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6:27
주님과 진리만 사모하라
1984. 5. 6. 주일오후
본문: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맡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주님 안에 거하고 자기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무엇이든지 조건부가 있지 앉고 어떤 것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네가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하면 다 그대로 이루리라 하는 말씀은 당신이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오전에 증거한 말씀이 다 같은 뜻입니다.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든지 의지하든지 더 아끼든지 관심을 더 가지든지 하면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그만 모든 존재를 자기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가정이든지 자기 장래라든지 또 자기의 무슨 사업이나 어떤 그 전공하는 무슨 어떤 것이든지 자녀든지 무엇이든지 내가 그것에게 그저 은혜를 입혀서 그 상대방이 잘되도록 내 가정이 잘되도록 자녀가 잘되도록 사업이 잘되도록 자기가 무엇을 전공하는 그것이 잘되도록 자기 사회가 잘 되도록 자기 민족이나 국가가 잘되도록 그 마음이 나쁜 것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잘되도록 하려는 것도 그것을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주님을 잊어버린다든지 또 그것을 잘되도록 하는 그 일이 주님을 자기가 사모하고 섬기는 일보다 더 중하게 여기든지 해서 여러 모양이 있겠지마는 그것을 인해서 주님은 멀리하고 주님은 잊어버리고 주의 말씀은 어길지라도 그것만큼은 내가 놓을 수 없고 그것만큼은 내가 잊을 수가 없다. 그것만큼은 어쩌든지 내가 잘되도록 내게 힘있는 대로 다 해서 그걸 잘되도록 해 봐야 되겠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 다 사람에게 한 가지 두 가지 혹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나머지기는 그거는 다 사람이 예사롭게 취급할 수 있지마는 누구든지 자기가 그 상대방에 대해서 참 잘되기를 원하는, 잘되도록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그걸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노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우리가 다 몇 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사업적으로나 출세적으로나 혹은 가정적으로나 자기 사업적으로나 소유적으로나 자기의 무슨 취미적으로나 무엇이든지 사람이 그거 없는 사람 없습니다.
어짜든지 그것은 내게 있는 힘을 다 해서 그것을 잘되도록 한번 해 보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그런 대상이 다 몇 가지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거, 그럴 때에 그것 때문에 주님을 잊어버리거나 또 주님을 거스리는 거 그런 일이 가다가는 생겨집니다. 가다가는 생겨질 때에 주님에게 거스려져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또 주님을 잊어 버려도 이것만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백 세에 외동 아들을 낳아 놨으니까 그 한 열 두서너 살 먹었으니까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또 순종하고 그러니까 아주 귀여워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기에다가 마음을 기울이고 또 늘 애정을 기울이고 늘 사모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좀 등한히 하고 그리 마음이 기울여지고 마음이 그리 가서 붙는 거같이 그렇게 여겨 질 만한 그런 형편이 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했습니다.
시험하되, 네가 그 이삭 독자 백 세의 독자 이삭을 네가 사랑하고 애모하므로 내게 대한 애모와 성의가 성글다 그리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이삭을 잡아서 불에 태워서 제사로 드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만일 아브라함이 참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백 세에 낳은 독자를 잡아서 불에 태워 -번제라 말은 불에 태워서 제사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이렇게 화제를 드리라고 이렇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조그만치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불만스러웠거나 불평스러웠거나 원망스러웠거나 그 일이 달갑지 아니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그렇게 화제로 드리라고 했지마는 제가 달갑지 안한 마음 가지고 화제로 드릴라고 하면 하나님이 네 마음에 백 세의 독자기 때문에 아깝고 그렇게 그러니 그만 내비둬라 그렇게 말씀했을 것이오. 다른 데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좋아서 예, 감사합니다 하고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요. 다시는 하나님이 이삭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쉽겠고. 또 아브라함도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렇게 기울여지기 쉬울 수 있는 그런 형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소원과 이삭과 그 비중을 비교할 때에 그 뭐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에 기울이는 성의의 비중이 만일 비유컨댄 만 근이라고 하면은 이삭에 대한 것은 한 근도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번제로 드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어데서 어데까지 나를 숭배하고 높이고 섬기고 두려워하고 모든 것이 내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내가 알았다.
이제야 네가 나를 참 지극히 크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알았다. 이러니까 그 이삭을 해하지 말고 그 옆에 있는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즉시 하나님이 이삭에게 작정하신 축복을 다 축복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는 그 구주의 바로 선조가 돼서 그를 통해서 그 씨로 통해서 메시아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잘되기를 원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여럿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 있는 사람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한 몇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있는 것이 나쁜 거 아니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그것이 잘될 수 있지 하나님을 거스리고는 잘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만일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또 하나님과 가까와질라고 하면은 그를 일단 내놓아야 되고 하는 그런 경우에 있을 때에 우리는 그저 지체하지 않고 그것을 내어놓고 주님 앞에 달라붙어서 그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안해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보다 주님을 높이고 더 사랑하고 더 두려워하고 의지하고 주님의 일을 더 아끼고 원하고 하는 그것보다 주님이 더 위에 있으면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만일 그것을 주님보다 더 위에 둔다고 하면 그것은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상대방의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잘 되고 그것의 혜택을 보고 그것의 도움을 보고 그것이 나에게 필요하고 요긴해서 그것으로 인하여서 내가 참 유익을 보고 도움을 보고 기쁨을 보고 평강을 보고 재미를 보고 영광을 보고 이렇게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잘 될라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잘될라고 하는 그것도 그거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잘될라고 하는 이것이 둘이 비중이 달려질 때는 그때는 지체하지 안해야 됩니다. '주여 그까짓게 암만 있어 봤자 주님이 그것을 가지고 내게 유익되게 하시면 유익되지마는 주님이 그걸 내 몰라라 해 버린다면 그것이 내게 대해서는 화밖에 안 될 터이니까 주님 놓치고는 내가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 모시고 주님이 주신 다 선물인 줄 알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익도 볼라고 하고. 또 주님이 나에게 그것을 붙여 줬기 때문에 주님의 돕는 은혜를 입어서 그것을 잘 되도록 해 볼려고 하는 것이지 원인은 전부 주님이지 주님보다 그것을 크게 낫게 이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는 그런 것은 우리가 꿈에라도 지체하지 안해야 됩니다. 만일 그것을 주님보다 귀중히 여기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도 절단날 것이고 자기도 그로 말미암아 유익이나 기쁨을 보지 못하고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런 것이 있느냐? 씨 뿌리는 비유에, 모든 인류에 대해서 모든 인류 모든 인류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잘되게 하려는 것도 있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참 유익을 보고 재미를 보려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잘되기를 원하고 또 자식에게 무슨 도움을 본다는 것보다도 자식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기쁘고 즐겁고 참 영광스러워지고 명예스러워지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나에게 좋은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것이 우리가 있고, 내가 또 그에게 잘 무엇을 좋은 걸 줘서 잘되기를 원하는 이 양면 관계를 우리는 인류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폭넓게 그 전민족을 향하여 그런 사람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국민을 향하여 그런 사람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조그만한 그 가족을 향하여 그런 사람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전인류를 향하여 그런 사람 그 좀 양이 많고 큰 넓은 그런 상대를 가지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에 대해서 인류에 대해서 내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어데 있느냐? 인류에 대해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실패는 그 인류에 대해서 내가 잘되기를 원해서 잘해 줄라고 하는 것이나 그로 말미암아 내가 참 기쁘고 잘될려고 하는 것이나 내가 줄려고 하는 것이나 받을려고 하는 것이 나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주님보다 중하게 취급해서 거기에다가 치중하고 그걸 중하게 여기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중하게 여기지 안하고 그거와의 관계가 중하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벼워진다고 하면 고만 그거는 실패입니다. 그거는 실패이니까 우리가 이 면을 주의해서 우리는 매일 생활에 늘 이런 것이 자꾸 덮쳐 오는 것인데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길가 뿌린 씨는 깊이 해석을 해 들어가면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자기에게 대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자기를 잘되게 하려는 자기가 잘되게 하려는 것과 또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영광스러워지려는 것. 자기라는 그 자체가 잘되기를 원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영광스러워지고 즐거워지고 참 행복스러워지기를 원하는 것. 자기가 자기에게 기울이는 것이나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가 그 기울임을 받는 것이나 이것이 꼭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인데 이것도 그러합니다. 그것을 주님과의 관계보다 중하게 여기면 거기에다가 중하게 여기면 그것을 중하게 여기고 주님 것을 경하게 여기면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실패를 합니다.
그거는 실패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패를 하게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이치를 따질 때에 그분이 창조주시요 그분이 주권자시요 그분이 지금 모든 생사 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요 그분이 계속 우리에게 호흡을 줘서 우리가 호흡하고 있지, 생기를 줘서 우리가 생명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그분에게 계속,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뿌리에서 계속 진액이 올라오는 그 진액으로 제가 잎사귀도 청청하고 또 꽃도 피고 열매도 맺고 순전히 거기에서 자꾸 받아서 그렇지 쌀빡 잘라 버리면 그만 금방 뭐 새들새들해 가지고서 시들어지고 말라지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은 그러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수많은 면을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고 면이 끊어지면 고 면이 사망하고 조 면이 끊어지면 조 면이 사망하고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살이라 하는 것은 요면 조 면을 하나님과 관계를 완전히 담박 다 싹 다 끊고 고게 세상 끝이기 때문에 그 다음이 유황불 구렁텅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끊기워 끊는 그 일을 완전히 이루는 그 절단 완성을 하는 위치에 있는 우리들을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과 법적 연결을 시키시고 재연결을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셔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처세하는 세상에 있는 이 재세의 기관이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과 끊겨졌던 것이 하나님과 재연결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이래서 이면과 하나님과 연결하고 저면을 하나님과 연결해서 영원무궁토록 끝이 없는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우리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후히 주어 누리게 하시는 그분과의 연결을 가지는 이 연결 재건 공사를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공사입니다. 본인이 알든지 모르든지 대속하신 주님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서 역사하셔 가지고 이거 재연결하는 이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대해서도 자기가 자기를 잘되게 해 줄라 잘되도록 해 줄라고 하는 것도 자기가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가 더 영광스럽고 존귀해 될라고 하는 것도,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는 영광스러웠고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는 존귀해졌고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는 참 절단났고 수치스러워졌고, 주는 것이나 받는 것이나 그 모든 것도 중요하기는 중요합니다. 전인류보다 자기가 중요합니다. 박애주의라고 해도 이타주의라고 해서 자기야 어찌 됐든지 남 하는 그것은 다 망상의 말이지 그거는 다 진리에 삐끌어진 말입니다. 모든 인류보다 자기가 중요합니다.
중요한데,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관심은 크지마는. 자기에 대해서도 자기를 대해서 모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중하게 여기면 실패합니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그 비중 이 비교되는 그런 일이 퍼뜩 오면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고 근심하지 안했고 '예, 감사합니다.' 하고는 가만히 생각하니 밤새껏 뭐 장작을 백지 패는데 장작 그 뭐 사람 하나 태우는 거 좀 많이 들기야 들지마는 지고 갈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많이 가지지도 못 할 거고, 이러니까 잠깐 패지마는 그 돼는 걸 또 돼 가지고 새로 더 잘 타도록 또 그런 걸 또 가리고 또 그것을 아주 잘 쪼개고 정성을 들여서 자꾸 화목을 쪼개는 그것이 뭐이냐? 주님이 그 번제로 드리라는 그 명령이 떨어진 이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 순종하는 것으로 계속하고 순종하는 것을 '예' 해 놓고 허툴이 다문 밤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그 단마음으로 순종하고 고것을 중단하지 아니하려는 그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비중이 나타나는 그런 혹 기회를 하나님께서.
이삭을 보고 하신 것과 같이 그런 시기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시기를 내가 이리 마음이 기울여져 가지고 있는 걸 아시지마는 내가 모를 때에 내 마음이 이이 기울여져 가 있어서 가짜다 이걸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서도 하는 때가 있고, 내 마음이 이리는 기울여 있지는 안하지마는 서도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울어질 듯 기울어질 듯 하니까 그때 견고해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번 경성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다가 내가 비중을 두느냐 하는 그런 비교하는.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이렇게 이 비교하고 비중하고 또 이 평가할 때에 어느 것보다 가치를 높이 보느냐 이럴 때에 그때에 하나님보다 거기에다가 더 두면 그만 그것은 멸망입니다. 다시 돌이켜 회개할 수 있기는 죽기 전에는 있지마는 그때 그것으로서는 실패입니다.
그럴 때에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하나님을 더 중하게 하나님을 더 높이고 그거 다 없어져도 하나님은 놓을 수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이러 사람이 되면 그것은 내가 그것에게 대해서 줄라는 것도 형통해서 얼마든지 줄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받는 것도 얼마든지 형통해서 받을 수 있어 그가 잘되고 내가 잘되고 하나님은 기뻐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덤불 밑에 뿌린 씨는 재물과 세상 모든 염려를 말했는데, 세상에 모든 사물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그런 것도 우리가 그 일이나 물건을 내가 잘되도록 하는 것도 있고, 그게 잘되므로 내가 그 혜택을 입을라 하는 것도 있고 주는 거 받는 거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주는 거 받는 거 그것을 우리가 시작할 때에는 그렇지 않지마는 시작해 가지고 얼마 동안 시간을 기울이고 정력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면 차차 차차 그리 내 마을이 기울어졌습니다. 기울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고시키기 위해서 내가 기울어지니 날 잊어버리고 그리 기울어지지 않느냐 그 비중이 오히려 나보다 더 크지 않느냐? 또 네가 큰 걸 네가 모르고 있지 않느냐? 또 비중이 크기를 곧 임박하게 되어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럴 때에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 그때는 지체하지 말고 옮겨야 되고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하시지 안하시고 만일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는 실패할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사심판을 시작해야 됩니다. 사심판.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심판해서 내가 지금 이것에 대해서는 내 자꾸 생각이 여기에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느냐 여기에는 덜 기울이지 않느냐? 내 애착이 여기에 많이 기울이지 않느냐 애착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것을 좌우하지 않느냐? 이것에게 내가 피동되어 있지 않느냐. 이것이 날 주관하고 있지 않느냐. 내 마음이 여기에 기울여져서 주님이 시기할 만치 그렇게 기울여져 있지를 아니하냐? 이것을 주님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깨달아서 이것을 사랑하고 취급한다는 것이 자꾸 그것을 상대해서 취급하지마는 속으로는 자꾸 주님에게 감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과 더 밀접해지고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고 이래 돼지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심사를 해 가지고서 거기에다가 중점을 두지 안해야 됩니다. 하나님보다 그 모든 인류 라든지 하나님보다 자기라든지 하나님보다 세상 사물이라든지 그것을 하나님보다 중요시 하면 그것은 실패합니다. 그것보다 하나님을 무한히 중요시하는 거기에서 그것도 잘되고 나도 잘되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잘되는 비결을 비유에 말씀하시기를 옥토에 뿌린 씨는 길가 뿌린 씨도 아니요 돌밭에 뿌린 씨도 아니요 덤불 밑에 뿌린 씨도 아니요 그 밭은 넓게 말하면 우리 자체지마는 요게 좁게 말하면 우리 마음인데 우리 마음인데. 우리 마음을 길바닥의 해도 받지 아니하고 돌밭의 해도 받지 안하고 덤불의 해도 받지 안하고, 옥토니까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내 마음에 심기어 진 하나님의 도, 내 마음에 심기어진 하나님의 도. 내 마음에 오신 주님과 주님의 도가 내 마음을 고만 아무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까 싹 다 먹어 버린다 말이오. 내 마음을 싹 다 먹어 버려요. 돌도 없지 덤불도 없지 딴딴하게 여물지도 안하지 이러니까 내 안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이 말씀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솔박 다 삼켜 버립니다. 내 마음을 그분이 다 차지하고 그분이 다 삼켜 버려요. 내가 그분만 사모하고 자꾸 이러니까 그 진리를 사모하니까 진리가 내 마음 다 차지하지, 내가 주님 사모하니까 주님이 날 다 차지하지 이러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이루리라.
고 제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에 대해서 백 배는 인류에 대해서 완전 승리를 말하고 육십 배는 악령에 대한 완전 승리를 말하고 삼십 배는 하나님에게 대한 완전 승리를 상징적으로 그렇게 계시한 것이라 하는 것을 제가 그전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주저를 했는데 제가 대구 집회 때 가 가지고서 거기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졌고 점점 깨달아 성경을 볼수록이 그것이 강하게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지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수는 삼 수라고 말을 했고 마귀의 수는 육이라고 말을 했고 인간의 수는 십이라고 예언서에는 얼추 말했습니다.
열흘이니 하는 것은 인간은 만수가 하나 둘 하다가 열이 되면 만수되고 열 되면 또 열 하나 해 가지고 또 스물 되면 또 만수가 오고 스물 하나에게 또 더 되면 서른으로 만수되고, 이래서 백 배라 하는 것은 인간의 만수를 만수하면 그 인간의 만수를 만수하면 백이 되는 것이고 마귀의 육수에 만수를 가하면은 또 육십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숫자에 인간 만수를 가하면은 삼십이 된다 하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무래도 이거는 다른 해석보다도 이렇게 깨닫고 나니까 다른 성경이 다 그대로 풀려서 막히지 안하고 나갑니다. 고 밑에 또 길가. 돌밭.
가시덤불. 그것을 이렇게 해석 안 해 놓으면은 내나 그것이 그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 설교한 말씀을 우리가 간직할 것은 무엇이든지, 비단 뭐 요게서 말씀한 것은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니까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니까 무엇이든지 이치는 이렇다 이말이오. 이치가 진리가 이렇다 말이오. 진리가 이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것을 내가 그것에게 대해서 잘 해 줄라고 또 그것이 나를 잘해 주기를, 잘해 줄라고 잘해 주기를 인간은 다 누구든지 자기가 촛점이요 자기가 촛점이요 자기가 중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모든 것을 잘되게 하려는 것이나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잘되려는 것이나 이것이 인류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모든 사물에 대해서 전존재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잘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잘되게 하려는 그것도 마찬가지인데 어짜든지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소속을 시키면 그게 잘되고 그것을 하나님보다 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자기가 소속해서 하나님을 멀리 해 버리면 실패합니다.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고 놓지 맙시다. 우리가 어떤 것이든지 내가 그를 잘되게 하라든지 그가 나를 잘되게 해주는 것을 원한다든지 하는데에 잘 못하면 우리는 거기에 너무 솔직하고 우리는 유치하고 너무 단순합니다. 주님은 우리 두뇌 안에다가 뭐 콤퓨터를 십억 만인가 얼만가 만들어 넣어 놨다고 모두다 그 학자들이 지금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갖고 그거 맞은지 안 맞은지 모르지마는 하나님이 그렇게 세밀하고 복잡하시고 세밀하신 분이시지마는 우리는 너무 솔직하고 단순합니다. 그렇게 그 많은 복합성 그런 종합성을 가지고 있지를 못하는 아주 성근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근 걸로 시작해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통치할 수 있는 천사를 앞으로 심판에서 모든 것을 다 바로 다스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까지 하나님이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그런고로,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내가 그것을 잘되게 하려는 그걸 사랑하므로 그 자체가 잘되게 하려고 하는 것. 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좋아지고 잘되게 하려는 거 이게 전 관계인데. 무엇이든지 그럴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다. 자기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자기 마음을 차지하도록 하기 쉬운데 그럴 때에 참 하나님이 우리를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미끄러져서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혹 네가 이 비중이 어찌 되었는고 한번 봐라 하고서 비중을 중량을 비교할 수 있는 고런 그 기회를 딱 만들어 줬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것보다 어느 것이냐 하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 비중을 지금 내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정선 하실라고 지금 비중의 기회를 주신다고 할 때는 우리는 깜짝 놀래서 얼른 '이 비중이야 내가 이제까지는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비중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면 전부다.' 이렇게 옮겨서야만 우리가 지혜 있는 사람인데, 사람은 이런 줄 알고도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자기가 애착하는 것이니까 애착하는 것이요. 그에게 기대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착하는 것이요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 때문에 내어놓게 될 때에는 원망 불평 시비하고서 안 내놓을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것을 잡을라고 하는 이런 완패한 노릇을 우리가 할 때가 있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는 그것을 지체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기회가 언제든지 있는 거 아닙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도 어떤 그 형제에게 그 편지가 왔기 때문에 이 형제에게 내가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기회를 주님이 귀한 기회를 주셨다. 이 기회를 놓치 말아라 이게 무슨 기회인 줄 알고 이 기회를 지금 놓으면 너는 평생 다시 못 만난다. 이런 기회를 다시 만날라 하면은 또 어떤 일을 당해야 될 터이니까 이런 기회가 다시없으니 기회를 놓치 말라 하는 그런 것으로서 제가 그 성구를 말해 줬습니다.
오전에 말씀에서 요거 단단히 기억하고, 오전 말씀에 더 첨부를 해서 하나 참고를 삼게 하려고 오후 성경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인류에게 대해서 참 완전한 성공, 인류에게 대해서 하나도 잘못됨이 없이 아주 참 잘못됨이 하나도 없어 완전히 잘한 것, 인류에게 대해서 완전히 후회할 것이 없는 참 잘됐다 할 수 있을 만치 완전히 잘하는 것.
또 자기에게 대해서 완전히 잘하는 것, 또 이 세상 사물에 대해서 후회할 것이 없이 완전히 잘하는 것, 하나님에게 대해서 완전히 잘하는 것 심판 받을 것 하나도 없이 잘하는 것, 악령에게 대해서도 완전히 잘해서 그에게 정죄받을 것이 하나도 없고 송사받을 것이 하나도 없고 티끌이를 뜯을라 해야 뜯을 것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잘하는 이것은 간단 한데, 그 간단한 그 방편은 주님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내 마음을 주님과 말씀이 차지하도록 하는 요거 단순한 요거라.
주님이 내 마음을 다 차지하시고 이 진리가 내 마음을 다 차지해서 내가 진리를 내 마음에서 진리를 생각하고, 또 주님 생각하고 또 진리 생각하고. 진리 생각하는 것이 주님 생각하는 것이요 주님 생각하는 것이 진리 생각하는 것이요 이렇게 주님과 진리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그 일을 그만 중단을 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말이오. 왜? 주님만 생각하고 진리만 생각해서 진리가 이래하냐 저래하나, 또 주님이 어떠하나?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이렇게 둘만 생각하고 이래 하니까 하다보니까 자기 보기에, 자기 주관 해석에 자기 주관 해석에, 모든 인류들의 지혜로 하는 해석에 '얘, 네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 예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이래 있으니 벌써 지금 시기가지 내가고 있지 않느냐? 이 사실은 이 사실은 시기가 지내가고 있지 않느냐? 시기 놓치면 네가 다시는 안 되는 것인데 이 일이 낭파되지 않느냐? 그런데 네가 똑 미치괭이 모양으로 예수 믿는다고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그 둘만 사모하고 이렇게 하고 있으니 네 보다시피 이 일이 지금 오늘 몇 시가 지내가면 헛일인데 네가 어떻게 하려고 이와 같이 하고 있느냐? 또 그 사건도 그러하고, 그 물건으로 말하면 이 시간이 한 시간만 넘어가면 이거 다 못 쓰고 아무짝도 못 쓰게 베려 버리는데 어쩔라고 네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느냐? 또 이 사람과 관계는 네가 지금 시기 놓치면 다시는 안 되는 것인데 어쩔라고 등신같이, 네가 네가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아편이라 한다. 기독교는 아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예수에 미쳤다. 완전히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이렇게 하니 너 보다시피 봐라 인인관계가 벌써 이 시기가 놓쳐지지 않느냐? 사물관계가 시기가 놓쳐지지 않느냐? 이런데 네가 자꾸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있으면 어찌 되느냐?' 하는 거기에서 '내가 이 참 정신이 돌았는가 봐, 저 일을 내비두고서 곧 산벼락같은 것이 떨어질 일이요, 이제까지 하던 그 했던 일 이 모두 다 낭파가 되어지는 것인데 주님만 사모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준 말씀만 사모하고 이래 있고 그거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내가 이거 참 최면술에 걸린 것 모양으로 내가 이 종교라는 똑 종교가 내게 대해서 아편 같이 내가 고만 돼 버리고 말았네. 내가 너무 치우쳐서 이 광신이 되고 말았네.' 이래 가지고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돌아서서 주님과 진리만 사모하는 것을 모처럼 시작했다가 고만 옆에 환경에서 그런 일이 자기 보기에 과학 적으로 환하게 보여지기 때문에 이 일을 그만 두고서 그 연결을 끊고 옮겨지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수십 번 속았습니다. 수십 번 속았고 수백 번 속았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시기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래 해야 되겠다. 내가 과거에는 이번에는 내가 환경이 어떻게 된다 해도 내가 끝 장을 보겠다. 그래 봤자 뭐 망해 봤자 이미 찍해야 죽을 죽음이고, 또 망해 봤자 또 뭐 죽는 것밖에 더 되겠나 이러니까, 주님의 말씀에 그러니까 끝까지 믿어서 죽도록 믿어 보겠다'. 고만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고 그래 나가다가서 낭파가 돼서 박살이 되든지 말든지 끝나 봤자 죽음 밖에 더 있겠느냐?' 하고서 이렇게 나가는 사람들은 다 그 장벽을 뚫고 돌파해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 거기에를 못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럴 때에 자기와 세상은 그로 인해서 완전히 부인해 버리는게 돼 버리고 말았고, 거기에 대해서 세상과 자기는 완전히 부인했고 인류는 완전히 부인챘고 자기나 모든 사람이 지걸거리는 것도 다 부인했고 세상도 부인했고 주님만 믿는 자로 이렇게 옮겨졌으니 그것이 주님과 접선되고 주님이 그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실수 있도록 되는 것이라. 다 이런 경우를 초월해 가지고 이런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하나님의 초자연의 기적이 나타난 것이 기독자의 생애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게 최고의 교훈인데 이 교훈을 잘못하면 자기가 하나님과 진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예를 들면. 연결줄이 이백 가닥이 있는데 한 가닥 두 가닥 백 가닥 연결이 있는데 구십 아홉 가닥은 연결하지 안하고 한 가닥만 연결해 가지고서 그것으로 만사가 되리라고 이렇게 하다가 실패하면 마귀란 놈이 보고서 '봐라. 네가 이래 가지고서 이리 네가 전적 주님과 진리만 사모하지 안했느냐 그랬는데 실패하지 안했느냐?' 이라니까 그만 그 사람이 경험하고 체험해 보니까 과연 그렇다 해 가지고 실패해서, 마귀란 놈 요럴 때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없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연결하고 사모하고 둘을 사모해도 안 된 일 있으면은 그 면에 내가 연결되지 안한 그 면이 있어서 그렇지 주님이 나에게 약속한 그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나가면은 한 번 실패, 두 번 실패로서 거기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잇길 것이 잇길 때에 하나님은 그 전부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머리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몸이 돼 가지고서 역사할 수 있는 교회의 완성이라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에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강자가 주님 안에 거 하는 거와 약자가 강자 안에 거하는 것과 강자가 약자 안에 거하는 것이 다릅니다. 4 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약자요 주님은 강자이십니다. 우리는 약자요 주님은 지극히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약자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거하는 방편이 약자가 강자를 바라보고 약자가 강자를 의지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할 때에는 그 강자는 자기에게 힘을 두고는 그 약자를 절대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왜 젖먹이 어린 아이가 다 같이 자기 속에서 난 자식이지마는 큰 자식과 갓 낳은 어린 자식에 대해서 부모의 그 책임이 달라지는가 하면은 그 연약성 이 다르고 바라보는 것이 다르고 의지하는 것이 다르고 맡기는 것이 다르고 거기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이거 등신같이 당장 박살될 일이고 와도 주님은 튼튼히 주님 계시니까 된다, 주님만 바라보고 무슨 큰 일이 와도 이것도 모르고 주님만 든든히 의지하고 뭐 온다하니까 주님 의지하고 안심하고 있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저 주님이 일어서라 하면 일어서고 가라 하면 가고 앉으라 하면 앉고 주님에게 복종만 하고 전부이 다 맡기고 전부 다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만 하는 그를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도 독사와 사랑이 같은 악한 우라 죄인이라도 자기를 전적 바라보고 의지하고 자기만 믿고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기에게만 복종하는 그를 버릴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래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옥토에 뿌린 씨와 꼭 같은 이치입니다. 꼭 같은 말입니다. 또 강자가 약자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강자가 약자 안에 있을 수 있느냐? 강자가 약자 안에 있는 것은 약자의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지지 안하고는 견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자가 강자가 약자를 보고서 그 관계를 맺었는데 강자의 힘을 두고는 약자를 돕지 안할 수 없고 지혜자가 무지자를 상관해 가지고는 무지자를 그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산 자가 죽는 자를 보고는 살리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건설 행위 치료 행위, 건설 행위 치료 행위 모든 이 건설 행위와 치료 행위를. 하는 주님으로 우리 안에 계시게 됩니다. 우리는 약자이기 때문에, 또 우리가 주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를 책임지시고 안보하시는 주님으로 우리를 싸게 됩니다.
주님의 안보를 입는 이치가 우리가 그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겆을 맡겨놓고 순종하는 것이요. 그분은 우리보다 강자인데 강자인데 그분이 우리 안에 와서 계시도록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겨놓고 당신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이걸 당신이 해주십시오.' 당신을 바라고 의지하고 당신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구할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대한 것을 책임지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 있다 말입니까? 주님을 사모하라 말이요, 주님을 바라보라 말이요,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걸 맡겨놓고 그에게 복종하라 말입니다. 이 복종할 마음 주님을 든든히 믿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모든 걸 맡겨놓고 '나는 모릅니다. 당신에게 맡겨놨으니까 당신이 가라면 갈 것이고 앉으라면 앉을 것이고 서라면 설 것이고 모든 걸 맡겨 놨으니까 그저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힘이 있는 대로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나는 하겠습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맡겨놓고 순종하는 요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오.
주님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이말은 우리가 우리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말미암아 그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을 주관하도록 내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내 마음은 주님의 말씀만 사모하니까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만 사모하니까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리 되면 무슨 큰 변화의 작용이 있느냐? 내가 주 안애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산에 있게 되면 이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지면 이 두 가지 이루어진 그 결과에서 무슨 큰 작용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무슨 작용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 변화 일어난 그 변화를 여기에 말씀을 했습니다. 원 하는 대로 구하라,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그러면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니까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살인을 원해도 그 일이 다 이루어지고 천하 사람 다 죽더라도 저만 잘 살라 해도 그 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그 말씀은 네 소원이 내 소원과 꼭 하나가 된다. 네 소원 네 소원. 네 모든 비판과 평가와 경영과 네 속에 네 마음의 움직임이 네 마음의 움직임이 네 마음의 움직임과 진리의 움직임과 꼭 진리와 하나님과 동행이니까 이 셋이 합해서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셋이 합해서 함께 움직이는 그 마음이니 천하가 대적해도 그거는 안 이루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이루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뜻. 그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에게 소원으로 두시고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 소원이 되게 하셔 가지고서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만 사모하고 주의 진리만 사모하면은 이 현실에 당면한 내 이 모든 책임이나 의무나. 그 내 형편이나 내 사회나 내가 정이나 내 국가나 내 모든 의무나 책임이나 이 일은 낭파가 돼 가는데 어떻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걸 다 주께 맡겨 둬라, 염화하직 말아라. 주님이 너 보기에 낭파가 다 돼 가는데 주님만 사모하다가 낭파가 돼도 낭파 낭파 우낭파가 돼도 그것을 재건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분이시기 때문에 홍해 바다를 건너가라 하신 것이다. 홍해 바다를 건너가라는 것이다.
그만 사모하고 이라면 사람 보기에는 낭파가 돼도 당신이 낭파된 것을 얼마든지 재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그분을 든든히 믿고 낭파가 되든지 말든지 그대로 두고서 주님만 사모하고 요거만 옮기지 말라. 모든 유혹이 와도 옮기지 말고 주님 사모와 진리 사모 요것만 하고 가지고 계속하면 네 의사와 하나님 의사가 동일 의사가 되고 동일 소원이 되고 동일 계획이 되고 동일 모든 소욕이 되고 동일 취미가 되고 동일 모든 경영이 되어지기 때문에 그는 만의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안할 수가 없고 완전히 완성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렇게 참 주님과 주님의 진리만 사모하고 내 마음을 주님과 진리가 다 차지하도록 그라면은 내 마음이 이 사회에 사물에 대해서 할 일이 복잡한데. 내 마음이 가서 일을 해야 되고 내 마음이 일을 해야 되고 그 뒤를 따라서 내 몸이 가서 일을 해야 되는데 여기에 다 바쳐 버리면 그거 낭파되라고, 이래 가지고 우리가 다 실패했던 것입니다. 모든, 염려 다 주께 맡겨 놓고 주님과 진리의 말씀만 사모하게 되면 내가 당신과 동행하는 변화가 되어져서 당신이 낭파되지 않도록 다 하시고 성공하도록 다 하시고 모든 것이 만물에 대해서도 완전 성공. 인류에 대해서도 완전 성공, 자기에게 대해서도 완전 성공,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완전 성공, 마귀에 대해서도 완전 성공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있느니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요것을 굳게 잡고 언제나 현실이 당할 때에 모든 것은 시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운동장의 시험을 그만 잊어 버렸습니다. 백목사가 자고 있는 통에 그만 시험을 그만 졌습니다. 그 지난 주간부터 시험인 줄 알고 이 시험이니까 이 시험에 여러분들 낙제할라요 합격을 할라요? 합격과 낙제에서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입을 수 있게, 입자 못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제 낙제냐 성공이냐? 무엇을 하려느냐? 손을 들라고 하면 다 합격을 원하고 낙제 원하는 사람 하나도 없을 거요. 학생들 머리에는 낙제와 성공 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말했으면 그 학생들이 용감스럽게 '오늘 나 낙제 안할란다. 낙제 안하고 합격해 가지고 나는 성공할란다.' 이랬을 터인데 미련케 오늘 아침에 미련한 인본의 설교를 하니까 하나님이 여기를 부르켜서 이렇게 부어올랐다가서 그것을 깨닫고 회개를 하니까 이제 설교할 때에 조금 낫기는 나았습니다.
제가 마음을 하나님에게 바치지 안하고 내 마음을 당신에게 바쳐야, 당신이 내 마음을 주관하지 안하니까 내 마음에 그런 지혜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올 수가 없는데 일을 다 저지르고 놓고 난 다음에는 후회하는 회고적 영감을 받았다. 회고적 영감을 받으니까 미래의 영감을 필요하지 현실 영감도 놀래게 하는 것 회고 영감은 후회뿐인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회고적 영감을 받고 보니까 내가 미련했다 그런 몹쓸 설교를 하고 외나 방비할 전투를 하지 안했다 이것을 깨닫고 나씨 이 부르키고 난 다음에 깨달았어.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이 부르킨 것도 예정이요. 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을 위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어짜든지 우리는 이 중점을 어데 두느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한다.
이를 중히 여기나 저를 경히 여기나 이를 사랑하나 저를 미워하느니라' 고렇게 말씀하신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이 되어지고, 우리가 주님과 진리만 사모하면 이 일 다 어떻게 하려고 염려하지 말고 맡깁시다.
그것을 그런 낭파가 당해도 낭파될 줄도 모르고 죽을 줄도 모르고 당신에게 맡기는 데에 당신은 오지 안할 수가 없어. 그 낭파가 큰 낭파 될 일 그것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 시키는 대로만 꾸뻑꾸뻑하는 그 자에게는 당신이 책임을 안 질 수가 없어. 그것이 당신이 와서 책임을 지도록 강하게 역사하는 유일의 법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약자가 강하신 하나님에게 달라붙어서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게 하시는 그 법칙은 이것이요. 이 네 가지 바라보고 의지하고 맡기고 순종하는 이것은 전능자지마는 꼼짝 못하게 나를 책임지도록 딱 등어리다가 짊어져서 맡기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