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모-동행-피동

 

1986. 2. 23. 주일오후

 

본문:갈라디아서2장 19절∼21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게 ‘믿음 안에서 산다’ 하는 말씀이 있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그러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아들을,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그러면 자기가 사는 것은 믿지 안할 때에 가졌던 그 육체 안에서 살고 있는데, 사람 보기에는 육체 안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나 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고, 또 사람 보기에는 내가 살고 있으나 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아듣기가 조금 어려운 말인데, 우리가 안 믿을 때와 같은 사람으로 내나 그 집에서 또 그 몸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을 때와같이 몸 안에서 그저 과거와같이 그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껍데기는 보면 같은 사람 같지마는서도 실상은 다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마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겉은 보기에 꼭 같은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마는 하나님이 구별하실 때에는 아주 판이한 딴 사람으로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 일을 아무래도 성공을 해야 됩니다. 죽기 전에 이 일을 성공해야 되고 환난을 만나기 전에 이 생활이 성공이 돼야 되지 이게 성공이 되지 안하면 참 껍데기 생활만 하고 있는 외식자가 됩니다. 다 같이 예배당에 오고 가고 오전에도 학습도 세웠고 세례도 베풀었고 또 여러 가지 예수님 안에서 이런 저런 직책도 맡고 이렇지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그저 말로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고 하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그러면,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은 어떤 건가?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죄와 자기대로 산 죄와 또 하나님의 법을 어긴 그 죄를 범해서 우리가 영원한 지옥에 매여 가지고 영원 멸망에 매여 가지고 있던 우리들입니다. 영원 멸망에 매여 가지고 멸망 속에서 멸망으로 멸망해 가고 있던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 살면 하루 산 것만치 멸망했고 일 년 살면 일 년 산 것만치 멸망했고, 세 가지 죄로 인해서 멸망 가운데서 살고 있던 우리들인데, 그러면 멸망 가운데 살았다는 말은 멸망으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벌써 영은 죽었고 그 심신으로 된 육도 정죄받아 가지고 사망을 한 것인데, 사망한 것인데, 나무를 베어 놓으면 그 나무가 당장 죽는 것이 아니고 많은 시간을 걸쳐서 죽는 것처럼 이 심신은 여러 개의 종합체이기 때문에 단번에 죽지 안하고 이 죽는 기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백 살 먹는 사람은 백 년 걸쳐서 죽는 것이요, 난 지 한 달 만에 죽는 것은 한 달 걸쳐서 죽는 것이요, 어쨌든지 그 심신이 사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시간이 오래 걸려 죽는 것 있고 단시일에 죽는 것 있고 그래 그 차이는 있지마는서도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기 전에 사는 것은 다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몰라서 사는 것인 줄 알지 실은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 우리가 그렇게 세상에서 심신이 그 생기 붙은 것이 다 죽고 나면 그다음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시 살아나 가지고 이제는 영원히 사망하는 그 사망에서 계속될 우리들입니다.

그렇게, 사망에게 속해 가지고서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죄를 없애 버렸고, 우리가 또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해서 의를 성공했고, 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신 화친을 해서 이렇게 모든 사망과 생명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 대신해서 대속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하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으나 과거에 그 사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과거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이 사망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으로 사는 사람 있고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있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주격이 돼 가지고 자기가 자기의 주격이 돼서 자주자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를 자기가 주장해서 자기 뜻대로, 자기 소원대로 자기 것을 가지고 이렇게 사는 사람 있습니다. 요걸 똑똑히 좀 구별하십시오. 첫째는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요거 요걸 잘 알아야 돼요.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있고, 자기가 살지 않고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으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주님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자기가 사는 사람 있고 안 믿을 때와 꼭 같이 자기가 지금 자기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가 주장이 되고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요거 좀 어려운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사람 있고, 자기가 자기로 사는 이것은 벌써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을 때에 예수님과 연합해서 같이 죽은 자인 것을 자기가 믿는고로, 인정한다 말이오. 죽은 자인 것을 믿는고로, 죽은 자인 것을 인정하는고로 이제는 나는 죽어 없어졌다.

자기가 죽어 없어진 것, 자기 이성도 죽어졌고 자기 주관도 없어졌고 자기 욕심도 없어졌고 자기의 뭐 성깔도 성질도 없어졌고 자기의 계획도 없고, 마치 자기가 죽은 것이, 마치 그 사람이 죽어서 송장이 돼 버리고 나면, 송장이 되고 나면은 그 사람이 송장이 되기 전에 살아 있으면서 아프다, 배 고프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사람은 생명이 딱 끊어져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그런 작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작용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죽었으니까 죽기 전에 그 사람의 무슨 지정의라든지 소욕이라든지 소망이라든지 모든 속성이라든지 힘이라든지 계획이라든지 그런 것은 완전히 죽어서 송장이 돼 버렸으니까 그거는 일단 락져버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는, 죽으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믿기 전 자기가 자기로, 자기 몸이 자기 것으로, 자기 소유가 자기 것으로, 또 자기의 소원이나 계획이나 모든 비판이나 평가나 그것이 자기 것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으므로 죽음 안에서 산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자기 죽음을 연결시켜 가지고 이제 자기는 완전히 죽은 자인 것을 연습하고 그렇게 갖추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죽음 안에서 사는 일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부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첫째 공부하는 것은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고 하니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 죽은 이 공부를 합니다. 죽은 공부. 죽은 공부를 해서, 죽은 것 같은데 또 어떤 형편을 닥치니까 또 이게 불뚝 살아나 버렸습니다. 또, 아주 죽일라고, 죽일라고 애를 쓰고 죽은 자로 살려고 했는데 또 이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날마다 성도들이 싸우는 싸움이 이것이 성도의 싸움입니다.

이제는 내가 다 죽었다. 이제는 내가 다 죽어 버렸고, 나로 살고, 내것으로 살고, 내 몸으로 살고, 내 모든 이 가진 것도 내것으로 살고, 내 소욕이 살았고 내 성질이 살았고 내 계획이 살았고 내 욕심이 살았고 내 뜻이 살았고 내 중심이 살았고 내 비판이 살았고 평가가 살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이 돼 가지고 죽어야 하겠는데 이것을 지금 죽는 연습을 하고서 자꾸 힘를 씁니다. 죽는 연습을 하고 자꾸 힘을 씁니다.

내가 제법 죽었나 안 죽었나 해서 죽은 공부를 자꾸 이래 하는데, 이제는 뭐 나는 완전히 죽어 버렸고 이제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연합해 가지고서 나는 완전히 죽었다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 무슨 일이 닥치면은 푹 튀어 나오는데 내나 옛날 그놈이 튀어 나옵니다. 뭐 그때는 툭 튀어 나오면은 입도 제 입이고 손도 제 손이고 눈도 제 눈이고 발도 제 발이고 총명도 제것이고 소원도 계획도 전부 쫙 나서는데 그만 전부 자기가 내나 생생하게 살아 가지고서 그대로 쭉 나섭니다.

그것을 가지고서 평생 싸움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 로마서 7장에 보면은 바울이 평생 싸운 싸움이 그것입니다. 이 두 사이에 끼어서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하는 그런 것도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몸과 마음이 살아 있기는 살아 있으나 자기 것으로 살고 있는 것은 완전히 죽기를 송장같이, 아주 죽어서 매장한 송장과같이 죽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죽음의 완성입니다. 그 죽음의 완성 그것을 할라고 우리가 노력하는데 그것이 죽는 날까지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두려운 것이나 또 사람을 이렇게 사귈 때에 회개할 만한 그런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또 하나님 앞에 거리낌을 하는 것이나 그런 것이, 환난을 당할 때에 고통스러운 것이나 염려스러운 것이나 겁이 나는 것이나 사람과 거석할 때에 감정이 나는 것이나 또 분이 일어나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그것이 옛사람 자기가 살아 가지고서 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 자기가 완전히 죽어 버리고 예수님으로 완전히 살아났으면 다니엘 같은 그런 일을 만나는 것도 자기는 염려할 것 없고 예수님으로 살았으니까 예수님이나 염려했으면 염려했지 자기는 염려할 것이 없고 겁낼 것이 없고 그런 것이 없는데, 우리가 안 믿을 때와 같은 그 자기로서 자기를 염려하는 것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나 뭐 원하는 것이나 자기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그런 것은 아직까지도 내나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완전히 죽지 안하고 지금 시들시들히 이렇게 안 죽고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게 때만 되면 바짝 일어나고, 또 이성 비판으로 비판해 가지고서 기도하면은 이놈이 죽어야 될 줄 알고 죽이고 이라니까 죽은 듯이 엎드려 가지고 있다가서 또 어떨 때가 되면 나오고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을 주시는 것은 그럴 때에 나도 모르게 자기로 사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예수 믿기 전에의 그 사람이 완전히 죽은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반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반 믿는 것입니다. 반 믿는 것.

그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제는 내가 언간히 다 죽었지. 이제는 뭐 내게는 다 죽고 예수님으로 이제 다시 살고 있지. 내게는 뭐 이제는 내욕심이나 내 성질이나 내 뜻이나 내 기분이나 내 중심이나 나를 위하는 것이나 나 좋은 것이나 이런 것은 내가 없겠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역부러 만들어 가지고 딱 그 현실을 줄 때에 자기도 모르게 ‘이거 참 내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아직도 내가 죽일 나를 죽이지 못하고, 내가 죽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내가 완전히 연합해서 죽은 자가 되지를 못하고 있구나.’ 하는 그것을 깨닫고 또 얼마 동안 노력을 하고 회개를 하고 힘을 쓰고 나면 하나님께서 또 그런 현실을 줘 가지고 또 덜 죽었다 하는 것을 보여 주고, 또, 어떨 때는 위로하기 위해서 어떤 현실을 줘 가지고서 ‘이번에 그 일이야 내가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그런 일 했지 내가 죽지 안했으면 그 일 못 한다.

나는 이제는 참 내가 완전히 죽었고 참 예수로 산다. 그거는 예수님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생활했지 내가 조그만치라도 살아남아 있으면, 옛날 나를 내가 아는데, 옛날 내가 살아 있으면은 일 났다. 일 났을 건데 그거 보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는 죽은 거다.’ 이렇게 또 우리를 사기를 돋궈서 소망을 가지게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이제, 나는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을 나타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거게서 또 교만하지 안하고 새로이 힘쓰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죽는 것은 아주, 송장아 아닌데 송장같이 되어지는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희들을 권면하시는도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그말은 몸은 살아 있기는 있는데 벌써 잡아서 제물 삼아서 제단 위에 올려 놓은 그 짐승이 무슨 기거 동작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기 덩어리만 잡아 가지고 얹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말은 무슨 뭐이냐 하면 네 이 심신은 살아 있는데 완전히 죽어서, 잡아 놓은 짐승같이 너는 완전히, 아직까지 썩지는 안했지마는서도 이 고기덩어리가 있지만 완전히 네라는 그 주관, 네가 주인되어 있고 네 소유가 있고 또 네 무슨 소원이나 계획이 있는 그 자는 완전히 죽여서, 완전히 죽여서 다만 이제는, 제물은 돌아다니는 짐승을 잡아 가지고서 제단 위에 올리면 그 짐승은 풀도 못 먹고 뭐 걸어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입니다. 불에 구으면 구이고 삶으면 삶기고 아무 말 없이 삶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네가 이제는 네가 몸똥이는 살아 있으나 완전히 너는 잡아 놓은 짐승처럼 그렇게 너는 완전히 죽고 이제 고기덩어리 그것은 제물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고, 짐승은 저는 제물됐기 때문에 저는 제 소욕대로는 하나도 못 합니다. 그 제물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지. 그와 마찬가지로 너는 이제 완전히 너는 죽고 하나님이 자유 자재대로 너를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되라.

‘하나님의 사랑이 권면하시는도다’ 이것이 네가 행복된 것이요 이렇게 되라 하는그것이 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되라는 것이 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행복되고 이리 되면 내가 성공이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라고, 또 그다음에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게 합리적, 합법적, 이게 합리적 예배니라.’ 이것이 이치에 맞게, 법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고렇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고것이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연합을 하고, 또 예수님의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라 말은 나를 대신해서 주님이 다시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신 이 부활과 내가 연합해 가지고서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신 그분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그 분에 따라서 이렇게 움직이는 자로 그렇게 사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믿는 믿음이라 하는 건 무슨 말인고 하니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나를 대신해서 부활하신 그 사실을 확실히 인정함으로, 「믿는」 위에 믿는다 하는 거는 그것을 확실히 인정함으로 ‘예수님이 죽었으니 내가 죽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부활은 내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신 그분으로 살고 옛날에 살던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서 완전히, 살아 있으나 송장같이 자기 의사나 뭐 그런 것은 다 없이 완전히 죽어 버리고, 송장같이 죽고 그로 산다.

그것을 가리켜서 ‘아들을 믿는’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믿는' 믿는 말은 대신 죽으시고 대신 살았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요 내가 산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죽은 자로, 옛날 살던 것은 죽은 자로 완전히 죽어 버리고 이제 사는 자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이니까 이제 나는 예수님의 부활한 그 부활로 내가 산다. 그 부활이 내 부활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신인 양성 일위의 그의 지정의로, 그이의 소욕으로 소망으로 내가 사는 것이라. 이것을 믿는 것이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밑에 믿음은 뭘 말해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믿음 안에서 산다 하는 것은 주님의 사활이 내 사활인 것을 내가 믿는 것이 믿음이라. 주님의 사활을 내 사활로 내가 인정하고, ‘아들을 믿는’ 고거는, 요 믿음이 둘 있지요? 고 믿음이 두 말 있지 안해요? 믿음 둘.

위의 믿음은 주님의 사활을, 내 대신 사활했기 때문에 내가, 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다시 뭐 기거 동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은 요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인 양성 일위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분의 산 것이 내가 산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하심에 내가 연합해 가지고서 그분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 부활한, 주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그분대로 살지 내대로 살지 않는다 하는 요것을 확실히 요래 사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것이라. 그래서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그말은, 그러기 때문에 내 주관대로 살지 안하고 그분에게 피동돼 산다. 그분으로 동하고 정해서 산다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하는 이것을 자기가 지식적으로 먼저 가질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이성 비판적으로 가질 수 있고, 지식적으로 가지기는 제일 쉽고 그 다음에 이성 비판적으로 가지는 것은 조금 어렵고 본능적으로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본능적으로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본능적으로 가진다 그말은 자기가 실상으로, 자기가 자기를 주관해서 사는 게 아니고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딴 세력이 와 가지고서 그 세력이 내 마음을 주관하고, 내 정신을 주관하고, 내 소원을 주관하고, 내 감정을 주관해 가지고서 과거는 내가 내 속에 주인인데 내가 내 속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 속에 딴 어떤 세력이 와 가지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사는 것이라 하는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안하고 이것을 자꾸 우리가 연습을 해야 됩니다. 처음에, 오늘 오전에도 그 말씀했지만 그걸 자꾸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와 가지고 변화를 시켜 줘요, 자꾸 읽으면 자기가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꾸 자기가 변화되는 것을, 변화가 빨리빨리 됩니다. 읽기 전에는 세상에 담뿍 빠져 가지고서 세상에 전체가 돼 가지고 세상으로 가뜩찼지마는서도 자꾸 읽고 읽으면은 세상은 차차차 흐미해지고, 어둠컴컴하이 흐미해지고 하나님의 빛이 와 가지고 주관하는 것을 자기가 보게 될 것입니다. 이래 자꾸 변화가 된다 말이오. 자꾸 변화가 돼요.

이래서, 처음에는 지식으로. 나는 예수 믿지 안할 때의 내라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지옥 사망에 속해 가지고 사망할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영원 사망을 대신하고 사망에서 나를 빼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대신 영원 사망하고 사망에서 나를 빼냈으니까 빼 나온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는 거기 죽을 것인데, 나는 거기 따라 죽는 건데 대신 죽고 나왔으니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것이라 말이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내대로 살 권리가 없어. 내대로 살 권리 없고, 내것이 아니라. 내걸 찾으면 저 지옥을 가야 돼. 내가 지옥을 가면 예수님은 다시 도로 나오고 저는 지옥에 가야 돼.

이런데, 이렇게 이 사실을 우리가 이성, 이성이라면 이치를 깨닫는, 이거 뭐 이거 옳다 그르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성이라 하는 그것이 이치를 따져 가지고서 아는 그것이 이성인데 그 이치를 따져 가지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내가 죽은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남아 있는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산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내것으로 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대로 살아야 되고, 내 소원대로 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소원대로 살아야 되고, 내 주장대로 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장대로 살아야 되고, 이거는 내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 이 모든 이목 구비 수족이 다 주님의 것이라. 내것이 아니라’ 이렇게 요것을 비판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이성으로 비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연합해서 죽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 내가 믿음으로 죽고, 나는 완전히 죽었다 고걸 인정하고, 이성 비판으로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공을 들이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내가 참으로 송장처럼 죽은 자 되는 그 연습을 자꾸 해 가지고서 나중에 참, 내가 살아 있기는 살아 있지마는서도 예수로 살아 있지 내것으로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그렇게 연습을 해 가지고서 고 연성을 시키는 고것을 우리가 이성으로 합니다. 이성 비판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나는 연합했다. 예수님의 부활함에 내가 연합해 가지고 나는 지금 영생을 가진 자인 것을 인정하고 영생 가진 자로 지금 삽니다.

그러면, 고것이 이성 비판으로 고렇게 하고, 그라다가는 이제 그다음에는, 그러면 자기가 지금 자기는 죽는 연습을 하고, 또 자기는 예수로 사는 연습을 자꾸 이렇게 합니다. 예수로 사는 연습을 할 때에 죽는 연습도 자기가 지식으로 연습하고 그다음에는 이성 비판으로 연습하고, 사는 것도 지식으로 연습하고 또 이성 비판으로 연습을 하고 이라다가, 그러니까 예수님으로 살라고 하니까 예수님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대로, 예수님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지 예수님의 살고 싶은 것의 정반대로 나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예수님으로 사는 연습을 할라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지 안할라고서 주님을 자기 속에 모시고 이래 살면서 무슨 현실을 당할 때에 ‘주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래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자꾸 성경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면 주님의 뜻인가 저렇게 하면 주님의 뜻인가 자꾸 이래 묻고 이렇게 살면 성경으로써 ‘예수님의 뜻은 이렇다. 그러니까 이래 살아야 된다. 저렇다. 저래 살아야 된다.’ 이것이 돼 나가는데 고것은 뭐인고 하니 내가, 아직까지 죽을 내가 죽지 안하고, 내라는 것이 아직 죽지 안하고, 내라는 것이 죽지 안하고 내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에게 물어 가지고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지 예수님이 나한테 와 가지고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뜻대로 살라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는 돼요. 그거는, 얼마 힘을 안 써도 됩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건 되지마는서도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공이 돼 가지고서 그분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그분이 내 속에서 능동적으로 역사할 때에 그 능동에 따라서 내가 피동적으로 살아야 될 터인데 이게 도무지 그분이 내 속에 와 가지고 나를 주장하는 그런 일이 잘 되지 안하기 때문에 이것을 연습하는 것이 사람들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래 신앙 생활할라 하면은 주님은 내 안에 모셔 가지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서 주님이 내 안에 와서 주인공만 되면, 주님이 내 안에 오셔 가지고서 나를 주관하고 나는 그분에게 아무런 주권이 없는, ‘주님,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이 일은 내가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이래 묻는 것은 그분에게 피동인 것입니까, 자기라는 주동 역사를 하고 있는 자기 주관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어찌 돼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라면 어찌 되는 것이지요? 자기 주관이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예? 그래. 저 큰 소리로, 기도하는 저 사람이 잘 해요. 잘 알아 들어요.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자기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예수님하고 접을 붙일라고,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살라고 지금 애를 쓰는 단계에 있는 것이지 아직까지 자기 주관이 살아 있는 것이라 말이지. 살아 있는 것이고.

이제, 자기는 묻지도 뭐 어쩌지도 안하는데 그분이 내 안에서 이래라 저래라 해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분이 생각하라 해서 내가 생각하고, 그분이 뭘 계획하라 해서 계획하고 순전히 그분이 능동이 되고 나는 그분에게 피동으로 사는 요 일이 돼야 요것이 완성이 되겠는데 이것이 안 돼서 그것을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기독자들의 연습인 것입니다. 이래서 바울이 「그런즉」 「그런즉 이제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가지고 역사하고 계시는 요것을 자기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성경 기자들이 성경 기록한 것이, 그것이 이 성경은 정확 무오의 기록입니다. 성경은 정확 무오의 기록이고, 성경 기록한 건 틀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확 무오의 기록이고, 또 이 성경은 전지 전능의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 기자가 전지를 했고, 또 성경 기자가 말한 것은 다 전능의 말입니다. 또 그는 정확 무오했습니다. 정확 무오, 하나도 털끝만치도 틀림 없고 바로 됐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정확 무오요, 또 성경은 전지의 지혜의 말이라, 전능의 능력의 능력이라. 이걸 성령이 기록했는데, 그러면 이 성경 기록할 때에 성경 기록한 사람은 자기 주관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더불어 교제해 가지고서 자기 주관이 하나님의 성령에게 물어 가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렇게 가르쳐 줘서 성령에게 배워 가지고 기록을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성경 기자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성경 기자가 하나님에게 피동돼 가지고, 하나님은 주동이 돼서 피동이 돼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까,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피동입니까 자기 주관이 지금 하나님으로 더불어 유기적인 교제를 해 가지고서 서로 교제해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서 주장을 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기록한 것입니까, 어떤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지금 믿습니까? 피동입니까, 자기 주관이 지금 하나님으로 더불어 유기적으로 교제를 해 가지고서 이렇게 물어서 그렇게 의논해 가지고 기록한 것으로 믿습니까, 이제 성경 기자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성경 기록할 때는 하나님이 그 속에 내주하셔 가지고 주관하시니까 자기네들이 기록하고 싶은 것도 기록하고 기록하기 싫은 것도 기록하고 아는 것도 기록하고 모르는 것도 기록하고 이렇게, 그분이 자기 속에서 주장해 가지고 기록을 할 때에 자기들은 피동이 돼 가지고 기록한 것으로 이렇게 배웠습니까,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이제 뒤에 해석한 것입니까, 처음에 자기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의논해 가지고 자기 주관이 지금 살아 있어 가지고서 의논해 가지고 이렇게 한 것으로서 그렇게 믿습니까, 그건 첫째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자기 속에서 주장해 가지고 그분에게 피동이 돼 가지고서 이렇게 기록한 그것으로 믿습니까, 후자입니까, 전자입니까? 전자라고 믿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후자로 믿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녜, 이 후자입니다. 이거 후자입니다.

지금 아직까지 세계의 조직 신학에서 성경 기록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둘이 의논해 가지고서 유기적으로 기록을 했다, 유기적으로 기록해서 의논해 가지고서 성경 기자의 자의식을 다 인정을 하고 유기적으로 기록했다 이것이 지금 요게까지 온 것이 세계의 조직 신학의 지금 진도입니다. 요게까지 진도가 돼 가지고서 이래 있습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실상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을 지금 턱 말을 해서 내 놓으면 담박 이단이라고 정죄를 해 가지고 이래, 받아서 그걸 말하지 못하지마는서도 이제 말한 대로 후자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주장이 되셔 가지고서 그를 붙들고 성경 기록했기 때문에 그분들이 기록할라고 계획도 하지도 안했고, 원하지도 안했고, 아는 것만 기록하지도 안했고, 또 기록했다고 그것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 속에서 당신이, 기자 속에서 내주하셔 가지고 그들을 통해서 이렇게 당신이 주관해 가지고 이래 하니까 그들은 그저 거게 피동돼 가지고 이렇게 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지금, 기록 영감에 대해서 논단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저 대체적으로 그 마음을 감동을 시켜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거게 유오설이 있습니다. 거게 틀린 것이 있다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기적으로 이렇게 서로 교제를 해 가지고서 이와 같이 했으나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고것은 어데가 틀리느냐 하면은 성경 기자들이 성경 기록한 것을 모릅니다. 성경 기록해 놓은 것의 뜻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뜻도 모르고 뭐할라고 이거 예언 같은 거 기록하라 하니까 그저 기록을 했지 예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거게 모순이 돼 가지고서 그것이 지금 일치가 되지 안하고 있는데 실은, 후자로 말하면 딱 들어맞습니다.

후자로 말하면 흠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축자적 영감을 말합니다. 축자적 영감, 그라면 하나님께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이와같이 지금 붙들고 써서 그렇다 하는 축자적 영감을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축자적 영감 그것이 우리가 깨달은 대로는 제일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도 말하는 것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가 지금 내 안에서 살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은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로 내가 너희들에게 한다. 또 이거는 내 생각으로 한다.

그러나 내가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람으로 알기 때문에 이것이 틀리지 안하고 옳고 바른 말인 줄 안다.’ 그렇게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구별해서 말하는 것은 이 바울 같은 분들도 그때까지는 자기 속에 완전히 주님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주장하셔 가지고 그분이 주관하시고 그분의 지체가 되고 피동이 돼 가지고 할 때도 있고, 가다가는, 주님이 자기 속에 확실히 주인공이 돼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알 때도 있고, 이거는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 알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게 좀 어룸할 때는 이것이 똑 자기 주관이 들어서 하는 것같이 그러나 이 주관이 성신의 감동받아서 이와같이 하는 것이고 그분이 똑똑히 우리에게 이렇다 하는 그것을 잡지 못하는 그럴 때는 그렇게 말을 해서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해 가지고 발표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 ‘너희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옮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이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라 하면 그대로 되었으리라’ 하는 요 말씀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속에 주님이 주장하셔 가지고서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이 뽕나무로 바다에 심기우라 하라’ 자기 속에서 주님이 자기에게 ‘이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 이렇게 말을 하라’ 하시는 주님이 자기에게 확실히 알고 분명하고 또 그분이 그래 하라는 데 대해서 자기가 그분이 내 속에서 역사해서 그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기가 확실히 알고, 그것이 절대자가 이와같이 나한테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뭐 천지가 없는 가운데서 이런 천지가 하나 만들어져라 해도 말한 대로 그대로 만들어질 것이고, 있는 것이 다 소멸되라 해도 소멸될 것이고 하는, 그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 고것을 확실히 알고, 네가 확실히 알고 고 믿음이 있어서 그와같이 말할 때는 그거는 능치 못함이 없다 하는 고것을 주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신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거기 가지 못하니까 자꾸 더듬어서 자꾸 이렇게 해서 차차차 깨달아지는 것이 겨자씨 믿음을 자꾸 연구하는 가운데에서 요새 제가 깨달은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시는 일이 보면 그분은 닥쳐서 뭐 할 때에 안 할 거는 안 하고 할 것은 하고 이렇게 척척 다 해 버렸습니다. 그 말한 대로 다 돼. 주님은 말한 대로 다 됐습니다. 주님은 말한 대로 다 됐는데, 깨닫고 보니까, 가루어져 가지고서 알지 못했는데, 깨닫고 보니까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다 이루리라’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됐으면 뭐 자기 소원이 무슨 소원이든지 네 소원대로 하나님이 순응하겠다 하는 그 말씀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아니고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이렇게 말씀했으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은 소원하는 대로 소원 성취가 다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 사람의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하실 수 없는 곧 하나님이 하고 싶은 고것만 내가 말하게 되고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고것만 내가 소원하게 돼서 하나님이 원하는 고것만 네가 소원하게 되니까 네 소원이 하나님 소원처럼, 하나님 소원이 소원대로 다 완성되는 것처럼 네 소원도 완성 된다. 이러니까 소원 일치가 되는 것을, 소원일치가 되는 것을 거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무슨 소원을 하든지 그 소원은 하나님께서 다 들어서 소원 성취를 이루어 주겠다는 그런 말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예? 전자이지요. 전자. 그거 전자라. 전부 이래 말해 놨는데 우리가 어두워서 몰랐습니다.

이러니까, 겨자씨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은 못 고쳤었다고 하니까 ‘그래. 데리고 오라.’ 하고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과 얼마나 같이 있어야 되겠느냐? 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에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면서 책망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얼마나 함께 있겠느냐?’ 이라면서 데리고 오라 해 가지고서 그 귀신을 내어 쫓아 주었습니다. 쫓아 주고 난 다음에 주님이 떡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우리는 못 쫓아냅니까?’ 이라니까 못 쫓아낸 이유를 말했습니다. 이유를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산을 옮겨서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심기워질 건데 귀신 들린 그 귀신 나가는 것이 문제가 있느냐?’ 고렇게 말했다 말이오.

고렇게 말한 그것은, 그러면 그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그 믿음은 무슨 믿음이냐? 하나님과 참 연결된 믿음인데 연결되면, 우리가 자꾸 말을 하면서도 그 뜻을 잘 깊이 바로 파악을 못 했다 그말이오. 연결된 믿음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셔 가지고 ‘그러면 이 귀신을 나가라 하라’ 이렇게 아버지가 명하시니까 명하신 아버지의 명령이 예수님을 통해서 귀신 나가라고 이렇게 명령하니까 아버지가 예수님과 하나요. 예수님이 말한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말하니까 그 귀신이 그만 즉시 나가고 말았다 말이오. 그러면, 고 지금 ‘너희들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으면 되지만 없다’ 하는 그말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연결이 돼 가지고, 하나가 돼 가지고서 아버지가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지금 이와같이 동하고 정하는 것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와같이 연결이 되어 있으면 되는데 연결이 안 돼 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생명이 안에 있으면은, 마치 생명이 없으면 온 몸이 다 죽어 버려서 신경이고 세포고 다 죽고 생명이 있으면 온 세포나 신경이 다 살아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이 모든 심신의 기능이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 움직입니다.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 움직인다는 그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의 힘으로써 우리 심신이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된 심신으로 우리 심신의 기능이 움직이니까 움직이면 이 움직임은 어떤 움직임이겠습니까? 그 움직임이 전능의 움직임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전능의 움직임입니다. 전능의 움직임.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이 나와 이렇게 연결이 돼 가지고서 내 안에 계시게 되면은,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속에 몇 가지가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이 세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몇 가지가 우리 속에 있습니까? 우리 속에 있습니까 몇 가지 있습니까? 이것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또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은 우리 속에 몇 가지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내나 셋입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는 하나로 나뉘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진리가 제일, 말씀이 제일 가에 나와 있고, 말씀을 붙들고 들어가면 진리를 잡게 되고, 진리 가지고 붙들고 들어가면 영감 잡게 되고, 진리와 영감을 붙들게 되면 진리와 영감은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붙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생명이 우리 안에 이제 계시기 때문에, 생명이 떠나면 장사라도 죽은 송장이 되고 생명이 오면은 장사의 그 모든 근육과 골수가 다 움직이지 않습니까? 움직이는 거와 마찬가지로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와서 계시면 우리 속에는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움직입니다.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신의 기능들이 움직이는데, 생명의 기능으로 움직이면 이 생명의 기능으로 우리의 심신들이 움직여는데 우리의 심신들이 이 생명의 기능으로 움직이면 생명의 기능인 그 생명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기능은 뭐입니까? 생명의 기능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과 영감과 진리입니다. 그러면 내 속에 생명의 기능이 움직인다 그말은 진리대로 진리의 힘이 와 가지고 진리대로 내가 진리대로 움직이고 진리의 힘으로 움직이고, 영감대로 움직이고 영감의 힘으로 움직이고, 또 예수님의 대속대로 움직이고 대속의 이 완성 공로, 완성, 뭐 이거는 완전입니다. 사죄도 완전, 칭의도 완전, 하나님과 화친도 완전입니다. 피조물로서는 완성인데, 이 완성이 우리 속에서 역사해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말로 해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새겨서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이 심신의 움직임은 이 세 가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세 가지로, 심신의 기능은 우리 속에 이 세 가지로 움직입니다. 세 가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은 우리의 전지가 됩니다. 우리의 전지가 되고 전능이 되고 또 우리의 완전이 되고 또 우리의 의가 되고 거룩이 되고 진실이 되고 완전이 되고 또 영광이 되고 존귀가 되고 평강이 되고, 이렇게,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은 혼자 계십니까 둘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혼자 계십니까 둘이 있습니까 셋이 있습니까? 몇이 있습니까? 셋이 똘똘 뭉쳐 하나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입니다. 나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나뉘지 못합니다.

이제, 하나되어 계시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와서 계시게 되면은 예수님은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이시지마는서도 지금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형체를 없이 지금 가지고,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인 양성 일위의, 인성은 영체는 있지마는서도 신령한 몸이기 때문에 그것도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런 무형의 존재와 같은 존재로 우리안에 계시면서 그 실력인즉 이 세 가지 실력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전지가 되고, 예수님은 나의 전지요 나의 전능이요 나의 완전이요 나의 승리요 나의 거룩이요 나의 의요 나의 진실이요 나의 영광이요 나의 덕이요, 이것을 자꾸 외어야 됩니다. 자꾸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주님은 나의 생명이시라.

주님은 나의 능력이시라, 나의 전지시라. 전능이시라, 완전이시라, 거룩이시라, 진실이시라, 의라.’ 이렇게 자꾸 우리가 외워서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면 내 이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의가 됩니다. 내 안에 계셔서 움직일 때에는 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안하고 진실이 아니면 움직이지 안하고 거룩이 아니면 움직이지 안하고 전지가 아니면 움직이지 안하고 전능이 아니면 움직이지 안하고, 이러니까 이것이 이제 은혜로서 이거는 순전히 믿음으로, 은혜로 되는 것인데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지존자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완성이 돼서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고 아버지의 말이다’ 또 이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 또 `내가 일하는 것은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시게 되는 것이라.’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으로 요렇게, 당신으로 능동된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신으로 능동된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전부 예수님은 피동으로 됐습니다.

그러면, 피동으로 된 것이 예수님은 능동으로는 하나도 털끝만치도 능동 일은 하지 안하시고 전부 완전히 피동으로 했는데 피동된 그것이 뭐이냐? 우리를 대신해서 피동됐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에게 완전 피동을 한 자라. 완전 피동을 한 자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이 칭의입니다. 완전 피동으로 입혀 주신 것이 칭의요, 또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삐뚤어진 게 없는 것으로 완전히 대형 대속한 것이, 그것이 사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4장에 보면은, 거게는 보면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하나가 되는 그런 방편에 대해서 그 과정을 우리에게 기록해 가지고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 중의 내가 돼 가지고, 내 중의 내가 돼 가지고서 당신이 내 언행 심사를 맡아 주관하셔 가지고서 당신의 역사하시는 것이 내 언행 심사가 돼 가지고 나오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이 일을 우리가 해야 되는데 이게 뭐이냐 하면은 이것에 방해하는 자, 이 일을 방해하는 자가 누군고 하니 방해하는 자가 그 자가, 방해하는 자가 있는데 그 자를 어떻게 해야 된다 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돼. 그걸 죽여야 돼요. 우리가 죽이는 공을 지금 하고 있고, 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서 다시 하나님 향하여 산 자로 이래 되어지는 이 공부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오셔 가지고 계셔서 참으로 나는 성전이 되고 성전이 되면 집이 그 집에 대해서 무엇인가 능동으로 행동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집이 그 주인을 위해서 능동으로 행동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기거 동작이 있습니까, 집이 기거 동작이 있습니까, 움직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 다만 주인이 만들어 놓은 대로 그대로 그저 떡 아무 생명도 없고 움직임도 안 하고 그대로 주인이 안에 살도록 이렇게 떡, 해 놓은 대로 그대로 보호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뭐 주인이 와서 벽을 뚜드려 깨도 암말도 안 하고 또 냅둬도 암말도 안 하고, 이것 모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능동으로 당신이 주권을 가지고 주관을 가지시고 이래 하지마는 우리는, 기능적으로는, 기능적으로 완전히 독단 기능이라는 그런 것은 전연히 없는 걸 말합니다. 전연히 없고, 이제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렇게 말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해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지체, 이 손이 제 맘대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이래 움직이지 손 제맘대로 하나도 못 합니다. 그렇지 안해요? 혹 여기 가만히 있는데 뭐이 와서 꾹 찌르면 깜짝 놀라는 이럴 때는 할까 몰라도 그거는 딴 세력이 와 가지고 그걸 해하니까 움직이지 이 단독은 움직이는 게 아니고 그저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지체라, 하나님의 몸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연습을 해야 되는데, 죽이는 연습을 해야 되겠고, 살아나는 연습을 우리가 해야 되겠는데 그것을 요한복음 14장에는 보면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주님 계명 지키는 그 계명 지키는 걸 통해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그 속에 가 가지고 거처한다 이랬습니다. 계명 지킬 때에 계명 지키는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들어 오셔 가지고서 그 안에 계시게 된다. 또 계명을 지킬 때에, 자꾸 지킬 때에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서 거처를 같이 하게 된다. 그러면 삼위 일체의 하나님과 계명 지키는 자와 같이 거처하게 된다. 또 말씀하시기를, 계명을 지키는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에게 나를 나타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에게 나를 나타낸다.

이것은 계명을 지키는, 그게 제일 껍데기 생활인데, 계명 지키는 그 생활을 하면 그 생활을 통해 가지고 내적으로 주님과 자기와의 연결이 된다. 계명을 지키게 되면은 내적으로 주님과 자기와 이렇게 연결이 된다. 계명을 지키게 되면 자꾸 이와같이 연결이 차차차 돼서 나중에는 그를 통해서 나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아무래도 이것을 다 자꾸, 단번에는 말할 수가 없는데, 어쨌든지 우리는 완전히 죽여야 할 자를 죽여야 되니 내라는 것은 완전히 죽여야 됩니다.

그래, 요새 늘 거기 대해서 말씀하는데, 원죄와 본죄를, 원죄는 뭘 말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가리켜서 원죄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주인으로 해 가지고 자기가 자기 주인되어 있는 그 자가 원죄로서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주인이 돼 가지고서 자기가 자기를 주관해서 자기로 사는 것이 그것이 원죄로 사는 것이라 그말이오. 원죄로 사는 것은 멸망뿐이지 거기는 산 것은 털끝만치도 섞여 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짜든지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리고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살릴 자를 살리는 것은, 그라면 살릴 자로 사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그러면 예수로 사는 것이 살릴 자로 사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나는 완전히 죽어서, 이러기 때문에 내 주관이라는 거는 전혀 없습니다. 주관도 없고 사욕도 없고 나는 완전히 잡아 놓은 짐승처럼 그렇고, 이제 주님이 나를 주관하는 그것이, 주님이 나를 주관하시고 나는 무주관자, 나는 무주관자, 욕심도 비판도 의견도 생각도 계획도 아무것도 없는 자, 완전히 이거는 기능적으로는 하나의 무생명체, 생명 없는 거와같이 그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렇게 되어지고 순전히 전지 전능의 완전하신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시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는 거는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래 말하면 여러분들이, 모든 이종교는 말이오. 모든 이종교는 철학입니다. 모든 이종교는 자기가 그 종교를 믿습니다. 자기가 종교를 믿어요. 모든 이종교는 자기가 종교를 믿는 것이 불교면 불교를 자기가 믿고 무슨 교면 무슨 교를 자기가 믿는 것이 그것이 이종교요, 또 자기가 지금 수양을 하고 회개를 하고 또 그 법칙을 지금 불교 법칙은 이러니까 내가 과거에는 이 법칙대로 살았다가서 이제는 불교 법칙이 저러니까 불교 법칙대로 살고, 또 저 종교에 개종을 하면 저 법칙 대로 살고 이제 자기가 이 법칙대로 저 법칙대로 따라 사는 것이 이종교의 생활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완전히 자기 부인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인해서 자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 완전히 부인되고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서 내 손도 주관하고 내 팔도 주관하고, 내 정신도 주관하고 내 마음도 주관하고 내 신경도 주관하고 예수님이 완전히 주관해서 나는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이오, 또 하나 형체로 말하면, 예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요, 또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완전히 나는 부인되고 예수님이 나를 대속했기 때문에 와서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사시면, 예수님이 오시면 몇으로 오십니까? 서이로 오십니다. 서이로 오는데, 다시 말하면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완전히 진리가 나를 주관해서 진리가 나를 붙들고 삽니다. 진리가 나를 붙들고 살고 영감이 나를 붙들고 살고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 나를 붙들고 살지 내 주장권이라는 거는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이거는 박탈당했고 완전히 죽여서 이거는 아무 감정이나 주관이나 완전히 없어지고 진리가 지금 와 가지고서 주관하고 영감이 주관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주관하고 사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수많은 과정을 말할 때 그 결과만 두고서 말하는 것이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만들어 가지고 애를 써서 이게 만들어져야 된다 말이오.

만들어지지 안하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형편을 당했을 때에 예수님은 기뻐하시는데, 예수님은 기뻐하시는데 우리는 섭섭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와는 그 사이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하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그것을 만류를 했지마는서도 예수님은 기뻐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기뻐하는 걸 예수님이 기뻐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걸 우리가 기뻐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이런 환난이나 뭐이나 어떤 뭐 이런 걸 당해 가지고서 우리 구원에 방해가 되는 희로 애락이라는 그 어떤 것이든지 그런 것은, 그 희로 애락이 뭐 좋다 나쁘다 자꾸 뭐 이렇게 말하는 그 희로 애락을 말하고 있는 그것이, 그것이 죽여야 할 사람입니까, 그대로 살려서 잘 길러야 할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예? 어떤 사람이지? 완전히 죽여야 하는 사람입니다. 죽여야 하는 사람. 그거 죽여야 하는 사람이오. 그런데, 예수님은 기뻐하는데 그놈은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기뻐하는데 그놈은 싫어하요.

예를 들면 하나, 이거 뭐 깊숙이 들어갈라 하니까, 만일 어떤 순교할 때가 있으면은, 순교할 일이 있으면은 주님은 그 순교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주님은 순교하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우리는 싫어합니다. 왜 희로 애락이 주님과 일치되지 않습니까? 일치되지 않는 그것은 그때는 옛사람이요 그거는 자기 주관으로 내나 죽여야 할 사람 그 사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새로 중생된 새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바꿔야 되는데 바꾸는 그 순서가 요한복음 14장에도 말해 놓은 대로 그 방편이 뭐이냐 하면은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또 그 말씀대로 내가 행할라고 자꾸 이라는 가운데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주님과 나와 동거 동행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여러분들이 명상을 하면 자꾸 이만 하면 알아 들어졌을 것이오. 우리를 구원한 것이 진리가 구원했고 영감이 구원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구원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는, 진리나 영감이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나 이것은, 이것이 다 유한한 것입니까 무한한 것입니까? 무한한 것입니다.

이게 다 영원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입니다. 다 영생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데, 내가 이렇게 이 생명이신 이 셋으로 더불어 내가 연결이 될라고 하는 데에는 제일 먼저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는 게 제일 쉽습니다. 이게 껍데기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자꾸 연결이 되면 연결되는 가운데에서 또 영감과 연결되고 대속과 연결되는데, 우리가 내게 마음도 있고 성품도 있고 뜻도 있고 생각도 있고 다 있지 않습니까? 다 있고 또 감정도 있고 욕심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정신도 있고 신경도 있고 다 있지 않습니까? 있는데, 이제 진리를 내가 자꾸 읽습니다. 읽어서, 읽는 거는 내가 연결될라고, 진리와 나와 하나될라고 지금 읽고 하는 것인데. 진리를 내가 자꾸 읽고 외우고 자꾸 이래합니다. 이라면, 그 진리와 나하고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데 연결이 안 됩니다. 연결이 안 됩니다. 자기가 그 말씀을 만 번 외어도 연결 안 됩니다. 연결 안 됩니다.

연결은, 꼭 연결은 뭘로 되느냐 하면은, 우리 속에, 고 표현을 할라면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 안하면 또 빛이라고, 자연의 빛이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빛이라 하는 것은 내 속에 옳고 바르고 참되고 깨끗하고 영원하고, 평가적으로, 내 속에 평가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평가적으로 처리하는 요소가 있고 비판적으로 처리하는 요소가 있으니까 고 요소를 가리켜서 뭐이라 하느냐 하면은 고 요소를 가리켜서 혹 자연의 빛이라, 양심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 진리와 연결이 되지 요것이 아니면 진리와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 고렇게 하는 가운데, 자꾸 진리를 외우고 또 생각하고, 새김질하고 외우고 외우고 하는 가운데에서 거게서 이거 해석할 수 없이 고 속에 차차 양심이 조그매씩 북돋아 가지고서 양심이 생겨나와 가지고 나중에 고 진리와 연결될 수 있는 고런 작용이 있기 때문에 고게다가 말하지 안하고 자꾸 말씀을 새김질하고 자꾸 익히라 익히라 이래 말하는 것이지 실은 그 말씀을 자기가 아무리 익혀 봤자 감각이 익히는 것이고, 자기 또 이성이 익히는 것이고, 지성이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거 지성이니 감각이니 뭐 이성이니 그런 거는 암만 해 봐도 이거 인간을 탁월한 완전성에 속한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는 연결을 못 합니다. 연결한 요소가 아닙니다. 연결이 안 됩니다. 연결이 안 되는데, 다만 그리하다 보면은 자기 속에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채택하는, 자연의 빛이라고도 하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 가지고서 고것이 조그매씩 생겨나서 움이 틀 때에는 그것이 연결이 됩니다. 움이 틀 때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요 작용이 역사하지 안하면 하나님과 우리와는 연결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하는 그 말은 내나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보지 양심 없으면 하나님 보지 못한다. 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것도 또 양심이라야 하나님과 접선이 되지 양심 외에는 접선이 안 된다 하는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처럼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의 대속을 암만 사모하고 이래 애를 써도 양심을 쓰지 안하면 소용이 없다 말이오.

양심이라하는 거는 뭐이 양심이냐 하면은 평가적이라 말은 요것보다 요게 낫다 요것보다 요게 낫다 자꾸 이래 가지고서, 이거냐 이거냐 암만 봐도 그래도 그걸 따지고 따져 보니까 이게 낫겠다, 따져 가지고 따지고 보니까 이게 가치 있고 이게 옳고 이게 좀 낫다 이렇게 자꾸 옳고 바르고 참된 그것을 찾는 고 요소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고 요소 고것이 앞잡이가 돼 가지고, 요걸 가리켜서 양심이라 하고서 우리의 빛이라. 너희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고 빛이라 하는 고것이 다른 말로 말하면 양심이라고 고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게 작용해야 인간 이상의 영원 완전성에 속한 진리나 영감이나 예수님의 대속을 접선할 수가 있지 그게 없으면 접선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요것을 쓸라고 생각지 안하고 요거는 냅두고 자기 지식이나 감각 가지고 얼마든지 기억하고 얼마든지 외우고 얼마든지 연구하고 얼마든지 입으로 증거하면 될 줄 알지만 입으로 증거 평생 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외워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고게는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어느 게 옳으냐? 요게 옳다. 요게 옳지 않느냐 요게 옳지 않느냐 요게 틀리지 않느냐?’ 비로소 평가적으로 이와같이 역사하는 요 역사가 눈이 떨어져야 자기와 연결이 되지 고게 떨어지기 전에는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꾸 인제 노력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를 자기가 접하나 예수님을 접하나 영감을 접하나 다 같은 것인데 영감은 감동이기 때문에, 잘 모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인 양성 일위로서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셨다가 이제 다시 부활하셔 가지고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형체로 나타나셨던 것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기 쉽고 생각하기 쉽고 또 진리는 성경에 문서로 기록했기 때문에 접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쉬우니까, 제일 진리가 접하기 쉽고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신인 양성 일위의 대속을 접하기가 그 다음으로, 우리 주관으로 말이오. 주관으로서는 쉽고 또 영감은 그 사이에 조금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접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꾸 이렇게 접해서 공을 들이기를 어짜든지, 뭘 해도 좋습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 아닙니까? 말씀이든지 그리 안하면 예수님의 대속이든지 그리 안 하면, 자기 마음을 옳고 바르게 감동시켜 주는 그 역사가 영감인데, 영감을 원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 내 속에 옳고 바르고 참된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옳게 깨닫게 해 주시는 그런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옳은 것은 행할 수 있는 그런 감동이 있으면 좋겠다. 옳은 것을 참 가치 있게, 옳은 것은 돈보다도 권세보다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옳은 것이 가치 있다, 옳은 것을 가치 있게 평가할 수 있는 그런 내 속에 뭣이 감동이, 영감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영감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니까 그 셋 중에 어느 걸 하든지 요것을 공부를 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잊어버리지 않겠다. 잊어버리지 않겠다. 또 내가 항상 모시고 살겠다. 내가 동행하고 살겠다.’ 모시고 살겠다. 동행하고 살겠다. 또 그분에게 피동되어 살겠다. 뭐 이거 다 한 가지 말입니다. ‘모시고 살겠다. 내가 잊어버리지 않겠다.

잊어버리지 않겠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겠다.’ 요거 어느 거라도 좋으니까 요것을 공을 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잊어버리지 안할라 하는, 주님 잊어버리지 안할라 하는 게 좀 쉽고, 진리를 잊어버리지 안할라 하는 건 조금 더 쉽고, 예를 들면 진리라면은, 겨자씨 믿음이라는 겨자씨 믿음, 또 씨 뿌리는 비유라면 씨 뿌리는 비유, 자꾸 그것을, 자꾸 그 이치를 자꾸, 진리를 생각한다 말이오. 진리를 생각하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안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할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어쨌든지 이 셋을,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잊어버리지 안하면, 마지막에, 하나 잊어버리지 안하면 그다음에 셋을 다 잊어버리지 안하고 다 한목 잡는 것이 되어집니다. 그래 보십시오.

그래 가지고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이라다 보니까 그만 누구하고 말하다 보니까 주님과, 내 생명, 이 셋이 생명인데. 생명을 잊어 버려 버리고. 말하다 보니까 그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주고 받지 벌써 주님을 잊어 버렸다 말이오. 또 내가 뭘 이래 주님을 사모하고 이라다가 뭣이 갑자기 눈에 퍼뜩 뜨이니까 그만 그 보이는 그것 때문에 그만 잊어 버렸다 말이지. 또 접할 때 잊어 버렸다 말이오. 그러면 내가 무엇을 접함으로 잊어버리고 보임으로 잊어버리고 들림으로 잊어버리고.

그래서 고것을 들려도 잊어버리지 안하고 보여도 잊어버리지 안하고 접해도 잊어버리지 안하는 요 일을 자꾸 연습을 시켜서 연성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무슨 그 폭탄이 떨어져 가지고 어떻게 한다 해도 내가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은 어떤 자이시라는 것을 내가, 전지 전능자라. 생명까지 바쳐서 나를 사랑하시는 자라,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개별 섭리를 하고 계시는 주님이시라 요렇게 요 주님을 내가 지식으로 환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요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폭탄이 와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내가 모시고 기억하고 동행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것이 다 내게 문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거 우리가 경험을 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래서, 잊어버리지 안하는 연습을 자꾸 해요. 잊어버리지 안하는 그런 연습을 하는 데에는 무슨 그런 일이 있으면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그렇게 하다 보면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런 현실을 만나야 되니까 안 되니까 자꾸 제가 만들어요.

잊어버리지 안하도록.

이제 주님하고 함께, 예를 들면 이래 길을 가면서 ‘주님 저게 사람이 옵니다.’ 하며 ‘저 사람이 옵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게 지금 무엇이 물건이 저게 있습니다. 저 물건은 어떤 물건입니까?’ 자꾸 주님하고 둘이 합해 가지고 물건도 보고 사람도 보고 말도 해 보고 자꾸 이 일을 연습해요. 자꾸 연습을 하면은 이제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는 일이 그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우리 일생 동안 연습해야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데라도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과 나와의 동행했을 때에는 그런 거는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문제되지 안해요. 해결이 돼요. 주님이 다 해 주시요.

그러고, 또 주님 모시는 것도 자꾸 연습해요. 역부로, 뭘 이래 그걸 내나 그래 해도, 이거 뭣을 자꾸 그런 일도 자꾸 이거 하나 거석하면서 ‘주님, 이거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주님, 그라면 여기 대해서는 이 결과가 어찌 됩니까? 여게 대해 성경이 뭐라 합니까’ 자꾸 주님하고 중얼중얼하면서 주님하고 떨어지지 안하고 주님하고, 주님이 날 놓고 가실 수 없도록 주님을 붙들고 자꾸 주님하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이 연습을 자꾸 해서 그저 그라니까 이라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하고 나하고 동행하고 있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동행하고 있고, 어떤 접촉해도 동행하고 있고 그저,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는 연습하고 주님과 같이 동거 동행하는 이 연습을 자꾸 이렇게 하면은 우리가 자꾸 변화가 돼지고 심령이 밝아지는 걸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우리를 멸망케 하는 어두운 것들이 다 제거됩니다. 제거돼서, 이렇게 자꾸 동거동행하고서 이와같이 하는 가운데에서 내가 자꾸 성화가 되어집니다. 성화가 되어져서 모든 잡된 것이 물러가고 하면 우리 심령이 밝아집니다. 심령이 밝아지고 모든 것이 정리가 돼지고, 그러면 이 세상도 바로 알게 되고, 모든 사물을 바로 알게 돼 가지고서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는데 어쨌든지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 내가 자기가 살지 안하고 주님이 분명히 내 안에 오셔 가지고서 당신 욕심대로 사시는 것이고 나는 거게 그분의 지체가 돼 가지고 피동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말을 하고도 ‘이 말은 내가 뭐할라고 말했노? 이거 주님이 한 말인데.

내가 이거 뭘 이런 생각을 가졌노?’ 그 생각을 가졌는데 그게 내 생각인지 뭐인지 몰랐는데, 가졌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나에게 생각을 가지게했다 말이오. 생각을 가지게 하고 말을 하게 하고 이라니까 ‘또 오늘은 이 설교를 하라고 하시네. 또 이거 뭐 할란가?’ 이거 보면 그래 놓고 보면 자꾸 하나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셔 가지고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걸 알 수가 있다 말이오.

그래서, 어쨌든지 우리는 이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가 우리 속에 생명이 돼야 됩니다. 생명이 되고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를 주관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를 믿는 이것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역사하시는 것, 순전히 당신이 내게 권세를 가지고 역사하시고 나는 완전히 죽는 것이 나 할 일입니다. 죽는 것이 문제요. 내가 들어서 설교도 잘하고 내가 들어서 장로노릇도 하고 내가 들어서 목사노릇도 하고 내가 들어 가지고 하는 그걸 죽이기 전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완전히 나는 죽어서 장례된 거와같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서 이제 이 세 가지 새생명으로 사는 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례를 오늘도 베풀었지마는 세례받는 거는 그것을 지금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 죽고 이제 다시 예수님으로 더불어 새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이 사람으로 지금 이거 아주 죽여서 장례식을 지내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새사람으로 사는 이 출발하는 장례 지내고 새사람으로 이제 나 가지고서 출발하는 요 기로점을 베푸는 것 요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녜, 자꾸 새벽으로 나오면 좀 요새 많이 좀 배워야 되겠는데, 나와서 진리를, 이거 뭐, 이거 말로 못 해요. 말로, 영감의 도리를 말로 못 하고 자꾸 눈을 감아서 이래 자꾸 명상하고 자기가 살면 알기 쉽지마는서도 생활하지 안하는 사람은 암만 가르칠라 해 봐야 그거 가르쳐야 그에게 이해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천하의 학박사라도 성신의 감동이 없으면 예수 믿는 이치는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하는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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