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15:09
주님이 구출해 주시는 방편
1981. 3. 14. 새벽 (토)
본문:시편 91편 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큰 자가 작은 자를 사랑할 때에는 그에게 대한 모든 책임을 필연적으로 지게 되고 또 그에게 모자란 것을 주려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작은 자가 큰 자를 사랑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또 의지하게 됩니다. 거게서 나아가서는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보다 큰 자를 사랑하는 자는 든든함과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작고 약한 자를 사랑할 때에는 그 책임이 무거워서 필연적으로 고단하게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곤하되 피곤함을 느끼지를 못하는 이상한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자기 형편과 사정이 어려워질수록 더 바라보고 더 의지하고 더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도 두려움으로 지키는 것과 주를 사랑함으로 지키는 것과가 본질 본성적으로 아주 판이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가 건지신다 말씀은 주님의 이 크심을 알고 주를 필연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그분에게 순종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주를 사랑한다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럴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어떤 데서라도 건져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실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주님이 건져주실 때에 건져주심이 그에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없는 자를 주님이 건지시면 그 사람을 배나 멸망 가운데 빠지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치 얼어 기절한 사람을 덥게 했다가 또 다시 얼게 하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죽어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를 사랑함으로 그를 바라는 자, 이자는 어떤 궁지에서 구출함을 받아도 그 구출함 받은 것을 잘 이용해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없는 자에게는 도리어 교만해서 이전보다 더 큰 증세가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를 사랑한 자만이 주님은 건져주실 수 있는 사랑이지 주님이 그 사람을 멸망할 것을 알고 멸망할 방편을 동참할 수는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바라보고 의지하여 그를 든든히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그에게 모든 구원을 맡기고 순종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저가 나를 사랑한즉” 사랑한즉 하는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외부적은 기독자들은 어떤 데서라도 주님이 구출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다른 피조물이 구출하려고 달라들지를 못합니다. 변질된 인간은 달라듭니다. 변질된 인간은 달라듭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아니하고 지음을 받은 그대로 있는 자들은 달라들지 않습니다. 만물은 그를 구출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예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달라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택한 자들이 주를 사랑하는 이 방편 하나로 주님의 구출을 받는, 주님의 구출 받는 이 구출 외에 다른 구출을 해 줄듯이 어떤 인간이 날뛰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쳐 버립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자기가 어떤 원인으로서든지 깊은 궁지에 빠져 있을 때에 그 궁지에 빠져 있는 것은 제 죄값도 있고, 선조의 죄값도 있고, 주의하지 안한 연고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 놓은 일들도 있습니다.
어째 이루어졌든지 거게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큰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궁지에 빠져 있는 거게는 하나님께서는 큰 소망을 가지고 계시는데 타락지 안하고 본지위에 있는 피조물들은 방해를 안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를 하지 않습니다. 거게 대해서 구출해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자가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고 일을 해도 일이 안 됩니다. 모든 만물이 여게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가 그 궁지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변질됐기 때문에 마귀와 하나이기 때문에 거게서 구출할듯이 날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의지하지 안하고 그런 것들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이렇게 유혹을 줍니다. 그것이 모두 다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욕심이 전부 그것입니다.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혹의 욕심에서 ‘이런 인간이 구출할까? 저런 인간이 구출할까? 어떤 만물이 구출할까?’ 이래 가지고 헛된 수고를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다른 만물을 인하여서, 물질이면 물질 이런 무슨 하나님의 자연물이면 자연물 그런 것을 인해서 구출을 받으려고 할 때에는 그것들이 듣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저주를 줍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말씀하신 대로 그것들이 저주를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걸 의지해도 저만 참 녹아나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인간이 달라들어 가지고서 구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 동안 좀 기다리다가 끝끝내 그러면 구출하려 하는 그것을 칩니다. 그것을 매로 칩니다. 이러면 하나가 궁지에 빠진 것이 둘이 궁지에 빠지고, 둘이 궁지에 빠진 것이 서이 너이 자꾸 연발적으로 궁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궁지에 빠지도록 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이 구출하지 않는데 인간이 구출하려고 하면은 구출 같습니다. 성공 같은 것이 보여집니다. 처음에는 구출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구출같은 그것이 마지막에는 배나 높은 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크게 깊은 궁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일찍 깨닫지 못하면 늙어죽을 때라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의지했던 것은 다 헛일이다. 바라봤던 것이 헛일이다.’ 참 하나님 바라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한 것이 마지막 죽을 때라도 후회를 가지고 가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있는 자는 일찍 깨닫습니다. 인간을 구출하려고 제가 하던 자도 ‘안 된다. 하나님만이 구출하시지 내가 구출한다는 것은 참 월권이요 이 건방된 일이다.’ 구출하려는 자도 그렇게 깨닫는 자가 복이 있고, 또 구출을 받으려고 하던 자도 ‘내가 인간으로 인해서 구출받으려고 했던 것이 이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이 도무지 길도 아니고 불가능한 일인데 이런 내가 망령을 부렸다.’ 해서 과거에 인간으로 인해서 구출되려고 생각했던 그 배나 인간을 버리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인간을 부인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질 때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의를 이룬다”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주권과 개별 섭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구속주 당신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일찍 되면 유익해서 건설이 될 것이고 늦게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피조물을 부인하게 되면 깨닫지마는 그는 건설할 기회나 재료는 다 허비되고 말았기 때문에 깨닫기를 더디 하면 그 사람은 건설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빠졌든지 이것은 인간을 인해서나 나로 인해서나, 내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나, 또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켜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셨든지 어쨌든지 궁지에 빠진 그 궁지에서는 택한 자들에게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큰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범죄함으로 궁지에 빠졌어도 반드시 그 궁지에 빠지지 아니한 것에 못지 않게 앞으로 향상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일으키신 것이라도 자기에게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택한 자들은 어떤 궁지에 빠졌을지라도 거게서 헤고나지 못할 궁지가 없다 하는 것을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궁지에서 헤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냐? 유일한 방법은 당신을 한 말로 말하면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하게 되면 궁지에 빠질수록 더 바라보게 됩니다. 그분 외에 딴게 없기 때문에 더 바라보고 달라붙게 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에 더 의지하게 됩니다.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조급해도 계명 지킵니다. 계명 안 지키면 낭패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이 더 뜨거운 사람은, 사랑함이 뜨거운 사람은 바라보기만 하지 안하고 의지하기만 하지 안하고 그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항상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언제나 평안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도수가 사랑함이 전연히 없는 데에는 자기는 궁지에서 절망 낙망 고통 번민으로서 참 지옥 생활을 하게 될 것이요 당신을 사랑함이 움틀 때에 당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라보게 될 때에 바라봄이 없을 때와 있을 때와 그에게는 달라져서 지옥이 변해서 천국이 돼집니다.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은 바라볼 뿐만 아니라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간구하되 바라만 보고 간구하는 사람 있고 의지하면서 간구하는 사람 있고, 바라만 보면서 간구하는 사람은 불안 속에 간구합니다. 의지하면서 간구하는 사람은 좀 안심되는 온유한 중에 간구하게 됩니다.
더 사랑하는자는 자기를 당신에게 맡기는 사람은 궁지에 떨어질 때에 웃습니다.
이 궁지에 떨어지는데 이 궁지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자의 그분의 그 구출할 밀접한 그런 사랑의 접촉이 있을 것을, 사랑을 받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속으로 웃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역사하심에 따라서 기쁘고 즐겁고 웃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의 도수에 따라서 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함이 없으면 이래서나 저래서나 이런 종류의 궁지나 저런 종류의 궁지나 궁지에 빠졌을 때 그는 지옥 생활입니다.
거게서 주님을 사랑함이 움이 틀 때에 당신을 바라보고 그래도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부르짖을 곳이 있소. 이제는 백계무책이라 나는 아무 희망 없다 낙망하고 쓰러질 자가 주님을 다소라도 사랑함이 움이 트게 되면 당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간구하는 이 간구가 생겨집니다.
그보다 주님을 사랑함이 더해지면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암만 궁지에 빠져도 든든합니다. 뭣인가 그래도 앞으로 이루어진다는 그 든든함이 있기 때문에 온유해집니다.
그보다도 주님을 사랑함이 뜨거워지면 그때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순종을 하는 이 순종을 하되 순종을 하되 당신을 사랑함으로 순종하기 때문에 주와 자기와 사랑하는 그 결합된 이 결합이 강해 있기 때문에 겉어머리서 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자가 둘이 있을 때에 밖에서 찬 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가 나면 날수록 둘은 더 결합될 것입니다. 되게 방이 추우면 둘이 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그의 궁지라는 것이 그의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 궁지라는 것이 주와 자기와의 더 결합을 만들어서 더 밀접하게 만들고 더 기쁘고 좋게 만들지 그 궁지라 하는 것이 결단코 주와 그의 사이를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서 기독자들이 사는 그 생활에서 궁지라는 이 궁지가 주를 사랑함에 따라서 그것은 차이 있는 반응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참 자기에게 행복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참 행복인데,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큰 행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보면 이것이 모두 다 그 사랑에 대해서는 부부간을 말했습니다.
주님과 우리와는 참 부부요 인간 부부는 그것을 계시하는 형식계시입니다.
형식계시요. 주님과 우리와의 그 부부는 참 그것이 본체요. 이것은 그 본체를 그림자하는 하나의 그림자요 자연계시입니다.
이 자연계시도 보면 참 그 사람이 자기 남편은 그것은 아무리 봐도 가치를 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무능한 존재입니다.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도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전적 사랑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그는 행복 가운데 삽니다.
자기 주관적인 행복은 삽니다. 자기 주관적인 행복은 가집니다. 자기 주관적인 행복이라 말은 자기대로는 행복감을 가지고 삽니다. 객관성이 없어서 행복을 실질적으로 이루지는 못해도 자기 마음은 행복되게 삽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그 남편이 모든 면이 구비해서 아주 유력한 그런 참 사람이라 비교 없을 만한 그런 훌륭한 모든 것이 구비한 그런 실력가라 도덕면이나 무슨 생활 박력이라 실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사랑함이 없으면 바라봄이 없을 것이요, 의지함이 없을 것이요, 자기를 맡김이 없을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그 아내는 불행 중의 불행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들이 창조주시요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이 주님을 사랑함이 없는 그것이 막바로 자기에게 자기가 저주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이오.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 말은 저주하는 말이 아니오.
주님을 사랑치 않는 그것이 자기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망치고 해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자꾸 자라도록 우리는 애를 써야 됩니다.
사랑이 자라는 데는, 사랑이 자라는 데는 그것도 사랑이 자라는 것은 사랑하면 또 자라고 사랑하면 또 자라고 사랑하면 또 자라고 사랑하면 또 자랍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사랑은 가래초 사랑과 같다.’ 가래초 그걸 뭐라고, 일반들이 알기에 뭐라고 합니까, 이름을? 간낭, 간낭입니까? 여반들, 간낭이요 그것? 간낭인가 뭐. 가래초, 간낭. 가래초 사랑이다.
이것은 이 속에 뭣이 들었는가 싶어서 한쪽, 한 잎사귀 떼내고 떼내고 하면 잎사귀뿐이오. 다 떼면 속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씩 둘씩 이래 붙어 가지고 그게 자꾸 인제 이만치 커지는 것인데 ‘인간 사랑은 가래초 사랑이라.’ 사랑하면 자꾸 사랑하게 되고 이제 사랑이 차차 떨어지기 시작하면다 떨어져서 아무것도 없어진다. 속에 알맹이 없는 거라.
인간은 그렇게 수동적으로 돼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을 때에 수동적으로 지었소.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수응적으로 그렇게 지어놓은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 사랑하면 자꾸 사랑이 뜨거워집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게 되면 자꾸 그 사랑이 커집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자라가려면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이 자라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자라가려고 하면은 어떻게 하면 자라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내 보기에 크다 크다 자꾸 당신이 나를 사랑함이 점점 커지는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함이 커지고 당신이 나를 사랑함이 커지는 그 방법이 무엇인가? 이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 이랬습니다. 네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당신을 사랑함으로 자기가 힘들지 않는 현실에서 그 계명을 지켜봅니다. 당신을, 우리가 구속받았기 때문에 그래도 당신이 나를 사랑해서 생명까지 버렸다 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 우러나지 안해도 당신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그게 우리의 그 상식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안 우러나도 사랑해야 된다는 것 안다 그말이오. 이러면 내게 사랑이 생겨지지는 안했지만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안다 그말이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해 보려고 자기의 현실에서 아주 쉬운 계명 지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현실에서 요구하는 것이 어쩌든지 쉬운 것 계명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 우연히 닥쳤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개별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기를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의 현실을 당신의 섭리로 만드실 때에 어떻게 만드는고 하니 우리의 현실을 당신의 섭리로 만드실 때에 아주 주의 계명 지키기 쉬운 현실을 주십니다., 아주 지키기에 쉬운 현실.
그것이야 뭐 지키는 데에 경제도 아무 거리낌이 없고, 인간에게도 거리낌이 없고, 사회에도 거리낌이 없고, 가정에도 거리낌이 없고, 자기의 기분에도 거리낌이 없고, 자기 욕심에도 거리낌이 없고, 아무데도 거리낌이 없어서 ‘이것이야 못 지켜?’ 그저 필연적으로 지킬 수 있을 만치 그렇게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지킬 수 있도록 요런 현실을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켜봅니다. 말씀대로 해 봅니다.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에 반드시 당신이 주시는 예물이 있습니다.
응답이 있습니다. 당신이 거게 보답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때에 당신이 나에게 내 지식에 맞추어서 감사할 수 있는 그 감사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자기에게 무슨 기분적으로, 주관면에 기분적으로 무슨 내적 성화가 이루어지든지, 내적 깨달음이 이루어지든지, 무슨 감동이 이루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타난 물질이 뭐 오든지 무슨 인인 관계가 무엇이 좀 달라지게 되든지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그말이오. 알아들립니까? 이해가 됩니까? 요것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요게 없으면 소용이 없어. 요걸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무가 이런 큰 뿌리 가지고서 사는 줄 알아도 큰 뿌리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큰 뿌리에 자잔한 자잔한 뿌리 그것이 잎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되지 이 큰 뿌리는 잔뿌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라. 잔뿌리는 생산자요 이 큰 뿌리는 운반자요. 이 큰 뿌리는 운반만 하지 생산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무를 심으는 사람이 그 원둥치 뿌리를 다 끊어도 거게 자잔한 뿌리 몇 개 있는 그것을 소망을 둡니다. 그것이 없으면 원뿌리에 움이 나고 원뿌리에 새 뿌리 자잔한 뿌리가 나리라 하는 그걸 바라봅니다. 그것 안 나면 헛일이오.
그것 안 나면 그만 그다음에 썩어버립니다.
우리가 일반 인간이 상상하지 않는, 느끼지 안하고 지내 돌아다니는 그 속에 이면적인 그걸 깨달아야 됩니다. 그걸 깨닫지 안하면 헛일이라. 그 사람은 항상 외식 신앙이 돼.
우리가 모든 평안이 감옥에서 들었던 사람이 해방되면 얼마나 평안합니까? 중병에 걸렸던 사람이 그 병이 나으면 얼마나 기쁩니까? 중병 치러본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가 큰 중병이 들었다가 수술을 하고 나니까 시원하고 이제 차차 경과가 좋게 되면은 그 성한 사람보다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떤 중병이 들었다가 그 병줄이 끊어지면 기쁜 것입니다. 큰 절망 속에 들었던 자가 해방되게 되면은 기쁜 것입니다. 기독자들의 기쁜 생활, 또 든든한 생활, 언제나 희망이 넘치는 생활 이게, 희망이 넘치는 것 든든함이 넘치는 것 평안함이 넘치는 것이 어데 있습니까? 돈에 있지 않습니다. 어리석지 마십시오.
권세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에 있지 않소.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에 있소.
이 사랑에 있는 것은 내 주관만이 아니오. 주관이 내가 먼저 든든하요, 기쁘요, 희망이 넘치요. 내 주관으로만 이래도 실제적으로 안 되면 헛일 아닙니까? 아니야. 내 주관이 있는 것만치 객관 역사는 전능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할 것이 없어. 그대로 다 이루어져.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행복이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것인데 이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해 가지고 날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배고프고 목마를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에 지내간 사람들이 다 배고파 죽었고 목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한 자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그때는 배가 더 부릅니다. 그때도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만족이 더합니다.
그러기에 주를 사랑함은 기독자들의 주관적 행복과 객관적 행복이 일치돼서 이것이 실질적으로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사랑함이 이것이 우리에게 행복인데 지금 주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말이 들리지 안하면 헛일이오.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이 돼지는 줄 압니까? 아니오. 주님을 바라본다고서 바라봐지는 줄 압니까? 의지한다고 의지가 돼지는 줄 압니까? 암만 의지해도 자기 옆에 어린아이 하나 있는 것만치 의지가 안 되는데 어쩝니까? 일국의 대왕 다리오 왕이 아무리 말해도 다리오 왕 그것은 다니엘이 의지하는 그분과 비교 못 하기 때문에 그까짓 걸 의지하지 안했습니다. 하루 종일 말해도 의지 안 한다 했어. 하루 종일 말해도 의지 안한다 그말이 듣지 안한 게 의지 안 한다 그말이오. 누구를 의지하기 때문에? 더 큰 의지를 자기가 알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까짓 것 의지가 보여지지를 안해.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이 돼지는 줄 압니까? 사랑하는 이 사랑이 가래초 사랑과 같이 사랑이 자라가야 된다 말이오. 사랑이 자라가야 돼. 한 현실에서 주를 사랑함이 그만치 가래초 한 잎파리 더 생기는 것 모양으로 조금 더 커진 것 모양으로 이제 더 생기고 더 생기고 더 커지고 이렇게 돼야 주님을 사랑함이 자라가야 되고 주님을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깨달음이 자라가야 되고 주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감이 자라가야 됩니다.
‘우리가 장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를 엘리야를 주님 이렇게 계시도록 여게서 삽시다’ 할 때에 구름이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 나서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니 너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는 선지 모세나 엘리야나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 사랑을 다 받은 자요 전적 나를 다 사랑한 자라. 내것은 다 저의 것 됐고 저의 것은 다 내것 됐다. 이 예수는 저의 세포 하나도 내것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 나는 나에게 있는 전부가 다 그의 것 아닌 게 하나도 없다.’ 그말을 가리켜서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표시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자라가야 되는데 사랑이 자라가는 이것이 실질인데 이것이 안 되면 안 되는데 이것이 나무로 말하면 새 뿌리, 자잔한 새 뿌리인데 이것이 없으면 헛일이라. 그걸 말하는데 들리지 않는 사람은 그게 안 들려지는데 무슨 구원이 이루어지겠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자라가야 되는데 자라가는 것은 자기가 쉽게 자라갑니다. 힘 안 들고 자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자라갑니다.
사랑이 자라가는 것은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그것 외에는 사랑하는 길이 없어. 내가 주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이리 말해도 내라는 이 주관이 당신에게 상대되지를 않습니다. 비로소 주의 피를 의지하고 주의 계명인 이 진리라는 이 선을 타고, 진리라는 이 줄을 타고, 진리라는 이 관을 통해서 당신에게 연결이 됩니다. 이 진리 외에는, 주의 피 이 진리 외에는 연결이 안 돼.
이러기 때문에 성령과, 또 뭐라 했습니까? 물과, 또? 피. 피는 예수님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요, 이 물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요, 성령은 우리를 보증한 이 영감 하나님의 이 감화 감동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만 하나님께 연결이 될 수가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거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기 쉬운 계명에서 지킬 때에 주를 사랑하는 아주 새 뿌리가 조그만한 것이 내렸습니다. 새 뿌리 조그만한 게 내렸어. 또 주의 계명을 한 번 더 지킬 때에 또 새 뿌리 하나가 더 내렸어. 또 그 계명을 두 번 지킬 때에 새 뿌리가 조금 더 길었어. 또 세 번 지킬 때에 더 깁니다. 그러나 한 계명만 자꾸 지키게 되면은 새 뿌리 하나만 길어봤자 그것 가지고는 위를 감당치 못합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요 현실을 주어서 요 계명을 지키도록 당신이 하셔서 요 새 뿌리가 내리고, 무슨 새 뿌리입니까? 무슨 새 뿌리지요? 무슨 새 뿌리요? 무슨 새 뿌리? 무슨 새 뿌리? 허, 이것 비유 말하면 비유는 비유대로 다 떨어져 나가버리지, 무슨 새 뿌리입니까? 사랑의 새 뿌리요, 사랑의 새 뿌리! 뭘 듣고 있습니까? 사랑의 새 뿌리가 내린다 그말이오.
현실을 섭리로 주실 때에 쉬운 계명 하나를 지키면 그것이 당신을 미약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쉬운 계명이니까. 생명을 바치지 안하면 사랑할 수 없는 그것은 장성한 뿌리가 생겨진 것이오. 그게 장성한 뿌리가 당장에 생겨집니까? 생겨지는 이치가 없어. 이것이 모두 다 식물이나 모든 것이 다 자연계시요.
자연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요 성경은 문서로 특별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무가 심어놓은 것이 당장 이 팔뚝시 같은 뿌리가 당장에 생기는 그런 이치가 어데 있소? 없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가는 뿌리가 여게 눈트듯이 해처럼 조그만한 것이 생겨져 가지고 차차차 그것이 볼록해 가지고서 그것이 볼록하다 가 조금 더 있으면은 어북 그게 톡 튀어 나오다가 그것이 나중에 위에 오면 가지가 되고 밑에 있으면 뿌리 됩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차차 차차 자라 가지고 머리털 같은 뿌리가 됐습니다. 하얀 뿌리가 됐어. 그것이 자라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현실에서 지키기 쉬운 계명, 자, 그 계명인데 같은, 그 계명인데, 그 계명인데 지낸번에는 지키기가 쉽더니마는 이번에는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왜? 환경이 지키기 어렵도록 만드니까 지키기가 어렵지요. 지키지 못하게 하는데 마지막에는 그 계명을, 그 계명도 지키려 하니까 목숨을 안 내놓으면 지킬 수 없도록 되어질 때가 있지요. 그것 뭣이요?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게 뭣입니까? 그렇게 생명 내놓지 안하면 지킬 수 없는 그런 환경을 당신의 섭리로 마련해 주시는 것은 당신의 요구가 뭣입니까? 뭣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여반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뭣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남반에? 뭣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씨? 사랑하기 때문에? ○○○씨? 그것 다 말, 대답은 비슷한데 삐뚤어졌어. 주님이 우리의 생명보다도 내 생명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이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오. 큰 사랑을 요구하는 것.
생명을 내가 포기하지 안하면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도록 환경을 몰아넣어서 이래 만드는 이것이 뭣이냐? 나 죽이려고 합니까? 계명 지키는 게 뭣이라 했소? 사랑의 뿌리라고 하지 안했습니까? 그 뿌리가 커단한 뿌리 큰 뿌리 되게 하려는 것이오. 생명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랑이, 생명보다 더 큰 사랑, 당신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더 큰 사랑, 생명보다, 인간의 생명보다 큰 사랑의 뿌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처음에는 신사에 가서 공을 들이면 아들 낳고 딸 낳고 한다고 신사에 참배하던 자가 하나님께서 그런 우상 섬기지 말아라 신사참배 하지 말라 하니까 누가 하라 하는 강요도 아무도 안 하는데 그까짓 거야 자기가 하나님께 소망만 두면 안 하지. 그러니까 신사참배 그 안 하기는 힘도 안 들지. 무슨 힘이 들겠어? 이렇지마는 마지막에는 생명을 안 내놓으면 신사참배를 안 하지 안할 수 없는, 생명을 내놔야 신사참배 하라 하는 데에 신사참배를 안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으로 변해진다 말이오. 그런 시대로 변해진다 말이오. 그렇게 변하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러분들? 다 같은 계명인데 그 계명을 지키기가 쉬운 그런 현실을 만들어서 ‘그 계명 지키기야 무슨 힘이 들어?’ 할 수 있는 그런 현실로 만드신 이가 누구며 그렇게 지키기 쉽던 계명이 이제는 참 소유와 몸과 생명을 내놓지 아니하면 안 될 수 있는, 생명을 내놓지 않고는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그런 현실로 만드는 그분이 누구요? 그분이 내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혼자 그렇게 만드시요. 이것이 뭣이냐? 다 사랑의 역사입니다. 당신과 나와의 밀접한 사랑의 이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오.
지극히 큰 분이 이 천한 만물의 때와 같은 이 더러운 우리로 더불어 당신이 사랑하시겠다고 내 더러운 사랑을 당신이 요구하시겠다고 이렇게 지금 하는 이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이 힘 안 나고 뭣 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소망이 뜨거워지지 않고 뭣이 뜨거워지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이것 전부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길러가야 됩니다.
사랑을 기르는 길은 다른 길이 없어. 자기 현실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은 힘이 안 듭니다. 처음에는 힘이 안 듭니다. 힘이 안 들고 그다음에 차차 차차 지켜 나가면 신앙을 지켜 나가는 사람에게는 신앙 지키는 것이 힘이 안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 그에게 절대로 어렵지 안했습니다. 어렵지 안했어.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 되게 고단하기야 고단하겠지마는 밑에서 한자욱 떼놓는 것이나 위에서 한자욱 떼놓는 것이나 한자욱 떼놓는것은 꼭 같습니다.
이렇지마는 그것은 밑에서 한 자욱 한 자욱 밟아올라가면 누구든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마는 밑에서 밟아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밑에서 한 발자국으로 천 메타나 뛰어올라가려 해 가지고서 올라갈 사람이 어데 역사에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 날짐승도 안 돼요. 많은 날개를 쳐야 올라가지. 그 안 된다는 것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이오.
우리가 주의 계명을 처음에서부터 지켜 나갈 때에는 그때는 큰 계명도 어렵지 않고 지키지마는 제가 처음에 지키지 안한 자가 큰 계명을 지키려고?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째야 됩니까? 자기가 지킬 수 없는, 없는 그 계명을 우리가 지키려고 해야 됩니까 지키기 어려워서 못 지킬, ‘아무리 지키려 해도 이 계명은 참 지키기가 힘든다.’지키기 힘드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계명 지키는 것입니까 자기가 쉽게 지킬 수 있는 계명 지키는 것이 우리의 계명 지키는 길입니까? ○○○목사님, 어느 것이지요? 어느 것이지요? ○○○목사 어데고? ○○○목사요? ○○○씨인 줄 아는데? 왜 자기가 남의 이름 부르는데 자기가 말해? 자기는 대답할 게 아니라. 내가 대답할 사람에게 물었는데.
자, 여러분들, 이것도 여러분들이 쉬운 것 같지마는 평생 예수 믿어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자기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못 하고 삽니다. 목사 우목사 박사가 돼도 못 느끼는 사람은 못 느낍니다. 이러니까 말을 해도 다 흘러 지내버리고 만다 말이오.
자기에게 상관없는, 상관없는 거짓말, 자기에게는 해당도 되지도 안하는 그런 말을 하면은 들려지고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이 없다 말이오. 왜 그런가?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래, 진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계명은 뭣입니까? 우리가 지킬 계명은 뭣이요? 지킬래야 지키지 못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가 지키려고 하니까 지켜지는 그 계명이 우리가 지킬 계명입니까? 어느 계명입니까? 예? 어느 계명이요? 자기가 지킬래야 지킬 수 없는 그 계명을 ‘이 계명을 지켜야지.’ 아주 이를 갈아붙이고 다물고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지켜도 헛일이요 못 지켜도 헛일이요 헛일입니다. 그것은 다 초절입니다. 그것은 초절이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다 자연스럽게 돼지요. 기쁨으로 가는 걸음이요 수월하게 가는 걸음이오.
자기가 목숨을 내놔야 되는데 목숨을 안 내놓으려고 뻘뻘 떨고 겁이 나 가지고 졸아지면서 목숨을 내놨다 할지라도 그 목숨 내놓은 것은 공연히 생명이 죽었소.
속에는 성령의 역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 지키는 것은 기쁨의 생활이요 즐거움의 생활이오. 그러기 때문에 단마음의 생활이오. 피곤치 않는 생활입니다.
같이 순교를 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못견뎌서 기뻐 즐거워서 감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기뻐 즐거워 못 견뎌서 죽은 사람 있고, 이제 죽는 것이 싫지마는 ‘하나님의 계명에 이래 놨으니 안 지킬 수 없고 안 지키고 이렇게 나가면 계명 어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그 결말이 어찌 되고 또 나가서 신앙 사회에 가 가지고 어떤 천물이 되어질 것이고’ 이것도 다 생각하고 여러가지 이성 비판에서 생각하고, ‘다니엘처럼 행여나 요행 심으로 ‘이래 목숨 내놨는데 살려준다 하니까 목숨 내놓은 것이 뒤에 도리어 목숨을 구출하게 될런지 알 수 있나?’ 하는 그런 허망심도, 그 속에 분석을 하면 기이하지도 않는 불신앙, 신앙이 아닌 기이한 더러운 것이 들어 가지고 역사합니다.
제가 해방 직후에 어떤 사람들 집회 가운데 만나봤는데 많이 그것을 내가 그것을 알아보려고 그래 왔는데 보니까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 있는데 안한 그 간증을 내가 해 보라 하니까 ‘네 이놈을, 일본놈들 요놈들, 나를 지져먹든지 볶아먹든지 아무렇게든지 해 봐라. 내가 신사참배 하는가?’ 그것이 주를 사랑함으로 계명 지킨 것인가? 아닙니다. 아니오. 그것이 참으로 이름은 주의 이름인데 속은 마귀요. 공산주의가 지키는 것, 민족주의자가 애국자가 지키는 것 그런 것이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으로 정사한 것과 같은 그런 것도 안 됩니다.
그것도 못 되는 것이오.
순교는, 그럴 때에 전설에 말하면 베드로가 꺼꾸로 못박아 주기를 간청했던 것처럼, 참 손양원 목사님이 기쁘고 즐거워 가면서 그렇게 증거를 하던 것,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지내가면서 기뻐 찬미하면서 내가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가는 것, 6.25 때에 그때 추 조사님하고 이 장로님하고 주 목사님하고 셋이 가 가지고서 개평교회 가서 설교하고 내무서원이 하나 와서 다 적어 가지고서 잡아 가지고 갔다 말이요, 동무 가자 하며 잡아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요놈들은 그냥 사형시켜서는 안 되고 요놈들은 어짜든지 우리가 해방시켜 놓고 요놈들을 다 참 갈아서 잔치를 해야 되겠다.’ 하면서 넣을 때에 그때에 두 사람도 주의 계명 때문에 갇혔고 주남선 목사님도 갇혔고 서이 갇혔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상이 새파랗게 벌써 사형받기 전에 거의 반이나 죽어가는데 주 목사님은 기뻐 즐거워서 십 분도 안 돼서 쿨쿨 주무시고 있더라고. 쿨쿨 주무시고 있더라고.
계명 지킴으로 당했지마는 속은 다르지요. 속은 두 사람은 어서 벗어나기를 원하겠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주를 사랑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지. 주를 떠나기를 원하는 것이지. 주남선 목사님은 주를 사랑함으로써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가 계명 지킬 계명은 자기가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지키는 계명입니다.
수월하게 지키는 계명을 지키면 모든 계명이 수월하게 지켜집니다. 수월하게 지킬 수 있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안하는 것이 사고입니다. 수월하게 지키지 안하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안한 데서 모든 사고는 다 구원은 중단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킬 수 없는 그 큰 계명을 지키지 않는 데서 구원이 중단돼 있는 것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아주 숫자가 적은데. 이 말은 속에 들려지지를 안하는데.
그 사람이 신사참배가 왔는데 신사참배를 이기지 못 하고 그만 신사참배에 견디지 못해서 신사참배 하겠다 고 굴복을 했습니다. 그때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그러니까 ‘너는 괜찮다.
나가거라.’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다시 신사참배 그것을 다시 안 하겠다고 날뛰어야 됩니까 그 신사참배 하지 안하려는 그런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제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가 그 밑에, 밑에 거게까지 올라오는 과정이 되는 그 밑에 다리를 놓는 자기 지킬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어데 있소? 신사참배 안 하는 그 계명이 자기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 지킬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어데 있소? 신사참배를 내가 하라는 데 이계명을 범했으니까 그게 일계명 이계명 범한 것인데 그 계명을 범했으니까 ‘이제 다시 신사참배를 안 해야 되겠다.’ 하는, 신사참배 안 하는 그 계명을 지켜야 됩니까 자기 지킬 계명이 딴데 있습니까? 신사참배를 했으니까 다시 신사참배를 안 하겠다는 신사참배 안 하는 그 계명을 지킬 것이 자기 당면된 지킬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봅시다. 자기 지킬 계명은 지금 그 계명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봅시다.
왜 여반에 안 듭니까?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소. 거게서 제가 계명 지키려 하면 안 돼.
따로 있어. 따로 뭣인가? 자기에게 지킬 계명이 있어.
자기가 당장이라도 돼. 자기 현실에서 그 현실에서 지킬 수 있는 계명 지켜.
절제해야 될 것이면 절제하고, 조심할 것 있으면 조심하고, 양심 쓸 일 있으면 양심 쓰고, 성경 상고할 수 있으면 성경 상고하고, 자기에게 거리낌이 있는 걸 발견되면 거리낌 있는 것 회개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기도하고, 이게 자기 지킬 계명이야.
여게서 신사참배를 그 하라는 그 강요에 대해서 그런 어려움 당한 것이 자기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해서 그 시기를 주신 것을 주님 앞에 기뻐하면서 ‘신사참배를 이것을 내가 이제는 이 계명을 지키겠다.’ 가 가지고서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들에게 ‘나는 과거에 신사참배 하겠다는 그런 죄를 지은 것을 내가 자복합니다. 용서해 달라. 내가 신사참배 하겠다는 말로써 하나님의 계명 어긴 죄를 하나님 앞과 당신들에게 범했기 때문에 내 죄를 용서하라. 내가 이제는 회개했다.’ 하면서 속에서 한없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그 신사참배를 이겼을 때 그때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 이기는 것이오. 수월하게 기쁘게 즐겁게 이길 수가 있어.
신사참배를 안 한다고 뚜드리니까 어찌 됩니까? 뚜드리니까 아프기야 아프겠지.
맞으니까 기쁩니까 분합니까? 예? 기쁩니까 분합니까? 어떻소? 어떻겠소, 그러면? 기쁘겠습니까 분하겠습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누구든지? ○○○목사님? 기뻐야 돼. 기뻐야 돼. 주님을 사랑함이 더하면 아플까 아픔이 없을까? 주님을 사랑함이 뜨거우면 아플까 아프지 않을까? 여게서는 뭣인지 모르고 지금 대답하겠지. 아프지 안해.
이러니까 모든 간증들이 그래. ‘참 매도 주님이 대신 맞아 주시는 모양이라.
하나도 아프지를 안했어.’ 아픈 것보다 더 강한 게 있는데. 주님을 사랑한 주님과 관계가 있는데 아픔이 그 속에 뚫고 들어오지를 못해. “피곤치 아니하면” 하는 것이나 그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하는 내나 그 말씀과 같은 성질의 것이오.
어떤 사람이 딸을 사랑하는데 가가지고 얼마나 가 가지고서 딸네 집에 묵어 있는 것을 거석하니까 아들이 그 여동생 집에 가서 보니까 어머니가 자기 집에서 갈 때보다 반쪼가리가 됐어. ‘아이구, 어머니 어데 편찮았습니까?’ ‘어데 야, 아프지 안했다.' 싱싱하이 막 기운이 있어 싱싱합니다. ‘아이고, 어머니 왜 신관이 많이 틀렸는데요. 아마 체중을 달면 어북 한 십여 키로가 줄었겠는데요.’ ‘아니 괜찮다.' 왜 그리 피곤한 걸 모를꼬? 아들은 걱정하는데 왜 자기 몸이 마른 것도 모를꼬? 밥맛은 있고. 왜 그럴까?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이오. 딸을 사랑하는 사랑함으로 하기 때문에 피곤한 줄을 몰라. 어서 해 주고 가겠다고.
그게 사랑의 힘이요, 사랑의 힘으로 피곤한 것 모르는 것이나, 사랑의 힘으로 아픈것 모르는 것이나, 사랑의 힘으로 죽는 것 모르는 것이나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를 사랑함이 자라가는 이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 것이 주를 믿는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당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당신의 속성을 알고 당신이 어떤 분인 것을 자기가 참으로 인정할 때에 이상하게도 이 속성과 저 속성이 서로 마주치는데, 마주치는데 모든 당신의 속성 당신의 그 존재를, 당신의 개별을, 당신의 주권을, 당신의 창조를, 당신의 섭리를 이 모든 것을 다 믿을 때에 요 믿음 속에 들어 있는 이 촛점에, 자기가 촛점에, 온 하나님을 다 믿으니까 믿음의 촛점이 다 자기에게 다 집중됐는데 자기가 촛점됐는데 촛점될 때에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변해집니다.
사람이 변해져, 정신이 변해져, 마음이 변해져, 모든 행동과 태도가 변해져, 변해지는 게 뭣이요? 초자연적이오. 이러니까 그의 하는 일이 실수 없으니까 올라갈 수밖에 없지. 어디로 가겠소, 안 올라가고?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은 시간 없으니까 가서 연구하고 인제 그 간추렸으니까 되는 것이니까 그대로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을 길러야 됩니다.
아까 신사참배 이기지 못한 그 사람은 신사참배 ‘주여 주여, 내가 신사참배 안 하겠습니다. 주여 이기게 해 주옵소서. 신사참배 이기게 해 주옵소서. 신사참배 이기게 해 주옵소서.’ 암만 해 봤자 헛일이오. 그 계명은 제가 지킬 계명이 아니라. 그 밑에 다리를 놔야 돼.
삼층 옥상에 올라가려면 제가 뛰어올라가려고 ‘주여, 올라가게 해 주옵소서.
올라가게 해 주옵소서.’ ‘야야, 올라가려 하지 말고 거게 올라갈 수 있는 비결을 매라. 비결을 매라. 사다리를 만들어라.’ 하나 만들고 둘 만들면 척척 거머쥐고 올라가면 되는데. 그래 안 하고 제가 평생 뛰어올라갈래도 못 뛰어올라가. 그와 마찬가지요.
제가 신사참배 못 이겼으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지킬 계명은 따로 있어.
뭣인가? 자기가 성경을 상고하면서 양심을 써. 제가 회개할 수 있는 회개를 해.
잘못된 것을 찾아서 자복해. 그렇지 않으면 제가 기도를 해. 자기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 거리낀 것 있으면 거리낀 것 그걸 틔워.
틔우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와. 능력이 와. 감화 감동이 와. 바른 깨달음이 와. 그러면 기도가 돼. 기도를 해. 그러면 당신을 대접할 맛이 생겨져.
당신을 대접할 맛이 생겨지면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 그로 인해서 없어지는 것은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요 그것 때문에 기다리고 있어. 그게 자기 성공이라.
마지막에 생명이 당신과 당신의 계명을 인해서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자기로 인해서 자기로 주님을 완전히 다 사랑했고 주님의 모든 것 자기 것 다 됐고 자기에게 속한 것은 주의 것이 다 됐기 때문에 생명 성공이라. 이것이 자기에게 소원인데, 소원인데 신사참배가 무슨 그것이 저주스러울 것이며 그것이 무슨 불행스러울 것입니까?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됩니다. 이렇게 하지 안하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유일한 좋은 방편이 뭣이냐?’ 하는 그 문제가 성경 시험에 장로 목사 시취 시험에 언제든지 그 문제를 제가 냅니다.
안 낼 때가 한번도 없습니다. 답안은 잘 써. ‘깨달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라.’ 답안은 잘 써. 그것이오. 오늘 아침에 설교하는 게 내나 그겁니다.
지킬 수 있는 것 지키면 나중에 지키는 것이지 제가 쉽게 힘 안 들고 지킬 수 있는 것도 지키지 안하면서 제가 지킬 수 없는 것 지킨다고? 그게 본야 인간의 타락의 본성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시키면 제가 할 수 있는 걸 시키면 그것은 안 하고 할 수 없는 것 꼭 한답니다. 할 수 없는 것 꼭 한대요. 그것은 아이가 잘못된 것이기에 그걸 고쳐줘야 됩니다. 할 수 있는 것 안 하고 그것은 안 하면서 할 수 없는 것 그거는 하겠답니다. 그것 허영과 허욕이요 그 속에 원죄라, 그것이.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자들도 할 것은 하지 안하고 할 수 없는 그것 제가 하려 합니다. 그 놀음은 언제든지 철없는 놀음이기 때문에 평생 걸어도 저는 그 실질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