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7:08
주님사랑이 양을 사랑함
본문 : 요 21:15-22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역사에든지 뭐이든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믿는 이치를 가르치는 곧 도입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디베랴 바다에 가 가지고 고기잡는 데 가서 이렇게 하신 일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무슨 육체의 식물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서 생선과 떡을 구워 가지고 대접을 하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아직까지 육덩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을 생각하면서 육을 돕고 위로하고 육에서부터 힘을 얻도록 해 가지고 차차 믿음에 나아가는 그런 순서적인 방편을 여기에 말씀을 하시고,
또 하나는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보다 더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표증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 표시는 뭘로 표시되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는 주님의 그 양을 사랑하는 것, '어린 양을 먹이라' 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 자기의 제자를 말하구 양을 치라는 것은 양을 잘 관리하라는 것을 말하고 또 양을 먹이라는 것은 장성한 양을 먹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필연적으로 주님의 양떼를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할라고 해도 그 방편이 양을 사랑하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방편 외에 다른 방편이 없습니다.
승천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신 것도 그것도-마지막 주일날 말씀하신 것입니다-거기에도 성령이 오시는 목적도 주님의 양떼들에게 예수님의 이 대속을 증거해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예수님의 따르는 그 제자가 되도록 하려는 그것이 목적이요 또 여기에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그 유일한 방편은 주님이 피로 구속하셔서 주님이 사랑하심으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구원한, 주님의 소유와 몸과 생명과 지위 영광 모든 것을 다 회생해서 구원해 놓은 당신의 그 양떼, 이 양떼를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 또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죽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말씀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활은 주를 위해서 사는 순생생활이 있고 또 마지막으로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순교 생활이 있는데 순생생활이나 순교 생활은 다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거기에서부터 힘을 얻어 가지고서 그 일을 하지, 거기에서 자라고 거기에서 힘 얻고 거기에서 좋은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순생 생활이나 순교 생활은 주님이 괴로 구속하신 양떼를 사랑함으로 그를 기르는 거기에서 순생의 힘도 -순생은 주를 위해서 날마다 사는 생활을 가리켜서 순생 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순교는 마지막 죽는 것이 순교입니다.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일생을 순생 생활하는 것이나 마지막으로 순교 생활하는 것이나 순생 생활과 순교 생활은 다 주님의 양떼를 사랑하는 데에서 시발되고 자라고 또 성과를 거둔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의 자기의 신앙 경험과 체험은 다 동일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구속하신 이 양을 사랑하는 거기에서 순생할 힘도 나오고 주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살 그런 힘도 나오고 열심도 나오고 또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거기에서 주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이 구속받은 성도들의 힘은 어데서 나오는가? 양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고 양을 사랑하는 거기에서 자라고 양을 사랑하는 거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 말했습니다.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어린 양을 먹이라'제일 먼저 '어린 양을 먹이라' 여러분들이 자기 양을 기르려고 하면 그 양에 뭐 철없는 일이 많습니다. 참 주님을 생각지 안하고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일, 볼 수 없는 일, 용납할 수 없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별별 일이 있지마는 그것이 주님이 제일 먼저 부탁한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을 먹이라' 그 다음에는 '양을 치라' 양을 관리하라. 여러분들 관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또 내 양을 먹이라 하는 것은 장성한 양들을 먹이라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순생 생활도 순교 생활도 여기에서 나온다하는 것을 여기에 알려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에 베드로가 어떻게 죽어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죽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고 또 주의할 것은,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신앙 걸음을 걸을 때에 옆에 사람 보는 사람은 이 신앙생활을 못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지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린 양을 먹일 수도 있고 양을 칠 수도 있고 양을 먹일 수도 있지 옆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 요것만 생각해야 이 귀한 생애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주님의 이 어린 양, 양 치는 것, 양을 먹이는 것이 일만 하는 거기에서 순생도 순교의 힘도 나옵니다.
순생과 순교의 힘도 여기에서 나오고 순생과 순교의 힘을 얻을 때에 '저 사람은 저런데' 사람 보면은 다 마귀 시험에 다 떨어집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지 '주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느냐? 그러면 나는 주님에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만을 생각하는 거기에서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안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순서는 아무래도 육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그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에서 불러 모아 놓고 고기와 먹을 구워서 대접을 하면서 했습니다.
육덩이기 때문에 육을 사랑함으로써 육에서부터 시발해 가지고서 영적으로 성장시켜 나가야 되지 그만 잘못하면 육을 초절해 가지고서 영에게만 이렇게 하면은 실패하니까 육에서부터 영으로 성장시켜 인도해 나가야 된다 하는 그런 방편을 여기에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그라고, 마지막으로는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보다 더하는 것이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그 차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차이는 어데서 나오느냐? 양떼를 먹이고 다스리고 먹이고 하는 그것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차이는 나타난다하는 그것을 요게서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면 천인 만인이 있어도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그 차이는 주님의 양떼를,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관리하고 양을 먹이는 그것으로써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그 사랑의 차이는 난다.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보다 더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차이는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치고 먹이는 요게서만 나타난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못 박았습니다.' 요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항상 일해야 될 것입니다.
육을 안 생각하고 영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육을 먼저 생각해서 거기에서부터 이끌어 가지고 영에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
주님을 사랑함으로 순생하고 순교하는 힘은 어데서 얻는가? 그 힘은 주님이 피로 구속한 양떼를 사랑하는 거기에서만 얻어진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죽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가리킴이라' 그런데는, 이렇게 힘은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고 먹이는 거기에서 순생 순교의 힘을 얻는 데 조심할 것은 시험에 드는 것은 어떤 시험에 드느냐? 베드로가 있다가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할 때에 주님께서 똑똑히 밝혔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할지라도' 이말은 머물러 있게 한다 말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 해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너는 지금 양을 위해서 순교하는 그 순교를 당하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땅위에서 평안하게 장수하게 한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옆에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든지 네가 좁은 범위에서 모르기 때문에 옆에 사람을 보지 말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요것만 보고서 행해야 네게 대한 신앙 성공을 하고 주님을 섬기는 이 성공을 하지 달리는 안 된다. 아주 세밀하고 구비한 것을 여기에 말씀해놨습니다.
그런데. 최종 마지막에 결론으로서, 그러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모든 사람보다 주님을 더 높이고 기쁘시게 한 그 차이는 어데 있느냐? 그 차이는 다른 데 있지 안하고 양을 먹이고 치고 다스리는 요게 있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에게 붙여 주신 양을 기르는 일에 있어서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셨으니 나는 주님에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 요것만 꼭 생각해야 되지 딴 거 생각하면 마귀의 시험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에 걸려서 말할 때에 주님이 그것을 벗겨 줬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