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모


선지자선교회 1982년 10월 9일 토새

 

본문 : 아4:6-10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여러 번 증거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는 내용입니다.

 잘 아는 말씀인데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요구하시는 처지가 어떤 처지인가 하는 것을 명시한 것입니다.

 물론 신앙 준비가 교회의 그 전성기, 교회가 왕성될 때 그때에 신앙에 어려움이  없는 고요한 때 이때가 신앙을 준비할 때입니다. 평안할 때에 신앙 준비를 해야  되지 환난 중에서는 신앙 준비가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평안한 때에서 준비를 하는 것은 그에게 닥친 현실 현실을 양보치 않고  나아가면 그것이 마치 높은 산은 한 자국씩 올라가는 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10미터만 뛰어 올라가려 해도 사람으로선 10미터를 한꺼번에 뛰어올라 갈 사람은  역사에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자국씩 걸어 올라가면  세계에 산중에 제일 높은 산도 사람들이 능히 다 그 절정에 걸어서 올라갑니다.

그것은 한 자국씩 닥친 것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지만 몇 자국이라도 한꺼번에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발치도 자기가 몇십 자국 걸어서 올라갈, 한  10미터만 된다고 해도 아무도 올라갈 자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우리에게 당한 그 현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요구하시는 최고 절정에 도달하기까지 그 모든 순서를 어렵지 않게 연단 받아  올라갈 수 있도록 하시는 역사인데 이것을 평소에 신앙을 지키지 안하고  한꺼번에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것이지만 계속  지키는 자들에게는 똑같은 형편이지 어려움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 이루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있는 것 다해야 영생을 이룬다  말씀하신 그대로 어떤 현실에도 이것 다해서 가면 그에게 닥쳐지는 것은 언제나  같은 정도의 것이지 어려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그 명령이 우리가 듣기에는  어려웠지만 아브라함이 듣기에는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자 굴에  갖다가 넣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렵겠다 놀랠 만한 일이요.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는 놀랠 만한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니엘에게는 어려운 것이 하나도  아니고 평소에 닥친 일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름 준비를 하라는 것은 곧 평소에 하라는 말인데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몰약산으로 가자" 주님이 우리에게  만날 위치를 당신이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위치는 어떤 자리인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그때 밤중 될 때 그러니까 낮에 해가 있어서 밝고 하는데  그런 때도 신앙 지키기는 지키지만 그 다음에는 날이 기울 때가 있고 그림자가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시기인데 그게 밤중에 신랑이  와서 만나게 된다는 그와 똑같은 뜻입니다.

 거기는 보니까 모두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주님을  만났지만 기름 준비 안 한 처녀들은 다 버림을 받았습니다. 기다릴 때만  못합니다. 그러면 이 처녀 비유를 모두 말하기를 '슬기 없는 다섯 처녀는 다  구원을 얻지 못한 멸망 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은  기본구원에 관한 교훈이 아니고 건설구원에 대한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구원은 다 얻었지만 자기 공력이 다 불타서 자기 공력은  하나도 하늘나라 못 가고 다 버리움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해석하는  해석이 있어서 각각 나누어집니다. 저는 후자를 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다섯 처녀들이라 헛일한 것을 나타나지만 그것을 구약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나를 만나자" 하신 이 말씀에 의하면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그 전에는 주님 만나기는 어렵다는 그런 뜻으로 말해 놨고 "그때 몰약산에서  만나자". "그때에 온 세상이 다 부패해질 때에 그때에 부패해지지 아니하는 그  신부가 되기를 또 부패해지지 아니할 그 위치에서 나를 만나자 그리 가자 거기서  만나자." 그러면 그 안에서는 만나지 못한다는 뜻을 거기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자기가 신앙생활을 지키는 것 같지만 참 지키면 어려울 게 없고  지키지 않는 외식하는 것은 다 패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평소에 쉬운 현실에도  다 하라는 것, 다해야 되는 것이지 다 하지 안한 그것은 다 아직까지 싸움에  미결이 있으니까 그것은 됐다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자 거기 가서 내가 너를 기다리겠다."  유향의 작은 산은 고독의 기도를 말합니다.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갔으니까  그때는 세상이 흉흉하게 날뛰니까 세상 그 물결에 들어가서 물결치는 대로 가는  그런 교회들이 다 되어 버리고 거기서 역류한 생명을 보존해서 온 세상과 대립이  되고 마찰이 되는 그런 고적한, 혹은 과거 왜정 말년에도 보면 망명한 사람들 또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 또 감옥에 안 들어가도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자기와의  하나도 함께 하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그 장소 그 위치를 원하시고 그때에  주님이 만날 수 있는 그런 성도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안에서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편 씨름할 때도 50명씩  갈라서 편 씨름을 하면 이쪽에는 한 열 명 나가 가지고 저쪽의 49명을 다  이겼습니다. 이러니까 이쪽에는 40명 남았고 저쪽에는 1명 남았으니까 그까짓 것  이겨 놓은 것보다 더 안심이겠지만 모릅니다. 한 사람 그 사람이 40명을 다  이길란지 남은 40명이 한 사람에게 다 질란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고 또 정말로 평소에 신앙을 지킨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와도 그 사람에게는 어렵고 쉬운 일이 없는 것인데 평소에는 다 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대개 마음, 목숨, 자기의 뜻, 힘,  성품을 다하는 것은 역경이 아니면 다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한 짐 되는  짊어지고는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써서 그 짐을 지기 쉽지만 뭐 손가락으로도  들 수 있는 짐을 등에 붙여 놓고 자기 있는 힘을 다 기울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표준은 "네가 다 해야 영생을 이룬다" 당신의 지공 지성법의  표준은 다인데. 구속의 법은 다인데 다를 기울인다는 것이 평소보다 그 환경이 다  기울이기에 쉽도록 되는 환경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절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신앙에서 계약한 계약이 마지막  판결이 되는 마지막 종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종결을 통과하지 안한  것은 아직까지 미결이기 때문에 그것은 승리도 아니오. 패전도 아닐지는 몰라도  승리는 아닙니다. 그걸 기억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여기 '부터'란 말이 있는데 그러면 그 전에는 열 처녀가 신랑 오기 전에  자기 주관대로 일방적으로 기다렸고 신랑과 처녀들에게 쌍방 화합은 없었습니다.

일방적 대기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나와 함께 가자." 그러면  레바논에서부터라면 레바논 전에는 함께 하고 함께 가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그 안에는 같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계약적으로 네 신앙 생애가 합격이 되느냐? 불합격이 되느냐? 또 네가 승리가  되느냐 패전이 되느냐 하는 것은 여기서 결승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 안에 패전될 만한 일이 없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패전과  승리를 압니다. 이제 말한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했으면 그자에게는 뭐 으레히 레바논 산에서 레바논 산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저가 와서 날뛸수록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며 그 계명을 어떻게 순종하는 것이 나타날  것뿐이지 저와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렇게 건드릴수록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나타날 것뿐이지 상관이 없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한 밭에서, 한 자리에 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도 건설구원에 관한 말인데 다 같이 신앙생활하지만  건설구원에 합격된 자도 있고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탈,  세상에 속한 그런 것도 있다는, 이 성경에 보면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이 되는  결승의 위치가 있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거게 닥치기 전에 비록 자기가 그런 범죄를  안했다 할지라도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그것이 다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안 닥쳐 그렇지 그런 일이 닥치면 으레히 될 자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은 다 알고 계시지만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징계를 줘 가지고 자기가 어떤 자라는 것을 알아서 죽기 전에 다시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자 레바논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백산, 모든  것 다 썩어. 내나 해가 지고 그림자가 간, 이렇게 세상이 다 마귀의 세계가 되고  인간의 나라가 되고 세상이 다 이렇게 될 그때에 거기에 속화되지 아니하고  거기에 감염되지 아니한 거기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함께 가자.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다 계약으로 책임지고 가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많은 말씀이 있지만 말씀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 그 사실이 절정이 다  있습니다. 절정이 닥치기 전에도 절정이 닥쳐 봤자 문제없이 통과할 사람들은  내나 "다 해야 영생이 네게 있다. 살인하는 자에게는,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없다." 그러면 인간 사랑으로 가득 찬 그것도 다하기 전에는 안됩니다. 주님에게  다 바치지 안하고 세상 무엇에게라도 조금이라도 바쳐 놓으면 반드시 거기는  미워할 것과 좋아할 것이 있지 다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보면 다 절정이 있는데 절정에는 똑같은 말이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듣는 본인에게 따라서 무슨 사람을, 아무리 계명 지키지 안하는  사람이라도 붙들어야 그 다음에 무엇이 가지지 그만 나뉘어 놓으면 말씀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붙들기 위해서 하는 그런 하나의 정도에서 듣는 것이지 그  말씀도 속에 파고 들어가면 내나 절정에 연결된 말씀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는 '나는 제사 지내고 술 먹고 담배 피고 이렇게 하는  사람인데 되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술 먹어면서 나오시고 담배 피우면서  나오시고 또 제사 지내면서 교회 나오십시오.' 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것 가지고  구원이 되느냐? 안됩니다. 그래도 나와야 뒤에 복음을 들을 수도 있고 회개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지 그대로 믿어 가지고 건설구원이 되는 것  아니고 기본구원은 믿는데 근거된 것이 아니고 택한 데 근거됐기 때문에 어떤  자라도 하나님의 택한 자는 기본구원은 변동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여기 또 꼭대기로 말했습니다. "아마나  꼭대기에서 스닐 꼭대기에서 헤르몬 꼭대기에서 나와 함께 하자." 여기 보면 꼭  같은 뜻의 말입니다. "아마나 꼭대기에서 함께 하자."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한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의 영원 자존을 또 완전을 그의  무한을 그의 사랑을 그의 신실을 그의 창조를 그의 주권을 그의 개별 섭리를  그의 목적을 사람들이 잡는다 하지만 어디까지 잡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디까지  잡느냐? "아마나 꼭대기에서 같이 하자." 당신이 요구하시는 위치가 아마나  꼭대기 스닐 꼭대기 헤르몬 꼭대기. 위치는 그곳이고 그곳에 가 가지고 만날 수  있는 그 사람을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대기란 이것을 명심해야 되지. 그 중간에 제 욕심대로 제 생각대로 제  주관대로 인본으로 다 하면서 "성전 밖마당은 척량하지 말아라" 하는 이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건설구원 이룬다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다해야 되지 두고는 안됩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저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라." 칼은 이 세상 사람들의 전법을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전법은  세상 전법이 아닙니다. 세상 전법이 아닌 이 전법. 뭐냐? 예수님께서 이 싸움을  싸우신 그 전법이라. 그것을 가져야 되고 무엇이든지 네가 하나라도 가지고  갈려고 하면 하나를 가지고 그걸 안 놓으려고 하면 안 놓으려고 하는 그것  때문에 네가 끌려가니 하나라도 안 놓고 하나라도 이것만은 가져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막바로 낚시입니다.

 이런 잉어라도 조그만 낚시에 낚여 올라가는 것같이 네가 아무리 위대해도  위대한 것이 상관이 없다. 네가 하나라도 가지고 갈려는 그것 있으면 네게는  사탄이 잡고 있는 낚시기 때문에 그것을 끌러 놔야 네가 안 죽고 자유 하지  그것을 가지고는 안 죽지 못하고 자유 하지 못한다. 그 모두 다 계약의 그  판정되는 절정 이거냐 저거냐 결승 되는 것을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지 안하고 밑에서 더듬다가 위안제를 마시고 맙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어떤 역경이 부딪혀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그자는  평소에는 신앙 근방에도 오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과 진리를  이용해 먹고 하나님의 교회를 이용해 먹는 것이지 그 신앙의 근방에도 안 온  것입니다.

 제일 쉬운 것이 어디가 쉬우냐? 제일 쉬운 것이 역경에서 신앙 지키기가 제일  쉽다 그거요 마치 가벼운 짐을 지고 전심전력을 다 기울이는 것은 어려워. 자기가  있는 힘 다 기울이지 안하면 처박힐 수가 있는 그런 형편에서는 자기 힘을 다  하기가 제일 쉬운 때라 말이오.

 "아마나 산꼭대기" 모든 사람이, 다 천 명이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인식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상관을 가지고 경외하는  이 상관을 가진 이 상관을 천 명이 가졌는데 좀 좋은 일 있으니까 떨어지고  어려운 일이 있으니까 떨어지고 이래 떨어지고 저래 떨어지고 다 떨어져서  견집의 굳게 잡는 절정에, 참 거기서 놓지 안하기는 이거는 뭐 더 세상이 아무리  놓도록 하려고 해도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날이랴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게서 나를 끊겠느냐?" 이제  아무도 세상을 끊을 수 없어야 이긴 자이지 끊을 수 있는 힘이 있고 끊길 수  있는 그자야 어떻게 승리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다 그것을 말합니다. 사데  교회에게도 "내가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보겠느냐?" 온전한 것이라야 산 것이지  온전에 도달치 안한 것은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이제 절정에 대한 것을 에누리없이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절정 설교를 늘 못하느냐?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러면 도망칠  것이니까 슬슬 세상도 말하고 이것도 말하고 예수님께서 또 제자들과 더불어 떡  잔치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처럼 이런 것이지 그것이 구원에 완성이 되는 절정이  되는 영생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 떨어지고 마지막에 한 명만 남을 수 있고 한 명도 안 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래요. 엊저녁에 김삼암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자기는 깨닫고 또  설교는 은혜롭게 하는데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를 해야 한다."  하는, 그 사람이 설교를 하나하고 또 그 다음에 딴 것이 나오면 그만 사람은  마음이 흔들려서 권태가 납니다. 또 딴 게 나오면 안돼. 세 개를 했어. 세 개.

제일 처음에 하고 말았으면 되는데 뭐 한다고 그때부터 '오후에 계속한 설교  말씀이기 때문에 또 이것을 한다.' 또 그러고 말아야지 또 그러고 난 다음에 본문  읽는 것과 서로 상합이 안되니까 또 본문에 대해서 해석하는 설교를 또 하니까  절제가 없다 말이요. 그러면 승리를 거두지를 못합니다.

 아마나 꼭대기에 가니까 모두 다 전능자가 나를 사랑한다 하는 그 사랑을  잡았다가 이리저리 하다가 그 사랑을 놓쳐 버려. 그 사랑을 놓치지 그 능력을  놓치지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놓치지. 또 그가 나를 전부 다해서 사랑했으니 나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해야 된다고 입으로도 말했지만 어떤 때가 되니까 놓친다  말이오. 하나님이 마귀를 통해서 이렇게 손을 거머졌다고 처음에는 거머쥔  이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으니까 딴 것 거머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놓게 하는, 위협으로 놓게 하는, 복잡해서 놓게 하는, 받을 때 놓게 하는,  꾀임 받아 놓게 하는. 세상에 사탄을 시켜서 이 굳게 잡는 것을 놓게 하는 오만  놓게 하는 데에 놓지 안한 그자가 아마나 꼭대기라 말입니다.

 "아마나 꼭대기에서 나와 같이 하자." 신앙은 이것이 있는데 이것을 평소에  보면서 우리가 가면 실력을 갖추겠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절정기에 가서 견집을  놨으면 또 새로 잡아야 되고 견집을 새로 잡아 가지고 어쨌든지 놓지 안한  그자가 승리합니다.

 "놓지 안한 아마나 꼭대기에서 나와 만나자 아마나 꼭대기서 나와 같이 하자. 또  스닐 산꼭대기에서 나와 같이 하나님으로 전신 갑주를 삼아라." 환난이 왔는데  곤고와 핍박과 위험과 적신이 왔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으셨다. 나를 사랑하시는  자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모든 공간과 활동계 인간의 심리계 모든 것을 당신이  주권 하시고 당신이 움직이는 대로 악인도 악인의 마음을 가지고, 의인도 의인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움직임대로 움직이는 그분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방어해 버립니다.

 이러니까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진 박히듯이 하나님을 문서로  기록해서 내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아 '주님은  이러한 주님이다.' 하는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여기서 오는 세상의 두려움은,  욕심의 화살은 물러갑니다. 또 공포의 화살은 물러갑니다.

 또 세상 지식들이 제일이라고 떠드는 그 모든 유혹이 아담이 범죄 했고 타락  후에 마귀가 왕이 됐고 그것이 666의 지식이고 그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주관해 가지고 그자가 지금 써서 가르쳐서 나온 사탄에게서 나온 그 지식이기  때문에 그건 다 죽은 지식이라는 이 가르친 성경 말씀 가지고 그걸 딱 막으니까  세상이 지금 말세에 무소불능의 지식이라고 전능의 과학이라고 이렇게 떠드는 그  지식을 한 말로 발아래 발끈 밟을 수 있는, 이게 뭐이냐? 모든 사람이 그 화살에  대해서는 방패를 못했는데 이제 주님이 성경에 '이러한 주님이라 이러한 계약이라  우리와의 관계가 이렇다.' 이것을 나타낸 그 조목조목에서 세상에서 오는 모든  것을 다 방어해 버리는 그것이 스닐 꼭대기라 말입니다.

 방패 꼭대기, 갑옷의 꼭대기란 말은 "하나님으로 전신 갑주를 입어라" 그 말은  세상에 어떤 게 와도 그것이 그 화살에 꿰뚫힐 수 없어. 그 유혹이 내게 들어올  수 없어. 좋다고 하는 그런 어떤 유혹이 들어올 수 없어.

 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보니까 그런 것을 내가 용납할 수가 없고 담대히  물리칠 수 있고 또 유혹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분이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내나 그것도 만들었는데 만든 그것은 연단 시키기 위해서 만들었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만들었고 다 없어질 것이요 풀과 또 풀의 꽃과 같은 데 그보다 무한히  뛰어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아는 사람은 좋은 것을 두고 나쁜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스닐 꼭대기에서 같이 하자. 헤르몬 산꼭대기에서 같이 하자" 거저 참 이것  쥐었던 것 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쥐었던 것을 놓는 것은 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야 놓지 쥔 것 그 외에는 없는데 그거는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거 잡기 위해서 놓는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세상에 가졌던 것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필요하고 요긴해도  이것도 주님께 거리끼니까 어렵잖게 가지고 놀다가 '야, 너 그것 가지고 놀지  않는 게 좋은데' 하니까 어렵지 않게 놔 버려요. 또 어떤 것은 애착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놓고 어쨌든지 놓는 그것이 헤르몬 산꼭대기입니다.

 절정 이것이 계약의 판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주인은 내나 사탄이 주인이지 제가 주인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보다 저  사랑해서 제가 주님을 이용하고 진리를 이용해 먹고 있지 제가 주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어 가지고 주님과 진리에게 이용당하는, 이용을 당해야 그때부터  영생이고 승리지. 제가 이용하는 그것은 정죄만 마련하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헤르몬 산꼭대기에서 나와 함께 하자"하는 이 절정. 그러기에 우리가  수많은 것을 끊었지만 그래도 끊지 못한 것이 혹 몇 가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대개 제일 끊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생의 애착을 끊는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제일 어렵습니다. 살고 싶은 것. 그놈을 끊기가 제일 힘들어. 그것도  다, 헤르몬 꼭대기란 말은 다 끊고 아무데도 속한 데가 없고 붙들린 데가 없는 다  끊은 거기서,  그 다음이 뭐이냐? 사자 굴, 표범 산입니다. "다 끊은 거기서 만나자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환경이 사자 굴이 되니까, 주위가 사잔데, 주변이  사잔데 거기에 잡을 것이 있겠소 사귈 것이 있겠소 탐할 것이 있겠소 좋을 것이  있겠소? 뭐 있겠소?  "내가 너희를 보낸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 것 같다"는 그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주관대로 이렇게 저렇게 에누리해서 깨닫는 것이지 아, 사자  굴과 표범 산이니까 거기에 정들 것이 뭐 있겠소 탐날 것이 뭐 있겠소? 그  환경이 자기 형편과 사정이, 실은 가정도 사자 굴과 표범 산이 되고 직장도 사자  굴 표범 산이 되고 자기 주위 환경 전체가 사자 굴과 표범 산이라. 다윗이  말하기를 "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한 것은 그가 사자 굴과 표범 산을  타락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난 다음에 발견해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자 굴과 표범 산" 이런 환경을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만들어 주어서라도  그가 땅에 마음이나 붙은 것이 하나 없고 그만 땅이 징그러워서 땅이 무서워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털끝만치도 생각에도 뭐에도 있지 않고 연결이 없고  완전히 거게 대해서는 배반하고 거게 대해서는 물리치고 그로 인해서 주님과  밀접해지는 것을 당신이 원하십니다.

 제가 어제 어떤 집을 방문해서 그게 가서도 사자 굴과 표범 산을 말했습니다.

홍순철 목사님이, 그분이 죽는 시간은 정해 있는데 그 시간은 변동을 못하는  것인데, 그때 건강해 가지고 교인들 보고 호령 치고 고함을 지르고 이렇게 설교를  권위 있게 하면 그분도 사람이라. 세상에 끊지 못한 줄이, 인연을 가진 것이 몇  개든지 있을 수 있어. 여러분들이 수십 개 가지고 있어. 수십 개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을 건강하니까 끊지 못하는데 이제 틀림없이 죽기는 죽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을 말로는 인식하지만 실감은 느끼지 못하고 자기는 아직까지 살  자로, 살아 있는 자로, 사는 데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딸깍 죽어 버리면  세상과 인연 다 끊지 못하고 사자 굴과 표범 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과  밀접해 질 수가 없다 말이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오랫동안 그러니까 아예 살 가망이 좀 있어서 수술을 하고  어쩌고 할 그때는 아직까지 사자 굴이 덜 돼서 그렇습니다. 거기서라도 좀 숨쉴  구멍이 있다 했지만 '이제는 희망 없다.'하는 그것이 갑자기 닥치지 안하고  오랫동안 계속하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에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서 메고 들어가서  운명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세상에서 있는 동안에 완전히 사자 굴과 표범 산을 만들어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완전히 평가해서 관계가 없다는 것, 필요 없다는 것, 다 끊어질  것이란 것, 없어질 것을 알아서 완전히 정리 정돈을 딱 하고 난 다음에 이제 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고 가면서 남은 시간 얼마 남은 지는 알지 못해도 있는 동안 이  일 해야겠다 하고서 그 최종의 설교 한마디란 것이 얼마나 권위 있고 가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증거해 준다. 사랑하는 자를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는 그것이 뭐이냐?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신랑 신부  결합된, 주님과 내가 결합된 그것이 금생과 내세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된 그때에, 그때에 절정이요, 그때에 높은 지위요. 그때에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발아래 내려다보아라." 어쨌든지 주님은 우리 환경을  어떻게 만들든지 창조주시오 주재시오. 주권자시오 만왕의 왕이시오. 뭐 생각도  못할 제일 높고 지극히 크신 그분이 우리와 이렇게 밀접해지기를 우리가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과 우리와의 이렇게 밀접 친밀 결합되어서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이지 못하고 이래 되어지는 이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주님 이 복음이 거짓 복음입니까? 왜 번연히 보기에 현저히  세상을 제 나라를 삼고 인본 운동하고 있어도 그렇지 안한데 우리가 볼 때는 이  진영에서는 잘 믿는다고 하는데 잘 믿는 그 종들은 왜 마지막에 이래 가지고  세상을 떠나게 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을 의심할 것 아닙니까?'  내가 이번에 아파 누웠으니까 누가 묻기를 '백 목사님도 편찮다 하십니까?' 아마  외부에서는 보는 모양이라. '봐라, 지금 그 사람들 나가는데는 제일 잘 믿는  사람들 다 아주 모진 병이 들어서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말이오.

그래 거게 대해서 이게 내가 책임 있는데 '이 복음 전한 이 복음이 이렇게 참  복음이 아니고 이게 잘못돼서 이렇게 벌받는 이런 복음입니까?' 내가 이렇게  물었어. 묻는 가운데서 내나 그전에 설교를 많이 했지만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이것이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헤르몬 꼭대기" 이 보니까  통일이라.

 그래서 '네, 주님이 특히 사랑하시고 아무것도 딴 데는 갈리는 게 없고 순전히  주님께만 향하는 그자를 만드시고 그자 되는 것을 원하셔서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둡기 때문에 이리되면 복음이 가루어지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살아나오니까 복음이 퍼졌지 거기서 죽었으면 복음이  가루어질 것 아닙니까?' 또 내가 이래 물으니까 '현재의 조건이, 이 복음이 참  전승이 되고 모든 사람이 참 하나님이 계신다 할 수 있도록 전부가 다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이 현실이 돼도 내가 안하면 그 현실의  힘 가지고 인간이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것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복음을 다  배반하고 다 가게 된다. 복음을 배반할 수 있는 역경, 전체가 하나도 복음을  인정할 만한 그런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도 내가 복음을 믿게 할 때 믿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주권이 되어 있지 인간들이 만들어진 현실 거기에 있는 줄 아느냐?  다니엘이 살아 나왔는데 거기서 있는 것같이 너희들이 보이도록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그것 때문에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리된 것은 이로 통하여 그들이 마음이 감동돼서  변화되도록 하는 내 주권에서 그런 것이지 그런 것 아니다. 네가 이 복음이  가루어진다 퍼쳐진다 그런데 대한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하는 것으로 제가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석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제가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하는 이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미  죽을 몸뚱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과 밀접하는 데 이용하느라 애를 쓰십니다.

우리가 이미 두고 떠날 세상이기 때문에, 버리고 떠날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어떻게 이용해서라도 주님과 밀접해지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든지 다 줄 수 있지만 그 세상을 인해서 주님과 나와  멀어지는 것을 당신이 원치 않습니다. 세상을 박살을 내서라도 그 세상을 역사에  없는 참혹한 세상을 주서라도 이 세상을 인해서 당신과 가까워지고 밀접해지고  당신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정말로 당신만 높이고 당신만 위하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상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를 아끼지 않습니다.

 왜? 이 육체는 이미 죽을 육체기 때문에 아, 주를 말미암아 도마가 쇠몽둥이에  맞아 완전히 떡이 되어서 죽었다 해서 그 몸뚱이를 가지고 살 것 같으면 하지만  이미 죽을 몸뚱인데 그것이 한없는 영광으로 변해지고 그럼으로 인해서 주님과  밀접해지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육을 이것을, 이미 그것 가지고  하늘나라 가지고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당신과 우리가 가까워지는데  이용하지 이것 때문에 당신과 우리가 멀어지도록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 세상의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면 주님과 나와의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그  작용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물이 다 불탄다 모든 체질이 녹아진다."  녹아지는 것은 뭐이냐? 주님과 나와 가까워지는 데 이용된 것은 다 소생된다.

만물을 새롭게 할 때 다 새로워지고 주님과 나와 가까워지는데 이용된 것은  새로워지고 주님과 나와 멀어지는데 이용된 것은 다 불타 버립니다. 그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 세상이 주님과 나와 가깝도록 하기 위해서 그 세상이 박살 되고  희생되었으면 그 세상은 살았습니다. 주님과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 몸뚱이가  박살된 것은 그것은 영원히 살았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깨닫고 우리가 해석을 해야겠습니다. 지금 그렇게 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지니까 이제 인간 생각으로 마귀란 놈들이 막 가지고  떠들거라 말입니다. 나만 이 병이 들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으면 그것 이용해  가지고 마구 떠들거라 말입니다. 그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이번에 이런  일이 안됐으면 모든 것을 갑자기 주님이 불렀으면 모든 것 정리도 못할 것인데  이제 모든 것 정리를 사소한 것도 다 했습니다. 사소한 것도 며칠 전부터  경제면이나 모든 인인 관계면이나 모든 약속면이나 그런 관계를 완전히 다  결산했습니다. 완전히 완결을 했습니다.

 그래 내가 가만히 그것 한 것 보니까 내가 이번에 참 말할 수 없는 힘없을 때를  닥쳤는데 그럴 때를 그 한 건을 틀렸는데 말할라 하니 가슴이 답답하니 말을 할  수 없지. 할 수 없어 꿍꿍 앓고 참고 있는데 그것을 평소에 내가 정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그래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 만일 그 문제를 하면 그 문제  밀리지 저 문제 밀리지 이러니까 언제 주님께 기울이지를 못할 것이라 그 말이오.

 복잡해서 한 문제도 해결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차차차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정리하니까 주님이 내게 대해서 이 일을  처리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안 아프고 만일 갔더라면 아주 처리하지  못할 문제가 많았고 또 내가 죽지 안하고,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것을 죽기 전에 내가 구경했다 말이오. 죽기 전에 모든 사람도 구경하고  모든 행동도 구경하고 다 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진영에 잘 믿는 사람들의 끝이 그렇게 끝마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똑똑히 알고 바로 믿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도 그것 없었으면 세상에 무엇인가 미련이 있는 종류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  또 저질러 놓은 일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오랫동안 지내니까 내일은 살 줄로  알고 저질러 놓은 그런 일없이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모르니 다 그날 그날에  완결을 지워 가면서 사는 이런 생애를 얼마 하다가 끝을 마쳤다 그거요.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총공회 지난밤에 모인 위원들 4층 뒤편에 다시 한 번 모입시다. 암만  내가 봐도 마음에 양심에 거리껴서 공의롭지 안해. 지공하게 해야 되겠어. 그래서  총공회 위원들은 10분 기도한 다음에 그리 모여 주시고 권찰회는 앞에 모이고  우리는 뒤에 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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