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자


선지자선교회 1981년 8월 3일 월새

 

본문 : 마 14:27-33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에 언제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면 사람을 어떤 사람이든지 이 바닷물이 사람을 삼키는 것이 이것이  자연이요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의지해서 이렇게 하는데 물 위에 아무라도 올라서면 물 위에  뜰만한 그런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다 물 속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헤험치는  그런 거는 물에 떠 가지고는 되지마는 물 위로 걸어서 이렇게 갈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 힘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비행기의 프로펠라와 같이 그렇게  발을 자주 떼 놓는다면 물 위에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다 물 위에 빠지는 것인데 이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물 위로 걸어가게 된 이것을 여기 기록하게 된 것은 믿는 사람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순종하면 그 갈릴리 바닷물과 같은 이 세상은 이 신앙의  사람에게는 육지와 같이 자기의 대로가 되는 것을 여기에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지방에 살든지 어느 나라에 가 살든지 공산치하에 가 살든지 어데  가 살든지 믿는 사람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주께 순종하는 요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어떤 행정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를 참 영화롭게 존귀케  유익되게만 해 주지 해치는 일은 추호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이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을 걸어서 갈 때에 안믿는  사람들은 다 세상에 빠져 가지고 그만 물하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빠져  가지고 사람이 빠지면 물하고 하나 안됩니까? 사람이 빠지면 물이 한말된  물에다가 주먹덩이 같은 돌을 집어넣으면 그 물양이 많아집니다. 안 넘던 그 물이  돌 하나 집어넣으면 물이 넘는 것처럼 그만 물의 양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사람이 하나 더 나면 세상이 더 붓고 둘 더 나면 더  붓고 만명이 더 생기면 또 세상은 그만치 커지고 붓는 것입니다. 마치 이 비유라  말이오. 말 위에 말에다가 물을 한말 담았는데 철렁 철렁 안넘습니까? 넘지요.

그것은 돌이 물 속에 들어가서 물이 된 거는 아니지마는 물 속에 들어가니까 물  양이 많아서 넘는다 그 말이오.

이거 모양으로 그 사람이 어데까지 문화를 이루었던지 개화를 했든지 능력  있든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 외에는 뭐 안믿는  사람이든지 또 믿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은 세상에게 삼켜져서 세상의 것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로 인해서 그 사람이 하나 세상의 것이 더 됐으니까 더  세상은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 쳐 놓고 세상의 것이 되지 안한 사람이 예수  밖에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종교의 모든 창설자들도 다 그 사람들 다  세상에 빠져서 고만 세상의 것이 되어서 세상만 커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것에서 빠져 나와서 세상 그것들의 것이 안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서  불러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한다 너희가 세상에서 나오지 안하고  세상에 있었더라면 세상은 저희의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세상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한다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니 그들이  너희를 미워하는 그것이 곧 조물주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를 대적하는  것이 조물주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물주가 그들에게 꺽어지겠느냐 그들이  꺽어지겠느냐 조물주가 깨지겠느냐 그들이 깨지겠느냐? 결국은 그런 것들이 다  깨지고 너는 승리해서 그것이 너를 존귀케 영광스럽게 할지언정 너를 추호도  해치는 해치지는 못하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들은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해서 이겼느냐 이기는 비결을 알아라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세상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상과 악령과 모든 사망도 생명도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완전히 점령했다. 마태복음 28장에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변할 수 없는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천하에 역사에  사람에게 삼켜지지 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한  형식계시로 보여 주신 것이라 이거요. 사람이 물 위에 걸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걸어갔기 때문에 그들이 유령이라 말한 것입니다. 역사에  없는 처음 일을 보기 때문에 지식 밖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뭘 보이는 것이냐?  갈릴리 바다는 세상을 상징해서 이런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인데 갈릴리 바다를 걸어간 사람은 물 위로 헤험친 사람은  있지마는 걸어간 사람은 없는 것처럼 세상에게 떠서 세상을 이용해서 걸어가려고  했지마는, 세상을 이용해서 살아가려고 했지마는 세상에게 삼켜지지 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다 세상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에게 순종하니까 이  바다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바다는 육지와 같이 그에게 이용이 되었고 그는 참  영광스럽게 걸어가는 튼튼한 대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바람 보고  무서워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바람 보고 무서워하고 보니까 그만  바다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많지마는 바다 속에 빠져 들어가서 세상에 빠져 들어가서 세상  것이 되어있는 교회들이 많고 또 서부교회 교인들도 많지마는 서부교회  교인으로서 세상에게 빠져 들어가서 세상 것이 되지 안한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누가 세상 것이 되지 안하고 세상을 발아래 밟고 세상이 자기를 전부  받드는 바닷물이 사람을 삼키는 것이 바닷물인데 베드로는 삼키지를 못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에는 바닷물이 베드로를 삼키지 못하고  베드로에게 이용됐습니다. 어떻게 이용됐습니까? 베드로를 이렇게 받들어 들고  있었습니다. 예 베드로를 이렇게 받들어 들고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바다에 빠져 가지 안하고 이 바다는 베드로를 이렇게 받들고 있으니까  바다 위를 점벙 점벙 걸어갑니다. 금방 바다 위로 걸어가던 사람이 또 그시에 물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죽은 송장은 물 속에 들어가도 죽는 줄 모르지마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빠져 들어가서 죽는 줄 알기 때문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다 세상에게 삼켜져 있습니다. 원죄와 본죄로 정죄 받아서 벌써  사망에게 삼켜 있고 또 죄 아래에 삼키워 있고 저주 아래 삼키워 있습니다.

정죄와 사망 아래에 사망에게 삼키워 있어 정죄의 것이 되어 있고 사망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이 물에 빠지는 것을 빠져 있는 것이 그에게 두렵지  않고 그에게는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물에 빠져 있어도 아무 감각이 없어.

물하고 하나가 돼 가지고 물이 출렁거리면 출렁거려 내 출렁거리고 물 속에  있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소. 생명있는 자는 허득거립니다. 생명이 딱 끊어져  버리면 물 속에 들어가도 아무런 고통이나 감각이나 무엇을 물에서 벗어나야  살지 물 속에서는 죽는다 하는 그런 것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정죄와 사망에서 (정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자라야  세상에 빠지면 죽는 줄 알고 그 물에 빠질 때에 안 죽으려고 야단치는 것처럼  세상에 안빠지려고 야단을 치고 세상에 빠지면 죽는 줄로 알지 벌써 그러다가  숨이 딱 끊어지고 나면은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물  속에서 그대로 지냅니다.

제가 몇해 전에 8월 집회를 마치고 9월달인데 늦어서 9월달에 수영 그  해수욕장에 그때 해수욕을 하러 갔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보니까 한 청년이 한 이십명 거기서 수영을 합디다. 보니까 두 사람이 같이 저리  들어가는데 한 사람은 헤험을 치는 모양이고 한 사람은 못 치든가 그만  가더니마는 물에 빠지는데 빠지니까 둘이 물 속에 들어가서 야단을 지기더니마는  하나는 솟아 올라 가지고 헤험을 쳐 나오고 하나는 터북 그래 쌓고 야단을  지기더니마는 안보입니다. 벌써 숨이 끊어졌다 이거요. 저 깊은데 들어가  놓으니까 뭐 그때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도 또 되지도 안하고 벌써 안올라  오는데 물결이 나가니까 어데 가 있는지 모른다 이거요.

제가 살살 헤험을 쳐서 저리 좀 돌아다녀 보니까 뭐 큰 고기같은 시커먼 게 물  속에서 물 속에 또 고기 모양으로 다니는데 그게 뭐인고 싶어 보니까 그  사람이라. 사람이 죽었다 이거요. 그래 끌고 이래 나왔었어. 나와 가지고 급하게  병원으로 보냈지마는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목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물 속에 안  빠지고 빠지면 죽는 줄 알기 때문에 헤어나려고 야단을 지기지마는 빠져 가지고  목숨이 끊어지고 나니까 그만 뭐 올라오려고 애도 쓰도 안하고 물 속에 보니까  그래 내가 그 뜨는 걸 보고 내가 이 말씀을 연상을 하면서 보니까 물결 모양으로  고기 모양으로 너물 너물하이 이래 떠 가지고 그 물 속에 있는 게 좋은 것처럼  이래 떠다니지 하나도 고민스러운 그런 게 없다 이거요.

꼭 이와 같습니다. 인생이 이 세상이 세상에 빠지면 죽는다는 그 감을 느끼는  때가 또 세상에 빠지지 안하려고 애를 쓰는 때가 어느 때냐? 생명이 있는  때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다 이랬습니다.

이런고로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되는 결합된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명, 피조물의 생명은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되어 있으면 그는  죽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을 중생시킨 생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지 안한 사람 진리와 연결이 끊어지지 안한 사람, 다시 말하면  영감과 끊어지지 안한 그 사람이라야 세상에 빠지면 죽는 줄로 알고 빠지지  안하려고 애를 쓰고 하지 아무리 기독자라도 그에게 벌써 영감이 끊어지게 되면  영감이 끊어진 그 이후에는 그는 세상에 저희 나라로 알고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 믿는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평신도들도 교회도 세상이 저희 것인 줄 알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자꾸 취하려고 애를 쓰고 그 속에 들어가서 제 것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 세상이 좋습니다.

하늘나라는 없어지고 하늘나라는 잊어 버려지고 멀어지고 세상이 자기 나라가 돼  가지고 세상 것을 취해서 세상적 성공을 하려고 오히려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나올 생각은 가지지 안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지면 그  시체는 세상에 물이 싫지 않다 말이오. 싫은 줄을 몰라. 그럼 물 속에 고기처럼  떠 다니면 있는 것처럼 기독자가 이 생명이 끊어지면 세상에서 헤험치려고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에서 높은 자리 세상에서 부요한 자리 세상에 영광있는  자리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락있는 자리 구비한 자리 세상적으로 구비하려고  세상적으로 부요하려고 애를 쓰지 내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이 세상과 천국과  멀어지고 이 세상과 진리와 진리를 떠나서 이 세상에 어떤 것을 취해도 이것이  내가 죽는 것이라 하여 빠져 들어가지 안하려고 후덕거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외정말년에도 신사참배가 왔을 때에 신사참배를 하면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자기  심령이 신앙이 죽는 줄 알기 때문에 신사참배 안하려고 생명을 내놓고  싸웠습니다. 생명을 내놓고 싸우고 그들에게 고문과 고행을 당하고 어떻게  외로움을 당하고 어떻게 박해를 당해도 그 일본 정권이라는 그 세상 속에 빠져  들어가지 안하려고 애를 썼지마는 그 영감이 없는 사람들은 '아 이럴때는 재빨리  신사참배하고 또 나라하고 정권하고 한덩어리가 되야 우리가 앞서 얼른 찔러서  정권하고 먼저 한덩어리가 되어야 이 세상 유익도 보고 이 교회들도 또 내가  권세를 보고 유익을 보겠다 저것들은 어리석어서 신사참배 안하려고 저러고  있는데 내가 얼른 신사참배를 하고 앞서 가지고 이 정권하고 한덩어리가 되어야  저 정권에 복종하지 안하는 저자들을 삼켜서 내것을 만들지' 하는 이런 방편  가지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부산서도 제일 큰 교회 그때 있었는데 그 사람 일본 정권하고  한덩어리 돼 가지고 일본 천조 대신으로 여 송도에 가 가지고 세례 받았소. 천조  대신 이름으로 세례를 얼른 받고 그 앞에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교회를  탄합하는 이런 운동을 해 가지고 그 교회를 점령을 하고 했습니다. 그  목사입니다.

오늘도 그때입니다. 오늘도 세상 정권을 등어리를 대 가지고 정권과 한덩어리  되어 가지고 그 권세를 가지고 교회에 진실한 교인들을 진실한 교회를 삼키려고  참된 복음 운동을 삼키려고 날뛰는 역사를 하는 것이 오늘도 그때와 꼭 같습니다.

교단을 만들고 종교법을 창설하자 또 신학교 질을 향상하자 하는 거기에  역사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이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좀 가서 살펴보면 알  것입니다. 지금도 소련에 교회가 없는 것 아닙니다. 중공에 교회가 없는 것,  중공에도 교회가 있고 소련에도 교회가 있고 이북에도 교회가 있습니다. 없는 것  아닙니다. 그들이 주장해서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뭐 신학교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저희 정권에 앞잡이가 돼 가지고 예수를 믿어도 이래 믿어라 하는  저희에게 이용될 이용물로서 저거의 것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그 교회는 저희가  없앨 필요가 있습니까?그게 있어야 교회를 삼키지 눈을 뜨고 봐야 됩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없는 자는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안빠져  들어가려고 날뛰지를 않습니다. 또 생명이 있어 세상에 빠지면 죽는 줄 알고 안  빠지려고 죄에 안 빠져 세상에 빠지는 게 죄에 빠지는 건데 죄에 안 빠지려고  불의에 안 빠지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으로서 안 빠지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 빠져버려.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있어야 성경 지식을 자기 지식을 삼은 자라야 성경  지식대로 보니까 세상에 빠지는 거 안되겠다. 하나님과 연결된 영감을 받고  보니까 아이구 이 세상에 빠져서 안되겠다.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되겠다. 이  신앙을 양보해서는 안되겠다. 신사참배 하면 안되겠다 하는 것이 영감이 있을  때에 안되는 줄로 알고 진리를 알아 진리와 하나 되어있을 때에 안되는 줄  알았지 이것을 버리고 벌써 빠지고 난 다음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것을 그들이 강요하고 운동하고 있지 빠지는  것이 싫지를 않다 그 말이오. 생명이 없으면 바다에 빠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싫지  않고 또 빠지면 죽는다는 감각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로 영감과 진리가 그들에게 없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과 합하는  것이 이것이 죽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세상과 합하는 것이 야고보서 4장  4절에 "음행하는 여인들아" 뭐 여인들은 여인들만 말하는 것인 줄 압니까? 성도  다 말하는 것 "음행하는 여인들아 세상과 벗되고저 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벗되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본 남편이 아내가 간부로 나가고 하면은 본  남편이 분노하는 것처럼 성령이 세상과 하나되는 것을 이렇게 시기하기까지  마음에 분개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헛된 줄로 아느뇨 하나님을 본 남편이라면  세상은 간부라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서도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생명인 영감과 진리와 우리의 육의 생활이 끊어지면 세상을  모르고 세상이 자기 것인 줄 알아 더 얻으려고 애를 쓰지 세상에 빠져 들어가지  안하고 빠져 들어가면 죽는 그 감각이 없습니다. 또 이 감각이 있어서 세상에  빠져 들어가지 안하려고 자기가 신사참배 안하려고 주일을 범하지 안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안하려고 양심에 가책되는 일 하지 안하려고 아무리 애써봤자  인간으로서는 안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안 빠져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에 빠져  들어가지 안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빠져 들어가지 안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가 뭐인가? 이  세상에 빠져 들어가지 안하고 세상을 발아래 밟고 세상이 자기를 돕는 자로  (세상이 자기를 돕는 자로) 물 위에 빠져 들어가지 안할 자가 없는데 생명이  있으면 물에 빠져 들어가면 죽는 줄 알고 빠져 들어가지 안하려고 애를 썼고  여기에 베드로 보니까 빠져 들어가려고 애를 썼지마는 제 단독에는 빠져  들어가지 안할 자가 하나도 없고 생명이 끊어지면 그 물 속이 저희 세계기  때문에 속목숨 떨어진 목숨 끊어진 그 시체는 보니까 고기 모양으로 떠돌아  다닙니다. 하나도 싫지 아니하고 제가 그 머리를 손가락에 끼어 가지고 이래 끌고  나오니까 무겁지도 안해. 이러니까 줄줄줄줄 따라 나오는데 육지에 나오니 그렇지  거기서는 물 속에 들어가니 똑 고기 한가지라. 어떻게 물에 뜨니까 생명이 있을  때에 세상에 빠지지 안하려고 하고 벌써 세상에 빠져서 세상과 같이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계명이 상관없고 영감이 상관없고 영감이야 자기에게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의 진리에야 배치가 되든지 말든지 어떻게 하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취해서 세상적으로도  높아지고 세상 권세를 저 배경으로 더 삼고 이럴 수 있는 그런 노력을 하는 이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벌써 참 생명인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생명인데  그 연결은 벌써 끊어진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 권세를 대할 때에 어짜든지 권세를 대할 때에  어짜든지 권세를 취하려고 그 권세 끝에 뭐 있는데 이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자기가 말 한마디만 하면 세상 권세를 이렇게 잡을 수 있어도 이걸 잡고 보면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그걸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범죄하지 안할 수 없고 시험에  들지 안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는 것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정조를 지킬라 하는 그런 숙녀도 어떤 남자가 친절히 하니까 친절히 하면서 아  친절히 짐도 들어다 주고 또 시장하면 뭘 좀 대접도 하겠다고 하고 이래도 그  짐을 들어다 놓을라 해도 아무리 바쁘고 되지마는 그것을 그 도움을 받지  안하려고 합니다. 다방에 가 가지고 차 한 잔을 마실려고 해도 그 차를 대접  안받을라 합니다. 왜? 그것 받아 놓으면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문제인 정조문제 무슨 이것이 자기가 허락지 안하면 안된다 할지라도  그만치 모욕을 당할 일이 있을란지도 모르기 때문에 안하려고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돈을 주고라도 다른 사람 시키지 공짜배기로 남의 어떤 남자가  들어다 준다고 한다고 받들 안한다 그 말이오. 가 가지고 차 한잔 대접을 받지  않는다 그말이요. 그것은 자기의 정조성에 대해서 염려를 가지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어떤 여자는 아따야 그 남자 내 고마우니 내가 취할라 그 들어붙어  가지고 이래 주니 오히려 그런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자기를 붙들면 아 내가 세상을 붙들라 해도 안되니까  나를 붙드니 이 기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좀 권세나 얻고 지위나 얻고 세상에  이 세력을 내 배경을 삼아 가지고 이 교회에서 세상 배경 가지고 (배경 가지고)  한번 교계에 교회에 한번 자세를 부리고 세도를 한번 부려보자 하는 이런 교회도  교인도 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것도 벌써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과 벗되고저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생명이 빈약하고 벌써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세상과 벗되고저 하는 것이고 또 세상과 벗되지 안하고  세상 그 죄악에게 빠지지 안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 단독에는 빠져  들어가지 안할 수가 없다.

베드로가 안 빠지려고 아우성을 쳤지마는 안빠지지 안해. 주님이 놔 뒀으면 빠져  들어가 죽어. 왜 그렇게 바닷물을 육지같이 이용을 해서 바닷물은 베드로를 이래  버득 들어서 그 밑에 발판이 돼 가지고 이렇게 들고 이래 있었는데 뭣 때문에  빠져 들어갔더냐 언제는 바다물이 저희 발판이 되었더냐 언제는 바다물에게  자기를 삼킬려고 할 때에 나 죽는다고 소리를 쳤느냐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순종할 때에 바다물은 자기의 발판이 되어 줬습니다. 더벅  더벅 걸어가는 발판이 되어 줬어.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에는 요게 요동치 안하면 공산주의가  칼을 가지고 달라드는 것도 그 사람에게 영광되게 유익되게만 하지 그 사람에게  해치는 일은 추호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하는 일은 추호도 못합니다. 죽이면  그것으로 최고로 유익되게 해 줬습니다.


6. 25에 인민군들이 손양원 목사님을 총으로 죽였으니까 손양원 목사님을 해친  줄 알았으니까 그분은 생명 살대로 다 살았는데 인민군 아니더라면 그분은 예수  잘 믿다 죽은 사람이지 순교자는 못됩니다. 생명까지 주를 사랑함으로 바친 자는  못됩니다. 이랬는데 6. 25때 바친 자 되었어. 손양원 목사님의 후임으로 있던 그  서목사님이 나를 강사로 청해서 내가 거 애양원 교회 집회로 갔었는데 가면 내가  물으면서 내가 성경 깨달은 대로는 믿는 사람이 꼭 생명대로 다 살고 마지막에  죽을 그 생명을 주를 위해서 바치도록 하려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특대하는 것인데 손양원 목사님 많이 살 수 있었던 것을 죽었는가 물어 봤습니다.

'어데를 맞아 죽었습니까?' '손에 맞아 죽었대요' '손에 맞아 죽었는데 피가 많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는 열 번 맞아도 안죽을 겁니다' 별 상처도 없고  피도 조금 비췄는데 죽었어.

이미 그래 안해도 그 시간 되면 손목사님은 죽는 건데 죽이려고 이래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으니까 생명까지 다 해서 주를 사랑했다 말이오.

소유를 다하고 몸을 다하고 지위 권세를 다하고 당신 것 다하고 생명까지 바쳐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해 주신 이 주님을 손양원 목사님도 일생동안 다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다가 마지막에 생명이 끊어질 울리게 되는 때에 네가 지금이라도  예수를 내놓으면 살려준다 할 때에 주를 사랑함으로서 그가 생명을 바치니까  이미 폐물되는 그 생물도 주를 사랑함으로 바치도록 만든 이것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이라.


6. 25때 뭐 순교자가 많이 있다 하지마는 믿는 자가 세상하고 침범하다가  그들에게 죽임당한 사람 많고 참 신앙으로 죽임 당한 그 순교자는 많지를  못했습니다. 6. 25때는 손양원 목사님과 참된 순교자들을 하나님께서 보배로  여겨서 이들이 생명까지 바쳐 주를 사랑하는 사랑할 수 있는 실력가인데 생명을  주를 사랑함으로 바치지 못할까 해서 바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6. 25를 만드신 것입니다. 6. 25를 만드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녜 주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십니다. 이것도 영원 전에 예정한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 비밀을 우리가 천하에 두어도 세상에 두어도 둘 곳이 없는  많은 사건 중에서 간추려서 이런 사건 66권 도리를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절수도 이 우주보다 중량이 크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될 때에 주님 안보고 바람 봤어. 주님 보고 든든할  때는 됐는데 그만 벌써 세상 그 바람 보고 무서워 하니까 헛일이야 세상에  시험이 올 때에 그 시험이 자기를 이렇게 높이 들어주는 영광케 영광스럽게 해  주는 발판인 것으로 인정될 때에는 기쁘고 즐겁지마는 세상에 어떤 시험이라도  벌써 두려움이 올 때에는 자기는 세상에 삼켜집니다. 두려운데는 그 다음에는  그들에게 정복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해도 정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어 부르짖으면 다시 물 위에 떠  오릅니다.

요것을 깊히 깨닫고 외정말년에도 그렇고 6. 25때도 그렇고 뭐 인민군들이  전쟁으로 가거나 말거나 그들이 올수록 하루 세번씩 종치고 부흥회하고 집회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들이 총을 가져와야 아무 두려움이나 아무 그런 것 없고  복음 전할 것 뿐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에는 세상이 그를 유익되게만 해 주지  두렵게도 만들지 못하고 염려되지 못하고 기쁘고 즐겁게만 만들어 줍니다. 또  결과적으로 유익되게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  비밀을 깨달아서 참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걸음은 세상이 자기의  발판이 되어지고 이보다도 주님에게 붙들려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는 다시는  세상에 빠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에녹이 동행했고 노아가 동행했고 아브라함이 동행했는데 동행할 때에는 그들은  온 세상을 그들은 영광스럽게 하는 결과를 맺었지 해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들어갈수록 더 기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들어갈수록 더 기쁘고 더 유익되고 더 좋고 더 존귀하고 더 영광스럽고  믿음으로 들어갈수록 야 이렇게 믿음으로 들어가면 좋은 세상 버리면 좋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 거기에 있습니다. 만드신 분이 큽니까? 만들어 놓음을 받음이  큽니까? 인간이 아무리 물건이 좋아도 물건을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사람 보고  기뻐하는 것이 낫습니다. 아마 자기네들이 아무리 물건이 좋은 물건이라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하고 친한 것보다는 더 좋은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그 결혼의 첫사랑의 모든 것이 아깝지 안하고 모든 것이 모든  것보다 나을 것이요.

그와 같이 왜 모든 것보다 인간이 자기로 말미암아서 자기는 그 사람 바라보고  그 사람은 자기 바라보고 이렇게 인간끼리 교제가 사물 교제보다 훨씬 낫아.

낫다고 학자들이 공부하려고 사십이나 오십이니 그만 공부하기 위해서 장가  못가고 이래 가지고 있던 그 사람들이 장가 갈 마음이 없어요. 사십이나 오십이나  늦게 장가 가 가지고 장가 가서 인간 교제에 부부 교제에 그 인격 교제 부부가  같이 협조해 가지고 뭐 이뤄 나가는 인격 교제의 맛을 보고 보니까 그만 그 학을  연구하는 그것이 틀려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모든 사물 교제보다 인인 교제가  맛이 뛰어납니다. 재미가 뛰어나요. 인인 교제보다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어. 하나님과 교제되는 데에는 그 베드로 같은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꺼꾸로 박혀달라 했다 말이오.

왜 이 말 하는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아 요만치 믿지 더 잘 믿으면 이거  절단나니까 참 자살행위 한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을 향하여 가는 것만치  재미가 없는 줄 알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잘 믿어 갈수록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고 권태나지 안하고 점점 더 좋고 더 평안하고 더 기쁘고 더  필요하고 더 권세있고 더 부요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녜  소유권으로서 불쌍한 자 같고 약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살리는 권능이 거기에  있어. 어리석게 예수 잘 믿으면 낭파되겠다 그런 생각 가지지 맙시다. 그거는  내가 간증이요 내가 처음에 믿을 때에 예수 믿고 나서 성경만 봐도 고만 이  세상을 집어던지게 됐는데 사경회를 못갔습니다. 사경회 가면 만일 사경회 가서  은혜를 받는 날이면 당장에 지금 세상이고 뭐 이런 것 돌보지 안하고 이렇게  나갈 터이니까 그리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저 예수 믿어 미치광이 됐다 이럴  터이니까 너무 은혜 많이 받아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나갈까 겁이 나 가지고  사경회 참석 안했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 쳐놓고 이만치 믿어야 되지 너무 사경회나 가 가지고  은혜 많이 받아 가지고 예수에 도취되고 진리에 도취돼 가지고 그래버리면  세상도 모르는 사람 돼버리면 이거 그만 참 불쌍한 사람 안되겠느냐 이래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그거야 그러나 지금은 참 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암만 더 들어갈래야 더 들어가지 못해 탈이지 들어간데만치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간 것만치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간 것만치는 후회가 없습니다. 가까이 간 거는  후회가 없어 더 못 가 탈이지. 가까이 가는 거는 후회가 없어 세상은 어떤 걸  취해봐도 취하고 난 다음에는 후회가 있지마는 이 일은 후회가 없어.

그러니까 예수 잘 믿으면 너무 잘 믿으면 이 가정을 어떻게 하며 세상을 어떻게  하노 그런 염려 마시고 잘 믿을수록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습니다. 무한히 더  좋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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