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1980. 5. 25. 주후 

 

본문: 마태복음 24장 32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2절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인데 문 앞에 이르렀다 벌써 재림이 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 재림하시고 그 다음에 지상 재림하십니다. 공중에  재림하셨을 때에 땅에는 환란이 시작됩니다. 환란이 시작되면 이 환난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모든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을 지키므로 박해 중에  거의가 다 순교를 합니다. 목베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죽는 것만 보고 부활한 것은 보지 못하는데 죽어 즉시 부활해 가지고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잠깐 동안 지나가면 택한 사람들은 전부  변화를 받아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땅에는 불택자들만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면 택자들이 다 공중에세 주를 영접하고 난 다음에 땅에 남은 불택자들이  마지막으로 전멸이 됩니다. 그때 약간 번식 인종이 시험물로 조금 남아있고 아주  지금 이 우주의 자연 제도나 또 인간이 건설해 놓은 지구상의 모든 제도 이런  것들은 완전히 없어지고 바꾸어지게 됩니다.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차차 부인했던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거든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하지를 아니하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고 일부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저희 구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차차 생겨지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하고 유태교 옛날 믿던 도를 그대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 신약 교회에서 구약에 속한 이스라엘을 마음에 측은히여겨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으면 그의 모든 생활을 보장해주고  또 자녀 교육을 보장해주고 그렇게 까지 결의를 해서 후대를 해도  유대인들중에는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유대교와 예수교는 많은 대립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러기 때문에 회교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 섰던 그 성전을 다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회교 성당이  그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도 시비 중에 있는데 예수님의 바로 재림하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가지가 연하고" 여름이 오니까 생기를 내서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가  나면 그들이 이제까지의 생각하던 메시야관은 틀렸고 십자가에 저희들이 못박아  죽인 이분이 메시야라 하는 것을 차차차차 돌이켜 알게되고 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서서히 생겨나게 되고 또 유대인들이 온 세계에 다 몰려서 예수님을  바로 믿고 의지하는 이 신앙에 입각하지 않을 없는 몰리는 형편이 되서 그들이  신앙 사상을 바꾸고 또 메시야관을 바꾸고 저들이 의지하고 소망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소망하는 순종하는 일이 되거든 바로  예수님께서 공중 재림하신 줄 알아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지금은 많이 예수님을 저희 구주라고 믿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을 자기 메시야라고 믿고  이제까지의 아직도 메시야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런 사상이 차차  없어져가고 돌이켜가는 단계에 있는데 유대 나라가 이스라엘이 가속도로  이방에게 큰 고통을 당하는 집중 포위 사격을 당하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을 전적  의지하고 이제까지 생각했던 메시야관을 돌이켜서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잎사귀를 내면"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싹수가 나면  차차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는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 메시야관이  돌이켜지고 하나님을 바로 의지하고 바라보는 그런 일들이 되거든 벌써 예수님의  재림이 공중 재림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공중 재림이 왔으면 그때는 땅에 어떤  일이 있느냐? 땅에는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방 통일이 되가지고서 교회에  여러 가지로 박해가 있어서 진실되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땅위에 발붙일 곳이  없을만치 고되게 됩니다. 그럴때에 진실한 사람들은 고난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서 자기의 일생 신앙 생애가 헛되지 아니하고 다 좋은 결과를 맺고 또  자기라는 그 인품도 좋은 결과를 맺지마는 진실이 없는 사람들은 다 실패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왜 하는고 하니? 성경에 말씀해 놓은 것은 이런 일이 있을 때에  그때에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이 벌써 공중재림이 되었고 땅에는 믿는  사람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고 즉시 부활해가지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이 택자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 조력을 하고 이용을 당하던  이방인들은 그때에 마지막으로 곡과 마곡이라는 전쟁으로 다 전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럴때는 땅에 남은 때가 없습니다. 없는데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또 땅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있다고 생각해 가지고 좀 더 살기 위해서  신앙을 배반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문앞에 이른줄  알라 하는 징조를 제일 마지막 징조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 큰 미혹이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해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살아 남아 있는 자들도 홀연히 변화한다 하는 그 홀연히란 말은 곧  순식간이라는 그런 뜻을 주로 가지고 있는 그 뜻인데 우리 나라말로는  홀연히라는 말이 좀 애매합니다. 홀연히 하니까 그 흐미하게 그런 뜻인데 그게  아니고 그 홀연히 갑자기 아주 그 신속히 변화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모두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부활에 참여했고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에녹과 엘리야 이 두 사람은 계시 이용으로  하나님께서 쓰셨기 때문에 그는 계시 기관으로 쓰신 것이지 에녹과 엘리야와  같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에 전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전재로하고 하는 말씀인데 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마지막 최고도의 연단입니다. 최고도의 연단이 죽음입니다.

죽음에서 하나님과 진리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죽을 때에 자기의 전부가 신경이나  사상이나 정신이나 근육이나 세포나 이 모든 것이 다 죽음에 대해서 발악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그런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지성하신 하나님과 지공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마지막 세상을 떠난 이것이 최종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목숨이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지마는 그 죽음 중에도 천층만층이 될만치  그 죽음을 단마음으로 하는 것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죽기는 죽으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자기 생명을 죽기는 죽지마는 원하는 마음이  아니고 불만 불평으로 부득이함으로 죽는 죽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도 바칠 때 어떻게 바치느냐 주님께서 십자가  못박히실 때에 죽음이 두려워서 내가 이 잔을 마시지 않고는 떠나지 않겠습니까  하시는 그것은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지성과 지공에 조금도  정죄되지 않는 순전히 바쳐서 원하는 마음으로 제물이 되어지는 그것이 어려워서  말씀하셨고 그것은 지극히 큰 능력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서 그 일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음을 통과해 가지고 부활에 참여하지 죽음없이 부활에  참여한다는 그런 미혹의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죽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래서 어쩌든지 안죽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남아있다가 그 징그럽고 무서운 일대 대  시험이 되고 실험이 되는 그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그런 것을 욕망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죽음이라는 그것이 벌써 자기 평소에서 다 끝내고 다만  낡아질 수 있는 제한 받은 이 육을 벗고 무제한의 영원한 몸으로 변화함을 받기  위해서 이 몸을 하나님께 맡겨두고 이방에서 저방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모든  전투를 끝내고 주의 나라로 옮겨져가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인정치 못하고  아직까지도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종되어 있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더욱이 죽음이라는 연단이 필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에 주를 배반하고 살아봤자 살 시간이 없습니다. 택한 자들은 다 먼저  올라갑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먼저 곡식은 다 거두워서 천사가 와가지고  곡식을 다 거두어서 다 추수하고 남은 그 포도원은 포도즙 짜는 틀에다 넣고  밟으니까 그 피가 일백육십 스다디온이 흐른다 하는 그 말은 마지막으로  전쟁으로 불택자들은 다 전멸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택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과 진리 자기의 신앙 인격 이것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  마지막 승리에 결실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저희가 배반을 하면 그 다음에 배반한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또 닥칩니다.

또 닥쳐서 기어코라도 주의 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가는 일찍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런 연단이 와야 연단되지 않는데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억지로 강제로 세상과 자기의 모든 사욕과 성욕 모든 것을  부인하고 주를 따라서 가는 그런 일이 마지막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이  말씀은 이 천지는 지금 제도와 조직과 질서, 모든 기존 시설 이런 것들이 다  변동되지마는 주님의 말씀, 곧 내 말은 아버지의 말이라고 했는데 주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더불어 선포해 놓은 이 문서 계약, 영감 계약 이 계약은  하나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기 보증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계약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습니다. "36절에 그러나  그날과 그시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행동이 있기전에 그 뜻이 있고 뜻에 작정이 있고 뜻이 있기전에  원함이 있고 원함이 있기 전에 생각이 있고 생각이 있기 전에 아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자기의 행동이 제일 첫째입니다. 그게 제일 시발점입니다.

그게 발단 점인데 그러면 알아야 거기에 대해서 원하고 원해야 작정을 하고  작정을 해야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날과 그시는 천사도 인자도 모른다 그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니까 거기  가장 당사자요 당신에게 직결된 일이지마는 하나님이 알게 하는 것 알고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않는 것 알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따라서 원하고  하나님이 뜻하게 하는 것 따라서 뜻하고 하나님이 움직여라 하시는 그대로  움직여서 이는 순전히 복종하는 것 천사도 이 완전자이신 유일하신 한분이신 이  하나님, 이 삼위일체로 말할 때는 제일 처음이 성부이기 때문에 이 성부에게  따라서 움직이는 이 움직임 뿐이지 독단이 거기서 움직이는 그런 일이 없는 것을  여기서 명시해 놓습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영원히 변동 가감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이 계약에 준해서 예수님도 천사도 살지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더불어  계약한 그 계약에 준해서 예수님도 아버지로 더불어 약속한 그 영감과 진리에  따라서 모든 택한 자들도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과 이 계약에 준해서 거기 따라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전 작정이요, 제도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일을 모른다는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 속 뜻은 재림을 시일을 모른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여기에  주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재림하시든지 벌써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시를 모른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재림 시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그것을 주로 표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만 그것을 들어서 말하시면서 여기  주요 뜻은 움직이는 것보다도 뜻을 작정한, 뜻을 세운 것이 그 앞에 있고 뜻을  세우는 것보다도 원하는 것이 앞에 있고 원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앞에 있어  아는 것이 제일 발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재림하실 거기에 당신에게 직접 관련된 일이지만 거기 대해서도  당신 독단이 알려고 하는 거게 원하는 뜻하는 행동하는 그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이 하늘나라인 것을 가르쳐 말합니다. 천사도 그러하고 주님도 그러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  하나로 모든 것이 되어져서 이 복종으로 영생할 것인 것을 그 나라인 것을 여기  밝혀서 여기 복종성에 절대성을 나타내서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신인양성일위이신 신성을 가지신 성자이시지만 성자도 아버지에게  분담된 아버지가 하시는 것은 거기에 복종해서 알려고 할 때에 알고 들으라 할  때 듣고 원하라 할 때 원하고 뜻하라 할 때 뜻하고 행하라 할 때 행하지 아버지  없이 능동적인 행동이 없는 것을 여기 나타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그 시일을 모르는 것을 중점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여기는 복종의 천국이요, 복종의 천사요, 복종의 인자라. 행동만 복종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지식하는 것, 아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알게 하실 때 알고  알게 하신 그대로 알지 자기 단독이 이렇다 저렇다 알고 이렇다 저렇다 뜻을  하고 원하고 또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여기  증거합니다. 예수님도 이러하시고 천사도 이러한데 이 나라요, 이 목적이요 이  구원인 이 절대성 있는 이 변할 수 없는 복종 세계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하는 말입니다.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주석을  찾아봐요. 주석을 찾아보고 이 말 들어보면 새로 알게 됩니다.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나님의 이 제도와 조직과 역사와 목적과 모든  움직이는 방편은 전부가 복종으로 또 하나님 한분만이 능동으로 완전자 그분에게  복종으로 전부가 이루어지는데 그 다음에 37절에 "노아의 때와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때와같이 예수님 재림하실 때도 그때와 같으리라."  무엇이 같다 말입니까?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노아는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방주를  만들었고 또 방주에 들어가라 하니까 방주에 들어가고 하나님으로 피동되고  하나님께 복종으로만 지금하고 있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은 복종은 하나 없이  제가 전부 사람마다 능동적으로 원하는 것도 제가 홀로 제 마음대로 택하고  뜻하는 것도 제대로 택하고 행동하는 것도 제대로 택하고 지식도 제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시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홍수가 나서 저를 다  멸하실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무엇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 한분만이  능동자시오. 그분만이 발원자시오. 모든 것은 그로 인하여 그분에게 피동되어  그를 따라 그에게 복종하는 이 복종으로 사는 것만 모인 것이 하늘나라요  이것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셔서 만드셔서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것은 전멸이요, 복종하는 것만 다 영생하도록 복종이  영생이 되도록 요렇게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이 하나님의 절대자이신 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목적도 모르고 하나님의 경영도 모르고 하나님의 방편도 모르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안보도 모르고 하나님의 구원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도 모르고 평강도 모르고 전부 이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같으리라."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와같으리라. 그래놓고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제 여기서 잘못된 오해가 풀어질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 하는 이런 것은 모든 세상 활동 생활, 세상  생활을 다 총칭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여인이 매를 간다는 것은 복음 운동을 가르쳐서 말씀한 것입니다. 열처녀  비유와 같이 성도를 가리켜서 하나님과 짝할 하나님의 배우자 하나님의  상대자라는 것을 인간의 말로 표현해서 이랬는데, 그래서 여황으로 앉은 자라  그렇게 요한계시록 18장에 말씀했습니다. 매를 간다 말은 복음 운동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복음 운동은 수많은 인종이 다 복음 안에 들어오면 매로 가는  것같이 전부 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매에 갈려서 깨지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이것이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양식이란 말을 배운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지는데 이 세상의 모든 일반 세상 생활이나 복음 운동의 생활이나  이 모든 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데 하나는 멸망을 받고 하나는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구원 얻는 것을 가리켜서 말했고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은 멸망받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다같이 장가가지 말고 시집가지 말라는 그것으로 처음에는 오해를  가지기 쉬울 것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 장가가지 말라는 것, 시집가지 말라는  것, 가정을 돌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같이 가정 생활을 해도 한 가정은  멸망받고 한 가정은 구원받고 한 가정에 다같이 살지만 한 사람은 멸망받고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같이 목사노릇하고 다같이 장로노릇하고 집사노릇하고 다같이  신자노릇, 권찰노릇, 반사노릇하지만 하나는 구원얻고 하나는 멸망받는 것을  가리켜서 여기, 한 밭에 둘이 일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여인이 매를 가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밝혀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자기라는 사람을 건설하는 것, 인격이나 지능이나 모든 사람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사람을 건설하는 것과 자기 행위를 건설하는 것과 자기의  명예나 영광이나 존귀나 권세나 소유나 이 모든 것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 행위와 자기 소유를 자기의 처소를 건설하는데 그 건설한 것이 어떤 것은  다 하늘나라에 들려올라가서 영생도 하게 되고 어떤 것은 다 들여올라 가지  못하고 포기돼서 버림받아 멸망받게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다같이 목사노릇했지만 한 목사노릇한 것은 하늘나라에 그대로 다 들려올라  갔고 한 목사노릇한 것은 전부 땅에서 제거돼서 멸망받게 된다 다같은 한  목사로서도 어느 때에 목회한 것은 어떤 말한 것은 어떤 일한 것은 어느 교회  시무할 때는 무슨 일한 것은 들려올라갔고 무슨 일한 것은 멸망받는다는 것을 한  사람에게도 구원되는 것과 멸망되는 것이 있고 또 한 직책에서도 그러하고 한  가정에서도 그러하고 또 한 시대에서도 그러하고 한 장소에서도 그러하고 다같은  사회에 있는 가정이지만 기독자의 가정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을 여기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은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것은 버려둠을 당하겠습니까? 깨닫지  못한 것, 잘못 깨달은 것, 잘못 행한 것, 이런 것은 다 버려둠을 당하고 바로  깨닫고 바로 원하고 바로 작정하고 바로 행동한 그것은 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깨닫고 바로 깨닫지 못한 거, 모두다 바로 깨닫지 못하고  멸망을 받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버려둠을 당한 것이 어떤 것이며 데려감을 당한 것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들 어떤 것이라 생각합니까? 내가 말할 것이니까 본문에 성경을 보는대로  그러면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깨달은 것과  깨닫지 못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깨닫지 못한 것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고  깨달은 것은 데려감을 당합니다.

 그러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 이 모든 것은 한분이신, 완전자 한분에게 모든 것이  피동하는 복종하는 이 나라를 건설하려고 이것만 영생으로 무궁세계에 옮겨가고  이를 거역하고 제대로 제가 왕이 되고 제가 주권자가 되고 제가 능동자가  되어가지고 하는 그런 것들은 낱낱이 다 하나님께서 버려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다 거두고 하나님의 창조의 것이 없는 세계,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세계, 제 단독이 살게 하는 세계, 이러니까 다 내어놓으니까  고통하는 저만 남습니다.

 그러기에 버림을 당하고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바로 깨달은 것이니 곧 하나님께  복종으로 일한 자 있고 복종으로 장가가고 시집간 자 있고 복종으로 먹고 마시는  자 있고 이 하나님께 복종을 떠나서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것은 다 멸망인데  노아 시대에 복종의 이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안보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자기대로 다 날뛰다가 노아 홍수에 전멸을 당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 재림 때에도 인간들이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 사실은 천지는 변동되도 변동되지 않는 이 절대성 있는 하나님의 두 가지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계약이요  하나님의 인도인데 이 면할 수 없는 항거할 수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절대성있는 이 사실을 제가 깨닫지 못하고 여기 반대해서 여기에 어겨서 제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 것이 제 욕심, 제 생각, 제 뜻, 제 지식, 제 주관,  제 해석 되는대로 이렇게 해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같이 세상에서 살았고 같이 한  가정에서 살았고 같이 한 사회에서 다 같은 가정으로 살았고 다같은  신자노릇했고 다같은 성직자노릇을 했지만 한 사람의 건설인 제 인격 건설도 다  절단나고 다만 기본구원 얻은 것만 가지고 가고 행위도 소유도 마련도 기반도  무대도 자기의 기능도 다 불탈 것,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만 되어진 이 기능, 복종의 기능 이것이 기능인데 이거  아니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나온 마귀 그놈이 내어놓은 마귀의 지식으로  가득차가지고 이것이 천추만대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땅위에 있는 것가지고  이렇게 이것이 언제든지 그대로 영원할 것으로 생각을 하고서 하는 그런 것들을  마지막에 다 멸하기를 노아 때에 하나님께 복종한 여덟 식구외의 것은 모두다  전멸되는 거와같이 예수님이 오셔서도 다 이와같이 되는데 일차적인 노아의 때는  이차적인 마지막 전멸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거울로 주어서 그때에 수많은  영웅이 호걸이 명철이 절사가 학자가 예술가가 과학자가 재벌가가 사업가가  정치가가 모조리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외에는 다 홍수밑에 전멸되는 거와같이  예수님 재림 때도 이럴 터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으면서 하는 이 말씀을 보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의식주도 상관 하지 안하고 가정을 돌보지 안하는, 가정을  부인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겠는데 그밑에 해석을 해놨습니다. 멸망하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만 위주로 해서 하나님과의 관련성은  돌보지 안하고 물질 위주, 가정 위주, 자기 본위 조물주 절대자 주권자 이분에게  모든 것이 달렸는데 이분은 무시하고 아무 힘없는 것이 제가 주동이 돼가지고  하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42절에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께서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네가 이제까지 건설하는 그 모든 것에 바로 결말을 지워라.

깨어라. 네가 이제까지 어디까지 걸어왔고 어떻게 지금 공작하고 어떻게 재를  저질러놓고 어떻게 하나님을 어기고 거역하고 반역하고 패역을 부려서 네가 왕이  되기를 이면으로도 네가 왕, 저면으로도 네가 왕, 모든 면으로 네가 왕이  되어가지고 오늘까지 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다 자는 자의 생활이라. 깨어라.

어서 하나님께 복종으로 돌아서라. 깨어라. 복종 주의로 돌아서라. 복종 위주로  돌아서라.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너희들도 이 사상을  가지고 이대로 살아라. 빌립보 2장에 말씀하신 거와같이,  "깨어라 너희 주가 어느 때에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복종으로  돌아서라. 이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 잘 들으십시오. 깨어있는 것인데  깨어있는 자는 속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의 움직임을 따라서 활동하는 자가  깨어있는 자입니다. 속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을 따라 움직이는 활동하는 자가  깨어 있는 자요. 속에 생명있으니까 그 속에 생명이 역사하는대로 말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이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자는 자는 어떤 자냐? 자는 자와 송장이 다릅니다. 송장은 속에 생명이 없어서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이것이 생명  없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송장이라고 말하고 자는 자는 송장과 달리  속에 생명이 있지만 생명 역사대로 듣지 아니하고 보지 아니하고 생각지  아니하고 비판하지 아니하고 활동하지 아니하고 움직이지 아니하고 송장과 같이  생명은 있지만 턱 늘어져가지고 들을 줄도 모르고 생각할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르고 계획도 없고 소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자는 자입니다.

 우리는 살아나기를 진리로 살아났고 성령으로 살아났습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이러기에 우리의 생명은 진리가 우리의 생명이요,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생명인데 우리가 영감대로 진리대로, 진리로 진리의  힘으로 움직이고 영감의 힘으로 움직여. 영감의 작용으로 진리의 작용으로 영감  진리대로 움직이는 그것이 산 자의 깬 행동이요, 자는 것은 영감과 진리로  살아나기는 살아났지만 영감과 진리의 활동은 전혀 없는 것을 가리켜서 자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으라 그말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야 네가 진리로  움직이고 영감으로 움직이라. 그러면 네가 어디까지 가고 어떤 것을 해놨든지  이제 순 마귀로써 하나님을 거역한 무신론으로 사업을 해놨고 모든  계명어김으로써 지위 권세 명예를 해놨고 너를 만들고 모든 것을 건설했고, 너도  이제 여기서 깨어라 지금 네 현실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돌아서라.

복종하는 자로 돌아서서 돌아섰을 때에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고  없어지는 것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없어질지라도 네 소유와 몸과 생명 모든 것이  없어질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 되고 복종함으로 없어졌으면 명예와 생명과  친척과 재물을 원수가 취한들 상관이 무어뇨 내 주께 있으리로다. 이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때문에 없어졌으면 복종으로 인하여 없어진 그것이 영생을 얻은  것이다. 그것이 내 소유가 살아나는 것이요. 내 소유나 지위나 권세나 살아나는  것이요. 네가 복종으로 인하여 네 생명이 끝났으면 네 생명은 영생으로 다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이제 깨어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주인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도적은 예수님이 도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은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빼앗기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니" 하는 그말은  주님의 날이 인간들의 모든 소유를 다 빼앗으려 온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면 도적 맞지 않도록 깨어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와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하나님께  복종으로 된 자유, 복종으로 된 생애, 복종으로 된 권위, 복종으로된 지위,  복종으로 된 소유, 복종으로 된 인격, 복종으로 된 기능, 복종으로 된 것은  원수가 해하지 못하지만 복종으로 되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완전히 다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다른데는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에는 "주의 날이 그물같이 임하리니"  말했습니다. 그물이 임하면 자유하던 새가, 자유하던 고기가 그물속에 든 것은  그물만 들면 다 그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나 생명이나 전부가 다 박탈당하는 것  아닙니까? 이와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예수님의 재림에 모든 심판이  이르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께 복종으로 된 것만 남겨놓고 하나님께  복종으로 된 것이 아닌 것은 전부 철수 철거를 하는 이날에 모든 사람들이  자유하던 것을 다 빼앗겨서 철수 당하게 박탈당하게 되는 것을 주의 날이  그물같이 임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기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은 전부 다 뺏겼다 그말입니다.

뺏겼는데 도적이 올 줄 알았으면 깨어있어 뺏기지 않게 한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복종으로 되지 안한 것은 전부 다 박탈되고 완전히 자기와는 상관이 없이  자기와는 하나도 상관없이 되어지는 이 사실을 알았으면 깨어있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 복종으로 생애해서, 깨어서, 복종 생활해서 그날에 도적맞지 않게  하리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종으로 되지 아니한 것은 다 이것은  그날로써 끝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44절에 "이러므로 이렇기 때문에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 모든 것이 철수되는 그 때가 오리라. 깨어서 예비해라. 복종으로 되지  안한 것은 다 그날에 하나님이 도로 찾아가신다. 다만 너만 남겨놓고  찾아가신다. 너는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은 다 찾아가신다. 물도  찾아가시고 공기도 찾아가시고 기후도 찾아가시고 땅도 찾아가시고 모든  하나님이 주신 그 기능도 다 찾아가시고 다 찾아가십니다. 이러니까 그날에는,  오늘에는 하나님 한분의 명령과 계약, 약속, 뜻 이것이 와서 일하는데 그날에는  하나님의 계약하신대로 하나님이 친히 오셔가지고 일하시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심판이라. 예수님의 재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에는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자 되게 하시려고 오셨고 재림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니 그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 안할수 없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당신이 바라보는  그자에게 마련하여 안 줄 수 없다 그말이오. 그의 바라보는대로 하나님이  마련하게 되고 의지하니 하나님이 보호하지 안할 수 없고 순종하니 지도하지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게 대해서 필요한 것을 당신이 마련하게 만드는 것이오. 모든 원수가  대적이 많은 데에서 나를 안보하시고 나를 책임지고 보호하시도록 만드는  것이오. 내가 순종하는 것은 그분이 나를 떠날 수가 없고 나를 낱낱이 지도하고  지시해야 되는 이 지도를 하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대로 이제 다하니까  인간이 심히 미약한 것으로 모자라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보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말했습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복종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러니까 자, 다른 사람이 말이오. 그게 무지하지만 우리 사람이 악해도 그게  꼭 나만 바라보고 삽니다. 나외에는 없고 나만 바라고 내가 의례히 잘해주지  하고 바라고 있으니 참 답답하다 말이오. 자 그렇게 바라고 있으니 내가 그에게  가서 그가 원하는 것, 그가 필요한 것을 마련 안하고 어떻게 되겠소. 우리가  악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어린 자식에게는 책임이 무겁고 장성한 자에게는 책임이  차차 벗어집니다. 벗어지는 것은 이제 제가 할 수 있고 제가 전적 바라지  않으니까 바라고 있으면 참 기가 막힌다 그말이오. 바라고 있으면 마련 안할  수가 없소. 죽는 것 사는 것 아무것도 모르고 전적 의지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안보를 책임 안 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시키는대로만 하려고 딱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에게 바른 지도를 안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말이오. 내 일을 하나님께 시키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말은 믿는 것이  하나님께 일을 시키는 것이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생각지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인자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가진 자유, 복종으로 말미암아 마련된 자유, 다니엘은  복종으로만 마련된 지위요, 권세입니다. 복종으로만 마련된 영광입니다.

복종으로 마련된 생명, 복종으로 마련된 인격, 복종으로 마련된 기능, 복종으로  마련된 지위, 복종으로 마련된 살림살이, 복종으로 마련된 모든 평강, 복종으로  마련된 것은 그날에 창수가 나고 바람부니까 다른 것은 다 떠내려가는 데  반석위에 있는 집은 떠내려가지 않고 그 한채만 남았으니까 영광이요 존귀요,  가치있지, 뚜렷이 들어나지 모래 위에 있는 것은 다 떠내려가고 아무것도 없지  복종으로 된 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노아가 그날부터 영광으로 존귀해진  것처럼, 온세계를 차지한 것처럼 영광되지만 복종을 떠나서 어떤 인간이나  자기나 이렇게 능동으로 왕이 되어가지고 움직인 모든 것은 그날 다 철거 당하고  빼앗겨지는 것이니까 그날이 어느 시간인지 알지 못하니 네가 뒤로 미루지 말고  어서 모든 것을 복종으로 돌이키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돌이켜서 이렇게 할 때에 네게  가진 것이 이렇게 함으로 없어진 것은 그것은 영생이 됐고 없어짐으로 하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복종 때문에 없어졌으니까 하나님 때문에 없어졌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져야 될 것 아니겠소? 이러기에 자기에게 있는 잘못된 것을 살리고  구출하는 것이 이 방법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복종으로 없어졌으면  그것은 단번에 구원이 다 된 것이고 복종으로 없어지지 안하고 남아있으면  그것은 앞으로 시험거리니까 남아있는 것은 언제가 복종으로 끝을 맺어야 그것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만일 복종으로 사자구덩이에서 죽었으면 그는  완성이지만 복종으로 그때는 구원얻었지만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직까지 미결입니다. 복종으로 끝을 마치기 전에는 그것이 나중에  복중했던 것이 뒤에 거역할 자가 될는지 모르기 때문에 미결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어느 때에 주께서 오실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라" 하는  그말은 이 모든 것이 철거되고 다 도난당하는 다 뺏겨지는 이것이 저로서는  제것인 줄 알기 때문에 뺏겨지는 것이오. 이렇지만 주인이 도로 찾는 것입니다.

조물주가 도로 찾는 것입니다. 안내 줄 세력이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느  시간이 이 시간인지 모르니 이 시간이 닥치기 전에 빨리 돌아서서 이제 모든  죽은 것을 살리고 뺏길 것을 영원히 내것을 삼고 죽을 것을 영생으로 바꿔라.

얼마나 큰 약속이오 구원인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 45절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맡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은 시기 시기마다 다른 사람에게 믿음의 유익을 의를 행하는 데에  유익을 그들의 새사람을 장성하 새사람을 힘있 의의 행위를 힘있게 돕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면 다 됩니다.

 자기가 주님께 복종하는, 자기가 지식하는, 아는 것도 주님이 알리는대로 알고  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작정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 하나로만 하면 그것이 자기가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자기에게 관련된 자에게는 다 양식주는 것이 다 됩니다. 그들에게 다 양식주는  것이 되고 힘을 주는 것이 되고 구원하는 것이 되고 은혜를 베푼 것이 됩니다.

우리는 복종하는 일하고 또 양식먹이는 일하고 이중 삼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을, 복종하는 생각을, 복종하는 뜻을, 복종하는 견해를,  복종하는 말을, 복종하는 행위를, 모든 것이 복종으로 주로 인하여 움직이는  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이 복종의 언행심사면 그것이 제 삼자에게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자에게 복종의 언행심사는 완전의 언행심사가 되어 접촉하는 자에게  삶이 되어지는 것이니 요 일로만 살고 요 일이 숙달된 요것으로만 영생할  그자에게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겨가지고 하나님께 복종으로써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것에게 충만케 해주는 이것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는 그에게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필연성의 것입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이 악한 종이라는 악은 자기 중심, 피조물 중심이라  말입니다. 이 악이라는 이 악의 정의를 해석한 것이 이제까지 안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보십시오. 악의 정의는, 이 악은 하나님외에 피조물 중심이 다  악인 것입니다. 이거 예사롭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예사로운 말이 아니오. 악의  정의가 피조물 중심이라는 정의가 아직까지 안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듣고  들으니 예사롭게 듣고 넘기지만 이 세상 간판, 내가 박사가 아니니까  어리석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만일 그 악한 종이, 하나님께 복종으로 살아야 할  주의 구속을 받은 자가 자기 중심으로 살아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뺏긴다 하는 것을 알지만 '설마 오늘이야  되겠나' 이래가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바꿔놓을 줄 모르고 깨지 못하고 자는  잠중에 다 떠나버립니다. 깨지못하고 잠든 채로 다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더디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동무들을 때리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 피조물 중심으로 사는 그것이 형제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양식을 먹이는 것이요. 복종외에 제가 왕이 돼가지고  제가 주장이 돼가지고 저도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만든  것인데 제가 뭐라고 제가 왕이 돼가지고 제 마음대로 제 중심대로 하는 그것이  악한 자요, 그것이 이웃을 때리는 자요, 이웃을 상하는 자라 말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가 복종에,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이구나 저 사람의 말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말이로구나 저  사람의 뜻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뜻이로구나 저 사람의 언행심사는 하나님이  움직이는대로 저 사람의 언행심사가 나왔구나.' 하는 그것이 제삼자에게  양식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어떤 사람을 따라 움직인다. 돈을 따라 움직인다. 권세 따라 움직인다. 자기대로  움직인다 하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을 상해하는 것입니다. 해치는 것입니다.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이거는 음행의 포도주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이 세상 주의, 세상 교훈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 교훈이 있고 이 약속이  있고 이 말씀이 있고 이 계약이 있는데 이거는 무시하고 인간들의 말만 크게  여겨서 여기 도취되어가지고 날뛰는 것이 술취한 자라 말입니다. 이것이  정신없는 자라.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사람은 그러다가 개인 끝을 마치든지 예수님의 재림을  만나든지 하면 그때는 소용없소. 예수님이 재림하고 난다음에 그때가서 등불  들라고 기름 구하려고 해도 안돼. 당황하고 날뛰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기독자의  구원은 전부가 예비적입니다. 그시 그시로 해서 되는 그런 기독자의 구원은 영웅  구원이 아닙니다. 영웅성을 가지지 안했습니다. 기독자의 구원은 영웅성이  아니오 모순성이 아닙니다. 모험으로 되는 것도 아니오. 모순 모험 영웅 그런  걸로 안됩니다. 아주 철두철미한 예비적입니다.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엄히 때린다는 말은  자기의 생애를 전부 박탈시킵니다. 그 인격이 세계에서 세계만큼 클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종으로만 되는 인격이 아니면 바짝 부숴버립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알아 줄 사람도 없고 세계도 없고 다 그것이 헛된 줄 알았는데 무슨  명예가 있으며 무슨 영광이 있으며 무슨 권위가 있을 것입니까? 엄히 때린다는  것은 복종으로 마련되지 않는 것은 다 박살되고 그때로서 절단이 나서  끝마쳐지는 것입니다.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알맹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됐으면 진리와 성령으로 살 일이지 영으로 살지 안하고 껍데기 마음과  고깃덩어리로 살고 창조주로 살아야 될 자가 창조주로 살지 않고 피조물로 살고  하나님의 뜻인 진리로 살아야 될 자가 인간의 사상으로 살고 이래서 "외식하는  자의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운다는 말은  후회되지. 이를 간다는 말은 분하지. 누구에게? 자기 아닌 옛사람에게 분하지.

이러니까 그걸 죽여 처분할 때에 기뻐지.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니 이제는 분한  것은 다 없지만 부끄러움뿐입니다. 불가운데서 구원얻은 거와같이 부끄러움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된 현실입니다. 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하나도 없어지지 않는 절대성의 이 권위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회개합시다. 교만하지 말고 어리석지 말고 교만해서 제 생각대로 나는 예수를  믿어도 요만한 조절해서 믿겠다. 조만한 조절해서 믿겠다. 전부 제 주관만  가지고 제 주장만 가지고 제 자율 제 사욕만 가지고 하나님은 높일 줄 모르고  자존심만 가지고 안됩니다.

 내가 얼마전에 어떤 사람에게 만나가지고 말했어. 자기는 자존심 그놈을 바짝  깨어야 구원되지 그것 깨기 전에는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에게 말했어. 그  본인 여기와서 앉았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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