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모


선지자선교회 1983년 3월 6일 주후

 

본문 : 시73: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세밀한 해석은 새벽마다 서 목사님이 해석해 주실 것입니다. 너무 오전 설교가  앞뒤가 잘라져서 어린 신앙들이 알아 듣지 못할까 해서 간단하게만 좀 말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예수  믿는 사람이 회개를 하다가 '회개가 이거 무슨 소용이 없다.' 그렇게 생각될 때  있습니다.

 l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루 종일 양심에  가책과 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 앞에 늘 잘못됐다는 것만 자꾸 하나님이  알려 주시니까 늘 하나님 앞에는 책망 맞는 일뿐입니다.

 l5절에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그 말은 자기가 예수 잘 믿어야 소용없다. 회개해야 소용없다.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이 더 잘되고 복받는데 그렇게 공연히 별스럽게 까다롭게, 죄  죄 의 의 회개 회개 그렇게 뭐 살게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이 말은 스스로  말입니다. 인간 자기 말이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회개해야 소용없다.

뭐 죄 짓는다고 안 되나 어데? 누구 보니까 죄 지어도 되기만 잘되더라' 이런 말을  하는 그 주장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주장은 그게 스스로 주장이라 그 말이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이라 그거요. 자기 생각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생각과를 먼저 구별해야 됩니다.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라' 그렇게만 생각했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짤막한 이 세상 살이를 준 그것을 나도  궤휼로 살았을 것이다. 궤휼이라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을 꾀우고 속이고 하는 그  생활,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닌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진리와 영감으로 살지 아니하는 그 생애는 전부가 다른 사람 꾀우고 속이고 또 저는  또 저와 다른 사람에게 꼬이고 속고 하는 그 노름이지 그 외에 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뭐 일관으로 일생을 성공에서 성공에서 참 화살같이 달아났다 해도  그 전부가 자타를 속이고 속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 하더니' 이거  도무지 선한 사람은 잘되고 악한 사람은 망하고, 회개 하면 잘되고 죄 지으면  망하는 이것이 원리 원칙인데, 꺼꾸로 되는 이 사실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거요. 그러니까 심히 마음에 고민합니다.

 고민하다가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다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간다는 말과 같고  기도로 묵상으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니까 세상 봉창이 뚫어집니다. 세상 봉창이  뚫어져요. 세상 봉창이 딱 가로 막고 있기 때문에 그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세상  안에 것만 보고 듣고 알지 세상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 가지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꿰뚫는 영원을  내다보는 그런 눈이 띄어집니다. 그것을 말합니다. 영원을 내다보는 그 눈을 가지고  보니까 저희 결국을 내가 보았다 그 말이오. 죄 지어도 잘되는 사람 의를 행해도  안되는 사람 그 사람의 결국이 어떻다 하는 것을 내다봤습니다. 비로소.

 l8절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이렇게 죄 지어도 형통하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던짐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형통 형통에서 반성할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고 죄를 지어도 모든 일이 형통하니까 그대로 일사천리로  일생을 형통으로 마치는 그 사람이 그게 멸망까지 미끄러져서 걸리는데 없이  미끄러지는 것이라. 그게 미끄러지는 것이라.

 사람이 자꾸만 자기에게 조그만한 것만 잘못되어도 거기 대해서 탈이 나고 폭로가  되고 또 말썽이 나고 일이 지장이 되고 뭐 거짓 말 한마디만 해도 그만 그게 탄로가  나 가지고 사업이 절단이 나고 해 놓은 모든 일이 다 파괴가 되어지고 이러는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그것이 범죄로 미끄러져 멸망받을 미끄러움에 미끄러지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발 받침의 말뚝을 박아준 것이라 그거요. 그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20절에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꿈에 뭘 봤다 할지라도 잠 깨고  나면 그 뭐 소용 있습니까?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리이다' 주가 깬다 말은 주님이 영원한 왕국으로 등장함을 말합니다. 주님이  영원한 왕국에서 왕으로 살 그때에 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죄를 지어도 형통하고  회개할 것도 없이 뭐 형통 형통해서 이렇게 나가는 사람을 복인 줄 알았지마는  주님이 나라로 임하실때 가 보니까 그 형상을 멸시한다. 그 형상이 참혹하다 그  말이오,  보니까 이목구비 수족은 기능이 없는 아주 무지무능자이지, 또 어린 아이 같이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지, 용모는 험상이지 의복은 순 쓰지 못할 얼이  져서 구멍이 뻐끔뻐끔하게 베를 짜도 한뼘 가다가 씨 하나가 들어가고 또 두뼘  가다가 씨 하나 들어가고 그러니까 그것이 베 짜는데 얼진다 얼진다 하는 건데 그래  놓으니까 갈아봤자 몸띠 다 나옵니다. 그런 것을 옷을 해 입고 돌아다니니까 참  볼품 없다 그거요.

 그게 뭐이냐? 그것이 이 세상에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해서 고쳐 살지를  못하고 마구잡이로 살아 놓으니까 행위의 의복도 아주 험하지, 어째 열흘 만에 말씀  한번 지키고 한 달 만에 한 말씀 지키니까 베를 짜는데 날뿐이지 써는 가끔 가다  하나씩 치면 그거 뭐 베가 되겠어요? 그거 가지고 옷 해 입는 거라.

내가 요새 보니까 국산들, '이거는 등외품입니다.' 이거는 뭐 불합격이라던가?  '이거는 불합격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값이 반 값 밖에 안 됩니다.' '불합격이 뭐이  불합격인데, 어딘데?' 그래 이래 찾더니마는 이 올 하나 잘못 되었는데  불합격이랍니다. 아주 값이 싸요. 얼이지는 것은 이래 베를 짜다 이래 한번 가고  이래 왔는데 그것이 한 뼘 가다가 하나 가고 두 뼘 가다가 하나 가니까 그거 뭐 옷  될 거 뭐 있습니까? 그런 거 가지고 누가 옷을 해입고 다녀 보십시오, 얼마나  추한고.

 그거 모양으로 일생 생활이 영원을 위해서 회개한 깨끗한 생활 하지 못하니까 그  나타났을 때에 참 볼품이 없다 그 말이오. '주께서 깨신 후에' 주님이 나라로 임하실  때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이래야 회개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금생과 내세를 일관해 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금생만 보고 내세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바로 믿지 못해요. 금생과 내세를 같이 놓고 일관으로 봐야 되고 지금  용모와 이 다음 무궁세계의 용모를 같이 봐야 돼요. 지금 자기 위신 올리려고, 권위  올리려고, 다른 사람이 무슨 좀 자기 위신에 걸리는 말만 한마디 해도 마구 불을 써  가지고 야단을 지겨서 자기 위신 권위를 올려 세우려고 야단을 지기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나타날 그 권위와 지위와 영광과 형편과 수치 그거는 보지를  못한다 말이오. 만일 그걸 봤다면 굉장할 것입니다.

 여기서도 잘나서 세상 일을 남보다 앞서고 눈을 부릅뜨고 날뛰는 그 사람들이  정말로 예수님의 나라에서 나타날 그때의 형편과 자기의 형상 자기의 모양과 지위  권위 그것을 알아놨으면 못난 사람들은 예수 믿지도 못할 것이오. 막 그 사람들이  이래 서둘러 쌓아서, 저거 욕심에 눈이 딱 가리워져 가지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못난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그래 놓으면 그 잘난 사람 때문에 예수 못 믿을 거야.

시간으로 금생과 내세에 영원 무궁을 같이 보는 사람이 돼야 되고 또 이 세상의  모든 형편 사정과 무궁 세계의 형편 사정을 같이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주님 외에  사모할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보면 그 좋은 것이 내세에 좋다는 게 아니고  좋은 그것을 봐서 무궁 세계에 좋은 걸 우리가 추상해야 되고, 세상에서 참  꿈에라도 자기는 그런 것 되기를 원치 안하는 그런 참혹한 것을 보거든 무궁 세계에  참혹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그런 지혜를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이 사람은 기도  가운데에서 이것을 발견했소.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면서 이 금생 아닌 영원  무궁의 장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활 후에. 자기의 될 형편과 모든 사람의 될  모양을 보지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안한  사람입니다. 이 둘을 발견하고 보니까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왜? 과거에 그렇게 산  게 좀 전에는 후회가 되더니마는 지금 생각하니꺄 그렇게 산 그것이 너무 부족해서  기가 막힙니다. 이 사람으로 변해져야 됩니다. 자기가 세상을 맞춰서 산 생활이 기가  막히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생활이 너무도 유약하고 빈약해서 기가 막히는 이것이  그에게 있는 것이 성신의 감화요 축복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 앞에 짐승이오나' 짐승같다 그 말이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이래도 주님을 늘 사모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늘  붙들고 그래도 승리하게 해 주신다 그 말이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걷기가 쉬우면 영광이  적고 그 인도를 따라 가려 하니까 걷기가 힘들면 영광이 크고 천인 만인이 그  인도를 땀지 못할 어려운 것이면 천인 만인이 얻지 못할 그 영광이 그 위에 달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인도하신 그 인도가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육체도 늙어지고 마음도 피곤해지고 이렇지마는.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하나님께 대한 것은 요동치 않는다 그 말이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이오. 이제 점점 살아가니까 세상 백 가지 천 가지에게 마음을  둬 가지고 이렇게 구비하게 활동 하던 것이 세상과의 관계된 그 마음은 차차 차차  걷혀 들어오고 손이 떨어져 가지마는 속에 주님을 생각하는 주께 대한 것은 더 반석  같이 튼튼하게 고것만 남는다 그 말이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 하나님만이 자기의 소망이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소.

 이러니까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주님, 외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말은 진리를 지키는 것도 주님 때문에 지키지 주님 없으면 진리  필요가 없어. 사랑도 주님 없으면 필요 없어. 의도 주님 없으면 필요 없어. 믿음도  주님 없으면 필요 없어. 주님 그분 때문에 좋아하는 것, 그분이 내놓은 것 그분이  시키신 것 그거 다 귀중하지 주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야. 이러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아무것도 없어. 땅에서도 주님 외에 사모할 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주님을 멀리하는자는 주님이 망친 게 아니라 스스로  망해. 주님을 멀리한 자는 스스로 망해. 식물이 땅을 마다 하고 멀어지면, 땅에서  멀어지면 말라 죽을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나는 자는 주께서  멸하셨나이다' 깨닫고 보면 인생이 주님을 떠나는 것이 마치 본 남편 내두고 창기  같이 음행으로 달리는 그 음녀와 같애. 하나님 앞에 인격의 지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지조를 파는 것이 마치 창기 음녀와 같이 그렇게 그 더러운 행위라 그 말이오.

 '음녀 같이 주를 떠나는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러니까 주님 사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전에 주님을 사모하는데 사모하는 그 사모가 무엇을 내놔야 된다 했습니까?  사모에서 무엇이 지금 움터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까? 주로 인하여 움직임이 움 터  나와야 됩니다. 그게 안 나오면 그 사모가 헛일이오. 또 주로 인함이, 자기가 아무리  주로 인해 산다고 해도 주로 인함이, 차차 주로 인해서 살다 보니까 주님은 자기의  언행심사 안에 알맹이 언행심사요 자기 안에 자기요. 그런고로 말도 자기 말은  껍데기고, 말 집이고, 자기 말의 알맹이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알맹이요  말의 주인이라. 행동도 생각도 비판도 자기가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비판은 껍데기  비판이요 자기 비판 속에 알맹이는 주님의 비판이 비판하는 그 비판이 나를 통해서  내 비판으로 나온 것 뿐이라. 기쁨도 주님의 기쁘신 그 기쁨이 내 안에서 그 기쁨이,  들어서 내 기쁨으로 나타나 내 기쁨이 변해지는, 이렇게 거룩한 집이 되어진다. 주가  거처할 수 있는 거룩한 집이 되어진다. 이러니까 그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안에, 하나님의 속성은 내 속성 안에, 하나님의 행동은 내 행동  안에, 하나님의 희로애락은 내 희로애락 안에 있어 사람 보기에는 내가  나타나지마는 실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이게 되어질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이렇게 될 때에 자기와 관련된 모든 인간이  피조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올바른 피조물의 행위가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또 상당한 은혜를  베푸시고 이것이 거룩한 제사장이라.

 이러니까 주를 사모하는 사모가 우리 속에 있어야 되고, 내가 자꾸 이 사모를,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 주님 사모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 알맹이가 돼 버려요.

나는 그의 전이 되고, 이러다 보면 그 모든 행위는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중보를,  그 조화를 일으키는 제사장의 거룩한 제사가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사모하는 이것을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를 사모하게  되느냐? 그 밑에 간단하게, 금생과 내세를 아울러 네가 발견해라. 또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형편과 무궁 세계의 나타나는 형편을 네가 한꺼번에 생각해라. 늘  책망받고 까글까글하게 까다롭게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영광으로 영접할 그 영광이  된 이 영광과 까다로운 주의 인도가 하나인 것을 네가 한꺼번에 생각해라. 이러면  주 외에는 사모할 자가 없게 된다. 주 외에는 연모할 자가 없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주님 외에는 애모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거 되는 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잘났든지 못났든지 자기가 어떤 대상을 두고 사모하게 되면, 돈을 두고  사모하든지 권세를 두고 사모하든지 인간을 두고 사모하든지 무엇을 두고 사모하게  되면 그것이 내나 애모요 연모요.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는 그것에게 피동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에게 피동되기 마련이오.

 만일 어떤 집에 아주 아이를 하나 낳아 놨는데 병신입니다. 눈도 하나 뿐이지 코도  없지 입도 구멍이 조그만하지 이거는 만고에 뭐 병신 중에 이런 병신, 볼 수 없는,  다른 사람은 참 꿈에 보일까 싶어 겁나는 그런 거라도 그 어머니가 불쌍해서 그것을  사모하고 연모하게 되면 그 어머니는 그 아이가 끕니다. 그 아이의 욕구대로  움직이게 되고 그 아이의 끄는 대로 끌리게 됩니다. 만일 그 아이가 병이 나서  그래도 또 병원에 가게 되면 그 아이가 병원 가면 어머니도 병원에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 우리가 사모하는 그 대상은 나를 끌게 된다. 연모하는 것은, 돈을 연모하면  돈이 나를 끌고 나는 거기 끌려가게 되고, 아주 쓰지 못할 오락이라도 그 오락을  사모하게 되면 그 오락이 나를 끌고 가게 되고, 강하고 약할 것 없이 내 자체가  무엇을 사모하든지 사모하게 되면 사모하는 그 대상에게 끌려 가기 마련이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래 다 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이 길을 걸어야 되느냐 저 길을 걸어야 되느냐? 제가 제법 제 길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바로 걸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거보다  강한 게 없습니다. 사모가 있소, 사모 그것이 그 사람을 끌기 마련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허욕은 망하는 것이라. 탐심은 망하는 것이라.' 줄줄 외우면서도  그 사람이 정말로 돈을 사모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은 들을 줄 몰라도 돈이  이렇게 저렇게 자기에게 열 마디 스무 마디 백 마디 속속거리는 대로 싹싹 다  들려지고 들은 대로 다 따라 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사모하는 상대에 욕구의 음성을  나는 듣게 되고 그것의 욕구에 나는 피동돼서 움직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소.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연모하고 애모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분에게 끌리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를 사모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그의 거처하는 전이 되어져 갑니다.

그의 전이 되어져 가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다시  말하면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보 생활을 하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모하게 됩니까? 주님을 사모하게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는 이 일이  성공이 돼서 주님을 사모하는 데에 도달한지 후에라야 무슨 구원의 성공이 있지  주님을 연모 애모하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전부 외식이요 다 헛일입니다.

음녀같이 주를 떠나 음녀 같이 달아나는 자입니다. 간부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원수가 되는 그런 것을 하나 둘 뿐 아니라 수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껍데기로 발라 맞춰 가지고 이래 하는데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넘어가지마는  사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네 사모가 어디 있나? 네 연모가 어디 있다 그것이  네 마음을 주장하고 있다.' 할 때에 그를 적으로 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한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철이 없어서 모를 때는 하나님 외에 이런 거 저런 걸 사모하는 것을 그저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모든 환경 주위를 교재와 같이, 실물 교재와 같이 이렇게  둬 가지고, 나는 모르지마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보이고 무엇이 망해지고  흥해지고 부서지고 서고 하는 그런 일이 생겨지는 그것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자꾸 이렇게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이래 가지고 목적은 주를  사모하는 이 사모로 이끌어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는 거기다가 딱 연결을 시킬려고,  그래야 영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라고 주님이 노력하시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참으면서 자꾸 이떻게 하시지 마는 끝까지 안 들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고 피  흘려 구속한 일이지마는 그 구원은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모를 바꾸어야 됩니다. 사모는 우리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정신이라 그럽니다. 네가 이런 일을 손으로는 하지마는  정신은 딴 데 가 있다. 또 네가 마음도 여기 들이지만 네가 지금 정성은 주  흩어놓고 있다. 마음 속에 정신이, 정신 속에 정성, 사모하게 되면 자연히 그리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러니까 어쨌든지 우리가 이 사모에서 고치는 것이 아주  지혜로운 일이요 가장 요령적인 첩경입니다.

 제가 사모는 여기 저기 둬서 이것도 사모하고 저것도 사모하고 하면서 주일에만  오고 또 성경만 보고 아무리 해야 주님과 밀접한 산 연결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인격자십니다. 주님은 인격을 만드신 하나님이시오. 인간의 인격을 만드신  하나님이시오. 인간의 그 모든 정서를 만드신 하나님이시오. 인간에게 감정 미워하는  질투 인간의 시기심 그걸 만드신 이가 주님이시오. 만들어 놓은 것이 그러하거든  만드신 그분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시기의 제일 강한 분이 하나님이시요 미움의  제일 강한 분이 하나님시오. 세밀하신 모든 세밀을 이십 세기 과학자의 머리를  사람들이 측량 못할 만치 위대하다 세밀하다 말하지마는 그걸 만드신 이가  주님이시오.

 나는 신문을, 잘 보는 건데 그만 뻐뜩 보고 잊어 버렸어. 누가 아마 봤을 건데.

인간의 머리에 컴퓨터가 뭐 십억이 있다, 십억이 있다 하던가 뭐 그걸 지금  발견한대요. 지금 한 사람 머리 속에 그 컴퓨터가 그게 그렇게 많이 하나님이  만들어 놨소. 그래 놓으니까 인간 머리도 그거 쓰면 굉장하게 범위넓게 활동을  한답니다. 그걸 만드신 이가 주님이시오.

 그러기에 우리는 이분을 어쩌든지 돈보다 이분을 사모하고, 사람 보다 이분을  사모하고, 자기보다 이분을 사모하고, 죽음에서도 사는 것보다 이분을 사모하고,  여기 보니까 마음과 육체는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에 반석이시라 요동치 않는다  그 말이오. 죽어도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은 요동치 않아. 또 '주는 영영히 나의  분깃이라' 전 소망이 그에게 있어. 그분만이 분깃이라. 그분만이 자기의 소망이라. 전  소유라.

 우리가 이 사모가 자기를 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모에게 끌려 가서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병신 자녀에게 그 사모가 자녀에게 감으로  사모할수록 자꾸 거기 대해서 거기서 말이 나옵니다. 사모할수록 '아이구 이거 배가  얼마나 고프겠나? 이게 얼마나 아프겠노? 이게 얼마나 비참하노? 내가 죽으면 이게  뒤에서 어찌 되겠노?' 자구 거기서 쉬지 아니하고 사모하는 그 병신에게서 자꾸  나옵니다.

 돈을 사모하는 자는 돈이, 돈에 대한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가지 돈에 자꾸 나옵니다. 돈이 '이래라. 요걸 계획해라. 요걸 한번 시작해 봐라.

요걸 한번 연구해 봐라. 요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사모하는 대상 그것이 우리에게  내가 어떻게 그 사모하는 그것을 따라서 움직여야 될 것을 자꾸 연출해 냅니다.

연해서 내요. 연출해 냅니다. 그러면 거기 따라서 하나 하고 둘 하고 자꾸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사모는 우리를 끄는 것인데, 지키는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 그 말은  마음이 엉뚱한 것을 사모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마음을 바로 가지라 바로 쓰라  말인데, 사모를 바로 하라 말입니다. 사모를 바로 하면 모든 일이 됩니다.

 우리의 사모를 주님에게 기울이면 주님에게서, 내가 자꾸 주님을 사모하니까  주님이 내게 자꾸 요구를 합니다. 요거 요구하고 조거 요구하고 또 저거 요구하고,  요구하니까 자꾸 요구하는 그것을 내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사모하기  때문에.

 이러니까 다른 사람은 주님이 한 마디 안 하는데 주를 사모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열 가지 스무 가지 당신의 요구가 나옵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사모의 도수에 따라 주님이 자기에게 욕구하시는 욕구가 자기에게 나오게  되고, 나오면, 자기는 거기 따라서 움직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주님을 사모함으로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옳고  바르고 참되고 좋고 영원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모 중에 모든 것은 다  궤휼이요 속이고 속는 것이오. 제가 뭐 '나는 일류 학교에 들어가 가지고 이렇게  어떤 그 문화 건설에 공로자가 되겠다, 뭐 어떤 자가 되겠다'. 떠들어 쌓아도 결론을  지어서 결산을 딱 하면, 끄트머리 결산을 딱 대면 남 꾀운 것 저 꾀운 것 속은 것  궤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산을 대면 궤휼 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하나님의 아들들의 시대를 궤휼로 행하였으리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는 이 사모는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연출해 나옵니다.

그분에게서 연출해 내서 이거는 말아 보고 이거는 해 보고 이래 보고 저래 보고  자꾸 그분에게서 나오니까 그분이 내게 이끌고 욕구하는 대로 내가 거기 따라서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는 자 되기 때문에 거기 따라 움직여지니까 그것이 전지의  움직임이요, 전능의 움직임이요, 완전에게 피동해서 움직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하는, 인하여 살리라 하는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데에서 당신으로 인하여 사는 생애가 됩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사는 생애가 되면 그 생활이 막바로, 하나님은 비유컨데 알맹이고 나는 그  껍데기이고 하나님은 내 안에 모든 것을 가진 생명이시고, 힘도 생명에서 지혜도  생명에서 모든 게 생명에서 나오는데, 생명이시고 나는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움직여 사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 모든 생애가 어디서 하든지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조화를 바로 일으키는 중보의 생활 제사장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보배로운 주님을 사모하는 이 생활을 어쩌든지 우리가 성공해서 가져야  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이 일을 성공하면 다른것 못하면 어쩌려고? 다른 것 못 해도  이분만 사모하면, 사모하는 자 되면 이분과 연결이 돼서 이분에게서 뭐이 자꾸 나와.

자꾸 나오는데, 엿새 동안예 그분에게서 나온 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영계를  창조했지마는 지금 그분을 사모함으로 인해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은 멸망받지  아니할, 전부 영원한 것들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나와도 그 전부 완전성의  것들이요 영원성의 것들이요 불변성의 것들이요 다 영생성의 것들입니다. 이러니까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물질계 문제나 영계 문제나 도덕 문제나 지능 문제나  비판 문제나 판단 문제나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이분을 사모하는 이  마음을 우리가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을 사모하는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은 주님을 사모할 만한 그런  기간이 없어.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 때문에 그런 시간이 없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때문에 그건 시간이 없고, 뭐 이것 저것 때문에 주님을 사모할 그런 시간이  없지마는 주님 사모를 빼놓은 어떤 선별되고 선택된 일이라도 그것온 섞임없는  궤휼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뿐이지 딴 것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사모하여  그분에게서 나음으로 인하여 나오는 거기 내가 피동되는 주로 인하여 사는 이것은  하나도 흠과 점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아무래도 내가 사모하는 사람 돼야 되겠는테 사모하는 사람 되는  방편을 여기 말씀하시기를 내가 금생과 내세를, 또 현 세상 살이와 무궁 살이의  형편을 이렇게 일관해서 네가 비판해 보고 평가해 보라 몇 가지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양심을 써서 비판을 해 봅니다. 냉정스럽게 비판을  해봅니다. 땅도 제 땅 아니고 제 힘도 제 힘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주신 힘 가지고  주님 만들어 준 땅에도 제가 심어 놓은 나무가 제 욕구에 정반대되면 베내버려  버리지 누가 두겠소? 주인이 가 가지고 길러 놓은 개가 물지 말라는 사람만 물고  그래 버리면 단박에 없애 버리지 누가 놔 두겠소? 모든 것을 비판해 보라. 신구약  성경 가지고 창조주와 피조물과 너와의 모든 걸 비판 해 봐라. 네가 비판해 봐라.

 또 네가 비판해 보고 나서 그러면 평가해 봐라. 어느 게 가치 있는고 평가해 봐라.

 비판과 평가, 주의 말씀을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이 비판과 평가는 필연적으로  사모의 대상을 선정하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비판하지 아니하고  평가하지 아니한 데에서 어리석게 참 한 닢푼치 가치도 없고 너 망치는 것뿐이고  속이는 것뿐인데, 네 원수 중에 원수인데 그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좋다고 일생을  망치는 이 돈 보고 사는 자야. 세상 보고 사는 자야. 왜 그러냐? 성경 말씀 가지고  네가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비판하면 번연히 답안이 나오지마는 비판하지  아니하고 바로 그만 '아이구, 비판하면 그거 나올 터이니까 아예 하지 말자.' 네가  미리 알지 않느냐.

 네가 신구약 성경 말씀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시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 영원을 일관해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또 세상 모든  천태만상과 무궁세계의 천태만상도 가르치고 있다. 지옥도 가르치고 있다 네가  좋아하는 것도 가치가 뭐라 하는 답안이 딱 나온다. 네가 비판하고 평가해 보라.

그러면, '주여, 나는 우매무지한 짐승이로소이다 내가 참으로 짐승입니다. 뭐 짐승은  잡아서 고기나 먹지마는 짐승만도 못한 이거는 아무짝도 못쓸 것입니다. 아무짝도  못쓸 것입니다. 참 어리석기가 짐승 한가지입니다. 네 뭘 보고 좋아하며 뭘 가치로  삼고 하고 있는지.

 이렇게 네가 비판하고 평가하면 필연적으로 너는 하늘에서도 주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인생을 구원하는, 인생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순교자라도 하늘에 주님이  안 계시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무슨 필요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순교도 당하고  주님 때문에 전도도 하고 주님 때문에 진리도 말하고 주님 때문에 천국이 있지 주님  없으면 다 멸망 뿐인데 뭐 있겠습니까?   '하늘에서는 주 외에 무엇이 있사오며 땅에서도 주 외에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마음과 육체는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 이시요 나의 영영한  분깃이시니이다 주를 음녀 같이 떠난 자는 주께서 다 멸망 시켰나이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입히시면 내가 주의 행사를 전파하리다.'  다니엘이 파사 나라에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에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요셉이 애굽에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를 전파한 것처럼 '내가 땅 위에 할 일은  당신을 사모함으로 당신에게 이끌려서 당신의 이 무한하심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나타나지 못하게 있는 가로막고 있는 이것이 틔워서 당신의 행사가  나타나도록 내가 전파하겠습니다.'

 우리는 암만 바빠도 성경 말씀 가지고 냉정스럽게 비판합시다. 자기의 과거 생애도  비판해 보고, 참 허무합니다. 여러분들은 몰라도 나는 과거 생활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합니다. 예수 믿은 생활이 뭐 오십여 년 근 육십여 년 되는데도 그저 거창서 산  생활이나 부산 와 생활이나 모두가 다 너무 허무해. 너무 속고 속은 것뿐이라.

 우리가 이 시기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말로 지식으로  비판한 거는 소용 없습니다. 인간 말 그까짓 거는 하나도 상대할 거 없어. 천인  만인이 나쁘다 해도 상관 없어. 나쁜 거 아니라. 좋다 해도 좋은 거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또박또박 하나 하나를 비판해서 모든 것을 수정하고  평가해서 그중에서 제일 가치있는 것을 네가 택해 잡아라. 이러면 하늘에서도 주  외에 딴에서도 주 외에 사모할 이가 없다. 그분만 사모하면 내 모든 정과 뜻과  욕망과 마음이 당신을 사모하게 되기 때문에 당신을 사모하니까 내 마음은 그리  기울어지고 또 그분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 요구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 분의  요구를 내가 그분을 사모하는 요거 하나 되면 그 요구를 안 하고는 못 견뎌요.

 가정은 사랑의 온상이라 하는데 가정에서 보면, 온 가족이 사모하는 병신이든지  어린 약한 것이든지 사모하면 온 식구는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고,  그것을 위해서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능이오.

 어쩌든지 주님을 사모하게만 돼 놓으면 주님에게 피동되기 마련입니다. 그분에게  피동만.되면 곧 주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나는 그 분의 성전이 되고 그분은 내  안에 계시는 주가 됩니다. 그러면, 말 속에도 그분이 계셔야 그 말이 살았소. 기쁨  속에도 그분이 계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기쁨이라야 그 기쁨이 살았지 그분 없는  데는 사망 뿐입니다. 무슨 가치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일을 우리가 하되 뭘 보고 주님 사모가 바로 됐나 안됐나  하는 것을 우리가 비판할 것인가? 주님의 사모가 바로 됐으면 내가 주님에게 끌리게  됩니다. 주님이 나에게 쉬지 않고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원하시는 게 있습니다.

나는 거기 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요 사모로 그분에게 응하게 되고 그분은  나에게 요구하게 되고, 요 사모로 되어지는 요것으로 인해서 그분은 내 속에 능동이  되어 지고, 이래서 마치 그분은 집 주인 같고 나는 껍데기 집 같이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 영광과 재물이 되어지는 요것이 올바른  구원입니다.

 그런고로 어쩌든지 시기가 지나기 전에 이 일 합시다. 그러기 때문에 사모를 빨리  정리합시다. 사모를 빨리 우리가 비판하고 평가해서 빨리 수정합시다. 그거 사모해서  죽을 만치 사모해도 아무 가치 없습니다. 아무 가치 없소. 뮐 우리가 사모합니까?  천하 사람들이 이것 저것 사모해서 일생을 지내고 죽을 때도 그것 사모하다가  죽었지마는 그것이 자기 망친 줄 모르고 마지막에 죽을 때도 그걸 모르고 죽어  가지고 심판 앞에서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인간을 사모하지 맙시다. 사물을 사모하지  맙시다. 진리만도 사모하지 맙시다. 주님을 사모해야 됩니다. 진리는 주님을 사모케  하는 것이오. 그분을 사모함으로 나는 그분에게 기울어지고 그분은 나를 끌고 나는  그분에게 끌려가게 되는 요것, 본능적으로 요렇게 되어지는 요것이 성령으로 되는  성화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속지 맙시다. 수많은 간증자들이 다 구름같이 둘러 있습니다. 별별 것을 사모해  가지고 다 자기 찌르고 망칠 것뿐이지 아무 가치 없소. 뭘 사모합니까, 우리가? 뭘  사모합니까? 아무 가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사모하는 것 보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하고 애터질 것뿐이지 우리가 부러워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도  옛날에는 그런 데 빠졌고, 지금도 빠져 있으면 빨리 일어서야 됩니다.

 (기도)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유한한 저희들에게 이루어질 무한성의 일들인  것을 압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게 부패한 저희들에게, 주와 같은 온전함과 거룩함과  깨꿋함이 이루어지는 것도 주님만이 우리에게 창조의 시온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는  줄을 압니다. 이미 말씀으로 선포하셨사오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 마음을 다하여  주님만을 사모할 수 있는 깨달음이 있게 하시고 영감이 있게 하사 주님만을  사모함으로 주로 인한 움직임이 저희들에게 나타나고 여게 따라 피동하는 움직임은  전지전능의 생명에 움직인 것을 확실히 믿는 저희들 됨으로 염려 없이 주를 딿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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