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음성

 

1987. 11. 30. 새벽 (월)

 

본문:마태복음 14장 26절∼33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무서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신비성을 여게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도입니다. 왜? 보이는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 생겨나왔다 이렇게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삼고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잠깐 생겨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데서 모든 보이는 것들이 생겨졌다 하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 가운데에 보이는 것만 위주로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그런 기독자가 있으니 그런 기독자는 다 그것이 유물주의요 피조물주의요 소위  그것을 가리켜서 인본의 도요 과학의 도요 자연의 도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 말은 일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그 수준 이하의 것들을 자연이라  합니다. 모두 다 알고 있으니까. 초자연이라 하는 것은 아주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비한 것, 인간들의 아는 그 위를, 탁월한 고차원의 것들을 가리켜서  초자연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전화 같은 이런 것도 제일 처음에 발명돼서 사람이 꼭 대해야 통화가 되는  줄로 알고 있는 때에 ‘선 하나가 건너 가 가지고 몇천 리 밖에서라도 서로  사람이 통화가 된다’ 하는 그런 것을 모든 사람들은 다 일반화되지 안했기  때문에 부인했습니다. 그런 건 다 초자연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가 한  사람 두 사람 알게 되고 일반이 다 ‘선만 가지고 몇만 리 몇십만 리라도 서로  선만 연결되면 서로 통화할 수 있다’ 하는 그때는 그것이 벌써 자연 지식이  됐습니다. 초자연 지식이 자연 지식이 됐습니다.

또 선이 있으면 되지마는 선도 없는데 그 수백 리 수천 리를 서로 말을 통화할  수 있다 이러면 그것도 사람들이 부인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처음에 발명한  사람이 알았겠고 그다음에 그저 몇 사람이 알았을 때에는 일반적 지식이 안 됐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초자연 지식이라. 일반적 지식이 됐을 때 그때에 자연  지식이라 그렇게, 초자연이니 자연이니 하는 말은 그렇게 구별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보이는 모든 것보다 보이지 않는 분을 더 크게 여기고 더 무서워하고  더 인정하고 더 믿고 상대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는 보이는 애굽의 많은 재물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봤습니다. 또 그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나 그런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상대한 그것이 믿음이요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형체를 가진 것보다, 형체를 가질 수 없는, 형체 속에 파묻힐  수 없는, 형체로 그분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것이 더 크고 능력 있고 완전한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알고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고로 기독자 중에는 ‘네가 만져봤나? 또 네가 눈으로 봤나?’ 그것이  심령이 어두운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제가 만져보고 알려고 하면 만져보는  것이 어느 정도 만져보며 어느 정도 범위로 만져볼 건가? 제가 소리도  만져보지는 못합니다. 들어봐야 알지.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그런 것이야 그게 무슨 실존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네게 제일 중한 것이 생명인데 네가 수족은 보이고 만질 수 있지만  수족보다 더 존귀한, 가치 있는 힘은 네가 만져보지를 못한다. 그 힘이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결과나 네가 나타나는 결과나 보지 힘은 볼 수 없다. 또  그보다도 더 가치 있는 생명은 네 눈으로나 네 감각으로나 볼 수 없다. 힘은  감각으로 볼 수 있어도 생명은 그것으로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가치가 있고 존귀하고 고귀하고 실력이 있을수록 어떤 그 형태나  존재에게 파묻히지를 않는다. 거게 갇혀지지를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완전자는  형 속에 들 수 없는고로 완전자는 형이 없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모든 가뜩 찬 지식 속에, 가뜩 찬 지식 속에 하나님의 지식이  내주해 있는 이 지식을 크게 여깁니다. 모든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보다 하나님의 지식인 신구약 성경, 얼마되지 안하지만 이 성경 지식을 크게  믿는다. 성경 지식보다 성경 지식 속에 내재해 있는 영감의 그 진리를 더 크게  여긴다.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상대해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손으로 몸으로 접촉해 가지고서 살고 있지마는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자기 마음과 생각을 귀중히 여기고 마음과 생각보다 그 속에 아롱아롱 보이지  않는 양심의 힘을 더 강하게 여기고 양심의 힘보다 자기 속에 영감으로 감동시킨  그 힘을 크게 믿고 사는 것이다.

‘죽어 나흘이 되었으니 썩어 냄새가 나오는데 돌을 열어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녜, 믿습니다.’ 돌을 옮겨놔서 나사로가 살았습니다. 그것은 마르다가 돌을  옮겨 놓은 그 돌을 옮겨놔서 산 게 아니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르다가 믿는 그 믿음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한  것입니다.

믿음은 순전히 그 사람의 마음의 작동입니다. 보이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작동이오. 마음에 알고 인정하고 바라는 것이니 전부 다 마음이 움직임인데  마음의 움직임이 나타나 보이는 것을 이룰 때에 나타나 보인 그것이 작용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 보이지 않는 형체 없는 그 믿음, 믿음의 능력이 그 작용을 해서  역사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갔던 것이 무슨 힘으로 갔느냐? 보이지 않는 그 마음 속에  믿는 그 믿음의 힘이 가게 했고 물에 빠졌을 때에 주님이 빠진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적게 믿는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 제자들이 육지에서 수리나 바다를 항해할 때에 잘 갔습니다.

잘 간 것은 그들이 노를 젓고 배를 타고 감으로 그 힘으로 잘 간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자기가 어떻게 순종하는 행동을 하니까 그  행동의 힘으로 뭣이 이루어지는 줄로 이렇게 오산하기 쉽습니다. 이러니까 가다가  바람 불고 물결이 거슬려서 가지지를 않습니다.

않는데 이들은, 자기네들이 배타고 가는 것이, 주님이 가라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이 육체의 힘으로 되는 줄 알고 노를 저으면 되는 줄 알고 그 힘으로 가려고  암만 애를 써도 안 가졌습니다. 안 가진 그것이 처음에는 왜 갔는데 안 가졌느냐?  안 가진 그것이 과거 저거가 뱃놀이 할 때는 얼마든지 육체로 했지마는 이제  예수님에게 복종하여 가는 그 전진의 걸음은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보입니다.

그들이 왜 가다 안 갔는가?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 그 믿음, 주님을  저희 마음 가운데 모신 그 믿음, 주님이 저희 안에, 심령 안에 영으로 내주하지  아니하시고 믿음으로 저들이 그를 접해서 힘입지 안하니까 주님이 안 계셨고  주님과 연결된 믿음이 없음으로 그 배가 가지 못한 것이지 주님이 내주하시고  주님과 연결된 그 믿음의 선의 작용이 있었으면 그 배는 풍랑이 상관없습니다.

왜? 풍랑보다 무한히 큰 능력이기 때문에 풍랑 그런 것을 다 능가하고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

가지 못한 그것은 제자들은 ‘우리가 노를 젓지 안해서 가지 못한다. 노를 젓는  이 힘이 거슬리는 바람의 힘보다 약하니 가지 않는 것이다. 여게다가 더 주력해  보자.’ 주력을 할수록 가지지는 더욱 안 해집니다. 왜? 그들은 보기를 저들의 그  노를 젓고 돛대의 힘 저들의 힘, 순전히 그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의 힘이 모자라  그러니까 과학을 일층 더 열을 가하자, 가열을 하자.’ 할수록 더 안 갑니다.

그것이 돛대나 배나 저들의 기술이나 힘으로가 아니고 주님이 가라 하신 그  주님을 자기들 심령 속에 사모하고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또 주님이 가라고 하신 그 말씀을 생각하고, 주의 명령과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에게 복종하는 그 복종의 마음의 믿음 그 능력이 들어서 가게 한 것인데  그걸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요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 신비한 면을 교훈해  주시는 이 말씀입니다.

그분이 배타지 안하고 물 위로 걸어간 그 힘은 순전히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에게 복종하는 요 믿음 가지고 물 위로 걸어갔지 딴걸로써 물  위에 걸어간 것 아닙니다. 확실히 인정이 됩니까? 요걸 잘 구별해야 됩니다.

이랬는데 가다가 물에 빠지니까? 왜 빠졌다고 했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야’  믿음으로 네가 걸어왔는데 조금 오다 못 온 것은 믿음이 적어서 믿음이 끊어졌다.

덧붙여서 ‘왜 의심하였느냐?’ 너는 믿음은 다 하나도 없어져 버렸고 믿음의  정반대인 네 주관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자기 주관으로 인간이 다 낭파 만들고 망하고 객관인 주님의 말씀과  영감과 보이지 않는 주님의 그 역사를 접하는 데에서 사람들은 사람이 갈 수  없는 초자연의 그 신앙 걸음, 세상을 이기는 신앙 생활, 모두 다 이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니고 초과학인 하나님의 그 무한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다 기적의 생활  표적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를 이스라엘이 건넌 것은 그들의 헤엄치고 그들이 담대히 걸어  들어가고 발자국 떼고, 인간의 힘으로는 아닙니다. 순전히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이  걸어갈 것을 믿고 그 능력으로 걸어갈 것을 믿을 때에 그 능력은 그들에게 와서  역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바라고 받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고 바라보고 인정하고 받는다 해도 그  능력 안 주면 소용 없습니다. 그 능력이 그에게 와 가지고 역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에게는 순전히 주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그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하는 그것이 신앙 생활이지 딴것은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자기가 설교를 할 때라도 내가 이렇게 열변을 토하고 또 이렇게 조직의 모든  이치를 말하고 이렇게 하니까 이것이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본주의자입니다.

아무리 그 말 암만 해도,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내재  역사가 있어 전능의 역사 그것이 사람을 깨닫게도 하고 감동도 시키지 세상  과학은 얼마든지 인간이 깨달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도는 지극히 작은 것도  세상에 명철 가지고는 깨달을 수가 없다. 왜? 왜 깨달을 수가 없습니까? 생명의 도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 첫째고 다음에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이걸 방어하는, 하나님의 도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강한 마귀를 꽉 즐비해서 첩첩이 세워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마귀의 능을 다 제어하고 능가해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자기에게  부딪혀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것 무슨 말인지? 그러기에 성령의 역사를 받지 않고는 감화를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수님에게 대한 것은 털끝만치도 제가 알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암만 듣고 안다고 믿는다고 해도 자기에게 경계선이 있어 가지고서  자기가 인정되는, 인정되는 인정이 안 되고 믿음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성경을 막 외우고 성경 학자들을 다 심문해 가지고 다  정복하고 설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해도 성신의 감화가 그에게 없을  때는 거게 생명의 도라는 것은 저들이 모르기 때문에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무시해 안 믿는 게 아니라 믿게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를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인정할 자가 아무도  없고 성령의 감화를 받고는 그리스도를 자기가 구주가 안 된다고 할 자 하나도  없다 이랬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이 제자들이 배타고 가는 데에 다른 것은 다 꼭 같앴어.

처음에 출발할 때나 다른 것 하나도 없어. 그 빠진 것 하나도 없어. 꼭 같앴는데  뭣이 없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느냐? 그 속에 주님을 잊어버렸어. 주님 생각하는  걸 잊어버리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명령이니’ 하는 주님의 명령의  권위와 주님이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이 전능자의 이 주님을 잊어버렸어.

잊어버리니까 껍데기만 있지 속이 없어.

한 장사에게 생명이 떠나고 보니까 그것은 개미만도 못해. 장사가 생명 떠나면  개미만도 못해. 개미가 와서 코구멍을  파먹어도 꼼짝도 못해, 생명이 떠나면.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떠나버리면 우리는 다 피조물뿐이요 초자연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초자연의 능력으로만 걸어갈 수 있는 이 신앙 걸음은 일보도 갈 수가  없는 것을 여기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제자들이 변화돼 버렸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을 생각할 때에, ‘내라' 말씀을  할 때에, 주님을 생각할 때에, ‘안심하라’ 주님 말씀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에게 주님이 자기 마음에 생각으로 들어오셨고, 감동으로  들어오셨고, 인정으로 들어오셨고, 자기 마음에 주님이 인정됐습니다. 생각이  됐습니다. 또 그 말씀으로 인해서 안심이 들어왔습니다. 평안이 들어왔습니다.

두려움이 물러갔습니다.

거기에 무슨 조그만한 뭐 쌀내끼만한 것이라도 무슨 작용이 있었습니까? 작용이  있었습니까? 먼지만한 작용이라도 뭐이 물질이 들어와서 작용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마음에 주님이 인정됐고 그 말씀이 자기에게  들어서 감동돼서 주님이 자기 마음에 계셔서 자기 마음에 주님이 생각돼지는 그  느낌과 감동이 됐어. 느낌이 됐고 말씀을 들을 때자기 속에 안심되는 그 역사가  됐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오. 알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이요 그것이 바로  능력이요 그것이 바로 생명이요 힘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든지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혼자 재독을 하든지 성경  말씀을 생각하든지 할 때에 자기 속에 주님이 생각납니다. 주님이 생각됩니다.

주님이 생각되니까, 다 그것은 여러 수억만 번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오. 주님이  생각되니까 ‘주님 나를 이렇게 해 주옵소서, 어째 주옵소서.’ 이렇게 주님이  자기 안에 와서 계시는 걸 생각하니까 주님에게 이런 것 저런 것 기도도 하고 또  잘못된 걸 자복도 하고 주님이 자기 마음에 계시는 것을 자기가 인정한다 말이오.

인정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안심도 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왜? 죄지었으면 두렵지. 어겼으니까 두렵지. 안심도 돼지지.

이렇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와 가지고서 역사하고 작용하는 것을  자기가 느꼈을 것이라 말이오.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사람 손 들어 봐요.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사람? 받아 본 사람, 안 받아 본 사람 말고 느낌을 받아 본 사람?  하나도 없을 거야, 다 느낌을 다 받아 봤을 거야. 안 받아 본 사람 없을 거라.

바로 그 느낌이 뭐입니까? 그 느낌이 주님이시요 주님의 능력이요 생명이요 전지  전능의 권능이요 지혜입니다.

이랬는데 다른 제자들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 속에 작용이 일어나서  그들이 무슨 변화를 받았습니까?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안심이 됐습니다.

주님이 저희 마음 안에 계셨습니다.

이러니까 처음에 주님의 음성 듣기 전에 유령이라, 주님 보고 물귀신이라  유령이라 할 때의 사람과 주의 음성 듣고 난 다음의 사람과 속에 마음만  달라졌습니까 이 팔다리 모든 지체가 달라졌습니까 또 피부가 달라졌습니까 뭣이  달라졌습니까? 달라지기를 말씀을 듣기 전과 들은 후와 달라진 게 뭣이  달라졌지요? 자, 뭣이 달라졌소? 마음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마음만 달라졌다는 분? 그러면  또 그이의 이목수족의 지체까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피부까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머리털까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다 달라졌습니다. 머리털까지 달라졌소.

이 말씀 듣고는 머리가 쭈삣했을 것입니다. 머리가 쭈삣하게 섰을 거라. 이거 다  작용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쭈삣 서. 이랬는데 말씀 듣고 난 다음에 머리털도  다 고요하게 온순해졌고 피부가 시퍼러이 지금 환하게 볼 수 있던 지금 그런  송장에 가까운 그 경동의 피부가 피부도 다 누글누글하게 평안해졌고 온유해졌고  그 지체도 그때는 사지가 오그라져 떨리고 이랬을 터인데 푹 풀려서 유순해졌을  것이고 마음도 그래 버렸을 것이고.

이렇게 되어지는 작용을 우리들이 주님을 내가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우리에 내라는 내게 와 가지고서 변화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겪을 것이라 말이오. 바로 그것이 주님이십니다.

이 제자들이 그렇게 변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그들을 초월해 가지고서 물 위로  걸어갔지만, 다른 제자들은 이제 주님이 저희에게 오시니까 그들은 가 가지고  먼저 더 앞서 가지고 주님을 만나려고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더 큰 은혜를  받겠다고 지금 ‘주님이 물 위로 걸어가니까 나로 물 위로 걸어가는 그것까지 좀  주십시오’ 이렇게 해 가지고 소원 이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렇지는 안하고 이  주의 음성 들음으로 자기들 마음 속에 주님 모시고 나니까 평안하고 모두 다  머리털까지 피부까지 지체까지 마음까지 그만 누글누글하게 그만 평안해졌습니다.

평안한 그것, 주님이 걸어오시니까 배 위에 올라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올라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배 위에 올라오시는 주님이 올라오시기 전에 저희들 마음  속에는 벌써 마음 속에 주님이 와 가지고서 벌써 자기 마음에 주님으로 인해서  평강을 얻었습니다. 벌써 자기 마음에는 주님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주님을  잊어버렸던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만히 작용하지 안하고 자기 마음에 변화 준  주님, 변화된 평강, 일어난 그 모든 평강의 마음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있으니까  어찌 됐습니까? 버리지 안하고 있으니까 그다음에 어찌 됐습니까? 어찌 됐지?  버리지 안하고 있으니 어찌 됐지? 버리지 안하고 있으니까 주님 배 위에  올라오셨어. 그것만 버리지 안해도 주님 배 위에 올라오셨어. 오시고 나니까 뭐  노 저을 것도 없어. 바람도 안 불고 순조롭게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요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설교 듣는 것도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이요, 성경 읽는 것도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이요,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이요, 그거 다  주님의 말씀 아닙니까? 주님 말씀 아니요? 주님의 말씀을 자기가 접하는 것이라  말이오.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라 말이오.

주님의 말씀을 접할 때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작용이 있어. 일어나는 감동이 있어.

일어나는 역사가 있어. 무슨 역사가? 제자들의 마음이 휘떡 뒤비져서 옳은 것은  틀렸다 틀린 것은 옳다 정반대의 견해 평가 모든 작용되는 그 마음이 바로  정상적으로 안정이 됐어.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이 됐어. 전지 전능자가 자기  마음 가운데 들어오셨어. 자기 생각 속에 들어오셔 생각으로 영접했어. 감동으로  영접했어. 마음으로 영접했어.

이런 작용이 주님의 음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오늘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요? 설교 듣는 것이 주님의 말씀 듣는 것이요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자기가 성경을 읽는 것이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이요 자기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이요 여기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없느냐 있느냐! 일어나는 작용과 역사가 있었으면 이를 버리지 말아라. 굳게 잡고  버리지 말고, 버리지만 말아라. 버리지만 안하면 주님이  네게 와서 점점 네게  들어와 가지고 계시고 너와 함께 동거 동행할 수가 있다.

너의 속에 작용된 이 은혜를 놓지만 말고 붙들고 있으면 점점 주님이 오셔서  가까워진다. 붙들고 있을 뿐 아니라 이는 곧 주님이시니 그 은혜를 잡고 주님  앞에 나아가라. 더 은혜 받기 위해서 주님으로 더불어 가까워지기 위해서 네가  노력해서 나아가라. 나아가면 물 위로 걸아가는 초자연의 이 신앙 걸음을 자유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게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달리 찾으려고 하지 말고 여게서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 이분이 전지 전능자라. 이분을 찾아 만나거든 놓지 말아요.

마귀란 놈은 ‘이것은 네 주관의 작용이지. 네 마음의 작용이지. 네 마음의  작용이지 그렇다고서 전지 전능자와 네가 접선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  말하고 ‘네가 병나은 것은, 막힌 귀가 뚫히고 어둡던 눈이 밝아지고 뭣이 몸에  큰 병이나 작은 병이나 없어지고 그만 피부병이 없어졌다, 혹이 떨어져서 없어져  버렸다, 이러는 것ㅡ마귀란 놈들이 와 가지고ㅡ그것이 다른 이종교에도 있다.

이종교에도 있다. 자기 정신 작용으로써 정신 작용이 그렇게 집중돼서 될 때에  거기에 신기한 능력이 역사한다.’ 그것도 자기 정신 문제로서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있습니다. 이종교에도 그게  있소. 있으나 그것을 우리에게 똑똑히 가르친 것, 출애굽에 모든 술객들 복술자,  술객들과 모세가 같이 신기한 이적을 행했는데 그들이 몇째까지 따라왔습니까?  몇째까지 따라왔습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 그래. 저 하나밖에 모른다. 저  뒤에는 하나도 손가락 안 든다. 셋째까지 따라왔어. 셋째까지 따라왔지만 그거  무익한 거라. 셋째까지 따라왔는데 넷째부터 그들은 따라오지 못했어.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되어지는 것은 되지만 인간의 심리 작용은 인간의  주관이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로써 피조물의 작용에 될 때까지 되지 피조물  작용을 초월한 거게서는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오.

또 그러고, 인간은 마귀의 것이 다 돼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 믿는 사람도  하나님과 연결되면 마귀는 도망치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마귀가 접선합니다.

마귀가 접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되어지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는  하나도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이 심리 작용으로 된다’ 심리 작용으로 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의 작용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안 됩니다. 요게 이해됩니까?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인간의  주관  작용으로도 이 병도 나을 수 있고 머리 아픈 것도 개운하게 나을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역사의 작용은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옵니다. 왜? 예수님은 버리고 인간의 심리 작용 피조물 그 작용으로만 된다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역사는 거게 가지는 않습니다. 못 갑니다. 못 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기도하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의 와서 내게 와 가지고 털끝만한 조끄만한 한  쌀내끼만한 작은 기적이라도 있었으면 그것은 뭣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작용입니까 인간의 심리 작용입니까? 요걸 알아야 돼. 인간의 심리 작용은  인간뿐입니다. 요것 마귀하고 한 덩어리입니다. 마귀하고 한 덩어리 된 요것은  예수님의 작용은 오지 못하도록 저희들이 전심 전력 기울여 막는 게 그겁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만일 한 일 분 동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일 분 동안 믿었으면 일 분 동안 믿는 그것은  심리 작용입니까 전능자의 작용입니까? 심리 작용입니까 전능자의 작용입니까?  어떻게 전능자의 작용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어지는 그 믿음 그것이 일  분 동안 믿다가 말았는데 ‘그까짓 거야 일 분 동안 믿다가 만, 얼마든지 사람이  그리 생각할 수 있지. 그게 뭐 하나님 작용이라?’ 인간의 작용으로써 그게 될 수  없다 말입니까?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 ○○○씨,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왜 없을꼬? 왜 없어?  저 ○선생, 왜 없지? 그걸 내가 그걸 말한 게 아니고, 왜 없는가 말이요? 이 우주를 지금 점령해 가지고 있는 우주의 왕인 마귀가 강하게 막고 있기  때문에, 막고 있기 때문에 못 옵니다.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작용이 못 오요.

거게 쌀내끼만치 왔더란대도 전능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작용을 뚫고 밀고  정복하고 뚫고 들어왔기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 도리나 믿는 신앙을 전반적으로 모르고 일반적으로  마귀란 놈이 요리 아는 자는 요리 걸어뜨리면 잡아 죽일 수 있고 조리  걸어뜨리면 잡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일생 동안 항상 그 마귀에게  유린만 당하고 말지 그게 바로 온전한 승리를 이뤄 가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워서 알아야 돼요. 자기가 깨달아서 알아야 돼요.

오늘 아침에는 주님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서 계시는가? 내 마음에 와서 계시는  눈에 보이는 형체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와서 계시는 것 내 마음에 마귀란 놈이  못 오구로 방해하기 때문에 마귀의 방해를 다 박차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게  되고, 믿게 되고,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사모하게 되고, 그분에게 서로  대화해서 간구하게 되고 이렇게 될 때는, 이렇게 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역사가,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역사가 주님의 모든 그 구원이 내게 왔는데 이 온  은혜는 잠깐 왔다 갔습니다. 뽀스래기 왔다 갔습니다. 뽀스래기가 왔다 갔습니다.

쌀내끼만치 왔다 갔습니다. 잠깐 왔다 갔습니다.

갔으면, 잠깐 왔다 갔으면 잠깐 왔다 간 그 은혜는 어떻게 온 은혜지? 여기  ○기사? 어떻게 온 은혜지? 잠깐 왔다가 순간으로 왔다 가고 뽀스래기 은혜가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여 주님이여 하고 주님 앞에  대화를 하고서 이렇게 간구하고 하는 그때에 온 은혜가 잠깐 순간으로 조금 그저  아주 아이들 말로 눈꼽재기만큼 참 그래 잠깐 왔다 갔는데 그 온 은혜는 어떻게  온 은혜지? 온 천하를 점령하고 있는 마귀를 어쨌든간에 그 많이 뚫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뚫고 이기고 왔다 말이오. 마귀의 그 모든 역사를 이기고 온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말이오. 능력이라. 이런데 이 능력을 자기 주관의 생각대로  생각하거든. 다 일한 것은 그 능력이 와서 일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그저 듣고 버리고 하지 말고 깨닫고 자꾸 신앙에 경험해. ‘해 보니까 그렇다.

과연 해 보니까 과연 그렇다.’ 이렇게 경험하고 체험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지  경험 없는 체험 없는 신앙 그까짓 것은 아무 소용 없어.

교회 주변을 청소하도록 종전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또 권찰회 모입니다.

주일학교 반사들은 어짜든지, 요번에는 새로운 공과가 나올지 모르는데  나오기까지는 자꾸 그전 공과를 꼭 외워요. 외우고 명상해요. 그러는데  여러분들은 자라요. 또 지하철 위해서도 기도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맙시다. 지금 권찰회 모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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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 주님의 몸이 된 성도의 위치/ 에베소서 1장 22절-23절/ 1982. 7. 28. 수새벽 선지자 20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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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음성/ 마태복음 14장 26절-33절/ 1987. 11. 30. 월새벽 선지자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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