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는 법

 

1984. 12. 12. 수새벽

 

본문 : 열왕기하 2장 1절∼11절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성경에 죽음을 이긴 사람이 두 사람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는 에녹이요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두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안하고 그대로 승천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악령들은 사람을 미혹시켜서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에 안 죽고 예수님을  맞이해서 무궁세계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런 길이 있으니까 이 길을 걸어가야  된다' 하는 그런 유혹을 마귀가 줘서 안 죽고 에녹과 엘리야와 같이 그렇게  하늘나라에 갈 것을 소망하는 그런 유혹을 주고 받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성경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고 또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하리니' 하는 또 그 성구를 잘못 해석 해 가지고서  '죽지 안하고 주님을 영접해서 하늘나라 갈 사람이 있다. 이러기 떼문에 죽기  싫은 사람들은 다 이리 모이라' 이래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해서 '이 노선을  따르면, 이 교파를 따르면 안 죽고 죽음을 보지 안하고 주님을 영접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다' 하는 그런 유혹의 도들이 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  몰려 듭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유혹들이 많이 있었는데 제일 그 미혹을 많이 받는 곳이  어데인고 하니 서울이 그 미혹을 제일 많이 받았고 그 다음에 둘째로 많이 받은  곳은 저 시골에서, 교파로 말하면 ○○교 ○○교 이번 교파에서 많이 받았고, 그  다음에는 대구이고 제일 그런 데에 빠지지 안한 지역이라고 하면은 부산 지방이  제일 좀 그 유혹에 빠지지 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니 또  무슨 안식교니 또 전도관이니 그런 교파들이 부산에서는 와 가지고서 시작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또 저 동래에 ○○○교회에서 금식 기도원을 그때 할 때에  무엇이 연보가 어떻고 어떻게 나 가지고서 그렇게 했다 그렇게 우리가 신문 볼  때에는 산 것으로 그렇게 말이 났는데 실은 뒤에 말 들으니까 세를 이 년  동안인가 기한하고서 얻었는데 그래 가지고 잘되면 얼마나 산다는 그런 말이  됐는지 모르나 그래 가지고 하다가 요새는 대단히 유지가 어려워서 그 아마 금식  기도원이 차차 없어지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그래도 부산에는 진리로 말하면 우리 한국 교회에 제일 좀 밝히 알고  그렇게 좀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대로 믿을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뭐 별스럽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 유혹의 도에는  별로이 끌리지 안하고 그래도 진리대로 이렇게 바로 믿을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게 ○○교파가 근거를 잡로 있었는데 그때 ○○교파가  좀 성경대로 나갈라고 하는 데는 뭐 아마 전국에서 그래 전체적으로 말하면 뭐  잘 믿는 반열에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고, 또 우리 총공회에서 진리를  증거하는 진리가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겉으머리 말하면서도 속은 이것을  대항할 수는 없으니까 어짜든지 그만 그리 못 가구로 하는 데에는 이단이라고  그렇게 해서 방어하는 그 방편이 제일 좋다 이래 가지고 하지마는 그래도 말하는  그 진리는 자꾸 퍼져 나가서 차차 차차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이 와 가지고서 침노를 잘못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기독교가 별별 유혹의 도가 많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조심을 해서 벌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기독자는 누구든지 죽어야 부활하고 부활해야 하늘나라를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홀연히 변화한다는 그런 말씀만 보면은 해석을 잘 하기가 어려운데  다른데 보면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이 다 복이 있다. 그 사람들이  하늘나라 가 가지고서 다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랬는데 그 첫째 부활에 참석  안 한 사람으로서 영생 얻은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이 두 사람뿐입니다.

 그러면, 첫째 부활에 참예했다는 말은 죽어야 부활이지 죽지 안하면 부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다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죽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영이 살아났고 그  다음에는 이 심신의 기능이 지금 살아나고 있고, 우리의 이 형체라는 이 몸의  형체, 마음의 형체와 몸의 형체 이 둘을 합해서 육이라고 말하고. 영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 영인데 그 영은 단번에 중생됐고 우리의 마음과 몸의 기능은  현실 현실을 통해서 그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아니하고 그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세 가지 대속을 입은 자로 현실을 통과할 때에 그때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통과한 고 양만 치고 부분은 그 기능이 다시 살아난 기능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체는 누구든지 다 한 번 죽고 살아나게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영은 살아난 것이 영원함으로 살아났고 마음과 몸의 기능은  영원함으로 살아났지마는서도 몸의 이 형체라 하는 이거는 이대로 살면 다  그것은 늙어지고 쇠해지고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혈육이 아닌 신령한 것으로  변화를 받아서 입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된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은 불가불  이 혈과 육이 이것을 벗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변화함을 받아 가지고 입어야  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안 죽고 하늘나라 간다는 그런 생각은 아예 마귀의 유혹이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게 하지 안해야 됩니다. 그것은 죽기를 싫어하는 거게서 생겨진  것이고 죽기를 싫어하는 그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 죄란 놈이 이 죄 저 죄 말해도 그만 죽인다 하면 죽음이 두려워서  이런 죄 저런 죄에게 빠져서 종 되는 이런 자들을 다 구원해 가지고서 어떤  죽음에게도 두려워하지 안하고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든지 안 죽든지 죽음을  이겨야 됩니다.

 우리는 둘인데 옛사람 자기 있는 그것은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자기이니  이 자기는 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자기는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현실에서 주님의 피공로와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난 그 자기가, 살아난 자기가 현실에서 주님의 피공로를 입고  성신의 감화 감동과 진리의 그 인도를 따라서 살면 그 사람은 고것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이 죽지 안하고 또 마음이 몸의 기능은  죽지 아니하고 그 형체는 일단 죽었다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지 안하고 승천한 에녹은 어떻게 됐으며 엘리야는 어찌 됐느냐?  고것은 우리에게 문서로만. 이 죽지 안하고 영생하는 도리를 문서로만 가르치지  안하고. 우리가 둔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암만 말해 놓으면 이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했으면 다인데 이 말씀만  가지고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하는 도리를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친 계시입니다. 그러기에 에녹과 엘리야는 '이렇게 살면 죽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보여 주신 계시 기관입니다. 계시로  이용하신,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구원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에녹을 만드셨고 엘리야를 만드셔서 그분들이 그렇게,  '요렇게 살면 죽지 않는다' 하는 고것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그 두 분의  생활은 특별했습니다.

 그러면 그 두 분의 생활이 다 어떤 생활이었느냐? 에녹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렇게 기록 돼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죽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실에서도 우리 영은 물론 하나님과 언제든지 동행해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영 안에 계시고 이래서 상호 내주해 가지고  떨어지는 일이 없지마는 우리 마음은 주님과 동행될 때도 있고 주님을 잊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리고 저 혼자 살든지 그래 안 하면 어떤 사람하고  같이 살든지 어떤 물건하고 일하고 고래 같이 살든지 살고 주님을 아주 잊어  버린 때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잊어 버리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되지  안했는고로 그것은 제가 주님 잊어버리고 무슨 큰 뭐 회사를 경영하는 뭐 사장  노릇에 하루 종일 분망했든지, 자기는 어떤 정권을 잡아 가지고 뭐 대통령이나  왕이나 천황 폐하나 뭐 어떤 일로 자기가 분주했든지, 또 어떤 자선 사업이나  구제 사업이나 이 봉사 사업으로 분주했든지, 또 자기가 어떤 세밀한 그런  과학자로서 하루 종일 과학을 연구하고 과학을 이루어 갈라고 분주했든지 간에  다 사망합니다. 다 사망하고. 다만 주님과 동행된 고것만 영원히 산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신 계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든지 하루 종일, '내가 오늘 종일'  영은 물론 영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언제든지 동행합니다. 그러기에 영은 벌써 죽지  안하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그 반열에 들어 가서  중생된 영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데 우리가 현실 닥쳤을  때에 우리 마음이 주님과 동행할 때도 있고 동행 안 하는 시간도 있고, 우리  몸이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도 있고 동행 안 하는 시간도 있기 때문에, 동행 안  하는 고 시간은 자기의 마음의 가능도 몸의 기능도 다 죽었습니다. 고것을 죽은  걸.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왜  둘째 사망의 해라고 말하는고? 그것은 사람들이,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은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영은 단번에 살아났고  우리 마음과 심신의 기능도 법적으로는 살아나 있습니다. 법적으로 살아난  그것이 주님과 동행했으면 동행한 고것은 다시 죽지 안하고 살아난 것이  영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루 종일 살고 난 다음에 나는 그라면 영생을 얻은 것은 얼마나  되는가? 영생을 계산할 때에 내 마음의 기능이 영생을 오늘은 얼마나 얻었으며  내 몸의 기능, 몸의 힘 말이오. 몸의 기능. 몸의 능력 마음의 능력 이것이  얼마나 살았으며 얼마나 죽었는가 고것을 계산할려고 하면은 동행으로 계산하면  된다 그것을 가르칩니다.

 오늘은, 주님 동행이 오늘은 몇 시간이나 있었느냐? 오늘은 기도할 때에 새벽  예배에 와 가지고서 새벽 예배 앉았으면서도 내가 그만 앉았기만 앉았지 내  마음은 엉뚱한데 가 가지고 지금 딴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배볼 때에도 나는  내 마음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지를 안했고 어만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또 내 몸은 그저 예배볼 때 그때 거기 가서 앉았기만 앉았지 마음이 딴데  가 있었기 때문에 몸은 거기 앉았지마는서도 몸도 실상 가지 못해 그렇지 딴데  가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몸이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하지는 못했다. 하루 종일  마음이나 몸이 주님과 동행한 일이 없었으면 그날은 예수님을 믿지마는 구원을  얻어서 영생얻은 심신의 기능은 하나도 없었다 고렇게 계산을 대면은 바로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어떤 분주한 가운데에 살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주해서 이 일 하고 저 일 하고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이 사건 저  사건 이렇게 생각하지마는서도 주님 생각하는 일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한 번도  잊어 버리지 안 하고 자기가 무슨 일 해도 '주님이여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주님이 이 일 할 때에 주님이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이거는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내가 탈선되지 안하도록 나를 붙들어 주웁소서.' 심지어 길을  가면서도 '주님, 여게서 나를 붙들어서 낙상해 죽지 않도록 하여 주옵소서.

여게서 차사고에 치이지 않게 해 주옵소서.' 또 자기가 무슨 말을 사람하고 할  때도 '이사람은 만났을 때에 내가 주님은 버리고 이 사람하고 둘이 짝이 돼  가지고서 이 사람이 나에게 간부가 되든지 이 사람이 나에게 음녀가 되든지  이렇게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람으로 주님 잊어 버리게 했으면 그 사람이 잘나고 나보다 세력이 센  사람이라 권위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내게 간부가 돼 가지고서 '아 그  사람하고 사귀는 것이 재미가 있고 권위가 있고 그 사람하고 사귀는 것이 뭣이  잘 될 것 같아서 사귀었으니까 그게 간부로 인해서 주님 잊어 버린 게 되겠고.

또 그 사람이 무슨 매력이 있고 참 좋고 이래서 그 사람의 그만 재미에, 아주  얘기를 잘 한다든지 얼굴이 아름답다든지 무슨 무슨 친절을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든지 또 그 사람의 아름다운 무슨 덕 있는 행위라든지 뭐 그런 거 아름답고  좋아서 그만 거게 빠져 가지고 그 사람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주님 깜빡 잊어  버렸으면고, 것은 그 사람이 내게 대해서는, 아무리 신앙이 좋아서 성녀이기  때문에 내가 그 성녀 만나 가지고 생각하다가 주님 잊어 버렸으면 고것은  성녀라도 자기에게 대해서는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음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잊어 버리는 그것은 간부든지 음녀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이래서, 그만 주님을 잊어버리고. 또 그 사람을 아무리 성녀하고 만날지라도  '주님이여. 주님이 이 사람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 성녀를  만들었고 이렇게 성자를 만들었고 이렇게 신앙의 담력된 그런 장성한 이 손 양원  목사님을 만드신 주님, 이제 주님이 나도 이렇게 만들어 주옵소서.' 자꾸 주님을  잊어 버리지 안하고 놓지 안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일도 하고 말도 하고 뭐 또  이리 저리 활동도 하고 이라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네나 내나 꼭 같지 뭐.

너도 보니까 공장에서 일하고 나도 공장에서 일하고, 너도 감옥에 갇혔고 나도  감옥에 갇혀 있었고 너도 오늘 이런 저런 전도 사업. 전도 일. 저런 뭐 일. 목회  했고 나도 목회 했으니까 꼭 같다' 싶으지마는서도 실은 속을 따 쪼개 가지고서  내부를 보면은 주님과 동행한 사람도 있고 동행 안 한 사람도 있고 이래서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껍데기는 같지마는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도  있고 동행 안 한 시간도 있으니 동행하는 시간은 영생이 됐고 동행 안 한 시간은  그 사람은 다 예수 믿는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거는 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은  사람이라.

 이래서 성경만 가지고는 사람들이 믿음이 어린 사람은 못 믿기 때문에 꼭 봐야  믿는 사람에게 한해서 이거 엘리야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안하고 산 채로  승천했다 이것을 우리에게 문서로 주시고. 또 이런 형식을 이런 사실의 형식을  가지고서, 모양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또 성신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계시해 주시는 방편이 여럿이 있는데, 이렇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 죽지 않는다 하는 요것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할라고 하면은, 그러면, 늘 하나님만 늘 생각하고 하나님  잊어 버리지 안하고 하나님과,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니까 누가 온다 해도,  어린 아이가 어떻게 나쁜 동무가 와서 부랑을 지길라 해도 자기 아버지하고  둘이 손 잡고 같이 가면은 그 아버지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그 부랑자가 와도  오히려 조롱이나 하지 그까짓 거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첩첩 산중에 한밤 중에 가서 이래 볼 때에 그때에 만일 거석할 때에  자기가 힘센 장정 장골 한 여나무 사람이 같이 이래 단체 해 가지고서 이렇게 그  어떤 산골을 갈 때에는 그때는 든든하고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간 때는 두려움이 있다 그거요 그게 뭐이냐 하면은 장정 열 명이 자기와  동행하는 그 동행한다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기 때문에 두렵지 안하지마는서도  아무 자기가 어려움 당할 때에 도와줄 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두렵다 그거요.

 그러나 그 장정 열 명이 동행하는 데도 6·25 때 같은 때에는 이때 인민군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서 이렇게 산으로 이렇게 다 헤매고 이래 돌아다니니까 이때  가다가서 뭐 이런 사람 만난다는 그런 것은 겁이 안나지마는서도 6·25 때는 열  사람이 산중에나 어데 그런데 동행을 할 때도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왜? 무기  가진 인민군이 들이 닥치면 그까짓 거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상관이 없다  말이오.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평소에는 열 명이면 같이 어데를 간다고 하면은  뭐 열 명이 같이 가니까 문제 없다 이렇게 열 명의 대적이 와도 열 명만 하면  눙히 능가하고 남음이 있다 그렇게 열 명의 그 힘을 믿기 때문에 그랬는데 6·25  때에는 열 명이 가도 두려운 것은 무기를 가지고 오는 데에는 열 명이 해 봤자  당하지 못하니까 열 몇 그 힘을 믿는 것이 인민군을 능가할 만치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예를 들어 말한 것인데 자기가 무슨  예배당에 이래 있을 때 '주여, 믿사옵나이다' 이랬지마는서도 고만 밤에 깜깜한  밤에 혼자 어데 길을 갈라 하니까 '주님이 내게 함께 계시는데 뭐 문제가  뭐이냐? 주여. 주님은 전능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게십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이거 두려움이 없어지지 안하고 두려워서 머리 끝이  쪼삣쪼삣하고 못 견디겠다 말이오. 그러면 그거 주님이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한번 대답 해 봐요. 믿는 것이라 하면 손가락  들고 안 믿는 것이라 하면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안 믿는 것이라고 하면은,  그때 그럴 때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주님과 동행을 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  동행을 믿는지 안 믿는지, 자, 동행을, 그렇게 머리가 쭈삣쭈삣하고 무서울  때에는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능력의 큰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아듬고 우리를 동행하시는 그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고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그렇게 두려움이 올 때는? 자 그게  두려움이 있을 때는 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그겁니다. 네 그거요.

 그러면, 두려움에 대해서도, 안보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또 자기가 뭣을 생각할  때 '이래 볼까 저래 볼까' 요래 볼까 저래 볼까 이랄 때에는 고것이 자기  생각이요. 주님에게 기도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시도록 '주님이 뭐라고 가르쳐  주는가 주님의 음성을 듣자' 이래 가지고서 '이 사건에는 이래 할까요 저래  할까요?' 이렇게 할 때에, 성경 말씀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때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야.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우리 귀에 들어오도록, 들리도록  그렇게 하시지 안하고 성경 말씀 가지고 우리를 지도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이래 하라 했느냐 저래 하라 했느냐 요것을 듣는 것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또 그 보다도 '내게 성신이 뭐라고 감동시켜 주는가 보자.' 성경이 가르치시는  그대로만 자기가 하는 것 가지고도 만족지 안하니까 성경이 요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성구를 찾아서 '아, 요렇게 해야 되겠다 저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고것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고렇게 발견한 성구가 자기에게 확실히 믿어져서,  '요건 주의 뜻이다. 요라면 틀림없다' 요렇게 성경을 보고서 깨달은 것보다도  자기가 확실히 그리 하는 것이 옳고 바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그렇게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을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경험했을 거라. 고것이 뭐이냐  하면 영감의 인도라 말이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영감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와 동행하는 것이라 했지? 입문을  그만 잊어 버렸구만.

 주님 사모로 주님과 동행하고, 성경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영감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이라 했지 그 다음에는?  예? 여기 남반에 좀 생각해 봐. 그래. 주님과 동행하는 거, 주님의 대속과  동행하는 거, 사죄와 동행하고 칭의와 동행하고 주님으로 더불어 화친된, 이거  뭐 간단한 시간이니까. 해석은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을 터이니까. 동행하는  것이 그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말이오, 또 동행은 뭐이라 했어요. 그  다음에는? 예? 고다음에는 기도 네 종류를 생각하면 고만 쉬워. 기억 돼.

 감사로, '보자, 아, 요거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고거 찾아  가지고 '아, 주님 요거 감사합니다.' 자기에게, 주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데  대해서 감사한 걸 찾아 가지고서, 요거 찾아 가지고 '감사합니다.' 조거 찾아  가지고 '감사합니다.' 자꾸 찾아 가지고 감사하다 하는 그때는 주님과 동행이라  그말이오. 또 자기가 뭐 '아이구, 요거 잘못됐습니다. 요거 내 잘못 했습니다.

요거 용서해 주웁소서' 그랄 때도 또 그게 주님과 동행이라 말이오. 주님 안  잊어버리고 하니까 동행이라 말이오. 또 자기가 '이거 이해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자꾸 물을 때에는 내가 모르니까 번민이라 말이오. 이래야 될까 저래야  될까 고민해서 '주여, 어째야 됩니까?' 이라면서 '주님이 성경에 그만 뭐라고  말씀했는가 보자. 성경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 주님이 이 성경에 뭐라고  말씀했는지 성구를 나에게 좀 알게 해 주옵소서' 이라면 주님이 성구를 나에게  알게해서 '봐라, 성경에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지 안했느냐.' '아이구,  그렇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또 '그러면, 내가 이렇게 알기는 알았지만 할라  하니까 막상 내가 내 힘으로는 하지 못하겠는데 주님이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거 좀 도와 주십시오' 이라니까 또 주님과 동행이라 말이오.

 그렇게, 어쨌든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영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 살은  계산에서 내가 주님 동행한 그 시간이 얼마인가 주님 동행은 이 열 가지를  말했는데 또 그 다음에 뭐 얼마든지 더 있지 않습니까? 그저 이 동행을 자꾸  연습을 해서 주님과 동행한 시간은 전부 산 시간이오  이러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내가 내게 인식을 시킨다 말이오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내가 내게 인식, 내게 내 무엇에게 내 영에게 인식시킵니까?  영에게 인식시킵니까? 마음에게 인식시킵니다. 또 누구에게 인식시켜? 내 몸에게  인식시킵니다. 그러면 인식시키는 자는 누구입니까? 인식시키는 자는 누구요?  '성령이'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준다'  이러니까, 성령님과 우리 영이 내 안에 와 가지고서 내게 있는 성경 지식을  아는 그 성경 지식이 자꾸 내 마음에다가 인식을 해. 성경 지식 그것도 마음  아닙니까? 마음인데, 우리가 동무들도 이 사람에게 하나 인식시키고 저 사람  인식시키고 자꾸 인식시키는 거 모양으로 우리 마음에도 여러 부분에 여러  종류가 있고 여러 분자가 있기 때문에, 성령과 영을 힘입어서 내 마음이 '주님  나와 동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전능자이십니다.' 자꾸 입술로 이래  가지고서 내 마음에다 인식을 시킨다 말이오. '주님, 주님은 전능자십니다.

주님은 전지자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 주님이 이 하늘도 지었고, 아, 조것도,  저 묘한 거 저것도 지었고' 자꾸 어짜든지 주님을 잊어 버리지 말고 놓지 말고  자꾸 주님을 되새기고 되말하고 되풀이하고 자꾸 그래 가지고서 그만 자기가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 꿈을 꾸다가 그만 헛소리도 '돈' 이라는 거 모양으로,  무슨 짐승에게나 놀란 사람은 자다가도 그만 무슨 놀래면 꿈 꾸는 것도 놀랜  꿈을 꿔 가지고 그만 벌벌 뻘면서 이라는 거 모양으로 이제 자꾸 주님을 자기가  인식한다 말이오. 주님을 자기 마음에게 인식시키고 자기 마음과 자기 몸이  주님으로 가득 차서 이거 무슨 급한 일 있으면 '주여' 하고, 고만 꿈을 꾸더라도  '아, 주님' 그만 이래 되도록 자기 마음과 몸에 꽉 배이구로 해 가지고서, 주님  그거는 주님 잊어 버릴 사이가 없이, 주님 잊어 버리지 안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어느 모로 생각해? 성경, 주님이 말이지요 이내 주먹이지마는 주먹에는  요 뽈록한 요 모도 있고 요 모도 있고 요 모도 있고 요모도 있고 요 모도 있고  요 모도 있고 요 모도 있고 또 요 모도 요 모도 넓적한 모도 있고 또 둥그란  모도 있고 여러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주님도, 예를 들면 주님도 주님의 요  면도 있고 조 면도 있고, 주님의 성경면, 주님에게는 주님의 성경면 영감면  전지면 전능면 완전면 나를 사랑하는면 십자가의 대속한면 이면 저 면을 자꾸  이렇게 생각해서 놓칠 여가 없으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그라면. 그거 하다가 언제 사업은 어째 하고, 사무는 어째 보고 또 그라면  자기 직책이나 본분이나 책임이나 그런 지위는 어떻게 지키고?' 이렇게 하기  쉽기 때문에 '에녹은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 자녀를  낳으면서 동행했다' 이랬습니다. 자녀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니까. 자녀,  우리는 뭐 합니까? 자녀 낳으면 그거 먹여야 되지. 입혀야 되지, 가르쳐야 되지  자꾸 이라니까 그거 뭐 에녹이 그거 다 했다 그거요. 다 했으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으며' 하는 거 보면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다 그거요. 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장관 노릇도 할 수 있고 대통령도  할 수 있고 왕 노릇도 할 수 있고, 동장 노릇도 할 수 있고, 반장 노릇도 할 수  있고, 또 뭐꼬? 공장장 노릇도 할 수 있고. 인부 노릇도 할 수 있고 식모 노릇도  할 수 있고, 어머니 노릇도 할 수 있고 아버지 노릇도 할 수 있고 그만 거 다 할  수 있다 그거요. 그만하면 다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동행한  것만치는 영생한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영생했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동행, 이 하나님을 자꾸 주님을 자꾸 생각할 때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합디다. '아, 나는 무엇을 판단할 때에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그거  모를 때에는, 성경 가지고도 잘 모를 때에는 그때는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해요. '목사님 생각하면 뭐 목사님 거기 가지도 안했는데 어찌  아느냐?' 이래 물으니까 목사님 생각. '이 일을 닥쳤을 때에 목사님은 어떻게  지도를 하실까? 목사님한테 물으면 뭐라고 지도하실까?' 고렇게 생각하면 자기  모르는게 쏙 나온대요. 나오면 '아 분명히 목사님 만나면 이리 이리 말씀하실  거다' 그만 그라면 되는데 그것은 들어 보면은 그렇게 목사님은 그렇게 지도할  건데 자기 생각하고는 틀렸다 그말이오. 자기 생각하고는 틀렸으니까 '이거  틀렸다' 이래서, 목사님한테 묻고 또 그래도 모를 때는 '주님은 어떻게 하실까?  주님이 만일 이런 형편이면, 주님이 여게 나와 같이 계시면서 주님 어떻게  할까요 하면은 주님이 뭐라고 나에게 지도를 하실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대략 다  안답니다. 대개 다 알아요. 그러면, 왜? 주님이 성경에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신  것이 많기 때문에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하라 하실  것이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알려진다고. 또 그라다가 이 일 닥쳐서, 나를  유혹시키고 있는 유혹이 있는 나를 유혹해서 범죄케 하는 그자를 생각해 보자.

그 자를 생각해 보면 또 반드시 범죄 하라고 지금. 범죄하자고 자꾸 이랄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서 주님을 생각하면 무엇이 바로 돼지고 옳게 돼집니다. 이래서, 주님  생각하는 것을 어쨌든지 이 모로도 생각하고 저 모로도 생각하고 이면 저 면으로  생각해서 어쨌든지 주님 생각을 놓지 아니하면. 주님 생각을 놓지 안하면 우리는  밝아집니다. 밝아져요.

 보십시오. 인간인데, 자기를 바로 지도하는 목사만 생각해도 그 일에 대해서  이래 바로 할 생각이 나오는데, 바른 생각이 나오는데 주님 생각 하면 얼마나  바른 생각이 나오겠습니까? 이러니까, 주님만 생각하면 주님깨서 그분만  생각하면 일은 언제하고? 주님만 생각하면 해야 될 일은 해야 된다고 나에게  강력하게 '이거는 네가 해야 된다' 하고. 또 안 할 거는 '그거는 하면 안 된다.'  그때 주님만 생각하면은 해야 될 일은 내게 생각이 나오고 또 주님만 생각하면은  뭐 안 할 일이 닥쳤으면 주님만 생각하면 주님이 '그거는 안 해야 된다' 이래  생각이 나오니까,  그러면 주님 그분은 부처모양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모양으로 그렇게  우리가 생각만 하면 우리 상상 가운데에 한 대상으로서 그분 생각 하니까 정신이  바로 되는 그게 아니고, 주님은 없는 가운데에 만물을 지었고 우리 머리 하나  속에 뭐 컴퓨터를 천억을 만들어 넣었대요. 그 말이 내게는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한 사람 머리에 컴퓨터를 천억을 만들어 넣었으니까 우리 머리는 참  이리 저리 이거 별별 걸 생각하니까. 그거 모 두 다 컴퓨터 하나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 딱 보면은 기억 딱 해 가지고 있는 거는 그 컴퓨터에 딱 기억하는  것으로 딱 그래 놓고서. 컴퓨터 보니까 요래 하나 딱 요래 놓고 눌러 놓고 그래  놓으니까 그거는 뭐 일 년이 되고 몇 달이 돼도 꼭 고대로 딱 정확하게 기억이  딱 돼 가지고 있습디다. 이거 모양으로, 이래 만드신 분이 그분이시니까, 천억을  만들어 넣으신 분이 그분이시니까 내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  동행할 때에 내게 대해서 뭐 일이 복잡하다 해도 까짓 거 몇 가지가 됩니까  그까짓 거? 거게 대해서 주님이 척척척척 얼마든지 우리에게 지도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시켜 줄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말이오.

 그런고로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잊어 버리지 말고 동행에만 영생한다 그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엘리야에 대해서 가르친 것은 엘리야는 뭘로 죽지 안하고 승천했는가? 엘리야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인도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그것도 동행이라. 그거는  동행인데도 그거는 하나님의 인도 따른 걸 말했습니다.

 '자, 나를 벧엘로 가라 한다, 나를 또 여리고로 가라 한다, 나를 요단강  건너가라 한다.' 이러니까 거게까지 따라가다가 주님을 따라가다가 그만 다른  사람 다 거기 주저앉았는데, 주저앉았는데 엘리사는 또 거기 주저앉지 안하고  자꾸 '나는 따라갈랍니다. 따라갈랍니다. 따라갈랍니다.' 이래 가자고 주님에게  따라가는 엘리야를 따라가다가서 요단강 건너 회리바람 때까지 따라갔으니까  최고는, 최고는 아니지만 따라갔지마는서도 엘리야는 하나님이 회리바람으로  인도해 가지고 올라갔는데 그때 엘리사는 그만 '너는 그라면 네가 영감 변화  받을 것이다' 이라니까 그것으로 만족해 버리고 더 이상 못 갔다 말이오. 만일  그때, 내 생각에 그래요. 엘리사가 '주님이여 당신의 혼의 삶을,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절대 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꼭 데리고  가십시오.' 놓지 안 하고 '날 꼭 데리고 가십시오. 나 안 떨어집니다. 내가 어데  바람 타고 가든지 뭐 뭐 가다가 떨어져 죽든지 어짜든지 어짜든지 나는 주님  놓지 안하고 따라가겠습니다.' 주님 따라가는 것이 엘리야는 요단강 건너  회리바람 불 때까지만 복종했지 그 이상은 복종을 못했고, 오십 인 선지는 또  여리고까지만 따라갔고 또 벧엘까지만 따라갔고 따라간 모든 차이가 있다  말이오. 따라간 차이. 이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에게 복종해서 주님  따라가는 거. 주님 인도 따라가는 요것만이 영생이다 고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 따라가는 요것만 영생이다. 이러니까, 내나 에녹 영생한 거나 꼭 같다  말이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 동행하니까 하나님 잊어 버리지 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한다는 이것을 믿는 거, 그러면, 처음에 그거 안 돼. 암만 그래도.

'주님 나와 같이 계십니다. 같이 계십니다.' 이래도 안 된다 그거요. 첩첩  산중에 맹수들이 있고 하는데 가서 혼자 가서 기도하는 거 그것이 뭐 좋은  것이냐 하면 처음에는 두려워서 '아 전능자와 나와 같이 계시는데 무슨 문제야?  또 모든 걸 창조하신 맹수를 창조하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데 뭐이냐? 주님  나와 같이 계십니다. 믿습니다. 나와 같이 계심을 믿습니다.' 암만 입술로는  그래 쌓는데 뭐 두려워서 못 견디는데 어째? 못 견딘다 그거요 그러나 자꾸 그런  거 주님과 동행하면 나중에 가서 '주님 나와 같이 계신다'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애를 썼다가 참 이거 아이들 말로 시동 걸린다 하지 않습니까? 시동  걸린다, 이제 시동이 걸렸다 시동이 걸렸다. 주님을 자꾸 이래 생각해서 주님과  딱 걸려 버렸다 말이오. 딱 걸리는데 그만 아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이  믿어질 때에는 그때는 뭐 맹수고 뭐이고 그런 것이 아무 문제가 없고 맹수도  사랑하고 싶고 뭐 아무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고 동행이 됐다 말이오.

 그것도 그렇고, 인제 무슨 일도, 공산주의 인민운이나 뭐이나 그런 걸 이래  닥치는데도 자꾸 주님과. 전능자가 동행하고 전능자가 날 보호하고 계시고 또  전능자 시키시는 대로 하는데. 전능자 시키시는 대로 인도대로 하는데 그  피조물들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는 그 사람 주님 만났을 때라 말이오 이떻게 해서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어떤 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과 동행을 하나 안 하나  또, 주님의 참 인도를 엘리야 모양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느냐 안  따라가고 있느냐, 이렇게 엘리야는 끝까지 그만 회리바람 부는데까지 따라서  승천까지 따라가 버렸습니다. 승천까지 엘리야는 따라가 버렸다. 엘리사는  거게까지 가다가 말았다, 오십인 생도는 여리고까지 가다가 말았다. 또 몇  생도들은 선지 생도들은 벧엘까지 가다가 말았다 따라가다 말았다. 이러니까,  엘리사는 따라간다 따라간다 이랬지마는서도 요단강 죽음을 건너  따라갔지마는서도 승천까지는 못 따라갔다 말이오. 그때 '나도 따라갑니다. 나도  따라갑니다.' 따라간다는 욕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따라갈 수 있었으면  엘리야만 승천할게 아니라 엘리사 승천했을 거라.

 이러니까, 고거는 뭐이냐 하면은 '따라가면 안 죽는다. 주님 따라가는 걸음은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죽지 않는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뭐이냐? 주님이 요구가 있다  말이오. 어떤 사람이 아파서 견디지를 못하고 장 이라는데 내가 말하기를 '야.

그 아픈 것이 그것이 없어지기까지, 네 아픔의 그 자극이 없어지기까지, 아픔의  자극이, 그 아픔의 아픔의 그 고통이 없어지기까지 사모해 봐라. 없어지기까지  사모해 봐라. 주님은 그걸 없애 주실수도 있고 죽은 사람 살릴 수도 없는데 고통  그거 없애 줄 수 가 없겠느냐? 사모해 봐라.'  이러니까, 그 사람이 주님의. 주님이 고통을 없애 주실 것을 자꾸 이래  사모하고 주님 사모하는 것에. 주님 사모하는 것에 뭐 주님의 이런 대속 저런  대속 이런 거 저런 거 자꾸 주님을 사모하는 그 주님 사모의 강도가. 주님  사모의 강도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니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그 강도가 아픈  강도보다 앞섰을 때에는 아픈 강도가 딱 떨어진 것을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말하는 걸 들었다 말이오. 그래 '내가 못 견뎠었는데 주님을 자꾸 이래 사모하고  주님이 고난 받은 거 사모하고 또 이렇게 주님이 그런 거 없애 주실 것을  사모하고 이라다 보니까 그 아픈 거 달아나 버려서 그만 아프지 안하고 잠을 잘  잤습니다.'  또, 어떤 사람 신사 참배 때문에 거창 경찰서 가서 붙들려 가서 두드려  맞았는데, 두드려 맞을 때에 둘이 갔었는데 ○○교회에서는 둘이 끌려 갔어요.

○○집사하고 ○○목사 지금, ○○집사하고 둘이 끌려 갔는데, 그 둘이 막 갖다  대 놓고 몽둥이로 이래 두드려 대면서 신사 참배 안 하겠냐구서 막 항복을  받을라고 이라는데 그때 자기네들이 '아 주님은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까 주님이 그 못박혀 죽을 때에 얼마나 아팠는가? 요만치 아팠는가'  이래 그걸 생각하니까 아픈게 하나도 없더라고. 그게 뭐이냐 하면은 '네까짓 거  몽둥이 맞는 이 아픈 정도인 줄 아나? 이 아픈 정도의 억억만 배도 더 됐다.

이거 아픈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주님이 보여. '그까짓 거 아픈 것도  아니다.' 이래 보였다 말이오. 그러니까, '아, 하나도 아프지 안하더라. 하나도  아프지 안하는데 암만 두드려도 하나도 아프지 안하고 그들만 툭탁 소리만 뭐이  들리지 아프지는 하나도 안 하더라.' 이제 그렇게 하나는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다가 그랬다 하고,  또 한 사람은 뭐가 '너는' 둘이 다 같지 안해요. ○○목사는 그렇게 생각해서  아픔이 없었다 하고 ○○집사는 내가 물으니까, '안 아프더나' 이라니까 '아 그  이상해.' '주님이 날 대속했기 때문에 이 매 맞는 것도 대신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다고. 그러니까, 주님이 대신 매를 맞으시니까 아프기는 주님이  아프시지 나는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주님이 대신 맞아 준 걸 생각하니까  믿으니까 그만 하나도 안 아파서 그렇츰 그래 쌓는데. 두드리고 그라니까 '이  사람들 아마 언간히 두드렸으니까 이제 죽을 거다. 이러니까 내 놔 버리자' 이래  내 놨는데 아픈 것 하나도 없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둘이 그래 손 잡고  올라왔다고서,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서 그래요.

 그게 뭐이냐?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 한자리에 있지마는서도 낫게 해 줄 걸  믿으면 '믿는 대로 되리라' 믿으니까 되지 안했습니까? 믿으니까 된 거.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또 하나님의 인도를 딿는 거,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날 어데까지 가자고 그리 가자, 그리 가자고 하신다 그리 가자고  하시니까 나는 그리 따라갈 터이니까 널랑 여기 있거라' '나도 따라갈랍니다.'  '나는 주님 따라서 지금 가서 벧엘에 가야 되겠으니까 너는 여기 있거라' '나도  따라갈랍니다. 나도 따라갈랍니다.' 이랬는데 회리바람 불 때에 그때 가  가지고는 '네 소원이 뭐이냐?' 소원은 영감 말했으니까 네 소원을 내가 하나님이  회리바람으로 하나님이 올려 갈 때에 그때, 나는 회리바람 올 때 나는 주님  따라서 회리바람을 타고 올라가겠는데 너는 그러면 여게 있으면서 소원하는 땅에  있으면서 소원하는 거. 영감 소원이 제일 큰 소원인데 그 소원 했으니까 그만 그  소원 받고서 여기 있거라' '나는 영감 소원도 좋지마는서도 영감 소원도 좋지만  당신하고 따라가는게 제일 소원입니다. 나는 당신과 같이 꼭 따라갈랍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같이 승천하지 안했겠느냐? 하나님이 그래 안 주셔  그렇지마는서도 그걸 제가 여러 번 많이 좀 생각해 봤습니다  이러니까, 주님 따라가는 데에 영생이 있다.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 영생이 있다  고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생은 고 둘뿐입니다. 주님 인도 따라가는데  주님과, 그것도 동행이라. 주님 따라가는게 주님동행 아닙니까? 주님 따라가는  데도 영생이 있고 주님과 동행에 영생이 있다. 거게만 영생이 있고 딴 데는  영생이 있지 않는다 그걸 말씀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주님 사모 놓지 맙시다. 주님 사모 놓으면 안 됩니다. 주님을 뭐 이  모로 저 모로 주님을 어짜든지 놓지만 말아요. 그만. 주님 안 놓으면 볼 일도 못  보구로? 주님 볼 일 못 보구로 놓지 말아요. '주님 나 놓고 못 갑니다.' 하고서  어짜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요 모 조 모로 주님을 놓지만  말아요. 놓지만 말고 하루 종일 생각하면 하루 종일 그동안은 전부 영생 다  됐습니다. 한 시간 살면 한 시간 영생 다 됐습니다. 그러면, 다른 일은? 다른  일은? 다른 일은 더 잘 돼. 전지자가 날 지도하는데, 주님. 전지자와 동행하는데  전지자가 뭐 실수 하도록 하겠소? 실수 없이 다 착착 할 일 다 하게 하신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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