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모

 

1984. 6. 18. 월새 

 

본문 : 시편 73편 25절∼28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주를 멀리 하는 그 행사는 다 여인이 자기 본남편 두고 간부 따라가는 거와  같은, 그와 꼭 같은 성질적인 것으로 주님이 그를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27절에 '대저 주를 멀리 하는 자들은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이는 과거로 보면 주를 떠난 민족이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일시는 잘 되는 것 같지마는 결과적으로는 살펴서 통계를 맞춰서 보면  안 망한 것이 없습니다. 망하나 그것이, 사람들은 언제나 직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당장 보는 그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서서히 망하는 그것은  사람들이 망하는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그렇게 하십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는 것도 암만 봐야 봄 오는 것같이 안  보입니다. '오늘은 봄이다. 오늘은 겨울이다. 겨울인지 봄인지 모를 만침 서서히  하나님이 진행시켜서 기어코라도 추운 겨울이 가는 줄 모르게 가고 따뜻한 봄도  오는 줄 모르게 와서 사람들이 벗고도 더워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여름으로  화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그러합니다.

자기가 정원에다가 화초를 심어 놓고 암만 봐야 크는 것이 보이지 안하지마는  땅속에 씨앗을 심어 놓은 그 화초가 자라서 그 시기가 지나가면 다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눈을 닦고 봐도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러하고 또 우리를 당신  법대로 멸망시키는 것도 그러합니다. 당장에는 안 보이지마는서도 몇 해가  지나가면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그러합니다. 그 정원의 꽃의  주인은 보고 '이는 암만 봐야 안 크네. 자라지 않네. 그래도 얼마 딴데 가서  있던 사람이 보고는, 와서 보고 '아, 꽃이 벌써 이렇게 자랐네' 그렇게  말합니다. '뭐이 자라? 하나도 자라지 않았는데. 많이 자랐다고서 그렇게 말하는  거와같이 사람들이 흥해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옆에서 보면 뭐 그게 복된 것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돕는 것이 보이지 안하지마는 한 이삼  년 있다 와 보면 그 사람은 아주 딴사람의 형편이 됐습니다. 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도 일 년이라 하는 그 세월이 세상으로 봐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루라 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벌써  육신적으로도 이삼 년이면 그 사람의 가치는 아주 현저히 변동이 됩니다. 이삼  년이면 그 사람의 가치가 아주 폭등될 수도 있고 폭락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모르지요. 저는 모르고 같이 사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안 보다가  보는 사람, 먼데서 보는 사람 그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이삼 년 동안에  굉장히 참 존귀한 사람이 되는 사람도 있고, 이삼 년 동안에 과거보다도 생각도  못 할 만침 아주 허무한 사람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치 무성한  식물이 자라가는 것처럼 인생의 그 성장도 그 사람이 모든 면으로 존귀하게  가치있게 자라가는 것도 그것도 참 속성입니다. 아주 연한 순같이 그렇게  자라가는 것도 자랍니다. 또 그 사람의 멸망도, 멸망이 자라는 것도 연한 순같이  자랍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그 사람이 시작하면 시작하는 그 때부터  다르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네가 성전 기초를 놓는 그날부터 전 후를 똑똑히  계산해 봐라 네가 모든 면을 네가 똑똑히 계산해 봐라 네 신앙생활 시작한' -  신앙생활 시작했다 말은 예수 믿기 시작했다 말이 아니오. 자기 마음과 자기  소망과 자기의 정신을 고쳐서 이제는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참 자기가 한번  고쳐서 옳은 사람 바른 사람이 돼 보겠다고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에게 잘못된  것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축복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그 마음으로 변화가 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변화되면 뭐 시간  걸리는 게 아니라 변화 되는 그 시간부터입니다. 그 시간부터 자기에게 대한  사람들도 달라지고 그리되면 달라지는 것이 대번에, 자기가 과거에는 무심히  지내 왔는데 '요게 내 원수로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주시는 이  은혜를 받아 이제는 참사람으로 한번 살아 보고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면 그 시간에 눈이 밝아져서 '아, 이 사람을 내가 떨어지면  못 살 줄 알고 이렇게 좋은 친구지마는 요게 내 원수로구나.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말하디마는 요게 내 원수로구나 요 친구 요게 내 원수로구나. 요게  나에게 있는 모든 하나님 중심 생활을 다 망쳐 버린 악한 동무로구나, 악한  동무는 선한 행실을 손해케 한다, 요게 악한 동무로 구나. 나는 요것을 만나  가지고서 반대를 해도 요것으로 인해서 내가 물이 들고 점점 더러워지는구나.

대번 압니다. 자기 원수를 알게 됩니다.

 또 '아, 이 사람은 나는 재미 없는 사람으로 여겼고 이 사람은 사귈 만 한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이루어 볼라고,  참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안하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라고. 영원한 무궁한  나라에 유익을 도모하는 생활로 살라고 하고 보니까 이 사람이 정말로  성자로구나, 이 사람이 참으로 성녀로구나. 이 사람이 나에게 은인이로구나, 이  사람을 내가 사귈 만한 참 성도로구나' 하는 것이 당장 보여질 때에 자기의  심령이 자기 사람이 변화됐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게 제일 빨리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이렇게 턱 살라고, 그렇게 살라고 하고 보면 과거에 자기가  원하고 원하던 그 모든 경영하는 경영이 자기가 요렇게 작정하고 난 다음에 고  경영을 볼 때에 그것이 수정이 됩니다. '아 내가 이 경솔한 이것은 될 리가  없다. 공중에다가 활을 쏘면서 잉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엉뚱한  짓이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이 도울 리가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올 리가 없고  이것을 하려고 하는 이 중심에서 내가 움직이면 내라는 사람의 정신이 바를 리가  없고, 생각이 바를 리가 없고 계획이 바를 리가 없고, 모든 성품이 바를 리가  없고, 언행 심사가 바를 리가 없고 사람 접촉이나 모든 경영이 바를 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이나 성공이 올리가 천부당 만부당 하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알게 됩니다. 그거는 자기 변화에서 알게 되는 것이오.

 또 이제 다른 사람을 봅니다. 과거에 부러웠습니다. 과거에 부러워서 아, 그  사람 참 부럽다.' 그 사람 하는 말이 참 아주 씩씩하고 인기 있고 매력 있고  이랬는데 자기가 참사람으로 살라고 착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와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보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귀 자식이로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을  다 미혹시키고 죽이는 역사로구나. 내가 이 미혹을 미혹인 줄 모르고. 이거  배암인 줄 모르고 살았구나. 이거는 참 외식자요 이거는 참 불쌍하고 가련한  자로구나. 만일 이대로 이 생활을 계속한다고 하면은 이 사람이 중년이 되면  어찌 되겠느냐? 이래 살아서 한 삼십 세가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래 살아서  이 사람이 사십 세가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래 살아서 만일 오십 세 육십  세가 되면 어찌 되겠느냐?' 환하게 알아집니다. '아. 이 사람은 멸망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가까이 해 가지고는 내가 물들어 가지고 내가 멸망할  사람이로구나.' 자신이 변화 되면 모든 접촉하는 사람도 정평 정가하게 되고,  모든 사건들도 정평 정가 하게 되고, 모든 사업들도 모든 사물들도 정평  정가하게 되고,  그럴 때에, 남을 보아서 자기를 깨달으라고 그 모든 주위의 환경을 봄으로 정평  정가한 그 심령이 될 때에 자기를 이제 헤아려 보면 자기도 정평 정가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서 회개할 것이 자꾸 나옵니다. '아, 이거는 안 됐다.

이거는 안 됐다. 고치는 것이 나옵니다. 이렇게 고치는 일에 착수해 가지고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모든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이 전부 다 망할 일만 하고 전부 저  망하는 일만 자꾸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저 망할 일만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멸시할 것입니까? 성경에 남의 눈에 티가 발견되거들랑 네 눈에 들보가 있기까지  발견하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아. 모든 사람이 이러니, 저 사람이 지금 망할  짓을 하고 가는데 망할 걸음을 걸어가고 있는데, 자, 나는 보자. 저 사람과 나와  비교해 보자.' 비교해 보니까 내가 나를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은 껍데기만  알지마는 내 속속들이 내 맘도 알고 성질도 알고 내 생각도 알고 욕심이고 뭐고  다 아니까,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내게 대해서 남을 보는 그 단점을 가지고 내게  있는 단점을 찾아보니까 그 사람보다 몇 십 배 더 단점이 많게 됩니다.

 이러니까 이종교는 이종교는 점점 그 종교인이 돼 갈수록이 교만해지지마는,  교만해지면서 불교는 점잖하게 '음', 불교인은 보면 압니다. 신문에 보면 중들은  보면, 언뜻 보면 미꿈하요. 다 점잔하게 이래 가지고 있습니다. 보나 그것은  생명 없는 부처를 섬겼다는 것이 확실히 표가 납니다. 그 속에 생명의 작용이  아무 것도 없소. 예수 믿는 사람은 자세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느슨하게,  아주 이렇게 느슨하게 바보되는 것 있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 아주 사기  협잡군으로 변해 가는 것 있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아주 칼날 같고  까랑까랑해서 이 사람에게는 앞에 상대만 해도 이 사람을 속일 수도 없고 이  사람이 내 마음을 환하게 보는 것 같고. 내 생각을 보는 것 같고 뭐 칼날 같고,  똑 비수검 칼날 같고 빛 같아서 햇빛 같아서 그 앞에서 뭐 어두운 것을 말할  수가 없고, 그 사람을 만나면 그만 삐뚤어진 말을 할 수가 없고, 그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이거 뭐 이랄까 저랄까 몰랐던 것도 그 사람을 만나 보니까 물을  것도 없습니다. 물을 것 없이 '아, 이거는 틀렸구나. 아, 이거는 옳구나.'  그러니까 만나 가지고 잠깐 얘기하는 가운데서 '뭐 의논할 것 있으면 뭐입니까?'  이래 말한다고 하면은 '예, 뭐 그만 아무 의논할 것 없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이거 어쩔까 이랬는데 와서 접촉하는 가운데서 그만 이렇게 해야 되겠다 저렇게  해야 되겠다 환하게 알았으니 거기에 대해서 다른 걸 뭐 물을 것이나 의논할 게  없습니다. 이렇게, 그럼으로써 그 빛 앞에 가면 모든 것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라'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빛이라 말은 우리는 빛이  아니요, 빛을 반사 받은 우리들인데 빛은 주님의 빛이시요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주님의 빛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생각할 때에, 이렇게 눈을 감고  주님을 생각할 때에 거기에서 삐뚤어진 것은 다 물리치게 되고 옳은 것은 자꾸  차지하게 되고, 자기 마음이 자꾸 주님 생각하니까 변화가 됩니다. 변화가 돼져.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자가 바로 믿는 사람은 물컹한 사람 아니오. 느슨한 사람  아니오. 천치 바보 아니오. 무골호인 아니오. 만일 껍데기는 유한 것 같아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아, 이 사람은, 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등신이니까 꼬아  먹을라면 다 꼬아 먹을 수 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유한 것을 보고서  저희가 와서 다 삼킬라고 왔다가는 와 보니까 이것은 참 단쇠입니다. 단쇠.

여기에는 그거 없어. 여기에는 그런 것은 없으니까 이제 철공소 가보면 알  것이야. 철공소가 보면 이 기계에서 쇠물이 줄줄 줄줄줄 흘러 나습니다. 줄줄줄  흘러나오다가 차차차 멀리 나오니까 찝게로 꾹 집어 가지고서 저리 지단하게  좋아가면은 철근, 철근이 주루루 돼 나온다 그말이오. 이 물렁한 물이지마는서도  나중에 보니 딴딴한 쇠라. 이것 모양으로 단쇠라 이렇게 그 사람이 보니까  물렁하니까 '그거야 뭐 거머쥐고 꼬아 먹을라면 꼬아 먹겠고 얼마든지 죄를  지을라면 지을 수 있고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그렇게  보여졌는데, 멀리 보기에는 보여졌는데 차차 차차 접촉을 해 보니까 강하기가  그렇츰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츰 담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츰 광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날카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쇠와 같다 이랬소. 단쇠 그것 보니까 물컹물컹하이 얼마나  좋겠소? 나 어릴 때, 지금 여기서는 그런 것 없는데 솥 때우는 장사들 보면 이  쇠물을 녹혀 가지고서 왕겨를 놓고 왕겨 속에다 없어 가지고 요래 욜랑욜랑  하면은 빨간 것이 똑 감 홍시 모양으로 욜랑욜랑 하니까 그것 둘러 마셨으면  좋겠다. 어릴 때 고거야 참 맛 있겠다, 요래 보였다 말이오. 그런데 그것 둘러  마신다면 그 사람은 고만 속이 타서 죽을 것 아니겠소? 그렇게 사람 보기에는  무르나 진리로 무르고 하나님으로 물러졌기 때문에, 진리로 무르고 하나님으로  유해지고 하나님으로 온유해지고 하나님으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으로 이와 같이  모두가 다 모 없는 이런 원만한 사람이 되어졌기 때문에 무른 것 같으나 굉장히  강한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학개서에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성전 기초를 쌓는  그날부터 계산해 봐라. 그날 이전이 어땠으며 이후가 어떤가? 네 생활을 네가  살펴봐라. 성전 기초를 쌓은 이전 날과 이후 날을 살펴봐라.' 즉시 달라집니다.

만일 자기가 참 하나님의 뜻대로 '이제는 나는 참사람으로 새사람으로 어쨌든지  나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양식으로 삼아서, 죄악이 오면 죄악을 내가  이용해서 내가 의를 이루겠고, 모든 악인을 만나면 악인을 이용해서 나는 선인이  되겠고, 도적을 접촉하여 도적으로 인해서 나는 그것을 먹어서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 자기가 구원을 이루겠다고 단정을 짓고 딱 시작하고 나면 그  시간부터 자체가 변해지는 것이 확실히 보여지고 자기가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볼 때에 비판도 평가도 아주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평가가 아주 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인이 보는 인간 평가와 악인이 보는 인간 평가는 아주 천지  차이로 달라집니다. 정반대로 달라지는 것이오.

 자, 주변에 있는 사람 비판 평가가 달라지지, 또 모든 사물의 평가가 달라지지,  모든 경영의 평가가 달라지지 이러니까, 과거에 부러웠던 것은 '아이구야,  그것이 내게 왔으면 어쩔 뻔 했노?' 과거에 부러웠던 것은 염병처럼 내가,  전염병처럼 내가 피하지 안할 수 없고, 과거에 시시하게 무시하게 보았던 그  신앙생활은 내가 생명 바쳐도 이거는 취해야 되겠다는 이런 사람으로  변해지니까. 자체가 변해지지, 환경에 대해서 비판과 평가가 변해지지, 사모가  변해지지, 경영이 변해지지 이러니까. 그것만 변해집니까? 자기가 행동해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함께 한다는 것이 환하게 보여집니다.

 요거 보여 줘도 강퍅하면 그것 안 들어. 강퍅하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다.

옆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면 대번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다.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참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이  계시는가 보다' 이라고 난 다음에도 마귀란 놈이 고다음 시간부터 다 변화하기  때문에 '뭐 안 믿는 사람에게도 그런 것 있는데 우연이지 자연이지 뭐 하나님의  은혜라? 이래 가지고서 그만 그거 다 무마시켜 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다 그걸  삭혀 버리고 마요.

 그러기 때문에, 자신을 연구해서, 내가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며, 옳은 데  따라서 내가 변화되는. 내가 성화가 되는 사람이냐 악한 데 따라서 변질되는  이런 것이냐? 내가 변하기는 변하는데 내가 변하는 것이 어떤 것에 변하느냐?  선을 따라서 변하느냐, 악을 따라서 변하느냐, 내 본질이라는 인간이 뭐냐 하는  것을 볼 때에 자기를 미워서 죽이면 싶습니다.

 이래서, 루터 선생도 자기가 미워서 이걸 어떻게 내가 자살을 하면은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겠고 이것을 어데 가서 어떻게 바위가 떨어지든지  차가 가든지 가다가서 날 고만 콱 치어서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자기를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싶어서 자기를 죽이고 싶은 그 마음이, 자살은 못 하고 어데서  무엇으로 죽였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자기를 죽이면 싶은 고 마음이 사흘  동안을 계속 했소. 그렇게 자기가 미운 다음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구속받아 이제는 자기보다도 구속하신 주님을 인해서 자기를 아끼지 안할 수  없고, 주님을 인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조심해서 만나지 안할 수 없어. 왜?  주님이 큰 힘 들여서 이래 놨는데 내야 죽는 것 마땅하고 지옥가  마땅하지마는서도 주님의 하신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내가 그 공로가 아깝고 그  공로가 마음에 참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대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내 죄값에  죽는 게 마땅하다. 이런 것은 죽어야 된다. 죽어야 돼. 죽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  천 번도 만 번도 더 하나, '죽어야 되나 나를 대속하신 주님을 인해서 아무래도  이걸 살려야 되겠다. 아무래도 이걸 고쳐야 되겠다, 아무래도 이걸 바로 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성도들의 소원이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이 이삼 년 동안이면 완전히 그 사람의 가치는 변해집니다.

뭐 시간이 길게 가지 않소. 이삼 년 동안이면 변해집니다. 그 사람이 한 달  동안이면 변해져요. 봅니다. 제가 작정한지 한 달 안에 봅니다. 그 사람이 벌써  눈 밝은 사람은 작정한 지 그날 봅니다. '아 저 사람이 오늘부터는 좀 살아  볼라고 하는구나.' 내나 그 일 하지마는서도 '오늘부터는 저 사람이 정신이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 있구나. 오늘부터는 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구나. 저  사람은 이상하네 오늘은 어제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갔는지 마음이 풀어졌네.

오늘은 방종해졌네.'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마는서도 그 사람의 얼굴빛에 다 있고  그 피부에 다 나타난다 말이오. 피부에 다 나타나고 있어. 이렇게 사람은 자꾸  변해지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이 천한 것을 하나님 같은  온전한 자를 만들라 했으니까 가속도로 변해져야 따라갈 것 아닙니까? 가속도로  변해지는 것입니다. 타락도 가속이요, 향상도 가속이요, 성화도 가속이요 악화도  가속입니다.

 그런고로, 여기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우리가 사모하면, 무엇을  사모하든지 사모하면 그와 가까워집니다. 사모하면 사모하는 그것이 내 마음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 사모하면 또 내 마음과 힘이 거기에 기울어집니다. 결국은  나는 사모하는 그것을 위해서 움직이게 되고 사모하는 거기에 대해서 나는  욕망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결국은 사모하는 그것으로써 내 속은  가득히 차게 되고 또 사모하는 그것을 따라서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기 때문에 돈을 사모하는 자는 두 말 할 것 없이 돈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돈에 따라서 움직이고 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돈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자 돈이 그 사람을 주장하니 죽고 살고, 구원이 되고 안 되고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받고 안 받고 돈만 위주로 하기 때문에, 돈만 표준을 해 가지고서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전부 생각하는 것도 돈 위주. 비판하는 것도 돈 위주.

사모도 돈 위주, 경영도 돈 위주 이러니까, 돈이 완전입니까? 돈이 인간보다  큽니까? 그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거는 틀림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면, 돈이 아니고, 자, 사람이라 합시다. 그러면 사람을 사모한다면은 그  사람이 완전입니까? 그 사람이 전지전능입니까? 그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주관합니까? 내세를 주관합니까? 결국은 사람을 사모하는 자는 사람 위해서 살게  되고, 사람 사모하는 자는 사람만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사람 사모하는 자는  사람에게 피동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를 본받아라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 기록한 그 영감을 본받아라  그말입니다. 영감을 본받아라. 자신을 보면, 나는 바울 본받지 안해요. 베드로도  본받지 안해요. 엘리야도 본받지 안해요. 아브라함도 본받지 안해요. 왜?  틀림없는 주님이 계신데 주님 본받지 뭣 때문에 주님 외에 그런 것  본받겠습니까? 그는 그대로 구원 얻었고 내 구원은 따로 있는데 내가 아브라함  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런고로 사모하는 것은 반드시 나는 그것이 되고야 맙니다. 사모하는 것은  나는 그와 가까워지고 내 마음은 그가 차지하게 되고 내 노력은 그가 차지하게  되고 내 모든 경영과 계획은 그를 위하게 되고, 이러니까, 점점 그 화 돼  가지고서 그것이 나를 주장하고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내 모든 전 움직이는  생활은 그것을 위함이 되어지니까, 인간 위하든지, 돈을 위하든지. 권세를  위하든지. 직장을 위하든지. 사업을 위하든지, 자. 그것 위하는 사람이 되어지면  그것 위하는 그것을 하늘나라에서 등용을 합니까? 안 하요. 하나님만 위하고,  진리 위하는 것도 하나님이 등용 안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방편을 진리로 쓸  것이지, 진리는 우리를 구원하는 구주가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는 인격이 없는  하나의 이치의 존재요. 이런고로, 신구약 성경인 진리는 왜 중요하냐? 이는  주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났고, 주님을 알라면 그를 통해서 알 수 있고, 주님을  사귈라면 그를 통해서 사귈 수 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라면 그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그는 주님과 나 사이의 올바른 이치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에게 대해서  내가 향하는 것도 성경 말씀만이 올바른 이치요, 주님이 내게 하실 때는 그  올바른 이치를 통해서, 주께서 주의 것이 내게 올 때도 내것이 주에게 갈 때도,  내 성의가 가는 것도 고 진리를 통해서 가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된다 말이오.

주님과 나 사이에 유일의 결합의 법칙이기 때문에 진리가 필요한 것이지 진리도  주님이 없이 진리만 하면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무얼 사모했느냐? 내 마음은 무엇이  차지했느냐? 내 마음은 무엇이 몇 타를 차지했고, 몇 타를 차지했느냐 이것을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종일 내 마음을 무엇이 차지했는지 차지한 그것이  됐습니다.

 '아,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만 사모하고 진리만 사모하며 뭐 그러면  그것만 하고서 모든 일 안 하고?' 주님 사모하면 주님과 가까워지지 또 주님이,  자꾸 사모하니까 주님이 내 안에 와서 자꾸 계시게 되지 주님으로 충만하게  되지, 나는 주님만 사모하니까 주님만 위하게 되지 주님이 삐뚤어진 것으로  당신을 위하라 했습니까? 주님 위하는 것은 전부 옳고 바르고 참되고 진실 된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아니면 당신 위함이 안 돼. 당신 위하다 보니까 진실한  사람 됐소. 당신 위하다 보니까 정직한 사람 됐소. 당신 위하다 보니까 사랑의  사람 됐소. 당신 위하다 보니까 온전한 사람 돼 버렸소. 이러니까, 당신이 내가  당신을 사모해서 당신이 내 안에 가득 차 가지고서 내가 당신 위하고, 이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피동하고, 당신만 위하다 보니까 당신을 사모하고. 내가 당신을  위하다 보니까, 당신 좋도록만 할 것 아니겠소? 당신에게만 피동 될 것  아니겠소? 돈을 사모한 사람이 결국은 돈을 위주로 해 가지고 하니까 돈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주님을 사모하면 주님을 따라서 움직이니까  주님을 따라 움직이면 주님이 날 지배하니까 완전자가 지배하는데 왜 사업이 안  되겠습니까? 전지자가 지배하는데 와 무지가 되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가 진리와 주님 외에 자기의 사모를 두는 것은 자기 죽고 그것  죽습니다. 내가 돈을 사모하면 돈을 위하는 것인 줄 압니까? 내가 아내를  사모하면은 아내를 위하는 것인 줄 압니까? 아내만 사모하니까 아내만 내 속에  가득히 찼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아내로 인해서 움직였습니다. 내 모든 노력의  목적과 결과는 아내를 위함이 됐습니다. 내가 아내 위함 됐으니까 그는 나 위함  될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위하고 그는 나 위했으니까 그는 나 죽였고 나는  그 죽였고 나는 그 속였고 그는 나 속이고 말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내가 완전 같으면은 아내가 완전 같으면은 완전을 위하니까 내 행위가 완전이  됐지마는서도 아내는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입니다. 나도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입니다. 이러니까 만물보다 거짓된 그것을 위했으니까 나는 전부 다 거짓된  것이 되고 말고 아내는 나 때문에 거짓된 것 되고 말지.

 내가 돈도, 돈을 사모했으면 나는 돈을 위함이 됐고 돈을 나를 위함이 됐지요.

돈은 날 위해서 돈이 많아졌소. 나는 돈을 위함이 돼서 돈이 또 커졌소. 돈이  많아지고 커졌으면 돈 그것이 커져서 내 모든 시간을 돈이 다 뺐들었고 돈의 그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다 모았고 이용했고 했으니까 돈이, 나 위한 재물이  불탑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나 위한 재물은 다 불 탑니다. 나 위한 재물은 다  불타요. 내가 재물 위한 내 생애는 전부 불타고 마요. 이러니까 나는 돈 망쳤고  돈은 나 망쳤지. 내가 주님을 사모하고 이라면.

 자, 가정에서 내가 진리만 사모하고 주님만 사모했으니까. 진리만 사모하니  진리 사모를, 진리 사모를 앉아서 됩니까? 아내에게는 아내에게 대해서 내가  진리 사모하니까 아내에게 대한 그 모든 것이 진리를 목적으로 진리를 목표로  진리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진리 위해서만 하고 하나님 위해서 했으니까 그  아내에게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위할 것이냐? 아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할 것이며, 아내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리에 맞도록  할 것이며, 아내에 대해서 진리에 맞도록, 아내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맞도록  하다 보니까, 자. 그 아내에게 잘못한 게 있겠소 없겠소? ○○○선생 아내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면 이 아내와의 관계에는 진리를 위함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아내와의 관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나님을 위함이 될까. 이러니까,  내가 그 아내에게 하나님 위했는데 그 아내에게 내가 완전 행위를 했습니다.

완전 봉사를 했습니다. 틀림없는, 심판받지 안할 것 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사모를 고쳐야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썩을 것만  사모하고 땅의 것 사모하고. 주님 사모하면 모든 것 다 됩니다. 옳고 바르게  참되게 다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 해도 이 아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은 이 아내에 대해서 진리를 위함이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진리를  버리는 것이 안 되고 이 아내에 대해서 진리를 위함이 될까, 아내와 관계에 진리  위했는데, 나는 진리에 위하기 위해서, 내가 이 아내로 인해서 진리를 버릴까 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진리를 위함이 될까 해서 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진리 위하는 관계가 될라고 애를 썼는데 고것이 아내를 살리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살리는 것이오. 주님도 그러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들이 다 서로 죽이오. 주님과 진리 외에는 사모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과 진리 외에 딴걸 사모하는 것은 자기가 그것화되기 때문에.

그것화되기 때문에 그게 망할 때에 나도 같이 망합니다. 나는 그것 망치고 그건  나 망치고, 기한이 되면 나는 그것 다 망쳤고 그거는 나 다 망쳤고 이래서 다  망하고 마는 것이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마귀 유혹에 수입을 주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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