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신 소망과 방편

 

1986. 9. 2. 화새벽

 

본문:누가복음 5장 4절∼11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찬송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주관대로 하지 말고, 가사도 생각할 뿐 아니라 곡이든지 뭐이든지 이럴 때는 같이 하기를 힘써야 됩니다. 속도도 같아야 되고 또 그래 못 해 그렇지 음의 높고 낮은 거 또 좀 웅장하게 할 것 또 아주 날카롭게 할 것 그런 것을 다 고저청탁이 꼭 같이 되도록 그래 하는 게 좋습니다. 한 사람이 찬송하는 것같이 그렇게 성의를 기울여서, 뭐 ‘어어’ 입은 가만 있고, 입은 가만히 있고 말이요, 입은 가만히 있고 `가기르 바기 보이이이 드아에 으으 으으으으’ 이랄 수도 있고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 앞에 빨리 나갑시다’ 이렇게 혀도 입술도 마음도 신경도 다 그렇게 합해 가지고 찬송을 해야 되지,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지 않겠소? 주님에게 찬송하는 것이니까. 한번 더 합시다.

어제 아침에는 이 말씀에서 셋 단계의 소망과 셋 단계의 방편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이 아니고 그저 아무나따나 주 대서 그렇게 한 말인가, 이건 성경대로인가? 그것을 어제 아침에 말씀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성경대로라면 이는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가감을 할 수 없습니다. 전지 전능자가 이렇게 우리에게 계약적으로 선포해 주셨고 또 법규적으로 선포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도 어기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도 어길 수가 없는 것이요 또 어떤 피조물도 여게는 가감을 시킬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서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단계의 소망과 세 가지 단계의 이 방편이 과연 진리인가? 변할 수 없는 진리인가? 이 셋 단계는 하나님도 당신이 선포해 놓은 법이기 때문에 당신도 어길 수 없는 진리인가? 이는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획 하나도 이것은 가감을 할 수 없는 진리인가 이것부터 먼저 우리가 확정을 지워야 된다는 것을 어제 아침에 말씀했습니다. 어제 아침에, 이것은 다 이 본문에 나타난 진리라, 본문 속에 확고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어제 아침에 밝혔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자기가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안할 수 없는 그런 단계도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말씀대로 할라고 애를 써 하는 게 아니라 안 할라고 애를 써도 안 하고 안 되는 그런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셔서 하나님 말씀이 과연 실상이며 권위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 안 먹을라고 하니까 억지로 입을 벌리고라도 먹이니까 처음에는 안 받아 먹더니마는 나중에 먹어 보니까 젖과 꿀이 되니까 좋아서 자꾸 달라고 나중에 울라 하는 것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는 이 맛을 보이기 위해서 안 할라 해도 해지도록 그렇게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거는 그 신앙 생활이 아니오.

이라다가는 나중에 맛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라고 애를 써도 처음에는 되더니마는 차차 차차 어려워져서 나중에는 ‘말씀대로 행하지 안하면 안 되겠다, 말씀대로 행하는 데는 내 소유가 절단나고 몸이 절단나고 목숨이 절단나도 이 말씀대로 나는 행해야 되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내 소유나 몸이나 목숨보다 더 귀하다.’ 이거 이 가치를 깨닫고 자기가 이대로 행할라고 애를 쓰면 하나님이 이제 그것을 참 자기가 행하여 소유를 손해보고 행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몸을 손해보고 행하기도 하고, 생명을 손해보고 행하기도 하여, 행하는 거는 꼭 같지마는 그 사람이 지금 행하는 그 소원과 강력과 강도와 또 자기의 마음이나 모든 것을 기울이는 것과는 아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해 놓은 계약을 네가 어느 정도 믿나, 최고로 믿는 것이 그게 제일 하늘 구원을 제일 잘 이룬 사람이고, 또 최고로 자기의 모든 것을 기울이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고, 최고로 대적이 많아도 그 대적을 다 이긴 것이 그것이 잘 믿는 것이라 말이오.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방해하는 대적을 이기는 그것이 대적 그게 다 내것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님 말씀을 행할라 할 때에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그것을 취할라 하면 행할 수 없고 행할라고 하면 그것을 버려야 될 때에 버리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이 말씀 때문에 버린 그것을 이 말씀이 다 책임지기 때문에 그것이 그 자체가 구원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 가지고, 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도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데서 주시고, 또 이 말씀을 네가 돈 천 원보다 귀하게 여기느냐? 말씀이 귀하기는 귀하지마는 천 원보다는 귀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천 원 이해가 있을 때에는 말씀을 버리고 천 원을 자기가 취하는 사람도 있고, 온 천하를 준다 해도 이 말씀은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어도 그것을 취하지 안하고 이 말씀대로 이행하는 일을 한다 말이오.

거게서 이제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유 관계, 인정 관계, 또 하나님에게 등용당할 수 있는 실력 관계 이런 것이 다 맺어지는 것입니다. 믿으면 맺어져요. 이러기 때문에, 차차 차차 예수 믿는 거는 어려워집니다.

어려워질 때에 최고가 어떤 것인고 하니 마지막에 생명을 바쳐서 생명이냐 네가 하나님의 이 선포한 계약의 말씀이냐, 이 법규의 말씀이냐 네 생명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하는 그것이 최고의 시험이요, 그때에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약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소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의 시험이요 최고의 신앙이요 그것을 통과하면 최고로 믿음 준비한 준비니까 무궁세계에 최고로 대우합니다.

최고로 대우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순종하니까 대우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결합이 됩니다. 그 사람이 영원 무궁에서, 만일 우리에게 가진 것은 생명보다 큰 게 없기 때문에 생명에 관계가 돼도 하나님 말씀 이행하고 또 엄격하게 받들어 섬기는 일이 요동치 안하니까 그 사람은 다시 요동시킬 만한 것이 없다 그말이오. 요동시킬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그 직책을 맡겨 놓으면 잘 감당하지요.

이러니까, 신앙 생활은 가다가 차차 차차 이 말씀을 지킬라고 하면은 제일 처음에는 안 지킬래야 안 지킬 수도 없도록 저절로 지키도록 하고, 또 나중에는 조그매한 힘써도 지켜지고, 나중에는 어북 힘써도 안 지켜지고, 나중에는 점점 어려워져서 마지막에 가서는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그런 단계로 자꾸 몰아넣는다 그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우리가 자기를 믿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땅의 걸 소망하느냐 하나님을 소망하느냐, 자기 이 피조물들의 주장과 생각과 그 모든 견해 비판 평가를 이것을 크게 여기느냐 하나님의 비판과 평가와 계획을 크게 여기느냐 그거 자꾸 비교하는 것, 보다 어느 것이냐 보다 어느 것이냐? 이러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생명을 기울이는 이 어려움인데 그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참 생명하고 바꿔야 되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지켜야 되느냐 안 지켜야 되느냐 할 때 그때에 ‘지키는 이것이 이거 과연 성경 말씀이가,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하는 것이냐?’ 이럴 때에 그때에 ‘이거는 성경에는 없는데 그저 목사가 하는 말이니까 목사 말을 위해서 내가 생명을 바칠 것이 뭐이냐, 암만 그냥 순종하지마는 생명까지 목사 말을 위해서 바칠 수가 있겠느냐, 사람 말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겠느냐?’ 그리 됩니다.

그러나 고거 자기가 ‘이거는 목사님이 소개를 하기는 해 주셨지마는 이거 목사님 말이 아니라 성경에 있지 않더냐? 성경이다.’ ‘성경이다' 할 때에 그때에 자기에게는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확실히 믿어지기도 하고, 또 ‘성경이니 나는 바쳐 살아야 된다’ 할 때에 성경 말씀을 믿으니까 말씀이라는 이 진리 자체가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 사람을 지켜 줍니다.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한 자들 가운데에서 업을 누리게 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꼭 설교를 들을 때는 이게 성경대로냐 성경대로 아니냐 하는 그것을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엿새 동안에 지은 실력을 가진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하는 그 말씀은 제이위 성자, 인격 존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천지 창조는 말씀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말씀인 이 진리를 가지고 천지를 창조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성경이냐?’ 할 때 성경이라 하면은 우주를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만든 그 권위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이 거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피조물이 거게 대해서 대항하거나 그런 비중이 아닙니다. 그와 무한히 탁월해 있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거게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거게 항거를 못 한다 그말이오.

그러나 그 들은 말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이 목사의 말이라 하면은 목사의 말은 하나님 말씀과 비중이 얼마나 다른가? 뭐 비중 다른 것이 뭐 그만 이는 창조주 전능이요, 전능이요, 전지요, 인간의 말은 그까짓 것 다 거짓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차이 있다 그말이오.

자기가 “믿는 대로 되리라” 했어, 믿는 대로. “네가 믿는 대로 되리라” 했는데 하나님 말씀인 걸 깨닫고 “하나님 말씀 이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대 저 하나님이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랬습니다.

이렇게 내가 믿을 때에 이 말씀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이 역사를 하는데 내가 안 믿으면 이 역사를 못 한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믿지 안하니 어짤 수 없다, 믿는 대로 되리라 했어. 믿으니까 병 낫고 안 믿으니까 병 안 낫지 안했습니까? 주님이 오셔 가지고 죽은 나사로 살릴라 할 때에 이제 ‘송장 내음새가 나는데 되겠습니까?’ 하니까 주님께서 못 살린다 그말이오. 안 믿으면 못 살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지 안했느냐?’ 이라니까 `예, 믿습니다.’ 하고서 돌 옮겨 놔. 그러니까 살아나지 안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그 자체와 그 능력과 그대로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 알고 난 다음에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부정하니까 그게 벌써 죄인데, 하나님을 부정하면 죄인데 죄에 무슨,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 줄 리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이루어 줄 수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설교를 들을 때에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 사람의 말이냐,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해석을 해서 줬는데 해석한 것을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니 ‘과연 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에 있다.’ 하는 요것을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첫째는 그 말씀을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람마다 다 깨달을 수가 있는 거는 아니고 깨닫는 은혜도 사람이 각각 받아서 이 면을 깨달은 사람 저 면을 깨달은 사람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깨달아도 그 깨달음을 나에게 전해 줘서 내가 배워서 깨달으면 내가 깨달은 게 되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그것을 모르는데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하나님의 선지자와 한가지인데선지자 될 때도 있고 또 마귀 될 때도 있겠지마는하나님의 종들이면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해서 나에게 주셔서 이렇게 해석했다. 해석했는데 이 해석한 것이 과연 성경에서 성경대로 나온 해석이냐, 이 성경대로가 아니고 아무나따나 그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주 들어붙여 놓은 것이냐, 성경에서 나왔느냐 요것을 또 알아야 되겠다 말이오. 요거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첫째는 깨닫고, 알아야, 기억을 해야 뭐 그걸 조사를 하지요.

기억을 하고, 둘째로는 ‘이 성경이냐 성경이 아니냐?’ 그것을 둘째로 자기가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확정을 지워야 하나님의 말씀을,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확정을 지워야 내가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믿음이 생겨지지요.

또 하나님 말씀이라도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하면은, 믿어지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 아니고 목사 말이다’ 이라면은 제가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거 중요합니다.

그러면, 제일 처음에 하나님 말씀을 설교를 들을 때에 제일 처음에 우리 할 일이 뭐입니까? 알 것, 기억하고 알 것 아닙니까? 기억하고 알아야 뭐 하지. 기억하고 알아야지요. 기억하고 알고, 둘째로 할 게 뭐입니까? 성경 말씀이냐 아니냐 그것을 조사해야 돼요. 왜? 조사하는 것은 나에게 전능한, 하나님 말씀은 전능한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내가 모시면 그 말씀은 나를 어떤 피조물의 박해에서도 능히 지켜 주실 수가 있지마는 인간 말은 나를 피조물들 박해에서 지킬 수 가 없다 그말이오.

하나님 말씀을 내가 모시고, 이 말씀을 떠나지 안하고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의 보호 아래에 있으면 이 말씀이 전능이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와 가지고 해하지를 못해요. 위하기나 해주지 돕지 뭐 해하지는 못합니다. 이제 실상을 이루는 이 권위를 위해서 따진다 그거요. ‘하나님 말씀이냐 아니냐?’ 인제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우리 셋째로 할 일이 뭐입니까? 셋째로 할 일이 뭐입니까? 셋째로 할 일이 뭐이지요? 어제 아침에도 말했는데. 이제는 믿어야 돼.

이제 다 안 데 속한 것 아니요? 그 안 데 속한 거라. 알고,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냐 성경이 아니냐?’ 하는 이게 다 아는 데 속한 거라.

알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뭐해야 돼요? 알고, 둘째로는? 믿고, 또 셋째로는? 바라보고, 그거 내가 소망을 해야 돼. 바라보고, 또 넷째로는? 나를 맡겨야 돼요.

왜? 이 전능이니까 나를 맡으니 내가 나를 맡겨야 돼. 맡기고, 또? 또 의지하고, 또? 그다음에 복종하고, 또? 참고 견디는 것, 주님이 주실 때까지 참고 견디면 돼져요. 요라면 물샐틈이 없어요. 어제 아침에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또 여게서 좀 하나 생각할 것이 뭐이냐? 일단계에 시몬이가 말하기를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우리의 이 구원은 삼단계의 소망, 삼단계의 방편인데 이는 다 우리의 수고가 없으면 안 됩니다. 수고가 없으면 안 돼요. 수고로 이 걸어가는 것인데 수고 없이 뭐 되고자 하는 그런 사람은 안 됩니다.

어짜든지 보면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구원을 이룰라고 할 때에 수고를 해야 된다는 그것을 생각을 하십시오. 또 수고만 한다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이 도를 지켜 나가야 되는 것. 그러면 수고뿐 아니라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야 한다는 이게 있어야 된다 말이오. 그냥 뭐 믿으면 되니까, 믿으면 되니까 아픈 것도 자기가 약 쓰기 싫고 또 돈 들고 이라니까 그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면 낫지 하고서 그렇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주신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우리 사람 만드는 것이 하나님 목적이지 뭐 그런 것 주고 안 주는 그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제가 저 할 일을 제가 자꾸 하도록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자연을 줬습니다. 자연을 줬기 때문에 자연도 하나님이 주신 법칙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자연을 이것을 쓰고 자연의 법칙에 속해 가지고 자연의 법대로 살다가 거게서 그 자연의 법을 초월해 가지고 그보다도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하나님의 법, 또 이 자연을 초월한 하나님의 진리의 이치, 점점 이와같이 올라가고 자꾸 자라가야 되는 것이지 그냥 게을배기로 있는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니라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처음에는, 만일 무슨 사건이 있으면 자기가 해야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대로 그 일을 해아 됩니다. 하나 하나님 떠나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와같이 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셔서 내 수고하는 이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겠지’ 하는 것을 믿고 수고를 해야 됩니다.

수고를 하면서는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를 바라기는 바라지마는 내가 수고를 하는데 수고로 너무 수고하는 것으로 많이 기울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없으면 또 안 된다 그거요. 그러면 수고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그걸 조절합니다. ‘너는 하나님 바라보는 거는 있다마는 수고가 적으니까 안 됐다.’ 그러면 또 수고가 될 만치 채워져야 됩니다.

이러니까, 그게 뭐 천태 만상인데 억억만 종류도 더 넘으니까 그걸 어떻게 다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자기가 참 소망을 가지고 양심을 써서 나가면은 저절로 알아지고 저절로 배워지고 요렇겠다 하는 것을 자기에게 깨달아지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기름 부음이 너희들에게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 준다” 중생시킨 성령이그 기름은 성령을 말하는 것인데가르쳐 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일계단의 소망을 가지고 일계단의 수고를 하는 그 사람이라야 이계단 삼계단에 올라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차차 향상하는 것이고, 차차 성장하는 것이고, 차차 온전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지 대번에 무슨 미신 모양으로 무슨 도박 신앙으로 이렇게 되어지는 게 아니라 꼭 순서가 있어요.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는, 그러면 그 순서를 한 말로 말하면 수고해야 된다, 수고해야 된다. 수고할 수 있는 소망이라야 되고, 또 자기가 수고할 수 있는 방편이라야 되지 그거 지금 소망으로 점점 자라가고 방편으로 점점 자라가는데, 이 소망은 그저 소망을 가지되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는 소망이라면 그거 참 소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거 거짓부리라 안 된다 그말이오. 또 이 방편은 좋다 해도 자기가 실상으로 실지로 수고할 만한 그런 방편이 아니면 그 방편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라 말이오. 알아듣겠습니까? 이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면 안 돼요.

이러니까,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차 소망 일차 방편을 시몬 베드로가 가졌었는데, 가졌었는데, 이 소망도 그저 말 소망이 아니라, 말 소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말하니까 그냥 그저 그렇다 하는 긍정 소망이 아니라.

긍정 소망이 아니고, 말 소망이 아니고, 얘기 소망이 아니고, ‘그렇단다’ 하는 그런 인정한 소망이 아니라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실상으로 밤새껏 수고할 수 있는, 수고할 수 있는 그 소망이라야 실상의 소망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자기가 고기 잡기를 소망하고 그것을 얻어 가지고 세상 물질을 좀 취해 가지고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는 그 소망을 가지되 말만 하는 그런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그 소망도 실제로 자기가 ‘아무래도 이거는 해야 되겠다’ 하고 밤이 도록 그저 수고를 할 만한 그런 소망이라야 그 실상의 소망이라 그말이오.

또 자기가 쓰는 방편도 ‘이제는 내가 이 고기를 잡아야 되겠다’ 하고서 고기 잡을라고 지금 수고할 때에 그 방편 쓰는 것이 그저 그물을 다 준비하고, 또 배를 타고 바다에 가 가지고 그물을 치고 밤새껏 그 찬 바람에 거게서 바람을 맞으며 어짜든지 고기 잡기 위해서 있는 노력을 다했다 말이오. 있는 노력을 다했어.

그러면 이것을 있는 노력을 다하는 이 사람이라야 예수 믿는 데 해당되지 그렇지 않으면 해당이 안 됩니다.

요거 지금 오늘 아침에 중요한 것인데 안 되면 내일 아침에 계속할 터이니까 요거 단단히 들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뭐 하나님이 해 주련 하고서 그만 이래 가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해 주시겠다 이래 믿는 것도 그것도 다 헛일이야. 꼭 이 단계적으로 일차 방편과 소망을 초월한, 그걸 밟고 올라서 거게 그보다 나은 초월한 이차 단계의 소망과 방편을 취하고 거게서 이제는 초월한 삼차 소망과 방편에 이래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대개 사람들 보면은 미신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초월 신앙을 가지지 안하고 초절 신앙이라. ‘뭐 그까짓 일차 단계의 소망도 방편도 다 필요 없고, 이차 단계의 소망도 방편도 다 필요 없고, 삼차 단계의 소망과 방편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것만 하면 된다, 그것만 하면 된다.’ 이래 가지고 ‘나는 다른 거 치워버리고 다 삼차 단계의 이거 소망과 방편을 취하겠다, 이거만 가지면 되겠다.’ 그렇게 사람들은 말하고 하는 그것은 전부 허영주의자야, 허영주의자.

허영주의자요, 허욕자요,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만행자요, 그것은 미신의 신앙이요, 그거는 도박 신앙이라. 그거 신앙이 안 된다 그걸 요게서 딱 못을 박아서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일차 단계 요것을 자기가 밤이 도록 수고를 해도 안 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은 수고해 봐야 예수 믿을 수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수고를 해봐야 예수를 믿을 수 있다 그말이오.

‘아이구, 예수 믿어 봤자 그렇고 하니까’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일 한번 해 보자.’ 안 해 본, 세상 일 해 보자 하는 것도 ‘뭐 별수 뭐 있나? 뭐 되는 대로 되고 굶으면 뭐 얻어다 먹지, 그리 안하면 남에게 거짓말 하고서 빚이나 내 먹지.’ 이렇게 말하는 진실이 없고 실상의 실행이 없는 사람은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이제 ‘아무래도 이것을 내가 뭘 얻어야 되겠으니까 공부를 한다든지, 장사를 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이제 이거 없어서는 안 되겠고 이거 있어야 되겠으니까 이 일을 달성을 시켜야 되겠다.’ 해서 수고할 만치 소망이 그 든든한 소망, 꼭 소망하는 그 소망, 또 자기가 그런 방편을 쓸 만치, 수고의 방편을 쓸 만치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그게 있어야 돼.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라야 처음에 일차 단계는 소망은 뭐였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아니라 제 욕심대로 ‘이거 내가 한번 해 보겠다, 아무래도 이게 있어야 되겠다.’ 제 욕심대로 가지는 그 소망 이것을 가지고 밤새도록 수고했고, 그 방편은 또 주님 가르친 방편이 아니고 자기 이제까지의 경험하고 체험하고, 예수 믿기 전에 경험하고 체험한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그런 방편 가지고 한번 해 볼라고 달라든다 말이오. 해 볼라고 달라든 사람은 안 된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압니까? 이렇게 할라고 달라들어 본 사람은, ‘밤이 도록 수고해도 얻은 것이 없다. 이거 어째 이러냐? 어째 이러냐?’ 자기가 예수님을 떠나서 주님이 주신 소망 버리고 제 욕심대로의 소망 가지고 제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경험, 체험, 모든 과거 인간들의 통계 이 모든 자연 법 가지고 해 봐도, 힘을 써서 해 봐도 안 된다는 것을 실상으로 절실히 느껴야 된다 그말이오. 그렇게 해 본 사람은 그 사실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을 해 보지 안한 사람은 말로 해 가지고 실감 있는 실감을 가지지 못한다 그말이오. 알아들립니까?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 예수님이 오다가다 보니까 만났겠습니까 아예 ‘이제 밤새도록 저놈들이 가 가지고 헛일했다’ 하고서 ‘지금 그물을 씻을 것이다' 하고서 그래 찾아오셨습니까 그거 모르고 찾아오셨습니까? 알고 찾아왔소? 녜, 알고 찾아왔습니다.

알고 찾아왔으면 일시로 당신이 알고 오셨습니까 이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계획 예정 순서에 딱 예정이 되어 가지고 있는 일입니까? 예정되어 가지고 있는 일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일이 그리 그저 오다가다 만난 일 아무나따나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 불변의 계약이요, 불변의 방편이요, 불변의 우리 구원 얻는 길이라 그말이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이제, 자기가 그라다가 예수님께서 ‘바다에 깊은 데 가 가지고 고기를 잡아라’ 이라니까, 깊은 데 고기 잡아라 하니까 이 고기 잡을 이 소망은 주님이 주신 소망입니까 제가 처음 모양으로 제 욕심으로 가진 소망입니까? 주님이 주신 소망이오.

제 욕심으로 가진 소망도 거기 섞였습니까? 안 섞였어. ‘선생이여! 밤이 도록 수고해도 얻은 게 없지마는 선생이 말하니까 선생의 말에 의지해서 내가 한번 던져 보지요.’ 소망은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그 소망을 가지지 안했다 말이오.

그 소망은 지금 이루어지지 안하면 주님 코빵 주고 지금 주님 한번 ‘선생님은 뭐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이나 가르치지 고기 잡는 이런 거야 뭐 안다고 지금 그랍니까? 이거 틀렸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되는가?’ 한번 코가 납작하구로 한번 눌러 줄라고 지금 달라들고 지금 이래 주님 주신 소망을 확실히 소망하지도 안하고, 또 깊은 데 던지라 하니까 ‘깊은 데 가서 무슨 대낮에 그물 던져 가지고 고기가 잡힐 것인가?’ 이 순종하기는 순종하지마는 안 믿는 순종이라, 안 믿는 순종. 안 믿는 소망이요 안 믿는 순종이라.

이랬는데 고기가 턱 많이 잡히니까 여기 사람이 확 뒤비졌다 말이오. 내가 밤이 도록 수고 안 했으면 고기 잡혀도 ‘고기 잡혔지’ 이렇지 뭐 거게 대해서 그렇게 변화되지는 안할 터인데 자기가 혼자 예수 없이 하다가 안 된 그것을 경험하고 실험하고 체험하고 애를 써도 안 된 그 경험을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됐을 때 깜깜 놀라고 거기서 실감이 있다 그말이오.

이번에 거창집회 때 말이오. 우리가 그날 집회 갈 때에 가기 전에 모두 다 일기예보에서 말하기를 ‘요번 주간이 제일 일 년 중에 제일 더운 주간이라.’ 뭐 이거는 전국에 신문이 다 신문마다 다 그래 놨고, 모두 기상대서 다 그렇게 말을 했고, ‘다음 주간이, 다음 주간이,’ 그렇게 그 더운 주간인데 `그 주간에 우리가 집회를 가서 어떻게 하나?’ 이랬는데 하나님께서 그렇츰 시원하게 해 줄 수가 없어. 안 그렇습디까? 그때 더웠습니까 시원했습니까? 그라다가 이거 ‘농사 안 되겠다’ 그래 나는 그걸 기도했어. `주님이여, 우리 때문에 기후가 차워서 농사가 안 되면 어짜노?’ 그만큼 아주 추울 만치 서늘해졌다 말이오.

이랬는데, 요새는 지금 그 철 없는 더위가 옵니다. 요새는 철이 없는 더위요. 이거 밤으로 지난밤에도 더웠지요? 더운 이것이 뭐이냐 하면은 이거 평상 기후와 다르다 그말이오. 평상 기후와 다른데 좀 더 더워요. 그래 좀 마음이 놓여요.

주님이 우리 때문에, 그만한 열도가 있어야, 온도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온도를 많이 확 줄여뜨려 버리니까 이 온도를 언제 보충을 해도 보충하셔야 이거 농사가 되겠는데 요새 보니까 이거 없을 온도가 많이 있는 거 보니까 ‘그때 아마 일주간 동안을 하나님께서 우리 시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확 줄인 그 온도를 지금 보충하고 계시는가보다’ 이 안심이 돼요, 내가.

그래 어제도 내가 그말 했어요, 다른 사람한테. ‘요새 참 날씨가 덥다’ 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래 날이 참 덥습니다. 곡식이 잘 익겠습니다.’ 또 집회 갔던 사람이 그라기 때문에 ‘이거는 우리 때문에 지금 이거 요새 더운 것을, 사람들 더운 꼴 보는 것은 우리 때문에 안 볼 더운 꼴을 봐.’ 우리를 위해서 안 시원할 때에 시원해 놨었기 때문에 그 보충을 해야 되지 안해요? 그때 좀 감소시켜 놓은 걸 요새 지금 보충을 시키고 있는 거라.

여게 대해서 생각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한 사람은 그렇게 여기지마는 기도 안 한 사람은 ‘추울 때라 추웠는갑다. 더울 때가 돼 더웠는갑다.’ 그때 집회 때 ‘이 더우면 어짜노?'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밥을 굶으면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밤이 도록 기도하고 그걸 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일기가 더우면 안 됩니다. 그거 좀 서늘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한 사람은 자기가 한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 그말이오.

또 그때 가는 것은 여름에 한창 더울 때니까, 제일 더울 때요. 일 년 중에 제일 더울 때니까 그때 가면 냇물이 있어서 그만 집회 마치고 나면 가 가지고 목욕도 하고 이래 해야 되는데 이 냇물이 바짝 말랐다고 기별이 왔으니까 이거 탈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이것도 다 이거 어째 되노?’ 천막은 쳐 놨지.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하기를 ‘주님이 비를 주시면 그때 물이 붇도록 비를 주실라 하면 천막 쳐놓은 것 다 절단나 버리고 다 모두 다 그뭐 이거 다 절단나겠지. 비니루 안 씌웠으니까 전부 그냥 뭐 새는 것 아닙니까? 이렇지, 비가 안 와도 안 되겠지, 또 비가 와도 낭패지.

그래 나는 기도하다 그랬어요. ‘아이구 나는 모르겠습니다. 비가 안 와도 낭패지 비가 와도 낭패지 나는 어짤 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전지하시니까 당신의 지혜로 그걸 잘 해 주십시오.’ 이랬다 말이오.

이랬는데 떡 여게서 들으니까 월요일날 새벽에 내가 전화해 들으니까 ‘어찌 되지?’ 이라니까 `참 뭐 기이합니다. 냇물이 홍수가 나와서, 홍수가 나와서 굉장히 물이 많이 불었습니다.’ ‘홍수가 났다니? 비가 많이 왔나?’ 이라니까 ‘여게는 비 똑삼십 분 왔다 하던가삼십 분 왔는데 그렇게 많이 오지 안했고 그저 비가 좀 먼지 잘 만치 왔습니다.’ ‘그러면 홍수가 어데 났어?' 이라니까 `어데서 왔는지 뭐 홍수가 와서 냇물이 이렇게 불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내가 어릴 때 웃비 온다 말 들었어, 웃비 온다. 웃비 온다 하는 건 저 덕유산에 저 위에서 비가 많이 오면 밑에서는 비 오는 줄 몰라요. 비 오는 줄 모르고 소를 개울가에 매어 놨는데 웃비가 와 가지고 갑자기 거석하니까 소 이놈이 떼 가지고 나오지도 못하고 이래 가지고 그만 그래 가지고 소가 떠내려가 죽은 일이 많아. 그러기에 웃비 올 때에 보면 소가 드부렁드부렁 떠 가지고 옵니다. 소도 떠 가지고 오지, 뭐 개도 떠내려 오지, 갑자기 위에서 그만 물이 쏵 웃비가 오니까.

웃비가 왔어. 나는 그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이 웃비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 기도했으면 될 건데 그거는 안 하고 ‘나는 그거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지혜로서 어떻게, 물은 있어야 되겠고 비는 와서는 안 되겠고,’ 이랬는데, 물은 있어야 되고 비는 안 오고 딱 했다 말이오. 안 그렇습디까? 그래 안 했어? 자기가 실상으로 안 한 자는 그걸 느끼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이랬는데 또 이거 비가 안 오고 여게는 지금 논이 모두 마르고 물이 거석하고, 냇물은 많지마는 봉답은 논이 마르고 있다 말이요, 비가 안 와서.

이러니까 또 ‘비를 와야 되겠는데 이거 탈이네. 우리 때문에 비가 못 와서 이거 봉답 부치는 사람들 우리 때문에 이 손해를 보니까 이거 어떻게 하노?’ 이렇게 생각했는데 우리 딱 천막 다 걷어 가지고 딱 떠나고 난 다음에 올 때 보니까 뒤에 뭐 그 비가 뭐 이슬비가 오는 것 같애. ‘비가 좀 올란가? 오면 좀 안심이다, 이거 좀 비가 많이 와야 이거 모두 봉답 농사들이 우리 때문에 흉년당하는 일을 안 당하지, 우리 때문에 뉘든지 손해 본다면 안 되는데’ 이랬는데, 보니까 뭐 여기 내려오니까 비가 안 와. ‘그러면 비가 안 오는갑다’ 걱정했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비가 그렇게 오는 비는 처음 봤대요. 마구 막 들어붓는데 그만 우리 있는 그 자리도 산태가 나고 전부 뭐 둑이 다 터지고 그뭐 어떻게 비가 뭐 왔는지, ○○○집사가 그때 천막 걷으러 다시 거기 우리 집회 마치는 날 왔다가 도로 갔어요. 갔는데 평생에 비가 그렇츰 쏟는 비는 못 봤대요. 그래 비가 어떻게 많이 왔는지 그만 뭐 물 천지가 돼 버렸어. 이래도 모릅니까? 그래 놓으니까 ‘이거 이 천막 또 다 썩히겠네.’ 그래 가지고 모두 다 이거 천막 지금, 다른 천막은 다 걷어 놨지마는 이거 중간반 천막은 이거 그 큰 걸 비맞아 놓으면 그거 말릴라 하면 큰 힘이 든다 그말이오. ‘이거 인제 이거 다 썩히겠네.’ 이랬는데, 그 이튿날 또 비가 안 오고 볕이 바람 불고 볕이 쫙 나서 그 이튿날 전부 다 말려 놓고 다 개어 놓고 그날 왔더라 말이오. 이 기적이라.

이래 놓으니까 자기가 참으로 하나님하고 보조를 맞추는 사람은 전부 기적입니다.

하루 종일 기적에서 살고 하루 종일 축복에서 삽니다. 그러나 실지로 따라서 보조를 안 맞추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만날 보조가 틀리니까 그 사람은 제 욕심대로 안 되니까 원망 불평밖에는 없는 사람이 된다 말이오. 이거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주신 소망, 믿지 안하고 방편도 억지로 썼어. ‘선생이 말하니까 내가 던져 보지요.’ 했는데, 믿지 안한 소망이, 믿지 안하고 억지로 행동한 행동이 그 결과가 크게 성공된 걸 보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거는 주님이 주신 소망 아니요? 주님이 주신 방편 아니요? 이제 이것을 하고 난 다음에 여게서 이제 주님이 주신 소망이 이렇게, 정 자기는 전적 의심했고 무시했지마는 이대로 놀랠 만치자기가 주님이 말씀하신 소망은 자기는 전혀 부인했는데 그 일이 되는 인간 생각에 몇천 배도 더 되게 이렇게 됐다 말이오. 이렇게 많이 됐다 말이오. 또 그 방편도 그렇게 권위 있게 됐다 말이오.

이러니까 부인했던 자기가 거게서 꺼꾸러져 가지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는 그말은 무어냐? 그라기 전과 그라고 난 다음에 보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차차차 천국 가면은 예수님과 자기와 가깝습니까 멉니까? 천국 가면은 예수님과 자기와 가까와지겠소 멀겠소? 예? 가까와지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손 놓읍시다. 천국 가면 주님과 자기와 멀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멀어, 멀어. 멀어요.

왜? 이제 사도 요한이가 보니까 처음에는 주님과 가까와 주님 앞에 뭐 기대고 이래 가지고 뭐 예수님을 깔고 드러눕고 이래 자꾸 이래 이래 쌓았지마는, 사도 요한이 말이지. 이래 쌓았지마는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님이 어떤 분인 걸 알아 놨다 말이오. 알고 보니까 어떻게 그 앞에 그만 기절해서 그만 죽을 지경이었어.

주님을 알아갈수록이 주님은 점점 크시고 무한하신 분이라 그만 갈수록이 놀래고 놀래고 자꾸 크시고, 또 주님과 자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한 일이 너무 거리가 멀어. 자기 한 일이 환하게 보이고 주님이 한 일이 환하게 보이니까 주님에 대해서는 사모가 돼서 존경은 자꾸 되고, 갈급은 자꾸, 주님은 자꾸 좋기는 좋고 자꾸, 두렵기는 두렵고, 자꾸 존대는 더 되고, 숭배는 더 되고, 자기는 점점 더러워지고, 그러니까 바울이 그라기를 다른 사람 모르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 죄인이라” 이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거 지금 뭐 빨리 할라 하니까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데 그저 혹 오늘 새벽에 참여하고 갈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내가 요것을 말해 줍니다.

수고해야지 수고 안 하면은 헛일입니다. 기독교는 자기가 실제로 행해야 되지 행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내일 아침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도리를 배워야 돼요. 안 배우면 모릅니다. 뭐 신학자라도 몰라요.

모르니까 구원 안 이루고, 모르니까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있을 때 다 져 버렸지, 또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안하니까 황거요배에 다 했어, 뭐. 감옥에 들어가 있는 옥중 성도들도 다 황거요배는 다 했어요. 천황 폐하 궁성을 향해서 궁성요배 다 했어. 거게 있는 걸 뭐 산 사람을 여기서 절한 거 그게 벌써 우상 섬기는 거 아닙니까? 그거 다 헛일했어. 그러나 그때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들은 뭐 자기가 몰라도 궁성요배를 다 피하게 했어.

저도 그 궁성요배, 나는 그 말도 못 들었는데 예배 보러 가니까 그라는데 일어서라 하고, 일어서라 하더니마는 나중에 설명을 해요. 이래서 이리 돌아서라 해. ‘뭐 때문에 돌아서라 하는고?’ 교역자가 하니까 돌아섰어. 이래 돌아섰어요.

돌아서고 난 다음에 이제 절하라 할라 하면 좀 거석하니까 아마 그 말했던 모양이라. ‘이렇고, 궁성을 향해서 이거 황거요배를요배라 말은 멀리 바라보고 절한다 말이오.황거요배를 해야 되지 안 하면 예배를 못 보게 하기 때문에 이거 할 수 없이 이래 하게 됩니다.’ 그때사 처음 들어 알았어.

그래 일어섰지, 동쪽으로 빽 돌아 요래 돌아섰지, 그 오른쪽으로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하는 그걸 이래 돌아섰다 말이오. 그렇게까지 됐다 말이오. 다 들어갔어.

다 그만 인제 황거요배하게 됐다 말이오.

그런데 그 말 듣고 ‘이 무슨 소리야?’ 그래 홱 돌아와 가지고 딱 이래 앉아 버렸다 말이오. 앉았는데 그게 교인이 많은 교인이 있었는데 않은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어. 다 황거요배 다 했어요. 다 했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지키시니까 그런 가운데서 깨닫게 해서 안 하게 하신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요만치 믿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는 요만한 하나님 노릇해 주시요. 하나님을 이 우주보다 더 크게 믿는 사람은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으로 그에게 효력 있게 합니다. “믿는 대로 되리라” 어짜든지 믿읍시다. 바로 믿어요. 이거면 다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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