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을 깨야 참 믿음


선지자선교회 1985년 10월 3일 목새

 

본문 :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기독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종교와 아주 근본부터 다릅니다. 크게 다른 것은  이종교는 자기가 무슨 도든지 그 도를 믿는 것이 이종교입니다. 자기가 불교든지  뭐 어떤 유교든지 뭐 마호메트교든지 뭐 이종교는 수가 말할 수 없는데, 또  종교와 비슷한 거 모든 미신들도 많이 있습니다. 미신 이 차차 비대해지면.

커지면 이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자기가 그 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피동 돼서 믿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싫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사람 많습니다. 그것은 믿기 싫은 그  주관을 둬 두고 하나님이 믿게 하시니까 자기는 안 믿을라고 애를 써도 결국은  믿어지게 되는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또 자기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같이  그렇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기 싫은데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  사람은 처음에는 믿기가 힙드나 끝에는 믿기가 더 좀 쉽고 또 처음에는 믿고  싶어서 믿은 사랑은 처음에는 믿기 쉽지만 나중에는 믿기가 힘듭니다. 왜 처음에  믿고 싶어 믿은 사람은 나중에 믿기 가 힘드는고 하니 믿고 싶은 그 사람이 자기  주관이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참 믿는 데에 나아갈 때는 하나 하나가  자기를 부인해야 믿는 데에 나아가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믿으면서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현실을 주어서 자기 욕심을 부인해야 될 때도 있고, 자기 주관을  부인해야 될 때도 있고, 자기의 비판과 평가를. 자기 지식을 부인해야 될 때도  있고, 자기의 자존심을 부인해야 될 때도 있고, 자기의 감정을 부인해야 될 때도  있고 전부 부인됨으로 되는 그것만 진짜 신앙에 접선된 것이지, 자기를 부인치  않고 뭐 열심히 믿는 그런 거 가지고는 믿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그가 참 에서와 같이 그렇게 씩씩한 남자가 되지를 못하고 암남자라, 또  칙칙한 남자라 그렇게 할 수 있을 만치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고  늘 그 밑에 돌면서 집 안에 뱅뱅 도는 그런 암남자 같은 그런 행위를 했습니다.

또 나중에는 아버지도 속이고 어머니도 속이는 그런 엄청난 일도 했습니다.

그라다가 형과 원수가 됐고 노경에 있는 아버지에게 크게 걱정을 끼쳤고 아주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그런 일 한 것이 뭐 때문에 그런 일을 했던가? 그는 땅 위에  아무것도 자기의 소망이 없고 순전히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소망을 가지고 또  그분의 축복만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축복이 아니면 뭐 암만 있어 봤자 그까짓  거 다 나중에 가서 절단난다는. 야곱은 특별히 영안이 밝았습니다. 영안이  밝아서 보는 눈이 좀 넓고 멀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이나 또 피조물의 것이나 그런  것들은 참, 똑똑히 그런 말로 표현은 못 했지만 '세상 모든 것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하는 그 사상을 그가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 안 놓치기  위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보고 있고 또 조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 그 축복이 계대된다는  것을 배워서 있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축복, 또 하나님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이 하시는 그 일에 조그만치라도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자기가 무식할까, 거기에 대해서 혹은 사이를 빠추어서, 어떤  토막이라도 한 토막을 빠춰 가지고 거기에 대해 가지고 손해볼까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떠나지를 못 했습니다. 거짓말도 했습니다. 또 번연히 그라면 그  형으로 더불어 원수가 돼 가지고 형이 죽일라고 할 줄도 알고, 또 형은 용사이고  쾌활하기 때문에, 또 영웅이기 때문에, 영웅, 영웅이기 때문에 뭐 그 손에 제가  절단날 줄도 알았습니다. 알면서 왜 그런 속이는 그런 일을 했는가? 일편 단심  소망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축복에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가 참 낯이 부신 일도 햇고. 제가 죽을 쑤면서 형이 배고프다 하면  얼른 드릴 일이지 그런 그 기회를 노려 가지고 그럴 때에 딱 그것을 계기로 삼아  가지고 '장자 직분 나한테 주면 내가 이 음식을 주지요' 그렇게 야비하게, 인간  같지 않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은. 그럴 때 물론 아마 그 야곱이 엄격하게 말하지  안했을 것이고 그 모든 전폭을 새겨 보면 그저 농담 비슷하게 하면서 슬그머니  하니까 또 에서는 그만 거기에 농담 삼아 여기고 그렇게 여길 만치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야곱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에  그만 거기에 전폭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사지를 못 쓰고.

예의도 예의도 차리지도 못하고 체면도 가지지 못하고 의면경우도 가지지 못하고  도덕도 가지지 못하고 그만 거기에는 어짤 줄을 모르는 그런 사람이 었던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어떤 사람은 보면 돈에 대해서 그런 사람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또 부부 애정에 대해서 그런 사람  있습니다. 뭐 다른 거는 다 그렇지만 자기 부부 애정에 대해서는 막 사지를 못  쓰고 이렇게 날뛰는 사람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존심이나 감정에 대해서.

감정에 걸리면, 감정에 걸리면 그 사람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르고 마구  날뛰는 사람 그런 사람 있다 말이오 그러면 감정이 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명예나 자기 위신. 자기 위신에 대해서, 다른 것은 뭐 손해가도 괜찮지만 자기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면 그만 그 사람 이성을 잃어 버린다 말이오. 이성을  잃어버릴 만치 야곱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의 소망에 견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은 야곱의 실수를 미워하지 안하시고 야곱의 실수를 하나님은  감동 받고 그에게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이 참 동정을 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물론 야곱이 믿음이 부족한 것은 부족입니다. 그거 뭐 자기가 그렇게 안 해도  벌써 날 때부터 하나님이 예정해 가지고 리브가에게 선언했는데 다른 것이  없지만 너무 수양없는 사람이요 어린 사람인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 참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거,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그 귀하게 여기는  것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그만 사람이 비정상이 되고 이성까지 감정까지 다  잊어 버리고 그렇게 날뛰는 사람이 될 만치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믿은 사람이요 하나님에게 대한 소망을  견고히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밧단 아람을 갈 때에 자기가 벧엘에서 그런 밤을 거기 지내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약속한 일도 자기는 그걸 늘 믿고 또 가 가지고 모든 산  업들도 잘되고 축복을 잘 받았습니다. 또 그가 하나님께서 '네 본토로 돌아가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돌아갈라고 나설 때에에서는 지금 자기를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 가기가 힘든다는 것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라.

염려하지 말고 가라' 말씀을 하셨고 또 안 된다니까 천군 천사들을, 군대를  보여줬어. 하늘 군대를 저에게 보여 줬습니다. '너와 지금 하늘 군대가 동행하고  있지 않느냐?' 하늘 군대 하나가 온 세상보다도 강한 것인데 군대가 같이 하는  것도 보여 줬습니다. 또 안심하고 가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이랬으나 얍복 강에  가 가지고 막상 지금 강 건너에는 에서가 군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죽일라고에서가 오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가라는 명령이라 가기는 가지만  아무래도 가면 자기의 처자나 자기나 다 죽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가지를 못하고  거기서 밤새껏 씨름했다 이렇게 했습니다.

 씨름을 했는데, 씨름하다가, 씨름한 그것은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으로 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야곱은 참 아주 격투적인 그런  투쟁적인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사람이 이 아주  기도도 했습니다. 그랬으나 그가 밤새껏 축복 받을라고, 거기에 축복은 무슨  축복이냐 하면 말로는 축복이라 한 말로 기록했지만 그에서에게 피해를 보지  안하고 에서에게 살해를 당하지 않는 그런 은혜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그것을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안심하고 가라.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네가 무사히 가고 그곳에서 나를 섬기도록 내가 해 줄 터이니까 안심하고  가라.' 자꾸 가라 하고 야곱은 '안 됩니다. 그가 지금 나를 죽일라고 준비해  가지고 오기 때문에 안 됩니다.' 가라.' '안 됩니다.' '가라.' '안 됩니다.'  밤새것 이 신강입니다. 그 싸움이라 하는 건 그 신강이오.

 이러니까,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못 이길 줄 알고. 거기에 있는. 같이  씨름하는 이를 하나님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죽지 안하고 산 것이 참 그거 다행이다' 야곱이 그 말을 한 것을  보아서 하나님으로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모든 성경 봐서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서로 싸웠습니다. 하나님하고 싸워서 힘을  겨루고, 하나님으로, 그 다음에 번역하기를 하나님으로 더불 어 힘을 겨뤄  가지고 야곱이 이겼다 이랬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힘을 겨뤄서 야곱이  이겼다, 이겼다는 이름을, 이겼다 하면서, 이겼다 하면 서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줬습니다.

 그래서 새 이름 준 데 대해서, 이겼다는 데 대해서 이것이 아무래도 성경을 좀  바로 보고 똑똑히 해석할라 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내가 그 이름은  말하지 않습니다. 유력한, 한국에서 제일 높은 신학 박사, 신학 박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번역하기를 그렇게 해석한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명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하는 명문이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뭐  달리는 변동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석을 '아이들하고 어른하고 둘이  씨름할 때에 어른들이 부러 이래 쿵 넘어가면서 아이들에게 네가 이겼다 말하는  것처럼 그런 말을 이용했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으로서의 어느  정도의 힘을 쓴다는 그것을 다 했기 때문에, 인간의 힘을 다 쓰니까 하나님이  인간 힘을 다 썼을 때에는 하나님이 거기에 져 준다, 하나님이 양보해 준다'  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해석한 것을 봤습니다.

 거기서 밤새껏 기도하는데 날은 새어가는데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켰습니다. 그 위골이 되고 난 그 다음에 그 야곱이 그가 말하 것을  보면 뭐라고 말했느냐?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참 죽임을 당하지 안한 것이,  죽지 안한 것이 이것이 큰 다행이다 하는 그런 것을 발표를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했다 말은 없는데 그 야곱이 말은 그렇게 했고 또  행동은 이제까지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복 주시지 안하면 안 갑니다. 안  갑니다.' 하던 그 야곱이 한 개 맞고 난 다음에는 그가 안심을 하고 얍복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그 얍복강에서 처음에 기도할 때와 다른 것아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으나 내가 죽지 안했다는 그 말을 자기 입으로써 증거를 했고 또 자기  행동이 과거에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지 안하면 내가 못 갑니다.

나는 죽습니다. 안 됩니다.' 이랬는데 한 대 맞고 난 다음에는 안심을 하고서  에서에게 뿍뿍 나아갔습니다. 행동이 달랐던 것입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둘이 변해졌지요? '변해지고 난 다음에 또 뭣이 변해졌느냐 하면 그에서가  야곱을 죽일라고 하지 안하고. 올 때까지는 그렇게 야곱을 살해하려고 왔는데  돌변돼 가지고서 야곱의 목을 안고 그렇게 입을 맞추고 '나와 너와 한 혈육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너를 어떻게 해할 수가 있겠느냐? 내가 너를 이제 앞으로는  도와서 네 안내자가 되고 네 밑에 너를 돕는 자가 되겠다' 이렇게까지 에서가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대적도 변해지고 모든 주위와 환경이 변해졌습니다.

브니엘 중 고등학교라고 하는 그 브니엘이라 하는 그 이름이 날이 샛다는 그런  뜻 인데 그때에 해가 돋았다 하는 것은 물론 날이 새 가니까 해가 돋겠다 이렇게  보지만 거기에 다 해석들을 모두 하는 것은 그것은 다 '해가 돋았다' 그러면  모든 세계가 그 사람에게는 광명한 세계가 돼졌다 하는 그런 것으로는 다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어떤 이름인가? 하나님하고 씨름하다가  하나님하고 서로 다투다가 하나님이 못 이길 줄 알고 못 이길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 큰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 징계 받고 난 다음에, 그가 징계 받기 전에  회개했으면 좋을 건데 징계 받고 난 다음에 야곱이 회개했다 하는 것으로서  거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 그가 회개했다는 말은  없어도 회개한 표가 있는 것은 뭐이냐 하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싸웠으면 다퉈서  하나님을 대항한 것이 반드시 죽임을 받을 일인데 죽임 받지 안하고 죽임 받지  안했다 하는 것을 자기가 깨달았고 그 하나님과 대항한 그 죽임 받을 만한  죄라는 것을 깨달았었기 때문에 하나님 대항하는 일을 회개한 것이 거기에  나타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뒤에 그가 또, 처음에는 '안 됩니다. 안됩니다.'  했는데 이제는 안심하고 얍복 강을 건너간 것을 봐서 그분이 처음에 씨름할 때의  사람과 정반대의 다른 사람, 하나님과 일치된 사람이 됐다 하나님이 가라 했는데  안 된다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가라 하는 대로 가는 사람이 됐다 그거요.

 그러기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하고 대결하다가, 하나님과 이렇게  다투다가. 하나님과 다투는 그것은 무슨 일이냐?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사형을  받을 일이다, 하나님과 다투는 건 전부 사망 받는 일이다, 하나님과 다투는 일은  사망 받는 일인데 하나님 앞에 사망 받지 안하고, 길이 참으심으로써 이제  살려두시고 죽음보다 가벼운 환도뼈 치는 그 징계를 가지고 하나님 대항하는  것을 쳐서 징계만 받고 죽지는 안했다, 하나님 대항하는 것은 그것은 망하고,  징계는 망하는 것이오. 죽는 것으로서 끝나 버리는 것이오. 하나님 대항하는  것은 망하고 죽는 일이다. 망하고 죽는 일인데, 하나님 대항하는 것은 망하고  죽는 일이니 하나님 대항은 전부 망 하고 죽는 거다. 사망하는 일이다, 사망하는  일인데 이 사망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대항하는 것은 :사망하는 일이라,  사망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 대항은 사망하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결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생명이다. 하나님에 대항하는 것은 사망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그것은  생명과 평강이다. 이것을 깨닫고 이 사상으로, 이 주의로, 이 정신으로. 이  법칙으로 사는 그것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데, 왜 이 말하는고 하니 야곱이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그 이상 있을  수 없을 만치 그렇게 강했고, 또 하나님에게 대한 복종도 아주 강했습니다. 뭐  자기가 참 타향에 가는 데가 얼마나 어려우며 거기 가 가지고 백난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성경에는 그거 기록돼 있지 안 하지만 거기 가 가지고  하나님이 축복도 했지만 그 생활은 전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생활을 해  나왔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에 대해서도 견고 하나님에게 대해 순종도 아주  철저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해 가지고 해결 지울 줄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으로  더불어 싸운 그 하나님의 대적 된 게 뭐 있던가? 그 대적된 그것이 환도뼈  위골되게 하는 그 징계 받고 난 다음에 야곱이 만일 그때까지 제가. 그라고 난  다음에도 '안 됩니다.' 했으면 하나님은 야곱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야곱이  만일 그때 끝까지 '안 됩니다.' '가라. 안심하고 가라.' '안 됩니다.' 이렇게  끝까지 대결해서 싸웠다면 씨름했다 하는데 씨름했다면 환도뼈 치다가 회개치  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이 모든 면이 다 좋지만 하나님으로 더불어 싸운 그게 뭐인가?  싸운 그것이 뭐인가? 싸운 그것이 있을 때까지는 야곱이 하나님을 섬겨도 전부  자기 주관대로 섬겼지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지는 안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욕심으로 섬겼어.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자기 욕심 또 장자 축복도 자기 욕심,  전부 자기 주관 행위로 이종교가들이 이종교를 믿는 거와같은 그런 데에서 믿기  때문에 그사람이, 이제는 얍복강을 건너서는 그가 올바른 신앙생활로 참 열매를  맺어야 될 터인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줬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때 하나님으로 더불어 싸웠던 것은 뭐인가 하면 자기 주관입니다.

자기 주관하고 하나님하고 다퉜습니다. 자기 주관이 자기 주관이 꺾어지지  안하고 자기 주관이 없어지지 안하고 자기 주관이 들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은 잘했습니다. 자기 주관이 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은 잘했지만 자기  부인되는 순종은 하지 못해 가지고 얍복 강에서 이라다가 환도뼈 위골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는 그때 그 분이 회개했습니다. 회개하고 그라고  난 다음부터는 야곱의 그 생애에 보면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자기 주관 행위라  하는 것은 전연히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그  찬송가에, 일어난 그 후 부터는 그가, 잠 깼다 말은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잠  깬 그거 내나 잠 깬 게 아니라 그 신앙의 잠을 깨서 완전히 깬 사람으로 살고 난  다음에는 야곱에게 흠점이 없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이 말 하는 것은 뭐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도 좋고 소망도 좋고.

기도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심방도 잘하고 모두 잘하나 하나님께서 자기  주관을 부인케 하고 하나님을,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그  단계가 있는데 그 단계가 빨리 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늦게 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 동안 예수 믿어도 요와 같이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으로써 자기의 전부를 삼는 이 회개 이것이 종말 회개요 이것이 완전  회개인데 이 완전 회개를 평생 못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다 기본구원만 있지 건설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로 어려움 당한 그 어려움 당한 그런 것은 다 그것이  종말 회개인데,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몸이나 자기의 생명이나 다 내 놓지  안하면 안 되는 그거 종말 회개, 자기 완전히 부인하는 것인데. 생의  애착욕이라든지 또 뭐 물욕이라든지, 물욕이나 이런 거 다 정욕 이런 거는 다  그까짓 거는 다 이기기 쉽지만 생의 애착욕을 이기는 것은 생의 애착욕을 없애는  것이 최종. 최종의 것입니다. 그러면. 최종의 자기 주관을, 최종으로 자기  주관을 완전히 꺾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사 참배 때에 자기 주관을 꺾은 사람들은 최종 시험을 이겼습니다. 이겨서  신사 참배를 이겼습니다. 이겼으면, 이겼으면 그 다음에는 이겼으니까 됐는가?  이겼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기 때문에 또 재시가 옵니다.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최종 시험인 그 결말 회개, 결말 회개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다니엘이나 그런 사람들이 결말 회개를 한 사람들이지만  그때 죽었으면 결말 회개를 하고 죽어서 완전이 돼 버리고 말았는데 죽지 안했기  때문에 또 결말 회개가 아직까지 또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결말  회개가 되지를 못 했고, 죽었으면 결말 회개가 된 터인데 죽지 안했기 때문에  결말 회개가 남아 있으니까, 그 다음에 남아 있을 때에도 그 결말 회개로  계속되고 다시 자기가 자기의 뭐 생의 애착욕이나 뭣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 어야만 되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이 살아 있는  그것이 완전 승리는 아니고 일시 승리로. 일시 승리라 그 승리는 앞으로 또  시험을 받아야 한다 하는 미결적인 승리라 하는 것을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내가 그 말씀 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래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깨닫는  그 깨달음, 그것을 가리켜 교리라 합니다. 자기가 깨닫는 깨달음을 가리켜서  교리라 하는 것인데 자기가 깨닫는 교리 또 자기가 믿는 줄기. 그걸 가리켜서  신조라 이랍니다. 그러면, 자기의 교리나 신조가 확정이 돼야 됩니다. 교리나  신조가 확정이 돼서 이거냐 저거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기 아는 대로의,  성경을 다 아는 사람이 많지를 못하지만 성경을 자기가 아는 대로 읽는 대로 '이  성구는 이렇다, 저렇다' 확정을 확정을 지워서 자기가 교리를 세워 가지고 가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해석하고 이러니까  '아 이래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래  믿는다' 그거 죽은 자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온 천하에 있는 학자들의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다 안다 할지라도, '아, 이 위인은, 이 신학자는 이런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다. 저 신학자는 저런 신조와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걸  다 안다 할지라도 '너는 어떠냐? 어떤 신조와 교리를 가졌느냐' 하는 이것이  없으면 그것은 책보따리요, 좀 더 크면 도서실이요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은  뭐이냐 하면 여기서 천 인 만인이 이래 해도 나는 요거다 해서, '요거다' 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는 구별이고 구별해 가지고, 거룩이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 거기서 구별해 가지고 마지막에 하나라 하는 그것을 딱 잡았을 때 그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온전함을 잡는 과정과  온전과를 합해서 말할 때에 거룩이라고 말하고,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찾는  과정은 말하지 안하고 결과적인 결말적인 그 하나인 그것을 말할 때에 진실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뭣이든지 믿는 이 도리, 한 성구, 성경 말씀은 전체가 다  체계적이요 하나입니다. 한 구슬 한 가지입니다. 이 성구도 찾아 들어 가면 결국  하나를 만납니다. 나중에 가다 보면 어느 성구든지 그 하나님의 많은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의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말씀이 있으나 이 말씀은 다  단일성입니다. 단일성. 이 모든 말씀이 있으나 이 말씀은 한 말씀이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도 찾아 들어가 보면 내나 거기에고 저  말씀도 저게고, 겉으머리 나타낼 때만 여 러 수천 수만으로 나타냈지 속에 외나  근원은 하나라 그 말이오. 자꾸 들어가면 하나더라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자기가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거기서  '요거는 이것이라' 확정을 지운 게 있어야. 자기 깨달음이 확정이 돼서 하나  단일로, 깨달음이 하나로 단일로 확정이 돼야 그 사람 행동이 단일 행동이  돼지지 자기 깨달음이 둘이 되면 그 사람 행동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접촉해서 말을 들어 보면 이 사람은 앞으로  시기와 자기 환경을 따라서 이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진 사람은 아, 이 사람은 교리와  신조로서는 앞으로 어떤 환경에서라 도 변동 안 하고 요동치 안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이 또 도와 주시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는  변동되지 안할 사람이다. 이 사람은 교리적으로 벌써 이 사람은 질팡갈팡 팔방  미인으로 공중에 나는 새 떼와같이 이렇게. 정처 없이 이렇게 할 사람이지, 아무  정처의 자기 교리와 신조가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여러분들 신앙이 그렇다 그 말이오. 이거 교리를 세우기 위해서 확정을  짓기 위해서 말을 하니까 말하면 '아이구. 여러 번 말하니까 듣기 싫다' 저는  지금 이것도 저것도 확정을 지워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좋을 때는 이렇고 또  나쁠 때는 이렇고. 어려울 때는 이렇고, 돈을 대할 때는 이렇고. 권리 대할 때는  이렇고, 명예 대할 때는 이렇고. 행락 대할 때는 이렇고. 취미 대할 때는 이렇고  막 이렇게 팔방 미인으로 변해질 이거, 확 정된, 자기를 붙들고 갈 만한 이  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잡을라고 애를 써서 이라면 잡지 안하고  자꾸 마음이 강퍅하니까, 자꾸 허영에 떠서 번들번들한 세삳만 보다 보니까,  일주일 내내 그저 제가 기도 한다 해도 식사 기도나 하지 뭐 별, 기도한다 해도  또 자기 욕심이나 피우 그 야곱이 얍복 강 가에서 하나님하고 다툰 거와 같은  그런 기도나 하고 말았지 이라면서 일 주일 동안에 예배 보러와 가지고. 쩍해야  오전에 한 시간 설교 오후에 한 시간 설교인데 한 시간 설교를 들으면서  지루하다 그 주리를 트는 그 인간이, 테레비나 무슨 극장이나 가 놓으면 두 시간  세 시간 가도 가는 줄도 모르게 졸음도 안 오는. 그러니까 제가 땅에 속했나  하늘에 속했나, 죽었느냐 살았느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래도 그걸  얘기라고 말이지. '아.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지루해서.' 그게 죽었다는 송장  냄새요. 그게 죽었다는, 죽었다는 증거요. 그게 죽었다 하는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때에 '이게 죽었으니까 아무래도 살려야 되겠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안하면 여러분들은 단일  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일관된 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도 많이 했지만 지금도 내가 물으면 여기서 대답을 다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거 다 알면 뭐 몇 마디 안 되는데 그걸 와, 믿어야 될 터인데,   그러면,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은 이것은 몇 껍데기 있습니다. 처음에 이 세상  술어적으로, 술어적으로 문장적으로 깨닫는 거. 문장적으로 깨닫는 것은 그것은  안 믿는 학자들이 믿는 목사보다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문장적으로 깨닫는  거. 문장적으로 문법적으로 이래 깨닫는 거. 그런데. 그 깨달음 속에 믿음으로  깨닫는 게 있습니다. 믿음으로 깨 닫는 게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이렇다고 백  번 주장해도 속으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 있습니다. 믿어지는 믿음으로 깨닫는 게  있다 말이오, 믿음으로. 믿어지는 거 있고. 아무리 입으로는 뭐 주장을 백 번  강하게 뭐 강단을 뚜드리면서 이렇다고 주장을 해도 속에는 믿지 안하고. 속으로  자기 가 알다시피, 자기가 알다시피 안 믿으면서도 사람에게 연극적으로 그와  같이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 교회 목사들  내가 목사노릇 그까짓 거야 수치스러워서 안하지 지금이라도 목사노릇 하면  설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하겠다'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거 뭐이냐  하면 자기는 믿어지지 안하나 믿어지는 양으로 말할 수 있고, 믿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믿으라고 말할 수 있고 얼마든지 말 할 수 있다 그라면서도 자기  속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게 있다 말이오. 알아 듣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거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래 그냥 이세상 그 문리적으로 아는 그 껍데기 속에 자기가  신앙으로 아는 속에 알맹이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으로 아는 그 알맹이  지식 속에 권능으로 아는 거 있습니다. 그러연, 그대로 실행 하고 권능으로 아는  지식이 있다 말이오. 있는데, 앎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말입니다. 내 말에 거한다 말은 주님 말씀 대로 산다 말이오. 내 말대로 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고, 그러면 그 자체가  변화가 되고. 그라고 난 다음에, 변화되기 전에는 모르는데 변화가 되고 난  다음에 '진리를 알지니' 무슨 진리를 알아? 내나 이미 행한 진리 안다 그  말이오, 내나. '내 말에 거하면' 그 말 안에 거하면 그 말은 그 말을 안다 그  말이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 말은 이제 그 진리에  대한 권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실행하는 권능.

 이러니까.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는 제일 아는, 연구해서 바로 깨닫는 방식이  뭐이라고, 세례 문답에 뭐라고 기록돼 있었습니까? 예? 아는 거? 성경을 바로  연구하는 법은 자기가 아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 성경 연구하는 가장 건전한 곧은  방법이라 하는 것을 학습 문답에도 기록돼 있고 세례 문답에도 기록돼 있는데 뭐  ○○선생읍 뭐 그런 소리 하고 있어? 엉뚱이 같은 소리 하고 있어 그래.

그겁니다. 그걸 안 하기 때문에, 그걸 안 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도리를 단일  진리로, 단일 진리로, 단일 교리와 자기 단일 신조로 이렇게 믿지 안하기 때문에  이 생활은 이렇게 그렁후렁하고 있으니까 뭐 마귀란 놈이 오면 마귀에게  끌려가고. 돈이 오면 돈에 끌려가고 공산주의가 오면 공산주의에게 끌려가고  주위 환경을 따라서 얼마든지 끌려갈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활이 다 그렇다 그거요,   이러니까 모두가 다 사람끼리 우굴우글거리지, 나 요새 며칠, 며칠 동 안 좀  그랬는데 내가 몸살이 납니다. 왜, 뭐이냐? 사람 만나 가지고 사람들하고 이래  해서 사람 비위 맞춰 가지고 이래 할라 하니까 하나님 비위 맞추고 둘은 못  하겠어, 무능하니까. 이러니까. 사람 비위 맞춰서 사람에게 대해서 이 모든 거  다 물샐틈 없이 할라 하면 하나님께 대해서는 이거 다 등한히 될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러면, 사람에게 대해서 물 샐틈 없이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올바로 하는 사람 있느냐? 역사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  위대인들로서는. 위인 쳐놓고는 그런 생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선지 사도들이 다 분주 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분주했지 뭐 인간 비위  맞춰서 인간으로 더불어 분주한 일이 없었다 그거요.

 이랬는데. 여러분들이 진리를 바로 깨닫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바로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깨닫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바로 깨닫느냐?자기가  말씀을 듣고 실행을 하려고 해 보면 다릅니다. 이런 어떤 과학자들이,  과학자들이 논리 연구를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치로 논리적으로 연구를 해  가지고 그걸 책에다 기록합니다. 논리 연구를 하고 난 다음에 그걸로 다 됐다  하면 그 사람은 헛일이오. 논리 연구 하고 난 다음에 실험 연구를 합니다.

실지로 해 봐요. 물질 가지고 이렇게 해 보면 꼭 이 치는 고라면 될 거 같은데  실지로 실험을 해 보니까 안 된다 그거요. 그러면 실험을 해 보고 또 고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논리가 없으면 말하자면 꿈이 없고 또 실험이 없으면  진실이 없어. 실상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논리에서는 자꾸 이런 것을, 이런거  저런 것을 희망을 가지고, 논리로써는 희망을 가지고 실험에서는 실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논리가 없이 실험만 하는 사람은 전진이 없고 또  논리만 있고 실험이 없는 사람은 진실이 없게 되기 때문에 다 실패입니다.

 이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공부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이거냐 저거냐  하나씩 확정을 지워갑니다. 이 성경에 말이오, 성경에 하나씩 확정을 지워가면  차차 처음에는 이 성경 가운데 한 교리, 한 깨달음과 한 신조를 확정을 지웠지만  그 다음엔 둘 지우고. 셋 지우고, 넷 지우고 자꾸 이렇게 지워서 가는 사람은.

지워서 가는 사람은 뭐로 지워가느냐? 듣고, 사람이 암만 가르칠라고 해도 그  속에 비밀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 말이오. 인간의 말이라 하는 것은 이거 몇 가지  안 됩니다. 인간의 방언이라 하는 것은 아는 걸 다 표시를 못 한다 그 말이오.

못 하는데. 인간이 표시할 수 있는 말로만 표시해 놓으면, 이 성경은 인간의  말로 표시 할 수 있는 것만 표시했지 표시할 수 없는 거는 표시 못 해 놨습니다.

인간의 말로 표시할 것을 포시해 놓은 이 속에는 어찌 되느냐? 그 속에 인간의  말로 표시 할 수 없는 것을 영감이, 성신의 감동이 계시해서, 영감 계시를  가리켜서 은밀 계시라 하니까 이 은밀 계시가 또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그거요.

 그러면, 영감이 가르치는 그것이 인간 말로 표시 못 할 것을 그것을 자기가  아는 데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면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하면 실행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깨달아지는 게 있다 말이오. 실행 가운데에서 깨달아지는  게 있어. 실행 가운데 깨달아지는 그것을, 그러니까. 자기는 깨 달았지만 벙어리  꿀 먹은 거라. 꿀 먹은 벙어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라고, 꿀  먹은 벙어리가 꿀을 먹어 보니까 달기는 달지만 달다는 말을 표시를 못 하는  것이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실행을 해 보니까. 실행을  해 보니까 '과연 과연' 실행 해 보니까 자기가 깨달아지고 확실히 느껴지는 그게  있기는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발표를 할라 해야 발표가 잘 안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문서 계시로 된 걸 문장적으로 이렇게 아는 거 그 이면에 내가  믿음으로 알아지는 것이 있으니 믿음으로 알아지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기울일 때에 실행하기 전에도 믿음으로 알아집니다. 믿음으로  알아지고. 믿음으로 알아지고 난 다음에. 그게 온전이 된 게 아니라. 믿음으로  알아지고 난다음에 그 다음에는 능력으로 알아야 되는데 능력으로 아는 것은  자기가 실행을 하니까. 실행을 하니까 거기에 대한 실행하는 데까지의 이치를  알았다 말이오. 실행하는 데까지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이 이치 속에 알맹이.

알맹이 속에 알맹이를 알았다 말이오  알고 난 다음에 그러면, 실행을 하는데, 실행을 하는데. 실행을 했는 데도,  실행을 했는데도 그 일이 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오. 실행을 했는 데도  이루어지지 안해. 자기가 실행을 했으면 이루어져야 뒬 터인데 실행해도  이루어지지 안해. 이루어지지 안하니까 또 재삼 재삼 자꾸 이 일을 실행을 해서  이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자기에게 미진한 것이 있더라 말이오. 미진한 게  있어서 그때 미진한 그것이 바로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과 자기와 마주쳐서 딱  들어맞는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자기가 실행하는 그 실행에서 영감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행하는 거기에서 자기의 잘못된 거, 처음에  실행하다가 또 틀렸고 또 틀렸고. 자꾸 이래 실행을 하다 또 실패하고 실패하고  자꾸 이런데, 마지막에 그 실행이 자 유하게 된다 말이오. 그 말씀대로 자기는  아무리 죽음이 와도 꼼짝 안하고 그거는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실력 있는  그 실행의 능력을 받게 되었으니 그게 뭐이냐 하면 그때 성신의 감동이 인쳐  주는 거라 그 말이오.

 그러기에, 요한계시 7장에 '하나님의 종의 이마에 인치기를 기다려라'  인치기를, 이마에 인치기를, 이마에 인친다 하는 거는 뭐입니까?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정신 그 사람의 지식, 그 사람의 비판 평가 거기서 확정됐다  말이오. 그러니까, 확정이 됐으니까, 자기 주관 확정이 됐으니까, 자기 주관  확정이 됐으니 자기 주관의 능력으로 하느냐? 자기 주관 확정이 됐기 때문에  자기 있는 힘은 다 들여서 하게 되고 다 들여 가지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와  가지고 인계해 가지고 다 해 주신다 그 말이오  우리가 불에 타면 타 죽는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자, 불에 들어가서 타 죽게 되면 타 죽을 때 가 되면 그  사람이 힘을 남겨 놓고 타 죽겠소 있는 힘을 다 기울이겠소? 예? 어떻겠소? 있는  힘을 다 기울이겠소 힘을 좀 남겨 놓겠소? 있는 힘을 다 기울이게 된다 말이오.

다 기울여.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자기가 거기서 구출될라고 불에서 벗어  나올라고 애를 쓰는, 애를 쓰는 거 와같이 애를 쓰기를 그러면, 불에서 타 죽을  판이니까 안 타 죽을라고 애를 쓰는 거와같은 그런 애씀의 절정에 도달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인계해 주는 것이라 그 말이오. 인계해 주는 것인데.

사람은 거기에 나아가지 안하기 때문에 안 돼.

 그러면, 사람이 처음에 그렇게 나갈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실행을 한다  말이오. 처음에 실행하다 보니까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자꾸. 실행을 연습을  자꾸 하는 사람은 시간이 멀지 않게 그것에, 참에 도달하고 또 그 다른 교리를  또 참에 도달하고 이래 나가지만 자기가 실 처해 보지 안하기를, 한 달에 실천  한 번씩 하는 사람은 만일 백 번 실천 해야 그 가운데서 또 좀 나아지고 좀  나아지고, 연습하는 가운데서 조금 조금씩 나아져 가지고 하는데, 백 번 연습을  해야 만점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문제라고 하면 그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  그걸 실행을 한다면 몇 해 걸림니까? 예? 일 년에 한 번씩 실행한다면 그  사람은. 한번 일 년에 하 번 하니까 실패했고 또 이 년에 또 두 번 하니까  실패했고. 그러면 백 번 연습을 해서 구십 아홉 번 실패하고 백 번째 성공할 수  있는 그런 어려운 교리라고 하면 그 사람이 그런 교리는 일 년에 한 번씩  연습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몇 년 걸립니까? 백 년 걸립니다. 백 년 걸리요.

 백년 걸리는 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매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어느  현실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현실이든지 다 할수 있는 그 계명 이 반  이상이 됩니다. 이러니까 자 그 사람이 '오늘도 내가 말에 흠없이 살겠다' 이걸  실행 하려고 연습 해. 흠 없이 살라고 했는 데 고만 그 날 또 실패했어. 하루 한  번씩 말에 흠없이 살라고서 애를 써서 말에 흠 없이 살라고 그 일을 시작해서 해  보면은 그 사람이 또 실패하고 실패했는데 아흔 아홉 번 실패하고 백 번  만이라야 성공할 수 있는 그런 어려운 문제라고 하면은 그 사람이 하루 한 번 씩  실행하면은 얼마 걸리면 되겠습니까? 얼마 걸리면 완성에 도달하겠습니까? 석 달  열 흘이면 되지요 석 달 열흘이면 안 됩니까? 석 달 열흘이면 되지 안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 스물 네 시간 뿐 아니라 이 시간에도 또 연습하고  실패하니까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한 시간에 육십 분 한 시강이 육십 분인데  실은 육 십 번도 더 걸린다 말이오. 자꾸 자기가 흠없이 하려고 또 하고 하고  아라니까 한 시간에도 몇십 번 될 때가 있다 말이오. 몇십 번 될 때가있으며 그  사람은 얼마 걸리면 온전함에 나아가겠습니까? 만일 하루, 잘 때는 말고 한 열  번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열흘이면 다 도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안해요?  열흘이면 백 번에 도달할 수 있지 안해요? 안 그렇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연습이 중요합니다. 경건을 연습 해라  경건을 해라, 연습이 중요한데 아예 듣고 버리는 그 자가 무슨 구원을  이루겠습니까? 기본 구원뿐이지 건설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고  또 금방 실수하니까 또 하고 또 하고 이래 가지고. 그러니까 자꾸 이러니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괴수 죄인이라, 또 나는 만삭되지 않아 낳은  아이 같다. 이렇츰 연약한 자가 어디 있으며 이렇게 뭐 변동되는 자가 어디  있느냐?' 이러니까 뭐 머리를 들 수가 없고 남에게 뭐 큰 소리 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믿으라' 이래 쌓지만 실은 자기가 돌아볼 때는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증거할 때는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이와같이 증거하는 것이지 나로 말하면 이렇게 내가 변하는 자가 아닙니까?  내가 이 렇게 고칠라고 해도 안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탄식하는 그 탄식 끝에,  그렇게 애를 쓰다가, 애를 쓰는 그 자를, 자기가 고칠라고 애를 쓰는 그 자를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애쓰지 않는 자를 도와 주지 안하고 또 자기의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다 기울인 자에게 도와 주십니다. 꼭 불 가운데 구원하는 거와 꼭  같소.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교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데 무슨, 지금 양성원 학생들이 여기 많이 와 있는데 양성원 학생도  가르치면, 여러분들이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으면 '아, 이 강사가 가르치는  거는 이 면이 좀 틀린다. 조 면이 좀 틀린다' 이래 가지고 그게 틀린다 맞다  이걸 거기에 구별해야 되지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아무나따나 머리만 가지고  있고, '아, 이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 신학자는 저렇게 말했다'  그것만 외워 가지고 있으면 그게 신학자 되면 그 거는 책보따리지 생명은 없는  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김 현봉 목사님이 어떤 대신학자의 책을, 하도 그래 쌓아니까  '가져오'라' '그라면 가져오라' 하더니 당신이 '좀 읽어라' 떠억 읽고 난 다음에  나중에 말하기를 '이 신학자는 생명이 없다. 이 신학자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팔방 미인으로 환경에 따라서 움직여질 사람이요 환경을 이기지는  못한다. 생명이 없다. 이거 죽은 글이다 죽은 신학이다.' 그래 그걸 가까운  사람이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저랬지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는 거, 자기, 아무런 자기 교리와 신조가 없다. 자기 교리와  신조가 없으니까 자기 생활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모든 사람의  생활이 자기 생활이지.'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구별해야 된다 그 말이오. 신학생도 그래 가지고,  내가, ○○○선생이라고 지금 카브난트 신학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편지가  왔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소망을 가졌습니다. 기뻐 소망을 가지고 거기서,  '삼위일체 교리와 또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의식에 마찰의 관계와 이것이  지금 다 그런데 이것이 난제라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배운 거와는 다릅니다.

다릅니다.' 그라면서, 이 난제점을 가지고 이렇게 하면서 말했어요. 그라면서  '요리 문답 제 육답에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진리, 예수님과 진리와 또 영감이  뚜렷이 개별적으로 이와 같이 있는데 그 개체가 어찌 되느냐, 그 조화성이 어찌  되느냐 하는 요거 참고가 될까 싶어서 말합니다.' 거기 가서 쪼끔 그러니까  얼떨떨한 모양이라. 얼떨떨한 모양이라. 지금 그것을 말을 했어요. 그 희망이  있습니다. 그걸 알면. 그래 알라고 하면,   여러분들 지금 말하는 것이 성경을 말한 것도 말이오, 요거 여러분들 지금 지금  양성원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말합니다. 성경은 범위가 이 범위 내에서 성경을  말한 성구가 있고, 이 범위를 포함한 이 넓은 범위에서 말한 성구가 있고. 더  넓은 범위 더 넓은 범위 마지막에는 이제 영원 단일 하신 자존하신, 유일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거기에까지 범위를 비춰 가는 게 있고 거기서  나와 가지고 지금 있는 거, 삼위일체라 하는 데 대해서 해석이 다릅니다.

다른데, 그게 뭐이냐 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 범위 밖에 있고 범위 너머를 가지를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 모든 범죄한 거, 죄라 하는 것도 하나님이 내놨다 하는  것을 말하지 못 하게 합니다. 제가 ○○신학교 졸업할 때에 논문 쓰기를 '죄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담 해와의 타락이 그게 범죄하게 한 천사의 타락이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천사의 타락이 있다. 천사 타락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이러니까, 그걸 제가 논문을 발표를 해서 절 좀 읽어보라 해서 제  논문을 쪼금 읽으니까 그만 ○○○목사님이 그만. 그만 뻘뻘 떨며 좇아오더만  아이구 이거 왜 이라느냐고 이라면서, 큰 일 났다고 이라면서 그것을 못 읽구로  해서 나는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좀 더 읽어 보겠습니다.' 아, 안 된다고 읽지  말라고 이래서 읽다가 못 읽었습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죄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죄도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다' 하는 그것을 말했기 때문에 지금  큰일난다고 한 것입니다. 큰일난 게 아니라 몰라 그렇지 그 범위를 넘어가서  보면 하나님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죄가 없느냐? 하나님은 죄가  없는 것은 그분은 그 위치가 탁월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게 하나님이 낸 내나 법칙인데 하나님이 낸 법칙이 지위에 따라서  다르다 그 말이오.

 예를 들면은. 여러분들. 사람이 지금 가을이니까 산에 갔습니나. 산에 가서  보니까 거기에 꽃이 있습니다. 꽃이 있습니다. 꽃이 있으니까 그걸 딱  꺾어다가서, 어제 내가 산에 기도실에 저 아래 갔었는데 누가 어떤 교인이  오더니만, 거기 기도하러 와 가지고, 교인이 오더니만 꽃을 하나 딱 꺾어다가서  내 천막 앞에다 딱 꽂아 줍니다. 꽂아 주는데 꽂아 주는 걸 나도 있다가서,  암말도 내가 말은 안 했어. 말은 안 하고 내가 그저 뭐 본척만척 이랬지만  속으로는 '아, 고맙다' 이래 생각 했고. '아 보기 좋다' 이렇게 생각했고. 또  속으로 생각할 때 '꽃을 모가지를 딱 끊어서 잔등이를 끊었으니까 죽이는 거  아니냐? 죄가 안 되겠느냐?'  만일 우리가, 꽃은 여기 있는 걸 꺾어다가서 병에 꽂아 두면, 꽂은 것과, 꽂은  것과 또 지금 산, 산 비둘기를 잡아 가지고, 죽여 가지고 비둘기를 잡아 가지고  산 채로 이래 가지고 내 앞에 책상 위에 비둘기를 잡아서. 산 비둘기를 잡아서  죽여 가지고 갖다 놓은 것과 또 소를 내 앞에서 잡아서 지금 산 소를 이와 같이,  뭐 먹을라고 잡는 거야 좋지만 산 소를 이제 취미적으로 재미로 말이지, 기분  좋기 위해서, 로마의 원형 극장 모양으로 산 소를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잡는 거  그리 아니면 또 요새는 싱싱한 걸 좋아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라면 소를 이래,  산 소를 매 놓고 가죽을 이래 벗겨 가지고 산 소를 돈 가져 가면 하나 떡 떼서  이래 고기를 삐져 파는 거와 또 산 사람을  거랑이라 하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의 아내는 아무 걸로도 기뻐하지 안 해요.

미인인데, 왕이 그 아내의 웃는 꼴을 볼라고 해도 도무지 웃지 안 해. 웃기만  웃으면 뭐 그만 환장을 할 만치 좋은데 웃들 안해요. 웃들 안 하니까, 그는  사람을 죽이면. 사람을 죽이면 사람 죽이는 거 보고는 사람만 죽이면 따그르르르  웃어요. 이러니까 왕이 그 아내 웃는 거 보기 좋아서 자꾸 사람을 죽였다 그  말이오. 여간 인제 다른 사람 죽이도 못 하는 데 한번은 식전 아침에 오줌  장군을 지고. 시골에 인제 오줌 장군을 지고 냇물을 건너가니까 이 여자가  앉았다가서 이 겨울에 추운데 맨발로 저래 발 벗고 물을 건너가는 거 보니까 저  속에 뭐이 들었는고 한번 보고 싶다 말이오. 좀 거기 대해서 한번. 그 속에 뭐이  들었는가 보고 싶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저 사람이 지금 저 짐을 지고 물 위로  걸어가는데 지금 얼음 속에 물 위로 걸어가는데 저 속에 뭐이 들었을까요?'  의문을 가진다 말이오. 그라니까 그 왕이란 놈이 떡 소리해 가지고 그 사람 좀  다리 한번 쪼개 봤으면 좋겠다 하니까 그 사람을, 그 농부를 잡아다가서 거석해  가지고 다리를 쪼개 봤다 말이오. 다리를 쪼개니까 따르르르 웃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무슨 말하다가 이래 나왔지?  옳지, 꽃 얘기하다 그랬지 그러면 자, 이제 그 꽃을 꺾은 거, 꽃을 생명을 똑  잡아 떼. 꽃을 꺾은. 또 거기서 새를 자기 취미로써 죽인 거. 또 소를 죽인 거,  또 사람을 죽인 거 자, 사람 중에도 또 인제 왕자를 죽인 거 그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소속시킨 것은  우리가 먹을 수도 있고 불에 삶아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와 지위가 차차차차 가까워져 갈수록 이제  내가 거기에 대해서 침해를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위가 가까울수록.

 이러니까, 자, 우리가 산에 꽃이 있으니까 그 꽃을 아름다워서 꽃을 집에 갖다  꽂을라고 꺾는 그 꽃과. 그 차이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과 그  차이가, 우리와 꽃과 같은 그 차이와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 인간과의 차이가  어찌 됩니까? 어느 거리가, 어느 거리가 더 멉니까? 저 학생, 어느 거리가 머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멉니까 우리와 그 화초와 사이가 거리가 멉니까?  탁월하기를, 층어리 있기를 우리와 화초와 층어리는 이렇게 높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높이와 어 느 높이가 더 크겠는가 말이오. 예? 모르면 할 수  없어. 어두우면.

 그러기에 화초는 꺾으면 정죄가 안 되는데, 정죄가 안 되는데, 만일 새를  그랬다 할지라도 정죄는 안 됩니다. '에, 그 사람 퍽 잔인하다' 이럴 것입니다.

이럴 것입니다. 그러나 소를 한 마리 그래 했으면 잔인하다고만 말할 게 아니라  '그거 도무지 너무 이거. 이거 사회성에. 사회성에 틀렸다. 도덕성에 그 안  됐다. 모든 다른 사람에게 좋지 못한 관념을 줘서 안 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가지고, 그 사람에게 그것을 금지시킬 일이지, 금지 시킬 일이지 거기 대해서  정죄는 하지를 못합니다. '잔인하다 나쁘다.' 사회에서 그 모든 풍경상 그걸  금지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람 을 그래 했으면 정죄하게 됩니다. 죄가  커집니다. 사람은 또 보통 평민보다도 나보다 높은 만일 왕의 아들을, 왕을  그랬다고 하면 더 죄가 커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근본은 하나님이 내신 그 법칙을 근거해 가지고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죽이라 할 때는 안  죽이는 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이  목적 하기 위해서 불집게는 불에 없어지도록 만들었고 또 어떤 보석은 자기 품  안에, 안 품에 안고 다니고. 이것은 자기의 유물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 가락지 여기에 끼는 것도 있고 불집게는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인간이. 천사의 타락이나 인간의  범죄라 하는 이것이 당신의 그 크신 이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이래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 선이요 사랑이요, 그 동기와 목적이 다 선이요 사랑이요  당신은 거기 탁웠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에게 죄가 되지 일는 것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기에다 그런 그런, 하나님을 그렇게 그걸, '죄도 하나님이 창조했다  하는 것은 틀렸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그 지위의 계급을 똑똑히  모르는 그 무식한 가운데서 나온 소행인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 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우리가 자꾸 마음을 넓히고. 실행하면 자꾸 넓어집니다. 실행하면 넓어집니다.

실행하면 자꾸 넓어져서 실행에서 영감 받으면, 영감 받으면 영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같이 넓어집니다. 그러기에 얼마 전에도 신구약 성경  말씀 가운데는 한 말씀도 행하지 못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 행하라고 한  말씀입니다. 다 행하라고. 그 행하는 데 대해서 율법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다  하는 그것을 몇 번이나 그걸 자꾸 말한 것은 뭐이냐 하면 다른 이단에 가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모로 저 모로 자꾸 여러 각도로 이렇게  말해서 했지만 그 다음에도 빠진 것이 한없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리에 굳게 서지 안하면 뭣이 와 가지고 삼킬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내가 떠나고 난 다음에는 너희들을 삼킬 이리 떼가 와 가지고 삼킬 터인데  너화들 가운 데에 열심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 그 말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진리를 콩 팥을 가려서 확정 지우기를 벌써 성경의 반 수  이상을 확정 지운 사람은 세상이 미혹을 못 합니다. 미혹을 하지를 못 합니다.

어떤것이 와도, 뭐 어떤 뭐 대대박사 어떤 신학자가 와도 '그 말 하는 것이  틀렸다' 그거 대번 지적해서 정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배워도 바로 알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거요. 아무리 이렇게 진리도  이래 논리하다가서, 논리하다가 자기가 이런데 저보다, 저보다 옳은 것이 위에  있으면 자기는 거기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최고의 지식은 영감이데 우리가 영감과 하나 되어 가지고 영감과  동행하는 이것이 아니면 세상에게 패전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거 자꾸, 똑똑히 바로 알고 올바른 하나의 교리, 단일 교리와  신조를 이렇게 가지는 것이 이것이 중요하지 그 단일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은 단일 행위를 할 수가 없다, 일관적인 행위를 할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을 지금 자꾸 말하기 위해 이러니까 이것도 공연히, 하번 알고 있으면  말할 필요가 없는 거라. 여러분들이 이걸 가르쳐도 중요하게 안 여기기 때문에  자꾸 이래 말해. 이거 전부 서론 하다가. 서론 하다가. 자꾸 서론 하다가 자꾸  만다 그거요. 얼마나 기가 차는 일입니까?

 여기에 지금 1절로부터 3절까지의 있는 말씀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자꾸 알아서  이 말씀 속에 모든 것이 다들었다 그 말이오. 얼마나 알기가 어려우며 얼마나  깨닫기가 어려우며 얼마나 거기에 광대한 진리가 들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도 이거 일반, 이 계시의 주인 이 예수 그리스도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생각하는 거 그거 옳습니다. 그  껍데기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한 것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알맹이는 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가운데에 다 내포돼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는 것입니다. 내포돼 있기 때문에. 내포되어 있는 그것은 2절에 보면  해석을 해 놨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뭐이냐? 그보다 더 알맹이는 뭐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은혜가 이 속에 다 들었다 그 말이오. 이 속에 다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이 속에 다 들었다. 이 속에 다 들었는데,  이속에 다 들었는데 그것은 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뭐이냐? 이 마지막 육십육 권째 되는 마지막  이 계시록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  껍데기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 계시록은 육십오 권의 내용을 다 총괄해  가지고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간단 명료하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간단  명료하게 가르쳐 줬기 때문에 이 간다 명료한 이것을, 총괄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는 신구약 육 십 육 권이 다 들어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다  들어 있다. 신구약 육십육 권이 다 들어 있으면 이것은, 그러면. 문서, 그러면,  그러면, 그 안에 그러면 또 영감, 그러면 그뿐이냐? 아니오. 이 제시가. 이 계시  안에는 우와 영계의 모든 게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계시 안에는 우주와 영계  창조주와 피조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왜? 이 안에, 계시록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도 들어 있고 자존자도 들어 있고 천지 창조도 들어 있고 모두가 다 들어  있지 않는가.

 이러니까, 이것은. 이 계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데 예수의 계시라  말은. 예수의 은혜라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돼서 나뉘어겼는데 이  친화해서 결합되는 은혜가 예수의 은혜입니다. 결합되는 은혜가 예수의 은혜요.

그리스도의 은혜는 결합된 자가 세 가지 그 직책의 권위를 마련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권위를 선 지자의 권위를, 왕의 권위를.

그러니까, 그 권위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도할 때에 '아, 여기에 가 가지고  전도를 하지 못하겠다' 그러면, 이 땅에 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땅에서 어디서든지 이 선지, 어디서든지 제사장직을  선지직을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은 무궁세계에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다 제사장 선지자 왕직을 할 수 있는 그 실력을 벌써 마련했다 그 말이오.

땅에서 실패했으면 거기 실패합니다. 땅에서 '내가 여기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 하는 게 그거 선지직인데. 전해야 되겠다 했는데, 거기에 제재받아  가지고 전하지 못했으면 그것이 뭐이냐? 무궁세계에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자기가 선지직을 하는 데 제한이 돼 가지고 있고 모든 것에 선지직을 다 할  수없기 때문에 자기 선지직의 무대의 범위가 좁다 그말입니다. 여기서 어디든지  닥치는 대로 다 선지직을 하는 것은 무궁세계에 무대의 범위가 무한히 넓어진다  그 말이오.

 고만침하고. 자꾸 와서 좀 잘 배워요. 배워야 되는데, 영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뭐 일하는 거, 사리 판단하는 거 보면 전부 다 틀렸어. 말하는 거 보면  모두 다 인본주의라. 이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배워서  자기의 똑똑한 하나의 교리 하나의 신조가 있어야 됩니다. 교리가 둘이면 행동  둘 됩니다. 신조가 둘이면 행동 둘 됩니다. 저 분 말이오 봐. 왜 졸아? 저분이  뭐 나한테 책 사 가지고 오지 안했어요? 카타쿰이던가, 카타쿰이가 뭐꼬? 예?  카타쿰? 예? 그 책 사 가지고 오지 안했어? 예? 아니야? 사 가지고 왔어?  아니야? 아. 나는 그런가 알았는데. 나는, 나는 읽을 여가가 없고 다른 사람  보고. 뉘더러 옆에 읽으 라 하고 좀 들어 봤어요.

 들어 봤는데 거기에도 견해가 각각 다릅니다. 견해가 각각 달라요. 일본  나라에서 예수님의 사진이라 하면서 갖다 떡 놓고 '이거 밟으면 안 죽이고 안  밟으면 죽인다' 이러니까 그거 안 밟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면으로  장점은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다 미신의 신앙들이라 정죄할 수 있습니다. 미신의  신앙들이라 정죄할 수가 있어. 나 같으면 말이 오 밟으라하면 써억 밟고  지나가겠습니다. 썩 밟고 지나가겠어. 왜? 그게 무슨 예수님의 사진이며 무슨  상관 있어? 불에 태우면 태우지. 우리 주님은 그런 주님이 아니라 말이오. 그  탁월하신 주님을, 주님을 그 사진 박아 놓고, 그거 밟는 게 뭐 예수님 밟는  것입니까? 그게 다 교리를 바로 모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그  카타쿰에 가 가지고 죽은 사람들도 다 그런 죽음이라 그 말이오, 내가 보니까.

그게 올바른 신앙을 똑똑히 깨닫지 못해서 그런데 그래 세계가 막 떠들고 이래  쌓지마는서도 그것은, 그때 원형 극장에 그런 일이 있기도 있었지만 깨달아서  올바른 판단을 가지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신조와 교리를 바로 배워서 바로 믿어야 돼지지 바로 믿지  안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오. 기본구원은 다 있지만 건설구원도 깨닫기 어려운 그  단계의 교리와 신조가 있고 그것은 또 행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깨닫기  어려운 거는 행하기도 어렵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건설구원의 차이는 얼마나  있느냐 하면 형체가, 하늘에 있는 형체 땅에 있는 형체. 해의 형체도 있고 땅에  있는 모래알 하나도 형체가 있지 않소? 형체라는 이름은 다 가지고 있고  형체라는 모양은 다 가지고 있지만 이제 그 가치와 영광과 권위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이랬으니까 우리 건설구원의 차이는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실 기회에 자꾸 배워야 되지 안 배우면 안 돼요. 안 배울라면 자기가  아는 대로 실행하면 뭐 배울 것도 없어요. 다 돼져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새벽으로 다 나오시이소. 나오고, 인제 좀 일찍 내가 간단하게  마칠라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너무 늦어 버렸구만 그만. 오늘 아침에 할 수  없이 양성원 학생들 때문에 좀 늦어요. 이런데, 이래 가르치면 뭐이 될란지,  구별하는 학생이 아니면 소용 없어. 까짓 거 뭐 만 명이라도 소용 없어. 목사  산태가 나 버렸어. 목사 산태가 났어. 산태가 났는데, 목사같이 귀한 게 없고  목사같이 천한 게 없어. 그러니까. 똑똑히 구별해 가지고 그렇게 유일한 교리와  신조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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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3 주님 모시고 말씀 생각하고 살자/ 요한계시록 1장 9절-20절/ 890119목새 선지자 2015.12.19
4332 주님 맞이할 준비/ 베드로후서 3장 1절-13절/ 1982년 17공과 선지자 2015.12.19
4331 주님 맞을 자세/ 마태복음 24장 35절-43절/ 840717화새 선지자 2015.12.19
4330 주님 만날 수 있는 신앙형태/ 아가 4장 6절-16절/ 881102수야 선지자 2015.12.19
4329 주님 만날 수 있는 신앙형태/ 아가 4장 6절-10절/ 881104금야 선지자 2015.12.19
4328 주님 뜻에 명중한- 죄 찾는 법/ 누가복음 15장 3절-7절/ 830415금야 선지자 2015.12.19
4327 주님 기쁘시게 하는 법/ 고린도후서 5장 9절/ 84030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4326 주께 맡긴 자의 할 일/ 디모데후서 1장 12절/ 821017주후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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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8 주관 믿음에서 / 누가복음 21장 33절-30절/ 881202금야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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