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연결

 

1984. 9. 29. 토새

 

본문: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지난밤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사람은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그렇게 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서 그대로 잘 된 것을 가리켜서 의로 그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를 보내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고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하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서 하나님의 그 목적과 소원과 경영을  다 고대로 온전히 이루었다 하는고 예수님의 대속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다 심판이 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공심관이 있어서 공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것을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그 사람  모든 생활을 답니다. 생활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벌써 심판을 다 이긴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가 이긴 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겼습니다. 이러니까 지옥 가고 뭐 하는 그런 심판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 천국을 가기로 벌써 심판에서 결정 된 사람이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심판 받을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의 원인은 예수님의 대속을 잘 간직했나 안 간직했나 하는 그것을 심사하는  심판이 그리스도의 심판이요,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잘 감당해서 우리의  원형이 되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모형을 바로 가졌나, 선지자의 모형을 바로  가졌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그 모형을 바로 네가 입었느냐, 예수님의  것을 입었느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그걸 심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16장 10절에 말씀하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옳다고  이래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는 상을 받을 가치 있는 일은 뭐이냐?  의인데, 의를 행했으면 그 의는 멸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들이 다  불타서 없어지지마는 우리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간다하는 그  말씀은, 의는 다 심판에서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심판의 의는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거 외에는 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뭐 양심 시대니 자유 시대니 이래 가지고서, 그때는  예수님의 이 도리를 일반인들이 몰랐기 때문에 '그때는 양심 심판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조작배기 말이지, 양심 심판에서, 사람이 양심대로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법칙에 하나도 어긋나거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않고는 구원  받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공심판을 다 승리하고 공심판에서 의인이라  인정을 받아 가지고 다 지옥 가는 그런 정죄나 저주나 그런 것을 받지 않게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판단해 가지고 '너는 이거는 의다' 이래 가지고  의로 정해서, 그때의 의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결정 된 그 의, 의로 인정하는  그 의는 지옥 가지 않는 그런 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의는 지옥  가고 뭐 천국 가고 하는 그런, 지옥을 가지 않는 그 의가 아니고 천국 가는 그런  의가 아니고, 이 그리스도의 심판은 하늘나라에서 '너는 옳으니까 상을 받아라'  하는 그런 상을 주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주고, 또 그렇게 되지 안한 사람은  영광이 없어지고 또 구원도 그렇게 수치스러운 구원이 되어지는 그런 것을  다루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에는 심판해서 가치로 인정하는 것과 공심판에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아주 다릅니다. 공심판에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법에, 지공 지성법에 걸리지 안하고 지공 지성법에서 정죄 받지  아니하는 그것을 가치로 그렇게 인정을 하지마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서는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는 것 아니오.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상  받을 것이 뭐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이렇지 뭐. 그 법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이 구속 받은 자로서 사람이나  행위나 그것을 하늘나라에 가서 상으로 주고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주는 그  영광과 상을 받는 그 가치 있는 생활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의라  그렇게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의라는 것은 그것은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수  있는 그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는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읕 수 있다, 영광을 받을 수 있다,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네가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누리고 상 받고 칭찬 받고 영광 받고  모든 만물들이 다 환영하고 하는 그 가치 있는 것을 따져서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심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가치로 여기는 그  가치와 공심판에서 가치로 여기는 가치가 다릅니다. 공심판에 가치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 걸리지 않는 것을 가치로 여기지마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가치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  하는 그걸 가지고서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암만 거기에 지성 지공법에 걸리는  것이라도 가치로 여길 수도 있고 걸리지 안 하는 것도 가치로 여기지 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평가하는 것과 공심판에서  평가하는 그 가치로 여기는 것이 가치 평가가 아주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참 의다 이렇게 하는 것과 공심판에서 의다 하는 것이 아주 다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의다 이렇게 의로 인정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서 판단해 봐 가지고 이거는 참 의다 이거는 불의다  그렇게 그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을 가지고서 판단법을 삼은 것이  아니고, 요거 좀 아마 좀 잘못하면 미끄러져 그만 그냥 나갑니다. 아니고, 다만  그 사람이 충성을 했나 안 했나 그 충성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공 지성법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충성 가지고서 평가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거에도 불의하다고 말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충한 사람은 지극히 큰  것에도 불충하다, 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되다고 말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거기에  충성을, 충성을 의로 그렇게 정했습니다. 충성을 의로 정했고 불충을 불의로  정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충이나 불의나 또 의나 충성이나 꼭 같은 말로  여기에 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로 정할 때에 그  정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그 가치와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만일 사람이 열 명이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았으면 그 심판받은 것이 그 사람의 행위로  보면 제일 많이 한 사람이 있어서 그 행위로만 가지고서 이와 같이 평가한다면,  그 편가의 행위를 단다고 이렇게 하면 일 호가 한 열 근쯤 되고 이호는 한 아홉  근 되고 십호는 한 근쯤 된다 이렇게 중량이 그리 됩니다. 중량이 그리 되는데,  하나님이 심판을 떡 내려서 인정해서 판정하는 것은 마지막에 한 근 된 자를  일등으로 삼고 열 근 된 자를 마지막에 열등으로 삼을 수가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공평되지 않다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이 사람은 열  냥쭝을 해도 십 등을 주시고, 한 냥쭝 해도 일등을 주시고 이러니까 그 사람  행위 가지고 많다 적다, 크다, 많다 적다 크다 작다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이  그리스도의 심판에는 이것이 좀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게 보면 충성은. 인간에게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과 같이 그것을 평가해 가지고서고 완전무결한 고걸 가지고서 가치를 삼는  것이 아니고 고 사람의 충성을 가지고서 가치로 삼는 것이라 말이오. 그리스도가  심판을 다 이겼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함을 받은 자 속에서 하나님이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가 자유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 다루기를 그 사람이 해 놓은 그  일의, 해 놓은 일의 그 옳고 바르고 참되고 가치 있는 그것으로써 가치를 삼아서  따지지 안하고 그 사람이 충성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그것으로 가지고서 가치를  따집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이 생각할 때에 자기는 참 옆의 사람과 비교하면은 그  사람에게 비해서, 그 사람이야 뭐 새벽 기도 뭐 날마다 나가고, 또 뭘 애쓰고  이런다고 해도 그 모든 도덕면 그 신덕면의 행위라든지 경제면의 행위라든지 뭐  이런 면 저런 면 모든 면을 따져 보면 늘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떠들어  쌓고 애를 써 쌓는 그것도 보면 몰라서 그렇게도 하고 뭐 사회성이나 윤리성이나  도덕성이나 신앙성이나 그게 다 무식한 신앙이기 때문에 아주 보잘 것이 없다  말이오. 보잘 것이 없는데 자기는 슬슬 놀면서 이렇게 자기 볼일 다 보고 모든  걸 다 그래 하고도 하는 행위가 그 사람 행위와 내 행위와 중량을 단다고 하면은  그 사람 행위보다는 내 행위가 훨씬 낫고, 그 사람 행위를 은이라고 말하면 내  행위는 금쯤 되겠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일했다 말이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딱 하나님이 심판해서 판정을 내리는 걸 보니까 영  다르다 그거요. 보니까 아주 사람 보기에 허무한 그것을 아주 높은 가치로 두고,  사람보기에 이거는 높으다고 하는 그 가치를 허무하게 돌려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이 하나님의 공심판과 그 판정하는 법칙이  다르다, 그것을 뭣을 가치로 삼느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지공 지성법에  걸리지 않는 것을 가치로 삼고 지공 지성법에 딱 들어맞는 것을 가치로 삼는데,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고, 그 사람 이 충성을 많이 했나  적게 했나 그것을 가지고서 가치를 따진다. 이라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모든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자연 은총이라든지 신령한 은혜라든지 모든  선천적이나 후천적의 그 자연 은혜라든지 또 신령한 은혜라든지 그런 거 많이  받은 사람 그 사람이 속기 쉽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내가 이만하면 됐다  하고서 참 암만 따져 봐도 그 사람보다는 모든 면이 내가 낫고 이랬는데 나중에  가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서 딱 보니까 오히려 자기가 허무하게 여겼던 그  사람의, 그,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큰 상을 주시고, 또 사람들  보기에 아주 위대하다 하는 그 사람은 아주 허무한 대우를 그렇게 하더라  그거요.

 그것은 왜 그러냐? 비유에, 만일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닷 냥쭝을 받은 사람이  있고 두 냥쭝 받은 사람이 있고 한 냥쭝 받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비교해 보니까 닷 냥쭝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만히 놀고 본전만  가지고 있어도 닷 냥쭝인데 두 냥쭝 받은 사람은 죽자 껏 해 봤자 그것이 넉  냥쭝밖에 안 되니까, 넉 냥쭝밖에 안 되니 넉 냥쭝과 닷 냥쭝과 비교하면은  중량이 얼마나 큽니까? 이러니까 닷 냥쭝 가진 사람은 '아, 내야 뭐, 너희  죽자껏 애써 봤자 네야 넉 냥쭝밖에 안 되는데 나는 닷 냥쭝이라' 그라니까  자기는 안심하고 교만할 수 있고, 또 한 냥쭝 가진 사람보고는 더 그렇겠고,  이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심판하는 것 보니까 자본 준 걸 다 빼 버립니다.

자본 준 것을 다 빼고, 닷 냥쭝 준 자는 닷 냥쭝 자본을 다 이제 빼고, 두 냥쭝  준 자는 두 냥쭝 자본을 다 빼고, 한 냥쭝 준 자는 한 냥쭝 준 자본을 다 떼고  나서 남는 게 얼마인가 보니까 닷 냥쭝 받은 사람 남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하나도 없다 말이오. 하나도 없고, 자본을, 당신이 은혜 주신 은혜를 그것을  떼 놓고, 자본 준 것을 떼 놓고 보니까 남는 게 하나도 없어. 이 한 냥쭝 받은  자는 죽자껏 애를 써고 써도 두 냥 쭝밖에 안 되니까, 죽자껏 애를 써도 두 냥쭝  밖에 안 되니까 항상 두 냥 쭝 가진 사람에게, 죽자껏 애쓰나 그 사람 애 안  쓰나 같고 닷 냥쭝 받은 사람과 비교하면은 그 사람은 석 냥쭝이 더 많고  이라니까 죽자껏 애써 봤자 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이랬는데, 자본을 뚝, 몰라서  모두 다, 그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전부 다 제 힘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제  힘인 줄 알았는데 자본 주신 분이 자본을 '너는 내가 자본을 얼마 줬으니까'  내가 은총 준 게 얼마이니까 은총 준 거 그걸 삭감하고 그걸 뚝 떼 놓고 자기가  해 놓은 일을 그 가치를 따지고 보니까 닷 냥쭝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 냥쭝 가진 사람도 하나도 없고 한 냥쭝 가진 사람은 두 냥, 죽도록 해야 두  냥쭝밖에 안 됐는데 그 사람은 한 냥쭝이 남았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라.

심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내나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그 은혜가 많이  받은 사람도 있고 적게 받은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재간에 따라서  많이 준 사람 적게 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제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아야 그  남는 것이 있을 것이고, 적게 받은 사람은 또 조그매만 더 있어도 적게 받은  것보다 많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의 의로 그렇게 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을 사람이냐? 하나님  앞에 받은 바의 그 은혜에 대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닷 냥쭝 받은 사람은 닷 냥쭝  다 가지고 움직이겠고 두 냥쭝 받은 사람은 두 냥쭝 다 가지고 움직였으니,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줬던지 적게 주셨던지 은혜 주신 그것을 다  가지고 충성한 그것이라야 하늘나라에는 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목회를 하는데 교인들이 숫자가 많고 이러니까 '나는 목회를  잘했으니 상을 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힘을 써서 목회를 해도 교인이 몇 사람  되지 안하고 이러니까 참 죽자껏 충성해 봤자 목회한 그 결과에 교인들도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자기는 상급이 적으리라 또 저 사람은 상급이 많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그 결과에 교인 수가 많고 적은 거 교인들이 잘 믿고 못 믿는  거 그것 가지고서 가치를 따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찾고 자본을 찾고 나머지기가. 제 모가치로 제가 만든 게 얼마나 되느냐 이렇게  따져 보니까 나중에 가서 보니 아주 큰 목회를 한 사람이 참 아주 자기 몸이  없는 허무한 사람도 있고, 아주 사람 보기에는 허무한 목회를 한 사람이 아주 큰  상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사람은 겉으머리 나타난 그 결과를 보고서 말을 하지마는  하나님은 그 결과를 가지고서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지 안하고 당신이 주신  자본을 가지고서 따지기 때문에 아주 큰 결과가 맺었지마는 자본 준 것을 빼  버리고 나니까 하나도 없는 사람 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타난 결과를 참고로 삼기는 삼지마는 내가 하늘나라에  가 가자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칭찬을 받겠느냐 책망을 받겠느냐, 부끄러움을  받겠느냐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겠느냐 모든 사람에게 천대를 받게 되겠느냐  하는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압니다. 자기 가 잘 아니,  왜 자기가 잘 아는가? 사람들은 나타난 그 결과만 보고서 말하지마는 내용은  모른다 말이오. 내용은 자기가 어떻게 한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자기에게 대해서 껍데기 나타나는 그런 것만 보지 속에 자기가  충성했는지 불충했는지 그 내용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걸 잘  모른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나타난 그 결과 가지고서 안심하지 말고, 참  자기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이 모든 것을  다해서 충성했느냐, 이 모든 것을 다해서 충성했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뭐  그렇게 다하지 안하고 그렇게 슬슬 놀면서 하면서도 그렇게 좋은 결과가  맺어졌는지 그거는 자기가 알 것이라 그 말이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이거 내가 뭐 서부 교회 목회를 하는 것을 이거 내가  그렇게 충성한 것도 아니고 또 성경 연구를 하는 데에 그렇게 충성한 것도  아닌데 진리를 깨닫는 것이나 또 목회에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나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아는데, 내가. 다른 사람이 날 모르는, 내가 내 모든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나만 아는 내 진짜 내 속을 아는데 내가 아무런 그렇게  충성이 없었는데 이래 됐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서 상이 이대로 되리라  그렇게는 저를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 것이 벌써 하나님의 공심판과 달라서 그리스도  심판에서는 나타난 결과보다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 주신 그 은혜의 양과  비교를 해서 그 사람의 그 속의, 내용의 충성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 부흥 안 돼도 충성만 했으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 상이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아주 나타나는 것은 없는데 상이 있으니까 그 사람 자꾸  상 받을 사람이 되겠고. 한 일은 없이, 충성 하지는 안하고 불충했는데 자꾸  결과는 좋아지고 하는 사람은 이게 제가 해서 그리 된 줄 알고 교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 보면 참 놀래고 허무할 것이오. 그래서 그걸 이 병규  목사님이 여기 와서 집회할 때에 말하기를 '부흥사는 가보니까 개털 모자가 제  면류관이고, 자기 앞에서 기도하는 그 할머니의 면류관이 금면류관이더라' 그래  그런 말을, 그거 비유지요. 그렇게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충성을 가지고 따진다.

그리스도의 심판에는 충성 가지고 따지고, 그 결과의 일이 뭐 잘되고 크게 되는  그것 가지고 따지지 안하고 충성 가지고 따진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결과  가지고 따진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결과 가지고 따지고 그리스도의 심판에는  충성 가지고 따진다 왜? 그리스도의 심판에는 하나님께서 자본 준 것이 있고,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꼭 같은 자본을 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본  찾는 것이 없고 그저 공평만 가지고서 이렇게 따지기 때문에 그 공평에 합격될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합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나 합격 될까 그  외에는 합격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것에 돼 가지고서 우리가 잘못하면 탈선되기 쉽다 그 말이오.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것을 가치적으로 작은 것이라 그렇게 우리는 따질 수도  없습니다. 또 그 일에 대해서 아주 힘들고 쉬운 일이라 그런 걸 가지 고만  정의를 내도 또 안되겠습니다. 왜? 가치는 아주 보기에 지극히 작은 가치 있는  그 일이 나중에 가서 이용될 때 보니까, 이용될 때 보니까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이용 가치가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 큰 이용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그 말이오. 그 이용 가치가, 앞으로 이것이 이용 가치가 클는지  적을는지 그거는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걸 따져 가지고 큰 거  작은걸 정의를 낼라 하다가는 안 되겠다 그 말이오. 또 쉬운 일 어려운 일 그거  가지고서 가치를 따져서 쉬운 일은 작은 일이라 아주 어려운 일은 큰일이라  그렇게 또 따져도 안 되겠다 그거요. 그거는 왜? 어렵고 쉬운 일이 어떤게  어렵고 쉬운 일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안다는 것은 범위가 너무 좁기  때문에 고 범위에서는 쉽다 하지마는 그 밖에 넓은 범위를 보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렵고 쉬운 것으로써 크다 작다  이렇게 따지지도 못하고 이용 가치가 크다 작다 그렇게 따지지도 못하고 이래서,  작은 것은 자기의 평상시의 모든 평상시의 일이요, 지극히 큰일은 비상시  과도기 아주 절정기의 그때의 일이라. 그러면, 평상시의 생활을 자기가 바로  했으면 아주 비상시 최고 절정의 그 어려움의 일도 잘 통과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정의를 내려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축소하고 축소해 가지고서  우리는 말하기를 그 현실에 모든 것이 달렸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만 꼬박꼬박,  고 현실만 꼬박꼬박 충성하면은 어떠한 역경과 환난과 절정의 일을 닥쳐도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말하기를 몇 천 미터 산을 올라가는데 그저 한  자욱씩 걸어 올라가면 내나 밑에서도 한 자욱 올라가면 됐고 만당 최고 절정에  올라갈 때에도 한 자욱만 똑 떼 놓으면 절정에 올라가게 된다. 그런 걸로, 차차  밟아 올라가는 것을 그런 것으로도 비유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그러면, 지극히 작다는 요것을  고 정의를 내릴 때에 지극히 작은 것은 어떤 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냐? 다른 말  요러면 고만 혼잡이 돼 가지고 안 돼 버려. 혼잡이 돼서 뭐인지 복잡해져 가지고  시험에 들기 쉽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일만 잘하면 지극히 큰일도  잘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일만 승리하면 지극히 큰일도 승리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지극히 큰일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요것을 우리가 다른 복잡한 걸로 생각지 말고,  지극히 작은 일은 날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평소, 이 평소  평상시에 이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이 요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요, 지극히 큰  것은 평상시가 아니고 비상시, 평상에는 없는 가끔 가다 있는 비상한 일, 아주  또 아주 과도기의 일, 다급한 일, 어떤 아주 극단에 이르는 일, 아주 절정의 일  그런 것을 가리켜서 큰일이라고 했다 요렇게 정의를 가지고서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는 요것으로 우리가 정의를 가지고 힘 써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 보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적은  능력 가지고도' '적은 능력 가지고도' 하는 거 보면, '적은 능력 가지고도'  '적은 능력 가지고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적은, 적은 힘을 가지고 이렇게 했다. '적은 힘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했다' 요 말과 '적은 힘을 가지고도' 하는 것과 같습니까?  어떻습니까? 예? 그 말이 어때요? 능력이라 말은 힘이라 말인데. '적은 능력을  가지고 네가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했다' 그말과 '적은 힘을  가지고도' 하는 요말과 어떻습니까?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주 다릅니다. 그거는  아주 참, 그 '적은 힘을 가지고도' 그 말은 '가지고도' 요거 붙인 것은고 힘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건데, 고 힘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아주 보잘  것 없는 고 힘 가지고서 네가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했다 하는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요것이 적은 힘 가지고도 그리 했으니까, 적은 힘 가진 그것이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 이러니까, 적은 힘 가지고 네가 했기 때문에 네가 요  사상과 요 주의를 가지고 네게 있는 힘을 가지고 평상시의 네 신앙 행위를  그것을 물샐틈 없이 하려고, 평상시 신앙생활, 네가 할 수 있는 그 평상시 생활,  아주 적은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아주 어렵지 안하고 적은 힘으로도 할 수  있는고 일을 네가 게을 부리지 안하고 네가 방종하지 안하고 네가 예사롭게  생각지 안하고 고 주님과 맺은 일이 있기 때문에 고 일을 생각해서 네가 지극히  작은 요 평상시의 일을 네가 정성을 들이고 힘을 써서 실수하지 안하도록,  평상시의 이 일을 네가 실수 없이 이와 같이 하는 고 신앙 주의를 가졌기  때문에, 네가 고 주의를 가졌기 때문에, 적은 능력 가지고서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하는고 주의를 네가 고 신앙 사상은 가지고 신앙하고 고 주의  가지고서 네가 신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 신앙 주의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뭐인가?  하나님 하시는 일은 '열린 문 둔다.' 열린 문 둔다. 고 신앙 주의, 고 신앙주의  고 신앙 사상 고 신앙 주의를 가지고서 고 신앙 행위 하는 그에게 열린 문을  둔다. 이러니까, 열린 문을 두니, 형통한 문이라 말인데. 고 형통한 그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아무도 문을 닫지 못한다고 말도, 아무도 문을 닫지  못한다. 형통을 줬기 때문에 고 형통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요것도 또  따지는 말입니다. 보면.

 이러니까 평소의 신앙생활을 그것을 주님을 생각하고 요렇게 충성 되게 한,  힘들여서 빈틈없이 그렇게 한 사람, 아주 고거는 뭐하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고 일을 네게 힘 있는 대로 그것을 바로  하고 흠 없게 하려고서 애를 쓰는 고 사상 고 주의 가지고 하는 네 신앙 사상 네  신앙 주의 거기에 내가 형통의 문을 열어준다. 형통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형통케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지극히 적은 힘을 가지고서  일하는 고 평상시의 신앙생활을 흠 없이 하려고 하는 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열린 문을 주시고,  그러면, 평상시는 무시하고서 또 어떤 과도기나 그런 어려운 때만 힘을 바짝  바짝 써서 그 일을 잘 추 내는 그런 사람에게는 요 원리대로 말을 한다면 그때는  주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는, 평상시에 자기는 조심해서 힘을 쓰는 사람에게 열린  문을 줬으니까 이제 평상시는 무시하고서 아주 과도기나 비상시나 그럴 때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일하는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무슨 문을 준다고  하겠습니까? 저 ○목사, ○목사, 무슨 문을 주겠어? 예? 뭐라 하노? ○○○  목사, 좀 말해 봐. 예? 아, 불통이라 그랬어? 와, 그라면, 그라면 인제  백점이라, 오늘 내가 보고 그것 틀렸으면 한번 코가 납작하게 한번 좀 꺾어 줄라  했더니마는. 듣는데 보니까 정성들여서 예배를 드리지 안해. 마음은 어만데다가  두고.

 그래. 이러니까 제딴에는 생각할 건데, 하나님께서 평상시에 조심하는  사람에게는 형통의 문을 주시고, 평상시는 거석하고 뭐 무슨 큰일이나  굵닥굵닥한 일 있으면 그때만 바짝 바짝 힘을 쓰는 그 사람에게는 이제 불통의  문을 준다 말이오. 불통의 문을 줘. 불통의 문을 줘. 불통의 문을 주니까,  그러니까 꾀부리는 사람, 꾀 부리는 사람 교만한 사람 실력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불통의 문을 주기 때문에 전부 멸망입니다.

 그러니까, 왜정 말년 때 그때 전국 장로교 총회를, 그때는 갈라지지도 안한  때인데, 총회 하는 것 보니까 아주 잘난 사람, 머리가 굵닥굵닥 하고 배짱 있는  사람이오. 그때도 보니까 말을 하는데 뭐 얼굴이 다 철면피라. 쇠바닥이라.

어떻게 마음이 뚝뚝한지 암만 대포를 놔도 안 뚫고 들어갈 것 같아. 어떻게  마음이 강퍅하고 완고하고 쎄워 대는데는 어림도 없어.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전부 신사 참배 다 졌다 말이오. 뭐 그런 사람들 고함을 지르고 위협을 놓고  호통을 하는 데는 아마 교인들이 쩔쩔 맬 것이고, 그때 승리한 하나님의 종들은  뭐 그런 데 비하면은 그까짓 한 냥쭝도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패전했어요.

 이러니까, 평상시에 이렇게 적은 힘 가지고 할 수 있는 고 평상시 생활을  그것을 발발 떨면서 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형통의 문을 주시고, 또  '평상시 그까짓 거야 뭐 하나 안 하나 굵닥 굵닥한 큰 것만 하면 되지' 하고서  그런 것만 힘을 쓰는 사람은 불통의 문을 줬어. 나는 ○목사님이 불통이라는  말을 형통이라는 말인줄 알고 정반대 말을 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좀 혼을  낼라했는데. 여기 물어보니까 여기는 다 대답을 옳게 했어. 그랬더니만 그  옆에서. 나 잘못 들었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해. 나는 형통의 문이라 하는  줄 알았는데 불통의 문이라 했으면 됐어.

 그러니까, 다 그런 사람들은 다 패전을 했다 그 말이오. 그게, 동양에서는 그런  말 있어. '군자는, 아주 대인은 큰 것만 받고 적은 거는 받지 안 하고, 소인은  적은 것만 받고 큰 거는 받지 않는다.' 이걸 그 사람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무슨 가치를 두고서 그렇게 증서에 말한 것인지 몰라도 그만 사람은  굵닥굵닥한 거 큰 거 몇 가지만 하면 되지 지저분한 거 그런 거 뭐 할 게 뭐  있는가? 그런 것이 유교의 사상입니다. 굵닥굵닥한 큰 것만 하면 되지 작은 거  그런 지저분한, 그런 거 하는 것이 뭐 그것이 옳은가 그렇게 잘못 유교의 사상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우리가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꼭 우리는 모든 승리가 평상시의  지극히 작은 데 거기에 있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네가 내 계속의 말을 지켰은즉,  계속의 말을 지켰은즉, 평소에, 뭐 그 과도기야 뜨문 뜨문하이 있지, 비상시나  그런, 가끔 가다가 있는 걸 비상시 있는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과도기는 또  어째 아주 다급한 때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평상시라 말은 평소라 말이지. 이  평소에 네가 내 말을 계속 지켰기 때문에, 내 인내의 말 지켰는고로, 계속하는  내 말을 지켰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은 평소 신앙생활을 해야 그게 계속이 되지  평소 신앙생활을 빼 버리고 나면 계속이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을  빼 버리면 없는 거와 마찬가지라.

 이러니까, 그 평소에, 평상시에 신앙 지키는 그걸 네가 했은즉 내가 모든  어려운 절정의 일들을 다 너희에게 면하게 하겠다, 그걸 다 통과하게 하겠다.

그걸 매를 맞고 통과하는 것도 있고 감옥에 갇히고 통과하는 것도 있고 매도  맞도 안하고 감옥에 갇히지도 안하고 아무런 그런 어려움도 없이 쓱 통과하는  일이 있다 말이오. 그러면 그 통과가 제일 좋아. 그 통과가 제일 실력 있는  통과라.

 실력 있는 통과인데, 그런 것을 가리켜서, 준비를 할 때에 평상시 준비 하고  과도기로 뭉텅뭉텅 굵닥굵닥한 것만 준비하는 그런 준비하는 그 준비를 장생골에  가 가지고서 우리가 공부를 했는데, 평상시 준비하는 것을 가리켜서 무슨  식이라고 했습니까? 예? 진합태산, 티끌모아 태산되는 것. 평상시의 생활  지저분한 거 그것 잘했는데 그것이 들어서, 그게 보스러기 십자가인데, 보스러기  십자가, 조금만 마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조금만 마음 가지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요 아주 뭐 사소한 일, 평상시의 일 요거 잘해서 조심했는데 그것이,  평상시 주의했으니까 주의한 그 주의 한다고 해 봤자, 하루 주의해 봤자 찍해야  콩알만치도 안 된다 그 말이오. 콩 알만치도 안 되지마는 하루 준비한 거 일주일  준비하니까 콩알 일곱 개가 됐어. 일 년을 준비하니까, 삼백 육십 뭐 오일이가?  삼백 예순 다섯 개가 됐지, 콩알 삼백 예순 다섯 개니 많이 모였지, 십년을  준비해, 오십 년을 준비해, 준비해 놓으니까 굉장히 많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신앙생활에는 티끌 모아 태산 되는 이방편을 가진 사람들은 다 승리하고 그렇지  안한 사람들은 다 승리 못한다.

 이러니까 우리가 매일 삼십 분씩 기도하자 하는 그 기도도 삼십 분 기도라고  보잘 것 없지마는 그것도 하루 모이면 하루면 삼십 분, 이틀이면 한 시간,  이틀이면 두 달이면 한 달, 일 년이면 반년 이렇게 자꾸 되니까 얼마나 그게  많이 됩니까?  이러니까, 그것을 네가 가졌기 때문에 내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당할 그 큰  환난의 때를 너는 아무 어려움 없이 쏙 통과하게 하겠다. 모든 사람이 그때 막  있는 힘을, 생명을 다 내놔도 이기지 못하고 뭐 두드려 맞고 야단 지기고 이렇게  해도 이기지 못하는데 너는 아무 일도 없이 걱정도 하나도 없이 슬렁하이 이렇게  지나가도록 이렇게 하겠다. 또 인민군하고도 싸우느라고 마구 생명을 내 대야  되고 이렇게 어려운데 인민군 앞에서 어떻게 한다 해도 아무 그런 문제가 없이,  뭐 그들이 어디 예배당 안 내 줄라 하니까 야단을 치고 이라는데도 '예배당 못  내 준다' 이래도 아무 말이 없지, 형통하지, 이럴 수 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6·25때에 그랬어요. 예배당에 풍금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와 가지고 예배당  문이 열려 있으니까 그만 와서 풍금을 타 버렸어요. 풍금을 타서 가 가지고서  '풍금 타지 말라 해라. 와 하나님의 제단의 성구를, 거룩한 도구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타지 말라 해라.' 타지 말라 하니까 그만. 그만 중단하고,  인민군이 와서 타다가 그만 중단해. 그라면 뭐 풍금 까짓 거 때려 부숴도 그만일  거라. 이리니 전라도서는 전부 팍 점령 다하고 그 사람들 마음대로 했다 그  말이오. 이런데 거창서는 와 가지고 타지 말라 하니까 못 탔다 말이오. 그래  내가 또 타지 말라 하고 크거 내 두면 와서 또 종종 탈 터이니까 '가서 부숴라'  전부 풍금을 다 해체 다 했어요. 풍금을 다 해체를 다 해서 다 나사 뚫어 가지고  다 똥 똥 개서 딱 재어서 딱 쌓아 놓고, 타지 못하게. 혹 우리가 없을 때 타는  날이면은 또 우리 제단에 더러워지겠으니까 풍금을 전부 해체를 해서 그래라  이랬다 말이오.

 '우리가,' 지금 인민군들이 이렇게 와 가지고서 잘 데가 없으니까 '예배당에 좀  누워 자겠다.' 아무데 예배당에 자꾸 잔다고 이래 말해. '안 된다' 안 된다고  거절했다 말이오. 거절해도 그 사람들이 잘 순종 잘해요. 거절하면 잘 안  되는데, 다른 데서는 생명을 내놓고 거절해도 안 됐더라 그 말이오.

 그걸 그때 나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적은 능력 가지고 지켰기 때문에  그때 그랬는데 지금은 그때 요량하면 거창 있을 때보다 내가 어북 뭐 진리도 더  깨닫고 큰 능력인데 큰 능력을 가지고도 지금 자꾸 지키지 안하고 이래 놓으니까  앞으로 내게 대해서는 인제 패전이 안 오나 그걸 생각하고, 또 이렇게 보스러기  준비, 진합태산의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생명을 내 대야 될  터인데 생명을 내 대는 그게 잘 되겠느냐 이래서 지금 제일 원통한 것이 뭐이냐  하면 보스러기 준비 못 한 이게 내 철천지 포원입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날  불쌍히 여겨서 깨우쳐 주는 모양이라. '야, 네가 진합태산 준비를 해야 되지,  과거에는 네가 진합태산 준비 하더니마는 지금은 진합태산 준비 안하고 티끌  그까짓 거야 나거나 말거나 그렇게 하는 것 아니가?' 그래서 그걸 회개를  시키시는 모양이라.

 이러니까, 우리가 티끌 모아 태산되는 요 방편을 잊지 마십시다.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층에 나 요새 인제 정원수를, 정원수 심는데, 나는 기념수입니다.

기념수를 심으는데, 일하러 온 사람들이 보면 웃어. 흙을 이래 만지니까 손에  흙이 대이지 않습니까? 흙이 묻었는데 그걸 씻을 때에 딴 데 씻으면 놀랩니다.

'안 된다.' 꼭 화원 안에 화원에다 대고 씻어야 꾸중물이, 흙물이 거기 내려와  가지고 딴 데 안 가지. 이러니까, 손에 묻은 흙도 그 물을 딴 데 못 씻게 해요.

꼭 그라고, 거기 있는 흙이 사층에 떠내려 오니까, 비 올 때 떠내려 올까 싶어  사층에다 보를 막아 놨어. 짚북더기로 보를 막아 가지고 구정물이 흘러내리다가  혹 비 오면 흙이 날려 가지고 내려오다가 가라앉으라고. 가라앉으면 그놈 우리가  퍼 올라고 그래 흙을 모았는데, 몇 번 말해도 이 사층에 있는 사람들 그런  머리를 쓰지 안해. 남의 것이라 그런지. 가보면 훅 틔워 놓고 훅 틔워 놓고.

그래서 오층에 올라간 것은 아무것도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들도 못 내려가고 또  아무리 나무를 베도, 나무 베도 나무 벤 것 전부 꽁꽁 쪼아 가지고서 땅속에  깊이 파묻어서 꼭 썩혀서 하나도 거기 온 거는 나가지 못합니다. 고주의가  뭐이냐? 하나님께서 그래 주신 것인데 고게 티끌 모아 태산되는 그 주의다,  티끌, 티끌이 흘리는, 티끌이 헐어 나가면 태산도 나중에 없어진다 하는 고  이치와 같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요 진합태산이라 하는 것을 지난번에 배웠는데, 그것을  예사로 여기지 맙시다. 여기지 말고, 평상시, 평상시 요것이 하나님 앞에 열린  문 받는 방식이요. 평상시 요것이 천하 인간이 다 패전할 수 있는 그 시험의  때를 다 무난히 통과하게 하는 고 방편이요,  또 말씀하시기를, 11절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하는, 이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한 이 가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진  것이 무엇이겠지요?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했으니까 이 가진 것이 뭐인가?  ○○○조사님, 가진 것이 뭐이요?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했으니까 가진 것이  뭐이지? 빌라델비아 교회 가진 것이 뭐이지? 그걸 굳게 잡고 놓지 말아라, 예?  뭐라 하노? 뭐라해? 예? 예? 적은 힘이 아니고 적은 힘 가지고서 발발 떨면서  하나님 말씀 지키는 거, 이 평상시. 티끌 모아 태산 모으라는 말입니다. 티끌  모아서 태산 모으는 진합태산 고 사상을 버리지 마라 그 말이오. 진합태산의  사상을 버리지 말아라. 고걸 굳게 잡아라 그 말입니다. 고걸 굳게 잡아라. 그게  뭐인데? 그것이 최고의 승리를 이루는 면류관이다 면류관이다.

 네가 가진 바의 그것을 굳게 잡아라. 가진 것이 뭐인데? 지극히 적은 힘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평상시의 충성이지요. 평상시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평상시에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살라고, 평상시에.

 어제 우리가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자, 주의 말씀대로 살자 이렇게 했는데,  아마, 자, 어제 한번, 어제 그건 해 본 사람, 그렇게 한번 되는가 안 되는가 해  본사람 손들어 봐요. 한 번 해 보자 하고 해 본 사람. 실패하고 성공한 거는  말고 해 본 사람 한번 손 들어 봐요, 해 본 사람. 네, 해 보기는 다 해 봤구만.

네, 다 해 봤는데, 그렇게 해서 한 번도, 한 동가리도, 한 동가리도 안 끊어진  사람, 한 동가리도 끊어지지 안한 사람, 그게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해야 되지 안하면 안돼. 한 동가리라도 안 끊어진 사람. 자,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도 없네요. 나도 그만 어째 하다가 나중에 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세 동가리나 끊어졌어. 세 동가리. 세 동가리가. 세  동가리가 끊어졌다 말이오. 그만 주님 잊어버리고 그만 무슨 행동하고. 제일  사람하고 만날 때에 제일 그래.

 엊저녁에 한 동가리는 끊어졌다 말이오. 엊저녁에 조 수옥 권사님 마산  인애원의 조 수옥 권사님이 여기에 오셨고, 또 주 남선 목사님의 큰 따님 주  경순 권사님이 오셨고, 또 미국에 있던 박 인순 선생님이 오셨고 이렇게 세 분이  와 가지고서, 내가 기도하니까 여기 누가 와 가지고서 '저기 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서 기도가 다 돼 가는데 끝도 못 마치고 그만 그래서 이랬는데, 끝  못 마쳐도 그거는 관계없는데 그때 주님을 딱 모시고 '주님, 지금 같이  가십시다' 이랬으면 되는 건데, 만나 가지고서, 만나 가지고 얘기하는 가운데에,  얘기하는 가운데에 그만 주님 깜빡 잊어버리고 이제 그 사람들하고만 데리고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오. 그게 음행이라, 말하자면. 남의 남자 보고서, 남의  남자나 남의 여자 보고서 음욕을 품는 거와 마찬 가지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하고 연결할 건데 그만 주님하고 연결이 끊어져 버리고 그만 그 연결 해  버렸다 말이오. 그러니까 께끄름하이, 아주 께끄름하이 거석해.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도 그 연습 또 합시다. 오늘도 연습해서 이제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네가, 내가 계속하라는 그 계속을 네가 지켰은즉'  오늘도 계속하는 이 계속을 해 봅시다.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맡기고, 뭐 맡기는 주님으로 바라보든지 어쩌든지, 주님의 하신 일이든지  주님이든지 주님과 연결 가진, 주님과 연결 가진 요 연결을, 주님을 내 마음으로  연결 가진 연결, 내 행위로는 주님의 법칙에 맞는 행위, 이렇게 주님을  어쨌든지, 제일 중요한 것이 주님 생각하고 사모하고 주님으로 의논하고  주님에게 물어 하고 주님에게 피동되고 하는 요 주님과 연결되는 요거, 요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요것이, 주님과 연결된 말은 영생이요, 주님과 연결된 말은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생각은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연구는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웃음은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분노도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행동도  살았고, 주님과 연결된 것은 다 살았습니다. 주님과 연결 끊어진 것을 뭐 세상이  다 높이 평가해도 다 죽은 것이오. 주님과 연결되면,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라. 주님과 연결된 것이 다 산 것이요 생명이라.

 그런고로, 오늘도 또 주님과 연결을 끊지 안하도록 요렇게 합시다.

 내가 ○○○집사를. 보니까 일자무식인데 국민학교 근방에 가지도 못하고  이랬는데, 권찰 일을 맡을 때 '저런 사람이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거 뭐  권찰일 보겠나' 이랬는데 제법 잘해요. 그래서 월급을 받습니다. 성적 순으로 돼  가지고서 월급을 받아요. ○○○집사님이 제 누님인데, 그래도 이래 말하는 거  보면 제법, 아무것이 전도했는데 아주 일류 그래 학자들을, 대지식인들을 전도를  했는데, '어떻게 전도를 했을까? 참 하나님 이상하다. 뭐라고 전도를 했을까?'  이랬는데 내가 하나 발견했어. 이래 뭘 하는데, 이래 뭐 하다가서, 이래 뭐  하니까 '주여' 또 뭘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가만히 내가 태도를 살펴보니까 또  있다가 '주여' 또 이래 말해놓고 '주여' 주여 소리가 입에 배었어, 보니까,  '주여 주여' 이제 아마 그것이 주님과 연결, 주님과 연결만 되면 그만 뭐  전지전능이니까, 주님과 연결만 되면 전지전능이니까, 우리가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과 연결되면 그것이 전지전능입니다.

 주님과 연결되는데. 그 연결이 뭐이냐 하면은, 그 연결이 잘됐니 잘못됐니 그걸  우리가 심사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 가지고 연결돼야 되지 말씀을  떠나서 제 생각대로 연결되는 그거는, 그거는 대마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는데 어떤 주님으로 사모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주님을 사모하고 또 연결을 어떻게 연결하나? 성경이 가르치는 그  법칙대로 연결하고, 성경이 참 보배라. 주님도 성경에, 성경에 나타난 그 주님을  내가 사귀어야 되고, 주님 사귀는 법도 성경에 나타난 그 법칙대로 사귀어야  되고, 성경은 주님을 사귀는데에 이 만물을 상대 하는 데에, 모든 우리 언행  심사의 활동하는데에. 이 유일한 법칙이 이게 신구약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 모르고 이 법칙 지킬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도 주님 잊어버리지 말고, 주여 주여 암만 한다고 해도 성경  말씀을 어겨서 성경에 없는 그런 하나님을 자꾸 사모하고 이래 생각 했으면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요 제가 만든 조작베기 하나님이오? 예? 예? 조작베기  하나님, 가짜 하나님, 가짜 하나님이 꽉 찼다 그 말이오. 조작배기 하나님이 꽉  찼어. 그거는 암만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점점 죄 가운데에 빠져 가지고서 마귀가  되고 말이요. 점점 패전되고 그거는 자꾸 사모하면 사람이 교만해져요. 그거만  사모하면 자꾸 교만해지고 백지 되지도 안한 것이 잘났다고 이렇게 자랑하고.

모두 다 요새 우리 교파가 제일이다 뭐 어쨌다 하는, 참 잘못 접선되면 교만하게  되고 자기 자랑하게 되고 자긍하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오늘도 이제 주님과 연결이 끊어지지 안하도록 또 시작합시다. 또 시작해. 또  넘어지면 낙심하지 말고 또 시작해.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뭐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넘어지면 또 시작해. 또 시작하고 그 시작을 자꾸  넘어졌으면 퍼뜩 시작하고 시작하는 사람은 마귀가 떱니다. 그 사람은 최후에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주님에게 고해서 사함받고 또 '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하고 다시 주님 찾아서 또 그라면 주님은 얼른 수고하고  돌아올 때에 '네가 고생 많이 했구나' 하고서 우리 등을 두드려 주고 어루만져  주시면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과 연결 요거 끊지 않도록. 또 주님의 말씀 사용을.

말씀을 이제 참고로, 말씀의 법칙을 우리가 그 법에 따라서, 말씀의 법에 따라서  살던, 법을 따라서 사는, 법에 복종하는 고 일을 어쩌든지 끊어지지 안하도록  오늘도 또 이 일 연습합시다. 이 일을 연습하면 이 일도 잘되고. 그 일 하다  보니까 사장이 보고서 칭찬합니다. 그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공장장이 있다가서  '아, 오늘 수고했습니다.' 칭찬합니다. 자꾸 그 일만 계속했더니마는 공장장이  '아, 그 사람은 아무래도 좀 월급을 올려 줘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책임자를 세워야 되겠는데 누구를 세울까?' '아무것이 그 사람을 책임자로  세우면 될 겁니다.' 자꾸 주님과 연결 끊어지지 안하고 말씀과 연결 끊어지지  안하니까 직장에서 올라가지, 사람들이 높여 주지 왜 높여 줍니까?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 닮은 사람이 돼 간다 말이오. 하나님 닮으면 그보다 더 좋은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능과 같이 하니까 그 사람의 지능이 탁월하다  그거요.

 이러니까, 참 보배 덩어리가 우리에게 왔는데, 우리에게 보배 덩어리, 이  하나님이 보배인데 이 보배만 접촉만 하면 다 살지, 접촉만 하면 밝아지지.

접촉만 하면 곧아지지, 접촉만 하면 지혜로와지지, 이런데 이분을 잊어버리고  썩은 것 죽은 것 그것만 접촉하고 그것만 좋다고 그것만 상대 하지 주님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가 얼마나 이거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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