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5:20
주님 만날 수 있는 신앙형태
1988. 11. 4. 금저녁
본문:아가 4장 6절∼10절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 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 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이 아가서는 솔로몬 선지를 통해서 기록해 준 성경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여러 면 중에 주님과 성도 사이에 친밀한 그 교제하는, 친밀한 그 면을 나타내고 있 는 계시입니다. 이래서 여게서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상관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찾 아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에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이 내가 하는 것은 주님이 당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날이 기운다는 것은 세상에 빛이 차차 어두워져가는 것을 말하고 그림자가 가는 것은 햇빛이 있을 때에 는 그림자와 또 양지가 구별되지마는 햇빛이 없어지면 밝은 것이 없어지니까 그림자 가 차차 차차 어두움뿐이고 다른 것은 없어져 버립니다. 어두움 하나만 있게 되고 밝은 것은 없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그림자가 간다 그랬어, 그림자가 간다. 그림 자가 없어진다 말이오.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것은 햇빛이 없어지니까 그림자가 표가 나지 않습니다. 다 모두 깜깜한 밤이 되니까.
이와같이 이 교회라는 것은 혹 개인으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도 있고 또 가 정적으로 그럴 때도 있고 또 한 교회적으로 그럴 때도 있고 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 로 또 지역적으로 제일 크게는 시대적으로 이렇게 어두워지고 빛이 없으니까 그림자 가 표가 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옳고 그른 그런 구별성이 없어지는 때를 말합니 다. 지금은 아주 기독교 전성 시기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한국에는 아주 기독교 전성 시기라, 섰다 하면 교회 섰다, 이래 가지고 뭐 한 집에 교회가 네 군데까지 서 가지고 있다 말을 들었습니다. 서울은 빌딩 한 채에 예배당이, 교회가 너이가 서 가 지고 있다, 이러니까 교회는 굉장히 많이 설립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참 복음을 위한 것도 있지마는 모두 자기 욕심으로 말미암아 하나 구멍가게를 내는 거 와 같은 그런 성질의 것도 많고 또 그런 조롱과 훼방을 받는 일들도 세상에서 많이 있습니다.
해가 왜 기울어지는가? 요한계시 9장에 보면 무저갱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햇빛 이 가리워서 안 보인다 이랬습니다. 무저갱에서 나오는 연기는 인간들 끝없는 욕심 에서 나오는 그 모든 악의 세력으로 인해서 진리가 가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 게 모두 다 교회들이 서기는 많이 서지마는 그뭐 다 믿을 수는 없는 말이지마는 어 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출세하기에는 신학 졸업해 가지고 목사 하는 것이 제일 출세하기가 쉽다. 또 돈벌이하는 것도 목사 하는 것이 돈벌이하기가 제일 쉽고 속빠 르다.' 이래서 이제 펴놓고 교회를 하나의 그 목사의 구멍가게라 그렇게들 말하는 사 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이 일어나지마는 제일 좀 답답한 것은 어데 진리니 영감이니 하는 그런 것이 별로 만나기 어려울 만치 희귀해집니다. 또 그림자가 간다고 말한 것처럼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그런 일이 도무지 없습니다. 아무 강단에 가 봐도 강단에서 '이거는 바르고 이거는 틀렸다, 이래 해야 되니까 이게 옳고 저거는 틀렸다.' 옳고 그 른 것을 말하는 강단이 차차 없어지게 되어있고 또 죄니 의니 하는 것을 말하는 그 강단이 점점 희귀해 갑니다.
모두가 다 전부가 사랑 화목이오. 어떻게 화목하는 화목 운동을 이렇게 아주 시위 하는 것, 또 사랑 운동, 또 이제 다른 사람을 뭐 돕는다는 세상에서 불우한 그 이웃 돕기라고 말하는 거와같이 이렇게 뭐 서로 화목하고 봉사하는 일, 이 모두 다 보면 기독교 도덕주의, 또 기독교 화평주의, 기독교 이렇게 구호주의, 모두 다 구해서 자 선사업 구제사업 하는 이런 면으로는 참 힘을 써서 좋은데 그만 그것이 위주가 되니 까 진가를 구별하는 이런 일이 아주 히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아무데서라도 이 진리니 거짓부리니 이거 뭐 인본이니 신본이니 그거는 뭐 정치주의니 세상주의니 도덕주의니 이런 소리를 하면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런 말하는 목사는 미친 목사로 보고 교인들도 듣기 싫어하고, 그저 사랑이나 말하 고 화평이나 말하고 서로 자선이나 구제나 이렇게 말하면 취미 있게 듣지마는 성경 대로 이 성경대로냐 아니냐 성경을 가지고 구별을 하고 이렇게 진가를 이렇게 갈라 내는 이런 것을 아예 사람들이 듣기도 싫어하고 그러면 그만 다 싫어합니다. 그말 하면 다 재미없이 여기고 졸아요. 여게도 그렇소.
그만 이 세상에 서로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고 와도 오늘까지 기쁘고 즐겁다 평안하 다 아주 기쁘게 즐겁게 평안하게 잘 살아라 이렇게 어쨌든지 모두가 다 이 평안하게 낙관으로 이렇게 말하면 취미 있게 여겨도 뭐 죄니 뭐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니 뭐 심판이니 하는 소리는 아예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런 것이 이 그림자가 가는 때 입니다.
지금을 아주 기독교 전성기라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참 지금은 참된 기 독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 씀하시고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같이, 노아의 때에 멸망하는 그날밤까지 모든 사 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뭐 사고 팔고 집짓고 하는 이런 일에서만 분 망하다가 그날밤에 다 멸망을 받고 말았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이와 갈다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지금 이루어져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심히 적습니다.
이래서, 그저 이것은 뭐 증거를 할려하면 한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해가 기울 고 그림자가 갈 때에 그말은 진리가 어두워지고 그림자가 갈 때에, 모든 콩 팥을, 옳 고 그른 것을, 또 틀리고 바른 것을 이런 것을 구별하는 것이 전혀 없어지게 된다, 전부 그런 구별하는 것 없어지게 된다 하는 그것만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혼자 가 서 생각하면 뭐 백 가지도 생각할 수 있고 그 사람 지식에 따라서 몇 백 가지도 생 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든지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그림자가 있으면 이거는 양지다 음지다 표가 있지마는 해가 없으면 양지 음지 밝고 어두움이 없습니 다. 전부 다 깜깜하고 어두워져 버리지요. 해가 없으면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의 진리와 영감이 없이 되니까 뭐 옳고 그른 것이 없고 전부는 다 세상과 꼭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교회와 세상과 다른 점이 어데 있느냐? 교회와 세상과 다른 점이 어 데 있으며 세상과 마찰을 가진 그런 교회가 어데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세상하고 한덩어리입니다. 세상과 다를 것이 없소. 이름만 교회고 세상이지 실은 생각하는 것 도 그렇고 원하는 것도 그렇고 또 평가하는 것도 세상에서 가치 있다 하는 것 교회 도 가치 있다 세상에서 가치 없다 하는 것 교회도 가치 없다, 세상과 교회가 가치를 삼는 것도 같고, 비판하는 것도 같고, 대우하는 것도 같고, 소원하는 것도 같고, 부러 워하는 것도 같고 꼭 세상입니다. 뭐 세상이지 이름만 교회라 이름을 가졌지 실상은 세상입니다. 이것이 왜 그러냐? 진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라 하는 말입니다.
과거 8·l5 해방 전에는, 그때 우리나라는 조선 나라인데 조선 나라에 있는 모든 교 회뿐 아니고 세계의 교회들이 다 그때 그만 참 방종하고 모두 이 세상 전쟁이니 이 런데만 생각을 가졌지 교회라 하는 것은 아주 허무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그때에 신 신학이 들어와 가지고 한국 교회를 완전히 더럽혔습니다.
그러다가 팔월 십오일 해방 후에 조선 교회가 '이래 가지고 안 됐다' 해 가지고 개 혁을 했습니다. 그 개혁할 때에 신사참배 하고 안 한 그걸 가지고 '한 것은 잘못됐다 안 한 것은 바로 됐다' 이래 가지고 신사참배 가지고 개혁을 했고 또 교리와 신조 개혁은 약간 있었지 그렇게 많이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개혁을 했었는데 이 개혁한 해방 후의 교회들이 오늘에는 해방 직후와 지금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때는 뭐 어데든지 은혜 있는 집회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전부 막 뭉쳐서 길을 못 찾을 만치 그렇게 모여들어 가지고 진리를 구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때는 뭐 인본주의 신본주의 다 알았어. 그건 인본주의다 이건 신본주의다. 그거는 기독교 정치주위다, 기독교 도덕주의다, 그거는 기독교 유물주의 다. 뭐 이렇게 모두 다 말했지만 그런 말이 지금은 싹 종자가 없어졌어요.
강단에서 그런 말합니다. 그런 말하면 벌써 교인들이 다 상을 찡그립니다. 다 찡그 리고 '저거 또 지금 아이구 듣기 싫은 소리한다' 교인들이 상을 찡그리고 듣기 싫어 하지, 그 설교 오래하면 그 목사가 쫓겨나가게 되지 배척당하게 되지 아, 목사도 사 람인데 자꾸 그런 설교 많이하면 뭐 사과 한 개도 안 가져오지 생선 한 마리도 안 사 가지고 오지 쫄쫄 곯지 뭐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게 차차 차차 그게 없어집니다. 없어지고 이제 꼭 세상과 같은 놀음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은 오늘은 세상에 빛이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한국에 '이 신학교 질이 낮으니까 신학교 질을 높이자' 이했는데 '그러면 신학교 질 을 높이면 어떻게 질을 높이노?' '신학교 질을 높이는 데에는 다 신학생들은 전부 대 학을 졸업 맡은 사람으로서 전부 신학생들이 돼야 되지' 세상 학문이 낮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신학의 질을 삼아 가지고 그 세상 학문이 적으면 질이 낮다 그 학문이 많으면 질이 높다 그래서 그 질을 높이자 하는 데에서 바짝 서둘러 가지고 모든 신 학교가 신과대학이 되고 대학원이 됐습니다.
신과대학이 되고 대학원이 됐는데 신학교로 있을 때와 신학대학이 된 때와 또 신학 대학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신학대학원이 된 때와 그것을 그때와 지금과 꼭 사진을 베껴 놓은 것같이, 사진같이 고 상태를 베껴 놓은 것 같으면 그때와 지금과는 아주 l80도 달라졌습니다 아주 달라졌습니다.
그게 자기네들은 그걸 모릅니다. 홀켜들어가 죽는 자는 몰라요, 그게 어데서 나왔느 냐 하면 우리 한국에 신학교 질이 낮으니까 신학교 질을 높이자 하는 거게서 신과대 학이 나왔습니다. 신학대학이 나왔고 신학 대학원이 나왔는데 그 나온 때부터 점점 교회는 세상화돼 버리고 말고 이래서 여게 가까이 있는데 여기 OO신학교도 그 OO 대학이 되고 나서 이제 신학은 그만 신학부로 좀 두고 또 종합대학이 될 때에, 그때 요새는 지금 뭐 의대가 제일 좀 유식한 학생들이 많이 있고 이러니까 의대가 세력을 잡아 가지고 지금 신학교는 그만 저 아주 매몰돼다시피 매물돼 쫓겨서 어데로 가다 시피 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지금 진리는 아주 가리워져서 어두워집니다.
어두워지는데 이때에 '이렇게 교회가 여게 저게 서니까 자꾸 이자 참 진리가 충만 한 시대다' 이렇게 보는 사람과 '이 진리가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고 지금은 참 그림 자가 갈 때라. 흑백을 구별하는 이 구별하는 일이 아주 없어지는 때라.'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총을 맞고 욕을 얻어먹고 교인들 에게 그런 소리하면 대략 세상에, 세상 돈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부자고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인데 그런 소리하면 그 사람들이 배척이나 하지 뭐 사례도 잘 주지도 않 고 또 뭐 대접도 안 하니까 쫄쫄 곤다 말이오. 그러니까 교역자들도 또 그렇게 할 필요 없다 해 가지고 좀 그래 돼 가지고 해서 어쨌든지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가 온다 하는 말이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내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 느냐' 하는 말씀을 보면 얼마나 그 믿음이 식어지고 빛이 없을 것을 계시록에도 말 했고 총총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랬는데, 지금 오늘 저녁에 말하는 것은 그러면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여 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내가' 하는 것은 주님 을 말합니다. 그러면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그때는 주님 만나려면 어데로 가야 되느냐 하는 그걸 요게 말하는 것이오. 주님 만나려면 어데로 가야 되느냐? 그러면, 해가 기울어 진리가 없고 빛이 없고 전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세상 이 무슨 강의하는 거와같이 세상 강의지 하나님의 말씀은 이름만 떡 갖다 붙여 놓고 실 상 강의할 때 하나님의 도를 강의하는 일은 없고 전부 세상 걸 강의합니다. 이래서, 그래도 눈이 어두워 모릅니다.
신학은 신학은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게 신학이요 또 성경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 하는 것을 하나님 공부하는 게 신학인데 요새는 신학은 한 학문이지 성경과 하나님 을 공부하는 게 신학이 아니라 할 만치 완전히 변해져 버렸습니다.
변해져도 거게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학자라 할수록 그 사람들은 다 신학은 신학이라는 한 학문이 있어서 그 신학을 신학이라는 한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지 신학이 어데 성경 공부하며 신학이 어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는 것 아니라고 그렇게 백의 구십구가 다 그래 말하고, 백의 백인데 '백 의 구십구' 하는 것은 하나 끼여 있다는 것은 그저 다 칠 수는 없고 그거 이러니까 구십구는 그렇다 그래 말하는 것이지 그런 시대가 왔습니다.
이러니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몰라요. 그거 전부, 앞에도 그 사람 뒤에도 그 사람 옆에도 그 사람 전부 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거게 반대되는 그런 것을 말 할 수도 없고 또 깨달을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다만 요것은 어데서 아느냐? 아 는 것은, 마태복음 l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 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거 는 네 육체가 너를 알게 해 준 게 아니고 육체가 알게 해 준 게 아니라 그말은 이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알게 해 준 게 아니라 그 말이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이 접해 가지고 안 게 아니고 네 속에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셨 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인간의 귀만, 귀에, 인간의 말에다가 귀를 기울이고 해서 많은 말 듣고 많은 서적을 읽으려고 해서 인간에게 듣는 그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영감을 받지를 못합니다. 영감이 아니고는 이 세대를 알 수가 없어요. 이런데 주님 말씀하시 기를 교회를 어데 세우는고 하니 네 위에 세우겠다 반석 위에 세운다, 반석이 뭐인 데? 인간의 그 말에다가 귀를 기울이고 눈을 보고 아는 게 아니고 그 속에 하나님이 감동시키는 그 감동을 따라서 아는 고 감동 따라 움직이는 거게 교회 세운다. 또 천 국 열쇠를 준다, 감동 따라 움직이는 그것이 천국 열쇠다. 또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도 매인다, 감동받은 그 감동대로 하는 그것이 땅에서 결정한 것이 하늘에 결정이 되고 이와같이 되어지지 그 외에 다른 데서는 구원 역사가 없다 그말입니다.
이래서, 이 말씀에 대해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라 하는 요것을 똑똑히 알아 야 그 다음에 그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는 그것이 필요하지 이걸 부 인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말하면 그거는 미친 소리와같이 아무 효력이 있을 리 가 없는 것입니다.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그때는 다 깜깜해지니까 뭐 주님도 못 보고 그만 전 부 멸망 가운데서 한목 멸망을 받고 마는데 이렇게 깜깜한 어두운 시대가 되고 어두 운 사회가 되고 어두운 교회들이 이와같이 되어져서 전부 세상화돼 버리고 이름만 교회라는 이름이 있고 성경 말씀만 한 마디씩 본문 읽어 놓지마는 전부 하는 말은 딴 말 하고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될 때는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노아 홍수 때 여덟 사 람만 구원얻고 나머지기 다 멸망받은 거와 마찬가지로 인자가 올 때도 많은 수들이 주여 주여 하지마는 다 멸망받고 구원얻을 숫자는 심히 적다 하는 이 말에 뭐 놀라 나는 사람이라야 거게 대해서 알려고 애를 쓰지 그까짓 거야 자기 상점에 사탕 한 개 파는 것만치도 요긴치 못하다고 이렇게 아주 깔보고 이렇게 멸시하는 그 사람에 게는 이런 말씀이 필요가 없어.
이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주님을 만나야 되는데 주님 만나고 싶은 '만나 지 못하면 멸망받는다.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을 여게 말 씀해 놨어.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데 가서 만나야 되느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주님이 거게 가신다 했으니까 거게 가 면 만난다 말이오. 주님을 만나는 데에는 어떻게 만나느냐? 이 세상이 자꾸 이와같 이 지금 타락하고 부패해서 세상화되고 교회는 전부 교회나 세상이나 다를 게 없습 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를 게 뭐 있습니까? 교회와 세상이 다른 게 뭐 있습니까? 교회와 세상은 꼭 하나입니 다. 이름만 달랐지 꼭 하나요.
행동이나 뭐 가치로 아는, 교회는 이런 걸 가치로 알고 세상은 이런 걸 가치로, 교 회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나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나 세상에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교회도 가치 있게 여기고 세상에서 가치 없게 여기는 것은 교회서도 가치 없이 여기고 그러니 가치 평가가 세상하고 꼭 같으니까 그거 세상이지 뭐 딴게 뭐 있습니 까? 또 비판도 세상이 이렇게 비판하면 교회도 그래 비판하고 전부 세상하고 한덩어 리라. 세상하고 한덩어리기 때문에 그림자가 갔다 그 말이오. 어두워졌다.
그러면 그때에 주님 만나는데 어떻게 만나느냐?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서 만난 다. 거게 주님이 가니까 거게서 만난다. 몰약산이라는 말은, 이 산이라는 것은 차차 올라가면, 산에 올라가는, 산은 올라가야 됩니다. 산에는 올라가야 되고 또 올라갈수 록. 그건 좁아집니다. 올라 갈수록 좁아져요. 처음에는 백 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시작했다가 차차 차차 신앙 걸음올 걸어서 이 몰약산을 올라가려 하면은 사람이 다 떨어져 버리고 나중에는 몇 사람 안 올라가요.
이 몰약이라 하는 것은 방부제 말합니다. 방부제 약. 썩지 못하게 하는 방부제, 여 기 농약 같은 이런 것 다 방부제 약입니다. 썩지 않게 하는 방부 약인데 '몰약산' 방 부산에, 방부산으로 내가 가겠다.
그러면 이렇게 어두워질 때에 다 어두워지니까 '세상이 다 그런데 뭐 나 혼자 그럴 게 뭐 있나?' 이래서 그만 '다 그러는데' 하고 자기도 속화되고 세상화되기 쉬운데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고 몰약산에 있다. 썩지 않는 그 언덕에 계신다. 썩지 아니한 그 만당.
자꾸 이렇게 올라가고 올라가면 자꾸 산이 좁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안 썩 으려고 이러면 처음에는 나도 안 썩겠다 나도 안 썩겠다 이렇게 안 썩겠다 안 썩겠 다, 썩는다 말은 죄짓는다 말이오. 나도 안 썩겠다 안 썩겠다 이렇게 한 사람들이 많 았지마는 차차 차차 어려움이 오니까 다 모두 다 주저앉아 버리고 주저앉아 버리고 해서 나중에 가서는 아주 숫자가 적어집니다. 그러기에 신앙 걸음은 자꾸 갈수록 잘 믿어 갈수록 고독해지는 게 신앙이오. 신앙 걸음은 고독해지는 게 신앙이요 또 신앙 걸음은 갈수록 자꾸 올라가는 게 신앙 생활이라, 이러니까, 이렇게 세상이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그때에 주님 만나는 길은 썩지 않는 봉우리에서 주님 만날 수 있다. 썩지 않는 봉우리에서 주님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방부의 산에서 주님 만날 수 있다 하는 요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점점 이 세 상이 어두워지고 환난이 심해서 교회가 자꾸 속화될 때 그때에 주님 만나는 곳은 썩지 않는 봉우리에서 주님 만나는 요것만 기억하십시오. 썩지 않는 봉우리. 처인 먁 인이 범죄해도 나는 범죄하지 않겠다. 아무리 그 사람들이 그와같이 해도 지금 속화 돼도 나는 속화되지 않겠다. 그 사람들이 뭐 계명 다 어겨도 나 혼자라도 계명 내가 어기지 않고 계명대로 살아 보겠다 자꾸 고렇게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몰약산에 가는 것이요 그런 데에서 주님 만나게 됩니다.
또 유향의 작은 산이라는 것은 기도의 산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그럴 때에는 유 향의 큰 산이 아니고 작은 산이라. 그러면 지금 기도하는 사람들이 뭐 뭉텅뭉텅 이 래 하지마는 그럴 때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지를 못해요. 그럴 때에는 기도하는 사람 이 없습니다.
참 왜정 말년에도 뭐 모두 그렇게 신사참배 때문에 난리 지기고 나니까 모두 다 기 도하는 사람들 없어요. 그때는 기도라 말이 없어요. 뭐 기도 안 하고 다 모두 그만 세상화돼 가지고 이럴 때에 그때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 소문이 냥어요, 그때. 그 거창서도 기도하는 사람 누구는 어데 가 산에 가서 기도한다, 기도한다 그래 다 이 름이 있어.
그때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어요.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라 그러면 뚤뚤 뭉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는 외롭게 고독하게 기도하는 그 봉우리에 가서 주님 만 나라. 그러면 이렇게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는 주님 만날 곳은 방부의 산과 외롭게 외롭게 조용히 고요히 외롭게 기도하는, 외롭게 기도하는 그 산에서 주님 만 난다. 그 봉우리에서 주님 만난다. 외롭게 기도하는 그 기도의 절정에서, 기도의 만 당에서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 만나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질 때에는 요 몰약산, 또 유향의 작은 산. 그때는 뭐 기도하는 사람이 여럿이 아니오. 혼자, 혼자 기도해, 누가 기도하러 가려 합니까? 그 기도하는 것도 다 그때는 기도하러 가자 해도 갈 사람이 없어요. 저도 말했지마는 8 ·l5 해방을 저는 거창 덕유산이라 하는 그 산이 높은 산인데 그 산에서 혼자 기도 하다가 팔월 십오일 맞이했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뭐 기도를 누가 하려 해야지? 다 모두, 지금은 서로 기도한다고 야단이지아는 그럴 때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러니까,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럴 때에 기도하는 거게서 주님 만날 수 있고 세상이 다 썩어도 나 혼자 썩지 않고 깨끗하게 성결을 지키는 거게서 주님 만날 수 있는 요 아가서 4장 6절 요 말씀을 단단히 기억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두워질 때에는 어데서 주님 만나나?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서 주님 만나게 된다. 또, 그 다음으로, 또 주님을 그러면 어떤 데에서 같이 동거하게 되나? 같이 주님하고 같이 거처하게 되느냐? 만나는 것은 몰약산과 유향산에서 만났 고 또 같이 거처는, 주님하고 같이 거처하려 하면 어데서 거처할 수가 있느냐? '나의 사랑 너는 순전하고 어여뻐서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이제 이렇게 몰약산 과 유향의 작은 산에서 주님 만난 고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요 주님의 참 신부요 주님이 어여쁘다고 여기는 사람이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기 때문 에 세상이 어두워져 갈수록 기도의 세월이 없소. 갈 그럴수록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 지는데 그럴수록 그때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 깨끗해서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 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그러면 주님과 동거하는 데에는 어데서 동거합니까? 주 님과 동거하는 곳은 주님을 만나 가지고 주님과 같이 동거, '나와 함께 하자' 하니까 '함께 하고' 했으니까 주님과 동거하는 것 아닙니까? '나와 함께 하고' 주님과 동거하 는 것.
주님과 동거는 어데서 동거하느냐? 주님과 동거는 레바논에서 동거합니다. 레바논.
레바논에서 주님과 동행합니다. 그러면 레바논이 뭐인가? 레바논은 백산이라는 말입 니다. 횐산, 백산이라 말이오. 레바논 산은 예루살뎀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아주 큰 태산입니다. 태산인데 그 태산은 일본 부사산과 같이 아무리 칠팔월 제일 더울 때라 도 그 산에는 만당에는 항상 눈이 있어요. 눈이 썩지 않아요. 그래서 그 백산이라 이 름을 그래 백산이라 하는 곳인데 백산에서 만나자. 백산에서 주님하고 함께 한다.
그 말은 이 세상 죄악이 오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뭐 성결한 체 이렇게 해도 나중에 가서는 차차 차차 세상 이 죄악의 세력이 강해지니까 거게서 썩어지고 썩어져서 그 만 다 속화돼 가지고 썩어지는데 온 세상이 썩어져도 모두 다 눈이 다 썩어 버려서 눈이 녹아서 다 그만 시커만 땅이 돼 버리고 말았지마는 레바논 산 그 산에는 꼭대 기에는 눈이 하야이 그대로 안 녹고 일 년 내내 횐눈이 그대로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온 주위 환경이 다 부패해져도 부패해지지 않고 오직 홀로 깨끗하 게 성결을 지키고 있는 거게서 주님 같이 합니다. 레바논 산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했습니다. 레바논 산에서 주님이 함께 한다. 레바논 산이라 말은 팔레스틴 북 쪽에 있는 그 산인데 제일 큰 산 상봉을 가리켜서 레바논 산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거는 백산이라, 눈이 있어서 하얀 백산이라. 그러면 백산에서 주님 만난다.
주님하고 같이 간다.
주님을 만나기는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서 주님 만나 가지고,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서 만난 사람은 주님이 보고 너는 어여쁘다, 순진하다, 흠이 없다, 나의 신 부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어두워져서 해 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 가면 주님 만나고 거게서 주님 만난 사람은 벌써 깨끗한 사람이요 흠이 없는 사람이요 순전한 사람이요 주님 의 신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주님과 동거하는 데는 어데서 동거하 수 있느냐? 주님과 동 거하는 데는 레바논 산에서 동거한다. 레바논 산에서 동거한다. 레바논 산, 레바논 산은 뭐이라 말이지요? 백산. '레바논 산에서 나와 함께 하고' 그러면 레바논 산에서 거게서 그렇게 흠없는 그런 칭찬받은 성도라도 레바논 산에서만 주님과 동거한다.
그 성결에서만 동거한다. 성결 떠나면 주님과는 그만이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 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이러니까 뭐 자기 생명을 내놔도 요 성결 내놓지 않아야 됩니다. 성 결, '레바논 산 에서 나와 함께 하고' 주님과 동거하려면 그 백산에서 동거한다. 백산에서 동거한다.
온 세상이 다 썩어서 눈이 다 썩어서 전부 그 횐눈이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썩어서 다 없어졌지마는 그 레바논 산만당에는 눈이 하야이 그대로 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주위 환경에 천인 만인이 다 더러워져도 자기만은 더러워지지 않 고 성결을 고대로 지키는 거게서 주님과 같이 하셔. 주님 동거할 수 있습니다. 주님 동거는 레바논 산에서 동거한다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요.
기억해 가지고 아무리 성결을 지키기가 힘들고 가족끼리, 그 가족이 더러워지려 할 때에 같이 더러워지지 않고 성결 지키려 하면 거게서 외롭기가 짝이 없어요. 또 온 그 교파에서 진리를 지키려 하면 그들에게 욕을 얻어먹다가 나중에는 주먹을 당하다 가 나중에 치리를 받다가 오만 짓 다 당해. 뭐 오만 욕 다 얻어먹고.
얻어먹든지 말든지 이래도 이제 주님하고 동거하고 동거할려면 우리는 헤르몬 산에 서 주님 만나고 주님 동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그러면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레바논 산은 그 대산맥의 큰 줄기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 헤르몬 산이라는 그거는 거게서 원줄기 큰 산에 소 뽁 한 솟은 봉우리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이제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는 어데서 동행하느냐?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어데가 동행하느냐. 레바논 산에서 동행한다. 백산에서 동행한 다. 그러면 이 성결에서 주님과 동행하지 성결 떠나서는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 다. 제가 아무래도 이 성결 더렵혔으면 주님은 만나 볼 수가 없는 것이오. 자기 혼자 예수 믿지.
이러니까 아무리 재미 있는 일이 있고 뭐 꿀이 흐르고 아무리 재미 있지마는 이 레 바논을 떠날 수가 없어. 썩을 수가 없어. 썩어질 수가 없어. 거게서만 주님 만나고 거게서만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래서 '나와 함께 가자' 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주님과 동행하자 이래 놨어. 그러면 아마나는, 아마나는 굳세게 잡는다는 뜻입니다. 견고히. 그러면 하 나님을 견고히 잡고. 하나님을 잡고 잡고 또 잡고 또 잡고, 진리를 잡고 잡고. 의를 잡고 잡고. 예수님의 사죄를 잡고 잡고, 칭의를 잡고 잡고, 화친을 잡고 잡고, 영감을 잡고 잡고 진리를 잡고 잡고, 이러면 자꾸 잡으면 이게 뭐이냐? 그 아마나 산 꼭대 기가 된다 말이요, 꼭대기.
아마나 산, '아마나와' 하면 아마나 산 봉우리를 말해, 아마나 산봉우리. 아마나라 말은 볼끈 잡는, 견고히 잡고 놓지 않고 볼끈 잡는 그 절정이라 말이오. 볼끈 잡는 절정. 굳게 잡는 절정. 옳은 것을 굳게 잡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 를 '네가 이제 가진 것을 굳게 잡고,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해라' 그렇 게 말씀했어. 굳게 잡는 것. 옳은 걸 굳게 잡는 것.
그러면 진리를 처음에는 슬그머니 잡지마는 좀 더 또, 내가 이 진리를 내가 어떻게 어려움이 있어도 이 진리를 놓지 않겠다. 괴로와도 놓치지 않고 명예가 떨어져도 놓 지 않고 직장이 떨어져도 놓지 않고 이 진리를 놓지 않고 영감을 놓지 않고 무슨 애 로가 와도, 또 예수님의 사죄를 벗지 않고 칭의를 벗지 않고 화친을 벗지 않고 자꾸 이래 입으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 '견고히 잡는 봉우리에서 나와 함께 하자' 그러면 굳게 잡고, 옳고 바른 참된 것, 이 세 가지, 사죄 칭의 화친의 피요 또 진리 영감 또 둘이요, 진리 영감 피 이 셋을 잡는 일을, 잡으면 또 잡는 것이 주님하고 동 행하는 것이고 더 잡으면 더 동행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그 잡는 그 방편으로써만 주님과 동행하는 그 길이 이루어진다 그 말이오.
'스닐과' 죄악이 부딪히니까 이는 하나님이 전능자시니 그 세력이 크다마는 내가 의 지하고 바라보는 주님의 능력만 못하니 전능자를 내가 바라보고 의지하니 전능자로 갑옷삼아, 스닐 산이라는 뜻은 갑옷이라는 뜻인데 갑옷의 상상봉에서 나를 만나자, 나와 함께 하자.
또 '헤르몬과' 헤르몬은 단절을 말합니다. 잡아당겨도 끊는 것. 헤르몬, 단절의, 단절 의 봉우리에서 나와 함께 하자. 단절. 자기가 꼭 이거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데, 하 고 싶어서 못 견디는데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면 고걸 싹 끊을 때에 그때에 주님이 동행한다. 주님이 동행해. 해 보면 알아요, 주님이 동행하는 걸.
자기가 '이거는 내가 아무래도 이거는 마련해야 되겠다' 마련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고 이런데 고걸 보니까 그것 마련해 그거 가지는 것을 주님이 싫어하신다 말이오.
싫어하시면 '아무래도 이걸 안 해야 되는데' 해도 그놈 끊기가 어려워. 안 해야 되는 데도. 욕심도 끊기가 어렵지 사업도 끊기가 어렵지 직장도 끊기가 어렵지 인정도 끊 기가 어렵지 애정도 끊기가 어렵지 뭐 끊기 어려운 게 얼마나 많은지? 또 안면도 끊 기 어렵지.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하루 종일 '야, 그렇지마는 내가 몰라 그랬다. 네가 지금 너 거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하면 내가 조서 내리기를 딴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구 덩이 넣기로 했으니까 너라고 안 넣을 수 없고 이러니 네가 가면 내가 정치를 어째 하노?' 하루 종일 다니엘에게 사정했다 말이오. 사정하면서 '네가 어찌 됐든간에 속 으로는 할지라도 겉어머리로 안 한 척이라도 해라.' 하루 종일 이래 쌓을 때에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왕이 자기에게 하루 종일 조아대니까 그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거 어렵겠소 안 어렵겠소? 죽인다는 게 어렵겠소 그게 어렵겠소? 죽인다는 게 어 렵겠소 그거 참 자기를 사랑하는 왕이 자기에게 사정하는 그 사신하는 그게 어렵겠 소 몽둥이로 뚜드리는 게 어렵겠소? 죽이는 게 어렵겠소 뭐이 어렵겠소? 그게 더 어 려워. 어려워.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 어려운 그럴 때에 그것을 헤르몬 봉우리에서 나와 함 께 가자 그럴 때 그 단절. 아무리 이렇게 왕이 하지마는 이제 내가 이러면 주님에게 내가 정조를 다 팔아 버리는 게 되는 것인데 할 수가 있나? '왕은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들을 줄 아십시오' 딱 단절하니까 이놈아 그러면 사자구덩이 집어 넣는다. 사자구 덩이 턱 집어 넣을 때 그때 주님하고 동행이라. 주님하고 동행.
이래서, 단절의 절정에서 주님과 동행한다. 굳게 잡는 절정에서 주님과 동행한다.
옳은 것을 굳게 잡을 때. 희미하게, '뭐 그렇게 할 게 뭐 있나? 그저 물에 물탄듯 술 에 술탄듯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이렇게 해야 좋아하지' 요런 거와 '요거는 톨렸다' 옳고 그른 것을 그른 것은 그르다고 딱 단절 지우고 옳은 건 옳다고 뽈끈 잡고 요렇게 하는 요 결단성 있는 거기에 주님이 동행합니다. 그거 없는 사람 주님 동행 못 해요. 암만 제가 믿는 척해도 인간에게는 팔방미인으로 미인이 될지라도 주 님 앞에는 그 사람은 정절 신부는 못 됩니다. 이래서 견집의 아마나 산, 견집의 산, 스닐 산 방패의 갑옷의 산, '헤르몬과' 단절의 산.
또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이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사자굴 표범산에 거게 사자굴에 갔는데 거게 주님이 계셔요. 또 표범산. 그러면 이렇 게 우리들이 이 신앙 생활을 해 나갈려고 하면 다니엘은 사자를 만났고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 뜨거운 불미를 만났고 이런 것을 가리켜서 사자굴 표범산이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자굴 표범산 이런 것은, 그러면 사랑하는 자가 주님하고 같이 갈 때에 어데서 주 님 동행했는고 하니 사자굴에서 동행했고 표범산에서 동행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자 굴과 같이 우리가 이 세상 지나가면 사자와같이 맹수의 그 세력들, 맹수와 같은 그 런 세력들, 또 그 사자와 같은 맹수의 그 모든 세력들, 이 맹수와 같은 이건 세력들 이 우리의 신앙을 삼킬라고, 정조 안 줄라 하면, 신앙의 정조 안 주려 하면 죽인다 어쩐다 뭐 별별 소리를 다 해.
그럴 때는 참 호랑이 담배 피울 때라. 저아레 내가 OOO권사님 만났는데 하룻밤에 는 아주 밤중돼서 나오라 해 보니까 마구 뭐 뻔쩍 뻔쩍한 금을 막 차고 이래 가지고 울긋불긋 금테 하고 이래 가지고 와서 떡 여기 큰 칼을, 일본 왜정 때는 칼이 이래 요. 왜정 때 칼 봤어요, 일본 순사 칼? 순사 칼 본 사람 손 들어 봐요. 왜정 때 순사 칼 본 사람. 봐, 이것도 봐. 이거 다 이거 뭐 신출내기라. 이게 지금 여러분들은 애를 써야지 이래 가지고는 이거 뭐이 둬지 몰라요. 이 칼이 이만해요.
이거 갖다 놓고 또 총 갖다 놓고 막 이래 가지고 막, 참 또 인제 그 총이 아니고 그거 격검하는 데, 격검하는 그거 저 몽둥이 이런 것 있어요. 격검하는, 대로 만들어 암만 뚜드려도 부러지지도 않아요, 그거는. 이런 이래 놓고 이래 가지고 막 성을 내 가지고 지금 '네가 지금 똑똑히 대답해라' 이러며 뭐 일본 나라에 그러면 천황 폐하 에 대해서 천황 폐하도 그러면 지옥가느냐?' 아,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뭐 그 거 내가 듣는 대로 다 못 외우고 그런 것 비슷하게 그래요.
이래도, 그랬는데 막 겹이 나서 떨려서 못 견디는데 그 전날 밤에 꿈을 꾸니까 그 러더래. 전날 밤에 꿈을 꾸니까 그 지금 고문과 고형을 당하는데 못 견뎌서 이래 층 이 나 볼볼 떨고 있는데 보니까 똑 그날 그 닥친 거와같이 그렇더래요. 그때 막 칼 을 놓고 이거 이래 놓고 막 그래 가지고 위협을 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자세히 보니까 종이더래요, 종이. 종이 사람이라. 종이 사람인데 훅 부니까 다 날아 가 버리더래요.
그래 그러고 난 뒤에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이톤날 보니까 꼭 그 광경이 있는데 그 래서 거게서 그 담력을 얻고 '이거 너희가 암만 그래 쌓아도 너희는 종이 사람이다.
아무 힘 없는 거다. 그까짓 거 불면 다 날아간다.' 이러니까 뭐 그럴수록 더 웃어가 며 유유하게 이래 놓으니까 그것들이 나중에 그만 나중에 뭐 아주 뭐 부애가 나 가 지고 죽을 지경이지마는 그래 가지고 다 이기고 났더라고.
요 사자굴과 표범산을 왜 요렇게 나타냈느냐 하면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 사자 같은 일 또 표범 같은 일, 그러니까 사자굴에 있어, 사자 굴에 있어. 그런 맹수와 혹독한 자들이 우리 신앙 생활할 때에 그렇게 대적하는 것 은 뭣 때문에 그와같이 하느냐? 암만 사자 같고, 표범산과 사자굴 말이지요. 사자굴 과 표범산, 이런 그 맹수가, 맹수 같은, 아주 사자 같고 이거 표범 같은 이런 맹수성 을 가지고 혹독성을 가진, 혹독성 가진 정치, 맹수성 가진 모든 정치인들, 왜정 말년 에도 그 일본 부장들 또 형사들 그런 사람들 다 모두 다 그 이 사자같이 이렇게 한 사람들인데,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그말은 사자굴과 표범산에까지 그 있는데 거게 가면 사자굴과, 이거 표현이 내가, 알아도 내가 말을 잘 못 해요. 여러 분들 내가 말할 때에 뭘 말할라는가보다 그걸 알아요.
사자굴과 표범산에 거게서 내려다 보아라 하는 것은 이렇게 주님하고 동거하는, 만 나는 곳은 몰약과 유향산에서 만나 가지고서 또 레바논 그 산에서 동거하다가 이제 또. 레바논에서부터 같이 동행하다가 이래 가지고 사자굴 표범산에 이와같이 지금 가는데 그 가는 데에는 주님이 함께 가시기 때문에 표범이고 사자고 상관이 없어.
사자굴에 가서 쉬고 있어. 사자굴에 가서 쉬고 있고 표범산에 가 가지고서 쉬고 있 고 거게서 지금 구경하고 있어요. 내려다 보고, 이거는 뭣을 가리키느냐 하면 이렇게 주님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 어떤 어려 움이 닥치는데 그 어려움이 크게 닥쳐, 큰 어려움이 닥칠수록 닥칠수록 주님이 자기 를 크게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하게 되고 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주님 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어려움 그 세력보다도 주님의 세력이 크니까 문제 없다는 것, 그러니까 이런 일이 닥칠수록 주님이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하 고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주님과 동행하는 데는 뭐 어떤 것이 와도 그것이 상관이 없는 것을 여게서 가리켜서 보이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어. 뭐 공산주의가 어떻게 뭐 어떤 게 와도 그 어떤 것이, 강하고 혹독하 고 맹혹한 것이 오면 올수록 주님의 보호를 그들에게 구경시킬 것뿐이고 보호를 나 타낼 것뿐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 평안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것뿐이고 본인은 평안한 그 평안함을 만나는 그런 참 아주 신기한 그런 경험과 체험을 볼 것 뿐이지 아무 거게는 상관이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말합니다.
이래서, '내려다 보아라' 그러면 그리그렇게 신앙으로 이렇게 자꾸 따라서 신앙을 따라서 후퇴하지 않고 전진 전진으로 올라가면 나중에 가서 인간이 보면 두려워서 견디지 못하는 사자굴에 가서 거처하고 있고 사자굴도 상관없고 표범산에도 상관없 고 아무 상관없이 거게서 가장 평안하게, 그곳이 평안하게 사는 곳이요 제일 평안한 곳이요 주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있는 곳이요 주님과 또 동거 동행하는 곳이요 또 세상에게 빛으로 보여 주는 곳이요, 거게서 올라가면 일반 신앙 생활하는 것과 자기 신앙 생활은 아주 높은 차원에 올라가 가지고 높은 차원에서 그래 보면 일반 신앙 생활과 자기 신앙 생활이 그렇게 산 발치에 있고 아주 높은 산 사자굴 표범산 에 거게서 있는 거와같이 그렇게 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힘써 나아가면 이거 높은 고차원의 자리까지 갈 수 있다. 갈 수 있 어서 사람 보기에는 사자굴 표범산이니까 다르게 보이지 그 본인에게는 아무 피해도 상관도 하나도 없고 가장 평안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노래 지은 노래에 흉흉한 파도 입고 고문 고형의 잔치집에 간다고 하는 그것이 내나 아가서에서 나온 말입니 다.
이래서,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나가면 환경과 주위가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본인에게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자에게는 어려움이 올수록 피해는 하나도 없 고 제 삼자에게는 볼 때에 기이하게 참 그 영광스럽게 보여지고 본인에게는 아무 손 해 없고 아무 어려움도 없고 불안도 없고 사자굴이 자기 쉬는 곳이라.
이래서 신앙으로 나가는 데는 어떤 맹혹한 그 세상 어떤 운동이 있어도 신앙으로 나가는 자에게는 그자를 도리어 영광스럽게만 만들고 존귀하게만 만들고 모든 사람 에게 우러러 보이게만 만들지 본인에게는 아무 어려움도 없고 실지의 어려움이라 하 는 그런 것 당하는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내 목의 구슬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다' 주님의 마음을 빼앗는 데에는 이런 것으로 주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레바논 산에서 주님과 같이 하는 데에서 레바논 산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또 아마나 스닐 또 헤르몬 꼭대기 사자굴 표범산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데 세상은 볼 때 위험 천만이지마는 한없이 평안하고 한없는 그 능력 속에 파묻혔기 때문에 그 자 리보다, 딴 데는 좀 불안 하지마는 그보다. 더 평안한 자리가 없어. 다른 데는 주님 과 좀 멀지마는 거게는 주님과 밀접한 주님의 능력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가장 평안하다 말이오.
그러면 이것이 런이냐? 이 생활하는 여게서 주님의 마음을 다 빼앗을 수가 있고 다 주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다 기울어질 수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래서, 이 말씀을 여러 수많은 각도로 생각해야 되는데, 왜 산이라고 이래 비유했 는가? 산이라고 이래 비유한 것은 신앙 생활이라 하는 건 자꾸 걸어서 올라가야 돼 요. 걸어서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한 자욱씩 걸어 올라가면 뭐 앉은뱅이라도 천 미 터라도 올라갈 수가 있어. 걸어 가서 빼지 않고 그 한번도 순서를 뽑지 않고 계속적 으로 자기 현실 현실을 밟아 올라가면 이 신앙 생활이 아주 쉽고 못 올라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신앙은 올라가면 주님 만난다. 올라가는 데 주님 만난다.
또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자꾸 신앙 생활은 신앙이 자라갈수록 동지가 적어진다. 신 앙이 자라갈수록 동지가 적어져요. 적어지고 또 점점 주님으로 더불어 가까와질수록 세상과 멀어지고 이러니까 산과같이 자꾸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것 모양으로 그 래 좁아지게 된다. 그런데 그 좁아지는, 평지보다 산만당 절정, 절정 만당 거게 가 가지고 이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 생활할 때에 밑이 발치가 있고 위에 봉우리가 있는 것이니 까 그 봉우리 올라가는 데에는 외롭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동지가 적어져요.
적어지는데 자꾸 이 걸음을 걸어가면 가다가 보면 여러 가지 표범 같은 그런 애로 가 있어. 가족이 말이요, 가족이 표범돼요. 자녀가 부모에게 표범될 수 있고 부모가 자녀에게 표범될 수도 있고 그 또 남편이 아내에게 표범되는 수 있고 아내가 남편에 게 표범 되는 게 있고 사회가 그런 것도 있고 세상이 그런 것도 막 그런 맹수 같은 그런 환경의 대적들이 많이 있으나, 많이 있으나 제 삼자들이 볼 때에 대적이고 제 삼자들이 볼 때에 아이구 저 위험천만하다, 위험하다 이러지 그 본인들은 사자굴에 서 지금 주님하고 거게서 아주 희희낙락하면서 이 모든 밑에 있는 세계를 내려다 보 고 구경하고 있어요.
이러니까, 신앙 생활하는 데에는 가면 갈수록 자꾸 고독해진다. 신앙을 자꾸 예수를 바로 잘 믿어 나가면 갈수록 고독해진다. 그래 고독해지는 걸 두려워하면 안 돼. 고 독해진다. 고독해질 뿐만 아니라. 이제 거게는 사자굴 표범산을 닥치게 된다. 사자굴 표범산을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사자굴 표범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주 님이 같이 계시니까 이제 사자보다도 주님이 더 강하시고 또 사자의 표범 뭐 맹수의 해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보호가 얼마나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무 그 본인들의 신앙의 사람에게는 해독이 아무 비쳐지지를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래서, 이런 것을 자꾸 좀 생각하면서, 그러편 이 사자굴 표범산은 왜 말했는가? 사자와 표범이 그러니까 밑에서는 보고 하, 저 사자가 저게 있네. 사자하고 있다. 저 거 물려 죽을런가? 제 삼자가 겁을 내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야, 저래 죽겠다. 마음이 조리조리해 가지고 그렇지 본인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사자굴 표범산 그런 것이 털끝만치라 도 해를 주지 못한다, 해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사자굴 표범산이 쉬는 곳이다.
주님으로, 주님으로 더불어 가장 가깜게 하는 곳이요 주님만 의지하는 곳이요 주님 만 믿게 하는 것이요 주님 품 속에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주님의 보호를 강하 게 입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해하는 곳이 아니라. 요런 걸 자꾸 새겨 가지고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