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5:26
주님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라
1985. 10. 30. 수저녁
본문 : 마태복음 18장 5절∼10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다음 주일 공과입니다 본문은, 마태 18장 5절∼10절 제목은, 죄에 대한 지식 요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삯이라 말은 품삯이란 말과 같은 말이오 삯이라 말은 댓가라 말입니다. 품삯, '품삯' 하는 그 삯입니다. 죄의 삯이라는 것은 죄의 값은 그 말입니다.)
서론에, 주님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시다. 전지 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주권을 가지고 있는 크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크신 분이 인생이 죄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한 사랑으로 하늘의 영광, 존귀 권세, 권능 다 내어 놓으시고 우리 대신 죽어 죄를 멸하고 우리를 지옥에서 구출하셨다.
이렇게도 인생을 만물 중 제일 사랑하시고 아끼신다. 사람 사랑에는 어떤 희생이라도 다 하신 분이시다. 그런고로, 말씀하시기를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주님 당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여 영원히 그 수고와 그 희생을 길이길이 갚겠다고 하셨다. 또 영원한 집으로 영접하시겠다고 약속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크심도 사랑도 날 사랑하심도 좀 실상으로 느껴 보자. 인생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본론에, 첫째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범죄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생각해 보자.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 그 자녀를 남이 돌을 달아 바다에 던져 죽였다 하면 그 원수를 어떻게 막분하여 갚을까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바다에 던져 죽이는 것보다 더 하다고 하셨다. 바다에 던져 죽는 것은 한번 죽을 생명이지만 범죄한 값은 영원한 사망이 되기 때문이다. 큰 죄나 작은, 죄나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막바로 살인이요 자살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죄의 비밀을 모르고 자기도 범죄하고 남도 범죄케 하는 그 댓가로 세상에서 화를 받고 심판 너머서는 영원한 형벌이 있다. 한번 범죄의 값으로 전인류는 사망하고 있다. 죄의 무서움을 우리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 세상 돈 지위 권세 공부 때문에 죄를 짓는 자는 자살 행위이다. 죽어도 죄만 안 지으면 살아난다. 우리 부모님들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공부를 하라고 하는 이것이니 이것이 막바로 죽이는 것이다.
둘째,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 버려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려라. 병신으로 천국가는 것이 다 가지고 영영한 지옥불에 타는 것보다 낫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죄의 무서움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 인생의 고생과 모든 고통은 다 죄값이다. 죄만 깨끗게 청산하고 의롭게 살면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 하나님의 계약이다.
셋째,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저희 천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매일 매시 직고한다고 주님이 주의를 부탁하셨다. 인생은 소경이다. 보이는 세상만 보는 외식이다. 보이는 세계를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세계는 굉장히 세밀하고 철두 철미하다. 털끝만큼도 억울함이 없이 지공평의 판결이 있다.
나그네 생활을 조심 있게 하고 마귀의 교훈에 취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깨끗이 깨끗이 준비하자 정금 같고 눈같이 살자.
문답에, 첫째, 주님은 어떤 분이시뇨? 답에, 전지 전능의 창조주 주권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주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느뇨? 답에, 인생을 위하여서는 소유도 영광도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희생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셋째,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이 무엇이뇨? 막바로 자살 행위요 살인 행위입니다 네째, 범죄케 하는 자기 지체를 어떻게 하라고 하셨느뇨? 찍어 버리고 빼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사람마다 무엇이 따르고 지키고 고발하고 있다고 하셨느뇨? 천사들 이 따라다니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음 공과인데, 학생들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아낀다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그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이 떡과 포도주를 기념하라. 떡은 너희들 구원을 위해서 찢는 주님의 몸이요 포도주는 구원의 약속을 위해서 흘리시는 주님의 피를 상징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이 피와 살을 기념하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만찬 먹는 것은 한 기념의 의식을 하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거 이것이 곧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그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대속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주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주님이 내게 대해서 어떠한 사랑으로 어떠한 방편을 가지고 사랑하신 그것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으니 나도 이제는 형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이 내게 하신 그대로 내가 형제에게 행하여 형제를 멸망 가운데서 구출해 내는 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그 구원을 간단 명료하게 말을 하면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또 하나님과 화친하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것을 다 희생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부요도 영광도 권세도 다 희생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형제를 이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이 사랑을 깨닫고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형제들에게 전하여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내게 있는 모든 소유나 또 영광이나 존귀나 내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형제.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여 구원하는 이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지위에서 우리 위해서 낮아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데까지 낮아져도 불만 불평 없이 끝까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낮아지는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요, 주님이 부탁하신 일인 줄 알고 형제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 낮아지는 것,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고 세상에서 온갖 곤욕을 참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주님이 내게 대해서 어떠한 사랑으로 구원한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이 사랑에 감격해서 우리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요대로의 이 모형을 형제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 이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을, 주를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신인 양성 일위를 지금 가지고 계시고 신인 양성 일위를 가지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신인 양성 일위의 주님으로 부활하셔 가지고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볼 수 있는 그런 형상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마는 우리에게 형상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우리 구원에 유익하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무형의 존재로 우리와 동행합니다. 만일 형체를 가졌으면 우리 구원에는 큰 폐단될 것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무형의 주님을 사랑함으로, 형체가 없는 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내 뜻으로 사랑하고. 내 성품으로 사랑하고, 또 내 정성으로 사랑하고, 내 영으로 사랑하고, 내 힘으로 사랑하는 이 사랑을 합니다.
이거는 다 안 보이는 것들입니다. 힘도 안 보이고 정성도 안 보이고 뜻도 안 보이고 마음도 안 보이고 우리의 목숨도 안 보이고 우리의 영도 보이지 않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는 역사는 보이지요. 우리 힘이 이것을 들면 이 종을 드는 것은 보이지마는 내 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 모든 요소를 가지고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거 가지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보이게, 보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볼 수 있도록 보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보이지 않는 것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을 암만 사랑해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요소를 가지고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암만 사랑해도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지마는 다른 사람은 보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보지를 못하고, 또 내 자신도, 내 자신도, 우리는 항상 이 둔한 육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음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하는 것이 항상 흐미하고, 흐미하고 우리에게 그렇게 뚜렷하게 확신이 되어지지 안하고 우리 마음에 만족이 되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마치 보이는 친구끼리 사랑한다든지, 또 보이는 부부끼리 사랑한다든지, 보이는 부모와 자녀끼리 사랑한다든지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육체를 사랑해야 마음에 흐믓하고 그 실상을 느낍니다. 보이는 육체로 사랑하지 안하고 그저 내가 자녀가 지금 먼 데 가 있는데 그 자녀를 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암만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해도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나와 같이 만나서 내가 그 자녀를 사랑함으로 무엇을 음식을 준다, 또 대접을 한다, 봉사를 한다, 그 자녀가 또 부모를 사랑함으로 이제 나타나 보이게 서로 또 사랑한다 이랄 때에, 보이지 않는 요소 가지고서 인간의 온갖 관계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이 만족되지를 않습니다. 만족되지를 안하고 이렇게 보이는 형체까지 사랑해야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 보이는 형체를 사랑한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우리의 요소 가지고 사랑치 안하면은 외식이 되는 것같이 마음에 시원치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요소 가지고서 아내를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과 정성과 자기 성품과 뜻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또 보이는, 육신의 눈으로 볼수 있도록 보이는 면으로 또 아내를 사랑하고, 또 남편도 보이지 않는 요소로 아내를 사랑하고 또 보이는 면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이렇게 남편이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 사랑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요소로 사랑하고 보이는 요소로 사랑할 때에 만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 부모와 자녀끼리나 친구끼리나 뭐 이런 데도 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친구 쳐 놓고는 제일 큰 친구가 누구냐 하면은 전쟁에서 같이 죽고 사는 그 생명 내놓은 거세서 서로 사귀고 사랑하는 그 전우, 전쟁의 전우가 정말 깊은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우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그 전우가 사랑하고 싶어 보고 싶어서 발동이 나도 내가 눈을 감고 암만 그 전우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이래 봐도 만족이 없습니다. 같이 척 만나 가지고 손을 잡고, 들이 아듬고 마구들이 뒹굴고 이래야 마음에 만족이 된다 그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전우들도 그렇고, 또 부모와 자녀들도 나눠 가지고 있다가서 그래 이제 암만 마음으로 사랑해도 만나 가지고서 서로 손을 잡고 참 부모가 자녀를 아듬고 자녀가 부모를 아듬고 이래 가지고서 뭐 울든지 웃든지 뭐 이래야 마음에 시원하고 만족이 된다 그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이 나 위해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많이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소유와 몸과 생명도 다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다 여러분들에게 다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아마 주님을 생명까지 바쳐서 주님 나 위해서 생명까지 바쳐 사랑했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생명까지 바쳐서 사랑하고 싶은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 손들라 하면 아마 다 들 줄 압니다. 다 그런,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라면 다 그런 것이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있고, 어떤 사람은 가끔가다가 한 번 있고, 어떤 사람은 더 도수가 뜨겁게 있고, 어떤 사람은 미직지근하게 있지 있기는 다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있는데, 주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싶어서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저 어데 자요 또 만족이 안 됩니다. 볼 수 없는 주님만 사랑하고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은 볼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만족이 못 된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걸 한번 해 보십시오.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이 나 위해서 이렇게 참 모든 걸 희생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격해서 나도 모든 것을 희생해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내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주님이 날 사랑한 고 사랑을 받아 가지고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고 일을 실천을 할 때에 그때에 이제 주의 사랑에 만족을 얻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해 보지 안한 사람은 그저 하나의 그런 실상이 아니고 이치적으로 그렇고, 이치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치적으로만 그렇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험을 못 해 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실험을 못 해 그래. 실지로 실험을 하면은 이치적이 아니라 실상으로 주님을 아듬었고 주님을 잡았고 주님의 볼 수 있는 육덩이로 주님하고 막 손을 거머쥐고 막 뒹굴고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실상으로 자기가 느껴 본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만 사랑한다고 이렇게 하고 형제를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볼 수 없는 형제를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육체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사랑해 보지를 못했다 그거요. 그런고로, 요것을 실상화 되도록 노력을 합시다. 요번 공과에는 자꾸 실감을 가지고 실상으로 느껴 좀 실감을 가져 보자 하는 것을 그것을 몇 차례 말을 했습니다.
제가 OO교회 있을 때에 다른 집에 이렇게 심방을 갑니다. 심방을 가도 그렇게 기쁘지를 안해요. 심방을 가는데 그 문둥이가 한 집 있습니다. 문둥이 집에 가면은, 문둥이 집에 가 가지고서 문둥이 하고 손을 거머쥐고 막 이래 가 거머쥐고 이래 뒹굴고 좋아서 막 이래 가지고서 이라고, 또 인제 밥도 서로 이렇게 뭐뭐 먹고 이래 하고 뭐 이렇게 하면 어떻게 좋은지, 고만 주님하고 주님하고 서로 만나서 뒹구는 거라. 좋아. 이래서, 교인들이 같이 따라가면은 그들도, 그들도 그런 모양이라. 그들도 거게 가면, 내가 물어 봤어요. '어데 심방가니까 제일 은혜가 되고 좋더냐?' 그 문둥이 집이랍니다. 문둥이 집.
조사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거 보면 또 좋고, 저거들도 또 실상 좋대요.
저는 거창 있을 때에는 제일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주님의 몸뚱이 하고 좀 사랑하고 싶고 이러면, 인제 어데 가느냐? 문둥이한테 갑니다. 문둥이한테. 문둥이 뭐 물론 일반 평신도도 좋지마는 문둥이 한테 가면 더 좋아. 이래서 내가 거창 있을 때에는 우리 전국에 문둥이 쳐 놓고는 나 백 집사라 하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뭐 전국에 문둥이는 다 알아요. 문둥이 교회는 제가 많이 다녀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러고, 또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한 사랑을 내가 볼 수 있는 형제에게 그렇게 사랑할 때에, 볼 수 있는 형제에게 사랑할 때에 그때에 주님이 내게 직접, 볼 수 없는 그분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 가지고,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나에게, 형체가 나타나니까 나타나도록 그분에게 만족하는 그 만족을 얻게 됩니다.
제가 OO있을 때에 뭐 아픈 사람 있으면은 제가 그 고름 있는 것을 입으로 빨아 내 가지고서 그렇게 해서 치료해서 그래 치료한대도 뭐 많이는 없어도 더러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그것보다도 한 군데 제일 기쁨이 있었던 것은 저 종이 뜨는 그 지소에 거게 어떤 환자가 하나 누웠는데 그 환자에게 자주 가서 제가 가서 며칠만에 한번씩 가 가지고서 방문을 하면서 그래 전도를 했습니다. 했는데,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안하고 먼 데서 음식은 이래 밀어 주고 이라니까 어떻게 냄새가 나는지, 그 성한 사람이 다 썩었으니까. 다 썩고 뭐 그저 썩어서 보면 뭐 구더기가 버글버글합니다. 이렇게 썩으니까 냄새가 참 굉장히 많이 나요. 그런데 거게 가 가지고서 기도하고 또, 기도해 주고, 또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고 썩는 사람하고 같이 둘이 앉아서 둘이, 참, 그 사람은 누웠지마는, 기쁨을 누리고 즐거움을 누릴 때에는 주님이 거게 와 가지고서 평소에 보지 못하는 내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줘서 그만 주님의 육덩이를, 주님의 육체를 내가 만나 가지고서 기뻐하는 그 기쁨의 그 느낌을 얼마든지 느끼고, 얼마든지 만족을 하고 느껴지는 그런 것을 느껴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체험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주님을 볼 수 없는 내 요소로 사랑함으로, 사랑함으로, 볼 수 있는 내 요소 가지고서 주님을 볼 수 있게 사랑치 못해서 만족이 되지 못한 자들아, 볼 수 없는 요소로 볼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만족이 되지 못하여 볼 수 있는 요소 가지고서 볼 수 있는 주님을 만나서 사랑함으로 만족을 얻을라고 원하는 자야, 원하거든 볼 수 있는 주님의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볼 수 있는 형제를 네가 볼 수 있는 요소 가지고서, 볼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하는 고 내부적인 요소 가지고 볼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로써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해 보라. 그러면 이제 볼 수 있는 요소, 볼 수 없는 요소 가지고서 볼 수 있는 주님 또 볼 수 없는 주님 다 사랑함이 된다. 볼 수 없는 주님도 사랑했고 볼 수 있는 주님도 사랑했고, 볼 수 있는 주님은 보지 못했는데 볼 수 없는 주님은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볼 수 있는 주님을 사랑과 꼭 같은 그 사랑을 네가 느끼고 재미를 보고 기쁨을 보고 행복을 누릴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형제와 주님과 하나라는 것을, 형제와 주님과 하나라는 것 내가 주님을 상대할 때에는 형제와 주님과 하나되어 있다는 요것을 어짜든지 평소에 자꾸 연습을 해 가지고서 하나라는 그것을 마음에 깊이 느껴서 우리가 언제든지 서슴지 안하고 서슴지 안하고, 형제 만나니까 주님 만남이 됐고 주님 만남으로, 기뻐질 그 기쁨이 형제 만남으로 기뻐지는 거, 그러기에, 권찰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주일학교 반사들이나 중간반 반사들이나 이 반사들이 그 형제를 만나면 기쁘고 즐거운 그것은 느낍니다. 처음에는 심방 갔을 때에 힘이 없지마는 가서 심방하다 보니까 힘이 나고 기쁘고 즐겁지마는 거게 대해서 혹, 기쁘고 즐거우니까, '아, 형제를 심방하니까 기쁘고 즐겁더라.' 이렇게 즐겁더라 하는 그런 것을 느껴서 심령이 밝으면 그 즐겁고 반가움이 곧 그때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거게 나타나셔 가지고서 나에게 주님을 만나 가지고 반갑고 즐겁고 기쁨이라는 그 기쁨을 아마 깨달아 느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그 소자 하나를 만나 가지고서 그렇게, 만날 때에 기쁘고 또 소자 그 하나에게 내가 이렇게 주님이 내게 하신 대로 주님이 내게 하신 대로 그것을 내가 받아 가지고 그대로 그 형제에게 행할 때에 그때에 그 기쁨을 누리면서 그는 그때는 자기는 뭐 이렇게 이성 판단에 아무 그것도 없고 막바로 주님 만나 가지고 기뻐하는, 주님 만나 가지고 기쁜 그 기쁨을 자기가 체험하고 느껴서 그저 주님의 형체로 나타나셔 가지고 주님 만나 가지고 서로 주님의 육과 내 육이 만나 가지고서, 만나서 기쁨을 누리는 그 기쁨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다름이 없고 그때는, 그게 뭐 육이 있느냐 그런 것도 느끼지 안하고.
다름이 없는 주님의 형체를 내가 만나 가지고서 주님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실지의 체험의 경험을 가진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 체험과 경험을 가져 본 사람 손들어 봐요? 아, 없어요. 모두? 없어? 안 그럴 건데.
형제에게 그게 없거들랑은. 없거든 그 형제의 평안한 것보다 병석에 가 보십시오. 약자에게 가 보십시오. 더 내가 더 희생해 수 있는 그런 사람을 한번 상대해서 가 보십시오. 가면서 그래 서로 그 사람에게 대해서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하듯이 내가 그에게 대해서 할 때에 그때에. 그래 하는 가운데에 자기도 모르게, 하는 가운데 그 사람인지 주님인지, 그 사람이라는 기억도 없고, 그 사람도 그 사람이라는 생각 이게 아무것이라 그것도 생각도 없고 주님이 오셨다 생각도 없고 막바로 주님을 상대하고 지금 주님으로 둘이 같이, 이와같이 상대해 가지고서 그렇게, 지금 주님에게 대접을 하고 있고 주님에게 대해 지금 그렇게 상대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여러분들이 못 가졌었습니까? 그때는 그 사람도 모르요. 그 사람도 이거 아무것이라, 그것도 잊어 버렸고, 또 주님이 오시나 그런 것도 잊어 버렸고 어쨌든지 그를 대할 때에는 주님 나하고 단 둘이 대해 가지고 서로 마주 생활했지 그때는 아무것도. 그때는 자기도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르고, 이제 주님이 그 형체로 왔든지 안왔든지 모르고, 또 그 환자나 그 사람도 모르고. 그거 모릅니다. 그런 느낌을 못 가졌어요? 제가 그때 언제 마산에 집회를 하고, 마산 결핵 요양소에 갔었습니다. 가니까 아주 다급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같이 그 형제하고 서로 기도하고 이래 거석하면서 그 형제에게 걱정 마라. 걱정 마라. 주님이 계시니까 안심하고 걱정 말라고 그라면서, 만나 가지고서 인제 제일 뭐뭐 각혈을 많이 하고 자꾸 제일 인제, 제일 급해서 희망이 없는 그런 환자인데, 그 환자들은, 아주 위급한 환자들은 거게 다 모여 있는데 그 환자들하고 만나 가지고서 같이 이렇게 여자는 아니고 남반은 남반이오. 남반인데 거머 안고 마구 입을 맞추고 그래 입을 맞추고, 뭐 이거 뭐 입을 맞추고 혀를 빨고 막 이래 가지고 이래 쌓으면서 이래 한 때 그때는 어떻게 마음에 기쁘고 좋은지. 그 사람인지 주님인지, 그 사람인지 주님인지 나는 주님하고 나는 상대해서 나는 그랬지 나는 그때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 버렸어.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주님하고 나하고 상대해서 어떻게 좋고 기쁜지. 그래 실컷 만족을 누리고 그래 그렇게 나중에 몇 시간 지나다가 같이 나왔습니다. 안내하는 사람들은 그때는 뭐, 안내하는 사람들 옆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그거 몰라요. 모르고 그 환자들하고는 둘이 어떻게 좋은지. 그 환자들도, 그 환자도 기쁘고 즐거운데 그거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지 이 환자들이 기뻐한다 그것도 나는 몰랐어. 환자인지 뭐인지 모르고 기쁘고 즐겁고 주님하고 단둘이 기뻐하고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잔치 집에 가는 거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서 말씀한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보면은 더 은혜되고 더 즐거운 곳이 있을 것입니다.
거게는 더 주님이 필요한 곳이고, 또 내가 더 주님의 형상을, 주님의 지체 노릇을, 주님의 몸노릇을, 주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주님의 지체노릇을 더 할 수 있는 고런 자리가 더 은혜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걸 깨달은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게 심방 가는 것보다도 환자에게 가는 게 좋고, 환자보다도 더 좀 인간들이 갈 수 없는 기막힌 자리에 가는 것이 더 기쁨이 더 많은 것은 여러분들이 아마 체험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심방가기 어려워하는, 제일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은 가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 감으로서 자기에게 은혜가 되더라. 그러면 자기 일생 동안, 심방을 갔든지 기도를 하든지 할 때에 제일 은혜될 때가 어느 때인가? 부자 집에 갔을 때인가, 가난한 집에 갔을 때인가, 건강한 사람한테 갈 때인가, 병든 자에게 갔을 때인가, 더 위험한 그런데에 간 때인가? 그래 자기가 심방 갔을 때에 제일 기쁨을 누린 곳이 어떤 곳인가? 험한 곳이었던 것을 체험한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제일 험한 곳에 가니까 제일 은혜가 되더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뻐뜩 들어 봐요, 이거밖에 없어? 이거 참 가짜네. 가짜라. 이제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이제 가 보십시오. 이거 체험해야 예수 믿는 도가 뭐인지 알고 또, 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멘이 아멘이 돼집니다.
그래서, 이제 시간이 많이 갔는데, 이제 보는 형제가 주님과 하나라. 이러기 때문에, 보는 형제에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 하는 것이요, 형제에게 안 하는 것이 주님에게 안 하는 것이라. 그러면 형제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막바로 주님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고 형제에게 내가 잘 한 것이 주님에게 잘 한 것이라 하는 그 느낌을 가져 본 사람 손들어 봅시다,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사람 손들어 봐. 그것도 없어? 이거 참, 그거야 우리 매일 매일 전생활이지요. 우리 생활이 전부 그거 아닙니까? 그런 생활 아닌 게 하나도 없지. 형제에게 잘못한 게 바로 주님에게 잘못한 게 되어 기가 막히고, 아, 형제에게 내가 마음에 흐뭇하게 하면은 주님에게 흐뭇하게 한 그런 것을 느껴지는 그런 것은 우리가 매일 생활이, 한 사람도 그렇지 안하는 사람이 없지요? 열 명이면 열 명, 말하면 다 안 그렇습니까? 다 그런 게 예수 믿는 사람이오. 우리가 이것을 연습해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요 행치 안한 것이 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라는 이것을 실상화시켜 가지고서 연습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은 이렇지마는 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곧 사람이 주님이요, 주님이, 주님이 부탁하시기를 주님에게 하듯이 사람에게 하고. 또 주님이 내게 한 그것을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내가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주님이 나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을 내가, 나도 죽음으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은 내가 형제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나도 죽음으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그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 이제 나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거는 직접 못 해요.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내가 형제를 그와 같이 사랑한 것이 막바로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 것이 된 것인 것을 여러분들이 체험하고 경험을 할 것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