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8 16:0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983. 5. 29. 주후
본문 :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토요일날 새벽에도 이 말씀, 또 오늘 오전에도 이 말씀, 또 오후에도 이 말씀, 이러니까 말 구경하는 사람들은 오후에는 아무 구경할 게 없습니다. 내나 오전에 구경 다 했습니다. 또 말씀을 들어 자기의 지식으로만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오후에는 뭐 들을 것 없습니아. 오후에 꼭 설교도 오전 그 설교입니다.
그저 이 말씀을 실제로 자기의 복음으로 삼아서 이 말씀에 약속한 대로 그 능력을 힘입고자 참 세상을 이기고 후회 없는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또 듣고 듣고 하는 가운데에서 자체도 변화가 되고, 변화됨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달리 들려지고, 또 깨닫기도 새롭게 깨달아지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얻어지는 그 경험과 체험을 자기가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문은 우리 현실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있는 그 현재, 시간으로 말하면 현재, 장소로 말하면 현장, 또 사건으로 말하면 현건, 그것이 자기 현실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몇십 년을 산다 할지라도 그 몇십 년 산 것은 현실 외에는 없습니다. 이 현실에서 또 살고 그다음에 또 현실이 오면 현실에 살고 그저 현실에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현실을 실패하면 일생은 실패요. 또 많은 세월을 '내가 십 년 동안 꼭 일심으로 가지고 성공을 해 보겠다.'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그럴 것 없고 그저 현실, '요 현실만 내가 실패 없이 살겠다' 그래 가지고 현실만 실패 없이 살면 그 사람의 일생은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예사롭게 생각하고 내가 명년에는, 또 훗달에는, 내일은 뭐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그것은 다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미래도 있고 과거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있고 또 과거에 대한 반성도 있고, 있는 것이지마는 반성도 계획도 현실이라는 현실이 없으면 그것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러니까 과거를 반성하는 그 반성 그것을, 또 미래에 대해서 경영하는 경영 그것을 자기 현실이라는 요 구멍으로 빼내야 됩니다.
반성이 미래의 계획이 요 현실에 그것이 와 가지고 역사해서 그러면 그걸 현실화시켜야 되지, 과거 반성도 현실화 또 미래에 모든 경영도 현실화시켜서 그 현실을 자기가 뺏기지 안하고 모든 과거 미래를 요 현실이라는 요 현실 안에 요것 다 집어넣어 가지고 현실이라는 이 생애로 그 모든 것을 잡아 빼내야 거기에 좋은 성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경영을 하고 또 어떤 반성의 통곡을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현실이 제 일이오. 어떤 사람이 과거에 대해서 잘못한 걸 반성해 실컷 울고 나서 마음이 시원하게 '내가 엔간히 할 회개를 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슴을 치고 울다가 그만 그 너무 마음이 아파서 죽어도 소용이 없어. 가룟유다는 원통해서 자살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소용없어.
또 자기 미래의 것을 아무리 경영을 하고 뭐 결심을 해도 소용없어. 결심한 게 좋으나 결심하고 과거에 반성한 것을 그 현재에 적용을 시켜서 그걸 현실화, 현재화 현실화해야 되는 것이지 요 현재라 하는 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원은 내 현실이라는 요 현실에 매였 습니다. 내 현실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과거도 좌우합니다.
과거에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그것도 현실에서 그것을 영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점이라면 과거에 자기가 주님을 저주하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 무서운 범죄 그것이 베드로는 현재에서 그것을 다 조화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장점은 그게 장점입니다.
베드로는 일생 동안 살 때에 닭 우는 소리 듣고는 한 번도 마음에 애통이 없이 지나간 일은 없었다. 그게 있었다. 그게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의 존경의 대상이 됐지, 과거 그것만 두고 과거는 과거로 청산해 잊어버리고 또 미래에 대해서는 큰 것을 경영해 놓고 '내가 이만치 이건 것을 계획하고 경영했으니까 성공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스스로 저는 무슨 큰 일 한 것처럼 위대한 젓같이 이래 생각하는 것도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현재, 현재라는 그 현실을 뺏기면 다 실패자요. 현실만 뺏기지 안하고 뭐 과거야 어찌 됐든지 미래야 어찌 됐든지 현실만 뺏기지 안하고 그것만 자기 것을 삼으면 됩니다.
오전에는 여러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저 좁은 문은 아주 좁아서 용신할 곳이 없는 그런 아주 좁은 길입니다. 이것은 만유의 대주재, 창조주, 주권자, 전지전능자, 우리를 대속하신 이 하나님 이 한 분이 인도하시는 그 한 분의 뜻입니다. 그 한 분의 인도 요것이 좁은 길입니다.
내 현실에는 이분의 뜻이 내 현실에 있습니다. 이 현실을 닥치면 이 현실에 당신의 뜻이 거기에 있고 또 이 현실이 지나가고 다음 현실이 닥치면 그 현실에 또 당신의 뜻이 있고, 있는데 당신이 우리를 인도 하시는 뜻, 당신의 뜻, 다시 말하면 당신의 뜻, 당신의 생각, 당신의 인도, 그게 당신의 명령이오. 당신의 명령, 당신의 인도, 당신의 뜻, 당신의 소원, 당신이 책임지는 길, 당신이 모든 것을 두고서 주느냐 안 주느냐 모든 것을 가지고 허락하시는 그 길, 요것이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 겉은 보면 험하고 요리도 못 하고 조리도 못 하고 하는 그 길이오.
요리 한번 구불텅이를 쳐서 그 조금 죄를 한번 용납하고 또 요리 꾸불텅이를 쳐서 상관이나 또 수상이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나 사회나 시대에 거기에 조금 순응하는, 그개 불의인데.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그게 의인데. 그렇게 불의를 조금 섞우고, 또 죄를 조금 섞우고, 하나님과 조금 멀고 그러면 뭐 수월하고 평탄하고 일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 했어.
그러니까 그저 요라면 수월하겠지마는 거기에는 죄가 되니 그래 못 하고, 요라면 수월하겠지마는 요거는 하나님에게 피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는 버리고 인간 인도라, 또 조금 요래 멈추면 좋겠는데 요 멈추는 요것은 하나님과 대립이 되고 이제 이 피조물과 화합이 되는 것, 이러니까 요리도 조리도 못 하는 아주 협착한 길입니다.
이러니까 이 좁은 문은 아주 외부에는 좁고 험악하고 이렇지마는 이 길이 무슨 길이냐?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그말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그말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하고 화친하는 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하나님과 동사하는 길이다. 그것이 절대자하고 나하고 이 둘이 합작하는 길이다.
절대자의 모든 것을 내가 다 인수받는 길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길이다.
이러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좁은 길을 갈 수 있고 좁은 길을 갈 때에 넓은 길로 오라고 가자고 많은 사람이 권면할 때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꾸 그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침노를 할수록 기쁘고 즐겁습니다.
왜? 이렇게 열 명이 지금 자기 인간 생각, 넓은 길은 인간 생각 길 인데, 넓은 길은 지금은 나는 인구가 몇십억이나 되는지 모르지마는 사람의 숫자대로의 생각은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그것이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인데 넓은 길에 사람들이 그 길 가자고 자꾸 이렇게 유혹을 할 때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유혹을 하나가 유혹하는데 당신이 인도하는 좁은 길로 가면 유혹 없는 데 가는 것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천명 만명이 이 넓은 길로 가자고 할 때에 안 가고 이리 가면 기분이 더 좋습니다. 넓은 길로 안 간다고 감옥에 가둔다. 죽인다 산다 뭐 이렇게 야단을 지기는데 그 길 안 가고 좁은 길로 가면 기분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것이거든.
이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크시며, 어떻게 능력 있으며, 어떻게 계약 이행에 신실하며,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당신이 말씀해 놓으신 이 말씀은 호리도 가감이 없이 신실하게 이루신 그분, 그분과 그분의 계약한 이 계약을 알고 그분에게 소망을 가지는 이것이 있는 것만치 좁은 길 갈 수 있습니다. 없이는 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현실을 닥쳐서 좁은 길 넓은 길 이 두 길을 이래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서 '두 길 중에 어느 길을 갈래?' 이렇게 해 놓은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좁은 문 넓은 문을 다 만들어 가지고 우리 앞에 두 길을 딱 앞에 당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그것으로써 '내가 네게 대해서 책임을 지나 안 지나? 네가 나에게 책임을 지우나 안 지우나? 또 네가 내가 너와 너를 돕는 것, 너에게 축복하는 것, 너에게 모두 은혜 베푸는 것, 나와 내 모든 것을 네가 차지하나 나와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그걸 차지하나?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항상 따집니다.
그렇게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은 무조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담당 하시고 대속했습니다. 그러나 대속 받은 자가, 대속 받은 자가 하늘 나라에 가 가지고서 영광의 차이가 있고, 권위의 차이가 있고, 지위의 차이가 있고 존귀의 차이가 있고, 대우에 차이 있는 그 차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건설구원이라 이렇게 말하고, 또 자기 행위는 뭐 어떻게 바울같이 한 행위나 또 아주 아무것도 행함이 없는 그런 사람의 행위나 꼭 같이 구원 얻는 꼭 같은 구원 얻는 그 구원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합니다.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기본구원은 영광의 차이가 없어.
지위의 차이도 없고, 권위의 차이도 없고, 가치의 차이도 없고, 대우의 차이도 없습니다. 꼭 같습니다.
다만 하늘나라에 가서 차이 있는 것은 건설구원의 차이인데, 건설 구원의 차이, 그것이 이제 영광 차이, 지위 차이, 권세 차이, 대우 차이, 부강 차이, 환영 차이, 이 모든 그것 차이인데 그 차이는 자기가 만들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 예수님이 대속하셨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구원에는 차이가 없다' 하는 그 사람 도박 신앙 가진 사람이요, 도박 신앙. 또 그 사람은 미신의 신앙 가진 사람입니다. 택한 자라면 기본구원은 그 사람도 얻기는 얻지마는 그 사람은 그 미혹을 받아서 일생 동안 자기 건설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합니다.
건설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세밀히 우리의 주관을 두고 자유로 선택해서 우리의 자유의 그 힘이요 또 자기의 공로입니다. 그 공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대속의 기본구원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꼭 자 기가 한 것같이 자기가 주장되고 하나님은 그다음에 피동됩니다. 이래서 '네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은 능동이 되고 하나님의 갚음은 거기에 피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에 요 두 길이 있는 것은, 네가 나와 내 모든 은혜와 축복과 또 내 보호와 내 능력, 나와 내 모든 은혜-그걸 수를 말하면 많지마는 크게 말해서-나와 내 모든 은혜 이것을 네가 차지하겠느냐? 또 마귀는 이 세상 인간들이 말하는 세상이 주는 세상에 무슨 어떤 개인이, 어떤 단체가, 어떤 정권이, 어떤 시대가, 어떤 사회가, 어떤 사상이, 뭐 어떤 재벌이, 이 세상이 주는 것 그것을 하겠느냐? 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이나 그렇지 안하면 세상과 세상의 것이나 둘 중에 어느 것이냐? 이것이 하나도 따지지 안하고 그저 지나가는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결정입니다.
뭐 돈 들이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유식한 지식도 필요 없고, 권세도 필요 없고, 또 예민도 명철도 필요 없고, 건강이나 미남이나 미인이나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것 다 필요 없다. 다만 네가 나와 내 것이나 세상과 세상의 것이냐, 어느 것이냐? 둘 중에 하나 차지해라.' 요것 두고 당신을 차지하고 당신의 은혜를 자기가 자기 것으로 삼으면 절로 세상과 세상의 것은 나와 원수가 되는 것이고, 내가 원수를 안 할라 해도 그와 나와는 떨어지는 것이고, 또 그것을 차지하면 주님은 자연히 나와 상관없이 떨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호세아서에 보면 여자가 본남편이 있고 간부가 있는데 간부는 세상을 가리켰고, 거기에 보면. 또 본부는 하나님을 가리켰는데 거기에서 분개한 것과 시기심과 그 면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 말씀했습니다.
이랬는데 거기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것은 간부 어떤 유혹이 와도 그것을 버리고 본부이신 하나님께로 속해서 돌아오는 것이고 그럴 때에 그 현실에서 좁은 문 요것을 버리고 넓은 문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본부이신 하나님을 탁 배반하고 간부에게로 빽 돌아서 가는 그와 꼭 같다 했어. 야고보서 4장 4절에는 보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것을 너희들이 헛된 말로 아느뇨?'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삽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한없이 하나님을 만족히 할 수 있고 현실에서 한없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할 수 있는 그게 그 현실입니다.
그 현실, 그 현실이 뭐 어떤 현실은 한 시간 두 시간 열 시간도 지나가는 것도 있고, 한 시간에 지나가는 것도 있고, 한 십 분에 지나가는 것도 있고, 짧고 긴 것은 있지마는 어찌 됐든지 자기 현실이라 하는 그 현실은 토막 토막으로 자꾸 현실이 지나면 그것이 과거가 되고, 또 미래가 또 와서 현실이 되고, 요렇게 되는데 그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노엽게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요 둘이 결정됩니다.
뭐. 거기에서, 거기에서 그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하나님 다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 박차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능력의 보호를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박차 버리고 인간과 세상하고 그만 음행할 수 있고, 그게 '말세에는 음행의 포도주를 먹어서 모든 왕이나 자주자나 종이나 할 것 없이 음행의 포도주를 먹고서 다 취해 가지고 전부 음행했다. 이 음행한 연고로 바벨론이 다 멸망받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음행의 포도주는 뭐이냐? 이 세상에 이십세기의 문화입니다. 이십 세기의 문화가 나쁜 게 아니지마는 이십세기의 문화로 말미암아 하 나님과 자기와 멀어졌으면 이십세기의 문화는 그 사람에게는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이십세기의 문화로 인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와 졌으면 그거는 음행의 포도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문화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선물도 될 수 있고 하나님과 원수를 만드는 음행의 포도주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이 세상과 자기의 모든 가진 문화를 이것을 음행의 포도주로 삼아 하나님 배반하고 간부인 이 세상과 짝이 돼서 세상 멸망할 때에 네가 같이 멸망하겠느냐? 온 천하가 다 그리 간다, 넓은 길로 간다 할지라도 네가 현실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은총을 네가 바라보고 차지함으로써 이 좁은 길을 걸어가겠느냐? 어느 것이냐? 거기에서 하나님은 기쁨과 섭섭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 놓고 난 다음에 '내가 이렇게 일을 했으니까 이 공로가 어북 크고 기뻐할 것이다.' 어리석은 일이오. 당신은 노동력이 모자라서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는 것 아니오. 또 지혜가 모자라 그건 것 아닙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지정의, 우리의 모든 마음, 뜻, 성품, 힘, 목숨, 우리의 전인격 이것을 당신을 믿음으로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과 접해서 당신과 동거 동행하는 이것 원하는 것입니다. 딴것 원하지 않소.
자기가 재산이 수십억이 있어서 다 바쳤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참으로 전적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에게 속해서 그로 자기의 전소망을 삼고 그에게 피동되어 그는 자기의 전부 중에 전부요 그분만 하면 자기의 전부라 이렇게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결합되는 이것이 없으면 순교해도 소용없고, 또 자기의 재산 다 드려도 소용없고, 뭐 일생 동안 복음 전도에 분발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노동력 원하지 않소. 우리의 재벌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슨 충성이나 열심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요.
우리 자신을 원하는데 우리 자신을 당신에게 바치느냐, 우리 자신을 세상에 바치느냐, 이 자신이 차지하느냐 그거는 현실에서 결정된다 그거요.
우리가 요것을 알고, 이 현실을 무심히 지내보낼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나는 여기서는 주님 팔았다. 배반했다. 또 내가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대우해서 나는 주님을 영접했다.' 요것을 계산하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렇게 계산을 해도 하다 보면 '아이쿠, 이 시간에는 내가 어데로 갔더냐? 내가 주님 버리고 간부에게로 갔더냐? 간부를 버리고 주님에게로 갔더냐?' 깜빡깜박해서 그것이 계속되지 못해서 그만 그 계산을 하지 못한 그런 토막 토막이 있는 그런 실수를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모세가 하나님에게 늘 했습니다.
뭐 일생 동안 간부하고 놀음을 하고 주님은 척척 버리고 뭐 있으면 간부가 뭐라 하면 '예' 머리 숙이고, 하자 하는 대로 다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그거 떨어지면 죽을 줄 알고, 모든 흥망성쇠가 다 거기 있는 줄 알고 절절 매고 이러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제 마음에 생각나면 또 한번 와 가지고 '주여' 한번 부르고 또 뭐 간구하고 중얼중얼거리다가 버리고, 그런 대우 받을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예민성을 지으신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감정을 지으신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모든 애정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연히 뭐 '또 그 말씀, 또 그 본문 읽으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는 깨서 자기가 어떤 업에 있든지, 어떤 직장에 있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현실은 여기에는 두 문이 있다. 좁은 문 넓은 문이 있다. 좁은 문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문이니 휘장 속으로 열어 놓은 생명의 길인데 이것은 주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가는 길이다.' 대속을 요러면 벗을 상바르면 또 안 돼. 대속을 안 벗을라 하니까, 사죄를 벗지 안하고 칭의를 벗지 안하고, 칭의는 당신에게 피동되는게 칭의인데, 또 화친은 하나님과 동행이 화친인데, 요 길을 걸어가려고 하니까 그 길이 좁아요.
요리 해도 주님이 옷을 벗기고 요리 해도 벗기고, 자기 옷을 주님이 입혀 주신 의의 옷을 벗어서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나는 부자라 나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하는 자야,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게서 횐옷을 사저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사죄를 입어라, 어서. 칭의를 입어라.
어서 하나님과 화친한 화친을 입어라.
자기 현실에서 이 두 길이 있으니 넓은 길은 인간 생각의 길이요 좁은 길은 유일하신 구주이신 이 하나님 그분의 생각의 길이라. 이러 니까 '여기에 주님의 생각은 무엇이며 인간의 생각은 무엇이냐?' 요것을 알고 하나는 생명길 하나는 사망길인 줄 알고 요 길을 두 길을 생각 하면서 '내가 어느 길을 가느냐? 과연 두 길이 있느냐?' 이래 보면 자기가 이 생명길을 가려고 하면 요 마귀가 쏙 나와 가지고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이 길이 좋다 이리 가자' 뭐 웃으면서 꾀우는 자, 돈을 주며 꾀우는 자, 사랑을 주며 꾀우는 자,친절을 주며 꾀우는 자, 직장을 주며 꾀우는 자, 권세를 주며 꾀우는 자, 또 어떤 모든 걸 빳다제로 하면서 꾀우는 자, 또 무력으로 탄압하는 자, 위협하는 자, '아따야, 이거 넓은 길로 안 가고 좁은 길로 갈라 하니까 이렇게 넓은 길로 가도록 할라 하는 이 대적이 이렇게 많구나.' 그것을 경험해서 다윗이 말하기를 '주여, 내가 좁은 길로 가려고 하니까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입니다. 천천이요 만만입니다.' 눈이 밝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의 하나님' 다윗의 열쇠를 네게 준다 '다윗의 위에 앉게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왕권을 계대시킨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좁은 길 넓은 길을 요것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걸어갈라고 해야 자기 약한 것도 알게 되고, 못난 것도 알게 되고, 겁쟁이도 알게 되고, 그 못된 꾀를 쓰는 꾀쟁이도 알게 되고, 간교한 것도 알게 되고 뭐 별별, 거기에서 자기의 모양이 삐틀어지고 좁고 넓고 삐뚤고 뭐 길고 린 삐쪽빼쪽 아주 자기의 형상이 인격의 형상이라 하는 것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더러워서 보지 못할 얄궂은 괴물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고, 거기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이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이 길로 걸어가는 것은 과연 우주를 상속받을 만하고 영계를 상속받을 만하고, 그는 하나님 다음에서 모든 피조물을 통치할 만하다. 과연 그런 실력이 여기에서 배양되고 그게 바로 이 실력이 바로 그 실력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려운 것을 알고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나님에게 간구하면서 거기에서 일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길로 들어가면 생명 만난다. 이 길로 들어가면 생명 만난다.
생명 만난다 그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너와 결합 만난다 그말이요, 결합 만난다. 아무리 인간이 강해도 하나님보다 강합니까?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치 좋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라,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니까 들어가려고 시작할 때에 벌써 생명의 도우심이 와 가지고 넓은 길 가는 사람보다도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훨씬 낫게 되면 안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러면 십자가의 도가 아닙니다.
넓은 길 버리고 좁은 길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저 미 련하게 왜 그리 가느냐? 그리 가면 이리이리 된다.' 자기네들이 말한 대로 좁은 길로 간 것이 과연 그들이 말한 대로 망하고 하나님 말씀한 대로 구원은 없습니다.
망했습니다. 망할 대로 다 망했어. 싹 망하요. 그 사건으로 말이요, 그 사건으로는 망할 대로 망합니다.
망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암만 봐도 하나님 말씀대로 좁은 길을 걸어갔는데 이제는 뭐 바라볼 희망도 없이 이제는 다 낭패될 대로 낭패됐고, 절단날 대로 절단났고, 다 실패할 대로 실패했고, 헛일될 대로 헛일 됐다. 이게 뭐이냐? 이것이 세상이 승리하는 것이고 마귀가 승 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제 하나님이 그를 도와서 살려 냅니다.
이러니까 이게 죽었다 산 것이오. 죽었다 사는 것,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 천해지고 존귀해지는 것, 빼앗기고 얻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도요. 십자가의 도는 죽고 사는 게 십자가의 도라.
다니엘이 사자구덩이 끌려 들어갈 때에 그건 영광이 나타났으면 아무라도 보고 따라갈 사람들 더러 있을 것이고 그리 됐으면 그뭐 별 소문이 날 게 뭐 있겠습니까? '야, 사자굴에 집어넣을라 했는데 뭐 어째 왕의 감동을 시켰는지 또 왕이 무슨 소리 하나 듣고 안 집어넣었다.' 그게 낫겠습니까? '사자구덩이 들어가서 하루밤 지냈으니까 이거는 완전히 사자밥이 돼서 벌써, 사자의 밥이 돼서 벌써 먹어 소화가 됐을 것이다.' 하고 그 이튿날 새벽에 왕이 가서 '다니엘아 다니엘아' 부르니까 '왕이여 만세 수나 하옵소서. 제가 여기 평안하게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왔으니까 하 나님의 나이 나타난 것을 모든 사람이 봤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됐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약과 당신의 자제를 믿느냐 안 믿느냐?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의 인도를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요것을 시험하는 것인데,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따르면 시작하다가 마느냐, 중간까지 따르느냐, 얼마나 따르느냐? 따라서 완전히 실패 하기까지 따르느냐? 실패될 상바르니까 '아이구, 더 못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고 죽은 걸 살리시는데 다 믿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완전히 실패해서 죽으면서 완전히 실패를, 완전히 실패가 다 될 때에 그래도 따릅니다. 실패에서 성공을 일으켜 주실 수 있고, 죽은 데에서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나이 당신이 있는 것, 그러면 당신을 믿되 있는 걸 있게 하고, 또 없어지는 걸 있게 하고, 아주 없어져도 있게 하시는 이 끝까지 믿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작정하고 우리 현실에서 두 문이 있다, 두 길이 있다. 넓은 길은 인간 생각대로 가는 길, 좁은 길은 한 분 하나님 그분이 내게 명령하는 그 길, 그 길은 내가 아는 대로 성경 말씀대로 가면 그 길인데 성경 말씀대로 가면 차차 차차 좁은 길을 가게 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선택하면 그다음에는 성경 말씀 가운데서도 또 양을 벗기고 성신의 영감대로의 그 좁은 길을 자꾸 양심을 따라서 영감을 따라서 그렇게 아주 좁은 길 그것이 아무데도 상하지 안하는 완전히 완성을 이루는 그 길입니다.
그 길이 있으니 이 두 길이 내 앞에 이 현실에 있는데 이 두길 중에 어느 길을 갈까? 두 길이 있다. 어느 길을 갈까? 넓은 길은 평탄하고 가기 좋고 모든 사람 비위 다 맞추고, 인간 화평 다 가지고 교제 다 가지고, 좁은 길은 세상을 버리기 얻지마는 한 분 그분을 따라갈라 하니까 나중에는 다른 걸 다 내놔야 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말이오.
그래도 그 좁은 길을 걸어가면 이 길 걸어가면 인제 온갖 강한 대적도 있고, 또 큰 형벌도 있고, 마귀가 저희 군병이 되어 있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다 해 가지고 할 대로 제가 할 것이오. 할 대로 다 할 것이오.
'할 대로 다 할 것이다. 할 대로 다 해도 다 하고 난 다음에 당신이 그 능력으로, 다 해 놓은 그것을 당신이 다시 부활시킬 수 있고 완전케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가 승리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그 다음에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이러기에 이 길은 좁고 험하지만 이 길은 생 명길이라 하는 요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돼, 생명길이다.
이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절대이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살게 하려 하시는 길, 복되게 하는 길, 성공하는 길.
이러니까 우리는 명예와 생명과 모든 권세 그것을 원수가 빼앗아도 상관이 없어. 빼앗아도 죽어도 그다음에 살려내서 당신이 할 수 -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을 믿는고로 그런데 대해서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가리켜 십자가의 도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넓은 길 좁은 길이 있다. 좁은 길에는 이 길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생명길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사는 길이다. 성공하는 길이다.
영광스러운 길이다. 존귀한 길이다. 승리하는 길이다.' 요것을 잡아야 됩니다.
뽀스라기 십자가를 경험해서 마지막에 금으로 만든 묵직한 그런 가치 높은 그런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있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평범한 그 일에 거기에도 두 길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넓은 길 버리고 좁은 길 택하니까 그 좁은 길 택한 데서 손해가 옵니다. '요만한 손해야 와도 내가 좀 감당하지' 하고 손해를 보고, 손해를 봐도 그 길을 가니까 손해가 가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손해 가고 나서 그다음에 유익이 옵니다.
이러니까 조그만한 십자가에서 손해보고 나중에 유익보고 조그만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그후에 큰 평강 얻고, 조그만한 십자가에서 자기가 주를 위해서 천대받고 그다음에 더 큰 존귀받고, 이러니까 언제든지 주의 인도는 그 인도를 따르려고 하면, 주님이 만들기를 그래 만들어요. 주님의 인도는 다른 인도를 버리게 하는 것 이기 때문에, 다른 인도를 버리게 하는 것이 주의 인도기 때문에 주의 인도를 따르되 다른 인도를 버리지 안하고 이래 가는 것은 아직까지는 결말 안 납니다.
이러다가 주의 인도를 따를라 하면 다른 인도를 버리게 될 때에 다른 인도를 버릴 때에 버려도 버림으로 말미암아 손해가 와도, 버림으로 말미암아 희생이 돼도, 버림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들어가도, 버림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해도 그 인도를 버리지 안하고 따라갈 때에 당신은 거기에 대해서 백 배 여러 배 보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분의 능력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는 것, 좁은 길은 당신의 생각 당신의 뜻, 넓은 길은 내 생각 오든 사람들의 생각 그게 넓은 길, 이러니까 내 현실에서는 인간대로의 인간 생각대로 인간 지식대로 인간 비판 평가대로 정해서 가는 그것이 현실에 있고 하나님 한 분이 인도하는 정해서 하는 그 길이 있고 요 두 길이 있으니까 그 두 길 있는 것, 그러면 우리는 현실 현실에서 내가 어느 길을 택해서 가고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벌써 지나갔으면 판정할 수 있으니까 '아 나는 지나간 현실에는 넓은 길을 택했다. 좁은 길을 택했다.' 넓은 길 택했으면 하 나님을 내가 배반했으니까 바라볼 게 뭐 있습니까? 못 바라봅니다. 소용없습니다. 후회되면 현재에서 다시 넓은 길 버리고 좁은 길을 택해서 좁은 길을 걸어가고 난 다음에 당신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당신의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좁은 길을 택해서 가면 뭐 달라 소리 안 해도 당신의 것이 다 내것 돼 가지고 있어. 넓은 길로 가면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는 상관이 없어. 요게서 우리의 성패가 결정되고, 또 흥망이 결정되고, 귀천이 결정됩니다.
결정 되는데, 당신의 인도를 따라가되 어데까지 따라갈 것이냐? 당 신의 인도를 따르지 안하고 세상 인도를 따름으로 자기에게 유익이 될 그 유익, 그 유익이 당신 인도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 유익이 다 없어지기까지 당신의 인도를 따라갈 것, 또 당신의 인도를 인해서 내게 오는 손해가 올 대로 당신 인도 때문에 손해보는 그 손해를 다 보고, 다 보기까지 따라갈 것,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금생과 내세가 있고, 또 쇠하고 흥하는 그런 중복적인 것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조급하지 말고 당신의 인도는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길이니까 좋으니까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신 인도를 따라가다가 이 세상에게 손해만 보고 당신 인도 때문에 손해 손해 손해 손해, 당신 인도 때문에 가난 가난, 당신 인도 때문에 천대 천대, 당신 인도 때문에 감옥 감옥, 당신 인도 때문에 마지막에 생명까지 죽고 당신의 인도 때문에 이 세상에는 전부 솔박 손해와 죽음만 당하고, 당신 인도 때문에 망했고, 이제 당신 인도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 하나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 모든 걸 당신 인도 때문에 전부 다 손해보는 다 보는 다 망하는, 다 망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봐라,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 인도 받아야 인제 죽기는 죽는대 인도받아 덕이 뭐 있느냐? 효력이 뭐 있느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변동되는 이 세상의 것을 주지 안하시고 영원 무궁의 변동치 안하는 완전 무궁한 영원 무궁한 것을 나에게 예비해 주시기 위해서 변동되는 이 세상 것을 주시지 안하고 무궁한 것을 나에게 예비해 놓으신 것을 내가 안다. 그걸 주시려고 주시지 않는다.' 하고 간 사람이 누굽니까? 그 사람의 신앙이 누구요? 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늘과 땅의 것 다 줘 버렸어.
우리는, 그분은 무한히 크신 분이요 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진실 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믿되 어데까지 믿을 게 아니라 무한히 믿어버려야 돼. 무한히 믿고, 무한히 바라고, 무한히 그분에게 순종하고, 무한히 믿고 가면 그것이 멀지 안해서, 심판 너머서부터는 그겁니다. 심판 너머서부터 거기에서부터 이제 무한히 믿은 댓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봇짱이 적고 사람이 포부가 적기 때문에 '요것은 하루밖에 못 믿을 인간이니까 하루 믿으면서 하루 안에 그 효력이 나와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요게 낙심하고 돌아갈 터이니까 할 수 없이 하루 안에 주자' 하루 안에 주니까 하루 동안에 수입하는 것이 뭐 큰 게 나올 게 뭐 있겠습니까? '고거 참기만 참으면 네가 한 달만 참으면 한 달 만에 결실하는 것은 좀 보배가 결실이 되는데' 한 달만 기다리면 하지마는 한 달 못 기다리는 그거는 보름밖에 못 기다리니까 할 수 없어 보름 만에 또 뭘 줘야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보름내기, 한 달내기, 일 년내기, 십 년내기, 또 몇십 년내기, 평생내기, 어떻게 돼도 당신을 의심 없이 믿고 바라보고, 뭐라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니 당신과 당신의 법도를 따라가는 것은 생명의 길이요 결코 손해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당신이 변동될 것으로서 주지 안하시는 것은, 유한한 걸로 주지 아니하시는 것은 무한한 걸로 주시기 위함이라.' 이렇게 당신의 무한하심을, 영영하심을, 당신의 불변하심을, 당신의 완전하심을 믿고 가는 이 사람이 우리가 죽기 전에 돼야 됩니다.
거기에서 영원한 부가 생겨지는 것인데 그걸 조그만한 데에서 하나 둘 경험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한 달 믿던 자가 일 년 믿고, 일 년 믿던 자가 십 년 믿고, 그다음에는 십 년 이십 년 믿고, 그래 가지고 거석한 자는 그만 영원히 믿어버려.
그것 내가 마산 요양원에 한번 그때 집회 가 가지고 요양원에 가 가지고 갔었는데 그 어떤 환자가 하나 아주 위급한 환자가 있었는데 가서 그래 우리 예배를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느냐?' '예, 믿습니다.' 그래 그 사람에게 악수도 하고, 남자인데 키스도 하고 '하나님을 믿 느냐?' '예, 믿습니다.' '그러면 이 병을 낫아 주실 것을 믿느냐?' 딱 대답하기를 '낫아 주시고 안 낫아 주시고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인데 낫아 주셔도 낫아 주시면 낫아 주시는 것으로 나는 감사하고 또 바쳐 충성할 것이고 낫아 주시지 안하시면 이 병고로서 당신에게 충 성하고 당신을 기쁘시게 하겠고' 사나 죽으나 상관이 없는, 이 병고로 몇십 년 계속해도 상관 없고 더 어떤 병 줘도 상관 없고 '그는 나를 사랑하시니 나에게 유익되고 좋은 것 주시는 것이지 나쁜 것 주시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든든히 믿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믿고, 능력을 믿고, 신실하심을 믿고, 나에게 모든 것을 좋게 해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하는 그말을 하는 데에서 내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세상에 그런 신앙가들 다 많습니다. 이다음에 가 보면 참 놀랄 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그만한 이 현실이란 토막에서 자꾸 자기를 길러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나도 무한히 믿는, 불변하신 하나님을 이 세상 죽는 데까지 이리 저리 변해져도 나는 그분에게 대한 것이 변하지 않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도록 이것을 날마다 길러가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약속에는 거기에서는 가감이 없습니다.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한 건 한 건에서 그렇게 경거 망동으로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든든히 믿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 주관과 많이 대립이 될 때에 그때 흔들리는데 그건 그때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게 믿음입니다.
믿은 것은 후회 없습니다. 손해 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