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5:42
장로의 할 일
1982. 6. 4. 금새벽
본문:베드로전서 5장 1절~4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여게 장로라고 표현한 것은 교회 감독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장로교라는 교파도 여기에 근거해 가지고 장로교라는 이름을 정하게 됐고, 또 감리교도 감독이라는 성구를 근거해 가지고 감리교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성결교는 거룩이라는 성구를 근거해 가지고 발족한 것입니다. 그건 모두 폐단들이 있은 지 후에 이름들을 간 것입니다.
여게 장로라고 말하는 것은 좁게 말하면 교회의 감독이요, 또 넓게 말하면 은사교권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를 둘로 분류하면 기본교권이라 은사교권이라 그렇게들 말합니다.
은사교권이라고 하면 은혜의 기관, 은혜를 베푸는 은혜의 기관의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은사의 교권을 가졌다, 또 교회의 일반적 모든 교인들, 신도들을 말할 때에 기본교권이라 그렇게들 말을 붙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이미 한번 지어 가지고 쓰고 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있지 그것이 성경같이 그렇게 무슨 권위 있거나 신실한 것은 아닙니다.
여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신앙 지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 장로에게 권하는 이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일학교 반사도 이 성구의 권면을 받아야 하고, 지권찰, 권찰, 남녀 권찰, 또 장로, 집사, 전도사, 목사, 또 그런 직책을 가지지 않을지라도 예수님 믿으면서 오늘 믿고 내가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나 예수님 믿게 됐으니 자기도 같이 믿자’ 이렇게 권면하는 사람들은 전부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요, 이 장로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질적으로는 그러합니다.
장로는 사람들이 다 알기에 이렇게 공적으로 성직을 가진 자이지마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신앙 지도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장로 직책과 같은 이런 직책을 자기는 받은 사람인 줄 알고 이 직책을 잘 감당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자기가 아주 어린 신앙으로 이제 예수님 믿기로 시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는 사람도 자기가 사람 알기에는 이런 직책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벌써 이 직책을 가지고 자기는 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도를 전하고, 또 그 사람을 지도하고 그 사람의 신앙을 일으켜 가꾸어 줄 수 있는 이런 위치에 있을 때에는 전부가 다 이 장로적인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장로에 대한 권면을 받고, 장로가 주의하여야 할 이 주의를 자기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장로와 여게 젊은 사람들이라 둘로 구별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신앙의 지도를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을 젊은 사람이라 그렇게 구별했습니다. 또 장로는 신앙을 지도하는, 가르치는 사람을 장로라 그렇게 여기에 구별했습니다.
그 밑에 보면 “젊은 자들아 장로들에게 다 순복하라” 이렇게 말씀을 해놓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이 말씀은 장로도 젊은이의 그 위치에서 신앙생활 해야 되고, 젊은 사람들도 장로의 위치에서도 신앙생활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나 젊은 사람이나 다 두 위치를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여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면은 장로요 또 일면은 젊은 사람이라, 일면은 신앙 지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요 일면은 신앙 지도를 해야 되는 사람이라, 일면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본을 내가 본 받아야 될 사람이요 또 일면은 본을 보여야 될 사람이라. 일면은 본을 보여야 될 사람이라. 일면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요 일면은 가르쳐야 할 사람이라. 이렇게 양면 위치를 가지고 양면 의무를 가지고 양면 이 행동을 하여야 한다 하는 것을 여게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 위치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처음 믿을지라도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는 어떻게 전도를 해야 되며 어떻게 그 사람을 취급해야 되며, 그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떤 정신과 태도로 대해야 되느냐? 내가 비록 어린 지권찰일지라도 지권찰로서의 그 지권찰 위치에서 지권찰 일을 감당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나? 또 주일학교 반사로서 학생들에게 반사의 위치를 감당하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되나? 권찰도, 중간반 반사들도, 또 부장도, 또 장로님들도, 또 목사님들도 어떻게 자기 후배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소속한 자에게 대해서는 이 일을 감당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여기에 권면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하는 이 권면을 우리가 바로 듣고, 이 권면을 받는 자로서 이 권면을 받아 가지고 일을 해야 되지, 이 권면을 받지 아니하고 일하면 그 일이 뒤에 가서 안한 것보다 잘못되기 쉽습니다.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이 바울이, 성경기자는 바울인데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러면 자기가 장로의 위치에 있는 것을 여게 말했습니다. 또 다른 데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와 같은 자다” 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양면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일면만 가지고 살았으면 그 사람은 그리 치우쳐서 다 파괴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그러면 장로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의 신성의 이름이 그리스도입니다. 또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멸망에서 구출해서 제사장 선지자 왕, 하나님 같은 제사장, 하나님 같은 선지자, 하나님 같은 왕,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라 말은 예수님이라는 말인데 예수님 같은 제사장 예수님 같은 선지자 예수님 같은 왕이 되도록, 이 세 가지를 구비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 공로를 베푸셨고 이 공로를 밑천 잡아 가지고 이 세 가지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신 분이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그 말은, 이 세 가지 직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 이 세 가지 직책을 감당하는 데에는 이런 고난이 있다 하는 그 고난을 보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인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 직책의 은혜를 자기가 받으려고 할 때에 고난 있는 그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 하려고 당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한 고난은 제사장 노릇 하려고 선지자 노릇 하려고 왕 노릇 하려고 이 세 가지 거룩한 직책을 감당하려고 모든 고난 당했고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고난은 당신이 제사장 선지자 왕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 또 당하신 고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인데, 여게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특별히 이 직책을 중심으로 해서, 이 직책과 이 직책으로 말미암아 이 직책의 은혜를 입어서 이 직책 맡은 자가 자기 맡은 직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그 직책이, 직책의 은혜 역사가 내게 임해서 그 직책 맡은 자가 욕구하는 대로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 이것이 또 하나입니다.
이러기에 예수님도 양면을, 양면을 인한 고생을 받으셨고, 또 우리들도 이 양면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고난의 증인이라 그 말은 이 양면 고난을 받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양면 고난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한다. 양면을 인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다. 이 양면을 위한 고난이 십자가의 고난이요 이것이 자기 십자가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우리는 전부 다 장로의 위치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도 장로의 위치를 가졌고, 이제 믿는 사람도 자기가 전도를 받은 그분에게 대해서는 젊은 사람의 위치를 가졌지마는 ‘야, 나 예수 믿게 됐는데, 작정했는데 너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자’ 했으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자기가 장로 위치를 가진 사람이라 그말이오. 젊은 사람의 위치와 장로의 위치를 다 가졌는데, 장로의 위치를 감당할 때에 어떻게 감당해야 되느냐? 요것을, 요 권면을 받아야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사람은 다 장로적인 장로의 성질의 위치를 가진 자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거 가정이 망하고 흥하는 것이 네게 있다. 너는 너거 가정에 제사장이다. 선지자다. 왕이다. 너 하나가 바로 되면 네 가정이 바로 되어서 복될 것이고 너 하나 삐뚤어지면 너거 가정은 희망이 없다’ 아무리 좋은 가정이라도 망하려면 다 망하고 아무리 나쁜 가정이라도 복되려면 다 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장로의 위치에 있다는 이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의 위치에 있으면 첫째로 자기가 할일이 뭐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 사람 되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가 잘 감당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예수님이 당하신 어려움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지금 당하고 있다. 그런 고생을 당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신앙의 선배들은 다 저렇게 사는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네가 친히 받아서, 네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친히 받아 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네 모든 후배들에게 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고, 이 고난의 혜택을 그들에게 입혀 줘야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이 은사 위치를 감당해야 된다. 이것이 둘째 권면입니다.
첫째 권면은, 다 너는 장로의 위치에 있다. 네가 사람들에게 장로로 천거는 받지를 않았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너는 장로의 위치에서 네가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그런 직책을 너는 가진 자다. ‘뭐 내야 인제 믿는 자이니까’ 네가 인제 믿어도 너는 장로의 위치에서 장로적인 역할을 네가 해야 된다. 은사 위치에서 은사를 베푸는, 은사를 베푸는 이런 일을 감당해야 된다 하는 이것이 첫째 권면입니다.
둘째 권면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과 증인이라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를 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라 하는 말까지를 범위 넓게 잡아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가 제사장 노릇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제사장은 뭐이 제사장인고 하니 하나님과 자기가 맡은 그 사람과 그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서로 조화를 잘 맞도록 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제사장 고난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노여워하는 점도 있겠고, 또 하나님 앞에 아주 삐뚤어진 점도 있겠고 하나님 앞에 꽉 막혀있는 점도 있겠고 그런데 내가 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노엽게 한 그것을 하나님을 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 하나님의 노가 풀어지도록, 하나님이 ‘너하고는 딱 절교다’ 했는데 절교된 절교를 이제 그 사람과 하나님과 서로 화평의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하나님 반대하고 달아났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반대하고 지금 있는데 이 둘을 서로 화평의 조화를 일으키는, 화목을 일으키고 서로 관계를 맺도록 하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좋아하고 이 사람은 하나님 좋아하고, 하나님은 이 사람하고 친하고 이 사람은 하나님하고 친하고,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기울이고 이 사람도 하나님에게 대해서 성심 성의를 다 기울일 수 있도록 양면의 조화를 잘 붙이는 이것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일방적으로 아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 용서받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제사장이라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 지식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하나님, 그 사람과 하나님과,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없지마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이것을, 다 이것을 고쳐서 잘못됨이 없도록, 용서를 받도록 이렇게 하는 이 일면이 있고, 이제는 그 사람을 잘 하도록, 잘못됨은 없지마는 잘하고 또 잘하고 또 잘하고 더 잘하고 더 잘하고 더 잘해서 나쁜 것을 치료하고 좋은 것으로 자꾸 이래 건설돼 나가게 하는 이것이 제사장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 하늘나라는 잘못된 것은 다 세상에 싹 씻어서 버려 버렸고 바로 된 것만 가지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 된 것이 많고 어떤 사람은 바로 된 것이 없고, 그러나 바로 된 것만 가지고 가는데 제사장 직은 영원 무궁토록 하늘나라에서도 이 직책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제사장 직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영원히 계속된다 말은 영원히 하나님과 더 가까와지고 더 가까와지고 하나님과의 멀어진 것이 자꾸 없어지고 가까와진다 그말이오.
더 가까와지고 더 가까와지니까 죄되는 거는 없지마는 5리 가깝던, 5리가 가까왔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5리 거리가 있었는데 5리 거리는 없어지고 이제는 4리 거리가 있고, 4리 거리는 없어지고 3리 거리가 있고, 나중에는 1리 거리가 있고, 나중에는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없어지고 하나님과 밀접하게 붙는 이 역사를 하는 이 역할은 무궁토록 있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당하는 것, 내가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 나만 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사람도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제사장을 만들기 위해서 또 내가 고난당하는 고난이 있다 그말이오. 내가 그 사람에게 제사장 노릇 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고 그 사람을 제사장 되도록 제사장 만들기 위해서 또 당하는 고난이 있다 그거요.
이것을 가리켜서 아가서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향나무, 향을 여는 감람 열매는 짜면 아주 향유가 되는 것인데 감람유를, 감람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라, 감람나무는 우리가, 향기를 나타내는 것은 자기가 이 향기를 나타내는 것이고, 향기를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향나무를 종자를 뿌려 가지고 향나무를 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아가서에 있는 그 동산에는, ‘잠근 동산이라’ 하는 그 동산에는 아주 향나무를 많이 길러서’ 향나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꽃 피니까 향기 나고’ 열매 맺으니까 향기 나고’ 향을 자꾸 맺는 그런 나무를 많이 길러 놨다 그거요.
사도 바울은 이 향나무를 많이 길렀습니다. 양성원에, 우리 양성원에 있는 교수들, 강사들, 또 양성원에 원장 이 모든 사람들이 향나무를 길러내는 그 작업을 하는 것인데, 향나무를 잘 길러서, 그 나무를 잘 길러서 그 나무에서 열매 맺은 것이 전부 좋은 향 재료가 되면 참 상급이 클 것이오.
그러나 이것을 생각지 못하고 거게서’ 이 밑에 내려다 보면 “더러운 이로 하지 말아라” 더러운 이, 거게서 자기 사람 만드려고, 자기 인기 끌려고, 자기 명예 거석하고, 뭐 반사들도 물론 그것이 껍데기로는 있어야 되지마는 숫자 늘리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도 내나 더러운 이(利) 중에 하나라 그거요.
“맡기워 준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맡기워 준, 맡겨진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맡기기는 누가 맡겼는데? 주님이 맡기신 양이라 그말이오. 그 양의 본이 되라 말씀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 내가 그 사람에게 선지자 노릇하려 하고, 선지자 노릇하려 하니까, 내 어떤 반사가 하나 오더니 말하기를 ‘오늘 말 많이 했습니다. 억수로 했습니다.’ 그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느냐? 이래 물으니까 학생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주기도문 외우라고 또 그랬지, 또 틀린다고 또 이래 했지, 권면 했지 뭐하고 오늘 말 많이 했다고. ‘그러면 그거 많이 해서 그러면 피곤할세.’ 그 피곤하다고, 그 피곤한 그것이 뭐이냐?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 그게 선지자, 선지자 노릇하는 고난이라. 선지자 노릇하는 고난.
권찰님들이 ‘아!’ 다른 사람들은 그 동정을 못합니다. 제가 말하는데 대해서 동정 안 하는데 권찰님들은 잘 동정을 해. ‘아! 목사님 오늘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우리는 그렇게 안 해도 피곤해 못견디겠는데’ 그 말은 자기네들이 선지자 노릇을 해 보니까 선지자 노릇이 힘든다는 것을 비로소 체험해서 안다 그거요.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타일러 가르치려 하는 사람 얼마나 힘들고, 그 사람이 거꾸로 돌아가는데,
어제 아래는 비원교회에서, 며칠 전에 내가 그 목사님에게 이거 문제가 있어서 지금 이거 고통이라고 지금 얘기를 와서 했는데, 그 말 내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 왔어. 왔는데 그 사람이 ○○목사님이 여게 있을 때 교도소에서 있을 때부터 알아 가지고 쭉 따라다녔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반발했던지 서로 백지 오해를 해 가지고 분해서 벌써 고발까지 해 놨다 말이오. ○○목사를 들어서 고발을 해 놨어. 해 놓고 지금 마지막 고발은 이제 관서 고발하고 난 다음에는 나한테 고발하러 왔다고. 고발하러 온 것은 ‘뭐라 하는고 보자’ 이래 가지고 지금 왔다 그거요.
이 사람을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얘기를 하고 해서 나중에는 고만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아도 얼굴이 발그레 해 가지고 ‘네,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마지막에는 ‘또 무슨 생각이 있고, 무슨 마음에 섭섭함이나 해결되지 않는 점이 있느냐?’ ‘아이구, 없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이러면서 기쁨을 가지고 갔습니다. 갔으나 고럴 때에 내가 간교한 소리로써 그 사람을 치켜 올려서 그와 같이 한 것 아니오. 고런 버르쟁이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슬슬 추켜 올려 가지고 간사하게 그 사람 듣기 좋아해 가지고 그 사람 마음을 돌이키는 거는 돌이키는 게 아니라 불난 데 석유를 던지면 불이 텀벅 꺼지는 것 같지마는 뒤에 더 큰 불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인본으로 하기 쉽다 말이오. 그 사람에게는 나는 그 사람의 잘못만 말했지 그 사람의 칭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를 저가 깨달아서 심령이 밝아질 때에는 선지자 노릇 해서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전달하면 성령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독사가 와 가지고 양이 될 수가 있다 그거요.
이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정력이 들어가고 힘이 기울어져. 그러면 그것이 뭐이냐?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그 사람에게 내가 선지자 노릇 하는 그 고난이라 그거요. 그 고난보다도 그 사람에게 내가 선지자 노릇하는 고난을 졸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선지자를 만드는 또 고난이 그 위에 있다 그거요. 일차 고난 이차 고난이 있어.
이런데 사람은 우리 ○○목사님이 참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놓으니까 이걸 붙들어서 사랑을 베풀었는데 고만 너무 사랑이 지나쳐 가지고 탈이 났어.
여러분들, 사랑도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동정도 지나치면 죄가 돼요. 동정이 좋은 것 같지마는 동정도 지나치면 죄가 돼. 남을 봉사하는 봉사도 지나치면 죄가 돼. 꼭 성경이 하라 하는 데까지만 가고 고 이상 안 가야 되지 고 이상 넘어갔다가는 큰일납니다. ‘뭐 남을 섬기는 것이야 얼마든지 하지’ 아니오. 섬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사랑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용서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한계를 넘어가면 다 죄가 됩니다.
이래서 내가 그 말은 했어. ‘아, ○○목사님이, 그분이 요게 걸렸다. 요게 걸렸어. 너를 너무 지나치게 동정한 요게 걸렸다. 그거 그렇게 안해야 된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한다. 거게서 딱 스톱해 버리고 만다. 거게서 지나치게 동정한 그것이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떠남이 됐고 네게 대해서는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네가 은반회수로 은혜를 도로 원수로 갚는 요런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은반회수의 네가 됐다. 그게 아니냐?’ 이러니까 낯이 벌거이 해 가지고 ‘예,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의도 지나치면 기한 전에 죽어요. 내가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여게는 목사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지금 보면 뭐 열에 칠팔은 다 실패라. 너무 인본이 많아. 너무 자기 주관이 많아. 요 말씀을 꼭 들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제가 혼자 고난 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환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환하게 보여 줘야 된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기 밑에 있는 그자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도록 그렇게 이 증인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해 줘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선지자 고난, 인간을,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이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만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위반된 복종은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정치도 하나님의 뜻에 맞은 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인 줄 알고 거기 복종합니다. 아무리 복종하다가 왕이 말해도 하나님의 정치에 딱 위반된 그 명령은 불응합니다.
다니엘은 다리오왕에게, 뭐 다리오왕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줄 알았는데, 다리오왕이 ‘한 달 동안만 기도하는 것을 사람 눈에 보이는 데는 중단해라’ 하니까 그 명령에는 죽어도 안 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치를 받는 사람이라.
그러면 하나님에게만 통치받지 어떤 돈 많은 사람에게, 권세있는 사람에게, 상관에게, 남편에게, 애처가의 아내에게, 자녀에게, 아무것에게도 다스림 받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만 다스림 받는다. ‘그 사람, 사람이 시키니까 잘하던데’ 그 사람은, 누가 말하기를 그래 말해요. 그때 내가 조사 때인데 ‘백조사님은, 서부교회 정치는 그 딸들이 해. 백조사님은 딸들의 말만 듣고 다 정치해.’ 딸하고 나하고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봤으면 딸들 말만 듣는 사람이 될 것이요 또 집사하고 나하고 있으면 또 집사 말만 듣는 사람 될 것이요, 주일학교 반사하고 나하고 있으면 반사 말만 듣는 사람 될 것이오. 왜? 그 말 듣거든. 왜 들어?
지난밤에 한 말씀같이 사람이 단 둘이 있어도, 단 둘이 있어도 제가 여게서 왕 노릇 하려고, 머리 노릇 하려고, 지도자 노릇 하려고, 이거하고 싸웁니다. 이거하고 은밀히 싸워. 자기 밑에 후배들인데 거게서도 자기는 복종 위치에 살아 보려고 애를 써서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이리도 말하고 저리도 말하고 슬근슬근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이러면서 ‘이거 어떻게 할까?’ 이러면 그 사람이 바보라도 이야기를 자꾸 이래 하니까 그 사람이 있다가 어떨 때 알아챈다 말이오.
‘아, 이제 나를 알아서 내 의견을 물으려고 깨닫는가 싶어 하시는 모양이시다. 이러니까 내가 의견을 나타내야 되겠다. 말을 들어보니까 이것을 좋아하는 모양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 옳게 되는 모양이다.’ 제가 깨닫고 ‘예,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말 합니다. 비슷한 말 하면, ‘아 그래! 아 그래! 그게 그럴 듯 해.’ 하면서 또 슬슬슬 말하면 그 사람이 있다가 ‘예, 그런데 이렇고 이러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래! 좋은 의견이야. 참 좋은 의견이야.’ 아직도 백점이 안 됐습니다.
그러면 또 슬슬슬슬 또 다 말합니다. ‘예, 그러니까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렇지 않습니까?’ ‘됐어, 참 좋은 의견이야. 아, 그대로 하겠어.’ 이러니까 옆에 사람 보면 ‘아, 그 교역자는 누구의 말만 듣는다.’ 제게서 나왔지마는 양면 수입입니다. 그 사람에게 선지자 노릇한 그 상급 있지 선지자 노릇하는 고난 당했지 또 그 사람에게 자기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옳은 것에게 복종하는 또 복종이 자랐지 뭐 수입이 얼마나 많은지! 요 생활을 깨닫고 요게서 재미있게 살면 남한테 공연히 우쭐한 체 이래 가지고 막 이래 쌓는 그 참 우스꽝스러운, 우습고 열적고 부끄럽고 낯이 간지러운 그런 생활보다 재미있습니다.
이러니까 기독자는 파고 들어가서, 저 회의를 모으면 회의 속에 구석에 꼭 박혀 가지고 눈만 빠꼼하이 내놓고 귀만 빠곰하이 내놓고 입만 빠곰하이 내놓고 몸둥이는 싸서 딱 가리고 이래 가지고 남의 말만 딱딱 듣고 보기만 보고 그래 가지고 거게서 아주 가치있는 말 한마디씩 딱딱하고 이러니까 생전 제가 알아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들 말 다 듣고 거게서 얻어 가지고 옳은 판단을 냅니다. 그러면 인제 마지막에는 그런 사람들, ‘저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최후 판단은 그 사람이 판단한다. 그 사람 말이라야 된다.’ 그 사람이 모든 사람 말 다 듣고 와서 거게서 다 얻은 재료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통치의 고난, 자기가 하나님에게만 통치받는 사람 되려고, 또 하나님에게만 통치받는 사람들을 만드려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장로 위치에 있어야 되지 이것도 가지지 않고 자기의 잘못된 것을 말해서, 교인들에게 ‘잘못됐으니까 이거 사과하십시오.’ 하는 그 말은, 그 말 한마디는, ‘예 잘못됐습니다.’ 사과하는 것은 온 교인들을 잘못됐을 때에는 목사에게, 교역자에게 사과하라는 것이 떡 시작이 돼 놨으니 사과 누가 많이 하겠소?
이러니까 자기 권도가 일어서지 않았소? 이러니까, 아무래도 그 교역자가 교인보다 옳게 할 수 있지. 이러니까 세도를 하나 정해 줬는데, 교역자 조사 권위 떨어뜨리고, 나중에 마치고 식사하러 오니까 떡 오더니마는 이 조사님이 ‘아, 제가 참 황송하고 죄송하지마는 목사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제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닙니까? 이러면 좀 목회하기가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뚱단지 같은 소리를 해. 그 세계가 딴 세계에 산다 말이오. 목사는 제사장권, 선지자권, 왕권 그 권리 외에는 없어. 그 권리만 써. 그 권리를 쓰는데 왕이 오면 무슨 상관이며 대통령이 오면 무슨 상관이며, 경관이 오면 무슨 상관이 있으며,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오. 그 세 가지 권위만 있으면 돼.
세 가지 권위는 잘 이행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데, 그 세 가지 권위로 죽는 것이 완성인데 뭐 세상에 두려울 게 뭐 있는가요?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