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재림

 

1982. 4. 19. 월새

 

본문 :  벧후 3:11-1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에게는 제일 큰 문제가 되고 또 죽음이 개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문제가 되는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큰 중요한 문제인 재림이 왜 사람들  마음에서 다 떠나가고 아무런 감각 없는 일이 되어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헛되다든지 또 재림의 그 시일이 장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게 된 것은 말세가 되어 갈수록 죄악  중에 가장 강한 죄악인 자기 중심 사욕이 강해서 이렇게 되어진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가. 원죄의 역사입니다. 원죄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주관, 사욕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 원죄의 역사가 강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여기에 대한 두려움이나 떨림이나 준비 이런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악령이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 그것 이 저의  대성공인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잊어버리게 하는 이것이 대성공입니다. 벌써  사람이 죽음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잊어버린 것은 악령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방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모든 생애는 다 불탈 것이요  땅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온전치 못한 이 믿음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생의 법칙으로 삼고 이대로 실행하여 산다고 해도 그것이 다 땅의 복음 생활이요,  땅의 것을 소망하고 땅의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요, 그것을 깊이 분석하면 원죄가  하고 있는 것이지 참 새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하는 것은 사람이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도 꼭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줄 알아 살려고 애쓰는 것만치  자기는 죽음에 대한 노력도 같은 양이 있어야 되지 같은 양이 있지 않으면  이것도 치우쳐서 다 헛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생애 전부와 꼭  동등되는 그런 중량을 가지고 있어 모든 경영과 소원과 계산, 이 평가와 비판은  죽음에서 하는 것처럼, 내가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이래야 되겠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래야 되겠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 정상입니다.

 죽음을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 소원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이나 계산하는 것이나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그것은 벌써 치우쳐서 사탄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아무런 수입이 없습니다. 어떤 경영을 하나  해도 나는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때문에 이 경영을 해야  된다 하면서 그 경영을 이 세상 현실에서 그것을 하면 조절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간절은 남김이  없는 그 마음 전부를 다 말하는데, 마음 전부는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이 재림에  있을 소망, 재림하실 그때에 가치있는 것, 그때에 남아 있을 것, 그 때에 필요한  것, 느껴지는 것, 원하는 것, 후회되는 것 그런 것을 오늘에 이루는 자가 되어져라  하는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왜. 이 모든 것이 불타 다 덜해지고 땅에 있는 모든 사실이 다  고정되어 드러나고 모든 것이 멸해지지마는 다만 그때에,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남아 있을 그것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들이요 그것이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있을 것들인데, 그것은 뭐이냐.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바라보도다" 의, 의만 그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한 행실, 경건,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것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가 거룩과 그날을 소망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가. 이것은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합니다.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데, 이 경건은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중심으로 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경건인데,  그러면 경건은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인가. 경건은 의를 이루는 이것입니다.

경건이 조성할 것은 의입니다. 경건의 목표는 의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하는데 주님을 위한다고 해도 자기의 주관대로 주님을  위할 수 있고, 상대방은 원치 아니하는데 자기는 자기대로의 위하는 그런 것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건은 어떤 것을 이루어야 되느냐. 경건은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하는데도 그것이 의는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씀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그 소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뜻을 이룬 것을 가리켜서 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중심으로 하되 그분의 뜻에 맞추어서 된 것이라야 되지 그분의 뜻에 맞추지 않은  그 경건이 되어 봤자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했으면 그것은 다 온전한 가치를 가진 것이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하는 것도 그것도 그 심판날에,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견디지 못하고 용납지 아니할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하다고 할지라도 그 경건을  받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우리 서부교회서도 이혼 당한 사람들을 내가 많이 봤는데, 여러 사람을  이혼 당한 그 부인들을 봤는데 그분들이 이혼 당하는 사람마다 상대방 자기  남편을 위주로 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 위주로 하고 그를 좋아하고 이러는데 그 상대방은, 그 아내는 전적 참 자기  남편만 위해서 이렇게 전심전력을 기울이다시피 우상이라고 할 만치 이렇게  위하는데 그 남편은 마다하고 또 죽자껏 싫어합니다. 이래 가지고 이혼되는 것을  봤습니다. 또 어떤 사람 보니까, 그 아내는 남편을 마다고 이러는데 남편은 또  아내를 좋아해서 아내는 이혼하려는데 남편이 이혼 안 해 주려 하는 것도 그런  것도 봤습니다. 이것이 다 모두 비정상인데, 왜 아내가 남편을 참 일편단심으로  위하는데 왜 남편이 싫으냐, 남편의 뜻에 안 맞아 그렇습니다. 뜻에 안 맞아  그렇고, 남편이 소원하는 대로의 그 소원이 아닌 열녀요, 아닌 모든 언행심사의  행위이기 때문에 남편이 마다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위하지 않아서 마다하는 것이 아니고 위해도 그분의 성미와 그분의 뜻과  그분의 소원과 기쁨이 되지 않으면 그는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거룩한 행실,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경건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 경건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경건을 했다 할지라도 이 경건이 또 버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말이오.

 버림을 당할 수 있다 그말은 이제 말한 이혼당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자기로서는  참 전부를 다 기울여서 하나님을 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비위에 맞지 않는 그  경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경건, 하나님이 요구하고 명령하고 소원하지 않는,  그분에게 맞지 않는 경건이라면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분에 맞은 경건은 무엇이냐, 그것은 의입니다.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이 의는 확실히 예수님의 재림의 모든 불심판을 다  통과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므로 모든 것들은 이 새하늘과 새  땅에 가서 있을 것들이라 그거요.

 그러면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 역사는 경건을 이루는 것이고 경건은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경건은 의를  이루는데, 그러면 의가 되는 경건이라야 되지 의가 되지 않는 경건은 소용이 없다  그거요.

 그러면, 의가 되는 경건이라. 의가 되는 경건이라 그말은,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시고, 당신의 본질, 본성, 법칙, 당신의 소원, 또 당신에게 영광  되는 이것이라야 의가 됩니다.

 의가 되는데,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는 그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경건입니다.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이룬 경건은 의가 됐습니다.

 의가 된 것은, 그 의는 하나님의 의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요구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그 본질과 본성에 딱  들어맞은 그 하나님의 소원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 이렇게  판정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사람되어 오신 그 하늘에서부터 땅에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죽으심은 하나님의 의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족히 여기셔서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시는 이 부활을 당신이  덧붙여 이 일을 맡길 수 있었고, 이 일을 맡으므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당신이 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다 주님의 것이 됐고 또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통치하는 것도 다  주님이 통치하시게 됐습니다.

 이래서 주님은 영원한 왕이시요 또 만주의 주시요, 이는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신성만을 말한 것 아닙니다. 또 모든 것을 심판하는 심판의 권세를 다 예수님이  가지셨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제일 만족히 여겨  그에게 다 기울일 수 있고, 기뻐하는 아들이라, 모든 것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공 지성 법에서 상속시켜 줌을 받을 수 있는 이런 자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 11장 7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가 반드시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는 자라"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하는 그  해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이 뭐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이 행복 될 때에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잘되는  그 면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되도록 역사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거리입니다. 어째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일까.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 하는 그 말을 우리가  영과 육이 금생과 내세에 참 행복되는 자가 되는 데에는 믿음 없이는 안된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을 우리가 행복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하는 그 해석을 하는 것은 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거룩과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그것이 무엇을  조성하려고 그와 같이 하는가. 경건을 조성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러면  경건은 무엇을 조성하려고 하나. 경건은 의를 조성하려고 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오셨으니 예수님은 이렇게 거룩한 행실,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시는 첫 열매로 이 일을 하셔서 경건을 이루시고 이  경건은 마침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는 의를  이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공하신 것은 의를 성공하셨고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거와 땅에 있는 것을 다 상속 받았고 아버지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다 주셨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대리 맡아 가지고 모든  일을 하게 됐기 때문에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또 심판하는 권세를 그가  가졌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에게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어 하나님의 소원에 만족을, 요구에 만족을, 하나님의  뜻에 만족을, 하나님의 영광에 만족을,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요구에 만족을  이룬, 만족을 이룬 이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멸망하지 아니하고 남아 있을 이것을 만드는 것은 의가 된  것만 남아 있습니다. 의는 그것은 어디서 만드는가. 경건에서 만듭니다. 자기가  거룩한 행실,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 거룩한 행위를 하는 이것이  잘되어서 성공되면 경건 됩니다.

 이렇게 거룩한 행실을 해도 이것이 경건이 안 될 수 있다 그말이오. 사람  보기에는 주를 위하는 것 같지마는 주를 위한다는 것이 자기 때문에 주를 위하면  자기가 근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껍데기에서는 다 이것이 합격이지만 들어갈수록 자꾸 불합격 불합격  불합격 되어 가지고 저 마지막에는 완전무결이 되어져야 그것이 합격이 되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합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건이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될  때에 그것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완전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모든 말씀은 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하는  것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에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을 이룬  이것이 의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모든 것 다 내어 놓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는 이 말씀까지 전부 아버지의  요구대로 하셨습니다. 만족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고 또 영광을 받으리라. 이제까지 온 것은  전부 내가 영광을 받았다. 앞으로도 영광을 받으리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인데, 빌립보 2장 9절 이하에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이 무릎을 꿇게 또  모든 피조물들로 주라 시인하여,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의를 완성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땅 위에 사는 것도 모든 우리의 마음이 다 그날에 가서 있으면,  그날에 가서 있는 것은 뭐 할려고. 그날에 가서 있는 것은 우리 행위가 거룩한  행위가 되려고 그날에 가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위해서 뭐하려고.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은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을 위해서, 이루기 위해서 하면 경건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가. 경건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의 완성인데도  하나님의 뜻은 심히 복잡합니다. 복잡해서 거룩도 있고 진실도 있고 사랑도 있고  또 온전도 있고 또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고 선도 있고 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러면 의에 대한 의의 중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딱 들어맞은 그것이 의인데,  하나님에게 딱 들어맞으면 딱 들어맞는, 하나님에게 들어맞는 그 맞음에 외부적인  각도가 많으니, 이 모도 있고 저 모도 있고 있으니까 어느 모때기를 중심으로  위주로 할 것인가 하는 이것이 이제 하나의 마지막 봉착된 문제가 되겠습니다.

 마지막 그러면 의, 이 의는 무엇을 표준으로 한 의겠는가 무엇을 중심으로 한  의겠는가. 하나님의 속성이 열두 가지나 되어지니, 나타난 것이 열두 가지로  나타났고 그 뒤에 분석하려면 더 많이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났으니 어느 속성을 위주로, 어느 속성을 중심으로, 어느 각도, 어느  속성의 각도를 근원으로 주체로 삼아서 우리가 이 일을 조성해야 될 것인가  이것이 이제 문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속성은 다 하나님의 의인데, 하나님의 속성대로 하지마는  어느 각도 어느 속성에 중심을 두고 해야 되겠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어제 오후에는 많이 마지막에 말을 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이 만족하신 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의에 대해서 당신이 만족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남김없이 다 줬습니다.

주고 참 영광을 받으시고 영원히 만족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만족하신 이 의를 이룬 그것을 우리가 보면  아버지는 어떤 것을 요구하시고 명령하셔 가지고 그대로 됐을 때에 만족하신 그  의로 인정하시고 모든 것을 다 남김 없이 안심하고 기뻐해서 다 상속을 시켜됐고  예수님은 상속을 다 받아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내게 주셨으니 이렇게  발표하신 대로 이렇게 됐는가.

 그러면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대해서 원하시는 그 의가 뭐이었던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벌써 지나간 일이 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이 됐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제도 다 가지 가지를 증거했지마는 그와 그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뭣하려고 하나님이 사람 되어 하나님의 부요를 뭣 때문에 내놨으며,  하나님의 존귀와 세력을 뭣 때문에 내왔으며, 사람되어 왔으며, 뭣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신데 동등 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와 같이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 되어졌던가.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아버지의 형상대로 만든 우리를 사랑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택한 자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택자 우리를  사랑하므로 아버지를 위하는 일, 곧 우리를 위하는 일 이것을 위해서, 주님이  하늘에서부터 다 이거 위해서 투자하고 희생해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이렇게 하신 것은 그분의 중심이 뭐였던가. 그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아버지의 뜻을 맞춘 것이 이 면을 맞췄다 그말이오.

 아버지의 뜻을 맞춘 것이 이 면을 맞췄어. 아버지를 사랑하는 면,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우리를 사랑하는 이 면, 아버지와 우리를 사랑하는 이 면을 맞춰  가지고 합격이 됐습니다. 이 면을 맞춰서 이 면에 모든 것을 다 투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 없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버지가 주님에게 요구하신 경건은 이것이었고, 주님이 이  경건으로 목표하셔서 만든 의는 이것을 기준해서, 이것을 표준해서,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한 의기 때문에 아버지가 만족했구나 하는 그것을 우리가 보고,  예수님은 첫 열매라고 말했고, 믿음을 주장해서 온전케 하려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오라, 예수님을 닮으라, 예수님은 볼 수  없는 아버지의 형상이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의는 원형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의는 원형이라고 하면 우리의 의는  그와 꼭 같은 예수님의 의의 모형이면 되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판정할 수가 있습니다. 또 첫 열매라고 했으니까 첫 열매가 그러면 다음 열매도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니까 꼭 예수님이 하신 그  모형대로,  또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게 채워라. 또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다 자기도  자기의 십자가 지라. 이 십자가는 예수님의 지신 그 십자가뿐이고 그 십자가의  새끼, 그 십자가의 모형 뿐인데 그러면 어떤 면으로 우리가 주력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대략 짐작을 해서 우리는 결정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고 그날에 소망하는, 그날에 무슨 소망을 가질  것인가. 이래 가지고 거룩한 행실 해 가지고 경건을 하는 것인데, 이 경건이 뭘  이룰 것인가 경건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

 하나님의 의는 각도가 많으니까 어떤 각도를 중심을 해 가지고 우리가 노력해야  되겠느냐 그 각도는 예수님이 잡으신 각도 그 각도를 우리가 잡아야 된다 그  각도가 뭐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곧 형제를 이웃을 사랑하는 이것이 그것이 각도의 그  모배기라. 이것이 중심이요, 이것이 위주라, 이것이 주체라, 이것을 중심으로  위주로 해 가지고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많지마는 요구의 그 중심 되는 것은 뭐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고 멸망 받지 않고 남아 있을 것들은 뭐이냐. 남아  있을 것들은 어떻게 하면 남아 있을 것들을 만들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이루겠습니까. 네가 뭐라고 읽었느냐. 율법을 뭐라고 네가 읽었느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또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잘 대답했다. 네가 잘  알았다. 그와 같이 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걸음 그것이 의심할 것 없이 우리가 그 걸음을  따라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면 이것은 하나님의 만족하시는 의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정 지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할 것은 뭐이냐. 할 것은,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의 이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면으로  우리가 의를 이를 것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 복종 복종 그것이 무엇 때문에 복종하느냐.

복종한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의인이라야 된다. 의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명령하신 그 각도에 맞은 그것을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면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에 만났을 때에도 부탁한 것이 이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히실 그때에 마지막으로 성찬을 베풀면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것도  이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 주일날 모여 가지고 부탁한 것도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이것이고, 첫 주일에 부탁한 것도 이것이고, 또 마지막 주일날 부탁하신  것도 이것이고, 또 예수님이 승천하실 직전에 유언하신 것도 이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어서 제일 처음에 착수한 일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은사를 입어 가지고 그들이 첫째 한 일, 성령이 그들에게 와 가지고 첫째  한 일이 무슨 일이냐. 첫째 한 일이 예수님의 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어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하는 이 일이 첫째 착수한 일입니다. 이 일이 첫째 착수한  일이요,  또 그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강림하고 난 다음에 중간에 한 토막  있었는데,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이 복음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을  멸망에서 건져내는 설교를 하므로 그들에게 거리꼈어. 건져내는 설교를 하므로  거리꼈어. 그래서 이 스데반이 신약교회에 순교자로서는 제일 첫 순교자입니다.

순교할 때에 이 스데반이 원하다가 순교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자기  주관 도에 다 빠졌어. 자기 주관 도에 다 빠져 버렸어. 하나님 하나님 말하지마는  하나님을 팔아먹는 자, 이용하는 자가 됐지 하나님의 것이 되지를 않았어. 이것을  고쳐서 구출하려고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은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이렇게 이럴 때에,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하늘에서 주님이 하늘문을 여시고,  하늘에서 스데반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만족히 여기시고 문을 열고 스데반  올라오기를 지금 맞이하려고 환영하러 나왔어. 환영하러 나온 것을 스데반이  봤어. 볼 때에 그 얼굴이 광채가 났고,  마지막에 이렇게 돌로 치는 이 속에서도 사람을 주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죄를 정하지 않기를, 사죄하기를 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마지막 있는 힘 다해서, 돌조산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면서, 묻혀 가면서 그 기도를 하는 이것으로서 만족하시고 그는 하늘나라로  올리워 갔습니다.

 또 그 뒤에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 가지고, 만나 가지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떻게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럴 때에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난 다음에 그분이 또 착수한 일이 뭐이냐 하면,  내나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대해서 하신 일과 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서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이 일로서 자기의  평생을 바쳤고, 마지막에 생명을 바치기까지 항상 미련을 가지다가 생명 바치는  그 사형을 받아 가지고, 사형이 결정되고 난 다음에 그가 말하기를 "이제는 나의  달려갈 길 다 갔고 내 소원 다 이루었고 모든 싸움 다 싸워 이겼으니 이제는  남은 것은 의의 면류관뿐이라. 의의 면류관, 이를 달성했다. 의를 달성했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고,  이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이 많고 의가 많지마는 그것이 뭐인가.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것이 그 각도요 그것이 중심이라.

이러기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뭐 목숨 버리는 것 뭣 때문에  버리는데.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 계명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거와 같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이  뭐인데. "내 계명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서 어떻게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한 이것과 같이 하는 이것이 계명이라"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하고 요구하는 것은  이것뿐이라 하는 것을 우리는 확정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이제는 확정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중심이 무엇이며, 우리가 목표하는 목표가 무엇이며, 우리의 취할 방편이  무엇이며, 걸어갈 자욱 자욱의 걸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판정을 지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속성의 각도는  많기 때문에 이 각도를 자기가 중심으로, 저 각도를 중심으로, 모든 각도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하기 쉬운데 모든 각도는 다 소속이요 외나 중심 아니고  주체는 아니라. 그 주체성은 뭐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것이  주체성이라.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것이 이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주체라. 그러면 우리의 목표도 하나님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는 것이  목표요, 우리의 방편도 이것을 위한 방편이요, 우리의 걸음도 이것을 향하여  찾아가는 걸음이요, 우리의 모든 조성도 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의 전 생애는 어디로 집중됐습니까. 이제는 무엇으로, 이것만 하면  된다 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단일로 결정이 됐습니까. 우리의 모든 땅 위에 있는  생애는 무엇 하나를 해야 된다는 그 하나를 이제 결정을 지웠는데,  수많은 것을 다, 수많은 것을 다 헤치고 헤치고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다 헤치고 이거다 하는 이 하나를 거머쥐었는데 하나 거머쥔 것은 무엇입니까.

남반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한번 대답해 봐요. 뭐입니까.

이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인데, 이러기 때문에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이렇게 사랑인데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네 몸을  형제를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해  놨으니 이것도 문제입니다.

 사랑 하나로서 규정을 지우기는 지웠는데, 규정을 지웠는데, 이 믿음 있는 것  희생하는 것 이것이 참 귀한 것인데 이래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해 놨으니  이것도 문제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또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자기  몸을 형제를 위해서 불사르도록 희생해서 내어 줄지라도 이래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 그말이오. 이래도 사랑이 아닐 수 있어.

 이러기 때문에 사랑은 첫째 아담의 사랑이 있고 둘째 아담의 사랑이 있으니  인간에게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이요 인간에게 제일 생명의 행복이 많은  것이 사랑이니 사랑과 사랑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사랑이 좋은 줄만  알고 사랑과 사랑을 구별하지 않는 이런 말세 교회가 됐기 때문에 문제라  그말이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망치는 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망치는 자가  사랑입니다. 교회를 망치는, 말세 교회가 범죄 하는, 교회를 망치는 이것이  뭐이냐. 사랑입니다.

 이래 가지고 저거끼리 뚤뚤 뭉쳐서 이제는, 어떤 사람의 역사를 대조해 가지고  발표를 했는데 천주교와 개혁교가 대립이 돼서 뭐 죽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는데 그때 종교가가 천주교를 그것을 틀렸다고 개혁하려고 할 때에  한 달 동안에 죽은 사람이 10만 명이라.

 내가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그 말이 석 달 동안에 10만 명이라던가 한 달  동안에 죽임 받은 사람이 10만 명이라든가 이런데,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에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천주교 교권이 이것이 다 꺾어져서  꺾어져서 사라지기까지 개혁교가 좀 자유를 얻기까지에 죽은 사람은 수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신문 보니까 천주교에서 이 개혁교를 죽인 것이 몇 만 명입디다.

내가 지방은 잊어버렸어. 또 지금부터 한 2, 30년 전에 그때도 그때 언제 한번  신문에 보니까 그것이 폴란드든가 뭐 무슨 뭐인지 모르요. 그런 것 어쩐 것  같은데 루마니아든가 어디서 거기에서 도끼로, 천주교인들이 개혁교인을 도끼로  쳐서 7천 명을 죽였던가 또 그렇게 됐습디다.

 이렇게 다 그분들이 공연히, 천주교에서 개혁교를 교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개혁교는 천주교를 죽이지 않지마는 천주교는 개혁교를 죽입니다. 인제 개혁교도  껍데기 종교가 돼 가지고 죽이는 그런 일을 얼마 전에 보니까 한 일을 봤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이런 이것이 다 교리 문제요 신조  문제인데, 요새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도 손을 잡고 화합을 하려고 지금 키신저가  저 중공에 갔고 뭐 소련에 갔고 이래 갔는데 우리가 편 때문에 이렇게 화친이 안  되겠느냐. 이러니까 종교는 기독교는 통일을 만들자. 이 통일 만들자는 거기에  앞선 자는 ○○○이입니다. ○○○이는, 기독교만 통일할 것이 아니라 불교나  뭐이나 종교는 다 종교 통일을 하자. ○○○이가 종교 통일하자는 제 일인으로  깃대를 들었습니다.

 이러니까 종교 통일을 다 하자고 하는 이 세대에, 공산주의 민주주의 서로  원수로 이렇게 하면서도 통일하자 하는 이때에 기독교가 통일 안 돼서 되겠느냐.

기독교 통일 주장을 해 가지고 성서공회에서 천주교인들과 개혁교인들이 성경  번역을 하면서 합동 번역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 성서공회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제가 그때는 말하기를, 합동 번역하는 이  성경은 우리는 안 사겠다. 이 합동 번역하는 것은 살 수가 없다. 이것은 순전히  번역하는 자들이 이것이 그 주체가 돈에게 팔려 가지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돈에게 팔려서 거기에 돈 우상을 섬기는 이자들이 번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는 사 보지 않겠다.

 그래서 그때 제가 교인들에게도 말해서 그 전 것을 천 권을 사다가 나눴고 또  천 권 사다가 나눴고 저도 그 성경을 다섯 권인가, 내가 몇해 살지 모르지마는 그  동안에 떨어지면 한 댓 권 더 떨어지겠나 해서 합동 번역 전의 것을, 이전의 것을  다섯 권을 사 놨습니다.

 합동 번역한다고 언제 거기에 대해서 이릴 수가 있냐 하는 그것을 팜플렛에다  내고, 심지어 기독교 무슨 언론지에다가 한번 기재해 낸 것까지 봤습니다. 그것은  누가 했느냐. 저 먼저 여기 우리 강단에 섰던 그 사람 성이 뭐고. 저 원주에 있는  사람. 하종택, 하종택목사님이 그래도 뼈가 살아 있어서 그것을 주장을 했습니다.

 이랬지만 다 웃으면서 말 같지 않게 취급해 버리고 그것 지금 다, 지금 그런 말  하면, 합동 번역을 뭐라 한다 하면 아이구 저거 퀘퀘묵은 것, 저 옛날에 파묻혀서  시대에 떨어진 것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진보의 기독교입니다.

진화의 기독교요 진화의 기독교. 진화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마귀의  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래서 이 사랑으로 집결되어서 사랑이 중심이고 주체라 하는 것을 잡았지만 이  사랑이 문제입니다. 첫째 아담의 사랑도 있고 둘째 아담의 사랑이 있으니, 첫째  아담의 사랑은 죽였고, 인간을 죽였고 둘째 아담의 사랑은 인간을 살렸는데,  그러면 우리가 사랑 이것이 중심이니 사랑이 중심이라면 이 사랑은 어떤 사랑.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니,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생겼는가.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봐라. 사랑은 여기에 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그  사랑은 어떻게 생겼는가. 사랑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그 사랑이 뭐이냐.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예수님이 가신 이대로의 걸음으로 가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중심에서 그 시간 그 시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뜻을 따라야 되지 이 사랑을 표준으로 목표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면 탈선되어 나가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이거 아주  어려운 말인데, 이거 절정에 지금, 절정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지금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그말이오.

 지난밤에 여기에 보니까, 나도 그것을 두 번 세 번까지 들었습니다. 5층에서  들었는데, 녹음한 것을 듣는데 나도 그것을 설교를 해 놓고 혹 잘못됐는가 싶어서  다시 그것을 내가 들어 볼려고 복사를 해 가지고 가져오라고 했더니 가지고 와서  그것을 듣다 보니까 거기에 나와서 들었는데 하나님이 옳고 바르게 증거해  줬습니다.

 어제 오후 시간에 그것은 오늘 아침에 말씀한 것과 같은 우리가 의에 집결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원하시는, 하나님이 만족해 하시는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인데 그 사랑인 것을 뭘 봐서 아느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럴 때에 요구가 이렇다. 이럴 때 요구가 이렇다.

이럴 때 만족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기뻐하는 자라고 찬성한 것이  이거다. 그걸 봐서 아버지가 주님에게 요구했던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요구에 만족을 이루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만족을 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다 맡겨서 이는 만주의, 만왕의 왕이시라고 딱 신인양성일위를 결정을  지워서 요한계시 17장에 계시해서 문서계시로 딱 선포를 해 놨다.

 이랬는데, 그러면 예수님에게 대해서 아버지의 요구는 그것인데 우리에게 대한  요구는, 예수님의 요구는 뭐이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도 그런 것인데 그런  것이라는 것을 그 증거를 성경을 많이 말을 하면서 증거를 댔습니다.

 이래도 거기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고 거기 따라오면 놀래질 것인데 따라오지  않고 벌써 떨어졌다 말이오. 떨어져서 나 혼자 설교했어. 떨어져 나 혼자 설교를  하니까 싱겁지마는 그래도 이걸 증거 해야 되기 때문에 증거를 했어. 거기에 대한  것도 제가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듣고 열두 시가 훨씬 지나서 저도 눈을  붙였습니다.

 그래, 이렇게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요구가 사랑이다. 사랑에  집결됐다. 그러면 사랑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다. 제일 해독 많은 것이  사랑이요 제일 생명 풍성한 것이 사랑이다. 이런 데에는, 이 사랑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달성하는, 이를 목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내어놓고  하나님의 문서계시와 영감계시 여기에 따라서 움직여져야 이것이 이루어진다.

 이러니까 가다가 탈선될 길이 어떻게 많은지. 앞으로 지금 이 갈래길이 예를  들면 백 개나 갈래길이 있는데, 갈래길, 앞으로 백 개의, 갈래길을 백 개를 앞에  두고 있는 여기에서야 이제 갈래길에서 바른 길 척 찾았으면 여기에서 다 됐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야 갈래길 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갈래길이 날 필요가 없고  여기에서는 그 한 길 뿐이지마는 이자가 거기에서 이 길에서 나가면 이 길로  전부 나가지 않고 중단하고 섰기 때문에 갈래길이 안 만나지지 여기에서 걸어  나가면 갈래길이 또 나옵니다.

 갈래길에서 거기에서, 그만 거기에서 섰으면 갈래길이 안 나올 것이고  갈래길에서 이 길을 가느냐 저 길을 가느냐,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다 하는  이것이 뭐이냐,  오늘에 지금 합동 번역하고 기독교 통합을 말하는 에규메니칼, 통일 뭐꼬, 지금  뉴에이지로 그렇게 파가 있고, 지금 ○○교회이니 모두 이래 나가는 그 교회들이  무슨 파지요. 통합파, 통합파. 통합, 칼측이라 하는 것은 통합파라 말인데  통합파가 그겁니다. 전부 다 통합하자는 그 주장을 지금 가지고 나가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 것이 들어와도 다 좋아합니다. 다 들어와도 다 같이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지는 이런 위험한 길이오.

 거기에서, 통합파에서 자기가 참 깨어서 말씀대로 살려고 나가 보면 반드시  그쪽에서 서로 신앙 대립이 생길 것입니다. 안 나가기 때문에 대립이 안 생겨져.

나가면 대립이 생겨져, 안 나가니 대립이 안 생겨져.

 그래 나가면 또 대립 생기면 거기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 가지고 바른 데로  나가면 여기면 끝인 줄 알아도 나가면 또 갈래길 또 갈래길 이래서 모든  갈래길을 다 헤쳐 놓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그것이 이제 바로 되는 것인데,  이러기 때문에 합하는 것도 좋지마는 나누는 것도 합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수가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것으로서 되어져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  교회가 하나로 단일교회로 되어지는 이것은, 단일교회 되어지는 것은 중생은  단일교회 됐습니다.

 중생은 단일교회가 됐는데, 중생 된 자가 건설구원의 단일을 맞추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단일을 맞추기 위해서 향해서 갔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 가지고 이렇게 달라지는 이것이 끝에  가서 이루어지는 이것은 이것이 다 건설구원에 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진리를 안 들으면 모릅니다. 안 들으면 모르요. 자꾸 이렇게  갈라서 쪼개는 것이, 어떤 사람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을 도마 위에 놓고 막 칼로  쪼아 가지고 이렇게 난도질하는 그것이 의가 아니라, 가증스러운 말입니다.

가증스러운 말이오. 천하에 둬도 둘 곳이 없는 그런 많은 양을 간추렸는데 그  간추린 이 속에 없다 말입니까. 성경 해석하는 것을 또 주님이 다 허락을  했습니다. 말씀을 했습니다. 또 사도들도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들으면 제가 그만, 여기에서는 됐는데 아직까지 갈래길 남아  있는 갈래길이 있으면 그것은 완성은 아닙니다. 완성은 아니오. 거기까지는 바로  왔지마는 그 다음에 저리 갈런지 이리 갈런지 모릅니다. 갈래길을 다 이것을  갈래길을 거치고 거치고 이제는 갈래길이 없는 거기에 가야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 그말이오, 그것이 하나님 의.

 이러니까 안 들으면 안 되는데 배암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무시합니다.

배암의 지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무시합니다. 이러기에 지금  세계의 교회는 배암 지식이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 있고 하나님의 지식이  운영하는 교회가 있으니, 하나님의 지식과 배암의 지식이 한자리에 있지마는  반드시 대립이 될 것이오. 되어서 배암 지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능란하고 세상적으로 조화가 맞고 아주 민첩하고 훌륭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 편으로 가깝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는 옳고 바를 것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의 지식으로 지혜 있는 것 배암의 지식으로 지혜 있는 것  이것이 지금 이 교회가 말세 교회가 되어질 것을 요한계시 2장으로부터  3장까지에 교회마다 전부 두 쪼가리라, 두 쪼가리. 전부 두 쪼가리라. 그들도 다  잘 믿으려 하는 교회인데 교회가 두 쪼가리라 말이오. 두 쪽이 아닌 교회가 일곱  교회 가운데에 몇 교회나 있습니까. 여반에. 한 교회뿐이라. 전부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교회는 두 쪼가리인데 한 교회는 두 쪼가리가 아니고 하나라, 그  교회 이름이 뭐입니까. 라오디게아교회. 다 죽었기 때문에, 그거는 죽었기 때문에  아무 갈라질 것이 있어. 뭐 대립될 것이 뭐 있어야지. 전부 세상 지식화됐다  말이오.

 목사도 세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이용을 하기는 하지마는 세상 지식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분석해  들어가면 제가 주인이요, 하나님도 이용해 먹는 제가 왕이라 그말이오. 주인을  바꾸지 않은 자라.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공경하는 열심 있는 그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고 지금 나와 대립되는  것은 너희들에게 내가 증거 하는 말씀 이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이  대립이 된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중간반 반사를 자꾸 여기에  참석해라, 새벽기도에 참석해라, 주일학교 반사들을 참석해라, 장로들을 참석해라  하느냐 제가 중직을 거머쥐고 사람을 이렇게 멸망시킬 수도 있고 이렇게  구원시킬 수도 있는 지금 이 기로의 입장을 가지고 이렇게 위치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서,  네가 많이 참석해서 알아라 하는 그말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애터져 하느냐  하면 그것이 이 진리를 듣지 않으면 제가 배암 지식뿐이지, 인간에게, 배암  지식은 인간에게, 타락한 인간에게 공부 안 해도 배암 지식 있습니다. 배암  지식은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이 배암 지식을 간추려서 정리를 해 놓은 것이  세상 문화입니다. 여러분 세상 문화요. 이것을 가지지 말라, 간추려 놓은 이것이  아니라도 사람마다 그거 다 있습니다. 사람마다 세상 철학 다 있고 과학 속에 다  있습니다. 그것을 연단을 안 했고 종합을 안 했고 자꾸 연구를 안 해 그렇지 암만  연구해 봤자 배암 지식 연구입니다. 암만 많아 봤자 배암 지식이고. 이 배암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이 두 지식이 들어서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배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 죽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다  죽이요.

 배암 지식을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꾸 그것을 녹여서  배암 지식이 제 지식의 주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이 주체가 되도록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왜 그러냐. 저 죽고 남 죽이고, 배암의 지식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주체가 되도록 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사람 나와 하나되게 하려고, 사람을 살리려고, 죽이는 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애가 터져서 그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 때문에 자꾸 권면 하고 이래 하면 어리석게 저거를 본위로 해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이 자꾸 저거 새벽기도 나오라 저래 하는 것은 자기 말  듣고 자기 지식과 자기 교훈화되도록 하려고 저와 같이 지금 하고 있다, 또 자기  말 암만 해 봤자 들어 보니까 시시하이 케케묵은 시대에 맞지 않는 삐뚤어진  소리, 아주 어리석은 소리, 참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다. 새벽기도 만날 나가 봐야  자꾸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는데 뭐 거석할 것이 뭐 있느냐.

 네가 배암 새끼요 배암의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네게 들리지  않는다. 네까짓 것이 죽는 날까지 이걸 다 배워도 모른다. 한시간 내내 가르쳐  놓고 여기에 대해서 가르친 말을 시험 문제를 내도 열 문제 중에 너는 한 문제도  답을 맞추지 못한다 하는 그것을 박사들 앞에 놓고 내가 말하는 것이 그것이  틀림없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암만 복음의 일을 해도 이 진리를 모르면 결국은 마귀 노릇 하고  맙니다. 인간을 죽이는 일 하고 마요. 오늘의 말세에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인자의 날도 노아의 때와 같다" 주님이 말씀한 것이 거짓말쟁이입니까. 공연히  사람에게 협박을 주고 위협을 준 말인 줄 압니까. 아니오. 노아 때도 하나님  섬기는 백성 많았습니다. 많았지마는 하나님이 표준적으로 주신 그 계명은 그들이  다 범했기 때문에 홍수 속에 같이 매장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세에도 믿는 사람들 많은데 이렇게 자꾸 몇만 명 운동, 뭐 한국에  만 교회 무슨 몇 교회 운동을 해 가지고 자꾸 일어 나는데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렇다" 거짓말 아닙니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왜 이걸 모릅니까.

 주님은,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 섬기는 사람 많지마는 구원 얻은 것은 여덟  식구밖에 없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도 믿는 사람 많지마는 주님의 뜻에 맞은 이  건설구원을 이루어서 나가는 숫자는 심히 적을 것을 말했는데 자꾸 많아지니까  이렇게 보기에 많은 교회가 되어지는데 주님은 믿음을 보겠느냐 이렇게 희귀한  걸 말했으니까 이 교회가 그 교회인지 무슨 교회인지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심령이 어두워서 이것을 판단을 못 한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이것이 지식이 바꾸어져 가지고 구원을 이루는지 지식을 바꾸지 않고  그와 같이 하고 있는지 도리어 말을 할수록 그렇습니다.

 참 박영기 조사님이 말하기를 다 같이 햇빛은 같이 쪼이는데 진흙덩어리는  딴딴하게 굳어지고 초는 물컹물컹 물러진다 하는 그것으로 비유했는데, 이  모양으로 자꾸 하나님 말씀은 갈수록 그 속에 반동이 돼 가지고 반발적으로,  말하면 반발적으로, 내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 가마에는 쌀이 없다,  이것이 쌀가마니다. 말하면 그 가마니 헐어 가지고, 쌀 없다 하는 가마니 헐어  가지고 찾아 가지고 쌀 한 개를 여기에도 쌀이 있네요 이러는 그런 자도 있다  말했습니다. 그거 회개 안 하면 멸망 받습니다. 전부 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그까짓 것은 성경 암만 읽어도 소용없어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다 밀이오.

 또 여기에는, 이것은 쌀가마니다, 주 찾아 가지고 쌀가마니에 모래알 하나  가지고 여기에도 모래알이 있네요, 모래알이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말하면 그래도  쌀이 많고 전체적으로 말하면 쌀 아닌 것이 많다 그말이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반발적으로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말할수록 더 반발적으로 나가, 반동적으로.

 이러니까 전부 배암의 지식이 자기 지식이 돼 가지고, 배암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인용을 안 합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성경 말씀으로  시험했습니다. 중심이 바꾸어져야 돼.

 들어서, 이 말씀이 공연히 내가 하는 말 아니고 하나님께서 줘서 말합니다. 나도  배우요. 복음을 봐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것이 자꾸 절정을 찾아 지금 쪼개 나가. 이게 이 말씀이면 모든 교회가  모든 것을 다 판단해서 쪼갤 수가 있어, 얼마든지.

 이러기에 구별하고 구별하고 가르고 가르고 갈라서 나가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핑계 못 할 만치, 표준 계명이 뭐이라요. 얼마 전에 노아 때에 표준 계명은  뭐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재림 때 표준 계명은 뭐이라구요.

 이것을 벌써 여러 달 전에 가르쳤습니다. 여러 달 전에 가르쳤어. 가르친 것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고 처음에는, 이거 아니라 하기 때문에 이리 저리 맞춰  보면 내나 그것이 하나 하나요 단일성으로 나가는 것을 알 수가 있잖습니까. 표준  계명은 사랑이오.

 이러기에 우리가 세상에 과학이라 하는 것도, 비행기를 만들어도 조금만, 한  푼만 길어도 안 되고 한 푼만 두꺼워도 안 되고 한 푼만 얇아도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데 아무나 예수만 믿으면 된다, 그거  기본구원입니다. 건설구원은 그것 아닙니다. 기본구원 가지고 하늘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왕 노릇 하지 못합니다.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천사고 마귀고 세상을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 남은 세밀한 지혜와 총명이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이것이 건설구원을 이룬 자들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볼 줄 알아야 돼. 저것은 인본주의인지 신본주의인지. 저거는 새사람이  일하는지 옛사람이 일하는 것인지 보고 판정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옛사람이  일하는 것도. 능하게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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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2 주님이 간섭하시는 교회/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1982. 10. 14. 목새벽 선지자 2015.12.27
4431 주님이 가장 노하시는 것/ 요한계시록 17장 13절-14절/ 1984. 7. 21. 토새벽 선지자 2015.12.27
4430 주님의 형상으로 자라가는 법/ 에베소서 4장 10절-16절/ 1981. 9. 10. 목새벽 선지자 2015.12.27
4429 주님의 피와 살이 참된 양식/ 마태복음 24장 44절-51절/ 1985. 8. 28. 수새벽 선지자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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