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지-회개의 눈물을

 

1984. 10. 8. 월새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에 기록한 뜻을 본문대로 전도지에 옮긴 것 아니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있는 말씀을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그렇게 뜻으로 번역해 가지고 옮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본문과 조금 다르나 뜻은 꼭 같습니다. '천하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는 요 말씀이 사도행전 4장 12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들어오면서 안 하던 일을 하니까, 아니  하던 일을 하니 좀 우스워서, 그래 웃으며 들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속으로,  나타나게는 웃지 안해도 웃는 그런 안면을 봤습니다. 네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셨을 때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명년 이맘때  아이 낳을 거라는 그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시니까 사라가 뒤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하도 그는 도무지 이치에 없는. 벌써 나이가 근 백 세가 다 돼 가서  늙어서 쪼그라지고 그런 지가 오래 됐는데 아이 낳는다 하니까 너무 얼척이 없는  그런 말 같아서 우스워서 웃었습니다. 자기는 혼자 웃었지마는 하나님께서  아시고 '사라야, 왜 네가 웃느냐? 네가 명년 이맘때면 알 것 아니냐?' 그래서  '제가 웃지 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네가 웃었느니라' 또 이래  따졌습니다. 그거 모양으로 처음에는 아마 여러분들 이 좀 우습기도 하고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좀 깨달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아침에는 두 전도지에 대한 것을 간략하게 말하려고 합니다.

 본문, '천하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 있는 말씀인데, 모든 이종교가들이 이 전도지를 받을 때에  너희 도만 구원 있다 하느냐 하는 그런 시비를 걸어올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불교인들에게 준다든지, 어떤 이종교가에게 준다든지 또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준다고 하면은 '다 도는 마찬가지로 구원이 있지 너희 예수교에만 구원이 있다  말이냐' 그렇게 뭐 독선주의라고도 말하고 자기 주관 저거대로 말한다고도 하고  별 그런 말들이 있고 그런 욕들과 대항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가 답을 할 때는 다른 말 하지 말고 그저 '저는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내 말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말씀 하신 분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그것을  밝혀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십시오. 우리는 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라면 오만 욕을 해도, 또 '다른 데 구원이 없고 그러면 여기만 구원이 있다는  말이냐' 그래도 '그것은 그저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전한 것뿐이지 내  주장으로 하는 거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 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여기 말씀한 거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워서 하나님이 하신 것을 그렇게 해야 되지 우리 의견으로 이거 말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말로 하면은 뭐 천 마디 만 마디 해 봤자 그까짓 거 무슨  권위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는 것뿐입니다. 그저 간단하게 거석하면 '네, 그저  하나님의 성경에 기록된 성경에 기록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그 이상은, 어떤 소리를 한다고 해도 자꾸 요  말만 하십시오. 그저 요 말만, 또 말하면 또 말할 때에 또 요 말하고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욕을 하면 또 욕하고 난 다음에  말을 안 하고 가만히 그만 욕을 얻어먹고 있으면 중단되거든 욕을 얻어먹고  있고. 거기에서 자꾸 어째 그러냐 이래 그러냐 자꾸 이래 말을 하면은 답을 해야  될 때에는 그저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자꾸  그렇게만 대답하십시오. 다른 말 하지 말고.

 이뿐만 아니고 우리가 공산주의를 대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기와 그 사람과 서로 대해 가지고 인간 대 인간의 그런  일을 하지 안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자기는 그저 빠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자꾸 자기는 증인이 돼야 되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말같이  여기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실 것인데 제가 책임지는 것 같은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저도 왜정 말년 때에 그 부장으로 더불어, 도베니라는. 와다나베라는 부장인데,  그 사람으로 더불어 여러 해를 계속해서 싸워 나왔고 이럴 때에 늘 그런  말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출애굽기 20장 3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성경을 어길 수 없어서  이렇다. 성경에 이래 기록했다. 그래도 해야 되나? 그거는 나는 아직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늘 만날 때에 '이해가 되느냐?' '이해가 안된다.' 또 그걸로 또  끝납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느냐?' '안 된다.' 그래 가지고서 내치 미루어  나갔고, '성경 말씀이 그러기 때문에 나는 성경 말씀대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 의사로 하는 것 아니라' 늘 그것으로써 계속해  나갔습니다.

 이랬는데, 나중에 해방 후에 감옥에 있는 종들이 나와서 서로 얘기할 때에 내나  동감이었습니다. 그저 거기에 자기가 뭣을 가석해 가지고서 이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자기가 한 사람들은 다 패전을 했고, 거기에 그저 무슨 말 하든지 성경  말씀 가지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 승리를 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음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이것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늘 성경 말씀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내가 대항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과 하나님과 대항하는 게 돼지기 때문에  악령이 그것으로서는 합당한 그 전법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물리쳐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 하면. 꼭 동감이었습니다. 이기는, 이기는 전법은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혹 모르면 성경에 말씀했다 하고, 그러면 성경 어디냐 들이대라 할  때에 그걸 못 들이대면 그때는 좀 이놈이 예수 믿는 놈이 이것도 모르냐고서  매도 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네. 제가 성경을 앞으로 생각하고 또  찾아 가지고서 내가 그렇게 답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미뤄 놓으면 진 거는  아닙니다. 패전한 거는 아니오. 우리가 성경 다 외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 가서 생각해서 성경을 자기가 생각하든지, 못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묻든지 이래 어찌 해 가지고라도 성경을 가지고 답을 했을 때에.

'성경 몇장 몇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성경이 지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부담을 시키지 안하고 네가 이런 성경을  믿느냐고 그런 욕은 할 수가 있고 형벌은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저는 그래 말했습니다. '일본 나라와 조선 나라가 합병될  매에 이 기독교 신앙 자유를 허락했으니까 그때에 국제 계약에서 된 일인데 어찌  지금 계약을 자꾸 돌변하라고 지금 하고 있느냐' 그런 말을 제가 그다음에는  덧붙여서 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뒤에 늘 있어도 아무 쟁론 했으나 별  그들이 끝까지 저에게 대해서 가해를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어렵지 않는 건 아니오. 제가 어떨 때는 산에 가 가지고서  개미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 여러 번 가져 봤습니다. '개미 네가  나보다는 행복스럽다. 나보다는 자유가 있다. 나는 아무 자유가 없다. 아무 데도  자유가 없다. 내가 어디로 숨어서 갈라 해도 그런 자유도 없고. 숨어 갈라 하니  주님에게 거리끼고 또 있자니 날마다 마찰의 그런 어려움이 있고, 너는 참  자유롭고 좋다.' 내가 그렇게 했는데, 그 뒤에 개미도 보니까 또 개미 그놈이  적이 있습디다. 개미 그놈이 적이 있어. 그래 뒤에 결론은 '모든 존재 쳐놓고  적이 없는 존재는 없다.' 그것을 보고서 나무에 보니까 산 나무를 파먹는 그것은  산 나무를 파 먹음으로써, 버러지는 나무를 파먹음으로 제가 살도록 하나님이 해  놨는데 그 나무 없으면 그 놈 죽습니다. 먹을 것 없기 때문에. 이래서, 모든  것이 다 이렇게 가해함으로 살고, 가해해서 그것을 전투해서 이김으로 성장돼  나가는 이것이, 모든 피조물 쳐놓고 그것이 하나님이 살고 자라는 법칙으로  주셨지 그것이 절대로 죽는 법이 아니라 하는 것을 마지막에는 결론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도 그저 그들이 뭐 별별 소리를 하더란대도 참 천하에 예수 믿는 길  밖에는 구원 얻는 길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래 전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그때에 우리는 속으로 참 진정 감사함을 느껴야 될 것입니다.

 이 천하에 있는 길이 천도 만도 넘은데, 가보면 어떤 사람은 돌 하나에다가  자기의 영원을 맡겨 놓고 그것이 자기 영원을 주장해 줄 줄로 알고 거기다 공을  들이는 사람 있고, 또 자기의 선조라고 조상 단지를 놓고서 거기에 금생 내세에  영원히 복을 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모두 헛되이 바라는 그 허망이  얼마나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참 생명의 길을 우리가 찾아서 믿게 된다는 거  이거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또 이 생명의 길을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셨다는 참 이  어마어마의 큰일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저 감사가 넘치고.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생각해 보면 감사하고 생각해 보면 기쁘고 즐겁고  담대하고 평강이 오고, 기독교 외에 딴것은 생각해 보면 고통이 번민이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적인 그런 모든 것이나 이종교의 모든 것은 생각할수록 점점  고민이 오고 걱정이 오고 평강이 없어집니다. 불교인들도 그들이 참 심령이  그만큼 어두워 그렇습니다. 그 불교인들이 그래 하지마는 그가, 과연 불(佛)이  자기들을 그렇게 구출할 수가 있겠느냐? 또 석가모니가 그렇게 지음을 받은 인생  중의 하나인데 그것이 구출할 수가 있겠느냐? 궁극적으로 참 밝은 심령 가지고  생각을 하면은 그 끝이 어찌 되느냐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는데, 그 심령이  어두운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가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거석하고 뭐  이런 이적도 나타나고 저런 권위도 나타나고 모두 다 믿는데 내가 뭐 그거  생각할 게 뭐 있느냐? 그저 부처에게 이렇게 공들이는 것으로, 불경을 하는  것으로 구원이 있다' 이렇게 하지. 그다음에는 저희들이 파고 나갈려면 파고  나갈 수가 있지마는 그다음을 파고 나갈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히지 안하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거기에서 그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구원은 자꾸 생각하고 따지고 하나 알다가 둘 알고 점점 많이  알아 갈수록, 널리 알아 갈수록 우리 구원은 확고하고 우리 행복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주의 구원의 도리를 생각지 않는 외부의 기쁨은 없습니다. 외부의  무슨 사람을 만남으로 뭘 어쩜으로써 외부에서 오는 행복은 그거 다 껍데기  행복이라서, 껍데기 쾌락이라서 다 절단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깊이 생각하다가,  그보다 더 깊이 양심으로 생각하다가, 그보다 더 깊이 성신의 감화로 생각하는  거기에서 모든 능력도 행복도 기쁨도 평강도 담력도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라야 참의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그 밖의 것은 그거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모두  건설하는 것들이요 모래 위에 건설하는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 믿는 해석은 우리가 교회 들어와야 그걸 알고 배우지마는  예수님을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 얻는다는 요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믿으면 다, 구원 됩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그대로 전하도록 하고.

 또 오늘 아침에 나도 이 인사하는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전도지라 말은. 우리가  전도를 받아서 예수 믿으라는 그 전도지는, 전도는 우리가 받아 가지고 믿는  사람이지마는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주님의 진노와  주님의 징계를 보는 눈동자를 쉬지 말지어다' 하는 이것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있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는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안하고 여기에 대해서 상관없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자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 경고하는, 깨우쳐 주시는 경고하는  전도입니다.

 경고하는 경고하는 도를 전해 주는 것이니까 이것을 전할 때도 겸손히 절을  하고 그렇게 신중히 절을 하면서 다른 말을 하지 말고, 과거에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진지 자셨습니까?' 이렇게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제 그거는  우리나라의 인사입니다. 일본 나라의 인사는 또 그렇지 않습니다. 아침에는  '오늘 아침에는!' 결심하는 소리요.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허리를 동이고  삽시다.' 또 '오늘은!' 낮에는 '오늘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또 '오늘 밤에는!'  언제든지 그 사람들은 긴장해서 전투의 준비적인 것으로 인사를 했고 우리나라는  그저 안일주의로만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뭐 진지 자셨습니까?  하는 그런 인사는 차차 없어졌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는 그런 것도  인사가 적어졌지마는, 우리가 과거는 약소국이요 이런 나라이기 때문에, 대국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하룻밤 동안에 무엇이 있을는지 몰라서 항상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인사는 각각 다릅니다. 나는 다른 나라 말은 모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인사는  모르나 그 나라 인사도 반드시 그런 종류의 것으로써, 그때에 그 백성들에게  제일 요긴하고 깨우칠 만한 그런 것을 자기네들의 인사로 삼아서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인사하는 그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사는 지금 우리가 참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되는, '흘릴지어다' 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했었습니다. 하는 이것을  전하는 것이니까 전할 때에 자기도 '내가 참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리라고 하셨는데 나는 흘리지 못한 자다' 하는 그걸  생각해 가지고서 흘리지 못한 걸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자기는 흘릴 각오를  가지고 흘려야 된다는 걸 인식하고 여기에 대한 것을 자기가 다시 새로워져야 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진노의 그 안면과 하나님의 진노로써 징계하시는 그 징계를  보는 그것을 눈동자를 돌리지 안 해야 될 터인데 그 눈동자를 쉬고 있는 그것을  자기가 회개하면서 받을 때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자기는 기도해야 될 것이고  다시 각오해야 될 것이고 다시 돌이켜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이걸 받았을 때에. 제가 양복을 입고 있으니까 ○집사님이  우유병 가지고 올라 온다고서 문을 열어 달라 해서 문을 열어 주는데 우유병  가지고 올라와 가지고서 제가 양복 입고 있으니까 절을 하면서 이것을 줬습니다.

그래 제가 이걸 받아 가지고서 양복 입다가 잠깐 내가 거기에서, 그때는 뭐  시간이 좀 있기 때문에, 지나가며 받을 때야 그때야 서서 눈 감고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잠깐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내가 참 이렇게 회개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될 터인데 이 회개에 대해서 간절함이 없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사과를 하면서, 그저 눈물을 흘린다고 흘리지마는 그렇게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그런 눈물이 있어야 될 터인데 없다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참 노여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를 구하고 또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신다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만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면만 보고 하나님의 진노의 안면을 보지 못하니 우리에게  당하고 있는, 우리 상대가 되어 있는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으로만 상대하고  진노의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우리 눈이 흐려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달라는 그런 말을 하고 이  어린 것들이 다 이렇게 돼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는 거기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는 다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있지마는 어린 것들이 아직까지 도를 모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전도치를 받아서 거기에서 기도가 간단한  기도가 됐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전도지를 전할 때에 우리가 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면서 이 전도지를 전해야 할 것이고, (졸지마 졸면 안돼.) 전도지를  전해야 할 것이고. 또 전도지를 받을 때에 나는 이 전도지와 같은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자기가 또 회개를 하면서. 그러면, 이 전도지는 전하면서 내가  회개를 하면서 전해야 되겠고. 받을 때마다 또 회개를 하면서 자기가 받고 받아  가지고는 그저, 받아 가지고는. 어떤 사람이 만일 퍼뜩 지나가고 그다음 순서가  있으면 그것을 할 수 없어 그러고 지나가지마는 자기가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은  길 걸어갈 때에는 그것을 뭐 오리든지 십리든지 계속해 갈 수가 있겠습니다.

오리든지 십리든지 눈을 뜨고 길을 걸어가면서 이 전도지에 대한 것을 묵상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자꾸 새로워져서 주님의 노가 풀어질 수 있는 그런  우리 심신들이 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몸은 하나인데, 그래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각 그 몸의 행한 것을 따라서 갚으려  함이라' 마음으로 행함이라 그거는 말하지 안했고 몸의 행함을 따라서라고 몸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몸은 최종적인 행위인데 그 행위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거기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전도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도록 이렇게 하신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깨우쳐서 우리에게 전도지를 이렇게 주셔  가지고서 우리들이 이렇게 박아 가지고서 전하면서, 서로 인사하면서  '안녕하십니까?' 이 세상의 썩을 말로 자꾸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그 태도와  행동으로 정신으로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나뉘고 할 터인데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노를 생각하면서 노를 풀라고 애쓸 수 있고 또 우리 앞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징계의 그 멸망을 우리가 걱정을 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구할  수 있는 이런 경고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아이들 미국 갈 때도 제가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이래  했는데 제 지금 같으면 이 전도지를 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인사를  할 때에 이 전도지를 주면서 내가 그들에게 인사의 표를 하겠고 또 그들도  나에게 절을 하면서 이 전도지로 인사의 표를 한 때에 요것을 가 가지고서, 거기  가 가지고서 일 년을 있든지 십 년 있든지 죽을 때까지 있어도 요 말씀을  기억해서 항상 주님이 노여워할까, 그이의, 그가 어떻게 할까 그래서 그의  노여움을 끼치지 안하려고 애를 쓰고, 주님의 징계가 오지 않기를 애를 쓰고  주님의 축복 오기를 애를 쓴다고 하면은 그 이상 좋은 인사가 없고 좋은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큰 축복인 것을 깨닫고 우리가 열심히 전합시다. 이번에  전도지 박는데 팔십만 원 전도지 비용이 들었는데. 연보 들어온 것이 그거  주고도 얼마 남아 있습니다. 남아서 통장에다 저금을 하고. 또 각 구역에서도  이름이 쓰여와서 그 구역장 이름만 쓰지 안하고 구역에 누구 얼마 누구 얼마  하면은 누구 누구 개인의 이름을 다 수첩에다 다 적어서 그랬습니다. 어떨 때는  내가 적고 내가 못 적을 때는 ○○집사에게 그걸 줘서 적어라고 하고 그렇게  적어서 수지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전하게 하시고 어떻게 하실는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만일 많이 들어오면 많이 전하게 하는 것인 줄 알고 많이 전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소원은 이 종이가 그저, 벌써 수원지에서는 말하기를 '올라올  때는 전하지 마시고 내려갈 때 전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올라올 때  전하는 사람은 그래 가지고서 그 전도지를 아마 읽어 보고 획 던져 버리니까  그게 혹 한 장이라도 있으니까 그런 말이 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올라갈 때  전해야 거기 가 가지고서 혹 앉아서 이렇게 좀 뭘 읽어 보든지 할 수 있을  터인데, 올라갈 때 전하니까, 그 안에서는 전할 권리가 없지마는 그래 전하고  싶은 사람은 그 밑에서, 입구에서는 얼마든지, 층층계 밑에서는 거기서는  대신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전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는 사람마다  이렇게 전할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걸 그 안에 가 가지고 전해서  한 장이라도 흘러 있으면 그거는 우리가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고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말썽이 있는 그런 일은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찰 없는 그런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가 좋습니다. 마찰 있고 신앙 걸음을 걷는  것보다 마찰 없고 신앙 걸음을 걷는 것이 좋고, 마찰 없고 신앙 걸음 걷는  것보다도 모든 사람이 환영하고 감화를 받는 일을 하면서 신앙 걸음을 걷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네, 오늘 아침에는 이 전도지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것을 이제 간략하게  말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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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 전도의 미련한 것/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51129금야 선지자 2015.12.17
1423 전도자의 자세/ 히브리서 12장 2절-3절/ 841225화새 선지자 2015.12.17
1422 전도지/ 에스겔 2장 3절 10절/ 841014주새 선지자 2015.12.17
1421 전도지 나누기/ 요한일서 3장 16절/ 841225성탄축하 선지자 2015.12.17
1420 전도지 사용에 대해서/ 시편 91장 14절-16절/ 841009화새 선지자 2015.12.17
» 전도지-회개의 눈물을/ 사도행전 4장 12절/ 841008월새 선지자 2015.12.17
1418 전신갑주/ 유다서 1장 14절-15절/ 811024토새 선지자 2015.12.17
1417 전쟁발발의 징조와 우리할 일-회개/ 이사야 1장 18절-20절/ 830607화새 선지자 201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