일을 했고 주일에 속한 일을 했는데, 다 새  이스라엘에게 대한 일을 하신 것은 전부 제팔일에 했습니다. 제칠일이  안식일인데 제칠일은 구약에 속한 일을 했고, 신약에 속한 일은 그때 벌써  제팔일에 일을 했습니다. 또 하늘에 속한 것도 제팔일에 일을 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도, 세례 받은 것도 우리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이것도  대속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도 신약에 속한 일이오. 대속의 그 세례를 우리 대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도 제팔일날 받으셨고, 또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신 것도  제팔일날 받으셨고, 그거 다 우리 대신 할례 받으셨는데, 또 예수님께서 변화  산상에 가서 변화되는 것도 제팔일 날에 올라가셔 가지고서 변화 받으셨고 또  나귀 타고 예루살렉 입성하는 것도, 예수님의 재림을 모형한 것인데 그것도  제팔일날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제팔일날 부활하셨고, 또 성신  강림도 제팔일날. 안식 후 첫날에 성령 강림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약에  속한, 천국에 속하고 신령한 백성들에게 속한 것은 전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안식일 지키면서 그 행사는 전부 팔 일 날 했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의 오묘한 것을 우리가 참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 받는 것도 주일날 받는 것을 말했고 우리가 변화되는 것도  주일날, 우리가 부활의 요소를, 부활의 요소를 받는 것도 주일날, 또 천국의  시민권의 실력 받는 것도 주일날, 우리가 이 모두 깨끗해지는 것도 주일날, 이  모두 다 주일날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날은 바꾸라고 했기  때문에 날은 바꿔야 되고 법칙은 바꾸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지키는 그 법칙을  우리가 주일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58장에 있는 이 말씀에 '만일 안식일에' 우리는 '만일 주일에'  해야 됩니다.' '주일에' 이 안식이라 말은 이것은 무슨 말을 이래 안식이라고  하는 고 하니 영원히 인간의 안락처에 들어가는 준비의 날이라는 뜻인데 이  안식이라는 것이 고만 구약에 안식일이라고 자꾸 이름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일이라 하면은 다른 사람이 착각할 것이기 때문에 주일이라 이래  하지 주일이라 말이나 안식일이라 말이나 꼭 같습니다. 안식을 준비하는 것,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4장엔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안식은, 그날은 폐해졌고 '다음 안식할 날이 다시 하 루가 오나니 이제 그날을  받거든, 그러면, 지금은 새 안식일이오. 지금은 새, 안식일이요, 그날은 묵은  안식일인데 . 새 안식일을 이것을 우리들에게 더 알리기 위해서 . 안식일이라  하면 자꾸 모르고 구약 안식일 그걸 끌고 나올 것이기 때문에 주의 날이라 이래,  성경에 주의 날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날에'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발을 금한다 말은, 네 발을 금 한다  말은 우리가 가고 싶은 데 가지 말자 그말입니다. 그만 쉽게 말해서 자기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것이 아니면 저 가고 싶은 데는 가지 말라  그말입니다. 제 가고 싶은 데는 가지 말아라. '발을 금하여 내 성 일에'  하나님의 이 거룩한 날로 구별된 날을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무슨 오락은 춤추는 것도 오락이겠고 또 테레비전 보는 그런  것도 오락이겠고 이런 저런 무슨 장기나 바둑이나 뭐 이런 것 두는 것도  오락이겠고 어짜든지 자기 오락, 그런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이러니까, 여기에서 주일날 이 테레비전 보는 것은 보지 안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이거 안 봐야 됩니다. 주일날 테레비전을 안 봐야 됩니다. 그리고  테레비전을 평소에 보는 거는 뭐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테레비전 그것이  하나 세상을 그렇게 묘사해서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볼 필요가 있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만 벌써 거기에 매력을 가지고서 자꾸 재미를 붙여 가지고 거기에  끌리기 시작하면 그거는 벌써 음행의 포도주에 지금 취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테레비전 안 봐야 되겠고. 그날은 무슨 자기 어떤, 어떤 오락이든지  하지 안해야 되겠고, 와? 오락할 여가가 없소.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이 주일을 일컬어' 요 말이 중요합니다.

'주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그러면 주일이 우리에게는 즐거운 날이 돼야  될 터인데 주일날이 즐거운 날이 되지 아니하고 주일날이 우리에게는 고통의  날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그저 자꾸 회개를 해야 되지. 일하는  사람은 일할 욕심에서 '또 주일 닥쳤다. 또 주일 닥쳤다.' 장사하는 사람은 '허,  뭐 장사 문 열자 또 주일 닥치자 언제 장사 할 여가가 있나?' 이래서 이날을  즐거운 날로 영접하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은, '목사는 뭐 그거  모르니까 그렇다.' 목사는 안 그런 줄 압니까? 목사는 주일날을 즐거운 날로  영접 다 하는 줄 압니까? 아니오. 즐거운 날로 영접 안했다고 회개를 합니다.

왜? 또 그랍니다. '아이구, 또 내일이 주일이구나. 내일이 주일이구나.' 이라면  이거 설교는 이거 자꾸 안 나오지 이러니까 등에 콩이 튑니다. '내일은 또  주일이라' 이래 가지고서 즐거운 날로 맞이한다는 이게 참 얼마나 어려운지.

 이걸 회개를 하고, 이래 쭉 생각해 보면 '아, 이 주일날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안했으면 어찌 됐겠느냐? 이 주일날 우리가 만반의 모든 구원이 다  여기서 나오는데 주일을 안 줬으면 어찌 되겠느냐? 이 주일을 즐거운 날로  맞이하지 안하는 이게 참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노를 쌓는 일이다.' 여러 가지로  이래 좀 새김질을 하고 나면은 회개가 되고서 '주일날 이 참 좋아. 주일 참  감사하다. 이 주일을 주시고, 다른 데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데, 주일 지키기  위해서 생명 내놓고 이라는데 우리는 자유로 지키게 되니까 얼마나 기쁘냐?'  이거 목사들도 시험에 든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깜빡하면 주일날을 즐거운  날로 이렇게 맞이 못 하기 쉽습니다. 아이들도 그래요. 아이들도 주일날을  즐거운 날로 이렇게 맞이 못 하는 학생들 되기 쉽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도 우리가, 자. 주일날은 발을 금해서 우리 가고 싶은데 가지  말자, 요거 하나. 우리 가고 싶은 데 가지 말자. 또 우리 즐거운, 그만 오락에  취미가 붙어 가지고서 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구원 주님의 대속과 부활이  연합되는 이 참 진진한 이것을 잊어버리고 고만 그 오락에 꼬박 넘어간다  말이오. 고만 거기 넘어가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무슨 연합해야  된다는 그 마음은 다 도망가고 없어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오락을 행치  안하도록,  또 '즐거운 날이라' 온 식구들이 다 주일날을 즐거운 날로 이래 여길 수 있는  즐거운 날로 주일날을 맞이할 수 있는 이 가족이 됐으면 참 행복 됩니다.

'아이구! 아이구! 내일이 주일이지요. 또 아내도 '여보, 내일이 주일이지요?'  이제 또 남편도 '아, 내일이 주일이제?' 이렇게 참 주일을 즐거운 날로  맞이한다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는데 에는 그렇게 많은  새김질을 하고 자기가 성신의 감화를 받지 안하면, 자꾸 이래 연구하면 주일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왔으며, 이날은 무얼 하며 무슨 수입이 있으며, 이날이  아니면 어찌 되며, 이날에 뭐 하느냐? 이것을 자꾸 깨닫게 되면 '아. 이날은 참  감사한 날이요, 주님이 주일을 주시지 안했으면, 주님이 나 위해서 다시 부활해  주지 안했으면 우리가 영생을 어찌 얻습니까? 새생명을 어찌 얻습니까?'  이러니까, 생각하면은 좋아서 뛰고 굴릴 만한 날이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이  마귀에게 끌려 가지고 주일을 즐거운 날로 맞이하지 못하기 쉽다 그 말이오.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아, 이날은 참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이다, 이날이 없었으면 우리는 뭐 아무리 여러 천 날 만 날을 가져도  그날이 다 죽은 날이요, 이 주일이 안 끼어 있으면 이거 그만 날은 다  죽었습니다. 날이 다 죽었소. 우리가 암만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뭐 백  년. 이백 년, 그때 과거에는 뭐 구백 육십 세까지 살았지마는 천 년을 살아도  아무 소용없어. 주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이오. '존귀한 날이라'  이날은 참 존귀한 날이라. 이것을 존귀한 날로 우리가 깨닫기까지 생각하면  나오는데, 자꾸 샘을 파면 물이 나옵니다. 땅을 파면 물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고 생각하면 이 '즐거운 날이라 또 존귀한 날이라.' '이를  존귀히 여기고' 이러니까, 주일을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이제  제 길로 행치 않는다 그 말은 제 생각대로 하지 아니하고 제 재미대로 제  취미대로 제 마음대로 하지 안하고 이 법칙에 매이자 그 말이오.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 하면'  사사로운 말을 하지마. 이거, 요거 하나 지켜보면 참 지키기 힘들어요. 지키고  보면 고만 주일을 범했어. 허 참. 이 목사가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더 많이 그럴  거라. 이거 하다 보면 그만 사사로운 말 해 버렸어요. 쑥 나와 버렸다 말이요,  고만 이 사사로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 구원에 관한 말이 아닌 말은  사사로운 말입니다. 구원에 관한 말이 아닌 말은 사사로운 말이오. 오늘은 이  주일날 주일에 대해서 설교했으니까 이 주일에 대해서 잠자기 전까지는 자꾸  이런 주일에 대한 것을 또 생각하고 얘기하고 생각하고 얘기해야 할 터인데 이거  아닌 다른 말을 옆에서 말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만 한마디 거들었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사사로운 말을 해 버렸다 말이오.

이래서, '이거 주일을 지키는 데에는 어떤 게 좋으냐?' 그래서. 그만 주일을  지키는 데에는 딱 오후 예배 보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고 와서 저 어데 산에  가서든지 어데 가서든지. 그만 하다 안 되면 누워 자 버리든지, 고만 이거 좀  사사로운 말도 안 하고 이래 할라 하면은, 그라면 송장같이 누워 자 버리든지  그리 안하면 딴데 가서 자꾸 이 주일에 참 마땅히 생각하고 묵상할 것만  묵상하고 노력할 것만 노력하고 이래 하든지 이거 주일 하루를 이사야 58장 13절  이하에 있는 요 말씀대로 지키려고 해 보니까 참 힘이 들어요. 이래 지키면,  지키려고 하니까 힘이 드는 것만치, 힘이 드는 것만치 그 힘든 것이 나중에는  기쁨으로 변화가 돼 버립니다. 힘든 것이 기쁨으로 변해져 버립니다.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요 어기지 안하고 요대로 주일을 지킬라고 애를 써 서  요러니까. 애를 쓰니, 뭐 그 애를 써 보면 알아요. 애를 써 보면 사탄이 그놈이  얼마나 날랜지 압니다. 애를 써 보면 요 틈을 타서 딴 게 쏙 들어오고 조 생각이  들어오고 요 생각이 들어오고 또 요 사람이 요 말 하고 조 사람이 조 말 하고  자꾸 뭐 쉬지 안하고 칼을 가지고서 자꾸 물리쳐도 뭐 어떻게 들어오는지. 그저  이 한 주일 하는데도 처음에는 들어오는 거, 그 성신의 검에. 하나님의 말씀에게  무찔러 죽는 것이 여러 수만 명도 될 것이고 수억억도 더 될 거라. 요게  들어오고 조게 들어오고, 이런데 다 이렇게 쳐서 이러나 그것이 언간히 정복이  되면 그런 것이 들어오는 것이 진압이 됐으니까 그렇게 자꾸 쉽게는 안 들어오고  이러다가 갑자기 고런 틈을 타 가지고 싹 들어와 버립니다.

 이것을 못 들어오구로 방비하고 이렇게 하다가 보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와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즐거움. 이러니까, 우리가 이 참 진짜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 믿는 사람이 우울하고 번민하고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서  그렇게 못 하는 거, 이거, 바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케 하려 함이 이게 하나님의 약속인데, 이거 아, 되는 건  그렇다 그말이오. 오늘도 우리가 주일을 지금 벌써 거의 반날은 지내고 온 날이  다 지내가는데, 남은 때라도 요 말씀대로 지켜보자 고 하면은 원수가 뭐인지  알아. '아, 나를 미혹시킨 사람은 저 사람이로구나.' '나를 미혹시킨 거는  조거로구나' 그리 안하면 몰라요. 미혹시킨 거는 모르고 미혹시켜서 내가  미혹받았으니 나도 멸망받고 그 사람도 멸망 받고 미혹시킬 때 미혹인 줄 알고  미혹을 안 받을라고 거기에 딱 방비해서, 미혹을 안 받을라고 딱 방비해서 고걸  잘 대항해서 싸우지 안하면, 싸운다는 것은 그저 속으로, 이 싸움은 혈육 싸움이  아니고 고 미혹 받지 않으려고 속으로 기도하면서 단단히 이를 갈아 불이고  요렇게 애를 쓰고 이러면 나는 미혹 안 받았으니까 나도 살고 그 마귀에게  이용물이 돼 가지고 날 미혹할라 하다가 미혹 못한 그 사람도 그만 삽니다.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사요. 마귀 그놈은 '에이 그놈 독한 놈이다' 하고서 그만 도망을  쳐 버린다 그거요.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땅의 높은 곳에  올린다 그말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주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땅의 높은 곳에 올린다 그 말은 이 세상에서  높여 준다 그말이오. 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안 하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높여서 축복을 해 주신다  그말이오. 축복 받을 수밖에 없지요. 왜? 아, 주일 하루 지키는데, 주일 하루  지켜서 그날에 엿새 동안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주일날  얻기 때문에, 주일날, 주일날 얻어 가지고서 지키기 때문에 주일날 실패하면 다  실패요. 이레 가운데에 주일날 실패하면 이레는 다 실패입니다. 그러기에,  그전에는 ○○○목사님이 늘 내가 오층에서 들으면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이  무슨 날입니까?' 학생들이 '주일날입니다.' 또 '시간 중에 제일 귀한 시간이  무슨 시간입니까?'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이랬는데 요새는 그 연습 안  시키니까 아마 좀 어두워져 가는 것 같애.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야곱의 업으로 기른다 그 말은 열 두 지파, 가나안 열 두 지파가 가서  이 지파에게는 이 지역을 펐고 저 지파에게는 저 지역을 줘서 그렇게 열 두  지파에게 지경을 갈라 가지고서 그 지대를 나눠 줬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형이라 그말이오. 하늘나라에 가서 이 면에서 이면에 활동할 사람 저 면에  활동할 사람 각각 다 분야가 각각 달라 가지고서 그러기 때문에, 요 사람은 요런  형편 조런 처지에서 고게 만들어지고 조 사람은 조런 처지에서 만들어지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담된 그 구원이 각각 따로 있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서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만듭니다. 나기 전부터도 요 사람은 감정이 예민하게 요 사람은  미련하게 요 사람은 혈기 있게 요 사람은 실수 잘하게 고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 고 가운데서 울며 불면서 노력해 가지고서 만들어지는 그게 뭐이냐  하면은 하늘나라의 그 사람에게 분담된 그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야곱의 업이라 말은 야곱의 열 두 지파가 각각 이와 같이 있는 거  모양으로 열 두 지파 열 두 사도, 이렇게 반열이 있는데, 네 반열, 네 반열 네  소속 네 구원 그것을 잘 이루게 해 주시겠다, '야곱의 업으로 기른다.' 네게  분담된 네 구원, 네 길을 잘 가게 해 주고 이 세상 모든 것도 다 높여 주시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단정합시다. 주일날은 매매하지 말 것. 또  일하지 말 것. 또 그날은 똘똘 뭉쳐 가지고서 어디다가 기울일 거냐? 모든 것  다, 옷도 마음도 몸도 전부 다 깨끗하게 해 가지고서 어데다가 전력 기울여?  전력 기울이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다  기울이자 그말이오. 기울여 가지고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떠한지 좀 그 구경을  하자 그말이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연구하고 연구해서 깊이 넓게 깊이  자꾸 이래 파고 들어가고,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넓게 깊게 자꾸 파고  들어가 연구해 들어가자 그거요.

 이래서, 이 주일날 이날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지식도 많이 자라고 또  실감도 많이 자라고 각오와 결심도 많이 자라고 권능도 많이 자라고 이래서 그  이튿날 월요일부터 사는 그 생활에 주일날 받은 그 지식과 능력과 소원을 가지고  고대로 실천에 옮겨서 살 수 있는 이 사람이 돼서 요렇게 주일날 얻어 가지고서  또 엿새 동안 살고, 또 엿새 동안 살고 나서 또 주일날 거석하고 이렇게 하면은  주일이어서 오기를 기다릴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인데, 우리가 아무 무의미하게  살기 때문에 주일이 즐거운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그렇게 여겨지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주일을 범하지 맙시다.

 오늘 오전에 '자 그러면, 주일날 매매하는 건 죄라 하니까 이 토큰을 내가 돈을  들여서 학생들 태워 가지고 오는데 이라면 돈을 내가 쓰니까 이거 죄가 되지  않습니까? 이런데 이거 어째야 됩니까? 나는 죄는 짓기 싫습니다.' 이래서,  '그래. 그거는 죄지. 죄니까 어짜든지 그것도 안 하도록 하라. 그러나 자기가 그  사람들을 구원을 하기로 했는데, 붙였는데, 그 사람들을 그래 가지고서 내가  주일날 토큰 쓰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멸망을 시키면 그  멸망하는 그 손해와 또 자기가 주일날 돈 써서 손해 가는 그 손해와 두 손해를  수지 계산을 맞춰 봐라.'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진리는 진리대로 두고 어짜든지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도록 자꾸 우리가 노력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는 큰 죄를 중간 죄로, 중간 죄를 적은 죄로, 적은 죄를 없는 죄로, 없는  죄를 작은. 조그만한 의로, 작은 의로 중간 의로, 중간 의로 큰 의로 자꾸  이렇게 진보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이 주일날 먼 데서 차타고 오는 이것이 이거 뭐 '지금은 괜찮다.'  이라면 양심이 썩어 버리고 안 됩니다. 이것은 주일을 범하는 건데 요것조차도  범하지 안하면 좋겠는데 이걸 범하지 안할라 하면은 진리의 말씀을 내가 듣지  못해서 깨닫지 못해서 다른 모든 생활이 전부가 다 절단날 것이고 또 주일을  범할 것이고, 주일을 범하지 안하고 옆에 다른 또 어떤데 가 가지고 모여 가지고  우리끼리 예배 본다든지 또 몇이 모인 데 간다든지 이래 가면은 거기서 깨닫지  못하니 요런 죄를 짓고라도 깨달아지는 데가 가지고서 이제 깨달아서 차차 힘을  얻어 가지고 요것까지도 고쳐서, 주일날 차타는 것까지도 고쳐서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하려는 목표를 두고 향해 가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후퇴적인, 후퇴적인 범죄는 하나님이 용납지 안하고 전진적인 범죄는 하나님이  이해하시고 기다리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 여기 지금 아마 와서  있을 것입니다. 제사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제사에 대해서 내가 그때 말할 때  그래 말했습니다. '제사를 열을 지내던 사람이 아홉을 지내는 것은 지낼 수  있다. 아홉 지내던 사람이 열 지내는 걸로 올라가면 안 된다. 열 지내는 사람이  아홉. 아홉, 제사 아홉 번 지내는 것으로 여덟 번 지내는 것으로, 자꾸 힘 있는  대로 해서 일곱 번, 다섯 번. 두 번, 한 번 그 다음에는 안 지내는 것으로 자꾸  이렇게 신앙으로 전진해 나가면서 차차차 그 죄를 감소시키는 이것은 할 수  있지마는서도 자주 뒤로 물러가서 죄를 키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노력을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요새는 그만 주일날 차타고 다니는 거. 음식 사 먹는 거, 음식도 사 먹는 걸  계산을 대 봐서 그 사 먹는 것이 수지계산에 나을상 바르면 사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거 안 먹어서 만일에 병이 나 가지고서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자기가 주일도 모르고 지키지 못하고 할 때에는 고 사먹는 죄를  범하고라도 그렇게 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죄는 죄로 정해  놓고 우리가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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