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5:55
재림
1980. 5. 25. 주전
본문 : 마태복음 24장 32절∼51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32절로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많은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일에 있어서 징조로는 하나님께서 여럿을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가 움이 트고 가지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아라 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심인데 문 앞에 이르렀다 그 말은 곧 주님이 공중 재림은 하셨고 땅위에 재림하실 일이 남아 벌써 재림해 가지고 계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화과 나무에 새순이 나고 가지가 연해지는 이것은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 근2천3백년 동안을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대로 버림을 당해 가지고 민족이 멸해지지 않고 꼭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나왔습니다.
잎사귀가 나고 가지가 연하여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이 관계 섭리가 있거든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유대인으로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마는 늘 외식으로 섬겨 나왔는데 이제 참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는 그런 기미가 보이거든,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그 섭리가 보이거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마지막에 세계가 공산주의보다도 천주교로서 어린양으로 더불어 대항하는 이 세계 통일이 되느냐 그렇게들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심인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움트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 민족에게 역사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그 민족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일도 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세계가 유대인을 못 견디게 아주 집중 사격해서 유대인들이 이제는 히스기야 왕과 같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로 인하여 삶을 얻으려고 전 민족이 히스기야 왕때와 같이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하는 그런 운동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건 유대인들이 환경, 그 배경 작용으로 인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민족으로 화해지고 또 하나님의 역사가 그 민족을 통해서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볼 수 있도록 나타나거든 벌써 예수님이 재림해 가지고 계시는 고로 땅위에는 환난이 있어 죽어 부활하고 죽어 부활하는 그때가 이른 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전에 회회교 국가가 40여 국이 되는데 그 나라들이 동맹해 가지고 유대인들을 포위해서 모든 것을 고립시켜서 견디지 못하게 한다는 그런 걸 들었는데 그런 것도 하나 역사입니다. 어쨌건 유대인들이 이제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 이 아니면 저들이 견딜 수 없는 그런 입장으로 몰아 넣는 그런 형편이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수천년 전에 예언하신 대로 2천 근 3백년 동안을 그 나라가 나라를 잃고 다녔지만 그래도 멸종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겠다고 하신 그대로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상한 민족입니다.
그 민족이 개인을 본다면 능히 그 나라를 독립시킬 만한 그런 권력을 가진 가람들도 많았습니다. 세계를 살펴 통계한 사람들이 세계에 모든 통신 기관에 중요 위치는 유대인들이 가졌고, 경제적으로는 전 세계의 10분지 8을 가졌고, 또 발명으로서는 세계의 십분지 8, 9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민족이면서도, 애국심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은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유태인이라 하는걸 먼저 선포하고 인사하지 그렇게 엉큼한 상대를 안 하는 애국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까지는 너희들이 나라를 얻지 못하리라′고 하신 대로 그대로 2천 근 3백여 년 동안 나라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독립은 했는데, 그 유태 나라와 배경에 있는 모든 열방들과 관계되는 그 점을 기독자들은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찌되느냐? 그것이 하나의 예수님의 재림에 마지막 징조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 징조가 어떻게 되나 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쓱쓱 올라가는 그런 일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다급한 데에 몰려지도록 해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는 히스기야 왕 시대와 같은 그런 역사가 더 해당되지 않느냐 그렇게들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징조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우리가 상고를 해서 늘 기억해야 되는데 거의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가속도로 발달된다는 그런 것도 다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세계가 좁아져서 서로 몇 시간이면 왕래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는 것도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35절에 있는 말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말씀은 지금 이 상태의 천지가 다 변질 변성 변형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지금 모양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 구조와 조직과 모든 운영 이것이 완전히 바꾸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우주에 이제까지의 조직도 질서도 모든 운영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있는 이 모든 시설도 완전히 없어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지는 그것을 바꾸어지는 그것을 말씀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선포해 놓은 문서 계약' 영감 계약 이 두 가지 계약은 조금도 변동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증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은 이 우주보다 중량이 크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신의 감동이 아니면 주의 말씀의 이 권위성의 중량을 인간의 역량으로서는 모릅니다.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만치 주의 말씀의 이 권위성, 불변성, 신실성을 알게 됩니다. 영감이 아니면 인간의 자율이나 주관이나 그런 머리 가지고는 이 말씀은 다 거짓되게 보고 하나의 기만술로 이렇게 보여지지 이 말씀이 우주보다 크다는 이 권위성으로 인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정되어지는 것이 성신의 감화를 받은 것만치 인정되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피공로를 힘입은 거기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36절로 41절에 보면 초두에 '그 날과 그 시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이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인자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님은 신인양성 일위시기 때문에, 그런데, '모른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날과 그 시는 아버지가 책임지고 이것을 역사 하신 일이기 때문에 분담시킨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은 이것을 분담하신 일이 아니고 천사들도 분담한 일이 아니고 다 분담된 일이 있기 때문에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된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어 종의 형상을 입고 복종했다' 이랬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월권이요 복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도 천사도 복종으로만 존재한다 하는 것을 선두에 내놨습니다. 복종으로만 존재한다. 천사도 복종으로만 존재하고 또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도 복종으로만 존재하지 자기 마음대로 월권적으로 이렇게 자행 자지 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서두에다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인자의 임함도 노아의 임함과 같이 된다' 홍수전에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들을 다 멸하시는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재림 때도 '사람들이 이렇게 깨닫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이 같이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꼭 같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는 이 구원을 받고 하나는 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는 말입니다.
또 그 위에 노아가, '노아 때에 홍수가 내려서 모든 홍수가 내려서 모든 사람을 멸하기까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그 일에만 주력하다가 멸망을 받았다. 인자의 때도 그와 같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다'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하나는 구원 얻고 하나는 구원 얻지 못한다, 이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나태 내는고 하니 신인 양성 일위이신 인자도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대해서는 자기가 정하는 그 담당도 아니고 나타내는 담당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아버지의 담당이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도 모른다 그 말은 천사도 하나님이 알게 해야 알고 전파하라 해야 전파하지 제 마음대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피동의 나라라 하는 것을 여기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피동의 나라라, 하나님의 나라는 피동의 나라라. 한 분, 한 분, 성령은 성자에게 순종, 하나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이 순종으로 된 나라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천사도 인자도 모른다 말은 거기서 관계하지를 못한다 말입니다. 거기 대해서는 언급하지를 못하고 거기 가서는 상관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는 조직의 나라요 질서의 나라요 법의 나라요 그보다 뛰어난 진리의 나라요 완전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피동으로 되는 나라라 하는 것을 나타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라 말은 하나님이라 말입니다. (안 들으면 모릅니다. 그저 감정으로 뭐 선을 행하라 사랑을 행하라 그런 것 가지고는 못삽니다. 그것은 불교에도 있습니다. 불교에도 그것 가지고는 못 삽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잘 듣고, 부자 되는 소리를 하면 잘 듣고 그것은 다 얻어도 땅의 것이요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걸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어 종의, 종의 형상을 입어 죽기까지 순종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너희들도 이 나라의 국민이 되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사가, 인자가 거기 대해서 상관하지를 못한다. 상관하게 하셨으면 책임지고 죽기까지 하고 상관하지 못하게 한 것은 상관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약속의 나라요 조직의 나라요 질서의 나라요 신실한 나라라. 그러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은 한 주권에 모든 것은 피동으로 되어지는 그 나라라. 그 나라의 왕은 주권자요 모든 것은 피동이라.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이신 그분도 성자의 위에 있을 때에는 복종 뿐이라.
성령도 성령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그 직책을 맡았을 때에는 복종 뿐이라.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본체로 돌아갔을 때에는 능동이지만 그 직책으로 성자의 위 성령의 위를 가졌을 때에는 복종 뿐이라. 하늘나라는 한 분만이 능동의 왕이시오 그 다음은 다 복종의 나라라 이걸 여기 선포합니다.
그런고로 능동자이신 한 분 외에 모든 것은 피동으로만 존속할 수 있고 피동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피동으로만 영생을 할 수 있고 피동으로만 성장과 향상과 존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피동한 분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요, 다른 사람들은 저거 생각에는 먹는 것 가정 이루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해서 했지만 그것은 다 능동적이요 다 주관적이요 다 사욕 적이요 자율적입니다.
거기는 주력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멸망 받았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한 거와 같이 인자의 때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것은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의지 안에서 역사 하셨고 당신 의지밖에 이것을 섭리해서 역사 하신 것인데,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한분 완전자가 능동자 되시고, 완전자 능동자 되시고 이분이 주권자 되시고 그밖에 있는 모든 것은 여기에 피동으로만 완전의 것이 되고, 완전의 능동 그것이 모든 피조물에 충만해 가지고 영존 영생하게 하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 영원전 정하신 목적입니다.
이러기에 내가 구름 타고 올 본인이지만, 내가 구름 타고 올 본인이지만 그 날과 그 시를, 이제까지 참 하나님의 심부름만 하고 있는 천사들이지만 그 날과 그 시는 모른다. 내가 올 날이지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지 내가 올 날이라고 내가 거기 가서 나는 그것은 내게 주권 되어 있지 아니하고 나에게 담당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복종의 나라며 얼마나 피동의 나라이며 한 분만이 능동의 나라인 것을 밝혀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거야 내가 재림할 터이니까 내게 해당된 일인데, 그 날과 그 시는 모든 것보다 그것이 내게 해당된 일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야 될 것 아닌가? 그렇지만 내가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엄격히 피동의 나라요 복종의 나라요 월권이나 그렇게 자행 자지의 남용을 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초두에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날을 알지 못한다' 이것으로만 생각하면 여기서 말씀한 큰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데 백성들이 이런 나라의 구원과 이 나라의 보호와 이 나라의 용납을 바라보는 노아 시대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하나님께 복종으로만 순종으로만 그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이 순종으로만 하나님의 보장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을 깨닫고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는 고독의 걸음을, 조롱의 걸음을, 역사에 한번도 없는 그런 필요 없는 모두가 다 조롱할 수밖에 없는 그 피동 순종이지만 노아는 피동 순종해 가지고 하나님의 안보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데 그 당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함으로, 순종으로 자체의 안보가 되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순종으로 모든 성공과 영광이 되어지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는 그때까지 제 마음대로 제 욕심대로 제 생각대로, 이것이 중요하다 싶으니까 저것이 좋다 싶으니까 이것이 필요하다 싶으니까 제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자기 주관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 주관 행위 사욕 행위 자율 행위,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을 하나 표준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절대자가 영원전에 목적을 이렇게 정해 놓으셨고 또 이렇게 섭리하시고 이 절대성 가지고 하고 계시는데 이것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저희 마음대로 하다가 멸망받았다. 노아의 여덟 식구만 이것을 깨닫고 천하의 인간이 비합리적이라고 하든지, 비과학적이라고 하든지, 비역사적이라고 하든지, 비통계적이라고 하든지, 모든 우매무지한 행위라고 하든지 이 절대자에게 복종하는, 그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행위인 이 복종하는 이것으로만 안보도 구원도 희망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이 비밀을 깨닫는 사람이 심히 드문 것이 그때와 같다. 택한 자들이야 기본구원 얻어서 하늘나라는 갑니다. 택한 자가 하늘나라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것이나 불택자가 지옥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것이나 꼭 같습니다. 택한자는 제가 아무리 엉망진창의 생애를 해도 기어코 하늘나라 갑니다. 가 가지고 그 나라에서 영원히 부끄럽습니다.
벗은 자가 밤이 되면 활동을 할 수가 있고 부끄러움이 적지만 날이 밝아 올수록 그에게는 더 부자유하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택자의 그 불법의 생활을, 불신의 생활을 하던 자가 지옥에 가면 고통은 같이 고통 당하지마는 거기서 부끄러울 거야 없지만, 하늘나라 가기 때문에 고통은 없지마는 그 부끄러움이 고통 못지 않은 부끄러움입니다.
내가 며칠 전에 어떤 사람 만나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나는 모욕 받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려워서 죽었으면 죽었지 모욕은 받지를 못하겠다. 수치는 나는 당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수치를 죽는 것보다 크게 여깁니다.
그러합니다. 사람이 사람 같은 사람은 생명보다 자기의 자존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이렇게 택자들이 불신의 생활하던 것이 지옥에 갈래야 갈 수 없고 하늘나라에 가기 때문에 영원히 수치입니다. 그러기에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인자도 자기가 가라니까 왔고 '나는 아버지로 인하여 살리라'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복종으로 사셨는데 이 복종으로 죽으시기 전에 '내가 올 것이지마는 그날을 아는 것은 당신이 아버지가 이렇게 알라 해야 내가 알고 말해라 해야 말하지 거기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나는 거기 대해서는 상관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서 하늘나라는 얼마나 복종의 나라인, 이 복종의 나라라는 것을 선두에 발표하시고, 노아 시대의 백성은, 복종의 나라 복종의 법칙을 가지고 인간을 구출하고 복종의 사람을 행위를 만들기 위해서 만물을 예정하셨고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이 하나님 구원을 바라보는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복종으로서만 안보 되고 복종으로서만 구원받고 복종으로서만 전진, 향상, 성장, 점점 좋아지는 것이 있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복종의 정반대로 저희들은 제 각각 제 생각, 제 마음, 제 욕심, 자율, 주관, 주권대로 움직이기를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 움직이다가 멸망했다.
이와 같이 인자가 재림할 신약교회의 마지막 이 우주의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아주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자지 말아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는 낮에 속한 자는 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밤에 속한 자들이 취하고 잔다 했습니다. 깨어 있으라 자지 말라 말입니다.
자는 것이 어떤 것인 자는 것입니까? 자는 것은 다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산 자라도 자면 생명은 있지마는 행동은 죽은 자와 같은 것이 자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자는 생명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행동이 죽은 자와 달리 그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이 깨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자는 기독자들이 자기로 돌아간 그것이 한말로 말하면 자는 것입니다. 택함을 입고 중생을 받았지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명령 복종에 문서 계약과 영감 계약에 준한 하나님에게 복종 생활,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는 이것이 깨어 있는 것이요, 하나님으로 중생 했지마는, 진리로 중생 했지마는 자는 것은 중생은 됐지마는 자기의 마음의 작용이나, (또 저 녹음기 믿고 또 조네요 그 녹음기 그거 없애 버리소. 그거 자기 죽습니다. 녹음기 암만 가서 들어도 그 녹음기가 영감은 못 줍니다. 영감 못 주면 자기를 정죄하는 율법밖에 더 되니까? 녹음을 말아요 금하지는 않습니다.
마는 녹음을 하지 마십시오. 지혜 있는 사람은 녹음을 안합니다.) 자는 이것을,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주관으로 사는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으로 거듭났지마는 하나님과 진리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로 움직이는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 생활이 되겠습니까? 자기로 움직이는 자, 자기 사욕으로 움직이는 자, 그렇지 않으면 어떤 피조물로 움직이는 자, 이는 분명히 의식주로 움직였고 가정이라는 것으로 움직였지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하나님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문서 계약으로 움직이지를 않았고 하나님이신 영감으로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들은 자는 생활했습니다. 깨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
'인자의 임함도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 그때 깨닫지 못하고 주관대로 자율대로 사욕대로 제대로 제대로가 아니면 어떤 물질이나 문화나 어떤 인간 어떤 권세 그것대로 피동 했지, 이 복종의 나라를, 복종의 구원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구별된 사람들이 복종의 나라요 복종의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노아 때에 능동으로만 살다가 멸망한 거와 같이 인자의 재림 때도 이렇게 피동으로만 보장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이 피조물인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이걸 깨닫지 못하고 제가 능동으로 살다가 노아 홍수에 전멸된 거와 같이 능동으로 살다가 예수님 재림 때 다 자기의 생활 자기의 생애가, 모든 것이, 모든 건설이 홍수에 다 매몰 전몰된 거와 같이 마지막 한 때에 피동하지 못한 이것 가지고 전멸되고 만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구원은 피동의 나라요 피동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은 유일하신 완전자에게 영원히 복종만으로만 움직이는 존재를 만들어, 완전자는 한 분이시지만 이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완전의 것이 되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이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 깨닫지 못했다' 무엇을 깨닫지 못했느냐? 복종의 나라 복종의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능동으로, 주관으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대로, 자기가 이것이 귀하다 하면 이것저것이 귀하다 하면 저거 이렇게 하다가 멸망 받는 것이 노아 때와 같다 말씀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후에 그 다음을 계속합니다. 오전에 나오고 오후에 나오지 않는 오전 교인들 멸망 받지 말고 오후에 다 나와서 배우십시오. 오늘인지 내일인지 주의 재림은 모릅니다. 노아 홍수 때에 건설해 놓은 문화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권세와 물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조석으로 달콤한 그 가정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복종 없는 가정, 복종 없는 나라, 복종 없는 단체, 복종 없는 대인, 복종 없는 권세, 이 유일하신 이분에게 복종하는 이것이 없는 것은 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전멸되고야 마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