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친밀의 기회


선지자선교회 1982년 7월 25일 주후

 

본문 : 계 1:6-8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는 전혀 모든 만물관이 삐뚤어져 있던 저희들입니다.

세상이 깜깜 어둡다는 말씀은 세상에 바른 지식이 없어서 바로 가르치는 글이  없고 책이 없습니다. 모두는 다 거짓말쟁이가 한 말들이요 거짓말쟁이 애비가 한  말들입니다. 전부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마귀에게서 받아 가지고 한 말입니다.

 물리 같은 것은 바른 말이나 물리의 주격인 인간 도리가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식도 반은 맞고 반은 안 맞기 때문에 반거짓말 지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세상이 깜깜 어둡다. '어두운데 빛이 비취되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모든 것이 삐뚤어진 지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삐뚤어진  만물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비판도 삐뚤어진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기  때문에 그 비판이 옳다는 것은 잘못됐고 잘못됐다는 것은 옳다는 것으로  정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지혜있는 줄 알거든 도리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식을 바꾼다는 것이 이것이 아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을 바꾸는 것이 제일 어렵고 또 지식을 바꾸는 것이 자기의 가진 능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신앙을 바꾸는 것은 자기를 바꾸는 것이요  지식을 바꾸는 것은 자기의 지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삐뚤어졌든지 바르든지, 그리 가면 죽을 길이든지  살 길이든지 어쩌든지 정신없는 술취한 자와 같이 달리려고만 하지 '이 길을  가면 사는 길이냐 죽는 길이냐? 내가 이 길로 가면, 온 가족을 끌고 이 길로  가면 가족을 죽이는 길이냐 살리는 길이냐?'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아니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써 밤낮에 심신을 기울여서 하는 일이 과연 이 일의  결과가 나와 내게 속한 자를 구원하는 길이냐 멸망시키는 길이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판단할 만한 그런 시야 넓은 안목을 가지지 못하고 일방적인 지식으로,  무엇이든지 필요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데 필요한, 일방적 지식으로 어데 필요한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거기에 필요하니까 '이것은 좋은 거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다른 데는  해롭다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무엇에든지 필요한 것이면 그것을 위해서 일생  심신을 다 기울여서 가져야 될 줄 압니다.

 과연 사람들이 탐하고 있는 돈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그 지식이 정말로 인간에게 그렇게 필요한가? 모든 인간들의 경험과 체험의  그 역사의 통계가 그게 참으로 정확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것이 너무 허무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심히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도 좋지마는 우리는 선택을 바로  할 줄을 알아야 되지 선택을 바로 못 하고 죽음의 길에서 제가 부지런히 날뛰면  죽음이나 더 커지지 딴게 뭐 있을 것 뭐 있습니까?  자기에게 뭐 필요한 것이라도 그 양이 있는데, 적당이라 하는 양이 있는데 적당  이상이 되면 그것은 다 자기에게 폐단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저 백의 일이 좋으면  좋은 그것만 알고 '백이고 천이고 이거는 좋으니까 얼마든지 많이 가지면 좋다.'  이렇게 우매 무지하니 참 짐승 한가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모든 사람이 그 오시는 것을 다 볼  수 있게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볼 것이요 믿는 사람도 다 볼  것입니다. 환하게 보는데 그때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다 그를 인해서  애곡한다 그렇게 말씀했어.

 그러면 그때에 슬피 우는 그 애곡은 불택자 불신자만 애곡하리라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모든 족속이 다 가슴치면서 슬피 울 것입니다. 왜? 이는 참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 무궁토록 튼튼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래 갑자기  세상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반대로 뒤벼질 줄은 사람들이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자기의 소망한 것이 다 헛되고, 자기의 노력한 공로가 다 헛되고, 자기의 마련해  놓은 모든 것이 다 헛되니까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자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주님  만나면 더욱 더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죽은 자와 같이 까물쳤습니다.

기절 했습니다. 그 앞에서 기절했어. 슬퍼 애통하는 것을 초월한 기절했습니다.

왜? 주님을 가까이 만나 보니까 기가 차서, 너무도 일생 동안 산 것이 너무도  기가 차서,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그 모든 여론이라는 세게 공론이라는 것을 매우  적은 것으로 여긴다' 이랬습니다. 또 자기 속에 양심에 가책이 없는 이런 시정한  그 깨끗을 그것을 인정을 도무지 안 했습니다.

 자기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지마는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서 설 걸  생각하니 어젯날 가책 없던 것이 오늘 가책이 또 생겨지고, 오늘에 가책 없는  일을 다 정돈해 놨는데 다음날 생각하니 성령 오니까 또 잘못된 가책이 생겨지니  마음에 눌리기를 무거운 짐진 자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꾸 눌려서 무거워서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주님을 만날 일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눌리고 눌려서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자기에게는 마음이 눌리고 탄식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참 사람의 그 심정이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우리가 그 앞에 나타나서 심판받고 행한 대로 행동록에 기록한 대로 심판받고  무궁을 향하여 갈 그 날을 생각하는 그 심령이 밝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우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요, 지금 담대한 자는 그때  두려움을 만날 것이요, 지금 낙관하고 평안하고 우쭐한 자는 그때에 꺾어지고  눌려져서 영원히 그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애곡 하리니 그러하리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을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전능자라는 말은 전지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멸시도  당하고, 천대도 당하고, 무시도 당하고, 배척도 당하고 이렇게 어떻게 어떤  곤욕을 당해도 주님은 가만히 당하고 계시지마는, 지금은 용서의 주님이요, 참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주님이요,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이시지마는 이것이 끝나고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그때부터는 영광의 주요, 엄위의 주요, 정상적으로  나타난 전지의 주라, 전능의 주라, 만주의 주라, 만왕의 왕이라. 모든 것을  행동록에 기록한 그대로 일단 심판해서 영원 무궁토록 그대로 인간 취급 만물  취급을 하실 그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에서 부자로 지냈다고 그대로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에서  고관대작을 했다고 그대로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에서 많은 것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받는다고 그대로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에서 인간 지식으로 대학자라, 위대한 과학자라, 위대한  영웅이라 하는 그 모두 다 외모인데 외모 그대로 무궁세계에 하나님은 평가하지  아니하시고 대우하지 아니하시고 인정하지 아니하신다. 이 모든 것은 다 제거돼  버린다.

 돼 버리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행위대로 갚으시는 그 행위는 신앙  행위도 있을 것이고, 사욕의 행위도 있을 것이고, 자율의 행위도 있을 것이고,  별별 우상의 행위가 있겠지요. 사람마다 우상이 둘, 셋, 넷, 열도 더 가지고  하나님은 그 다음으로 모시고 하나님보다 순위로 앞서 있는 그 순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있습니다.

 주님보다 돈도 앞서고, 주님보다 남편도 앞서고, 주님보다 아내도 앞서고,  주님보다 부모도 앞서고, 주님보다 상관도 앞서고, 주님보다 모든 자녀도  앞서고, 주님보다 저도 앞세우고, 주님보다 권세도 앞세우고, 주님보다 세상의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것을 앞세워 놓고 찌끄러기 가지고 주님을 대우하는 그  모든 행위,  그저 '행한 대로 갚아준다' 행한 대로 무궁세계에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당신 만을 위해서 사는 그  생활에 아무리 곤고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주님이 아는 척 해서  대우해 주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무궁세계에 보응이 있기 때문에 뭐 조금도  그것이 냉대가 아닌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이를 아버지라 부른즉' 그말은, 이분을 아버지로 부른다  그말은 이렇게 지공 지성의 완전성 영원성으로 되어있는 그분의 아들이 그분의  아들이 성도들이다 그말이오. 그분의 아들이 성도들이다.

 소 새끼는 소를 닮았고, 개 새끼는 개를 닮았고, 사람의 자녀는 사람을 닮았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은 지공 지성의 본질과 본성을 가지신  분이요 또 지성 지공대로 그대로 행동하는 그분이라. 그분의 아들도 그러해.

 그분의 자녀들도 그러하니 네가 살고 있는 너는 그분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식인지 네가 너를 생각해 봐라. 너는 그분의 자녀인지 그 분의 본질과 본성을  타고 난 자인지 순전히 마귀의 본질과 본성을 타고 난 자인지 잘못하면 자기  아닌 자로 살기 쉽고 참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의 자녀인 자기로 살 수도 있으니,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네가 조심하지 아니하면 너 아닌 너로  살고 너는 매장시켜서 네 생활은 네가 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꾀여 가지고 너  아닌 생활을 네가 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말씀을 했습니다.

 오전에도, 우리가 지금은 그분을 영접할 수도 있고, 그분을 사귈 수도 있고,  그분을 대접할 수도 있고, 친밀해질 수도 있고, 그분으로 너불어 얼마든지  상통하고 머리와 몸이 하나처럼 이렇게 친밀해져 가지고 살 수 있는 이런 권리도  있지마는 일단 세상을 떠나고 나면 털끝만치도 이 일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하지 세상을 떠나서는 다시 못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자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자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나타나서 일하는 것이 곧 내가  아버지와 하나되어서 일하는 것이라. 아버지와 하나되어서 일하는 것이라.

이런고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내가 말한다. 내가 일하는 것은 아버지가 일함이요,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말함이요, 내가 나타난 것은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라. 아버지와  나와 하나라.'  이와 같이 너희들이 내 이름을 가지고 이 피 운동에 이 복음 운동에 너희들이  복음을 위해서 역사하는 것, 오늘 아침에도 이 말씀을 시작하다가 결과만 하고  말았습니다.

 뭣 때문에 피곤하다가 주일날 쉬는 날인데 학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피곤할  터인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지고 남의 집에 개 짖기면서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면서, 가 봤자 환영도 하나도 안하고 조롱도 하고 핍박도 하고 야단도  치고, 이러니까 오만 아부를 다하고 오만 저 자세를 다 해서, 가면 아이 못  데리고 가구로 고함을 치고 야단을 치니까, 야단을 치며 벌써 성을 내고 뚱 해  가지고 나오니까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속으로는 학생 아버지라 그말이오.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아버지라 하니까 듣기 좋아서 괄시를 못해서 '아, 왔소?  야야 야야, 여기 너거 선생님 왔다. 어서 오너라. 너거 선생님 오셨다'  이렇게 주를 위해서 천해지기도 낮아지기도 오만 일 다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함이라' 너희가 그와 같이  전할 때에 나는 너의 머리요 너는 내 몸이라. 너와 나와는 하나라. 하나되는  것이라.

 이것이 주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요, 이렇게 밀접해지는 것이요, 이렇게 나  위해 도를 전하고 신앙으로서 내 앞에서 끌 때에 그 분의 끄는 그 교훈이나  인도를 받는 그것이 막바로 또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을 모시는 것이오.

주님과 한 몸 되는 것, 주님을 모시는 것.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이것이 주님을 모시는 것,  이것이 주님과 하나되는 것. 오늘 모두 우리가 지식이 삐뚤어져서, 그 지방  장관과 하나돼도 세도를 부립니다. 그 나라의 머리되는 어떤 과학자나 학자나  재벌가나 권세자와 하나돼도 세도를 부립니다.

 언제 ○박사 양아들이 왔다 하니까 저 경주에서 귀하신 분이 오셨다고 귀하신  분이라 그 말이 찻간에 가니까 꽉 퍼져 있습디다. 그것이 뭐 정당한 말입니다.

 오늘에 사람들은 하나되는 것. 이렇게 자기의 머리로 모시는 것이 일을 귀중한  줄 알아서 시골에 가면 장관 아저씨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 또 효력을  봅니다. 아무나 '우리 아저씨가, 뭐 집에 가니까 누가 오고 누가 오고' 가지도  않았소. '누가 오고 누가 오고 또 어떤 국회의원이 왔고 또 어떤 장관이  찾아왔고' '하야. 저거 장관 아저씨가 있는가보다. 국회의원 아저씨가  있는가보다. 무슨 국장도 뭐 있는가보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게 귀한 줄 알기 때문에 얼마 전에 큰 물질에 부도가  났는데 그 부도난 그 사람들을 보니까 모두 ○대통령 연관성 있는, ○대통령  알지도 못하는데 미리 공연히 '저분의 친척이고 저분의 성이 동성이고 어떻고  하니까 알아 기어야 되겠다' 해 가지고 이래서 그렇게 많은 재산들을 절단을  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큰 자를 사귀는 것이 지혜있는 자인 줄 알고 큰 자로 더불어  한덩어리 되는 것이 참 유력한 일인 줄 알고 다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 아닙니다.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어떤 집에 가니까, 심방을 갔는데, 그 재산 되어진 것이 거의 제 신앙  지도로 입으로 쪼아서 '그거는 하면 안 된다. 이거는 해라. 저거를 해라.' 이래  가지고 좀 재산이 조금 얼마 있는 사람 됐는데 심방 가니까 아이들까지도 우리는  무시합니다. '목사님이 오셨다.' 목사님이 왔거나 말았거나 해도, 와서 인사하라  해도 뭐 인사도 잘 안 합니다.

 이러면서 분위기를 보니까 '손님 오신다. 오신다 ' 모두 다 그래 '무슨 손님이  오시는고?' 이러니까 그날 뭐 도지사 부인하고 검찰 청장 부인하고 또 재판소 뭐  소장 부인하고 그래 온다고 그분들이 온다고 이러면서 온 아이들까지도 다  그렇게 뭐 정신이 기울어지고 이랬습니다. 우리는 가니까 시시하게 그래 봐.

속으로, 내가 거기에 대해서 '아무리 인간이 존귀한 자리에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  뭘 찌끄러기 갖다가 차려 놓고, 찌끄러기를 내 놓으며 '이것들은 이만해도  족하지' 해서 내놨는데 손에 들어서 드는 척 하고 하나도 입에 안 대고 그냥  왔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 가정이 지금 뒤가 어떻게 됐는지 나는 모르겠어. 내가  그분에게 '네가 네 자녀 교육에 대해서 네가 50세가 되면 내가 한 말을 깨달아질  것이고 그때는 네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거의 한 50세가 아마 됐을 것 같은데  언제 만나면 '지금 눈물 흘리는 일 없느냐?' 내가 물을 것이오.

 세상이 이렇게 권력있는 자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처세에 유리한 줄 알고  권력있는 사람과 한덩어리 되는 것이 이것이 큰 세력인 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걸 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 말해 둡니다. 땅위에는 이런 머리 저런 머리 좋고 아름답고 위대한  머리들이 많지마는 그 머리를 자기의 머리로 모시고 살면서 유익을 본다  할지라도 그 유익은 극히 적습니다. 또 그 유익의 기간은 극히 짧습니다. 오늘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있어도 큰 유익 아니고 또 있어 봤자 얼마 지탱 못 할 것이고 또 없어 봤자.

없어 봤자 없으면 권력 없는 데에서는 조심해서 권력 없는 데에서는 조심이  자라가고, 가난한 데서는 겸손이 자라가고, 무식한 데에서는 근신이 자라가지 별  손해갈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높이 평가하고 있는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배경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사귀려고 대우하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진상을 똑똑히 파악을 해서 그것의 실력이 어느 정도며, 그 수명이 어느 정도며,  그의 범위가 어느 정도며 어데까지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저울에 올려 놓고 달면 환하게 나옵니다. 그 잣대로 재면 환하게  나옵니다. 그 가치가 정확한 가치가 나올 것이요 정확한 중량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 아닙니다. 그거는 그것만치 평가해야 될 것입니다.

 똥도 가치 없는 것 아니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뭐 토비를 해라 뭣 해라 하지  인분을 거름으로 쓰라 소리는 안 나오는데, 이 부산만 해도 인분 처리를 하려고  이래 가지고 돈을 몇억이나 들였는지 그래 가지고 지금 시비를 하고 모두 야단을  지기는데 이것 좋은 거름이오. 옛날은 말하기를 제 오줌 제 똥을 삼년을 안  먹으면 죽는다 이랬습니다.

 이렇게 모두 다 사람들은 사치에만 흘러서 그 지식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전부 자살 행위밖에는 안 되고 맙니다.

 요새 신문에 보니까 무슨 과학자가 뭐 발명 뭐 발명 뭐 발명 했는데 한 그것이  전부 인간 죽이는 데만 쓰여지고 인간 교만한 데만 쓰여지고 인간 게을한 데만  쓰여지고 인간 강퍅하게만 만들지 하나도 유익되게 만드는 그런 것은 별로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넓게 큰 범위로 계산을 대면, 마지막 결말에 계산을 대면 전체가  사망케 하는 것뿐인데 사망케 하는 이 지식은 크다, 크다 하고, 오늘이 끝날지  내일이 끝날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그런 것은 든든히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는 '오늘에 사귀라. 오늘이라는 이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네 마음을 완패케 하지 말고 오늘에  조물주를 사귀라. 오늘에 대주재를 사귀라. 오늘에 전능자를 사귀라, 오늘에  만왕의 왕을 사귀라, 오늘에 주권자를 사귀라, 가까이 있을 때에 사귀라, 시기  놓치면 다시는 사귀지 못한다. 말씀했지마는 오늘은 이 일을 우리는 예사롭게  여깁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 이하에는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마라. 네가 세상에 속했으면 저희 것으로 알고 너희들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와서 나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미워함이다. 너와 나와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에게 미움을 당한다.'  주와 하나됨으로 세상에게 미움당하는 그 자체가, 그 입장이, 그 행위가 주님과  하나된다는 이 비밀의 사실의 가치를 모르면 저는 낙망도 비관도 불만도 있을  것이요 주님이 누구신 것을 알고 그분과 하나요, 그분과 고락이 같은 것이요.

그분과 같은 생활 같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응되는 것이  같은 반응을 받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깨닫고 알면 기뻐 즐거워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원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바울 그는 잘 깨닫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그말은 내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인정하고 그 지식을 따르고 그의 행동을 따라 그의  지식으로 내 지식 삼고 그의 능력으로 내 능력 삼는 이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만을 상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자랑스럽게 살지 말아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데서 나왔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위해서  있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그러기에 마태복음 25장 40절에 보면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니라' '소자 하나에게 후대하는 것이 나에게 후대하는 것이니라' 소자  하나가 감사할 줄 모르고, 나는 참 심신을 기울여서 그에게 정성을 다 기울여서  진정 사랑해서 노력하고 그가 모르게 기도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피곤한 다리로 가지고 방문하되 아주 냉정스럽게 냉대할 때에  우리는 낙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소자 하나에게 내가 행하는 것이 주님에게 행하는 것이라. 그럴 때에  주님이 내가 당신에게 그와 같은 잘못이 있는 그것을 내가 당신에게 소자에게 한  그것이 당신에게 했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대해서 넉넉히 참으시고 넉넉히  후대로 갚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넓은 세계에서 살아야 됩니다. 조부라운 인간 지식에서 파묻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전지의 지식을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삼아서  무대 넓게, 시야 넓게, 포부 크게, 광대하고 영영한 포부를 가지고 참 큰 자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는 보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영원한  집으로 그가 너를 영접하리라' 영접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이십니다. 네가  땅위에 있는 네 힘이든지, 정성이든지, 총명이든지, 네 명예든지, 네 재산이든지  뭐이든지 네가 피흘려 구속하시는 이 구속 운동에 네가 인간 구원에 기울이라.

'냉수 한 그릇의 기울인 것도 내가 결단코 상을 내가 잃지 않겠다. 네가 결단코  내가 상을 잃지 않겠다.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네가 저주받은 것이며 이미 두고 갈 것이며 다 죄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둬도 없어질 것 이래도 없어질 것, 네 정력도 다 죄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 없어질 것이다.

 이런데 이것 가지고 친구 사귀라. 어떤 친구? 이것 가지고 친구 사귀라. 어떤  친구? 영원한 집에서 영접할 친구, 만왕의 왕 친구, 만주의 주 친구, 창조주  친구, 주재 친구, 주권자 친구,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영원한 처소에서  내가 너를 찾겠다.' 이게 아니면 복음 위해 살 자 없습니다.

 다 못나나 잘나나 제 수단 방법대로는 처세해서 저 위해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마는 이걸 아는 사람은 자기 모든 것 다 기울여 원수에게 행하는 것이나  무지자에게 행하는 것이나 문둥이에게 행하는 것이나 그것이 대주재인 친구 이분  사귀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좋은 신사 있는 교회를 두고 문둥이 있는 교회로  찾아가고, 부자 있는 교회를 버리고 가난하고 아주 험악한 그런 산골 미개한  야만의 그 나라로 찾아가는 것이 다 그들이 아는 것이 있고 보는 눈이 있고  깨달은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분들이 절대로 속는 것 아닙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어떤 친구? 오늘에 내가 그 형제 위해서  남모르게 그를 위해서 눈물 흘리면서 기도한 것이, 강변에 가서 기도한 것이,  의자 위에서 기도한 것이, 남모르게 산에 가서 기도한 것이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주님 사귀는 것입니다.

 당신 위해서 눈물 흘렸고, 당신 위해서 기도했고, 당신 위해서 바쳐서 당신  애착해서 당신이 그리워서 당신 위해서 한 것이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졌을 때에 영원한 처소에서 내가 너를  찾겠다. 너를 영접하겠다.' 나와 내 도를 인해서, 나와 내 도 전하기 위해서  병신된 사람.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믿음 지키려 하다가 남편에게 맞아서 갈빗대  뿌질러진 사람, 안 믿는 가정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참 눈물로써 자기를 썩힌  사람, 오만 속 다 썩힌 사람,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희생했든지 무엇을  손해봤든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거기서 갚겠다. 갚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내가 네게 필요하면 여러 배 백 배를 내가 갚아 줄 수 있다.

 요한복은 15장 13절 이하에는 마지막으로 말씀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 주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없다.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없다.

'내가 다시는 너를 내가 종이라 너와 나와 구별하지 아니하고 너를 친구라 하여  아버지에게 내가 들은 것을 너에게 다 알리겠다'  들으연 그것이 실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한 것은 전부 당신의 뜻,  당신의 뜻 그것이 우주도 지었고 영계도 지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에게 받은  이것이 다 너의 것이라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주님을 내가 내 왕으로 머리로 모시는 행위가 있고  주님과 나와 한 몸 되는 행위가 있습니다. 한 몸 되는 행위. 주님과 나와의  부부되는 행위가 있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목자와 양의 관계가 맺어지는 행위가  있습니다. 주님과 나와에는 주님은 안에 계시는 주인이요 나는 당신의 전이  되어지는 이 관계를 맺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가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이분을 사귀는 것이 지혜가 있습니다.

이분을 사귀는 것이 지혜있고 이분을 모시는 것이 지혜있고 이분과 동행하는  것이 지혜 있습니다. 요대로.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요대로입니다.

 당신의 지체같이 되어서 당신과 희로애락이 같애. 이럴 때에는 당신이 하는 그  모든 일이 그와 하나 된, 그분이 해. 그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하나님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가 눈을 떠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마련을 할까? 무엇을  배경으로 삼을까? 무엇을 사귈까? 무엇을 모실까?' 우리의 평가가 바로 됐는지  잘못됐는지 성경 말씀 가지고 한번 검토를 세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도 그 가정이 참 주님을 호주로 모신 가정을 만들어야 그 호주가  부끄럽지 아니하고 후회가 없고 가족들에게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 제가  호주라고 제가 왕이 돼 가지고 떠들고, 저거 가정에 주님을 호주로 모시고 그  슬하에서 있도록 이렇게 만들지 못하고 제가 호주라고 떠든 그자의 영원한  수치와 가족들에게 배척이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정신 차려 살아야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얼마든지 그분을 모실 수도 있고, 사귈 수도 있고, 섬길 수도  있고, 대접할 수도 있고, 그분으로 더불어 한 몸이 되어 가지고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 오늘입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알 하나도 이런 목적이 없는 일이 하니도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도 그 일의 동기는 이겁니다. 지극히 작은 일도 목적은 이겁니다.

그 일의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결과는 주님이냐 마귀냐, 영원한  것이냐 멸망할 것이냐? 이 둘의 결과를 맺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사실을 고요히 명상하면서 우리의 현 생활을 우리가 검토해 봅시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깨달아서 애통이 있어야 참 위로의 날이  있지, 여기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배부를 것이요'  말씀하신 대로 여기에 대해서 주림이 있어야 되지, 두고 갈 이 세상과 세상에  대해서는 불만과 부족과 지금 주림이 많이 있지마는 우리가 의에 대해서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주님과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 하지마는 참 주님과 사귄 것이 뭐 있는지?  친밀해진 게 뭐 있는지? 고요히 생각하면서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합시다.

 우리가 의를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낙심할 이유 없습니다. 낙심할 만한  그런 것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해서 생명 바치고도 오히려 부족을 느낄 수 있는,  느낄 수밖에 없는 가치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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